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파(超敎派)'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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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교파(超敎派)'는 교파를 초월하여 어떤 일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실로 기독교에는 많은 교파가 존재한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의 소위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 성공회, 루터교 등의 넓은 의미의 기독교 안에는 너무나 많은 교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모든 기독교의 공동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이니, 이 하나의 신앙으로 뭉치자는 말은 어떤 면에서는 백번 옳은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역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서 초교파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할에 있어서는 초교파적 활동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점점 그 활동이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로 밀려 들어오면, 중심(中心)없는 신앙고백이 될 수 있고 향방(向方)없는 달음질이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왜 그렇게 많은 교파들로 분파되었는가. 교리(敎理) 때문이다. 교리라는 것은 수많은 가치관들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논쟁을 통해 다듬어진 신앙고백의 정수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그 차이가 바로 교파들을 만들어낸 이유이고, 근본적으로 그 양상은 선하다고 본다. 결국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몸부림이 아니던가.
각 교회는 여전히 그러한 신앙고백을 유지하고, 교리를 지켜내야 한다. 우리 주님은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마16:16,18... 허긴 이 구절마저도 교파간에 해석을 달리한다. ㅡㅡ;;). 교회가 '사랑'을 말하지만, 때로는 사랑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없는 진리의 문제가 항상 교회 안에는 꿈틀거린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가 과연 좋은 교회일까?
초교파적 활동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오면, 점점 교리는 약해지고 신앙고백은 포괄적으로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이슈화하여 성경적(?) 방안을 내어놓는 활동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그 영향력이 교회 안에 미치면 딱딱한 교리는 이제 그만 허물자는 유혹이 기승을 부린다.
불우이웃을 돕고, 공명정대한 선거를 치르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자는 등의 활동에는 초교파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고, 불교도들과도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 마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교통질서를 지키자는데, 어떤 종교가 반대하겠으며 어떤 교파가 반대를 하겠는가. 하지만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서로 관계하지 말아야 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성장'이니, '영성훈련'이니 하는 이슈들은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유혹이다. (그나마 열심인) 대학생들은 여러 선교단체 활동을 통해 영성훈련을 받게 되고 그 비전을 교회에서 실현하기를 꿈꾼다. (그나마 열심인) 목회자들은 여러 교회성장 세미나를 통해 도전을 받게 되고 그 감동을 교회에서 실현하기를 꿈꾼다. 전자의 경우 교회에서 '반항'으로 표현되며, 후자의 경우 '강요'로 표현될 뿐...
영성훈련과 교회성장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대부분 그러한 이슈를 초교파적 선교/연구단체에서 선점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노력이나 열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역할이 있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정작 각 교회 내에서는 그런 발전적 연구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인력이 부족하다고? 그렇다면 최소한 공동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파나 교단 내에서의 활동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그 역시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 같다.
모두 좋자고, 잘하자고 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폭넓은(?) 활동을 의심하고 불신해야 하는 고리를 끊기란 쉽지 않다. 교회 내에서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대화는 적어지고 인식의 차이는 벌어지고, 그러면서도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밖의 '초교파' 단체들에게 몸을 기대이게 되고... 악순환이다. 밖에서 가지고 들어온 영성훈련 프로그램이나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교회 안에서 성공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들을 가지고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느니 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갖는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은 일관성에 있다. 신앙과 행동의 일치...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만의 특징이 아닐 것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앙체계를 갈망하는 모든 교회는 신행일치(信行一致)를 말한다. 그리고 각 교파의 교리가 조금씩 다르고 그 강조점이 다르므로 삶으로 나타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양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서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이 연구되고, 교회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교의적 뿌리가 없는 '짬뽕'프로그램의 유행으로 교회를 멍들게 할 것이다. 왜냐면... 아무거나 받아들이는 포용력 속에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이라는 함정이 있게 마련이니까.
오늘날 성장 위주의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자기부정을 익숙하도록 만들었다. 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은 요즘 너무나 보편적이다. 개인으로 보면 철학의 부재이고, 교회로 보면 신학의 부재가 그 원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역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서 초교파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할에 있어서는 초교파적 활동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점점 그 활동이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로 밀려 들어오면, 중심(中心)없는 신앙고백이 될 수 있고 향방(向方)없는 달음질이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왜 그렇게 많은 교파들로 분파되었는가. 교리(敎理) 때문이다. 교리라는 것은 수많은 가치관들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논쟁을 통해 다듬어진 신앙고백의 정수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그 차이가 바로 교파들을 만들어낸 이유이고, 근본적으로 그 양상은 선하다고 본다. 결국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몸부림이 아니던가.
각 교회는 여전히 그러한 신앙고백을 유지하고, 교리를 지켜내야 한다. 우리 주님은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마16:16,18... 허긴 이 구절마저도 교파간에 해석을 달리한다. ㅡㅡ;;). 교회가 '사랑'을 말하지만, 때로는 사랑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없는 진리의 문제가 항상 교회 안에는 꿈틀거린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가 과연 좋은 교회일까?
초교파적 활동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오면, 점점 교리는 약해지고 신앙고백은 포괄적으로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이슈화하여 성경적(?) 방안을 내어놓는 활동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그 영향력이 교회 안에 미치면 딱딱한 교리는 이제 그만 허물자는 유혹이 기승을 부린다.
불우이웃을 돕고, 공명정대한 선거를 치르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자는 등의 활동에는 초교파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고, 불교도들과도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 마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교통질서를 지키자는데, 어떤 종교가 반대하겠으며 어떤 교파가 반대를 하겠는가. 하지만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서로 관계하지 말아야 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성장'이니, '영성훈련'이니 하는 이슈들은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유혹이다. (그나마 열심인) 대학생들은 여러 선교단체 활동을 통해 영성훈련을 받게 되고 그 비전을 교회에서 실현하기를 꿈꾼다. (그나마 열심인) 목회자들은 여러 교회성장 세미나를 통해 도전을 받게 되고 그 감동을 교회에서 실현하기를 꿈꾼다. 전자의 경우 교회에서 '반항'으로 표현되며, 후자의 경우 '강요'로 표현될 뿐...
영성훈련과 교회성장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대부분 그러한 이슈를 초교파적 선교/연구단체에서 선점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노력이나 열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역할이 있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정작 각 교회 내에서는 그런 발전적 연구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인력이 부족하다고? 그렇다면 최소한 공동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파나 교단 내에서의 활동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그 역시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 같다.
모두 좋자고, 잘하자고 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폭넓은(?) 활동을 의심하고 불신해야 하는 고리를 끊기란 쉽지 않다. 교회 내에서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대화는 적어지고 인식의 차이는 벌어지고, 그러면서도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밖의 '초교파' 단체들에게 몸을 기대이게 되고... 악순환이다. 밖에서 가지고 들어온 영성훈련 프로그램이나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교회 안에서 성공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들을 가지고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느니 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갖는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은 일관성에 있다. 신앙과 행동의 일치...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만의 특징이 아닐 것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앙체계를 갈망하는 모든 교회는 신행일치(信行一致)를 말한다. 그리고 각 교파의 교리가 조금씩 다르고 그 강조점이 다르므로 삶으로 나타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양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서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이 연구되고, 교회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교의적 뿌리가 없는 '짬뽕'프로그램의 유행으로 교회를 멍들게 할 것이다. 왜냐면... 아무거나 받아들이는 포용력 속에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이라는 함정이 있게 마련이니까.
오늘날 성장 위주의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자기부정을 익숙하도록 만들었다. 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은 요즘 너무나 보편적이다. 개인으로 보면 철학의 부재이고, 교회로 보면 신학의 부재가 그 원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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