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고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성령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개념범주를 갖는다.
2.3.7.1.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개론
1)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선물의 성격을 갖는다. (성령의 은사들을 표시하는 카리스마타는 카리스마의 복수형으로 "은혜의 각양선물들"을 의미한다.) 성령에 충만한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줄 수 있다(참조. 롬 1:11). 그럴 경우에도 성령의 은사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주시는 것이다. 그 사람은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성령의 은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다. 모든 기독교인에게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은사가 주어진다. 모든 기독교인은 다 똑같은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며 또 어느 누구도 모든 은사를 다 가지려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3) 모든 은사는 유익이나 가치를 자아내기 위해서 주어진다(참조. 고전 12:7). 즉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기독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다. 상이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이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이 종말론적인 존재 안에서 각기 그들의 위치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로 봉사하며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4) 성령의 은사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하고 굉장한 것이라도 영적 성숙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교인들처럼 성숙치 못한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은사에 관한한 탁월할 수 있다(참조. 고전 1:7; 3:1-3).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5) 성령의 은사는 최고의 은사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지반으로 해서 나타나야 한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익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신령한 은사를 대신하는 대치물은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은사 위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고전 14:1a).
6) 성령의 은사에는 귀천이 없다. 은사는 선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자기의 것처럼 자랑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선물이 다른 사람의 선물보다 더 영적이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또 다른 교인이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그를 시기하거나 불쾌하게 여겨서도 안된다. 그리고 어떤 교인들에게 이같은 은사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다른 교인이 그를 멸시해서도 안된다. 그가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만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를 멸시한 자신을 포함해서 교회 전체가 고통받게 된다. 모든 교인은 하나님께서 모두의 유익을 위해 한 사람에게 부여하신, 다시 말하자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집단 전체에게 부여해준 은사 안에서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기쁨에의 한 운명공동체로 결합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
7) 성령의 은사는 모두 다 귀중한 것이다. 은사를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과 성령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은 일을 행하지 않는다. 기독인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잘 사용해야 할뿐만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해야 한다(고전 14:12b).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게 되면 그것은 한층 더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은사를 잘 사용하여 이러한 도움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경험되도록 해야 한다.
8)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참조. 고전 12:5-6): 은사도 여러 가지 이고, 직임(봉사)도 여러 가지 이고, 역사(능력행사)도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동일한 성령, 동일한 주, 동일한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이와 같이 은사는 다양하지만 동일한 하나님 안에 그 뿌리를 갖고서 서로 연결되며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9)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홉 가지 은사보다 더 많은데 이 은사들을 크게 나누면 말씀과 관련된 은사, 믿음과 관련된 은사, 봉사와 관련된 은사, 교회의 일에 관련된 은사, 자신과 관련된 은사들이 있다.
10) 바울서신에서 은사에 대한 보도는 세 군데 있다(고전 12:8-10; 28-31; 롬 12:6-8). 고전 12: 8-10절에서 우리가 잘 아는 9가지 은사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27-31절에서도 성령의 은사자들과 은사들이 언급된다. 이 은사 목록들과는 다르게 바울은 롬 12:6-8에서도 은사들을 정돈하여 그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목록으로 만들어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2.3.7.2.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설명
고전 12:8-10에 나오는 은사 목록이 유명하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고전 12:27-31과 롬 6:8-10에 나오는 은사목록들 가운데 맨 앞의 목록에서 다루지 않은 것들만을 설명하겠다.
성령은 인간을 살려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고 인격적 교제를 가능케 하는 인격적인 능력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의사소통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일차적인 사역이 말씀과 관련된 사역이다. 이 은사가 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봉사를 한다. 이런 활동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다. 이 사역을 위해서 기독인을 깨우치는 말씀과 관계하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은사로 주어진다.
