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기독교 신학에 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1. 플라톤과의 관계에서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사상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의 뉘케이온에서 자신의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플라톤이 죽은 지 10년 후에 플라톤의 제자들과 헤어졌으며, 또한 자신의 글에서 플라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기원전 1세기 이래로 후기 플라톤주의자들에게 그는 거의 그들과 가까운 사상가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논리학과 범주론이, 물론 한정적이긴 하지만, 플라톤 학파의 영역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알비노스 같은 일단의 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 학설과 아리스토텔레스 학설 사이에 그 어떤 대립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을 주석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이었다.
이와 달리 라틴 중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대안적 입장을 대표하는 이들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런 생각은 12세기에 “보편개념”(Universalien)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즉 알게마인베그리프(Allgemeinbegriff)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확고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이 알려진 뒤로 그것의 경험적 입장은 플라톤에게 영감을 받는 어거스틴의 조명이론과 대립되는 입장으로 파악되었다.
보편의 본성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이에 개재된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특성(eidos)을 질료와 묶여 있으면서 사물의 실체를 구성하는 형상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플라톤은 에이도스를 의미세계를 극복하는, 초월하는, 사물에서 모사된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중세기의 학교는 이런 차이점을 아래와 같이 세 대안으로 형식화 했다.
universalia in re(실재 안에 있는 보편),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인데, 이에 따르면 개념은 인식될 대상 안에서 실현된다.
universalia ante rem(실재 앞에 있는 보편), 이것은 원상인 이데아를 그것에서 모사된 사물에 우선하게 하는 플라톤의 입장이다.
여기에는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라 할 보편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아래와 같은 세 번째 가능성이다.
universalia post rem(실재 뒤에 있는 보편), 이것은 소위 유명론(Nominalismus)의 해석인데, 이에 따르면 보편개념은 nomina, 즉 사물의 실재에 있는 대상 없이 사람에 의해 형성된 사상이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11,12세기의 “변증가들”에게서, 특히 아벨라르 같은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의 학교 운영에 기초라 할 수 있는 보에티우스의 주석서에까지 소급된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해석학을 주석한 것이다. 또한 플로티노스의 제자인 포르퓌리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대해 집필한 개론(Isagoge)로 이에 해당된다.
중세기의 학습 토론에서는 보편개념과 그것이 지각대상과 맺는 관계를 추상적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런 추상적 관점은 물론 플라톤의 입장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측의 착상에 내재한 특수성을 추상화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람의 경우에 공히 명백한 보편은 사물의 현실성(Wirklichkeit) 일반을 파악하는 순간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한 생각이 다른 생각과 마찬가지로 명백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의 경우에 이데아가 구체적으로 소여된 것을, 즉 끊임 없이 자신의 당위개념 뒤로 물러가서 자기의 이데아를 모방할 뿐인 이 소여성을,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당위개념(Sollbegriff)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한 사물의 種개념(eidos)은 원래부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유개념은 사유를 규정하는 것이며, 또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형식요소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영혼의 본성을, 그리고 영혼이 물체(Körper) 세계와 맺는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선재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또한 이데아가 물체 없이 나타난다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것을 영혼이 물체화 앞에 놓여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자기 운동이라는 플라톤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모든 운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물체의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운동개념이 질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대한 글을 쓰면서 “영혼이 운동에 종속되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서 영혼의 자기 운동이라는 주장은 이미 그 토대를 잃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영혼을 물체가 운동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De an. 432 b 15ff.). 그러나 이에 덧붙여 이르기를 영혼 자신이 운동 안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영혼은 물체와 연결되어 있다.(414a 20). 여기서 말하는 물체는 생물체의 “형상”(morphè)인데(414a 19f.), 말하자면 물체를 생물로 만드는 그것이다. 물체 자체만으로는 단지 생명에 대한 가능성(dynamis)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일종의 생명인 생물체의 현실성(energeia)이다.(412a 27f.).
