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문학의 기원
폴 핸슨 이무용·김지은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성경에도 응달처럼 취급되는 곳이 있다. 소위 '후기 선지서'라고 불리워지는 곳이다.
비역사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이 남발되는 곳이요 역사적인 요소와 뒤엉켜 있어 이성의 혼돈을 요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본 책은 바로 이러한 계시의 밀림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그 실상을 정돈된 구조로 독자 앞에 명백하게 규명시키고자 했다.
묵시문학이 발생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예언자들의 약속이 점차적으로 느슨해진 시기였다.
현실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으로 알고 있었던 영광된 미래상이 전혀 실효성이 없어져
갔던 것이다. 그당시 역사적-정치적 상황이 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 악을 통제할 어떠
한 낙관적 현실이 마련되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이방 종교와는 달리 예언된 약속이 추진력을 갖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성취가 되는 고리로 인해 이어져 왔다. 선지자들은 하늘의 뜻을 전달했고 정치적, 군사적 책임이 있는 자는 그것을 실천해 옮김으로서 철저히 약속에 종속되는 국가로 유지하려고 했다.
약속 구현을 위한 행정 체제에 있어 이스라엘은 왕과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체제로 양립되어 구축되었다. 그런데 이 제사장직에 대해서 같은 아론의 후계라도 사독 계열과 비사독계열로 구분되었다.
사독 계열만이 제사장직을 독점하는 반면에 비사독 계열은 더 이상 제사장이 될 수 없고 소위 레위인들로서 성전에서 비천한 일을 도모하게 된다. 번제물을 준비한다든지, 성전의 문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된다. 사독 계열에 속한 자들은 이러한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 행정 체제 유지와 반복되는 제사 이외에 더 이상 다른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적 제사장 권력에서 소외당한 비사독계열에 속한 레위인들과 예언자들의 반발이 포로기에 일어나게 되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사에 비추어 재조명하는 가운데 예배를 독점적으로 장악한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의 죄악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구체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즉 그들의 신실해 보이는 제사 규례 준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혀 이스라엘의 정치적 어려움을 돌보지 않았으면 도리어 그들의 가증된 제사로 인해 이스라엘을 파멸의 길로 몰아 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장래에 어떻게 역사 하신다는 말인가?
여기에 환상 예언자 집단이 부각이 된다. 정치적 상황하고는 무관한 질서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개입으로 실시된다는 것이다. 그 개입이란 바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면적인 심판이 가해지게 되며, 구원도 소수에 억눌리고 비천한 자들에게 특별한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이런 묵시 사상가 집단과 성직자 집단의 갈등은 포로 이후 본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더욱 심화된다. 에스겔이 본 묵시적 새성전을 실제로 재건립하여 묵시마저 현실적인 것으로 합법적으로 회복하겠다는 나서는 사독 계열의 성직자들의 주장이라면, 페르시아 정부의 비호 아래 거짓 성전을 지어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 묵시사상가들의 주장이었다.
사독 계열의 성직자들은, 에스겔에 나오는 '성소' 개념을 자기들에게 알맞도록 원용한다. 즉 포로 잡혀 있는 정통 성직자들인 자기들과 하나님이 영원한 계약을 맺었고 그 성취로서 이방인 집권자를 마치 메시아처럼 사용하여 자기들에게 후원을 입히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개, 스가랴에 나오는 제사장직 성전 프로그램은 예언선상에서 볼 때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성전 밖에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할 수 없는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종이란 바로 실재적 인물인 스룹바벨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성전의 메시야적 재건자이다. 그러나 예레미아나 이사야에 있어 하나님의 종이란 바로 이러한 사독 가문들로 인해 고난받고 배척받는 예언자 집단을 지칭한다는 것이 환상가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사독 계열의 환상가들에 의해 정통 사독 계열의 제사장이 그토록 오해받고 고발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그 여호수아를 사탄 앞에서 완전히 죄사함해 주신다. 고소자는 사탄과 동일시되며 여호와는 그 사탄을 책망한다. 제사장 규례에 따라 제사장은 정식으로 옷을 갈아입으므로써 예배의 순수성을 이룬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사독계- 지배 제사장 통치성 구조를 붕괴하고자 함이 아니라 성결케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비해서 묵시적 환상가들은 성전 재건축을 달리 해석한다.
