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장로의 유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주신 율법에 인간적인 생각을 더한 것이 장로의 유전입니다. 랍비들은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러 조항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교회 전통도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자 만드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장로의 유전이 될 수 있습니다. 전통을 만드는 당사자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장로의 유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의 원리에 입각하여 그 전통들에 대해 살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교회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12시를 기점으로 송구영신 예배를 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에 송구영신 예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기에 하나님께 예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이 행해지고 송구영신 감사 헌금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인가 아니면 장로의 유전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날, 곧 주일
공적 예배는 주일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모든 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모든 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새 언약의 교회가 옛 언약의 유대인들과는 구별된 방식으로 하루를 지킵니다. '안식 후 첫날'입니다(행 20:7). '안식 후 첫날'의 다른 표현이 '주의 날'입니다(계 1:10).
'주의 날'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쓰인 주의 날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본문 외에 주의 날이 쓰인 곳은 세 군데이고(살전 5:2, 살후 2:2, 벧후 3:10), 다른 곳에서는 '그날'이라는 표현으로 아주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주의 날, 그날은 도적같이 임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주후 70년에 이루어지는 옛 언약의 백성에 대한 불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옛 질서에 속한 온 세상의 멸망이었습니다(벧후 3:10,12). 노아 시대의 홍수를 기점으로 옛 세상이 멸망하고 새 세상이 열렸던 것과 같습니다(벧후 2:5, 3:6~7). 주후 70년 옛 언약의 공적 파기를 가리키는 주의 날, 그날은 원리적으로 주님께서 강림하신 날입니다.
주의 날에 상응하는 구약적 표현은 '야웨의 날'입니다. 야웨의 날은 일차적으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을 가리키고 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분의 모든 사역을 가리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때에 있었던 헤롯의 행위 곧 베들레헴에 사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아기를 죽이는 사건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마 2:17~18, 렘 31:15).
이처럼 주의 날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심판의 칼을 빼어 들고 나아오시는 날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날입니다. 불순종하는 언약의 백성에 대한 심판은 순종하는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가시 곧 고통거리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통해 의인들이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더욱 굳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에 입각하여 인자함과 진실함을 앞세우시고, 한 손에는 긍휼과 자비를 다른 한 손에는 심판의 칼을 들고 그의 백성들에게 나아오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 주의 날이며, 그 방식이 공적 예배입니다. 물론 모든 언약의 백성은 모든 날과 시간에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 교제가 가능하고 이루어져야 하지만 주의 날은 공적으로 만나는 특별한 날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날에 '그날의 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나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의 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찾아가심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시는 장면이 그것입니다(창 3:8). 우리 성경에는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야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들이 그날의 영으로 오시는 야웨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1). 그 소리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진노하시어 급박하게 다가오시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두려워서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 날은 제 칠일 곧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로 보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제 육일에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이 종류대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가 창조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의 모든 일은 한날 곧 육일에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그리고 곧 이어 범죄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기에 이는 제 칠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날의 영'이라고 할 때에 '그날'은 안식일과 직접 연결되고, 이후의 성경에서 쓰인 심판의 날로서 '그날'의 원형입니다. 곧 야웨의 날, 주의 날의 원형입니다. 안식의 날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심판주로서 급박하게 오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고, 그 하나님께 뱀과 여자와 남자의 순으로 이어지는 심판의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창 3:14~19). 아담은 자신의 아내를 '생명'이라는 뜻의 하와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심판의 선언 가운데 주어진 약속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이는 첫아들을 "야웨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뜻으로 가인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선언을 듣고 회개하는 심령에게는 자비하십니다. 긍휼을 베푸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며 생명을 주십니다.
주의 날도 이 모든 것이 원리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그날에 공적으로 찾아오십니다. 공적 예배는 그의 백성들에게 공적으로 나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 선포인 설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는 위로를,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미암는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회개하는 심령은 위로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완고하게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은 심령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설교자는 회중을 그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기 백성들에게 진노하사 멸하시려고 하실 때에 중보를 통하여 그 진노가 철회되도록 했던 선지자들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리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이는 결코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와 깊은 기도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여기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은 모든 죄에 대한 것이었기에 사실 우리의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승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주님은 범죄하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요일 2:1).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의 날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죽음을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는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은혜는 범죄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죄로 알고 가슴을 치며 자백하고 그 자리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회개가 있을 때에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됩니다. 공적 예배의 순서에 '죄의 고백'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일의 신학적 의의
안식 후 첫날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쏟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날입니다. 주의 날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새 시대가 시작된 날입니다. 곧 옛 시대의 종결이면서 새 시대가 펼쳐지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을 보내시는 모든 구속 역사가 원리적으로 포함되는 날입니다. 옛 질서에 속한 세상의 종말과 새 질서에 속한 천년왕국이 열리는 역사적인 시점인 주후 70년의 옛 언약의 공적 파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 역사가 원리적으로 다시 반복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매 주일은 성탄절이면서 수난절이고 부활절이면서 승천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강림하시는 날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지켜지는 절기는 특별히 그 부분을 더욱 깊이 되새기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때에만 그 절기가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주일에는 성탄, 수난, 부활, 승천, 성령 강림, 주의 강림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로 부활에 대한 찬양이 부활절에만 불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성탄절을 12월 25일이라는 한 날로 정하여서 주의 날과 무관하게 지키는 것도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2).
