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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신학사 개관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15:32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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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신학](OT theology)에 대한 정의나, 그리고 그 적절한 주제설정의 결론은 얻지 못한 채1그 내용구성과 그 방법을 달리한 수많은 역저들이 [구약신학]이라는 표제 아래 출간 소개되었다. 사실, 구약성서가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를 체계화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욱이 교의학적 서술방법에 따라 구약신학을 체계화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실로, 구약성서는, 어떤 일정한 도식 속에 그려 넣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는 어디까지나 경전으로 읽어야 하고 또한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과제 앞에 우리는 부단히 직면하고 있다. 구약에 대한 신학적 논구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과제를 안고 몸부림쳐 온 역사라 하겠다.

1. 18세기 이전

구약신학의 역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성서비평학이 나오기 이전,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구약신학이란 단지 기독교 교의신학(Christian dogmatic theology)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의학자들의 결론을 전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 신학은 기독교 교리를 변호하기 위한 그 증빙자료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시녀 노릇만을 하였다 하겠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성서적 권위문제에 대해서는 비록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은총 사이의 극한적 대립관계를 확신하였던 초대교회의 신도들도2 그 문자영감(the verbal inspiration)에 대한 확신 때문에 신약성서와 동일한 성서적 권위를 부여하였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세계의 이러한 사상에 충격적 영향을 준 것은 소위 말시온(Marcion ; A.D. 2세기경)의 사상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마르시오니즘(Marcionism)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사상은3 변증적이고 호교론적인 초대교부들로부터 극렬한 반동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4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구약에서 계시된 신과 신약에서 계시된 신 사이에는 그 본질적인 면에서나 그 윤리적인 특성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 구약의 신은 물질세계만을 관계하는 데미이저(demiurge)의 신이기 때문에 영적 세계를 관계하는 신약의 신보다는 저급한 신이라는 것이며, 사랑의 윤리를 강조한 신약의 신에 비하면 융통성이 없는 율법과 심판의 신인 구약의 신은 훨씬 열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成肉)이나 신약의 구약적 배경, 구약의 기독교적 경전성 등을 부인하고 신약에서 유대교적 요소를 제거하려 하였다.5 그러나 이러한 말시온주의의 위험 때문에 초대교회의 성서학자들(교부들)은 지나칠 정도로 호교론적이고 교리주의적인 성서해석으로 치우치게 되었는데6 그들이 사용한 성서해석법은 대체로 우의적 해석(allegorical method), 문자주의적 해석(literalistic and grammatical method), 그리고 유형론적이고도 예표론적인(typological and prefigurative methods) 해석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구약성서를 기독인의 경전으로서, 그리고 신의 계시와 인간 구원이 증언되고 있는 성서로서 충분하고도 절대적인 책이라는 확신을 기초한 해석들이었다.

그러나, 중세교회 시대에서는 초대 교부들이 가진 "그리스도 예표의 한 교본"이라는 입장과는 달리 구약을 어디까지나 중세교회의 "교회지상주의의 교리"(dogmas of medieval ecclesiasticism)를 증명하는 증빙전(prooftext)으로서 이용하였다. 실로, 이 시대는 구약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서 전체가 교회 만능주의의 교리를 변호하는 목적과 수단으로 사용되고 이용당하였던 "성서신학의 암흑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M.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은 "성서해석이란 교황의 특권이다"는 중세교회의 관념을 뒤집고 그 절대적 권위를 교황으로부터 성서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성서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가 성서 각 책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그 수리점(數理點)"이라는 데 철저하였기 때문에 구약성서란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느 정도 지시하고 있느냐 하는 데 따라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의 구약 주석들은 비록 역사적 연구의 방법을 중요시하긴 하였으나 구약성서 안에 계시된 신계시의 발전과정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칼빈(1509-1564)의 경우는, 성서계시의 발전을 인정하였고 구약과 신약 사이를 밀접히 연결시켜서 이 둘은 "율법과 복음의 선포"라는 "하나"의 통일된 섭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성격지었다. 비록 칼빈은 구약보다는 신약이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루터와 견해를 같이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신·구약을 "하나의 계시의 책"으로 보는 점에서는 철저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점은 현대 고등비평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싹은 보덴스타인(R. Bodenstein, 1480-1541)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비록 본격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16∼17C에서부터 성서비평학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분명히 여기서 우리는 성서계시에 대한 이해의 발전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성서계시의 성격규명을 구약 신학적 입장에서 처음으로 천명한 자로는 이름있는 히브리 언어학자인 코케이어스(Johannes Cocceius, 1603-166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648년에 펴낸 책 "신의 계약과 약속에 관한 최고의 교리"(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Restament Dei)는 소위 "계약신학"(the covenant theology)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란 타락 이전이나 이후나 간에 본질상 계약적인 것이라 보고 이 "계약"을 "자연계약"(foedus naturale)과 "은총계약"(foedus graitae)으로 구분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연계약이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진 계약으로서 이 자연계약이 그리스도의 수육(受肉)의 사건을 통하여 완성된 것이 이른바 은총계약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에 다다르기 위하여 코케이어스는 유형론적 성서해석법(typology)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는데 그 결과, 그는 구약이란 교회주의적 교리를 지지해주는 "증빙자료의 저장소"(a Repository of proof texts)에 불과하다는 관념을 깨뜨려 버렸던 것이다. 이는 실로, 중세교권주의의 시녀들의 "헤어렘"(Harem)으로부터 구약신학의 엑소두스를 시도한 첫번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로 인하여 구약은 신약과 함께 합법적인 성서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기독교 신앙을 직접 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자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독일 루터교회 내에 일고 있었던 경건주의자들의 "경건운동"으로부터는 성서연구의 선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건운동의 움직임은 17C 말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이와 같은 개인주의적인 경건에 대한 강조는 성서를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각도에서만 보게 하지 아니하고 신학적인 각도에서 보도록 하는 하나의 추진력이 되었다 하겠다.

