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영 분별

헤르메스주의 (Hermeticism 헤르메티시즘)

은바리라이프 2012. 8. 8. 13:15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행자·목동·웅변·체육·무게·상업·도둑을 주관하는 신이며, 주로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전령 역할을 수행한다... 혼합주의를 통하여 헤르메스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신 토트가 결합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그레코로망 문화의 상징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라는 신비로운 전설의 인물이 나왔다. - 위키백과

"미스테리종교<<"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이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 헤르메티시즘/秘傳신비주의)이다. 아니, 이 둘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것 같다. 고대 이집트 미스테리스쿨에서부터 근대 프리메이슨과 신지학회 그리고 뉴에이지까지의 에소테릭 전통을 헤르메스주의가 커버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미스테리종교가 종교적인 면을 강조하는 반면에, 헤르메스주의는 철학/과학적인 면을 지칭하는 듯하다. 단어상의 의미로, 헤르메스주의는 고대의 비전과학(ancient esoteric science 마술, 오컬트 등)을 뜻한다.

 

Hermetic Fellowship<<이라는 사이트에 나와 있는 헤르메스주의자들의 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직접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이 글에는 헤르메스주의에 대한 길고 짧은 두 개의 설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우선 짧은 설명을 올리고, 후에 기회가 되면 긴 설명을 더 올리도록 하겠다.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 헤르메티시즘/秘傳신비주의)

 

헤르메스주의는고대의 영적, 철학적, 마술적 전통이다. 이는 영적 성장의 길이다. 헤르메스주의는, 지혜와 마술의 위대한 이집트 신토트의 그레코-이집트 형태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그리스어 "세 배로 위대한 헤르메스") 신으로부터 이름지어졌다. 우리(Hermetic Fellowship)가 헤르메스주의라고 정의하는 것은 또한 서양 에소테릭 전통이라고 불리어 오기도 했으며, 헤르메스주의는 영속의 철학과 영원한 지혜를 받아들여 왔다. 우리가 지지하는 긍정적 형태의 헤르메스주의의 특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다.

 

 [As above, so below 사인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헤르메스주의는:

 

  • 인류는, 신(성)과의 합일 상태로 되돌아 가는 영적 여행 중에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인류의 "위대한 작업"(GreatWork)이다.
  • 우리가 신성에 이르려면 신성을 염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적 성장은 사람의 노력 없이는 성취하지 못한다.
  • 절충적(혼합적)이며 서양 에소테릭 전통 전반에 걸친 소스로부터 자료를 추출한다.
  • 다신적이지만 일신적이다. (즉, 궁극적으로 하나인 신적 통일체로부터 방출되는 신성이 여러 형태로 나타남을 받아들인다.)
  • 신성을 내재적이면서 또한 초월적인 것으로 여긴다.
  • 우주는 신적이며 선한 것이라고 여긴다.
  • 우리가 신성을 구할 때, 자연의 신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가르친다.
  • 영적 호기심을 북돋는다.
  • 사람들이 기술과 염원을 통해 불가사의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 이를 위해, 마술, 명상, 의식(ritual)과 기타 영적 신비적 수행을 수용한다.
  • 신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만물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의 균형을 또한 추구할 것을 촉구한다.
  • 금욕적 세계관이 아니라 차라리 시(詩)적 세계관이다.




헤르메스주의의 특성들

 

헤르메스 전통은 사상의 독단적 단독 학파도 아니고 특정한 영적 시스템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공통된 뿌리에서 나와서 다양한 꽃을 피우는 지식과 행습의 살아있는 몸체이다. 비록 광범위하게 특성지을 수는 있지만, 최초 헤르메스 유파(학파)에서와도 같이, 현대 헤르메스주의 내에서도 시각과 체험에 있어서 흥미로운 다양성이 발견된다.

 

다음은 특별히 "Hermetic Fellowship"의 헤르메스주의에 적용된다. 이런 특징 하나하나는 적법한 역사적 전례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운영되는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헤르메스 그룹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절충주의

 

알렉산드리안 헤르메스주의가 매우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전통들에 의지한 것과 똑같이, 현대 헤르메스주의도 헤르메스 전통, 또는 서양 에소테릭 전통 속의 다양한 범위의 영적인 길들을 탐구한다. "Hermetic Fellowship"의 경우, 이런 길들은 다음 것들을 포함한다(하지만 이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고대 미스테리종교, 카발라, 연금술, 장미십자(회)사상, 영지주의 및 기타 에소테릭 기독교, 마술, 주술과 신이교주의, 그리고 성배탐구.

