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무엘상

세바의 반란과 요압의 월권 삼하 20:1-13

은바리라이프 2009. 2. 12. 17:50

세바의 반란과 요압의 월권        삼하 20:1-13


 사람들은 잘 될 것으로 믿었던 일이 막힐 때 좌절하기 쉽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흔히 극단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러한 때에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성숙한 신앙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인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압살롬의 난을 평정한 이후에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남과 북의 연합이 깨지는 일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내에는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남쪽 세력과 나머지 북쪽 지파들 사이에 거리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유다지파였고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여서 지파들 간에 하나 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사람인 세바가 나타나서 유다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을 모아서 다윗을 반역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바는 어떤 사람인가? 1절에 보면 불량배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로 보면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절에 나온 대로 세바는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문제를 만들기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바가 어떻게 북쪽의 지도자가 되었는가? 그 힘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의 대중 연설 때문이었습니다.

 1절 중간에 보면 ‘나팔을 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팔을 불면서 여러 사람들을 모아 대중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함께 나눌 분깃이 없고 받을 유산도 없다” 즉 우리들은 다윗과 다른 지파이기 때문에 다윗으로부터 혜택을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바는 지역감정, 지파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얼마나 연설을 잘 했는지 그러한 말들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히틀러는 역사상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이 강력한 대중 연설로 수십만명, 수백만명을 동조자로 만들었습니다. 세바도 그처럼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었던 것입니다.

 이전부터 다윗은 지파들을 통합시키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결속이 잘 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군대지휘관이었던 아마사에게 세바의 반란을 진압해야 하니 군대를 소집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5절을 보시면 아마사가 그 일을 지체하였습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불순종하다가 그렇게 지체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아마사가 잘 해내지 못하자 다윗이 이번에는 아비새에게 명을 내립니다. 6절에 보면 세바의 반란이 압살롬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니 가서 제압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비새는 형 요압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갑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당시 기브온에서 아마사가 요압과 아비새의 군대를 맞이하였습니다. 함께 세바를 진압하는 일에 합류하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압은 다시 비열한 방법을 씁니다. 사실 아마사와 요압은 사촌지간입니다. 아마사는 사촌 형이고 요압은 동생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압살롬 편에 섰던 아마사가 다윗의 군대장관이 되자 요압은 아마사를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사에게 인사하는 척 하면서, 그 수염을 잡고 입을 맞추며  칼로 죽였습니다. 단 한 칼에 죽였습니다.

 그동안 요압이 암살했던 사람들 역시도 다윗의 뜻과는 상관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요압이 마음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 안에는 아마사의 모습도 있고 요압의 모습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명하신 바를 아마사처럼 따르기를 지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요압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우리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백하시기를 “나는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행하러 세상에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그 어려운 십자가 앞에서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기를 내려놓으시고 죽음의 길, 좁은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시요 모범이십니다.

 

신앙의 마지막은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요압은 불순종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너무나 중요한 때였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정복되어 이제 나라를 다시 새롭게 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때에 함께 연합해야할 아마사를 요압이 죽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캄캄한 때에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나중에 22장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특히 22장 29절에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어떤 영혼이든, 인생이든 하나님께서 등불을 밝게 켜주시지 않으시면 그 내면과 인생이 환하게 밝혀질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둠을 밝혀주시고 친히 길이 되어 주실 것을 신뢰하며 기도하면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등불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과 인생의 흑암을 밝히신다고 고백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영성은 인생길이 캄캄할 때 나타나야 합니다. 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 등불이라고 믿으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문제는 적은 것이지만 크게 보면 큽니다.

 반대로 태산 같이 어려운 문제라도 하나님 중심의 믿음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는 신발의 작은 모래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때가 되매 그 문제가 먼지처럼 떨어져 나갑니다.


다윗은 압살롬 보다 세바의 반란이 더 커보인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세바의 반란을 간단하게 진압하셨습니다. 신기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십니다. 그것이 내일 본문에 나옵니다.

 아무쪼록 어둔 길을 하나님의 등불 아래서 지나갔던 다윗처럼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이 가득하시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