2. 18세기에서부터 19세기 역사주의학풍에 이르기까지

18C에 들어서면서부터 성서학은 본격적인 성서비평학의 형태로 나타났다. 대체로 본격적인 구약문서비평, 문학비평은 이 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중세교권주의의 집요한 방해를 제거하고 자유로운 성서연구의 길을 모색해 준 것은 분명히 유럽의 합리주의(rationalism)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합리주의에 힘입은 중세 교리주의의 탈피와 함께 "교의신학과 성서신학 사이의 구별"이 공적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교의신학과 성서신학 사이의 구별을 획기적으로 선언한 학문적인 발표가 1787년 가블러(Johann Philipp Gabler)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1787년에 "성서신학과 교의학의 적절한 구별에 관한 연설"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가블러는 성서신학과 교의신학을 구별하여 말하기를 교의신학이란 권위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출된 신조들을 어떤 교단이나 교파 또는 어느 특수시대에 맞도록 논리적으로 체계있게 교육하는 것인 반면에 성서신학은 그 성격상 하나의 "역사과학"(historical science)이며  그 근본목적은 신구약의 각 저자들이 거룩한 신적 사건들에 관해서 각각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를 기술하는 하나의 "학문"이라고 구별지었다. 가블러의 강연이 공개된 이래 그가 구별한 바 교의신학과 성서신학 사이의 구별의 정당성은 그 후 학계에 공인된 "자명한 원리"로 받아들여졌다. 실로 그는 성서신학이 그의 연구결과를 단지 교의신학을 보충해 주는 일과 교의신학의 성서적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자료"(dicta probanita)로 제공해 온 일종의 교의신학의 시녀적 예속상태에서 독립되어야 함을 학문적으로 밝혀 준 공적 이외에도 성서신학이란 어떤 성격의 학문이냐는 것을 뚜렷이 했다는 사실과 구약성서신학의 다양한 발전의 길을 터놓았다는 점에서도 그의 공적은 기억할 만하다 하겠다.

가블러와 함께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약신학을 쓴 대표작은 바우어(Bauer)의 "구약신학"(Theologie des ATs, 1796)이라 하겠다. 여기서 바우어는 주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종교사상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는 것을 찾아내는 데 관심하였다. 그는 구약신학이 문제삼을 그 범위를 히브리인의 종교가 시작한 때부터 시작해서 기독교가 창설되기까지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구약신학의 자료도 구약성서에만 국한하지 아니하고 외경(外經)과 유대인의 문서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구약신학의 방법은 성서의 주제들 가운데서 가치비중을 따져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은 끝까지 탐구해 내고 적극적인 가치가 없는 것은 제거해 버리는 방법을 취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성서의 주제들 중의 어떤 것은 그 가치를 멸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가 이러한 방법을 택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신념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그의 신념에 의하면 성서의 참 진리는 성서본문 속에 들어 있는 지역적이고 시대적인 옷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성서의 참 진리는 지역적 시대적 의상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우어는 성서 속에 들어 있는 환상기사, 기적기사, 예언기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는 비합리적이라 해서 거부를 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영향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반응을 보인 자가 저 유명한 드·베테(De Wette, 1780-1849)였다. 그의 학문적 공적은 B.C. 621년 요시아 종교개혁 당시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서가 곧 오늘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명기(12=26장)와 동일한 것이라고 밝힌 점에서 이미 나타났다. 또한 그가 1811년에 내놓았던 "시편주석"도 후일 시편연구의 대가인 궁켈이 사용한 양식비평적 방법이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서신학의 본질적 내용을 역사적으로 통찰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탁월하였는데 비록 그는 아잇히호른(Eichhorn), 겟데스(Geddes) 그리고 파테르(Vater) 등의 합리주의적 방법론에 그의 방법론적 근거를 두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는 순수한 합리주의에 만족하지 아니했다. 이러한 그의 방법론은 1813년에 내놓은 [기독교 교의의 책]이라는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성서의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히 역사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기술하려고만 하지 아니하고 그 역사적 사건들을 합리주의적 원리에 따라 "철학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성서신학과 칸트의 순수비판적인 철학과의 관계를 지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신학의 과제란 순수한 이스라엘적인 것을 찾으려는 데 있지 아니하고 구약성서 속에 나타난 보편타당한 우주적 원리를 철학적으로 연구하려는 데 있었다. 그가 정의를 내린 히브리주의의 근본원리는 "거룩한 의지"(holy will)요 이 거룩한 의지는 곧 도덕의지(moral will)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구약신학을 신론, 천사론, 인간론이라는 형식으로 다루므로 구약의 낡은 양식들로부터 도그마(dogma)를 떼어 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서의 시대사적 사건들을 놓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더욱더 철저한 역사주의적 해석을 도입하므로 역사철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하겠다. 즉 그는 바벨론 포로의 사건을 히브리주의(Hebraism)와 유대주의(Judaism) 사이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보는가 하면, 구약성서는 히브리적 신정사(神政史, history of Hebrew theocracy)를 기록한 책이라고까지 보기도 하였다. 그의 입장은 역사철학적이고도 종교철학적인 면으로 기울어진 감이 많다 하겠다.