 

"Hermetic Fellowship"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인 파로스(Pharos)를 길잡이 상징으로 채택했는데, 파로스는 그 빛으로 모든 많은 여러 영적, 마술적, 종교적 길들을 비추었으며, 서로 간의 교차수정을 통해 영적 계몽의 꽃들을 피웠다. 이런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헤르메스주의가 다양한 실제들의 역설적 아이디어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영적 역설은 이해해야 할 신비(미스테리)로 여겨지며, 제외되어야 할 모순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비록 개념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서양 전통들의 탐구에만 한정시키고 있지만, 우리가 찾는 신적 불빛(Divine Light)의 광선을 포함하는 한 모든 영적인 길들을 존중한다.


영적 호기심

 

헤르메스주의자들은 구도자들이다 - 신적 진리의 구도자, 지혜의 구도자, 이해의 구도자, 영지(그노시스)의 구도자들이다. 헤르메스적 영적 호기심은 다른 이들의 방법들과 영적인 길들에 대한 열림과 관대함을 장려한다. 이런 호기심은 서적들을 통해 일부 만족시킬 수 있다. 교약적 문학적 전통으로서 헤르메스주의는 다른이들의 체험과 직관으로부터 - 또한 교사나 동료 구도자들의 중재를 통해 - 우리 구도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영적인 것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개인적 체험 없이는 얻는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개인적 공부와 가르침을 많이 권고하기는 하지만, 의식(儀式 ritual), 명상, 기타 영적 수행을 통해 영적 세계에 참여하는 것 또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님을 강조한다. 각자 선택하는 종교적 헌신 또한 개인의 성장에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다신론 그리고 궁극적 일신론

 

고대 이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헤메스주의는 일반적으로 다신론적으로 영성에 접근한다. 신(the Divine)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내며 여러 개의 얼굴을 입고 있다. 많은 신들과 여신들 - 특별히 파로스의 불빛 아래 알렉산드리아에 모인 문화들이 받드는 신들 - 은 헤르메스주의에 중요하다. 하지만 다신론 하부에서 이를 통합하는, 궁극적인 신적 통합, 긍극적 일신론을 우리는 받아들인다.


이 개념은 우주에 대한 헤르메스적 이해로 확장된다. 우주는 다형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the one) 속에 통합된다. 따라서, 세상의 분명한 다양성 뒤에 있는 "통합"을 드러내 주는, 보이지 않는 연결을 우리는 추구하고 발견할 수 있다. 헤르메스적 카발라는 이의 한 모델이다: 각 세피로트은 신(성)의 다양성의 표현인 반면, 모두는 케테르로부터 발산되며 케테르 속에 통합된다. 이 통합 자체는 궁극적으로 미현현자(Unmanifest En Soph 카발라의 신성)로부터의 발산이다. [카발라 생명나무의 가장 상위에 위치한 케테르(왕관) 세피로트는 신성(아인 소프 오르)과 접해 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As above, so below)

 

헤르메스학은 신을 내재적이자 초월적이라고 여긴다. 신(성)은 나타난 (현현한) 우주의 만물 (특히 우리 자신을 포함한) 속에 있으며, 또한 그들을 초월한다. '위'와 '아래' 사이의 상호연결 때문에 영적 레벨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질 세계에의 결과를 가져 온다. 거꾸로, 물질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영적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 - 물질과 영, 몸과 정신, 안과 밖, 밤과 낮, 사실 모든 양극성들 - 사이의 평형을 유지하는 것은 헤르메스의 영적 작업의 중심이 된다. 균형은 성장의 열쇠이다.


만물은 신(적)이다


신(성)이 만물 속에 있기 때문에 만물은 신(적)이다. 우리를 포함한 우주에 대한 묵상과 이해를 통해서, 기도와 염원과 영지를 통해서, 사람들은 더 '신 같이' 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신과의 재결합에 이르게 된다. 많은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이 목표를 한번의 인생 동안에 성취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나, 어떤 이들은 이 이상을 물리적인 몸 가운데 있는 동안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윤회에 대한 자세는 바뀐다.

 

고대 '헤르메티카'에서는, (프랜시스 예이츠가 그랬듯이)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로 구분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두가지 다른 자세를 볼 수 있다. 낙천적 자세는 - 비록 우리와 만물이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을 인식하지만 - 신적이며 기본적으로 선한 우주를 빋아 들인다. 염세적 자세는, 물질은 영의 흩어짐이며 그러므로 질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본다. 현대적 "연대(Fellowship)"의 헤르메스주의는 확실히 낙관적 유파(학파)에 속한다.

