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를 보며 분노하다
“대통령 각하, 진실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진실은 당신의 통치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100년 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중 한 문장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고, 졸라 이후 수많은 양심적, 진보적 지식인들의 운동으로 드레퓌스는 풀려납니다. 이 드레퓌스 사건은 양심적 지식인들과 건강한 시민사회의 역동적 움직임으로 프랑스 시민운동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부가 만들어낸 언론의 힘이 프랑스의 많은 국민들에게 진실을 숨기기에 충분했고 정부 언론에 조정당한 국민들은 졸라가 글을 발표한 직후 오히려 졸라를 매국노로 취급합니다. 또한 협박과 군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결국 졸라는 재판도 받게 됩니다. 재판장에서 졸라는 말하죠. “지금은 의회도, 신문도, 신문이 만들어 낸 여론도 나에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나의 편은 다만 진리와 정의뿐이지만, 프랑스는 언젠가 거짓과 맞서서 싸운 나에게 감사할 때가 올 것입니다.” 진실을 알리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감추고 싶어 하는 그들과의 대립이 꼭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자손들은 졸라의 말처럼 진실을 밝힌 이에게 감사하겠죠.
그로부터 1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스테판 에셀은 2009년 ‘레지스탕스의 발언’ 연례 모임에서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즉흥 연설을 합니다.
튀니지의 젊은이들, 이집트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압박을 받으면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이슬람 문명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문명이라면, 그 문명 속에 갇힌 채 무력하게만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도처에 독재와 압박에 순응하지 않는 깨어 있는 국민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 세계 곳곳마다, 때는 왔습니다. 전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쉽게 체념해버리던 일들을 이제 그냥 당하고 있지만 않고 이에 맞서 일어설 때가 온 것입니다.
저자는 선대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에 저항하여 싸웠던 것처럼 젊은 세대가 “이런 모든 일들에 암묵적인 찬동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분노할 것을 주문합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나쁜 태도라고 나무랍니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란 우리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10여 년 전부터 지구화 시대입니다. 지구 곳곳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저편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등에서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압박에 저항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우리보다 훨씬 민주화된 복지국가 프랑스에서도, 유럽의 대표적인 국가인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도 ‘분노 신드롬’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에셀의 「분노하라」는 미국은 물론 일본과 브리질, 심지어 중국에까지 판권이 수출된 상태입니다. 100년 전 「나는 고발한다」가 프랑스 전역으로 파장을 일으켰듯이, 지구촌 사회에서의 「분노하라」는 전지구적으로 젊은이들과 깨어있는 지식인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요? 제가 「분노하라」를 보며 화가 났던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치솟는 생활물가와 대학 등록금, 비정규직 비율 세계 최고, 청년실업, 갈수록 커져만 가는 빈부 격차,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급감하는 출산율, ……. 이것이 프랑스보다 분노할 게 훨씬 더 많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인데, 아직도 대다수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졸라와 같은 문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지요. 눈물이 날 정도로 화가 나죠. “분노하라”는 94세 스테판 에셀이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호소하는 글입니다만 사실 도서 「분노하라」가 아니라, 단어 “분노하라”가 우리에게 깊이 새겨져야 하는 말입니다. ‘진실은 승리한다’라는 문장을 대한민국에서도 만들어보자고요!!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샤르트르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긍정적인 ‘분노’란 시대를 건강하게 지켜줄 수 있는 힘입니다. 100년 전의 아폴리네르의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는 말처럼 이제는 희망이 그리 격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놓고 분노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역사의 물결을 자꾸 더러운 웅덩이 쪽으로 몰고 갈 때, 이제 더 이상 권력자의 이기심과 오만을 견디지 못할 때 우리들은 분노해야 합니다. 저자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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