플라톤은 영혼의 선재를 물체의 운동원리로 받아들였는데,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그 영혼이 내재하고 있는 생물의 특성이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영혼은 자연적으로 고찰되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특히 생물의 본성에 대한 자연적 고찰로 정치된다고 볼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 플라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있을 때 이미 이에 대해서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 그는 생물의 발전과 성장을 묘사하는 한 쌍의 개념을 발견한 것 같다. 즉 가능성(dynamis)와 현실성(energeia)이다. 생물체의 현실성인 영혼의 현존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물체의 “첫 완성태”(entelécheia hè próte)라고 특색화 했다. 이 물체의 “두번째” 성취는 영혼을 통해서 활성화된 활동에서 이루어진다. 즉 실행은 생물이 의존되어 있는, 그리고 그 무엇인가에서 현실화될 목적을 구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문제를 자기의 “형이상학”에서 가장 간결하게 처리했다. “활동이 목표이기 때문에, 현실성은 활동이다. 그래서 현실성(energeia)이라는 이름도 역시 활동(ergon)을 파생시키며, 또한 완성태(entelécheia)를 목표로 한다.”(Met. 1050 a 21-23).
이 문장에서 의미심장하게 요약된 방향설정은 마지막에 대해서 플라토니즘적으로 제기된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명확하게 해석해주고 있는데, 이 질문은 소위 선(목표, 텔로스)이 아르케로, 즉 파이돈에서 일컬어지고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연결하고 연관시키는” 원리로 어떻게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서 의도된 답변을 플라톤과는 다른 방향에서 찾는다. 요컨데 이데아와 감각적 사물 사이에 있는 대립을 포기함으로써 찾는다. 그는 그가 흔히 말했듯이 오히려 에이도스나 “형상”(morphó)의 정체성을 감각적 사물 자체의 현실성이라고 규정했다. 그에게는 무엇이 더 요청되는 것일까? 일단 플라톤 자신에 의해서(그의 책 파르메니데스) 논란이 된 이데아론 문제가 감각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대상의 중복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데아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특별한 연구 영역에서 도달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훨씬 중요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탐구가로서 자기 학설의 이데아론에서 받아들인 결정적인 동기는 이데아가 사물의 생성과 과정을, 즉 운동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놓여있다.(Met. 991 a 8f.). 이를 위해서 플라톤은 영혼의 도움을 받았다. 영혼이 물체를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금 어둠에 빠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의 개념인 가능성과 현실성을 이런 목표로 몰고 갔다. 즉 운동은 가능성에 기울어져 있는 것을 현실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성취를 현실화하는 것이다.(Phys. 3,1-201a 10f.). 그리고 영혼은 생물에 내재하는 이러한 현실화의 원리를 성취하게 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의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사물을 초월하는 플라톤의 이데아는 감각적 사물, 즉 생물의 “형상” 자체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런 생물의 생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질료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상의 현실화라고 했다.(Phys 201 a 27 참조). 운동은 여기서 생성이다. 즉 “현실성을 하나되게 하는 생성이며 전체가 되게하는 생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우시아(ousia)라고, 즉 존재자(Seiende)라고 특색화 했다.(Met 983 a 27f.). 이것을 좀더 정확히 말하면 분명한 그 무엇(tóde ti)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것들과 구별되며(1017 b 25),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의해서 모든 다른 것이(질, 크기, 관계) 설명되는 그 어떤 것이다. 실체 개념을 규정하는 이 두 “방식”(trópous)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구별되었다.(1017 b 24). 이 구별은 그러나 그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두 묘사가 자신의 “형상”을 통해서 규정된 구체적인 존재자들과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존재자들(ousia)은 형상과 질료에서 구성되었다. 왜냐하면 형상(eidos)은 질료 안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질료는 나름대로 그 실현이 가능하게 해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법칙을 만들 수 있다.
