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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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20 그 무렵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 서서 말하기를 (함께 모인 사람의 수는 약 일백이십 명이더라.) “형제 여러분, 예수를 붙잡은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이 성경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도다. 그가 우리와 함께 계수되었으며 이 사역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느니라. 그런데 이 자가 실로 불의의 대가로 밭을 샀는데 그 후에 곤두박이로 떨어져서 몸의 중간이 터져 그의 모든 창자가 쏟아져 나왔느니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어 그 밭을 그들의 말로 ‘아켈다마’라고 하니, 즉 ‘피의 밭’이라는 뜻이라. 이는 시편에 기록되기를 ‘그의 처소를 황폐케 하시고 그 곳에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시며, 그의 감독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음이라.
이 구절은 사역의 요약된 역사와 유다의 죽음이다. 시몬 베드로가 이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는 시편 109편을 성취시키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9:28의 잃어버린 “법정 추정 상속인”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여기서 “나를 따르는 너희들”에는 유다가 포함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다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가 제시한 자격요건들로 볼 때(행 1:21,22),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 함께 모인 사람의 수는 약 일백이십 명이더라』(5절). 이것은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기록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9:26은 어떤 종류의 “연합”이 지역교회와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문제들은 성령께서 자세하게 다루시지 않았으며, 그 판단은 지역 교회의 회중에게 맡겨진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초대교회에서 행해진 관행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항들에 관한 성경적 판례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 이것이 바티칸과 추기경 대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뒤엎고 “전통”에 호소할 때 빠져나가는 구멍이지만,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역사의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버스사역, 출석, 재적 캠페인, 주일학교, 구제사업, 보육, 교회게시판, 이사회 등은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한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동의 원칙들이 성경적임을 증명할 만한 구절들을 찾아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들에 대해서 반드시 준수되어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어떤 사도나 교부나 목사나 교사, 복음전도자가 행하는 관행이나 전통이 성경의 명백한 구절에 반대될 때는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120명에 관해서는 중요한 참조 구절이 있다. 역대하 5장에서 솔로몬이 주의 전을 완성한 후 주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가져올 때 나팔을 불고 “한 소리”로 성전을 채우도록 찬양했던 사람들은 120명의 제사장들이었다. 사도행전 1:14의 본문에서 “하나가 되어 기도와 간구에 전념했던” 사람들도 120명이었다.
A.T. 로버트슨은 그의 헬라어 학생들에게 “120이라는 수에는 특별한 중요성이 없다.”고 말한다. 클락과 복음주의 주석은 그 수에 대해서, 유대인의 시 공의회에 120명의 사람들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사사로운 해석에 불과하다. 이 수에 대해 성경이 해석하는 것은 역대하 5:12-14과 연관된다. 역대하 5:12은 주께서 “성전을 채우시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의 수뿐만 아니라, 10절에서 제시한 것 같이 호렙에서 온 언약궤가 십계명과 함께 거기에 있었음을 언급해 주고 있다. 십계명을 줄 때 살해된 사람과 같은 수의 사람이 사도행전 2장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학자들은 놓칠 수 있단 말인가(출 32장)!
『형제 여러분, ...이 성경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도다』(16절).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시편 109:6-8이 성취된 것이다. 시편 109편은 열 네 구절에 걸쳐 “한 사람”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1장의 성취를 혹 시편 69:27-28의 참고구절에 맞추려 할지 모르나, 시편 69편은 한 사람 이상에 목표가 맞춰져 있으며, 유다가 아니라(롬 11:9,10 참고)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다(22절).
『... 예수를 붙잡은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16절).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살전 2:13)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알 것이다(요 6:70,71). 요한복음 17:12, 데살로니가후서 2:2-6, 계시록 9:11과 <짐승의 표>(1960, 1970)를 참조하라. <복음주의 주석>은 유다를 “하나님의 신성의 참예자”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거듭난 구성원”이었다고 말하는데, 만약 유다가 거듭났다면,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적 수술을 받은 거듭난 마귀인 것이다(요 6:70, 골 2:11).
『그가...이 사역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느니라』(17절). 유다가 구원받았다거나 거듭났다거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했다는 등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다의 예를 드는 것은 너무도 근거가 희박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같이 헤아리심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분이 죄인이 되는가? 주 예수께서는 유다를 사역에 보내신 후(마 10장)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요 6:70)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사탄(요 13:27)의 “비밀요원”이었다. 그는 결코 “중생”하지 않았다.