 

자연은 신(성)을 나타낸다

 

현대 헤르메틱(헤르메스주의자)에게 있어서 '자연'은 '신적' 스승이며 '미스테리'의 '계시자'이다. 어느 장미십자회원은 이를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자연의 여사제이다." 따라서, 영적 '예술'을 이루기 위해서 헤르메틱은 사제로서 자연 또한 섬겨야만 한다. 물리적 세계는 "신적 권능과 사랑"의 현현 또는 그릇이며, 우리는 이 그릇을 보살피도록 특별히 위임받았다.

 

아담이(인류가) 타락했을 때 한 의미로는 '자연'도 그와 함께 타락했다는 에소테릭 전통이 있다.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과 발전을 통해 아담을 구원(구속)함으로써 우리는 자연도 함께 구원한다. 그 반대도 진리이다: 자연을 구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  이 사상은 헤르메스적 환경(보호)론에 하나의 기초를 제공한다.

 

우리의 존중과 돌봄에 대한 보답으로서 자연은 "그녀의 신적 자신"을 영적 여정에 대한 무한히 심오한 상징으로서 보여준다. 지구의 리듬과 해와 달과 위성들의 사이클에서, 우주의 경이로운 구조에서, 탄생과 죽음의 상호보완적 기적들에서 헤르메틱은 베일벗은 신을 발견하고 - 기념한다.


'빛'으로의 의지

 

인류는 우리의 '의지' 때문에 신적 패턴에 있어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에게는 신을 염원하는 능력이 있으며, 신(성)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구도자는 찾기를 원해야 한다. 철학자는 알기 원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의지'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헤르메스주의는 각 사람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 또한 가지고 있다. 신적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소망과 '의지'라는 중요한 인간적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그의 '더 높은 자아'와 합일을 이루어 결국에는 신과 재결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신비한 영역에로의 접근

 

인류에게는 비물리적인 영역 - 심령적, 정신적, 영적 영역 - 에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더구나 이것은 여러가지 영적 테크닉을 통해 최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연적으로 타고난 능력이다. 비물리적 영역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은 마술의 수행 - 또는 의식(儀式)을 통한 신과의 동역 - 을 통해 이루어진다.

 

(헤르메스학의) 탐구에 있어서 의식은 특별히 강력한 수행법이다. (의식은) 다양한 심령 테크닉들을 결합시켜서 강력한 전체로 만들어 우리를 비물리적 영역에 연결시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마술적 조화 속에서 신과 함께 작업함으로써, 그리고 "위에서도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법칙을 통해서, 비물리적 영엑에서의 작업은 물리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작업 (The Great Work)

 

인류가, 더 축복받고 신과 더 합일된 이전의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사상은 많은 종교와 철학이 공유한다. 이집트, 그리스, 영지주의, 그리고 유대신화에서 발견되는 이런 개념들은 헤르메스주의 흐름의 요소들이다. 헤르메틱은, 이 합일로부터의 추락(타락)을 악 또는 형벌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영적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젊은이가 자라고 성숙하기 위해서 그가 집을 떠나서 삶을 경험해야만 하듯이, 전체로서의 인류는 경험 속으로 '추락'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서 치유와 회복(갱생)을 위해 다시 한번 신과 합일할 때까지 우리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각 헤르메틱이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작업, '회복'은 단순히 우리의 추락 이전의 축복된 상태를 되찾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육신의 거대한 누에고치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변태(變態)되어 왔기에, 이것(작업)은 어떤 새로운 것의 성취를 말한다. 우리가 에덴에 되돌아 갈 때, 거기는 우리가 한 때 떠났던 동산뿐만은 아닐 것이다. 동산의 중앙에는 거룩한 도시, 신과 창조적 함일 속에서의 인간의 가장 위대한 영적 성취가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이 신과의 새롭고 탈바꿈된 합일로 돌아가는 이 헤르메스 작업의 목표이다. 이 과정은 "위대한 작업" 또는 "장엄한 예술"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참된 지혜", "완전한 행복", "최상선"인 "철학자들의 돌"이 발견한 것이다. [철학자의 돌은 연금술사들이 구하려는 지고의 목표물이다]

 

이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자연의 패턴을 열쇠 삼아 우리와 신과의 연결을 새롭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각 연결은 입문(initiation)으로 대변된다. 서로 다른 유파들은 각각 다른 자연 패턴을 따른다. 에를 들어, 어떤 이들은 연금술 작업의 단계들에 기초한 입문 단계들을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입문과정들을 영혼(프쉬케)와 영의 발전에 기초를 둘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달의 사이클에 기초할 수도 있다.

