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갑부 집안의 '외톨이' 어머니는 시리아 출신 '노예의 자식'이라 불려
1988년 알카에다 창립, 처음엔 아랍 전사 지원 업무… 미군에 분노, 테러 조직으로
1997년 CNN인터뷰로 '악명' "미국은 범죄 집단" 맹비난… 부인 최소 4명, 자녀 25명
'최고 액수의 현상금이 걸린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54)이 2일 9·11 테러 10년 만에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됐다. 그는 2001년 9월 11일 항공기를 이용한 자살테러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최고 지도자였다.◆'노예의 자식'이라 불리던 외톨이
빈 라덴은 1957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건설업을 하던 억만장자 모하메드 빈 라덴이 22명 부인 사이에서 낳은 54명 자녀 중 17번째로 태어났다. 빈 라덴 자신도 최소 4명의 부인 사이에서 자녀 25명을 낳았다. 빈 라덴은 열 살 때인 1967년 아버지 모하메드가 비행기 사고로 죽자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미국 정보기관은 그의 재산이 수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어린 시절 그는 늘 '외톨이'였다. 시리아 출신인 그의 어머니는 가족들 사이에서 '노예'라고 불렸고 그는 '노예의 자식'으로 통했다. 이복 형제는 많았지만 동복 형제는 없었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미국·유럽 등 외국에 유학하며 서구 문화를 흡수했지만 그는 제다에서 대학을 다니며 반(反)서구 성향이 강한 이슬람 근본주의인 와하비즘에 경도됐다. 이 대학 압둘라 아잠 교수는 범이슬람 종교운동을 주창하며 청년 빈 라덴에게 "지하드(성전)는 무슬림의 책무"라고 가르쳤다. 빈 라덴은 아잠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대항하는 테러조직을 만들자 자금을 지원하고 10여년간 무슬림 무장조직의 전사로서 실전 감각을 익혔다.
- ▲ 2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테러리스트수배자 홈페이지에 게시된 오사마 빈 라덴 항목의 상태가‘사망’으로 바뀌며 10년 만에 가장 극적인 업데이트를 이뤘다. /로이터 뉴시스
◆미군에 분노, '지하드' 선언
빈 라덴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계기로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하자 미국에 '지하드'를 선언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뒤 사우디로 돌아간 빈 라덴은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이슬람 성지를 미군이 더럽히고 있다며 분노했다. 그는 사우디를 늘 '두 성소(聖所)가 있는 나라'라고 불렀다. 그는 사우디 정부에 미국과의 '지하드'에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거부당한 뒤 1991년 조직원들을 이끌고 아프리카 수단으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 알카에다를 본격적인 테러 전사의 조직으로 전환했다.
빈 라덴은 1994년 과격 이슬람 단체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사우디 국적을 박탈당했다. 1996년엔 미국의 압박으로 수단을 떠나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1997년 CNN 인터뷰에서 미국을 '불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하며 서구 세계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렸다. 그는 "미국은 아랍 세계를 점령하고 재산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후 그는 민간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을 상대로 '지하드'를 확대했다.
빈 라덴은 1998년 케냐·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 2000년 미 해군전함 USS콜호 공격 등을 주도하면서 미 연방수사국(FBI)의 '10대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랐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공공의 적 1호'라고 불렀다.
2001년 10월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여러 차례 그의 은신처를 폭격했지만 생포하거나 사살하지 못했다. 미국은 2005년 현상금을 2500만달러에서 5000만달러로 올렸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미국은 빈 라덴이 어디에 있는지 정보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작전을 지시한 오바마 대통령에 따르면 그 몇 달 후 빈 라덴의 소재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확보했고 2일 전격적인 작전을 통해 그를 사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