ousia(physia)
(telos)
/ ∖
morphe hyle
energeia dynamis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서 한 사상(事象) 자체의 유기적인 생성이라고 규정된 운동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두 번째 형상을 알고 있었다. 요컨데 외부에서 작용한 강요된 운동인데, 이 운동은 질료의 예술적인 형태와 비교될 수 있다. 외부에서 작용한 운동을 분석할 때는 네 “원인”이 구별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자인 예술가, 둘째는 예술가 앞에 어른거리는 형태의 목적, 세 번째로는 형상, 마지막으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형상이 각인시켜할 질료가 그것들이다. 유기적인 생성에서는 이와 달리 세가지 첫 원인자(작용원인, 형상과 목표)가 형상과 동일시된 엔텔레키(entelechie)를 조성한다. 이 엔텔레키는 물체를 운동하게 하는 원인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기적으로 운동하는 본질의 엔텔레키와 동일시되는 그 영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원리에 따라서 볼 때 엔텔레키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물체의 엔텔레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운동과 그 운동 안에 있는 존재자들은 매우 복잡하게 분석되어야 할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분석의 기본 사상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입장에 가깝다. 즉 모든 운동과, 그리고 그 운동 안에 있는 존재자들의 궁극적 원인은 선과 완성을 목표로 한다. 이 완성은 모든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학설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그 어떤 신적인 것, 선, 추구할만한 것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선에 따라 자신의 본질을 추구하는 그 무엇이 있다.”(Phis 192 a 16ff.).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플라톤의 명제를 거절함으로써 당연히 신적인 완성을 부동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었다.(Met 1073 a 4).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신성을 불변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만을 직관하는 최고 이성으로 생각했다.(Met 1074 b 34f.). 왜냐하면 이성보다 높은 그 어떤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성의 고유한 부동성으로 인해서 이 신적인 이성은 모든 여타의 전체 코스모스를 움직인다.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움직이듯이 끌어당긴다는 말이다.(Met 1072 b 2). 이런 방식으로 최고의 신성은 우선 성좌(星座)를 움직이며, 이 성좌를 통해서 모든 존재와 사물을 움직인다.
바로 앞서 말한 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명제를 거부했는데, 그는 선을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소크라테스-플라톤 학설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 명제의 거부를 플라톤의 다른 많은 생각에 적용시키지 않고 거리를 두었다. 따라서 완성된 누스의 부동성 때문에,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언급했듯이 데미우르고스가 활동함으로써 코스모스가 생성된다는 설명은 표상 불가다.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코스모스의 생성이라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최고의 신성은 역시 코스모스 운동의 원천일 뿐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형상이 질료 가운데서 자신을 또렷이 주조해냄으로써 물체 자체 안에서만 발생한다.
형상은 질료와 묶임으로써 형태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묶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을 규정했다. 이런 철학의 한 부분이 기독교 중세기인 13세기 초에 관심과 논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질료적인 대상에서 실현된 형상들은 “추상화”를 통한 인식과정에서 지각 조성자로부터 해체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누스(Nus)가 영혼 안에서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 누수는 몸과 묶여 있는 영혼의 구성 분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영혼과 “나뉘어져” 있다.(De an. 430 a 22). 그것은 마치 빛처럼 외부에서 영혼으로 침투하여 작용하는 것이라고 표상할 수 있다.(430 a 15).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책의 그 유명한 한 장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바로 활동하는 누스다.(De an. Ⅲ, 3). 그는 이 부분에서 이르기를 영혼과 나뉘어 있지만 활동하는 누스만은 죽지 않는다(430 a 23)고 했다. 반면에 몸과 묶여 있는 영혼은 몸과 더불어 사라진다. “수동적인” 누스의 몸도 역시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지각 조성자에게서 해체된 형상들을 자기 자신에게 받아들이고 상호간에 연결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불사성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한번 플라톤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러나 동시에 “추상화”를 통해서 사물의 형상을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상은 “조명”을 통해서 이데아를 인식하려는 플라톤의 설명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이 증명된다. 즉 유럽 중세기 때 이 주제에 대해서 논쟁을 펼치면서 생각했던 내용과는 다르다. 적극적인 누스는 빛처럼 영혼 안으로 돌입하여 작용함으로써 영혼을 각인시킨다.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이에게 있는 그 형상들로 각인시킨다. 단순히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감의 모델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여전히 의미있다. 이 영감의 모델은 인식과정에 대한 고대 표상의 전체 역사를 규정하는 그것이다.
