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조나단 에드워드

교회사인물(제37강) 조나단 에드워드

은바리라이프 2010. 12. 23. 18:17

교회사인물(제37강) 조나단 에드워드 교회사인물

2010/08/1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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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인물(제37강)  조나단 에드워드(딤전1:12-17)

 


●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미국 청교도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목회자이며, 선교사인 동시에 신학자요 철학가이다. 그는 1703년10월5일 미국 북동부에 있는 코네티컷주 이스트 윈저에서 청교도 2세로 태어났다. 아버지 디모데 에드위즈는 이곳에 있는 회중교회 목사였고, 어머니 에스더는 노스햄프턴에서 시무하는 솔로몬 스토달드목사의 딸이었다. 자녀 11명을 두었는데 조나단은 다섯 번째 아이였고, 위로 4명의 누나와 아래로 6명의 여동생을 둔, 1남 10녀 중 독자로 자라났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 받을 수 있었는데, 그는 어릴적부터 학문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여섯살 때부터 아버지 디모데 목사는 에드워드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이미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었다. 11세 때 자연계와 곤충을 관찰하고 소논문을 쓰기도 했고, 12세에는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기도 했으며 부흥성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확실히 조숙한 천재였다.

 

가정 학교에서 철저한 기독교적인 교육을 받던 중 13세에 예일대에 입학하였다. 뛰어난 관찰력과 지적인 호기심으로 곤충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거미줄의 모습과 형태, 목적에 관한 상세한 과학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는 여기서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는 신비한 모습에서 창조자의 끝없는 선하심과 오묘하신 지혜를 발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작 뉴톤의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14세에는 ‘자연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물질주의와 무신론을 반박하는 글을 모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식의 경지에 다다르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고 믿었기에, 기독교인의 학문 추구를 적극 장려했다. 특히 이때 기록한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라는 논문은 죤 로크의 사상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에 의하여 연구될 정도의 수작이다.

 

17세에 예일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하고 바로 예일대 신학부에 진학하여 목회자 과정을 2년간 공부하였다. 바로 그 2년은 에드워즈가 자신의 회심을 체험하였던 시기로 추정된다. 신학생 시절인 1721년(18세)에 그동안 의심을 가졌던 예정론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과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재학 중 1년간 뉴욕시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예일 대학의 학장이 성공회로 개종하여 변절하자, 졸업 후 예일대학으로 돌아가 교수생활을 시작하여 정통 신학을 재정립하고자 3년간 예일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1724~26).

 

1722-1723년 겨울에 자기의 마음과 생활을 통제하는 지침서가 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만든 '결의문'의 대부분을 썼다. 이 결의문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에 대한 최고의 요약집, 지금까지 사람이 만들 수 있었던 것 중 복음적 선행 실천에 대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되고 있다. 결심문은 70개의 항목으로 되어있는데, 에드워즈가 이 결심문을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기 속에 남아 있는 정보를 추적해보면, 에드워즈가 18세 때 회심을 체험한 20세가 되기 전, 약 1년여에 걸쳐, 그가 평생 살아갈 자신의 자세와 태도를 70가지의 결심문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에즈워드는 이 결심문을 1주일에 한 번씩 읽으면서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 70개 결의문은 신앙과 신학 포스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삶은 점점 더 성숙하고 성화되어 갔으며, 그는 교회 역사에 하나님의 부흥의 도구로, 또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의 한 사람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

 

● 그는 1727년 예일대학 설립자중 한 사람이었던 제임스 피어폰트 목사의 딸인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하였으며, 목사안수를 받은 후 외할아버지가 시무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갔는데, 2년 후인 1729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750년 그 교회에서 물러날 때까지 섬겼다. 주님은 그의 많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의 수고에 축복하셔서 교회가 부흥되었다. 노드햄턴교회에서는 에드워드의 설교에 의해 많은 회심자가 생겨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었다.

 

에드워즈는 전형적인 부흥사는 아니었다. 하루에 12-13시간씩 연구에 몰두한 학자형 목회자였다. 설교시에 우렁찬 음성이나 제스처의 기법없이 원고를 읽곤 하였지만, 설교 내용에서 조직성과 묘사가 뛰어났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 영국은 처음의 청교도 정신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형식적이고 복음과 멀어져가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신앙회복을 주장하였다. 당시 그의 메시지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전체가 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주님의 구원의 사랑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특히 그의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미국을 일깨우는 유명한 설교가 되었다. “죄인들이여, 당신이 처해있는 위험한 상황을 잘 살펴보십시오.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으며, 지옥의 불구덩이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용광로는 이제 뜨겁게 달아 있으며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올바로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어서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십시오.” 그의 메시지는 죄악으로 잠자고 있는 미국을 일깨우는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다.