-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
이 두 가지 은사를 정확하게 구별하기는 쉽지가 않다.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은사는 계시적 은사로서 다음처럼 교회 공동체의 삶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공동체 사건 안으로 개입하여 사람이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의사소통에 깊은 통로를 열어준다. 이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어렵고 위태한 상황을 위해서 주어진다. 이 은사가 주어진 은사자는 문제의 요점을 정확하게 맞추어 그 난제를 해결케 한다. 그때 이 은사자는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에 대해 그의 청중처럼 똑같이 놀란다. 그는 그가 항상 마음대로 소환할 수 있는 지속적인 지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새로운 상황에서 그에게 부여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구별하길 원한다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그리스도께서 해명해 주시고 교회의 선포와 고백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뜻을 표시하기 때문에 지혜의 말씀은 계시를 통하여 드러난 진리를 일반적인 삶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는 권면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지식의 말씀은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킬 목적으로 기독교적 진리,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리스도의 사역,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원발생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구원수여 등에 대한 해명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믿음 -
믿음은 바울에게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믿음은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임이다. 이 믿음은 모든 기독인들에게 있다. 은사로서의 "믿음"은 모든 기독인이 갖고 있는 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바울서신에서 "신뢰의 믿음" 혹은 "기적 믿음"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그 믿음이다(고전 12,9; 롬 4, 18이하; 12,3; 고전 13,2). 이것은 삶의 한복판에서 불가능한 것이 전능한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이 완전히 절망적으로 내던져진 부정적인 인과고리들을 폭파시켜버리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믿음의 은사는 수많은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이 은사로 무장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신뢰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일치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다.
- 병 고치는 은사 -
"병 고치는 은사"는 의술의 결과가 아니라, 신령한 능력에 의해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이 은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치료하고 구원하는 성령의 능력에 참여하며, 특별한 믿음과 신뢰가 충만한 기도가 기적적인 것을 가능케 하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서 건강하게 만드는 권세를 주신다는 초대교회의 근본경험과 관계가 있다. 병 고치는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는 것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참조. 고후 12:8-9). 그러나 그는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기에 적합한 환경에서는 신유의 도구가 되었다.
병 고치는 활동은 우선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에 속했다. 이 활동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에 결부되었고 이 나라를 현재적으로 유효하게 했다. 그에게 있어서 말씀 선포와 치유행위는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내적으로 새롭게 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인간의 육체도 함께 포함한다. 부활절 이후의 공동체에 있어서도 이러한 치유활동은 계속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질병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하나님의 성령과 전권으로 무장해서, 공동체 안에서 질병을 치유했다. 이 병 고치는 은사의 출현은 강한 신뢰 신앙이 특징적인 무리들, 즉 자신이 사실적으로 질병의 승리자로 나타나리라는 하나님께 대한 기대의 태도가 특징적인 무리들 안에서만 전적으로 가능하다. 바울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란 복수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질병의 치유는 어떤 유일적인 기회가 아니라 특수한 경우를 위한 특별한 은사들이기 때문이다.
- 능력 행함 -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능력 행함"에 관한 은사가 있다. 능력 행함은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능력 행함은 병을 고치는 것보다 그 범위가 넓은 반면에 (병을 고치는 것은 단지 능력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믿음만큼 광범위하지는 못하다. 바울은 이 능력을 복수로 사용한다. 그는 그것을 통하여 능력 행함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용어로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히 바울은 능력 행함 아래에서 병고침을 생각한다. 역시 질병의 치유자도 하나의 "기적행사자"이기 때문이다. "능력 행함의 기적적인 능력"이 주어진 자는 역시 치유자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나아가 성령에 의해 다른 방법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아마도 귀신 축출, 자연 기적들, 죽은 자를 다시 살림, 소경이 되게 한 것 등등). 그래서 질병치유의 기적(이것이 대체로 가장 중요한 기적임)을 위한 "병 고치는 은사" 개념 곁에 기적 능력으로의 무장을 위한 개념이 바울에 의해서 발견되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 예언 -
"예언"(프로페티아)은 은사들 가운데 가장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은사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언이라고 하면 미래의 일을 예고한다든가, 예견한다든가, 알아 맞추는 일처럼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언은 미래의 일을 예고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이 말이 1세기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메시지를 선포한다거나 신들의 신탁을 해석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말을 쓸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예언에 대한 정의는 고전 14장에서 발견된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3절에서 제공된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교훈, 권고와 위로(관주성경에는 덕, 권면, 안위이다)를 말한다". 주목할 것은 거기서 권고(파라블레시스)란 말이다. 이 말은 원어에서 더 많은 의미, 즉 일깨움(각성), 장려(격려, 위로)를 내포한다. 그것은 올바른 길을 지시하고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행위인 새로운 삶에로의 가능성에 대한 장려를 뜻한다. 그러므로 권고를 포함하는 예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표현이 된다.