에이도스를 질료 안에서 구체화된 형상이라고 보는 이 기본 표상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까지 규정한다. 이 범주론은 그가 때때로 최고의 “존재자 무리(類)”(Gattung des Seiende)라고 특징화할 수 있었던 그것이다.(de an. 412 a 6). 이것은 이미 플라톤이 최상의 무리들(mégista géne)라고 언급했던 그 방식과 비슷하다. 특별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정돈하자는 시도가 플라톤에 의해서 지속되었는데, 이 시도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 다루고 있는 그 방식의 문제이다. 가장 일반적인 무리는 플라톤의 경우에 여전히 사물 자체의 근원(archai)에 대해서 의미가 이Te.(Phileb. 23 c-25 b 참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달리 가장 보편적인 무리개념을 더 이상 존재자의 원리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물의 술어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형상, 즉 “카테고리”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술어는 지각 대상에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논의된 대로 질료 안에서 현실화된 형상을 존재론적으로 설정한다. 최상의 술어 무리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더 이상 그저 똑같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중의 하나인 우시아가 독자적인 대상의 무리로 부각되었다. 반면에 다른 규정들은 대상“에”만 상관되어 있다. 이것들은 단지 “동반하는” 규정들(symbebekóta), 즉 실체의 “우발(偶發)”일 뿐이다. 실체가 나머지 술어 형식의 기초가 된다는 이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성 이해가 구체적인 개체 사물를 지향한다는 점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 기원전 2세기 이래로 플라톤 연구 영역에서 다루어진 교육재료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논쟁적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당연해졌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플라톤주의자들은 감각세계(Sinnwelt)를 존재자의 최저급 단계로만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의 세계에 대해서 영적인 세계는, 누스의 영역은, 즉 일자는 그것을 뛰어넘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성성은 이제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적 지각 세계에 소여된 것에 한정된다.
2. 교부신학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요소들
후기 고대 철학자들처럼 교부들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이의 차이점을 나중에 라틴 중세기에서 그랬던 것보다는 훨씬 덜 날카롭게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Ⅷ, 12)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플라톤주의자로 설정한다. 그가 물론 자신의 학파를 세웠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한 부분을 -즉 그의 범주론과 해석학- 중세기에 전승시킨 인물드로서 플라톤주의자였던 보에티우스와 포르퓌리오스도 역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배타적인 대립에 대해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양자를 결합시키려고 했다. 플라톤도 역시 인식이 감각적 사물과 그 지각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아남네시스(想起)의 인식심리학과 이데아의 특수한 실존을 뒤로 물리기만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플라톤 철학의 첫 단계를 아주 정확하게 이끌어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플라톤 사상의 안방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플라토니즘에 수용되었으며 그렇게 해석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감각세계에서만 받아들여졌다. 영적인 세계와 특히 신성은 카테고리를 초월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Strom Ⅴ, 11)는 중간 플라토니즘을 주도하는 철학자들과 일치하여 이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선이며, 최고의 단일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단일성 자체보다 탁월하다.”(Paid. Ⅰ,8,71,1). 이런 점에서 클레멘스는 약간 뒤에 활동했던 플로티노스보다는 훨씬 더 부정신학(negative Theologie)의 입장을 취했다. 하나님이 단일성을 훨씬 탁월하다는 사실은 기독교 교리에서 좋은 의미였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7:21-23에 따르면(클레멘스는 이 말씀에 의해서 소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단일성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되고, 따라서 그 차이의 순간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 달리 하나님은 존재의 피안에서 사유되어야 한다는 서술에서 더 큰 어려움이 있다.(Staat 509 b 9). 왜냐하면 그리스어판 성서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존재자”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이 기록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클레멘서에게 이 존재자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었다.(Phaid Ⅰ, 8, 71,2). 중기 및 신플라토니즘 철학자들은 이와 달리 플라톤의 “존재자의 피안”(epékeina ousia)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테고리론을 어느 정도까지 적용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했다. 왜냐하면 존재자(우시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열 개 범주 중에서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여타의 모든 것은 이 존재자로부터 서술된다. 일자인 선을 존재의 피안에서 사유함으로써 카테고리를 감각 세계의 인식 안에 한정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가 형상을 질료와 연결시티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형상이 질료에 묶이게 되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도 실체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Eth. Nik. 1096 a 24).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은 이에 맞서 질료적 존재자에 대한 카테로기를 영적인 현실성에, 특히 최고의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는 주장을 제기했다.
