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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과 자유) 신(神)의 예지(豫知)와 인간의 부자유(不自由)

은바리라이프 2009. 11. 10. 23:17

신(神)의 예지(豫知)와 인간의 부자유(不自由)

I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자신이 아들에게 살해된다는 신탁(信託)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내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난 후 신탁의 실현을 두려워한 그는 아이의 발 뒤꿈치에 못을 박아 산 속에 버렸다. 그 아이는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발견되어 오이디푸스(발이 부은자)라는 이름으로 성장하였다. 어느날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자기에게 무서운 신탁,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는다」는 신탁이 내린 사실을 안 오이디푸스는 자기의 운명을 두려워하여 코린토스를 떠나는데, 도중에 세갈래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길다툼을 하다가 그만 그를 죽이게 된다. 자신이 죽인 노인이 바로 친아버지 라이오스였으나 그것도 모른채 테베로 간 오이디푸스는 괴물 스핑크스를 처치하고 그 공로로 왕위에 오른 뒤 왕비를 아내로 삼아서 아이까지 얻는다. 그 후 테베에 무서운 전염병이 퍼지고 그것이 선왕을 죽인 범인을 처벌하지 않은데서 온 것이라는 신탁이 있자 거국적으로 범인 색출에 나선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왕이 하수인이라고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언자를 데리고 온 집정관인 처남을 의심, 서로 다툼을 벌인다. 중재에 나선 왕비는 선왕을 죽인 것은 세 갈래 길의 도둑이었다고 하나 왕은 점점 불안해진다. 그때 코린토스에서 사신이 와 부왕의 죽음을 알린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 없어지게 되어 안심을 하면서 다른 한편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 두려워 귀국을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이 테베 출신이고 그가 길에서 죽인 사람이 아버지 라이오스이며, 지금의 아내는 어머니 이오카스테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어 자결하고 오이디푸스도 자신의 두 눈을 도려내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고대 그리이스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의 소재가 된 오이디푸스의 이 전설은 인간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너무나 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서 동서고금을 통하여 인구에 회자되어왔다. 이 전설처럼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운명이 희극적으로든 비극적으로든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들은 2400여년 전에 아테네에서 상연된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관람하면서 단장(斷腸)의 비애에 망연자실 손수건을 적시면서, 한편으로는 몸서리칠 정도로 준엄한 운명의 힘 앞에 다시 한번 자신들의 삶과 그 의미를 되돌아 봤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오이디푸스 처럼 비장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들도 누구나 한 번쯤 운명의 힘에 대하여 막연하게 혹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과연 운명이란게 있는 것일까? 운명이 있다면 피할 수 있는가 없는가?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의 운명은 인간이 만드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일상생활중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불현듯 떠오른다.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든지, 하는 일마다 실패한다든지, 혹은 하는 일 마다 이상하게 잘 된다든지, 복권에 당첨되어 횡재하게 되었다든지, 우연히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데 그가 곧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든지 등등 운명을 생각케 하는 일들은 도처에 있다. 그러나 대개 운명이나 숙명에 대한 생각은 고통이나 위협 혹은 사별의 경험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좌절하면서 운명이란 것을 수용하든지 혹은 그 앞에 굴복하게 된다. 그리고 운명의 이러한 힘을 지속적으로 믿는 사람을 우리는 운명론자라고 부른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나타난 운명론(fatalism)의 특징은 한마디로 <운명은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이다. 오이디푸스는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성장해온 코린토스를 떠난 것이다. 그 곳을 떠나지 않으면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이 내린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의 일련의 행동들을 통하여 그는 운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면서 그는 운명의 존재를 뼈져리게 느꼈을 것이며 자신을 미리 결정된 곳으로 데려다 놓은 운명의 전지전능 앞에 경탄을 금치 못했는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의 미래가 운명에 의해 결정되었고 또 이것을 그가 믿는다고 해서 오이디푸스의 입장이 철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결정론”(determinism)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정론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입장이다. 즉 어떤 사건은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선행조건(원인)이 주어지면 반드시 일어난다(결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운명론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운명론적인 이유는 그가 무엇을 하기로 작정했든 관계없이 그는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이디푸스는 무슨 일이 생기든지 어떤 특정한 일(아버지를 죽임)이 기어코 일어난다고 스스로 믿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는 코린토스를 떠나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II

많은 사람들은 운명론이 정서적인 측면에서 굉장한 호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합리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편견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철학자들 중엔, 그것도 소수의 위대한 철학자들 중엔 운명론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논리를 제공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한 바 있다.