구약신학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보려는 경향은 슐라이엘맛하(Schleiermacher, 1768- 1834)와 헤겔(Hegel, 1770-1831)에게서 명백하게 발견된다 하겠다. 특히 헤겔의 변증적이고 진화론적인 방법론의 영향을 받은 성서신학자로서 그 대표적인 사람은, 바트케(Wilhelm Vatke, 1806-1882)였다. 그는 저 유명한 종교사학파의 거장인 벨하우젠(J. Wellhausen)의 신학적 방법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로서 1835년에 구약종교의 진화적 발전에 관한 논문을 내놓았다. 그의 관점은 이러했다. 즉 성서 속에 들어 있는 종교적 윤리적 개념들, 즉 성서의 諸 종교사상들은 역사적으로 발전한다는 "계시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현상은 결코 그 전후관계가 단절되는 그런 발전이 아니라 성서의 諸 종교사상들이 피차간에 서로 내적 관계를 지으면서 발전하는 그런 성격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의 과제는 성서에서 발견되는 여러 종교사상들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더듬어 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더듬어 가는 방법이란 역사적 발생학적(historic-genetic) 방법에 따른 관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관찰을 통하여 얻어지는 문제들을 다룰 때는 그 문제들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사용하되 연구자 자신이 주관적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바트케는 모세가 살던 사회(Mosaic society)는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았고 그 모세 시대의 사회가 하나의 체제를 형성하게 된 것은 율법(torah)을 받아서 생활화한 때부터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명기도 요시아 종교개혁이 이룩해 논 결과들 중의 하나라고 보았고 오경자료들 중에서 가장 후대의 자료들은 포로시대에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히브리인의 종교란 비교적 원시적이고도 비역사적인 원시사회로부터 후대의 유일신 신앙을 가진 종교로 발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헤겔의 변증법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책은 바우어가 쓴 구약계시의 문제에 관한 논문이다. 그는 여기서 종교라는 것을 해석할 때 "신의 자의식"(divine self-consciousness)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종교는 신의 자의식이며 그 자의식은 더 높은 수준에까지 진화하는 과정 속에 있고 그 가장 완숙한 발전은 신의 자의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극복될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란 본질상 하나의 역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신의 계시사(啓示史)는 여러 시대를 거쳐서 발전해 가는 상승 구조(ascending pattern)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영향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저작들은 헹스텐버그(E. W. Hengstenberg), 폰·호프만(J. C. K. von Hofmann), 그리고 웰러(G. F. Oehler) 등의 저작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헹스텐버그는 슐라엘마허(Schleiermacher)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주로 아잇히호른과 드·베테의 고등비평적 방법에 대하여 반발을 보인 사람이다. 그는 성서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확고하게 고집하여 성서계시의 발전을 부정했고 성서 속에 나타낸 하나님의 계시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로 구약성서의 특징을 그 메시야적 예언에 두었고 어디까지나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구약을 이해하였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그의 기독론 연구서인 [구약의 기독론](Christologie des ATs, 3 vols 1829- 1835)에 밝혀져 있다. 그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기원과 그 성장에 관한 현대적 이론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러나 비평적인 학파의 이론에 대해서는 분열을 조장하는 이론이라고 배척해 버렸다. 비록 그는 신구약 성서의 통일을 철저히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후대 성서의 신학자들을 앞질러 갔다고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경의 저작권에 대한 비평과 같은 고등비평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소심한 반박을 제기했기 때문에 당시의 비평적인 분위기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는 소위 영해라는 것을 성서해석의 방법으로 채택했고 텍스트의 역사성 같은 것은 무시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적인 관점들은 자기 서클 밖에서는 대체로 무시를 당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와 동일한 계통에 속하였던 신약성서학자인 폰·호프만을 들 수 있다. 그의 주요관심과 성서학 연구의 목적은 성서의 영감성과 성서의 권위를 정당화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서의 영감성과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교리적으로 진술하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헤겔의 방법론인 역사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약성서를 어디까지나 <구원사>(redemtive history)라고 하는 관점에서 관찰하였고 역사와 예언을 밀접히 결합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최종 목적지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가 말하는 구원사(Heilsgeschichte)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incarnation)을 그 최종목적지로 하는 역사적 진행과정으로 구성된 역사였다.

웰러(G. F. Oehler)의 입장은 비록 보수적인 신학자이기는 하였어도 구약신학의 과제란 어디까지나 구약 속에 담긴 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밝히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1845년에 [구약신학 서설](Prolegonmena zur Theologie des ATs, 1845)을 저술해 내었고 그가 죽은 후(1876년에 죽음) 1873년에 [구약신학](Theologie des ATs)이 출판되었다. 그의 구약신학에는 그러한 그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는데, 그의 구약신학은 출간되자 말자 곧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해석해 온 구약해석법을 배척하고 역사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로 가는 하나의 예비단계이며 동시에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의 성육(成肉)과 구원의 빛에서 비로소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역사의 최종 목적지는 그리스도요 또한 그의 성육이라는 것이다. 또한 구약성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화육시키는 그 역사적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그의 구약신학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세상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세상에 자기 자신을 점진적으로 나타내신 그 계시의 역사를 논증하는 일종의 "역사신학"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엄격한 역사주의적 해석방법의 입장에서 그리스도 및 기독교를 계시사의 그 궁극적 도달점이라고 단정했다. 이러한 방법에는 주관주의적 해석방법이 따르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적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알렉산드리아 학파 이래 유행된 성서해석은 완강히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부응하여 구약신학 연구에 공헌한 또 하나의 역저는 디스텔(L. Diestel)의 [기독교 교회에 있어서의 구약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구약신학에 대한 연구방법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 연구방법을 적절히 종합하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즉, 그 첫째는 순수한 <역사문화적 배경>(historic-cultural background)을 고찰하므로 중동(근동)의 배경과 이스라엘을 엄격히 대립시키는 방법이었다. 그에 의하면 중동의 배경은 히브리 종교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불공평한 평가를 내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둘째는 히브리 종교의 영적 성장의 본질과 그 정도를 평가하기 위하여 종교철학을 응용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매우 주관주의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셋째로는 이스라엘 종교의 영원한 진리는 구약 속에 표현된 구원사의 빛에 비추어 연구되어야 한다는 구원사적 입장에서 구약신학을 연구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디스텔의 방법론은 이러한 세 가지 방법을 종합한 것인데 그의 결론은, 하나님의 계시가 가장 완전하게 나타난 곳은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활동은 전적으로 인간 역사 안에서 발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19C의 구약성서 연구가들은 벨하우젠의 저작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변증법적이고도 진화론적인 이론에 사로 잡혀 있었다. 구약 종교사상의 진화론적 발달에 관한 그의 <발달설>(The Development Hypothesis)이론은 히브리 종교사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구약신학에도 적용되었다. 벨하우젠(1844-1918)은 보수주의적이며 스콜라주의적인 태도를 취한 그의 스승 에발트(H. Ewald)(1805-1875)의 입장을 내어버리고 구약에 대한 순순한 역사적 연구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의 <발달가설>의 이론은 1878년에 내놓은 [이스라엘 역사](Geschichte Israels)와 5년 후 수정 보완해서 내놓은 [이스라엘 역사 서설](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s)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구약성서관과 구약연구 방법론은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의거한 역사비평적인 방법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가 P문서의 최고대설 이론을 뒤집고 P문서 최후대설을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구약의 종교사상은 그 역사적 발전과정을 따라 저급한 원시종교에서부터 제도화한 고급종교로 발전해 간다는 변증법적이고도 진화론적인 이론을 따라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문서가 보여주는 사상은 종교의 원시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고도로 제도화한 사상적 배경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된 제도는 이스라엘 역사상 포로 이후의 시대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구약신학의 과제를 이스라엘 종교사를 다른 나라의 종교사와 비교하면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하였고 또한 제도화하였는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벨하우젠은 이스라엘 종교사 연구가 곧 구약신학의 연구라는 새로운 공식을 세운 셈이다. 즉 그는 구약신학의 의미를 따로 인정하지 하니 하고 구약신학은 곧 이스라엘 종교사학이며 구약은 이스라엘 종교사 연구의 역사자료집의 구실밖에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구약의 경전적 가치는 그에게서 전적으로 배척되었다 하겠다. 그러나 역사이해가 곧 사상이해라는 견해나 이스라엘 종교의 의식이나 제도에 대한 이해가 곧 그 종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된다는 견해, 그리고 모든 종교사상은 반드시 진화하는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경향은 19C를 석권했다 하겠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서 찬반의 반응을 보인 구약신학자들이 그의 학파 자체 내에서 나타났다. 예컨대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e Schule)의 주류를 따르는 자들로서 리임(Eduard Riehm)과 딜만(August Dillmann)의 구약신학은 종교사학파의 입장에서 만족치 아니하고 새로운 입장에서 다룬 것들이다.