기독교 신학도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비질료적이고, 빗물체적이어서 모든 질료적 존재자들보다 탁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오리게네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따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존재이지만 존재의 피안이다. 이는 흡사 하나님의 누스이지만 우리 이성의 피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출애굽기 3:14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한 것이라고 본 것 처럼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레고리우스(Gregor von Nazianz)는 후에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만물과 달리 무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해명했다. 이것은 곧 그의 동생인 그레고리우스 폰 니세누스가 주장했듯이 신적인 본질의 고유한 차이점이 하나님의 무한성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달리 인간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를 통해서 그에게 훨씬 가까워졌다. 이미 호료론자 아테나고라스는 영혼과 몸의 상호 관련성을 기독교 부활신앙을 방어하는 인간론적 토대로 제시할 수 있었다. 인간은 성서의 창조기사에 따라서 몸과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혼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영혼만의 불가사성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혼만으로 창조하지 않았듯이 참된 인간구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을 몸과 영혼의 단일성으로 본다는 것은 철학적인 면에서 우선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 영혼은 이 “형상”으로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을 형성한다. 한참 지난 후 이 영혼은 공식으로도 역시 중세 교회에 의해서 확증되었다. 요컨데 1312년 비인 공의회를 통해서 확증되었다.(DS 902).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에 접근한 기독교는 이미 2세기 때 기독교가 영혼의 불가사성이라는 명제를 결정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결정은 물론 플라톤의 불가사성 표상과는 달리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개인 영혼의 불가사성을 가리킨다. 몸에 연결된 영혼이 상기, 상상력, 자기의식, 지각의식, 그리고 이런 것들과 관계된 사유와 더불어서 죽게되지만 능동적인 이성은 죽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De an. Ⅲ,5) 이런 기독교의 입장과 일치될 수 없었다. 더구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von Aphrodisias) 이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적인 이성은 인간 영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 영혼에 돌입하여 작용하는 신적 누스와 일치한다는 그 의속에 빠져버렸다. 영혼이 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몸에 묶이지 않는 독자성이 있다는 기독교적 이해에 흥미를 느낀 네메시우스(Nemesius von Emesa)는 400년 경에 영혼이 몸의 현실태(엔텔레키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대해서 아주 명백하게 반대투쟁했다.
3. 기독교가 라틴 중세기 때 받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 문제점
라틴 중세기 신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13세기 이래로 그야말로 유일한 “철학자”였다. 플라톤은 단지 그의 선구자일 뿐이었다. 르네상스가 시작하자 15세기 이래로 다시금 이런 평가에 대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스콜라 신학에서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플라톤 철학이 온전히 상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중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용된 근거를 플라토니즘이 교부들에게 친화력이 있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친화력에서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당시의 논리적이고 경험론적인 호기심에 어울렸다는 사실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이미 11세기 이래로 스콜라 철학의 학습 영역에서 그 토대를 이루었다. 물론 범주론과 해석학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서 12세기 중반에 아라비아어에서 서구어로 번역됨으로써 잘 알려지게 된 그 이외의 논리 문헌들이 흥미를 끌게되었다. 12세기 후반부에 더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이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영혼에 대한 글과 논리학에 과한 글들이 포함된다. 1200년 경에는 물리학과 그 이외의 자연철학 문헌이 나왔고,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 관한 글도 나왔다. 이 마지막 작품은 형이상학과 같을 정도로 13세기 초에 아주 유명해졌다.
따라서 번역 작업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번역 작업이 그때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지식 영역을 알게한 새로운 텍스트에 대해서 오랫동안 계속된 그 인식의 과정을 설명해주었으며, 이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가 특히 논리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권위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번역의 효과는 물론 물론 13세기 전반부에 그 책들을 읽고 주석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가 불신하고 금지시킴으로써 어려움에 빠졌다. 13세기 중반 이래로 大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의 시대가 되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권위가 그의 전문분야에서 결정적으로 관철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역시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다.
