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스크랩] "요나 1:1-17"/ 작성: 서지훈

은바리라이프 2009. 10. 9. 14:45

2009/10/09(목) "요나 1:1-17"/ 작성: 서지훈

2009년 10월 9일 (금)
<본문> 욘1:1-17 / 172장(새183)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요나는 호세아나 아모스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초창기에는 그들처럼 북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열왕기서를 보면 요나가 여로보암 2세의 통치로인한 북이스라엘의 번영을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옛 솔로몬 때의 영토를 회복하고(열하14:25),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여로보암 2세의 손으로 그 나라를 구원하실 것 등을 예언했으니(열하14:26,27), 요나는 분명 당시 사람들로부터 인기 있는 선지자였을 것입니다. 잘 될 것이라 하고,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본인도 흐뭇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된 사명지는 북이스라엘의 적대국이라 할 수 있는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받으면서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집니다.
 요나서 전체의 흐름을 보면 요나의 사명은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니느웨의 심판보다는 니느웨의 회복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의 예언을 듣고 니느웨의 백성들이 다 돌이켜 회개할 뿐 아니라 왕도 그의 보좌에서 내려와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을 선포합니다.
 결과적으로 니느웨는 요나의 선포를 통해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음’(1절)에도 불구하고 회복과 부흥을 경험 합니다. 니느웨의 심판은 나훔선지자를 통해 150년 후에나 이루어집니다. 요나 덕분에 심판이 150년이 유보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는 곳 마다 회복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고 또 부흥을 일으키는 요나는 행복한 사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과 요나 사이에는 큰 긴장과 대립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신학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학에는 구원은 히브리인들인 그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니느웨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회개와 회복이 일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런 요나에게 임하여 니느웨로 가라고 합니다. 얼굴을 굳히고 하나님을 쳐다보던 요나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하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서 니느웨와 반대편인 다시스로 갑니다.
3절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한다’는 말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이 말은 도망하면 하나님이 못 찾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어느 곳이나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또“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라고 고백한 조상 다윗의 시편을 알고 있습니다.
 그도 역시 9절에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여호와’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 없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도망을 갑니다. 도망갈 수 없음을 아는데 말이죠.
 이 말은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일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선지자 안하면 안하지 당신 말 따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긴장감 감도는 대치국면이 또 한번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해 선지자직을 던지는 것을 배를 타고 바다로 가는 것으로 의사표시한 요나에게, 하나님이 그 바다 위에 큰 바람을 던지시는 것으로(4절, 히브리 원어로 직역하면 '바다위에 내리시매'는‘바다 위에 던지시매'가 됩니다.)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선장을 통해서 배의 밑바닥에서 깊이 잠자고 있는 요나를 깨우십니다.
그의 입을 통해 깊은 침륜에 빠져든 요나의 영혼을 흔들어 대십니다.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6절)
선지자로서의 소명의식을 망각한 요나를 하나님은 이방선장을 선지자 삼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에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요나에게 이번에는 배에 탄 무리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신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잊고 있는지 무리를 통해 질문하심으로써 요나를 다시 한번 각성시키려고 하십니다. 
 8절 “무리가 그에게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게 속하였느냐”
 이방인의 이 질문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 재앙이 너의 불순종 때문인 것을 알지 않느냐, 너의 생업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이고, 또 너희 민족은 나의 복이 모든 민족에게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복의 근원, 복의 통로라는 것을 잊었느냐'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요나는 답을 생각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 되돌아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9절에서는 자신의 생업 즉, 소명이 선지자임을 쏙 빼고 대답합니다. 여전히 여호와의 낯을 피해가려는 요나의 굳은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자신의 신학에 근거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답변입니다. 

 또 어떻게 해야 이 바다가 잔잔해지겠느냐는 물음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는 이방 선장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음에도 회개를 통하여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과 대치하는 요나의 굳을 대로 굳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12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자신을 돌이켜 회개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지자 요나는, 끝끝내 그것을 거부하고 뛰노는 바다에 자신을 던져달라고 함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선지자직을 내던진 요나, 그런 요나의 가는 길을 막기 위해 바다위에 큰 바람을 던지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강퍅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이번에는 바다위에 자신을 던짐으로 죽음으로까지 하나님을 반역하는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뜻과 거슬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선지자의 사명을 내던지는 것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바다에 내던지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노골적 반항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의 강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를 대합니다.

 바다 위에 던지신 큰 바람은 요나를 향한 징계나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바다 위로 던지신 것은 그분의 마음이셨고, 사랑이었습니다.
바다 위에 큰 바람을 던지셔서 죽음으로 가는 배역의 길을 막으시려 했던 하나님은, 이번에는 바다 밑에 큰 물고기를 준비해 두심으로 그의 죽음을 막으셨습니다.
 마지막 17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는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큰 바람을 던지신 것도, 큰 물고기를 준비하신 것도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기대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요나의 '던지는' 행위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행위는 요나를 껴안는 것이었습니다.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의 삼일 밤낮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의 삼일 밤낮이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요나의 변화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니느웨의 변화와 회복에 앞서 하나님은 요나의 변화가, 그의 회복이 필요하신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망가지도록 내던졌으면 내던졌지,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꺾고 하나님에게로 자신을 던지기는 죽어도 싫은 것이 우리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우리가 요나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 속에는 이런 요나의 완고함과 아집이 숨어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 생각과 의지를 꺾고 자신을 하나님께로 던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 되지 않고, 이 세상이 우리 신앙인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로다 할 수 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요나에게 기회를 주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처럼, 동일한 인내와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나의 아집과 완고함을 내려놓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자신의 완고함과 아집 때문에 하나님을 낯을 피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요나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요나에게 베푸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제는 나를 하나님께로 던짐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출처 : 마머세평
글쓴이 : 마머세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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