예언에 있어서 그 대상에는 개인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공동체가 중요하다.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교화가 주어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아서 예언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공동체에게 그들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지시한다. 예언이 없이는 어떤 올바른 방향성도 없다. 예언은 설교와 동시에 계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통보이며 회개에로의 경고와 권면이며 핍박받는 교회에 대한 위로와 약속으로서 "공동체 집회에서 가장 순전한 영의 표현"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이다. 그는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성령과 대면케 하고 공동체와 개별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며 하나님 앞에서 지기인식을 하도록 돕는다.
이 예언적 말씀의 구체적인 성격은 항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의 독특성은 그것이 가르침과 비교될 때 특별히 분명해진다. 가르침에서는 보존, 전달과 전통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 반면에 예언적 선포에서는 하나님의 지시 사항을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시간에 공동체에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예언은, 바울의 이해에 따르면, 미래의 어떤 예견이나 예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길을 잘 되게 하길 원한다. 그것은 미래에서 좋은 것으로 나타날 거기에로 결단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그것은 어떤 결정이 미래를 가로막고 있고 어떤 결정이 미래를 열어 놓고 있는지를 안다.
그러나 예언적인 말씀은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안내하는 그리고 친근한 말씀이며 새로운 태도의 가능성들에로의 권고이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언적인 말씀은 '자기 발견'과 '자기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돕는 말이다. 예언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점점 더 인간을 아는 자가 된다. 그는 인간의 마음의 갈피 못잡음(과실)을 통찰하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황과 절망에서 길을 보여줄 수 있도록 명석하게 된다. 만약에 공동체가 이런 방법으로 불신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면, 그들은 실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사실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참조. 고전 14:25)라고 고백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영들의 분별 -
초대 기독교는 항상 되풀이되어 거짓 선지자들과 사기꾼들에 의해 내습 당해 왔다. 그들은 첫눈에 복음의 진지한 선포자들과 구별될 수 없었다. 영들을 분별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복음의 변질을 막는 것이 교회의 과제 중에 하나가 되었다. "영들의 분별"의 은사는 참 복음과 거짓 복음에 대한 구별이 교리와 신학적으로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시기에 많이 주어졌다. 이 영분별의 은사는 교리와 신학이 점점 체계적이 될수록 상대적으로 감소되어 갔다. 이 은사가 어떻게 변모해 가는지는 마 7: 15-23과 디다케 11장이 잘 묘사해주고 있다. 마 7:15-23에서는 거짓선지자들의 구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의 열매라고 강조하고 있다. 신자들은 삶의 열매로 선지자들이 참된지 거짓된지 판단해야 한다.
디다케 11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너희에게로 오는 모든 사도는 하루만 머물러야 한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틀만! 그가 그러나 3일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그 사도가 계속 나아간다면 그는 밤을 보낼 때까지 빵 외에는 아무 것도 얻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 . 영으로 말하는 자 모두가 선지자는 아니다. 그의 삶의 방법이 주를 따를 때에만 선지자다. 삶의 방법에서 너희는 한 사람이 진짜 선지자인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 .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선지자가 만약 그가 자기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마 7:15-23과 디다케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교인은 분명히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영감을 통해 특정 인물들과 그들의 사역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대신에 이제 이성적인 숙고를 통해 얻은 범주들에 의해 판단을 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미 기독교 2세대와 3세대에서 영분별 은사와 그 은사에 대한 지식이 적어도 상당히 상실되어졌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의 공동체에서 영들의 분별에 능력이 있는 자는 공동체를 위해 위험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아가는지(혹은 여행하는 선포자로부터인지 공동체 회원 자체로부터인지)에 대한 초자연적인 "후각 능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는 이 인식 능력으로 해당하는 사람을 면책하고 그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폭로 할 수 있었다.
