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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시에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다섯 선교사의 이야기를 그린 <창끝>(The End of the Spear)이 개봉되었는데 다섯 명 중 한 명인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역을 맡은 연기자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뒤집어졌고, 보수적인 문화 평론가들은 둘로 나뉘었다. <월드>(World)지의 유진 베이스(Eugene Veith) 같은 평론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화를 평가할 때, 배우의 스크린 밖 사생활이 얼마나 도덕적인지에 기준을 두지 말고 영화의 예술적 우수성에 근거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평론가들은 불매 운동을 주장했다. 기독교와 문화를 주제로 한 중요한 논쟁들이 수백 개의 웹사이트에서 일어났다. 무엇이 영화를 ‘기독교적’ 영화로 만드는가? 모든 배우가 그리스도인이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종류의 죄인은 가능하고, 어떤 종류의 죄인은 불가능한가? 그리스도인이 주류 문화를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하려면 영적인 타협은 불가피한 것인가?
그리스도인들과 문화의 관계는 교회가 최근 맞닥뜨린 특별한 위기이다. 복음주의권이 점점 증가하는 포스트 기독교적(post-Christian) 사회 질서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몇 가지 입장이 분명하게 나뉜다. 몇몇 사람은 총체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는 직접적인 시도를 일절 거부하면서 다시금 전통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스스로 교회다워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다른 몇몇 이들은 문화에는 적대적이지만, 과감한 행동, 때로는 정치적인 것까지 포함한 행동으로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한 번에 한 사람씩 변화시킨다면 결국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새로운 문화에 매료된 나머지, 교회가 새롭게 바뀌어 교회와 문화의 적대적 관계가 수정되기를 바란다. 이들이 문화적 계약(cultural engagement)이란 이름으로 복음주의적 교리가 가지는 독특한 차별성을 변화, 적용시키는 반면, ‘한 번에 한 사람씩’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교리를 경시하고 경험을 강조한다. 이런 차이들이 많은 신학적 논쟁에 불을 지피는 이슈다. 하지만 변화의 필요에 공감하는 사람들조차도 문화에 다가가기 위해 교리의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전략들 가운데 하나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독교 전통과 정계에 진출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효과적인 복음 전도 모두가 필요하다. 교회는 항상 교회를 둘러싼 문화에 응답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왔다. 그러나 모든 접근은 과도할 경우 해롭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강점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마법의 총알인 양 생각하기 때문에 특정한 전략만을 앞세워 접근한다. 나는 그런 마법의 총알이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렇다고 이런 전략들을 그냥 하나로 합치는 것 또한 충분하지 않다. 대신 우리에게는 새로운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도시 안의 도시
내가 제안하는 첫 번째 전략은 단순하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에 장기 거주해야 한다. 역사가들은 기원후 300년까지 로마 제국의 시골 인구는 대부분 이교도였던 반면, 도시 인구는 대부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실은, 이교도(pagan)라는 단어는 원래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을 의미했다. 이 단어가 비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이 시대부터였다.)
이런 경향은 기원후 1000년까지 첫 천년기 동안 유럽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도시 인구는 대부분 그리스도인이었고, 시골 인구는 대체로 이교도였다. 두 시대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도시 인구가 그리스도인이면, 인구의 대다수가 이교도라 할지라도 사회는 기독교적인 흐름으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도시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문화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경향은 도시에서 일어나 사회의 나머지 부분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대도시의 문화 중심지에 살면서, 예술계, 재계, 학계, 출판계,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우리 문화에 과도한 영향력을 미쳐 왔다. 나는 뉴욕 시민으로 17년간 사역해 오면서 나의 동료들과 지인들이 어떻게 미국의 타지역 사람들에게 영화나 활자, 예술이나 사업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고 계속해서 깜짝 깜짝 놀랐다.
나는 돈 많고 유명한 ‘엘리트 집안 출신의 엘리트’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엘리트’를 말하는 것이다. MTV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최고 경영진들이 아니라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하고 MTV의 모든 부서에서 일을 시작하는 젊고 패기 있는 친구들이다. 도시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문화 속에 표현해 낸 가치들을 보게 된다.
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아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필요하다.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에서 목회했던 고(故)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도시에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견해를 동의하고 받아들인다. 그분은 자신의 책 「두 도시: 두 사랑」(Two Cities: Two Loves)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도시 인구의 비율만큼은 도시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회에서 많은 영향력을 미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일단 도시에 살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역동적인 대안 문화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도시에서 개인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종류의 공동체로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산 위에 세운 동네”라고 말씀하셨다(마 5:14-16). 그리스도인들은 성(性)과 돈과 권력을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시 안의 대안 도시, 문화 속의 대안 문화로 부름받았다.
