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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죄 죽임의 교리 / 김남준 목사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15:38

죄죽임의 교리, 은혜살림의 교리

•설교: 김남준 목사

- 죄죽임이란? The Doctrine of Motification of Sin


- The Doctrine of Vivication of Grace 은혜 살림의 교리.

우리 안에 있는 살아있는 영적인 삶을 일구어가게 하는 은혜를 말함.

- 깊은 신학적인 혼란. 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쉽게 뒤로 물러갈까? 그렇게 감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놀라운 말씀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쉽게 허물어져 버릴까?
아마 은혜를 잘 받지 못했거나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
그러나 문제는 실제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에 그 문제를 입증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면도 많다.

진정 중요한 점은 얼마나 그가 신앙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는가, 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실 때 인격전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옛 삶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굉장히 잘못됐다는 것에 대해서 깊은 인식이 들어온다.

또 하나는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급격하게 타오르는 열정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은 변화의 큰 증거 중에 하나가 된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깊이 만지고 지나가실때는 하나님의 마음의 부어주심이 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는 일.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는가? 5장 참조)

그리고 그 삶의 일관성이 생겼는가? 생각이나 판단이 모든 면에 있어서 일관성이 생긴다. 인생과 교회와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각”이 생긴다.
ex)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다가 통곡하시는 장면 -->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짐으로 인해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해당이 안되는 사람이 쉽게 물러가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는 문제인데, 실제로 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깊이 만났지만 뒤로 쉽게 물러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중간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깊이 만났는가의 문제이다는 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렸었다. 그러던 중 존 라일의 “거룩”이라는 책에서 제임스 패커가 서문을 썼는데, 패커는 승리는 자연스러운 것이나 자아로 인해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는 말을 듣고 자기 안의 불순종의 요소를 철저히 파헤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영적인 상태는 개선되지 못했다. 라일의 죄죽임의 교리는 존 오웬의 교리에서 원판을 따온 것이다. 이러한 논설을 읽으면서 “나는 짐승이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웬의 책은 16권의 전집을 남겼는데, 번역하면 300여페이지의 책 50여권의 책이 될 것이다. 오웬의 고민은 또한 칼빈이 먼저 한 고민이기도 하였다.

죄죽임의 교리가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무리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큰 경험을 했다고 해도, 끊임없이 죄를 파악하고 죄를 철저하게 죽여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뒤로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웬은 칼빈보다 훨씬 치밀하다. 칼빈은 논리적이고 신학적이지만 오웬은 성경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깊이 파고들었다. 죄죽임의 교리를 다루면서 사람들의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이렇게 응답할 것입니다... ) 지성적으로 무릎을 꿇리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기 힘들다.

죄와 싸우는 것에 대해서 슬프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너무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웬은 한사람이 회개하였다는 것이 무엇인가? 죄가 죽어야만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아직까지 매력을 느끼고 있다면 참된 회개가 일어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네가 범죄한 죄를 떠올릴때 극도의 혐오감이 솟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오웬의 관점에서 보면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니라 죄가 처리되지 않고 쌓인 것이다. 우리가 회개했는데 생명이 없는 이유는?

1) 회개했는데 용서하셨다는 인침이 약하다. 회개했을 때 단지 죄의식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서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기 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회개한 후에 가슴이 텅빈 상태로 나타날 수 있다. 회개의 강도가 낮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더 잘못된 사고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도 그 죄에 대해서 아파하지만 문제는 그 죄는 용서를 받았지만 죄의 영향이 계속 살아서 그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옛날에 지은 그 죄 하나를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기 양심의 얘기이고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어떤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가운데 우후죽순과 같이 다른 죄가 자라난다. 죄들이 서로 합력하여 악을 이룬다(?).

2) 이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시작된다. 회개하였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포기하게 된다. 오래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못한다. 포기한 후 급격하게 마음이 굳어진다. 그 후에는 “지성”도 설복을 당하게 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칼빈이나 오웬은 옛날의 그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죄 하나만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영적인 상태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는 옛날에 지은 특정한 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시선을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그 사람 내면의 세계속에서 성장해서 그의 영적인 성장을 억압하고 있는 죄의 문제이며, 이 문제는 ‘정욕’으로 나타난다. 은혜와 죄의 공통점이 있다면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은혜가 자라지 않으면 죄가 자라난다. 우리 안에 있는 은혜를 살려내야 한다.

강력하게 하나님이 부흥을 부어주시는 것은 주권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것을 살리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은혜살림의 교리). 교회에서 은혜의 불씨는 받았지만 세상에 나가서 그 불씨를 꺼트려버리는 것이다.

▶ 강의

성화교리의 토대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음미하는 것으로서 시작해야 한다.

연합의 의미: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면 지난 죄를 용서해주시는데, 단지 용서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 연합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고,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오게 되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인은 성화로부터 생겨나는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의롭다하심을 입은 존재라는 것이다.