- 방언 -
고전 14, 1-25에서 바울은 방언을 자세히 다루나 우리에겐 방언이 도대체 무엇인지 충분할 정도로 분명하지 않다. 방언의 자세한 정의를 위해서 종교사적인 유비가 필요하다. 우선 구약적인 유비인 이사야 28, 7-13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입술 더듬음이 보도된다. 그리고 그리이스와 헬라적 종교성의 영역에서 유비가 있는데 그것은 황홀경적-더듬는 말이다. 이러한 유비가 방언을 정확하게 규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종교사적 비교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것이다: 의미론적인 언어 영역 없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진술 가능성들의 저편에서 보통 인간의 말하는 것의 범위 안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이것을 역시 고전 14장 자체에서 경험한다. 방언은 분명히 의미론적 언어 영역이 빠져있는 그러나 표현적이고 소리내어 부르짖는 언어 영역이 보존되는 일종의 준언어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방언은 음성의 흐름이다. 그것은 듣는 자나 말하는 자에게 이해되지 않는다(음성적 요소에 어떤 특정한 내용이 부가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표현의 성격과 부르짖음의 성격을 갖는다(그것을 통해서 방언은 대개 의미가 충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방언을 통하여 의식의 감독 기관을 지나서 고유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말해지며 그러한 원시적인 감정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인간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 기쁨은 보통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발음 가능성의 저편에 놓여있다. 이 발음 가능성은 보통의 의사소통 안에서 주제화 될 수 없다.
방언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 14:28절에 나온다. 여기서 만약에 방언 통역자가 없으면 방언하는 자는 교회의 집회 때 조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경우에 홀로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바울은 공공적인 방언과 사적이고 개인적인 방언을 구별한다. 공공적인 방언은 매우 절제되어서 나타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령의 은사의 개인적인 사용은 자물쇠를 잠그면 안된다. 바울은 방언하는 자는 자신을 교화한다(4절)는 것을 안다. 그리고 개인적 방언을 통하여 자신을 교화하는 가능성에 의해서 신자는 방해받지 않은 채 사용해야 한다. "교화하다"의 개념은 여기서 인격의 본질적인 세움을 표시한다. 방언은 심리 위생적 기능을 채우고 영적인 심층에 만족할만한 영향을 준다. 바울은 이 관계를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방언의 개인적 사용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매우 조심한다. 그 자신은 홀로 종종 그리고 철저히 방언의 은사를 실행한다.
- 방언들의 해석 -
방언 해석의 은사에 어떤 과제가 떨어지나? 이 통역자는 방언을 보통 언어로 번역한다. 이 가설에 대한 유비는 꿈해석이다. 심층심리학적 견해에 따르면 꿈에서 무의식적인 것이 말로 된다. 그의 상징 언어 안에서 의식의 감독기관을 지나 표현된다. 꿈해석자(심리치료자)는 이 상징언어를 의식에 이해되도록 만든다. 그것과 비슷하게 방언의 해석은 진행된다.
