늦게 집사님의 질문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주일과 YA들 내일 점심 준비 때문에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집사님의 질문 1
"초대교회의 신학과 역사를 심각하게 공부해 본 사람들은 요새 인터텐에 많이 떠다니는 초대 교회 기독교의 핵심 신학중에 “윤회설”을 가르쳤다는 글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아직 신학의 정립이 되어있지 않았던 시대에 비성경적 또는 토속 신앙에 의한 잘못된 신관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답변은 초기 교회에는 잘못된 신관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여도 무방한지요
요새도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잘못된 신관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많이 틀린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그래도 서로 인정하는 교단은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성공회, 루터란교등을 말하지 않습니까? (만일 제가 삽입하지 않은 교단중에 우리가 인정하는 교단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왜냐하면 저희들의 근본인 구원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등이 같기 때문입니다. 교단마다 성례나 구원의 순서나 성령 세례나 충만같은 minor 한 것들은 다르지만 구원의 근본은 같지 않습니까? 혹저희가 인정하는 교단이더라도 구원론이나 성경에 위배된 것을 가르치면 우리가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요새도 이단으로 규정 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몰몬이나 여호와 증인 Church of Christian Science 같은 곳은 이름만 기독교로 가장했을 뿐 기독교가 아닌 이단들 아닙니까? 그렇기에 저는 요셉 스미스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우리 교회들에게 악영향을 주지 않는 한 교리는 알고 있어도 관심이 없다는 맥락에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편 초기 교부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신약 정경이 아직 정리되지 못했고 헬라 철학에 영향을 크게 받아 여러 가지 비 성경적인 것들이 교회 신학과 잘못된 성서적인 해석으로 이단들이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당시 교회 역사에 남을 만한 분들이 열어둔 것이 많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중에는 언급하신 오르겐은 신학중에 문제가 있는 것도 분명히 있지만 그 분이 교회 역사에 공헌한 바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오르겐은 교회의 역사에서 이단이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제 소견으로는 당시의 그의 입장에서는 실수를 한 것은 그의 배경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고 또한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가 오르겐의 잘못된 부분을 성경적인 입장에서 지적하였고 Correct 하였으며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언급하지만 오르겐은 윤회설을 입증할 자료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New Age의 변증을 주장하는 학자 MacGregor도 그의 책 (The book Reincarnation in Christianity, 1978)에서 오르겐이 윤회설을 가르쳤다는 심증은 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라고 정리합니다. (혹시 찾으시면 저에게 말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찾은 것은 5가지의 인용한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 잘못 인용된 것으로 학자들에 의해 확인 된 것입니다. 이중 두 가지 인용된 글들은 전에 윤회론에 대한 제 대답을 드릴 때 올렸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는 분들중에 오르겐에 대해서 질문이 있는 분을 위한 것입니다.
오르겐은 교회 초기에 체계가 없었던 신학에 중요한 기초석을 놓았고 그의 Allegorical 성경 해석과 그리고 헬라 철학인 플라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해 Gnostism(영지주의)과 그리고 윤회설을 그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남겨두게 됩니다.
제가 간단히 찾은 것중에 동인 교회의 송태은 목사가 크리스쳔 투데이지에 기고한 오리겐에 대한 글을 이렇게 썼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해 어떤 본문이든 문자적인 의미·영혼의 덕을 세우는 도덕적 의미·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숨은 의미를 담고 있는 풍유적(또는 영적) 의미를 지닌다고 강론, 중세기 풍유적 성경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말년에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악한 물질세계론, 영혼선재론, 육체적 부활부인, 성부 하나님 물질세계 창조 불가론, 성자 예수의 십자가상 신성 미손상론 등을 주장해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0874 이곳에 가시면 신문에 기재된 전체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언급하지만 교회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여러 사람들과 단체들은 자신들이 믿고저 하는 것들을 주장하게 되어 헬라 철학이나 또는 잘못 해석 이해하고 있는 교리로 기록된 성경에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을 교회는 바로 잡았고 성경에 입각한 정통을 고수 해 온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교회 역사를 배울 때 교회 초기에 이렇게도 많은 이단들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집사님의 질문 2
“초대교회에서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있었는지 까지만 답해주셔도 저 개인적으로는 만족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영혼 선재설이란 기독교와 헬라 사상사이에 크게 차이가 납니다.