보편 논쟁을 통해서 인식론 안에 준비된 그 입장이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기초가 되었다. 어거스틴이 인식에 대해서 신적인 진리의 빛을 통해 인간의 영이 결국 깨우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 신학자들을 통해서 13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에 이르기 까지 확증적으로 주장된 바이다. 이런 설명에 맞서서 大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념적인 내용의 추상화를 통한 우리의 개념 형성이 지각 조성자들에게서 발생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여기서는 불가피하게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는 역사에서 논란이 되었던 질문, 즉 능동적인 지성의 본성에 대한 질문이 부각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능동적인 지성은 그 활동을 통해서(빛의 성질상) 개념적인 내용을 지각형성자에게서 해체시킨다. 13기 중반이 가까워오자 요하네스(Johannes von Rupella)는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의미에서 intellectus agens(능동적 지성)를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어거스틴의 조명이론과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알베르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해석을 내쳤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에 의하면 영혼이 육체와 더불어서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은 大알베르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동적 지성이 인간 영혼의 요소라고 설명한 것에 대한 고유한 근거를 제공했다. 이와 반대로 시제르(Sieger von Brabant)는 이미 1270년에 이의를 제기하기를, 이런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다르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지성은 오히려 인간 영혼의 한 부분이 아니다. 大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옹호된, 그리고 시제르를 반대하는 문헌에서 방어된 이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을 기독교적인 동기에 입각해서 변형시킨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첫 번째로 인간 지성이 그 인식 행위의 능동적, 생산적 주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의 생산적인 주체성이 근대적인 사상에서 당연하게 된 그 착상은 大알베르투스의 능동적 지성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이 기독교적으로 동기화된 그 변형에 근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가 수용하는 과정에서 투쟁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여타의 난제들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 하나님을 단지 세계의 운동자일 뿐이지 그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가장 첨예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자기 운동을 문제 삼았기 때문에 최고의 누스도 역시 부동으로 머물게 된다. 최고의 누스는 순수 활동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만 그렇다. 그는 단지 목적 원인으로서의 인력(引力)을 통해서만 세계를 움직인다. 그리고 이것은 코스모스와 그 형태의 현존을 이미 전제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 달리 하나님을 능동적인 창시자, 창조의 창시자로, 피조물의 현존을 야기하는 원인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 문제는 이미 13세기 초, 파리의 신학자로서 나중에 파리의 주교가 된 빌헬름(Wilhelm von Auvergne)에 의해서 전반적으로 명쾌하게 해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자의 말씀을 전혀 몰랐으며, 또한 비존재자들을 존재하게하는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말슴을 전혀 모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창조자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하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자유가 묶여야만한 어떤 질서는 없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을 누스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에서 빠져나와 일종의 심리학적인 신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극복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논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의지가 없는 지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지성이 있다면 당연히 의지도 있는 게 틀림 없다고 말이다. 이 의지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차선으로는 다른 본질의 현존에 대한 긍정인데, 이것은 자신의 긍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필수적인 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에서 나온다. 신적인 의지가 필수적으로 신적인 지성과 연결된다는 교리가 형성됨으로써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神개념을 기독교화 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이 신개념을 확장시켜서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 표상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 착상을 심각하게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지성과 의지가 구별됨으로써 그 지성과 의지의 전체 작용이 어떤 종류인가에 대해 주어진 질문과 더불어서, 모든 유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신인동형동성설로 각인되었다. 이 구별로 인해서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는 숙명적인 후속결과에 빠져들었다. 즉 이 기독교의 진술이 신인동형동성설적인 투사의 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만은 라틴 스콜라 철학의 심리학적 신론이 이신론의 비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런 神사유는 해체될 수 밖에 없었다. 스피노자에게서부터 피히테와 포이에르바흐에 이르는 일련의 근대 정신에서 이런 상황에 부딛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누스를, 이미 현존하는 세계를 부동자로서 움직이게 하는(der unbewegte Beweger) 기능에 한정시킴으로써 세계의 영원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의 현존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주장을 전제하게 되었다. 또한 그 세계의 질료나 개체 형태의 무상성이 손상받지 않은 채 유지되는 그 형상의 요소들도 역시 이런 전제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세계 개념이라는 측면으로부터 다시 한번 기독교 창조 신앙에 대해서 반대가 발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서술을 과학적으로 정확한 것이라고 간주한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이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大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조우에서, 한편으로 이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Moses)에 의해서 발전된 논증에 기대어 세계의 시작이 없었다는 증명을 약화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 세계의 창조와, 또한 그 창조에 의해서 시간적인 시작이 있었다는 전제를 순수하게 신앙적인 진리로 설명했다. 여기서 언급된 이 진리는 계시와만 관계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와 달리 창조 사실과 세계의 시간적인 시작에 관한 질문 사실을 구별한다. 모든 신 외적인 것들이 피조물의 존재 원인인 하나님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불가피한 이성적 진리이며, 따라서 세계의 피조성이라고(S. theol. Ⅰ,44,1) 생각하는 한 세계가 늘 그렇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a.a.O. Ⅰ,46,1) 순수하게 합리적으로 배척해버릴 수는 없다. 결국 세계의 시간적 시초는 (보나벤투라의 입장과는 달리) 아주 강력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문제가 된다.(Ⅰ,46,2 c: sola fide tenetur). 이것은 곧 형이상학 주석을 쓴 대알베르투스의 입장에 접근되었다. 하나님을 원인으로 하는 모든 것은 세계의 시간적인 시초에 대한 질문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과 작용의 동시성이 일어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알베르투스도 역시 창조에 대한 주장이 이미 세계의 시간적인 시초에 대한 주장을 포함한다는 가정을 포기했다.