리임(Eduard Riehm)의 구약신학은 비록 구약종교의 발전을 인정하고 그 히브리 종교의 발전을 히브리 민족사와 밀접히 관련시켜서 기술하려고는 하였으나 구약신학이 곧 이스라엘 종교사 연구라는 입장은 인정치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구약신학의 가치를 이스라엘 종교사라는 범주로부터 구별해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종교사 연구와 구약신학의 과제 사이의 구별점을 말하기를, 이스라엘 종교사 연구는 단순히 종교의 현상학적인 것을 문제 삼지만 구약신학은 역사적 사실과 그 내면적 의미와의 관계, 그리고 그 역사적 사실과 계시종교의 발전과의 상관관계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하였다.

딜만(August Dillmann)도 역시 벨하우젠의 학설을 극복 지양하였는데 그의 구약신학에 나타낸 그의 주장점에 의하면 이스라엘 종교는 동일한 환경 안에 있었던 이웃 나라의 종교들과는 매우 다른 특이한 성격의 종교이기 때문에 역사주의적 원칙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으며, 특히 히브리인 종교가 기독교의 복음 안에서 성취된 그 구약종교에 대해서는 순수한 종교사적 방법만은 매우 불완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구약은 순수한 객관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데이빗슨(A. B. Davidson)의 구약신학은 철저히 벨하우젠의 학문적 방법을 그대로 구약신학에 적용하였다. 즉, 그는 구약신학을 정의하여 구약종교의 역사적 발생학적 양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구약신학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역사과학적 학문으로서 하나님이 자기 왕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였고 어떻게 그의 민족 이스라엘의 생각과 희망을 각성시켰느냐 하는 것을 찾아보는 하나의 역사과학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구약신학은 구약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어떻게 발전되어 갔는지를 저술하는 학문이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본 구약신학의 과제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하겠다 즉 하나님의 왕국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종교제도를,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선민(選民)의 생활 속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인류에게 계시했는가를 찾아내는 것,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와 하나님의 왕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것, 따라서 장차 신약에 나타날 그림자(foreshadow)요 예표(pregiguration)로서의 구약역사와 제도 및 생활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구약신학의 과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제를 이행하는 방법으로서 처음에는 순수한 역사신학적 방법, 즉 역사적 발생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때 <구약신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또 구약역사는 하나님의 신국사의 한 토막이라고 보았으나 후에는 신론, 인간론, 구원론이라는 교의학적 구분법을 채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19C 역사주의는 19C 말에서 20C 초에 이르면서 도전적인 반발을 받게 되었다.


3. 19C 역사주의에 대한 도전적 반응 - 20C 구약신학

19C 역사주의에 대한 도전적 반응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언어학(Philology), 고고학(Archaeology), 인류학(Anthropology)으로 성격지어지는 학문적 경향이고 그 다른 하나는 문학양식의 <삶의 자리>(Sitz-im-Leben)를 탐구하는 양식사적 연구이며 그 다음은 구약신학에서의 반응이라 하겠다. 고고학 연구와 언어학 연구는 피차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구약 연구에 큰 공헌을 끼쳤는데 발굴된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cuneiform)로 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서들과 상형문자(hieroglyphic)의 애굽문서들은 언어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해독 연구되므로 구약 고대 자료들과 구약에 나타난 고대 히브리인의 삶을 고대 중동의 환경에 비추어 계속 연구하게 하는데 큰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셈 언어 연구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히브리 언어학도 따라서 더 과학적인 연구를 하므로 구약 본문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가장 원시적인 히브리 종교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한 중동의 타종교와의 비교 및 유비를 통한 연구는 인류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하겠다. 스미스(Robertson Smith)가 1889년에 내어 놓은 [셈족의 종교](the Religion of the Semites)는 이 점에 있어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종교양식과 사상을 유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겠다. 그에 의하면 발전된 종교형식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그보다 훨씬 더 원시적이고 더 초보적인 종교형식들을 자세하게 연구해 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히브리 종교의 신앙과 형식도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연구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셈족의 초기종교 신앙을 연구하므로 <속량> 관념이나 <성찬의식> 관념은 초기 셈족 종교의 기본 관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대체로 언어학, 고고학, 비교종교학 등의 학문적 방법은 구약연구가 역사주의 일변도의 연구 때문에 잃고 있는 균형을 수정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공헌은 구약에 담긴 문학양식과 그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하겠다. 역시 이 분야의 개척적 공로자는 20C를 밝힌 거성, 궁켈(Hermann Gunkel, 1862-1932)이라 하겠다. 그의 양식 비평적 연구는 소위 <양식사학파>(Formgeschichtliche Schule)를 형성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모든 사상은 그 특유의 문학적 표현양식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구약에 포함되어 있는 각이(各異)한 문학양식들을 분류, 분석하고 그 문학양식들이 자라난 그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고찰하므로 히브리 종교사상의 근본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연구의 대상으로서, 산문체 자료로서는 창세기, 시문학의 자료로서는 시편을 선정했다. 그의 창세기 주석(Genesis bersetzt und erklrt, 1901, 7판, 1965)은 구전을 통하여 전승된 창세기 설화들이란 민속적이고도 원인론적인 사담(saga)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중동의 다른 나라의 사담과 비교 연구할 수 있다고 보고 이 사담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구전양식을 찾아내기 위하여서는 여러 종류의 서로 다른 문학양식들(Gattungen)을 분류, 분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시편 연구도 시편 시의 문학형태(Gattung)가 성장하고 발전한 그 제의적 삶의 자리를 찾아내는 데 괄목할 만한 공헌을 했다 하겠다. 그 결과 그는 창세기의 사담들이나 시편 시들의 많은 부분이 본래는 구전의 형태(oral form)로 존재해 있었던 것이며 그 원형은 고대의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은 종교사학파의 입장과 다른 결론들을 이끌어 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궁켈의 연구방법은 창세기나 시편연구 뿐만 아니라 구약의 다른 책들에 대한 연구에까지 확장되었는데 그레스만(Hugo Gressmann)으로부터 퀠러(Ludwig K hler), 궁켈의 제자 베그릿히(Joachim Begrich) 그리고 최근의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에게까지 이른다. 궁켈의 이러한 방법론은 <제의> (cult)의 의의에 치중한 시편연구라는 새로운 형태로 모빙켈(Sigmund Mowinkel)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그러나 모든 시가 제의적 목적에 따라 쓰여졌을 뿐 개인적 목적으로 쓰여진 시는 거의(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없다는 제의사학파의 주장에는 다소의 억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20C 구약신학은 19C의 역사주의뿐만 아니라 양식비평(form-criticism)적 연구에도 내어 버렸던 구약성서의 계시적 성격을 재발견하고 그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려는 노력을 활발히 전개했다.