성(性)과 관련하여, 대안 도시는 세속 사회가 성을 우상화하는 것과 전통 사회가 성을 두려워하는 것 모두를 피한다. 대안 도시는 구성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곳이며 순결이 통하는 공동체다. 그 안에서 구성원들은 혼외 성관계는 절제하고 결혼 관계 안에서 정절을 지키라는 복음의 기준을 배운다. 돈과 관련해서는, 기독교 대안 문화는 시간과 돈과 관계와 주거 공간을 철저하게 그리고 후하게 나누어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가난한 이들과 이민자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권력과 관련해서는, 기독교 공동체는 소외된 인종과 계층들이 서로 권력을 공유하고 관계를 세워 나가게 하는 데 헌신한다. 이런 현상의 구체적인 증거로, 일반 회중뿐 아니라 리더십 그룹에서도 다민족으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모아 일반 문화와 대조되는 대안 문화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시 전체의 유익에 철저히 헌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전체 사회, 특별히 가난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희생적으로 섬기고 행동해야만 한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구속의 최종 목적은 물질적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개인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권력과 분쟁과 이기심에 기초한 세상이 아닌 정의와 평화와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의 막을 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행하는 것을 믿건 믿지 않건 간에, 말과 행동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와 이웃의 평화와 안전과 정의와 번영을 위해 일한다. 예레미야 29장 7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은 그 도시에서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도시를 사랑하고, 그 도시의 평안(그 도시의 경제적, 사회적, 영적 번영)을 위해 일하는 것까지를 의미했다. 하나님의 도시에 속한 시민은 이 땅에 있는 도시의 가장 합당한 시민들이다.
이것이 세상 방식에 우리 자신을 더럽히거나 세상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문화적 계약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권력을 얻기 위해 도시의 중심으로 나아간다면, 그들은 결코 깊고 지속적인, 그리고 일반 사회가 받아들일 만한 문화적 영향력과 변화를 절대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도시에 살아야 한다. 진정한 힘을 얻으려면 우리의 힘을 잃어버려야만 한다. 상대방의 신앙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희생적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결코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매력적인 종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전략(우리가 이것을 전략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어느 문화에서건 그리스도인의 어떤 행동은 불쾌감을 주고, 공격받을 수 있지만, 반면에 어떤 행동은 비그리스도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거나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너희를…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마 5:16도 보라). 중동 지역에서 기독교의 성 윤리는 통한다. 그러나 “다른 뺨도 돌려대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뉴욕 시에서 기독교의 성 윤리는 끔찍하게 퇴보하는 것이지만 용서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적 가르침은 환영받는다. 심지어 기독교가 주류 문화에 여러 방식으로 반대한다 해도 모든 비기독교 문화에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부를 인식하고 그것에 매료될 만큼의 충분한 일반 은총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를 공공연히 비난해서도 안 되고 순응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오해받고 때때로 공격받을 것을 예상하면서 공동선을 위해 희생적으로 섬겨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적대자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으신 분의 발걸음을 따라 걸어야만 한다.
일에 대한 세계관
기독교가 공동선을 위한 대안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믿음과 일을 통합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흔히 문화는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관습, 태도, 가치, 확신 등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것들은 다음의 ‘큰 질문들’을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답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생명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생명이 허락된 동안 우리 시간을 투자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 없이 살아가거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큰 질문들에 대한 모든 대답이 문화를 형성한다.
위의 질문들에 오늘날 직장이 제시하는 해답은 기독교의 해답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자신의 믿음을 감추고 주변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동료들에게 성경 구절을 들려주는 정도에 그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일에 관한 우리의 세계관을 믿음에 근거한 행동을 통해 보여주면서 기독교의 해답을 전달하고 납득시키는 방법을 잘 모른다. 또한 예술계, 재계, 정계, 언론계, 연예계, 학계 등에서 일하는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복음으로 영향을 미치게 하려면 그들을 어떻게 준비시켜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도적이고 창조적이며 탁월한 비즈니스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예술 분야에서 환희와 소망과 진리를 구체화하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시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맡은 일을 탁월하게 그리고 구별된 태도로 해 나가면서 문화적 중심지에 다수가 거주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지금 우리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사회는 지혜를 가치 있게 여긴 반면, 유대 사회는 영적인 능력을 추구했다(고전 1:22-25). 그리스와 유대 문화를 지배하는 희망은 바울이 설교를 통해 우상이라고 지적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을 위한 참된 ‘하나님의 지혜’이자 유대인들을 위한 참된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들의 문화는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그려 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문화적 소망을 어떻게 성취하는지를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매료되게 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