 

에드워즈는 그의 목회 기간 2번의 부흥을 체험하였다. 첫 번째 부흥은 1734년 11월 알미니우스 이단사상의 확산을 염려하여 행한 “오직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칭의”라는 일련의 설교를 통하여 일어났다. 1735년 봄과 여름에 온 마을이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을 체험하였다. 마을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정도였다. 한 주에 30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 6개월만에 300명 이상이 회심하고, 교인수가 620명으로 늘어나 유례없는 축복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부흥은 1740-1741년이었는데 이 때에는 뉴잉글랜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두 번째 대각성의 특징은 조지 휫필드와 사역했다는 점이다. 1740년에 보스톤의 여러 목사들이 휫필드를 뉴잉글랜드로 초청하였는데, 그렇게 방문한 것이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 되었다.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우정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에 대해 말하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했다.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교인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에드워드는 이 해에 수많은 설교를 하면서 몸이 쇠약해졌으나 “땅도 지옥도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커다란 역사입니다.” 하고 고백하며 오순절 부흥과 같은 역사를 일으키게 된다.

 

● 하지만 목회 말년, 1750년 6월 23일 에드워즈는 그가 23년간 사역해 온 자신의 교회로부터 축출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은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재력가의 아이들이 외설적인 책을 읽었는데 그가 이것을 꾸중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에드워드와 교회 평신도 지도자간의 갈등은 신학적인 문제까지 확대되어 큰 분란이 생겼다.

 

에드워드가 목회할 당시는 청교도 2세의 신앙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열정적인 신앙이 식어갔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입교하지 않는 아이들도 성찬에 참석해도 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당시 많은 교회들이 초신자들도 교회에 초청하여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신앙이 없이 성찬식을 받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회심한 세례교인만 주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가르치고 실행하였다. 여기에 반발을 느껴 교인들의 불평이 생겼다. 불평이 생기자 다른 문제에까지 확산되었다. 목회자가 서재에 너무 많이 앉아 있고 심방이 부족하다(하루에 10시간 이상 공부함), 너무 잘산다, 장로들의 자녀들을 책벌한다 등이었다. 이리하여 조나단은 1750년 7월 1일 고별설교를 하고 23년간 시무한 교회를 사임하였다. 결국 교회 정회원 230명이 에드워즈의 사임을 찬성하고 반대자는 오직 23명 뿐이었다.

 

이듬해인 1751년 에드워드는 인디언 마을인 스톡브리지 교회의 청빙을 받고 원주민 선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 언어습득, 풍토병, 인디언 전쟁들, 개인적인 대적자들로부터의 공격, 그리고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한편 한적한 환경 속에서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동안 밀쳐 두었던 글들을 이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유명한 저서 ‘의지의 자유’도 이때 출판되었다.

 

그는 평생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치며 방대한 신앙저술을 하면서도, 그 시대의 복잡한 심리학, 사회학, 철학, 과학적 논쟁들을 연구하고, 거기에 대한 균형 잡힌 신앙인의 자세를 명확히 제시하였다.

 

1758년에 현재 프린스톤 대학교의 전신인 뉴저지대학(당시 학교는 목사양성기관이었음)의 학장으로 청빙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이에 노회가 결정하여 편지를 보내어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건강이 좋지 못하여 저술에만 전력을 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해야 했었다. 학장 겸 교수로 취임하였으나, 당시 신 개발된 천연두 주사를 맞았는데 부작용이 생겨 투병하다가 총장으로 부임한지 1달 반인 3월 중순경에 사망하였다. 1758년 3월 22일, 그의 나이 55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들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오랫동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신비한 연합은 내가 믿은 대로 영적인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오.” 질병도 사인이었으나,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고독한 목회자가 노드햄프턴 교회로부터 입은 큰 상실감과 인디언 마을 스톡브리지의 수고로 말미암아 지쳐 있던 에드워즈를 영원한 안식처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죽음까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기에 평온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의 아내도 6개월 후에 에드워즈의 뒤를 따랐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현재 뉴저지 프린스턴 시내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에드워즈는 30여년간의 무난한 가정 생활을 유지했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한 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에드워즈와 사라 사이에 11명의 자녀가 탄생했으며, 자녀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훈련받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과 약 1시간에 걸친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들에게 자상히 가르쳤다.

 

그가 죽은 지 약 150년이 지난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의 삶을 연구해 본 결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은 모두 873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학총장이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회자와 성직자 100명, 군장성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국가 공무원 80명, 국회의원 5명, 미국 부통령 1명, 그리고 260명의 평범한 신앙인들로 살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