19C의 비평적 역사주의에 대한 20C 구약신학의 도전적 반응은 탁월한 히브리 언어학자요 벨하우젠 학파의 숙적으로 알려진 퀘니히(Eduard K nig)의 <구약신학>(Theologie des ATs, 1922)에서 그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록 구약자료의 신빙도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정확한 <역사적 문법적>(the historical and grammatical)인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그 역사자료들을 역사주의자들처럼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배척하였고 그 대신에 히브리 종교사에 대한 통상적인 기술 방법을 사용했고 그 다음엔 이스라엘 국가형성에 도움을 준 주요 사상들을 조직적으로 취급하였다. 벨하우젠의 역사주의적 가설에 대한 반동은 스토이엘나겔(C. Steuernagel)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스토이엘나겔(C. Steuernagel)의 [구약신학과 구약종교사](Alttestamentliche Theologie und Alttestamentliche Religiongeschichte, 1925)는 가블러가 교의학으로부터 구약신학의 엑소두스를 외친 것처럼 구약종교사 연구로부터의 구약신학의 엑소두스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구약종교사 연구의 과제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종교사 연구의 과제와 구약신학의 과제는 공존 병립해야 할 구약학의 두 가지 과제라고 말하므로 구약신학만으로는 구약학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즉, 구약종교의 발전과정을 밝히는데 있어서는 구약종교사 연구의 과제가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구약자료를 체계있게 종합하여 제시하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년 후 아이스펠트(Otto Eissfeldt)의 짧은 논문, <이스라엘 유다 종교사와 구약신학>(Israelitisch- judische Religionsgeschichte und Alttestmentliche Theologie)에서 다시 대변되었다.

아이스펠트가 그의 논문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구약계시에서 역사를 제거해 버린 정통 경건주의의 오류에 못지 않게 19C 역사주의도 역사에서 <계시>를 제거해 버릴 위험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구약에 대한 역사적 연구방법과 신학적 연구방법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다고 보고 이 둘 사이를 엄격히 구별할 것을 요구했다. 즉, 그에 의하면, 구약의 역사도 어디까지나 역사이기 때문에 그 역사의 외적 현상은 어디까지나 상이한 역사자료들을 분류하고 그 상이한 성격을 밝혀 주는 순수한 역사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전혀 인식의 능력(Kraft der Erkenntnis)에 의해서 되는 <인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구약에 형성된 그 내면적 요소는 외부적 역사현상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며 이 하나님의 <계시>가 곧 구약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신앙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 역사과학적 방법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역사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 사이의 구분과 인식과 신앙, 역사와 계시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활동을 역사에서 분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 사이의 엄격한 이분법(dichotomy)은 결국 그가 배척하였던 오류인, 계시에서 역사를 제거해 버리는 오류를 그가 다시 답습하게 된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논의는 젤린(E. Sellin)에서 계속된다.

젤린은 그의 [구약신학](1933)에서 종교사 연구와 구약신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기독교 신학의 분야(part of the discipline of christian theology)라고 주장하였다. 즉,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독립시키면, 순수한 종교사 연구는 기독교 신학이라는 성격을 잃게 되고 순수한  신학적 연구는 관념적인 것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둘 사이의 긴밀한 상관성을 주장하므로 종교사적 연구에 의해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까지의 종교사를 관찰하되 그 속에서 활동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모습도 함께 찾아보며 그리고 신학적 연구에 의해서는 B.C. 5-2C 사이에 수집된 <선포된 구약의 문서>를 기초로 하고 유대교가 형성한 종교적 교훈과 신앙을 체계있게(in a systematic manner) 서술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그의 구약신학은 <종교사적 기초 위에 선 구약신학>이라는 표제를 달고 등장하였으며 그의 신학의 범위는 모세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의 계시까지로 잡고 그 기간 동안에 흐른 역사적 흐름을 (즉, 율법과 은총, 제사종교와 예언종교의 긴장관계의 흐름을) 발달사적으로 더듬어 가되 구약신학의 구성을 <신론, 인간론, 구원론>이라는 교의학적 분류법에 따라 구성하였다.