창조 신앙에 따라온 귀결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변형만을 요구한 게 아니라 프로클로스와도 조우하게 되었다. 질료적 코스모스의 발현에 대한 그의 표상은 중간 단계를 뛰어넘어, 특히 13세기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가운데서 있었던 Liber de causis(원인에 관한 책)을 통해서 스콜라 신학자들과 철학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수용하게 만들었다. 를 수용하게 되었다. 창조자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모든 개체 사건과 연관된다. 세계와 개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작용은 일종의 간접인 작용만이 아니다. 즉 천체 운동을 통해서 중재되었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은 이미 빌헬름에게서 분명하게 인식되었으며, 또한 부각되었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성, 그리고 역으로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직접성은 1270년에 인간 지성의 본성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서 신학이 아라비아적 아리스토텔레주의와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인들과 벌인 논의 과정에서 두 번째로 시급한 논쟁점을 형성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적 활동을 천체와 그 운동을 통해서 세계와 중재하려는 표상의 결정론은 -물론 일종의 점성술적인 운명신앙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그 반작용으로서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게 되었고, 또한 인간이 코스모스의 자연법적 질서로부터 자유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초기에는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같은 프란체스코 학파에게서, 후에는 빌헬름 옥캄(Wilhelm Ockham)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 이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개체의 직접성이 주제화 되었다. 신비주의와, 그리고 늦은 14세기에 갱신된 토마스 브라와딘과 그레고르 리미니의 어거스티니즘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개인들이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루터의 학설도 역시 이런 어거스티니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표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변형이 여기서 언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창조자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개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성과 연관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자유가 이 직접성의 기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개개 존재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그리고 모든 개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아라비아 아리스토주의자들은 세계 사건의 개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논란을 제기했다. 이것은 그 인식이 자기에게 근거하고 있는 신적인 이성의 본질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Met. 1074 b 34 f.). 그리고 이 이성은 자기에서 유래하는 흡인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하늘의 물체를 움직이고 코스모스를 움직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지성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그 지성을 통해서 발현하는 피조물의 원인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논증했다. 그리고 이 원인성(Ursächlichkeit)은 사물에 내재한 전형적인 것만(그런 무리와 종류들)이 아니라 개개의 특수성으로 확장된다.(S. theol. Ⅰ,22,2). 피조물과 그 질서의 사실적인 생산은 당연히 신의 의지가 작용한 소산이어서 둔스 스코투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선지(先知)는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에 제한적이지 단지 자기 지성에만 따른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로써 이런 질문들이 해결되려면 최고 이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神사상의 변형에, 그것은 기독교 신학에 토대를 제공하는 것인데, 바로 그 변형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생각이 보충되는 순간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4. 근대와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중세기에 끼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이 15세기의 플라톤 르네상스를 통해서 주춤했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은17세기에 다시 한번 정점에 도달했다. 그것도 신학에서 말이다. 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거부했지만 17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신학도 역시 다시 한번 아리스토텔레스를 향해서, 특별히 그의 형이상학을 향해서 방향을 틀었다. 근대에 들어와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영향력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한 새로운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De caelo Ⅲ에서) -데모크리토스가 요구했던 것처럼, 그리고 후기 플라톤이 동의했다고 보이는 것처럼- 모든 성질상의 차이점을 양적인 차이로 환원시키자는 주장을 거부했다. 그의 물리학은 사물(내지는 그런 종류) 사이에서 재생산될 수 없는 양적인 차이점에 대한 물리학이다. 그런데 근대 자연과학은 이런 사실에서 모든 물체가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데모크리토스의 학설을, 그리고 모든 성질상의 차이를 양적인 차이로 되돌려야 한다는 그의 학설을 따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대한 근대 비판과 그 개조에 대한 근대의 비판은 이런 사안과 밀접하게 상호 관련을 맺는다. 이 비판은 관계의 카테고리가 사용될 영역이 모든 여타의 카테고리를 값으로 해서 전진적으로 연장(延長)된다는 것이 그 특색이다. 따라서 결국 이 근대 비판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얻게 되었다. 즉 (칸트와 헤겔에게서) 실체 개념은 우연과 관계되어 있어서 이런 우연을 제외하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계적인 구조를 갖는다고 말이다.