 

또한, 영적인 것을 되얻기 위해 물질적인 것을 모두 배제하는 그런 영적 여정 대신, 헤르메틱의 목표는 만물의 균형을 껴안는 것이다. 헤르메스주의는 성취를 향한 금욕주의자적 모드보다는 시적 모드로 묘사할 수 있겠다. 신의 정신을 인용하며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는 우리에게 말한다: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함으로 너희를 성장시켜라, 모든 욱체를 뛰어 넘고, 모든 시간을 벗어나 영원이 되어라. 그러면 신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품고 너 자신이 불멸이며 모든 것, 모든 예술, 모든 배움, 모든 생물들의 성질을 이해한다고 여겨라. 모든 것보다 높이 올라가고 가장 깊은 것보다 내려가라. 불과 물, 마른 것과 젖은 것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의 감각을 네 안에 모아라. 바로 땅위와 바다 속, 하늘의 모든 것이 되어라. 탄생 이전이 되며, 자궁 속에 있으며, 젊고, 늙고, 죽고, 죽음을 넘어라. 이 모든 것들 - 시간, 장소, 사물, 질적인 것들과 양적인 것들 - 을 바로 이해했을 때, 너는 신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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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메스 전통은 사상의 독단적 단독 학파도 아니고 특정한 영적 시스템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공통된 뿌리에서 나와서 다양한 꽃을 피우는 지식과 행습의 살아있는 몸체이다. 비록 광범위하게 특성지을 수는 있지만, 최초 헤르메스 유파(학파)에서와도 같이, 현대 헤르메스주의 내에서도 시각과 체험에 있어서 흥미로운 다양성이 발견된다.

     

    다음은 특별히 "Hermetic Fellowship"의 헤르메스주의에 적용된다. 이런 특징 하나하나는 적법한 역사적 전례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운영되는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헤르메스 그룹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절충주의

     

    알렉산드리안 헤르메스주의가 매우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전통들에 의지한 것과 똑같이, 현대 헤르메스주의도 헤르메스 전통, 또는 서양 에소테릭 전통 속의 다양한 범위의 영적인 길들을 탐구한다. "Hermetic Fellowship"의 경우, 이런 길들은 다음 것들을 포함한다(하지만 이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고대 미스테리종교, 카발라, 연금술, 장미십자(회)사상, 영지주의 및 기타 에소테릭 기독교, 마술, 주술과 신이교주의, 그리고 성배탐구.

     

    "Hermetic Fellowship"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인 파로스(Pharos)를 길잡이 상징으로 채택했는데, 파로스는 그 빛으로 모든 많은 여러 영적, 마술적, 종교적 길들을 비추었으며, 서로 간의 교차수정을 통해 영적 계몽의 꽃들을 피웠다. 이런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헤르메스주의가 다양한 실제들의 역설적 아이디어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영적 역설은 이해해야 할 신비(미스테리)로 여겨지며, 제외되어야 할 모순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비록 개념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서양 전통들의 탐구에만 한정시키고 있지만, 우리가 찾는 신적 불빛(Divine Light)의 광선을 포함하는 한 모든 영적인 길들을 존중한다.


    영적 호기심

     

    헤르메스주의자들은 구도자들이다 - 신적 진리의 구도자, 지혜의 구도자, 이해의 구도자, 영지(그노시스)의 구도자들이다. 헤르메스적 영적 호기심은 다른 이들의 방법들과 영적인 길들에 대한 열림과 관대함을 장려한다. 이런 호기심은 서적들을 통해 일부 만족시킬 수 있다. 교약적 문학적 전통으로서 헤르메스주의는 다른이들의 체험과 직관으로부터 - 또한 교사나 동료 구도자들의 중재를 통해 - 우리 구도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영적인 것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개인적 체험 없이는 얻는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개인적 공부와 가르침을 많이 권고하기는 하지만, 의식(儀式 ritual), 명상, 기타 영적 수행을 통해 영적 세계에 참여하는 것 또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님을 강조한다. 각자 선택하는 종교적 헌신 또한 개인의 성장에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다신론 그리고 궁극적 일신론

     

    고대 이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헤메스주의는 일반적으로 다신론적으로 영성에 접근한다. 신(the Divine)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내며 여러 개의 얼굴을 입고 있다. 많은 신들과 여신들 - 특별히 파로스의 불빛 아래 알렉산드리아에 모인 문화들이 받드는 신들 - 은 헤르메스주의에 중요하다. 하지만 다신론 하부에서 이를 통합하는, 궁극적인 신적 통합, 긍극적 일신론을 우리는 받아들인다.