고전 12:28-30절의 은사 가진 자들과 은사들
이 목록은 8-10절의 목록과 일치하는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동일한 장에서 바울은 두 개의 다른 은사적 능력들을 열거한다. 이것은 바울이 은사적인 현상들을 정돈하고 분류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공동체 안에 성령의 충만한 표시가 있다. 8-10절의 첫 번째 목록에선 예언의 은사가 이야기되는 반면에 두 번째 목록 28-30절에선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가 언급되는 것이 현저히 눈에 뜨인다. 예언과 관련해서는 분명히 한 과정이 진행된다. 그것은 때때로 수여되는 은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 은사를 가진 자에게 지속적인 능력으로 머물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두 번째 목록에서 이렇게 은사가 지속적인 능력으로 머문 사람들의 그룹이 언급된다: 그 첫째는 사도이고, 둘째는 예언자이고, 셋째는 교사이다. 세 가지 은사자들을 통한 말씀의 세 가지 활동은 그리스도교의 일차적인 활동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세 집단의 중요성은 문장을 두 번 끊음으로써 강조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순위가 나오지 않고, 은사를 가진 사람들 대신에 은사들이 언급된다. 8-10절의 목록에 대비하여 28-30절의 은사 목록 안에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새롭게 덧붙여진다. 여기서는 앞의 첫 목록에 나오지 않는 세 은사자들과 새로 나온 두 가지 은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 사도 -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자, 또는 복음전파를 위해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는 것이 그들의 필수적인 자격이었다. 그러나 부활을 목격한 자들 모두가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사도라고 일컬음을 받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함께 했던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던 열두 사도들과는 구별되었다. 그들의 일은 그 자체가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들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와 교회에 개종자들을 입회시키는 일에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종말론적인 복음전도자들이었다.
- 예언자 -
예언자는 예언의 은사를 행한 사람들이었다. 예언의 은사는 위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라. 예언자는 순회하는 방랑선교자들이 아니라 지역교회에서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경우에 따라서는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결합되어 있었고 그들을 도와서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신학을 형성하게 하거나 전개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 때에도 계시와 신앙에 관한 창조적인 통찰들이 주어진 곳에서, 즉 사도들과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전달된 복음의 범위 내에서 자기의 메시지, 신학, 지시, 권고, 약속들을 전개해야 했다. 그들도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표현된 객관적인 신앙규범을 지켜야 했으며 새로운 구원의 지평을 열거나 새로운 구원의 체계를 만들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 교사들 -
교사들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의미와 도덕적 내용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사도들이 전해준 기독교 복음에 대한 좋은 지식과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 복음을 교의(敎義)적으로 새롭게 고쳐 써서 이해시킬 수 있는 재능을 소유하였다. 그들의 주요업무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신앙을 소개해서 복음을 받아드리게 하고, 집회 시에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며,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 이방세계에서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가르침에서 특별히 구약성서의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설명하였던 것 같다. 이 교사들은 교회 안에 있었고, 교회와 함께 살았으며, 교회를 위해서 봉사했다. 그들은 사도 다음으로 공동체에서 복음의 선포와 복음의 교수에 지도자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굳게 부여잡고 그것을 조직화하며 발전시켜서 속사도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 서로 돕는 은사 -
남을 돕는 직무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인간관계의 원리로 삼아 그것을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일에 해당한다. 남을 돕는 은사를 지속적으로 가진 자는 집사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직무는 교회의 보조로 궁핍한 자들을 박애적이며 기술적이고 조직적으로 돌보는 일이다. 그들은 공평하고 투명하게 이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 때에 잘난 체하지 말고, 권력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며, 사심이 없이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가난한 자들과 교제할 때 그들의 복지를 염려하는 사랑과 열정 이외에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 정도의 지혜와 배려가 필요하다. 동시에 직업적인 가난한 자들에 의하여 악용되거나 오용되지 않을 정도의 인간에 대한 깊은 지식과 총명을 겸비해야 한다.