플라톤의 의한 영혼 선재설은 영혼이 육체와 별도로 먼저 존재하다가 출생과 함께 육체와 결합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르겐이나 어거스틴등은 창조된 영혼 불멸을 주장합니다. 영혼 불멸의 사상이 만일 집사님이 말씀 하시는 오르겐이나 어거스틴이 언급한 선재론이라면 선재론의 개념은 교회 신학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선재론이라면 비 성경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됩니다. 그 전에는 누구도 영으로든지 육으로든지 창조하신 적이 없다고 했으니 플라톤의 선재론은 비성경적일 수 밖에 없지않겠습니까?
집사님의 질문 3 ( 아래 모든 글들은 인터넷에서 널리 인용된 글이더군요 그 소스가 “ 바이블의 진실”이라고 말하시는 분들과 불행하게도 침례신학대학교의 남병두 교수가 그에게 보낸 신재철 이란 학생이 E 메일 질문에 대답한 내용이 반반 섞여 있었습니다. )
■ 초기 기독교에서는 윤회와 환생은 인정 예수의 가르침 이후 초기 기독교에서 윤회와 환생은 정식으로 인정되던 교회신학의 일부였다. 서기 2세기경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와 성 히에로니(St.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당시의 크고 강력했던 기독교 종파인 그노시스파(영지주의)와 마니교도들도 윤회설을 가르쳤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약 400년간 환생설은 보편적인 가르침의 일부였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남병두 교수가 어떤 context에서 이글을 썼는지 여쭈고자 합니다. 또한 침례 교단에서는 이 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위에 언급된 교부들이 소위 가르쳤다는 “환생설”을 증명하는 Bibliograph를 요구하려고 합니다. 제가 읽은 것 중에는 단 한 건도 환생설을 가르쳤다는 것은 없습니다. 더욱이 그노시스파(영지주의) , Gnonticism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 1서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기록된 편지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 초대 교회에서 이미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더욱이 마니교는 (조로아스터 교) 성 어거스틴이 그리스도를 만나기전 몸담았던 지금의 몰몬보다더 더 큰 이단이었습니다.)
■ BC4 :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서 삭제하기 시작
"그러나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서, 개인적인 노력과 발전으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우려에 따라 윤회를 가르치던 당시의 용어인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삭제되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없애기로 결정하여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고,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로마제국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인정받고 있었다. 황제는 동로마의 승정 159명을 초대하고 서로마로부터는 6명의 승정만을 초대해 공의회를 열었고, 당시의 교황은 동서 로마가 같은 수의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면서도 공의회에 불참한 뒤 그 회의에서 결정된 윤회설의 이단 규정과 오리게네스의 파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기 이후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면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환생설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카톨릭은 승리하여 정통이 되었고, 그노시스파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르겐의 가르침을 답습한 사람들중에 오르겐이 살짝 언급한 Highly questionable 한 윤회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가르쳤던 사람들이 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들중에는 선제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설 그리고 지금에 우리가 잘 아는 여호와 증인들이 비슷하게 믿는 Arius 설 (예수님은 창조된 자로 하나님이 아니다. ) 도 포함됩니다.
그들중에는 Arius, Eunomius, Macedonius, Apollinaris, Nestorius, Eutyches and Origen 은 553년에 Fifth Ecumenical Council에 의하여 이단으로 낙인 찍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중에 오리겐의 추종자들은 제5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기전 9년전인 544년 Patriarch Mennas of Constantinople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었습니다.
553년에서는 이부분을 다신 인준한 것 뿐입니다.
분명 기독교 역사에는 교황과 로마 황제간에 안력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력 때문에 성서적으로 잘못된 교리를 정화하는 교회의 한 역사를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할 일들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것들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는 것은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단으로 몰렸던 교파들의 신앙 속에서 이어짐이란 인용구에 대한 반응은 하지 않겠습니다.