    이 개념은 우주에 대한 헤르메스적 이해로 확장된다. 우주는 다형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the one) 속에 통합된다. 따라서, 세상의 분명한 다양성 뒤에 있는 "통합"을 드러내 주는, 보이지 않는 연결을 우리는 추구하고 발견할 수 있다. 헤르메스적 카발라는 이의 한 모델이다: 각 세피로트은 신(성)의 다양성의 표현인 반면, 모두는 케테르로부터 발산되며 케테르 속에 통합된다. 이 통합 자체는 궁극적으로 미현현자(Unmanifest En Soph 카발라의 신성)로부터의 발산이다. [카발라 생명나무의 가장 상위에 위치한 케테르(왕관) 세피로트는 신성(아인 소프 오르)과 접해 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As above, so below)

     

    헤르메스학은 신을 내재적이자 초월적이라고 여긴다. 신(성)은 나타난 (현현한) 우주의 만물 (특히 우리 자신을 포함한) 속에 있으며, 또한 그들을 초월한다. '위'와 '아래' 사이의 상호연결 때문에 영적 레벨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질 세계에의 결과를 가져 온다. 거꾸로, 물질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영적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 - 물질과 영, 몸과 정신, 안과 밖, 밤과 낮, 사실 모든 양극성들 - 사이의 평형을 유지하는 것은 헤르메스의 영적 작업의 중심이 된다. 균형은 성장의 열쇠이다.


    만물은 신(적)이다


    신(성)이 만물 속에 있기 때문에 만물은 신(적)이다. 우리를 포함한 우주에 대한 묵상과 이해를 통해서, 기도와 염원과 영지를 통해서, 사람들은 더 '신 같이' 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신과의 재결합에 이르게 된다. 많은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이 목표를 한번의 인생 동안에 성취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나, 어떤 이들은 이 이상을 물리적인 몸 가운데 있는 동안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윤회에 대한 자세는 바뀐다.

     

    고대 '헤르메티카'에서는, (프랜시스 예이츠가 그랬듯이)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로 구분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두가지 다른 자세를 볼 수 있다. 낙천적 자세는 - 비록 우리와 만물이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을 인식하지만 - 신적이며 기본적으로 선한 우주를 빋아 들인다. 염세적 자세는, 물질은 영의 흩어짐이며 그러므로 질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본다. 현대적 "연대(Fellowship)"의 헤르메스주의는 확실히 낙관적 유파(학파)에 속한다.

     

    자연은 신(성)을 나타낸다

     

    현대 헤르메틱(헤르메스주의자)에게 있어서 '자연'은 '신적' 스승이며 '미스테리'의 '계시자'이다. 어느 장미십자회원은 이를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자연의 여사제이다." 따라서, 영적 '예술'을 이루기 위해서 헤르메틱은 사제로서 자연 또한 섬겨야만 한다. 물리적 세계는 "신적 권능과 사랑"의 현현 또는 그릇이며, 우리는 이 그릇을 보살피도록 특별히 위임받았다.

     

    아담이(인류가) 타락했을 때 한 의미로는 '자연'도 그와 함께 타락했다는 에소테릭 전통이 있다.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과 발전을 통해 아담을 구원(구속)함으로써 우리는 자연도 함께 구원한다. 그 반대도 진리이다: 자연을 구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  이 사상은 헤르메스적 환경(보호)론에 하나의 기초를 제공한다.

     

    우리의 존중과 돌봄에 대한 보답으로서 자연은 "그녀의 신적 자신"을 영적 여정에 대한 무한히 심오한 상징으로서 보여준다. 지구의 리듬과 해와 달과 위성들의 사이클에서, 우주의 경이로운 구조에서, 탄생과 죽음의 상호보완적 기적들에서 헤르메틱은 베일벗은 신을 발견하고 - 기념한다.