즉 성전 통치자 세력의 등극은 그 자체가 곧 망하게 될 악의 통치의 절정에 이른 상태라는 것이다.
성전이 재건되자마자 오랫동안 기다렸던 종말이 올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선포이다.
이 타락의 원인을 페르시아와의 동맹에서 찾았다. 참된 회복은 이처럼 이방족과의 협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장하신 전사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도움 없이 이 세상을 정복하므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스룹바벨을 메시야로 간주하든, 성전을 새 예루살렘으로 간주하든, 사독자손의 제사장들을 종말의 통치자로 간주하든, 현재의 현상들을 종말론적인 왕국과 동일시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이스라엘 국가가 이 지상에 처음 등장될 때부터 참된 성전은 오직 직접 싸우시는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가능했던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전쟁과 승리→무장하신 하나님의 현현→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성전 건축과 예배→여호와의 우주적 통치의 개시 라는 일관된 투쟁 사실이 기본적 유형을 띠면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은 시편에 있어서도 확립된 참 이스라엘의 정적질서로서 전달되고 있다.
시온은 새로운 하나님의 동산이며 다윗왕은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은 결코 이웃한 잡신들과 양립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적 도구도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지 않는다. 타락한 세계에서의 구원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묵시적 환상가들은 어떠한 역사 속의 사건들이 나름대로 결속하여 예언적 미래상을 구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해체시켜 버린다. 특히 성전에서 토기장이밭으로 던져지는 은 삼십량 비유나, 억울하게 찔림 받는 고난의 종의 상처 비유를 통해서, 왕조 신학과 왕정 예배에 대항하다가 고난받는 자기 자신들의 처지에다가 적용한다. 성직자 집단이 말하는 역사적 예언이란 기껏 구원사건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묵시가들은 두 개의 이스라엘의 존재함을 명백히 한다. 그리고 참된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의해서 이 종말의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 된다.
저자는 이와 같이 묵시문학 안에 나타나 있는 심판-구원의 혼합 형식을 통해 그 당시 갈등과 충돌을 점검하는 것으로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선에서 머문다. 어느 한쪽의 노선을 불변의 진리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성실한 자에게 나아간다고 말한다.
성경적인 평가
성경의 내용을, 현실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낀 전문종교인의 넋두리와 시기심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다. 하나님은 죄로서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죄란 인간이 자아 존재성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의미를 생성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사독 계열에 속한 성직자이든 비사독계열의 소외된 환상가이든 상관없이 단지 자기 주체적 활동과 주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시도해서 내뱉어 놓은 것이 하나님의 예언이고 말씀이라면 그것은 삼국지와 같은 일개 역사 소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 가운데는 인간의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탐욕성이 충만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해석되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의 종인 예언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봐야 한다. 그들이 소리쳤던 바는 그 당시 인간의 삶의 정황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의 신실하심이었다. 스스로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모든 근원적인 죄를 오실 메시야의 의로움을 가지고 고발한 것이다. 죄를 모르는 자들이 벌리는 신학 작업이 기껏 역사 해설에 머문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준 책이다.
'기독칼럼·논문·서적 > 기독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SBS 방송 모티브 된 「예수는 신화다」에 대한 반박 (0) | 2008.09.22 |
|---|---|
| 마가복음 1:4,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0) | 2008.09.20 |
| 히브리어 헬라어 폰트 (0) | 2008.09.08 |
| 히브리 헬라어 (0) | 2008.09.08 |
| 취하지 않을 만큼만 마셔라? (0) | 2008.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