1. 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예컨대 내일 해전(海戰)이 일어나든가 내일 해전이 일어 나지 않든가이다.

2. 어떤 사람은 내일 해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긍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일 해전이 일어난다 는 것을 부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3. 한 사람의 진술은 사실과 일치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진술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 다.

4. 그런데 이럴 경우 (1) 해전이 내일 일어날 것이라는 것, 즉 그 해전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 성은 지금 전혀 없다는 것은 이미 참이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면 (2) 해전이 내일 일어나 지 않을 것이라는 것, 즉 해전이 내일 일어날 가능성이 지금 전혀 없다는 것은 이미 참이 다.

5. 그렇다면 (1), (2)의 경우 어떤 일도, 현재에나 미래에나,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으 며, 두 가지 이외의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이루 어지며,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Aristotle, De Interpretatione)

소위 배중률(the Law of Excluded Middle)을 이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논증은 형식적으로 타당하다. (배중률은 동일률, 모순률, 충족이유율과 함께 모든 사고의 기본 전제이다.) 이 논증과 유사한 골격을 유지하면서 오늘 주제에 알맞게 ‘전지전능한 존재’와 ‘자유의지’의 개념을 내용상으로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논증이 나온다.

1.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어떤 존재(그를 ‘단군’이라고 부르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2. 내가 이번 토요일 아침에 목욕탕에 갈 것이라는 것이 옳거나 내가 이번 토요일 아침에 목 욕탕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게 옳다.

3. 만일 내가 이번 토요일 아침에 목욕하러 갈 것이라는게 옳다면,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 기 때문에) 단군은 내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걸 지금 알고 있다.

4. 그리고 만일 이번 토요일 아침에 목욕하러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옳다면, 단군은 내가 목욕하러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지금 알고 있다.

5. 따라서 어느 경우든지 단군은 이번 토요일 아침에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지금 알고 있다.

6. 그런데 나의 미래의 행동 어느 것에 관해서도 이와 똑같은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

7. 그러므로 단군은 나의 모든 미래의 행동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지금 알고 있다.

8. 그렇다면 나의 미래의 행동은 모두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나는 내가 이번 토요일 아침에 목욕하러 갈 것인지 가지 않을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9. 그러므로 만일 무엇이든 다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사람들은 결코 자유의지를 갖지 못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무엇이든지 다 알 수 있는(全知) 존재, 즉 단군은 바로 그 능력 때문에 미래의 일을 보는데 있어 실수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즉 단군이 내가 이번 토요일에 목욕탕에 갈 것임을 오늘 이미 알고 있다면 내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나는 결국 토요일에 목욕을 가고 말 것이다. 설사 목욕가는 행위를 내가 선택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해도 말이다. 이번 토요일에 내가 목욕갈 것을 단군이 지금 안다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사실은 사실일 뿐이지 사실이 사실 아닌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목욕가는 길은 변경될 수가 없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오늘(목요일)과 토요일 사이의 어느 시점, 예컨대 금요일에 내가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럴 경우 단군이 아는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버릴 능력이 내게 생겨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과거의 사실을 바꿀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즉 목요일(t1)에 단군이 안 사실을 금요일(t2)에 바꾼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전지한 존재인 단군은 그가 투시하는 미래에 대하여 결코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III

이상의 간단한 설명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된다: 운명론의 논리에 따르면 전지한 존재의 예지(豫知)와 인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경우 전지한 신탁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자기가 선택한 행동을 했다고, 즉 자유의지를 행사했다고.