    '빛'으로의 의지

     

    인류는 우리의 '의지' 때문에 신적 패턴에 있어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에게는 신을 염원하는 능력이 있으며, 신(성)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구도자는 찾기를 원해야 한다. 철학자는 알기 원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의지'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헤르메스주의는 각 사람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 또한 가지고 있다. 신적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소망과 '의지'라는 중요한 인간적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그의 '더 높은 자아'와 합일을 이루어 결국에는 신과 재결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신비한 영역에로의 접근

     

    인류에게는 비물리적인 영역 - 심령적, 정신적, 영적 영역 - 에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더구나 이것은 여러가지 영적 테크닉을 통해 최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연적으로 타고난 능력이다. 비물리적 영역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은 마술의 수행 - 또는 의식(儀式)을 통한 신과의 동역 - 을 통해 이루어진다.

     

    (헤르메스학의) 탐구에 있어서 의식은 특별히 강력한 수행법이다. (의식은) 다양한 심령 테크닉들을 결합시켜서 강력한 전체로 만들어 우리를 비물리적 영역에 연결시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마술적 조화 속에서 신과 함께 작업함으로써, 그리고 "위에서도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법칙을 통해서, 비물리적 영엑에서의 작업은 물리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작업 (The Great Work)

     

    인류가, 더 축복받고 신과 더 합일된 이전의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사상은 많은 종교와 철학이 공유한다. 이집트, 그리스, 영지주의, 그리고 유대신화에서 발견되는 이런 개념들은 헤르메스주의 흐름의 요소들이다. 헤르메틱은, 이 합일로부터의 추락(타락)을 악 또는 형벌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영적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젊은이가 자라고 성숙하기 위해서 그가 집을 떠나서 삶을 경험해야만 하듯이, 전체로서의 인류는 경험 속으로 '추락'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서 치유와 회복(갱생)을 위해 다시 한번 신과 합일할 때까지 우리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각 헤르메틱이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작업, '회복'은 단순히 우리의 추락 이전의 축복된 상태를 되찾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육신의 거대한 누에고치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변태(變態)되어 왔기에, 이것(작업)은 어떤 새로운 것의 성취를 말한다. 우리가 에덴에 되돌아 갈 때, 거기는 우리가 한 때 떠났던 동산뿐만은 아닐 것이다. 동산의 중앙에는 거룩한 도시, 신과 창조적 함일 속에서의 인간의 가장 위대한 영적 성취가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이 신과의 새롭고 탈바꿈된 합일로 돌아가는 이 헤르메스 작업의 목표이다. 이 과정은 "위대한 작업" 또는 "장엄한 예술"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참된 지혜", "완전한 행복", "최상선"인 "철학자들의 돌"이 발견한 것이다. [철학자의 돌은 연금술사들이 구하려는 지고의 목표물이다]

     

    이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자연의 패턴을 열쇠 삼아 우리와 신과의 연결을 새롭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각 연결은 입문(initiation)으로 대변된다. 서로 다른 유파들은 각각 다른 자연 패턴을 따른다. 에를 들어, 어떤 이들은 연금술 작업의 단계들에 기초한 입문 단계들을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입문과정들을 영혼(프쉬케)와 영의 발전에 기초를 둘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달의 사이클에 기초할 수도 있다.

     

    또한, 영적인 것을 되얻기 위해 물질적인 것을 모두 배제하는 그런 영적 여정 대신, 헤르메틱의 목표는 만물의 균형을 껴안는 것이다. 헤르메스주의는 성취를 향한 금욕주의자적 모드보다는 시적 모드로 묘사할 수 있겠다. 신의 정신을 인용하며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는 우리에게 말한다: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함으로 너희를 성장시켜라, 모든 욱체를 뛰어 넘고, 모든 시간을 벗어나 영원이 되어라. 그러면 신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품고 너 자신이 불멸이며 모든 것, 모든 예술, 모든 배움, 모든 생물들의 성질을 이해한다고 여겨라. 모든 것보다 높이 올라가고 가장 깊은 것보다 내려가라. 불과 물, 마른 것과 젖은 것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의 감각을 네 안에 모아라. 바로 땅위와 바다 속, 하늘의 모든 것이 되어라. 탄생 이전이 되며, 자궁 속에 있으며, 젊고, 늙고, 죽고, 죽음을 넘어라. 이 모든 것들 - 시간, 장소, 사물, 질적인 것들과 양적인 것들 - 을 바로 이해했을 때, 너는 신을 이해할 수 있다.

    [출처] 헤르메스주의 (Hermeticism 헤르메티시즘) (1 of 2)|작성자 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