젤린과 동시대에 구약신학 제1권을 낸 아잇히로트(Walter Eichrodt)는 이미 히브리 종교의 현상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탐구를 지양하여 변증신학(dialectical theolgy)에 관심을 기울인 바 있는 데 구약신학 제1권에 이어 1933년에는 제2권, 1939년에는 제3권을 내놓았다. 그는 역사주의적 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구약신학을 전개하였는데 역사의 현상보다는 역사 배후의 신앙세계가 가진 통일된 주제를 찾아서 그 주제에 따라 구약종교의 본질을 구명해 보려 했다. 이를 위해서 그가 채택한 주요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따라 갔다. 첫째로는 구약의 신앙세계가 가지고 있는 통일된 주제와 그 중심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의 사상세계의 단면도(Querschnitt)를 만들고 거기에 나타난 사상층을 만들기 위하여 구약의 사상세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체계있게 고찰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구약신학을 하나님과 백성,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주제 아래 체계화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셋째로는 단면도에 비추인 구약종교의 본질적인 사상을 평가하고 밝히는 일은 철학이나 교의학과 같은 학문분야의 일이므로 교의학적 서술방법에 의하여 성서의 도그마(dogma)를 찾아나가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는 자연히 연구자 자신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마련인데 그는 이러한 그의 특수한 연구방법을 통하여 구약의 신앙세계의 횡단면을 자르고 거기에 비추인 구약성서의 중심사상을 관찰한 다음, 그것을 그는 <계약>이라고 보았다. 즉, 하나님은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인간을 만나시고 이 만남을 통하여 그는 그의 사람, 즉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다. 이 선민과 하나님 사이의 구체적 사건으로 탄생된 것이 계약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의 계시에 대한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이며 이 속에는 신의 <약속>과 선민의 의무를 밝히는 신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 <계약>은 어디까지나 도덕적이고도 윤리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계약은 마침내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지양하게 되고 그들의 신 고백은 우주적 신 고백이 된다. 그러나 구약의 신앙 세계는 어떤 하나의 주제 아래 집약되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다양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퀠러의 구약신학(Theologie der ATs, 1936)도 함축적인 어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신학적 체계를 시도하려 하였다 하겠다. 즉, 그는 <신학>이란 곧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신학은 마땅히 구약의 사상들을 체계있게 설명해 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데이빗슨이 후일 채택하였고 젤린이 채택한 교의학적 전개법을 따라 신론, 인간론, 심판과 구원이라는 분류를 따라갔다. 대체로 그는 구약의 중심사상을 하나님의 통치왕국(Divine Kingdom)의 개념, 즉 하나님의 주권개념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신학의 기초가 되는 명제는 <주> 개념인데 주이신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계시하시는 활동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역사는 처음에는 좁은 지역에서 시작된 제한된 가치만을 가졌던 것이 차츰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것이 된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긴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비셔(Willheim Vischer)의 구약신학 제1권은 아잇히로트의 구약신학 제1권이 나온 이듬해 아잇히로트와는 아주 다른 성격을 띠고 나타났다. [구약성서의 그리스도 증거]라는 그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는 구약성서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독교 교리를 가려내는 작업을 공개적으로 행했다. 비록 그가 사용한 방법은 역사적 방법과 공통된 점을 많이 갖고 있기는 하였어도 주로 유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방법을 채택하였다. 즉, 그는 구약성서의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계시, 신약성서 안에 나타난 계시의 기초(foundation)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 있어서 바움겔텔(F. Baumg rtel)이나 린드블람(J. Lindblom) 같은 이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졌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구약종교의 완성은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린드블람은 히브리인들의 신 개념은 인근 국가들의 종교들과는 반드시 구별지어야 할 독특하고도 특수한 점을 갖고 있는데 그 특이성은 하나님에 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구약성서의 신관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특수한 가치를 가진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나왔던 것이다.

이 즈음은 즉 세계 1차 대전에서 세계 2차 대전에 이르는 그 사이는 주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liberal humanism)에 대한 재평가의 기운이 거세게 불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뚜렷한 반동은 신정통주의의 변증신학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러한 움직임의 특징은, 인간을 위한 신의 경륜은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경험하는 특수한 역사경험들 안에서 밝혀졌으며 그러한 과정의 절정은 신약성서 안에서 일어났다는 확신 위에 선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20C의 기독교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이즈음의 많은 구약신학서들이 밝혀 주고 있다. 로빈손(Wheeler Robinson)의 구약연구는 구약성서의 자료들 속에 나타나는 신, 인간, 죄, 은총, 역사의 심판 등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엮어 나갔으며 존스(Cunliffe-Jones)의 구약연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신계시에서 하나님의 계시활동사의 절정을 보았다. 이러한 영향은 구미의 여러 구약신학자들에게 미쳤고 그 영향은 폰·라트(G. von Rad)의 구약신학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구약의 메시지를 기독교 복음의 <적용>의 과제와 획기적 연결을 시도한 구약신학은 프리젠(Th. C. Vriezen)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프리젠의 구약신학은 전부 11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주요 성격은 다음 몇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로는 교회와 구약성서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소비했는데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와 똑같은 기독교 교회의 경전이요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키 위하여 그는 예수의 유일한 성서는 구약이었다는 점과 또한 구약은 예수의 제자들이나 바울이 예수를 증거하는 기본자료였다는 점과 초대교회의 신학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한 것도 구약이었다는 점을 든다. 또한 그는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계시의 책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하여 구약계시의 역사적 발전을 말하였다. 즉, 구약 안에는 고대 중동의 영신론적(靈神論的) 종교세계에서 야훼 유일신론(mono-yahwehism)적 구약종교에로의 계시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야훼종교는 야훼의 바알화를 시도하는 자연종교(naturalism)와 야훼의 국가수호신화를 강요하는 민족주의(nationalism)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그 계시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는 구약 각 문서의 사상적 특징을 밝혔는데 JEDP의 사상적 구조를 밝혔다. 예컨대 J에게서는 주로 구원사상, E에게서는 선택사상, D에게서는 선민의 응보사상, 그리고 P에게서는 제의를 통한 종교사상들을 지적해 냈다. 그 다음 셋째로는 구약의 주석문제와 구약을 텍스트로 하는 설교학의 문제를 다루었다. 주석문제에 있어서는 구약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언어학적인 이해는 물론이고 구약 전체와의 콘텍스트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였으며 설교학의 문제로서는 구약 텍스트에서 기독교 복음의 경전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을 문제 삼았다. 대체로 그는 역사주의의 이스라엘 종교사 연구를 독립된 연구방법으로 독립시키되 교의학적 과제를 성서신학의 과제와 밀접히 결합시켜 놓았다 하겠다.