예수님의 부활은 희년의 성취입니다. 땅과 관련한 모든 약속이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 주의 날입니다. 희년은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나고 난 다음 해입니다. 일곱 번의 안식년은 완전한 안식년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희년은 완전한 안식년이 지난 다음 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시고 교회가 안식 후 첫날을 지킨 것은 완전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3). 새 언약의 교회가 안식 후 첫날을 지키는 것은 희년을 원리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내포되어 있던 원리를 깨달아 교회가 지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날이 다 주일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주의 날은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에게 그 이전의 모든 역사의 종결이면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비록 새로운 달, 새해, 새로운 백년, 새 천년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지만 주의 날만 못합니다. 아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 달, 새해를 주기로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돌이키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다짐할 것이 아니라 매 주일을 주기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새 달, 새해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공적 만남인 예배
예배는 한 손에는 긍휼과 자비를, 다른 한 손에는 심판의 칼을 들고 그의 백성들에게 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와 그 얼굴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시 68:24)"고 노래하였습니다. 온 우주의 왕이시며 우리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 임하십니다. 하늘에서 그 병거를 타시고 영광의 나팔을 울리며 행차하시는 것입니다. 찬란한 빛을 발하시며 천군 천사들을 병거로 삼으시고 예배의 자리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예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께 나아가 맞이하며 뵈옵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감사와 기쁨의 잔치입니다. 경박하지 않으면서 즐거움으로 가득한 잔치입니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하늘에서의 예배의 복사판입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그 영광으로 임재하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곧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면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백성을 만나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상이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한 나라의 백성이 그의 왕을 알현하려고 할 때에 왕이 만나 주시는 것이 최고의 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왕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공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주의 날에 개인적으로는 지난날의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주일의 모든 의미가 개인적으로 적용되어집니다. 공적 예배에서 죄가 고백되고 공적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찬에서 하나님과 한 상에 먹고 마십니다. 온전한 연합입니다.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승천절, 강림절, 새날, 새 달, 새해, 새로운 백년, 새로운 천년을 지내는 것입니다.
송구영신 예배의 문제
송구영신 예배는 그 처음 의도가 어떠하였든지 성경의 원리를 토대로 삼고 있지 못합니다. 송구영신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한해의 소원을 적은 헌금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목회자가 기도하는데만 2~3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무속 신앙의 재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경입니다. 그것은 주일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는 송구영신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의 열성이 주일 예배에 참여하는 열성보다 더 강하다는 것으로 확인되어집니다.
송구영신 예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기 어렵습니다. 주일이 주일답고 예배가 예배다우면 필요하지 않은 예식입니다. 주일이 주일다우면 매 주일이 송구영신입니다. 예배가 예배다우면 우주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별도의 예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일의 예배보다 더 큰 의미를 담아 성찬을 행하고 전체적으로 감사 헌금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번 자리를 잡은 교회 전통이기에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된 교회 전통이기에 고수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성경의 원리로 점검하고 성찰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원리에 부합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송구영신 예배에 참여하자니 찜찜하고 참여하지 않자니 그 이유를 모르는 지체들에게 덕이 되지 않을까 고심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언제쯤이면 주일과 주일의 공적 예배가 살아나고 별도의 송구영신 예배가 사라지고 그러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요? 그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대합니다.
(1)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형상>(메리딧 G. 클라인 지음, 서홍종 역, 도서출판 줄과추, 180쪽)
(2) 예수님은 겨울에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에 목자들이 늦게까지 들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팔레스타인의 건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탄절은 교회적인 필요에 의해 생겼습니다. 그날은 태양신을 숭배하던 로마의 제사 의식이 행해지던 날이었습니다. 국교가 된 후에 그날을 예수님 탄생일로 정하였습니다. 태양신 숭배 의식을 막고 국교의 중심 내용인 예수님에 대해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 시대적 상황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3) 하루와 일년의 연관은 성경에서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출이집트 후 이스라엘 1세대의 광야 40년 생활은 가나안 땅을 탐지한 40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주어진 것이었습니다(민 14:34). 에스겔이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의 죄악을 당하고 우편으로 누워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는데, 일일이 일 년이었습니다(겔 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