집사님의 질문 3 성경에 대한 질문
■ 그나마 남아있는 전생과 윤회의 구절들
+ 보라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장 5~6절]
+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마태복음 11장 13절~15절 ]
+ 예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고 제 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을 깨달았다 [마태 17:11~14]
상기 말라기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 보내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너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오리라한 즉,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엘리야 선지자가 요한의 몸으로 이미 너희 앞에 와 있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게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7장만 보면 죽지 않고 하늘로 오른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환생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점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가 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 인간에게는 죽음 다음에 환생이 없고 심판이 바로 따른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19-26 나사로라는 거지와 부자 이야기의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2-24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누가복음 16:25-26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비유를 말씀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혼이 환생할 수 없는 상태를 분명히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어 환생을 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엘리야가 왔다는 마태복음의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엘리야는 구약에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바알을 믿었던 당대에 사람들에게 선지자로 활동했던 인물로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인물입니다.
엘리야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광야에서 수도합니다.
마태복음 뿐 아니라 누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출생이 소개됩니다.
(눅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리야는 어려운 북 이스라엘의 시절에 개혁과 부흥을 외친 선지자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엘리야와 같은 사명자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 역시 그의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것을 알리기 위해서 엘리야와 같이 낙타 털옷과 가죽띠를 입고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사역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하였습니다.
만일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환생한 것이였다면 누가복음 역시 세례 요한의 탄생을 엘리야의 환생이라 적어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면 성경은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 모순이 있는 잡서에 불과할 것입니다.
욥기에 대한 해석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못 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이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기 3장 11절~19절]
욥에게 시험과 고난이 닥치니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몹시 후회하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장면이다. 욥은 어미의 태에서 죽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나왔다 해도 자기가 어미의 젖을 빨지 않았더라면(죽었다면) 지금 전생에서 평안히 누워자고 있었을 것이며, 또한 그 곳에 있는 임금들과 의사들과 편히 있었을 것이라고 전생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욥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와 같이 혹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빛도 보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욥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곳은 악한 자들의 소요도 없고 곤비한 자도 평강을 얻으며 갇힌 자도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동일하며 종들도 상전에게 자유스러운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 역시 성경을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하면 전생의 교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3장 3절에서 10절까지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는 울부짖음이라면, 11절에서 19절까지에는 태어난 다음에 바로 죽었기를 바라는 말들입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죽음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어난 다음에 삶을 피하는 방법은 죽음이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자마자 죽었으면 이런 고단한 삶의 여정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것을. 살려고 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지만, 이제 살고 싶지 않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삶임을 표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1-19절은 당시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인이 있는 죽음 후에 있는 세계 스올에 관한 것을 언급합니다.
스올(Sheol)은 성경에 65번 나오는데 주로 사망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삼하 22:6, 사 28:15, 호 13:14, 합 2:5 등). 이 스올을 악인들의 거처라고 말하는 곳도 있지만(욥 21:13, 24:19, 시 31:17) 악인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의인도 함께 가는 곳임을 욥은 3장 11-19에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례미야에 대한 성경적 해석
+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 1장 4절~5절]
성경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교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에베소서입니다. 참고하시면 플라톤의 선재설과 큰 차이가 있음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창세전이라 한 것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 온 보이는 세상이나 보이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지 전입니다. )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정했다는 말입니다. )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의 해석
+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8:56~58]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전부터 있었다” 라는 말을 Ego Emi ( I Am that I Am )를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힐 때 사용한 I Am으로 사용함으로 그가 구약 아브라함의 하나님임을 묘사 하였고 그 말을 들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전생과는 하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철학과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석가모니는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육신의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또한 환생하여 부처가 된 것 역시 역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증명을 할 수도 한 적도 없이 다만 그의 가르침을 추종하고 따른 사람들에 의해 믿어지고 전해질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초대 교회부터 역사적인 토대위에 비판되어 왔지만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 사래는 단 한건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건을 토대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깊은 은혜를 통한 사랑 그리고 신뢰를 통한 믿음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경험되는 것 같습니다. 내 자아 내 마음 내 인격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런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고 나를 나대로 받아주실 뿐 아니라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어주셨다는 생각을 할 때 마다 저의 가슴은 아직도 감동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감동을 얻고자 노력한 것이 아닌데도 제 마음 깊은 곳에서 깊이 움직입니다.
토요일 밤이 너무 늦은 관계로 어떻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그 이유 만으로 사람이 지옥으로 보내는 불합리적인 이유가 있는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인가? 라는 질문은 후에 시간을 내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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