성질상의 규정에서 양적인 관계로 환원하려는 경향은 일찍이 만물을 장소 변화로 묘사하고 기하학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등장했다. 이런 경향은 주로 고전 역학(力學)에서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플라톤과 달리 모든 운동을 물체와 연결된 것으로, 따라서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운동 개념은 다른 고전 역학 개념보다는 훨씬 복잡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생성과 진행을 그 고유성, 즉 에이도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인 dynamis(가능태)와 energeia(현실적 활동)은 이것에 관련되어 있다. 17, 18세기 물리학은 운동 개념이 장소 변화에 환원됨으로써 이 개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이와 연결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 도식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시점에 운동력 개념이 등장한다.
사물의 성질적인 차이점을 양적인 차이점으로 해체하는 것은 물체의 상태와 그 변화에 대한 한정적인 연구를 위해서 근대 자연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하고, 사물의 “본질적 형식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 형태의 불환원성에 대한 논의는 근본적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는 생명 형식에서(한 부분의 조건으로서) 전체가 강조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심리학에서 형태 지각이 지적되는 것과 같다. 즉 전체는 자신의 부분에서 분석되어야만 하지만, 단순히 그 부분들의 총체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 이상”이다.
전술한 이 차이점들은 경험론적 관점의 근대가 여전히 유명론적인 방향이 월등한 상태에서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방식으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 현실성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이것의 우월성은 무엇보다도 공간에 주어진 물체라는 점과, 또한 이것과 연결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과 심리학에서 주체 개념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기독교가 intellectus agens(능동적 지성)을 중세기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통해서 인간 영혼의 한 부분으로 변형 해석한 것에서(앞의 내용을 참조할 것) 암시되었으며, 또한 후기 중세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가 유명론적으로 방향을 바꿈으로써 준비되었다. 이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개념은 변화되었다. 즉 위에서 언급된 바이지만 개개 카테고리와, 또한 카테고리 체제의 서열을 제한적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카테고리는 주체의 기능이 되었다. 칸트는 이런 의미의 기능을 오성(悟性) 기능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이외에도 역시 금세기 철학에 이르기까지 가장 강력하게 모범적으로 작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개개 항목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Substanz) 개념은 영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칸트와 헤겔에게서 이 실체 개념은 유지되었지만, 그러나 관계 개념의 하위로 (우연과의 관계로) 떨어졌다. 이로써 실체 개념은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이라는 그 위상을 상실했다. 신칸트주의자인 에른스트 카시러는 근대 자연과학이 기능 개념을 통해서 실체 개념으로부터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결국 과정철학은, 특히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의 작업을 통해서, 실체개념을 사건(event) 개념으로 대체해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기초개념을 설정해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은 그의 형이상학(Met 1017 b 24)에서 언급되었듯이 두 가지로 특징화되는 점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실체는 한편으로는 규정된, 다른 것들과 구별된 그 무엇(tóde ti)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다른 것들이 그것에 의해 언급될 수 있는 그것이다. 실체 개념은 두 번째 기능에서 진술 형식(카테고리)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우연한 결정의 변화에서도 여전히 존재론적 기준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실체 개념의 이런 측면에 대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성격화된 것인데- 존재론적인 해석이 비판받은 것은 당연하다. 이와 달리 실체 사상은 tóde ti의 의미에서 불가역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늘 그렇게 규정된 그 무엇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며, 또한 객관적인 리얼리티를 이러한 구별에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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