위대한 것은 우리는 그분의 영광에 관하여서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행하지 않도록 하나님께만 성별되고 바쳐진 존재이다. 우리의 육체를 따라서 이것은 연약함의 문제가 아니다. 목표를 정하는 것은 연약함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잊어버리도록 하자.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죄된 인간을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구속하신 것이다. 그 찬양은 변화된 삶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하지 않는다. 신자의 행복에 관한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은 그들과 하나되고자 하는 그분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 세상에서의 관심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 되어야 한다. 스펄젼의 삶의 목표는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았다.

칼빈은 최선의 선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중요성에 대해서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와 접붙인바 되었으며 그분과 합하여 졌기 때문에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은 우리가 장성하여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연합의 과정에서 죄죽임이 일어나게 된다.

1) 무엇보다도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2)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반대파들은 본질과의 연합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에 대한 예증으로 결혼관계를 들고 있다.

3) 연합을 결성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게으른 사색으로서는 신비한 연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4)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확립된다. 믿음은 아교와 같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며,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칼빈은 믿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강조점은 오직 믿음이었고, 칼빈의 강조점은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목표가 일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진정한 목표는 칭의를 받고 주님을 닮아 거룩하게 변해가는 것, 그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도 거룩한 목표가 있는가?

칭의를 우리를 은혜가운데 의로운 사람으로 받으시는 용납함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즉각적인 전가로 이루어진다. 칭의는 즉각적이고 도덕적인 완전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점점 더 철저히 본받음으로써 죄에 대한 본성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마지막때 우리의 육신의 장막을 벗기시고 그분께 인도할때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칭의라고 하는 즉각적인 행동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칭의에 의해서는 원죄가 해결되지만 자범죄는 성화의 교리로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고 해서 그 죄의 영향이 그친 것은 아니다. 용서하신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죄죽임의 교리는 사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화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깨끗게 되는 방법은 두가지인데, 그리스도께서 보혈로 단번에 이루신 것인데, 우리의 죄를 날마다 쳐 부수므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성령으로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이다.

은혜는 죄를 죽이고, 죄는 은혜를 죽인다. 칭의는 용서와 관련되고, 성화는 회개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신자들로 하여금 칭의때문만이 아니라 성화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기를 배우게 하라.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기쁨,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즐거움 때문에 살 수 있도록.

회개와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획득된다. 삶의 실제적인 거룩함은 의의 전가와 나누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도 드려지셨다. 용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에 있어서도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드려지셨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의존한다. 믿음은 경건한 내면의 마음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를 성화에 참여케 하면서 죄와 능히 싸우게 하고 점점 더 성화에 이르게 한다. 죄를 완전히 멸할 때까지 우리안에 시작된 죄의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가야 한다.

성화와 칭의 모두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에서 나온다. 더욱이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험에 있어서는 이 둘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는 구원 그 자체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거나 취사선택의 문제이다. 이러한 성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바로 ‘죄죽임의 교리’가 적용된다.

회개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에는 그분의 죽으심과 사심이 함께 역사하게 된다. 죄를 죽이는 것과 은혜를 살리는 것은 칭의에 이어 따라오는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죄죽임의 대상은 육신이다. 칼빈은, 육신은 성령의 검에 의하여 죽었다. 신자는 중생을 통해 죄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고서도 믿기 전보다 더 비참해 질 수 있는가?
비유) 전쟁을 통해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빨치산들이 역사하여 점점 그 세력이 커진다.

죄죽임은 은혜살림이 동반되어야 한다. 은혜살림이란 하나님의 성령께서 살아계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 죄죽임의 방법 3가지

1) 자기부인: 자기부인은 이성, 지성으로 시작한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의 요구에로 돌이키게 할 수 있다. 육신의 이성에 안녕을 고하고, 지성의 욕심에 재갈을 물리라.
칼빈에 의하면, 자기부인은 소극적인 개념과 적극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자기사랑을 버리지 아니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자신에 대한 병적인 평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2) 십자가를 짐: 누구든지 주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신자의 외면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관심이 있다.
죄죽이는 삶을 살때에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묵상하여야 한다. 현재적인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없이는 죄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없다.
죄가 십자가의 은혜에 의해 억압당해야 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십자가 짐이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고난론’이 아니다. 칼빈은 고난가운데 즐거움을 보여주도록 요구한다.

3) 내세에 대한 묵상: 어떠한 종류의 환난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 끝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죽임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육신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그 방법으로는 --> 이 세상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깊이 자각해야 한다. 현재의 삶에 대한 경멸이 있어야 한다. 내세를 사모해야 한다.
내세에 대한 묵상은 이 세상의 불의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질문1>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칼빈이 오히려 이원론을 깨고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부분은 전분야에 속한다.
정직하게 편견없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말라고 한다.

<질문2> 완전주의? (웨슬리안)
죄죽임은 완전주의는 아니다. 죄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도록 하는 상태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죄의 기원이 이 세상과의 접촉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죄죽임은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죄를 죽이는 이유는 죄많은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려고 하는 것이다.




출처 : 건지는교회
글쓴이 : 얼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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