『곤두박이로 떨어져서 몸의 중간이 터져』(18절). 마태복음 27:5에서 유다는 목매어 죽었다고 말한다. 이 두 차이점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사사롭게 해석하는데, 아담 클락은 마태복음 27:5의 『목매어 죽으니』를 “질식했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그는 사도행전 1:18의 『그의 모든 창자가 쏟아져 나왔느니라』는 말을 “상황을 설명하는 정교한 표현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래드 박사는 『곤두박이로 떨어져서』가 “부풀어 올라”로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로버트슨 박사는 『곤두박이로』가 “병으로 누워서”로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진술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마태복음 27:5에서 유다는 목을 매달았는데, 27:51에는 그 땅에 큰 지진이 있었다고 말한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질 정도의 지진이면 유다를 떨어뜨려 그의 배를 가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감독의 직분』(bishoprick, 20절)은 “office”에 대한 옛날 영어로, 감독에게 책임으로 주어지는 임무를 포함한다(딤후 4:1-8). 그것은 현재 감독교회(Episcopalian)나 카톨릭 주교 관할하에 있는 지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할 때처럼 그렇게 물질적인 용어는 아니다. 시편 109:8은 이 “사도”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독자는 시편 69:8,21,25에 있는 메시야의 참조 구절을 관찰해야 한다. 유다의 진짜 모습을 아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묘사를 에스겔 21:25-27에 있는 위대한 구절들과 비교하는 것을 놓칠 수 없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1:21-26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신 모든 기간 동안 즉 요한의 침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떠나 들려올라 가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더불어 지냈던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 우리와 함께 주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더라. 그리하여 그들이 두 사람을 세우니 한 사람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토라고도 부르는 요셉이요, 또 한 사람은 맛디아더라. 그들이 기도하며 말하기를 “주여,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께서 이 둘 중에 주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보여 주시어 이 사역과 사도의 직분의 한 부분을 담당케 하소서. 유다는 범죄함으로 이로부터 떨어져 자기 거처로 갔나이다.”라고 한 후에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맛디아에게 떨어진지라, 그가 열 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더라.
21-22절은 유다를 대신할 자격 요건을 제시해 준다. 그는 마태복음 3장에서부터 사도행전 1:10까지 사도들을 따르던 사람이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5-12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22절)을 봤어야만 한다. 여기에 두 사람이 선정되는데(23절), “안식일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바사바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이름의 맛디아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캠벨 모건과 얼과 카터는(<복음주의 주석> p.22) 사도들이 제비를 뽑은 것은 실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울이 선정될 때까지 기다렸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범하는 실수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이 사역과 사도의 직분』(25절)에는 바울이 자격미달임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바울은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도 받지 않았으며 사도행전 1:10 이후로 수 년이 지날 때까지는 다른 열 한 사도들과 함께 지내지도 않았다.
성령께서 바울을 사도라고 불렀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것은 적절한 생각이 아니다. “바나바”도 사도라고 불리지만(행 14:14) 분명히 “열 둘” 중의 하나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쿠프로 출신의 레위인이었으며(행 4:36),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로 사도의 사역을 함께하지도 않았다. 그가 사도라고 불렸다고 해서 아무도 바나바를 유다를 대신하는 사도로 생각하지 않는다.
유다를 대신할 사도가 바울이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는 야고보가 죽었을 때(행 12:1-3) 야고보를 대신할 사람을 뽑지 않았다는 데 있다(행 12:1-3). 그러므로 유다가 변절한 후에도, 고정된 12라는 수(마 19:28)는 대체되거나 교환되는 일 없이 고정된 수여야만 한다. 바울이 열 둘이라는 수를 채우기 위해 열 두 번째 사도가 되어야 했다면 야고보가 죽었을 때 왜 다른 사람을 뽑거나 바울을 뽑아 열 둘이라는 숫자를 채우지 않았는가? 바울은 사도행전 12장이 되기 훨씬 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행 9:22,30). 그렇다면 야고보가 살해되었을 때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다는 것이 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바나바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사도행전 12장 훨씬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하시고 설교하도록 그를 부르시기 전에 13명의 사도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사도행전 4:36에서도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린저가 “열 둘”이외에도 몇 사람이 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지적했을 때 그는 어느 정도의 진리를 본 셈이다. 벌린저는 그 이외의 사도들로 안드로니코와 유니아(롬 16:7), 아폴로(고전 4:6,9), 소스테네(고전 1:1; 4:9), 실라와 디모데(살전 1:1) 등을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많은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등장한다 해도, 이스라엘과 관련된 열 두 명의 사도들은 고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 지상에 사도가 열 두 명으로 항상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죽은 후에도 원래의 열 두 명 이외에 더 첨가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유다는 마귀였기에 제외되었을 뿐이고, 베드로가 말한 자격요건에 맞는 사람으로 열 둘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맛디아가 선출되었던 것이다.
