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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4) 느헤미야-성벽 재건 공사 주도한 느헤미야

은바리라이프 2010. 4. 28. 10:59

[유대인 이야기] (34) 느헤미야

성벽 재건 공사 주도한 느헤미야
공동체의 결집과 안정 이루어내
발행일 : 2009-11-01 [제2670호, 15면]

-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안정을 찾기 위해선 유대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 보호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림은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보는 느헤미야를 묘사한 구스타프 도레의 작품.
부푼 기대를 안고 다시 찾아온 예루살렘은 꿈속에서 그리던 그런 낙원이 아니었다. 돌아온 자들과 밥그릇 나눌 생각이 없었던 토착 유대인들의 박해, 이민족들의 침략, 사마리아인들의 냉대 등으로 인해 많은 귀향 유대인들이 고통 속에 지내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빌론에 사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결국 바빌론으로의 유턴 현상이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빌론으로 다시 돌아간 인물 중에 ‘하나니’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니는 친척 느헤미야를 찾아가 예루살렘의 처참한 상황을 전한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에 탔습니다.”(느헤 1,3)

느헤미야는 주저앉아 통곡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서 모든 고통을 종식시킬 것을 다짐한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을 따르는 시종이었다(느헤 1,11 참조). 시종이라고 해서 단순한 종의 신분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왕의 독살이 빈번히 일어났다. 당연히 왕의 술을 담당한 시종은 왕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 중의 측근이어야 했다. 페르시아 왕에게 있어서 유대인 느헤미야는 없어서는 안되는 소위 왼팔이었던 셈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갈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느헤미야가 왕 앞에 가서 아뢴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느헤 2,5)

왕은 느헤미야에게 유대 총독의 지위를 내리고, 예루살렘행을 허락했다. 왕은 주판알을 튕겼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혼란은 페르시아 왕실로서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유대인들의 귀향을 통해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려 했지만, 정작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선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인물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가 느헤미야였다. 특히 느헤미야의 청렴함은 왕의 결정을 더욱 쉽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12년간 급여를 전혀 받지 않았으며, 자신의 종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직접 투입할 정도로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느헤 5,14-19 참조).

호위 병사들까지 내어준 왕의 배려로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여장을 풀 여유도 없이 곧바로 성벽 재건 사업에 뛰어든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도시가 안정을 찾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치안 확립이 중요하다. 백성들은 정권이 가족의 안전을 지켜 주고 재물을 보호해 준다고 믿을 때만 충성을 바친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안정을 찾기 위해선 유대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 보호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사업은 곧 암초를 만났다. 성벽 재건은 유대인들의 무장을 의미했다. 성벽이 재건될 경우 유대인 정착촌을 대상으로 하는 약탈과 방화 및 노예 사냥은 어려워진다. 결국 아라비아인들과 암몬인들을 비롯해 예루살렘 및 인근 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던 사람들이 성전복구 사업을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나섰다(느헤 3,34-35 참조).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을 둘러보는 작업도 밤에 비밀리에 행해야 했다(느헤 2,11-16 참조). 성벽 재건 작업도 무장을 한 상태에서 진행할 정도였다. 짐을 져서 나르는 이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무기를 잡았다. 성벽을 쌓는 이들은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성벽을 쌓았다. 비상사태 발생을 신속히 알리기 위해 느헤미야의 옆에는 늘 나팔수가 동행했다.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의 어려움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 형제들도, 내 수하 젊은이들도 나를 따르는 경비병들도, (성벽 공사기간동안) 그 누구도 옷을 벗거나 오른손에서 무기를 놓는 일이 없었다.”(느헤 4,17) 그렇게 작업은 매일 “동이 틀 때부터 별이 나올 때까지”(느헤 4,15) 진행됐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52일 만에 드디어 성벽이 완성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민족 멸망의 조짐은 대형 토목 건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가 그랬고, 만리장성을 쌓은 진나라가 그랬다.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즈음해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개혁의 압력을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이후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국력 쇠퇴를 경험했고, 결국 나라까지 잃었다.

하지만 느헤미야 주도로 이뤄진 기원전 440년경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는 완전히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쇠퇴가 아니라 융성이다. 성벽 재건 공사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유대 민족의 도약을 가져오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페르시아 궁정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하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법의 학자, 에즈라 사제’(에즈 7,12)에 의해 율법이 공포됐으며(느헤 8,1-12 참조), 초막절 등 각종 민족 절기가 지켜지기 시작했고(느헤 8,13-16 참조), 종교 제의도 틀을 갖추었다(느헤 12,44-47 참조). 다양한 개혁을 통해 공동체의 안정도 이뤄졌다(느헤 13,4-31 참조).

귀향 유대인들은 비로소 튼튼한 성벽 안에서 다리 뻗고, 편히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100~200여 년의 공간은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빈 공간으로 남는다. 여기서 ‘빈 공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큰 재난과 재앙이 없었다는 의미다.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허락했으며, 예루살렘 재건도 적극 지원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향인 가나안 땅을 비롯해 페르시아 제국 어느 곳에서든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의 친구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 변화의 물결은 페르시아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알렉산더 대왕(BC 356~BC 323)의 4~5만 정예 병력이 가나안 땅 입구인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15만 대군을 격파한 것이 기원전 333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