- 다스리는 은사 -
다스리는 은사( )는 행해사, 키잡이 등의 의미를 갖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말하자면 교회의 항해사 내지는 운전사에 해당된다. 그러한 은사를 지속적으로 소유한 자는 감독들이었다. 그들의 과제는 교회의 일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사도들의 순회 선교활동과는 대조적으로 지역적인 활동이었고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행한 말씀 사역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봉사가 없었다면 어떤 교회도 세워지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들의 임무수행이 없으면 어떤 교회도 장래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지도 역할에는 교회의 치리, 예배의 관장, 사목 활동 등이 포함되었다. 그 당시 교회에서는 어떤 공식적인 위계질서가 없었지만 교회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은사가 주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롬 12:6-8에 나오는 은사들
- 예언 -
예언은 영감된 설교의 은사이다. 이것의 내용은 교화와 권고와 위로이다. 여기서 예언의 은사는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은사를 , 즉 가르치는 은사와 권위하는 은사로 전개된다. 예언의 은사에 관하여는 고전 12:6-8의 은사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라.
- 섬기는 일 -
섬기는 일은 헬라어로는 디아코니아이다. 이 말은 선포의 봉사를 표시할 수 있고, 더 광범위하게 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모든 책임있는 봉사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은사는 여기 목록에서 마지막 세 가지 은사, 즉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로 전개된다.
섬기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고 존귀하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섬기는 자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그러므로 기독인은 이 섬기는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하고 그 은사를 마땅히 활용하여야 한다.
- 가르치는 일 -
가르치는 일은 교회의 업무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에 속한다. 이것은 예언, 즉 영감적인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서 설교에서 선포된 내용을 상세하게 해설하는 일이다. 이 가르침이 영적인 결실을 얻으려면 이해, 예증, 응용에 있어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능력이 요청된다. 가르치는 일은 말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시범과 인격의 미묘한 감화력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가르치는 은사가 지속적으로 머무는 사람은 고전 12장의 두 번째 은사목록에서 교사로 지칭되고 있다.
- 권위하는 일 -
헬라어로는 파라클레시스로 "보혜사" 파라클레토스와 그 어원을 같이 한다. 이들 단어의 동사는 파라칼레오로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옆에서 돕는다", "돕기 위해서 더불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단어에서 나온 낱말 권위는 기독교에서 "신앙을 격려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권위하는 은사는 예언적 설교의 주요한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패배의 잔을 마신 자, 실망중에 있는 자, 시련을 당한 자, 슬픔을 당한 자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은사는 다른 사람들의 수준을 높여주며, 헌신을 심도있게 해주며, 마음에 품은 의도를 순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오늘날의 세계는 격려와 위로의 은사가 대대적으로 요청되는 시대이다.
다음의 마지막 세가지 은사는 자선적이고 기구적인 종류의 행위로서 섬기는 은사의 일종이다. 이 세가지 은사에 관해서는 각각 사용법이 첨가되어 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 구제하는 일 -
자기의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도움을 표시하거나 궁핍한 자에 대한 공동체의 구호물을 나누어 줌을 의미한다. 첫 번째 경우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두 번째의 경우는 나누어 주는 자는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
이것은 타인의 필요를 보충 혹은 담당하는 것이며 박애적 정신, 그 이상의 것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적 사랑으로 충만된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다. 구제할 때 인색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것이 구제의 은사이다.
다른 은사들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구제의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적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란 주님의 말씀과 양과 염소에 관한 심판의 비유에 따라 우리는 구제의 은사를 함양해야 할 것이다.
- 다스리는 일 -
다스리는( ) 은사를 가진 자는 공동체와 가정교회의 감독을 의미한다. 이 은사를 가진 자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다스리고 돌보아야 한다. 이 은사에 대하여는 고전 12장의 두 번째 은사목록에 나오는 다스리는 은사( )와 용어는 다르나 의미는 같다. 그곳을 참조하라.
- 긍휼을 베푸는 일 -
긍휼을 베푸는 일은 동정이나 관심, 곧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타인의 감정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인데 아마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감정이입과 같은 것이다. 즉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고 그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어 그를 구체적으로 돕는 희귀하고도 중요한 능력이다. 이 은사는 병자를 간호하고 갇힌 자를 돌보고 주린 자를 도와주는 등의 구제를 포함한다. 이러한 은사로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불평없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한다. 마리아 테레사가 극명하게 보여준 은사로서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은사로 재발견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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