이와 동시대에 미주 신학계가 내놓은 구약신학은 바압(Otto Baab)의 것이다. 이 책은 성서에 대한 비평적, 분석적 방법을 비판하고 그 종교적 동기에 더욱 관심한다. 이 책에는 구약이 가진 종교적 진리를 소개하고 구약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임을 증거하려는 목적과 구약 본문에 의한 더욱 효과적인 성서적 설교를 촉진시키려는 뚜렷한 목적이 나타나 있다. 대체로 그는 신, 인간, 죄, 구원, 하나님의 나라, 죽음과 말세, 악 등의 대표적인 종교적 주제를 따라 구약신학을 전개했고 구약의 독자성과 동시에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및 경전성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신정통주의의 변증신학적 영향은 덴탄(R. D. Dentan), 폴처스(N. W. Porteous), 그리고 라이트(G. E. Wright)의 구약신학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즉 폴처스는 그리스도가 구약의 문제를 풀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성도 했다는 사실을 구약신학이 결코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라이트의 구약신학서인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폰·라트의 구약신학의 전초적 역할을 담담하였다 하겠다. 그는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 나타내신 신의 행위들을 볼 때 그것들을 신앙고백의 눈으로 보았으며 구원사적 신조에 따라 이해했다고 보았다. 즉 홍해의 구원사건, 시내산 계약사건과 같은 신의 <능력의 행위>에 대한 낭송(recital)으로 구성된 것이 곧 구약신앙이라는 것이다. 즉 구약종교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일련의 사은(謝恩)의 회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히브리인의 신앙을 전혀 신앙 고백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기본적인 신앙들이 초대교회 크리스챤들에게는 유형론적(typological)인 해석방법을 통하여 이해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신약성서 저자들이 고찰한 것에 한해서만은 유형론(typology)을 사용할 수 있다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비록 그가 그의 구약신학을 낭송의 신학이라는 제한된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하였어도 제의 참여자들의 신앙을 육성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그의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라이트의 주장은 야코브(Edmond Jacob)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야코브의 구약신학에 의하면 구약의 신앙은 어떤 신관념이나 신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응답>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구약신학 구성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 부분은 역사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본질, 속성, 그리고 그의 행위를 취급하고 둘째 부분은 죄의 개념, 구원의 개념, 그리고 종말론의 개념 등을 취급하고 셋째 부분은 역사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활동의 완성과 성취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생활에서 차지하는 계약의 의의와 제의의 역할 같은 것을 도외시하였다.

라이트의 구약신학이 나오던 그 해에 그와는 강조점을 달리하는 구약신학자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움겔텔의 <약속 : 구약의 복음적 이해의 문제>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서를 신학적으로 평가해주는 궁극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이고 구약의 특성은 그 예언적 특성보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이 증거하는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가 사용한 것 같은 유형론(typology)의 사용을 거부하였고 그것은 특히 현대 그리스도인이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대신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구약의 구원사(Heilsgeschichte)를 이해할 수 있으면 또한 구약에 기술되어 있는 죄에 대한 신의 심판사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그가 구약문서에 나타난 예언적 요소, 그 중에서도 메시야적 성격을 띤 예언문서들을 적절하게 다루지 못했다고는 하더라도 고대 히브리인의 신학을 단순한 역사주의라는 관점을 떠나서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경험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하다 하겠다.

20C 구약신학 논의가 한창일 무렵, 1957년에는 구약신학계에 가장 설득력 있는 반응을 던져 준 구약신학이, 지금은 고인이 된 폰·라트에 의해서 그 제1권이 나왔는데, <이스라엘 역사 전승의 신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그후 1960년에는 <이스라엘 예언전승의 신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구약신학 제2권이 나왔다. 그의 부제들이 암시하는 대로 그의 구약신학은 알트·노트(Alt-Noth)의 전승사 연구라는 방법론에 기초되었다 하겠다. 이러한 신학적 주제의 기초공사는 아마도 1938년도의 <육경의 양식사적 문제>라는 논문에서 이미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방법론은 두 개의 큰 지주, 즉 헬만 궁켈의 양식사적 연구와 알트·노트의 전승사적 연구를 기초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구약신학의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가 이러한 방법들을 절묘하게 응용하게 된 것은, 아마도 지파동맹을 창조해낸, 이른바, 하나님의 구원행동(cf. E. Wright!)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증언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띤 히브리인의 고백적 역사신앙을 반복, 재음미하는 것이 곧 구약신학의 주요 과제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는 구약구원사(Heilsgeschichte)를 그 역사적 형태로 단지 <다시 말해 본다>는 견지에서 아잇히로트가 상상하였던 바 <이스라엘의 신앙세계>는 아예 배척해 버렸다. 폰·라트에 의하면, 육경(Hexateuch)은 서로 모순되고 피차 갈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전승층의 고백들이 배열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신앙의 창시자에 대한 여러 전승들이 피차 조화되지 못하고 있는 점 때문에 모세라는 인물은 역사적으로 매우 모호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예언문서들을 취급할 때도 각각 따로 따로 취급하였는데 그렇게 한 것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란 더 초기의 역사 전승들을 전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들은 각각 다른 주제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주장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에 의하면 고대 전통이 소중히 보관해 온 <구속론적 개념>(the soteriological concept)은 부적절한 것으로서 그것은 <전능한 구원행동>이라는 개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언문서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개개 예언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가는 방법을 취했고 끝으로는 해석학의 문제와 신약에 나타난 구약사용의 문제를 취급함으로 그의 구약신학 전체를 끝맺는다. 그런데 그의 구약신학은 우선 구약신학의 주제에 관한 다른 이들의 견해를 자기본위적 판단에 따라 가혹히 질책 비난하는 <이교타파적 권위의 책>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예컨대 그는 자기의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들(대체로, 신학적 체계를 시도한 방법들)은 아예 비역사적인 방법이라고 비판하는 인상을 남겼는데 그러한 주장의 이유로서 그는 다른 이들의 방법이란 고정적인 신학적 묘사에 치중하였고 역사적 흐름 속을 뚫고 들어가는 동적(動的)인 계시개념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채용한 양식비평적 방법의 정당성은 의문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의 방법은 구약설화의 주요 요소들 중 어떤 것은 마치 제 이차적인 요소인 것처럼 취급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예컨대, 창조설화는 비록 이차적인 자료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구원사(Heilsgeschichte) 이론과 실제적으로 어떻게 관련시킬 수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없게 한 점은 이만한 거작에서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 결점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그의 방법론에 대한 얕잡을 수 없는 비판점은 구원사(Heilsgeschichte)라는 개념이 구약사상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종류의 구약자료도 다 통용할 수 있는 최선의 개념이겠느냐는 점이다. 더욱이 가장 초기의 역사가, 야비스트(Jahwist)의 신앙이 가장 표준적으로 표현된 것이 과연 <짧은 역사신조>(Short Historical Creed)의 형태였겠는가 하는 점도 문제이다. 비록 이러한 견해는 지파공동체(Amphictyony)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초기의 이스라엘을 이러한 고대사회의 조직과 관련되었다는 알트·노트학파, 일명 전승사학파의 주장과 공통된다 하더라도 정착시기 동안의 히브리인들의 정치구조가 알트·노트가 희랍인들의 정치구조와 일치된다는 견해는 사실상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도 폰·라트가 그의 구원사적 신학을 수립함에 있어서 그가 범한 결정적인 잘못은 그의 신학의 근거를 이루는 신의 구원행위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증거(testimonies)들을 사용할 때 그는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자료들을 사용했다는 점인데 이러한 자료들을 얻기 위하여 그가 사용한 양식비평적 원리가 과연 방법론적으로 정당하냐 하는 근본적인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폰·라트의 구약신학 제2권이 나오기 바로 전 해에 영국에서는 또하나 괄목할 만한 구약신학 연구서가 나왔는데 그것은 나이트(G. A. F. Knight)의 [구약의 기독교 신학]이다. 그의 저서는 라이트의 God who acts와 폰·라트의 구약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이 암시되어 있다. 그는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평가한 영국계 학자로서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학적 평가를 내리는 데 필요한 예비적 과정으로서 그는 비평적 방법을 따라 문학의 철저한 재구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 히브리인들의 심상을 강조하고 그들의 심적 표현이 신약성서와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므로 이른바 특이한 인간학적 조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기독론적 해석(Christological interpretation)을 채택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그 모두가 메시아적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생각지 않은 구약신학은 무의미한 것이라고까지 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본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의 속성도 철저히 행동하시는 면을 강조하였다.

