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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지리 탐방을 마치고(1)

은바리라이프 2008. 10. 14. 18:01

성경지리 탐방을 마치고(1)

김영길목사 평택 더불어사는 교회 담임 목사 017-274-7464 http://cafe.naver.com/onlylogos


필자는 지난 2월 13일부터 2월 21일까지 8박 9일 간의 여정으로,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시찰회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을 경유한 성경지리 탐방(일명 성지순례)에 동참하게 되었다. 여행을 위하여 출국하기 직전에 건강상(심장병)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어 성경지리 탐방을 보류해야 할 입장에 있었으나, 병원측의 특별한 진료와 동료 목사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성경지리 탐방을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성경지리 탐방에 대한 생각들을 두 번에 걸쳐서 짤막하게나마 신앙적 관점에서 몇 자 적어 볼까 한다.


 필자가 성경지리 탐방을 떠나기에 앞서 느낀 감정은 ‘많은 돈을 들여서까지 성경지리 탐방을 꼭 가야 하는가? 보지 않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성경지리 탐방이라는 의미를 신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 수없이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더욱더 성경지리 탐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다녀와야 했었고, 그 결과의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성경지리 탐방의 뿌리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하지만 구약적 개념으로 본 다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때만 되면 1년에 3번 정도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수확물(대개 곡식)들을 하나님께 헌상하고 돌아오는 여정들 속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추억을 회상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확증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성경지리 탐방의 기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편을 보면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러한 부제는 성경지리 탐방의 단초를 제공하는 의미는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유대적 전통이 신약과 접목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하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현장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흔적과 초대교회가 시작한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들의 행적을 몸소 체험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다지면서 그 여정을 밟는 것이 성경지리 탐방의 기원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의 노선을 추적하면서 가장 크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면,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출애굽 당시의 지명들이, 일부는 변형되었거나 없어졌을지라도 대부분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의 방편으로 기록된 성경의 역사가 사실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지리적 환경이 어떻게 성경과 일치하며 조화를 이루는지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 이번 성경지리 탐방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행을 하면서 확인한, 또 한 가지의 사실은 영적으로 암흑기라고 일컬어지는 중세시대의 교회 건물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는데, 한결같이 웅장하고 화려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엄청난 건물들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네 절간 같은 느낌과 더불어 수많은 성화와 성상들이 건물 내벽과 외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 중세 종교개혁자들이 왜 캐톨릭주의자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했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4세기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는 있었으나 오히려 화려하며 외식적이고 의식적인 문화가 교회 안에 침투하면서 사실상 하나님과의 관계는 불투명한 시대로 접어들었고, 급기야는 하나님은 화려하게 치장한 건물 문화에 갇혀 버린 시대가 영적으로 눈먼 중세 암흑기가 아니던가? 그러한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에 세워진 건물더미 속에서 우리는 성경지리 탐방이라는 여정을 통하여 무엇을 생각하고 배워야할지를 깊이 상고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중세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개신교인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중세시대에 세워진 화려한 건물더미 속에서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유산들을 접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억제할 수 없는 감정들을 폭발시키는 것은 진정으로 말씀에 입각한 신앙심의 발로에서 나타난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성지순례를 상업적인 포석이 깔린 미신주의라고 경계하면서, 순례 자체를 영적인 은총의 산물이 아님을 강조했던 사실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번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 중의 하나는 예루살렘에서의 일이다. 그것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같은 일행 모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의 현장에 찾아가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의미로 이미 준비되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행 모두는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비아돌로로사)이라고 일컬어지는 골고다의 언덕을 함께 통과하면서 필자는 많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형제와 자매들은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훌쩍거리는 모습들 속에서 말이다. 정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 모두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를, 필자 스스로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셨는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가 정말 무엇일까? 신자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흔히, 남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대신 져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대단한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가끔 대통령이나 청치인들이 국민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십자가를 지고 갈 것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남의 무거운 짐을 대신 맡아주고, 짐을 대신 져주는 것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세상 사람들도 주위의 어려운 환경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물질들을 투자하면서 육신적으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는데, 과연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구원을 떠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자신들의 윤리적인 시각과 도덕적인 관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지라도 그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결과는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세상에서 평가하는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실천하고 살아가는 삶을 가리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넓은 의미로 두 가지 정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시기와 질투와 억압 받는 일도 능히 감수하는 일이다. 이는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모든 종교는 자기들 나름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주의, 그래서 서로 다른 종교일지라도 인정해 주고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자고 하는 종교 간음자들의 사상)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어서 그들로부터 고통 받는 삶을 가리켜 십자가를 지는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자랑하는 신앙인은 오늘날 한국에서는 크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슬람권에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외친다면, 쉽게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구원이 오직 주님 밖에 없다고 믿는 신앙이 얼마나 우리의 목숨을 담보한 신앙인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는 통상 남의 고통을 대신 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本意는 그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인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러한 천상적 가치관을 가진 주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대하여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보다 더 나은 천성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으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와 같은 삶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자신의 성을 쌓기 위해서 투기를 하거나 자신의 행복을 담보하기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끌어들인다거나 발버둥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결국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벧후3:10~13).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고후4:18)이라고 말이다.


 오늘날 말씀을 증거한다고 하는 가짜 사역자들의 오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큰 성을 쌓고 부한 자로 살아가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천당을 부르짖고 눈물로 통회하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결과는 지옥뿐이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주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헌신 봉사했던 자들을 주님은 외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마25:44~46). 더욱 더 큰 문제는 저들이 주님이 오실 때 까지도 자신들이 진짜 신자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수고와 땀의 결과 자체까지도 주님의 것임을 안다면, 우리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장차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할 일을 다 하고도 무익한 종으로서 주님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