『자기 거처로 갔나이다』(25절). 여기서도 역시 많은 주석가들이 “자기 거처”라는 말에 걸려 넘어진다.
1. 클락은 다섯가지 설명을 하고서는 “자기 거처”를 맛디아에게 적용시킨다.
2. 빈센트(Word Studies, 1권, p.447)는 그것이 게헨나라고 말한다(노울링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3. A.T.로버트슨은 기술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고 “대담하고 시각적인 묘사”라고만 말하고 있다.
4. 더멜로우는 “그것은 아마도 지옥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단지 과격하게 지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자비롭게도 자제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5. 제미에슨, 포셋, 브라운은 그것을 무엇인가에 대한 “부드러운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결코 말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지옥을 부드럽게 표현하면서 설교와 글에서 자유주의가 되어가는 현대의 보수주의자들과도 연관된 말이다.]
6. 래드 박사(Ibid., p.1126)도 유다가 간 곳을 언급하지 않는다.
7. F.F.브루스는, 사도들은 유다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유다의 운명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학자들의 견해를 떠나 “자기 거처”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살펴보자.
1. 『자기 거처』(his own place)는 라반과 압살롬에게 사용된 표현이다. “고향”(his place, 창 31:55), “압살롬의 장소”(Absalom's place, 삼하 18:18). 압살롬은 신구약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적그리스도의 유형 중의 하나이고, 라반에게서 되돌아오는 야곱은 A.D. 1948-1978년의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2. 유다는 마귀였으며(요 6:70,71) 그의 이름은 “멸망의 아들”(요 17:12)이다. “멸망의 아들”은 “멸망”으로 들어간다(계 17:8). 왜냐하면 그곳이 “자기 거처”이기 때문이다(계 9:11).
3. “자기 거처”라는 말은 단순히 그가 들어 가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그 장소를 소유했다. 그는 그곳의 왕이었다(계 9:11). 베드로가 “자기 거처”(his OWN place)라고 말했을 때 그는 마태복음 16:22나 요한복음 13:8에서 했던 것만큼이나 강하고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사도행전 1:25은 익살도 아니며 완곡한 표현도 아니다. 학자들은 연합하여 어려운 말들을 함으로써 진리를 가려 버리고 있으나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말해 주고 있다. 유다는 지금 구렁에 있다(계 9:11). 사탄이 성경에서 두 번째로 가장 비중있는 인물, 즉 멸망의 아들의 몸으로 들어올 때, 그의 영은 그 구렁으로부터 올라올 것이다(계 17:8).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 관한 주제로 그 본문을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늘은 준비된 사람들(벧전 1:4)을 위한 준비된 장소(요 14:3)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옥도 준비된 사람들을 위한(롬 2:5,8) 준비된 장소(마 25:41)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다가 간 “자기 거처”는 끝없는 구렁을 언급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의” 처소로 간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는 “자신의 처소”는 원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마 25:41) 위해 준비된 곳이지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거기서 있게 될 것이다.
『그가 열 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더라』(26절). “열 한 사도”라는 말은 특히 사도행전 2:14의 “열 한”과 연결될 때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한다. “열 한”이란 수는 위에 언급한 120이라는 수만큼이나 중요하다. 창세기 32:22와 창세기 37:9은 이 “열 한”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는 구절인데, 그 수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완성하는 “내 슬픔의 아들”(창 35:18)이 모자라는 상태이다. 베냐민이 없이는 지파는 불완전하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인 바울이 등장한다(빌 3:5)! 바울은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고전 15:8). 이것이 그가 사도행전 1장에서 12번째 사도의 목적에 맞지 않는 이유이다. 그는 교회시대 끝에 태어나는(계 12:4,5) “사내 아이”(사 66:7-9)의 유형이다. 그러므로 “열 둘”에서 “열 하나”(행 1:26)로 줄어든 것은 12지파가 교회시대가 끝날 때까지는(히 8:8,9) 그들의 메시야의 인도를 받는 상태로 회복되지 못하리라는 암시적인 예언이다.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2월 (통권 45 호) page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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