이러한 반론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이 문제를 우리는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다행히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6)에게서 이에 대한 전문적인 견해를 구할 수 있다:

신(神)의 현재와 인간의 현재를 정당하게 비교하여 본다면 너희들이 시간적 현재안의 사물을 보듯이 신은 당신의 영원한 현재안에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神의 예지는 사물의 본성이나 고유성을 변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안에 이루어질 것들을 그런 것들로서 자기의 현재 안에 바라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은 사물의 판단에 있어 혼란되지 않으며 다만 정신의 일별(一瞥)로써 미래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과 필연성을 띠지 않고 이루어질 것을 식별하는 것이다...... 신에 있어서는 그 사물들은 현재의 것이지만 시간적 조건하에서는 미래의 것들이다...... 네가 만일 신이 보고 있는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은 안될 수 없는 것이요, 또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물론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같은 미래의 사정 이라도 그것이 신의 인식과 관련될 때는 필연이고, 그것이 사물의 자기 본질 안에서 고찰될 때는 구속이 없이 온전히 자유로운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철학의 위안」제 5권)

보에티우스는 여기에서 신과 인간에 있어 시간의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신은 영원한 존재이므로 시간을 초월해 있고, 그러한 신의 예지는 시간 내에서 인간에 의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헤쳐나갈 때 얻어지는 미래라는 개념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직관하는 신의 전지앞에 놓여진 영원한 현재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신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필연적이지만 (인간을 포함하여)시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자유롭다고 봄으로써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식의 자유개념이 성립된다하여도 운명론의 근본명제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이 방에 들어오고 있는 어떤 사람을 내가 지켜보고 있다 하여도 그 사람의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을 보고서 어느 자리에 앉을지 미리 알 수는 있다. 신의 예지가 있다면 이와 비슷한 것이리라 본다. 보에티우스 자신도 곧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섭리의 현재적 진리는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할 것인지 또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다 직관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신의 예지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네가 네 자유의지로 여러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 현재하는 눈의 직관은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시말해 운명론의 기본 전제가 맞다면 자유라는 것은 그 고유한 실체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 한 나는 자유로울 수 없듯, 신의 전지한 눈이 나의 자유로운 행동을 보고 있다면 -내가 그 눈초리를 의식하든 말든- 근본적으로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신의 예지 혹은 전지 차원에서는 시간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고,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운명론이 가능하다. 시간성이 배제되었다는 말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제(時制)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신에게 있어서는 오직 하나뿐인 <영원한 현재>인데, 인간이 관점(perspective)을 갖고 보면 과거․현재․미래가 생겨나게 된다. 인간이 <영원한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보에티우스에게 있어 시간은 운명론 문제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IV

우리들은 누구나 오직 하나만의 과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과거는 마치 일기를 쓰듯이 모두 글로써 자세히 기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글로 기술된 과거의 순서를 (혹은 과거를 기술한 수많은 문장들의 배열 순서를)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는 단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오직 하나의 미래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미래도 과거처럼 변경할 수 없는 사건들의 배열을 가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처럼 미래도 말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술과 미래에 대한 기술을 합하면 바로 일생을 적은 전기(傳記)가 탄생된다. 이 전기 속에 기술된 나의 삶과 그 삶 속에 이루어지고 이루어질 모든 일들은 오직 하나의 전체로서 연결된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이 전체의 일부분을, 누구는 짧게 누구는 길게, 살았을 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좀더 분명하게 보이는가 덜 분명하게 보이는가 하는 것 뿐이다. 일반적으로 미래는 불확실하고 과거는 확실하다 하지만 꼭 그런것도 아니다. 예컨대 나는 낯선 이방인의 과거를 전혀 모를 수 있다. 그에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그에게 고유한, 그만의 과거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역사가들도 과거의 일부분 밖에는 모른다.) 이에 비해 나는 내일 해가 뜬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이 도시의 교통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을, 사람이 모여사는 한 살인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점 등은 분명히 알 수 잇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사실 정도 차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따라서 반드시 과거는 닫혀 있고 미래는 반드시 열려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운명론의 논리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는 똑같이 고정되어 있다. 우리가 미래를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이리저리 바꿀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누구도 과거의 일을 바꿀 수 없고 피할 수 없듯이 미래의 일도 바꿀 수 없고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