폰·라트의 구약신학 제2권이 나온 후 그 이듬해에는 마일렌버그(J. Muilenburg)의<이스라엘의 길>이 나왔다. 비록 그는 벨하우젠의 역사주의적 연구의 결과를 받아들이면서도 성서 본문의 본래적 의미를 역사적 발전에 잘못 영향받음이 없이 밝혀내는 일이 학자의 주요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역사란 <새 계약>과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며 새 계약 안에서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서본문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내신 신의 행위를 통찰할 수 있게 해 주는 반면에 구약신앙의 가장 완전한 의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활동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것임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신의 계시 자체보다는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경험과 윤리적 응답을 더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계약>을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자극하는 요소(motivating factor)로 강조한다.

마일렌버그와 동시대에 나온 제임스·바(James Baar)의 [성서언어의 어의론]은 저 유명한 킷텔(R. Kittel)의 [신약성서 사전](Theologisches W rterbuch zum Neuen Testament)이 사용한 원리를 비판하는 책으로 나타났다. 제임스·바 교수는 언어의 기능과 본질이 비과학적인 사전 편찬적 공리에 의하여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킷텔의 원리를 비판했다. 특히 그는 성서적 언어와 그 언어가 가진 사상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서 논의할 점이 많이 있음을 지적하고 어의를 추구하는 방법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특수언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어의 위에 이룩된 사상구조(thought- structure)를 살피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특수점은 성서언어의 어원연구에 필요한 예비적 단계로서 독립된 성서 어휘 연구 방법을 철저히 지양하고 성서적 진술(statements)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언어들의 어근과 동의어와 반의어 등에 의해서 연구하는 방법이 아니라 즉, 개개의 단어연구보다는 어구나 문장연구를 권장했는데 구약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언어들의 의미는 그 어원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 아니라 그 사용법과 그 문맥(context)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성서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학적 전제와 방법에 있어서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예컨대 히브리 사상과 희랍 사상 사이의 전통적인 구별점을 경솔하게 사용하게 한다든가 구약성서와 고대 중동의 문서들 사이의 다른 점을 강조할 때까지는 잘못된 선입견 또는 적절하지 않은 신학적 개념들을 가지고 성서 언어들을 읽으려는 경향, 그 이외에 언어 분석법이나 어원학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 등등을 지적했다.

결어 : 지금까지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서해석가들로부터 1960년대의 20C 구약성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의 구약성서에 대한 신학적 논구의 역사를 간략하게 개관해 본 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가? 제임스·바 교수가 지적했듯이 폰·라트의 구약신학 이후로는 더 이상 <구약신학>이라는 주제로 구약연구서가 쓰여질 필요는 없는 것일까? 구약학 연구의 남은 과제는 단지 주석학의 과제에만 달려 있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질문은 그리 중요한 물음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서신학적 논구는 앞으로도 더 계속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폰·라트의 구약신학과 같은 거작(巨作)의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의 신학서의 기초적 작업에 있어서 양식비평적 논구의 작업에서 생긴 문제점 같은 것은 충분히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자료들은 어디까지나 그의 양식비평적 논구를 통하여 재구성된 자료들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예컨대 야비스트의 신학이냐 아니면 야비스트의 신학에 의해서 재건되기 전의 전승자료가 가진 신학이냐 하는 소박한 질문 속에서도 폰·라트가 그의 작업 속에서 도외시한 부분들 ― 그가 이차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내어 버렸던 부분들 ― 에 대한 재평가가 고려될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령, 창조설화를 구원사적 성서이해의 <보조적 기능>(ancillary function)만을 가진 것으로 본 그의 관념은 항상 문제될 수 있는 비판의 주제이기도 하다. 제임스·바도 이러한 비평을 가하였지만 특히 그의 비평 중에서도 폰·라트의 구원사적 방법이 그가 완강하게 거부해 버렸던 <자료선택의 원리>(Principle of Selectivity)를 새로운 형태로(무의식적으로?) 다시 채택해 버리게 되었다는 비평은 괄목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제임스·바가 제안하듯이 폰·라트의 연구방법과 아이히롯트의 연구방법의 결부 및 조화를 통하여 앞으로의 구약신학을 전망하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폰·라트 자신이 그의 양식비평적 논구와 자료 선택의 과정에서 빠뜨렸던 부분들과 그리고 그의 구원사적 주제 ―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가 <선택한> 주제였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 에 관련시키기 위하여 범한 견강부회(牽强附會)를 극복하는 과제를 통하여 앞으로의 구약신학을 전망해 보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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