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영 분별

관상기도 비판

은바리라이프 2010. 9. 6. 11:22

관상기도에 대한 비판 (김삼 목사)
  2008/02/28 08:44
아침의 노래      조회 110  추천 0

김삼 목사가 제시하는 관상기도 비판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관상기도 자체가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둘째는 관상기도는 성령의 도움이 아닌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며, 교회보다 개인을 강조하는 이기적인 기도형태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밝히 드러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동양종교의 선/명상/요가 등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1.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관상기도의 특징 하나는 어구를 반복해 되뇌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성경말씀(마6:7a)에 엄격히 위배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한글개역)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새표준역)

"그러나 그대들이 기도할 때는 이교도들처럼 하릴없는 반복 어구를 쓰지 마오."(필자 사역)

우리말 중언부언(重言復言)은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을 의미한다. 중언부언의 사전적 의미를 따르는 기도 형태는 ‘관상기도 상태’로 들어가는 하나의 도입부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살필 때는 국어사전만을 참고해서는 안된다. 원어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주지해야 하고,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중언부언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중언부언 - 이 말의 원어는 '밭타로게세테'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어원 역시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Erasmus), 또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詩)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onomatopoeic word)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중언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호크마주석]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크게 보아 우리말 사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등장한 배후에는 어떤 맥락이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언부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마태복음 마태복음 6장 7절은 산상수훈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팔복으로 시작해서 - 당시의 유대교적 가치관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가르침의 맥락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이해해야 한다.

필자는 산상수훈을 거칠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전반부인 팔복(5:1~12)과 소금과 빛(5:13~16)은 산상수훈의 기조연설이자 대전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론적 의미를 선포한 부분이며 후반부 (5:21~7:27)는 율법과 관습을 재해석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구체적 삶의 모습에 대해 가르치신 부분이다.

따라서 중언부언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잘못된 기도행태를 지적(6:5~8)하셨으며, 다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다(6:9~13)는 흐름 속에서 단어와 구절의 의미를 파악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잘못된 기도행태는 다시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외식하는 자의 기도요 둘째는 이방인의 기도이다. 첫 번째 기도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기도이며 두 번째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기도이다. 왜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에 말을 많이 했을까?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v)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준으로 생각해 무조건 열심히 공을 들이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자신의 욕구를 토설하는 기도를 낳게 된다. 즉 하나님에게 졸라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반복적인 행위를 기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방인의 기도에 대비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v)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중언부언의 기도는 단순히 한 문구만을 되풀이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욕망만을 끊임없이 토설하는 기도, 한국 교회에 만연한 '주여 주시옵소서!', 일명 <막달라 마리아의 기도(‘막 달란 말이야!’)>야 말로 진정한 중언부언형 기도가 아닌가?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사전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것보다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욕심을 반복해서 아뢰는 기도’를 비판해야 마땅할 것이다.

 

2. 성령의 도움이 아닌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며, 교회보다 개인을 강조하는 이기적인 기도이다.

“관상기도는 한마디로 성령의 도움 없이 혼자 신/하느님/하나님과 '합일'하겠다는 시도로 지극히 뉴에이지적이다. 아울러 관상기도 자체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기도다. 전체 교회가 아닌 혼자서 신과 합일하겠다니 말이다.”

예수님은 올바른 기도의 전형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8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조언했다. 즉 사도 바울은 성령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삶 전체를 통해 드리는 기도를 권했다.

이러한 기도를 위해 ‘관상기도’라는 하나의 틀은 대단히 유익하다. 짤막한 문장(성경구절이나 신앙고백, 기도문 등)을 마음 깊이 묵상하고 되뇌는 과정은 성령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언제나 인정하며 하나님의 의지에 나 자신을 순복시키도록 이끌어준다.

이는 공덕(功德)을 쌓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상의 삶에서 짧은 성경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돌보심을 고백하는 행위가 어떻게 성령님의 도움을 배제한 채 ‘신과 합일을 꾀하는 뉴에이지적 시도’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관상기도를 이기적인 기도라고 하며 빈정거리듯 던진 “전체 교회가 아닌 혼자서 신과 합일하겠다니 말이다.”라는 말은 관상기도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사용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영성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채 개인의 행위, 개인의 구원, 개인의 영성에만 집중해온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사용되어야 옳은 말이다.

 

3.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밝히 드러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동양종교의 선/명상/요가 등과 다를 바가 없다.

관상기도는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의식상태의 변환을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음”을 목표로 한다.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밝히 드러난 하나님을 왜 "찾겠다"는 것인지 필자는 사뭇 궁금하다.

이 부분에 이르러 필자는 기독교 영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 김삼 목사와 필자 사이에 깊은 골이 있음을 새삼 통감했다. 하나님은 날로 새로우신 분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할수록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뵙게 되고, 깊은 기도와 묵상 속에서 익숙한 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된다.

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아가야 하는가? 아니, 왜 성경을 통해 계시해주신 당신의 모습을 인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만나야만 하는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유한한 인식 체계와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금 본 영화 한 편의 감동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조차 불가능 한 것이 우리의 한계인데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깊고 넓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여도 하나님을 ‘밝히 깨닫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영성에서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적 영성은 필요불가결하다. 이미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기독교 교리는 어떤 것인지 모두 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에 빠지지 않으려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관상기도는 큰 도움을 준다. 익숙하게 생각했던 한 두 구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반복해 기도함으로,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말씀의 중층적(重層的)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새롭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성령의 임재 가운데, 다시 말해 우리에게 찾아와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이 지점이 타종교의 구도적 영성과 기독교 영성을 구분하는 기점(基點)이 된다.

 

4. 맺으며

물론 여러 유익에도 불구하고 관상기도는 주술적, 초월적 형태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인의 종교성향을 고려한다면 결코 기우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삼 목사가 최고 수준의 기도라고 말한 방언기도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방언기도는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도 방언기도가 존재하며 원시 종교에도 존재한다. 심지어 성령의 역사가 아닌 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언기도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에 관상기도와 방언기도라는 큰 틀로 묶어 일방적으로 비판하거나 추켜세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과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적 상태에 따라 사항별로(case by case)로 구분하여 다르게 보아야 마땅하다. 외형적 형태와 상관없이 어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를 더해줄 수도 있고, 반면 잘못된 기도는 왜곡된 신비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 이 말은 ‘모든게 case by case니 굳이 (관상기도에 대해) 복잡하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비판받고 성경적으로 재검토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신학적 사유의 출발에 선입견이 작용해서는 안된다. 관상기도는 무조건 잘못된 것, 혹은 관상기도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신학적 노선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처음부터 선입견을 가지고 달려들면 마태복음 6:7을 “그러나 그대들이 기도할 때는 이교도들처럼 하릴없는 반복 어구를 쓰지 마오.”라고 오역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