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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할례의 진정한 의미 - 7. 언약: 그 구속의 파노라마 II. 주제연구

은바리라이프 2008. 6. 3. 19:47
(6) 할례의 진정한 의미 - 7. 언약: 그 구속의 파노라마 II. 주제연구
 김무현
한국창조과학회 미주 텍사스지부장
Texas A&M 대학 교수
해양|토목 공학 박사


6) 할례의 진정한 의미 (The True Meaning of Circumcision)

창세기 17:8-14에는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의 명령을 주십니다.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세기 17:11)

이 육체적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계속해서 상기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궁극적으로 성령님께서 베푸실 마음의 할례를 예표 하기도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명기 30:6)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프뉴마:성령)에 있고 의문(the letter)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2:28-29상)

성경은 그 할례의 대상은 어디까지 포함된다고 증거합니까(갈라디아서 3:8)?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세기 17:12)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갈라디아서 3:8)

저(아브라함)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4:11)

많은 믿지 않는 형제들과 심지어 믿음의 형제들에게서도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민족만 특별히 선택하시고 보호하시며 전쟁에서도 주위의 이방민족만 너무나 무참히 심판하시던데 하나님도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자(racist)가 아니냐?” 라는 반감이 많이 섞인 항의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사야 10:15과 29:16 입니다.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사야 29:16)

진흙이 토기장이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역사의 주권자로 먼저 인정하십시오. 그의 그러한 권한은 피조물인 우리가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9:20-23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로마서 9:20)

실제로 이스라엘은 핏줄(혈육) 공동체가 아니라 언약공동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일지라도 위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주로 섬기기로 작정하면 누구나 그 공동체 안에 속하고 할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출애굽기 12:38, 12:48-50).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언약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출애굽기 12:48)

다윗의 충신 우리야도 헷사람이었으며(사무엘하 11:3)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을 전한 병사도 아말렉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군대에 쫓겨 예루살렘을 떠날 때 함께 했던 가드 사람 잇대 및 육 백인도 다 블레셋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 다섯 명 중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라합, 다말, 룻, 밧세바) 네 명이 다 이방여인들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이와 같은 예를 수도 없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도 그 성의 모든 백성이 홍해가 갈라지고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곳까지 인도해 오신 것을 분명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여호수아 2:9-10). 그들은 단지 라합과 같이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언약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었습니다. 이와 같이 결단한 이방 여인인 라합이 생명을 보존한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조상이 된 축복을 받은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마태복음 1장).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로마서 3:29-30)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2-13)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내용을 분명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분명히 듣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 믿는 형제/자매들의 책임이겠지요?) 여리고 성의 백성들과 같이 그 복음을 거부하여 멸망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믿는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2)

예레미야 4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거스려 자만함으로 사악해진 모압을 심판하시면서도 그들이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심지어 울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예레미야 48:31)

이스라엘은 주위의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나님을 알리고 믿게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다면, 더 많은 민족이 언약 안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량한 선민의식만을 내세우며 이기적인 잘 못 된 길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십자가도 바로 공의와 사랑의 양면성의 표현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인류의 반역과 타락의 죄를 심판하시지 않고 간과해 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을 너무도 사랑하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경이와 비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26)

여리고성의 심판은 똑같이 불신자들의 미래에 받을 심판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 성안에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래도 착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복음을 거부함으로 죄 안에서 불 속에서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을 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여리고 성과 똑같이 불태움을 당하는 심판이 알 수 없는 미래에 임할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반역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타게 부르심같이, 지금도 주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영혼들을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나(하나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에스겔 33:11)

그 사랑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베드로후서 3: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그렇지만 그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지지 않고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죄를 간과하시지 않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어떠한 죄 보다도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고, 자기가 그 위에 서서, 자기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의 죄가 하나님께는 가장 큰 죄라는 것도 기억하십시오(잠언 6:16-17).

나(예수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믿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성경)이 마지막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8)

어떠한 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심각한 악입니까?(잠언 6:17) 당신이 당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추구하는 바알(우상)은 무엇입니까? 진화론입니까? 이데올로기입니까? 부입니까? 명예입니까? 지위입니까? 혹시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심각한 죄임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들이 왜 우상을 섬기는지 아십니까? 우상은 사람이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간섭하지 않습니다. 좌를 탓하거나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평소에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해 마음이 약해지면 우상에게로 달려가 빕니다. 특별한 우상이 없을지라도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사는 인생은 자신이 자기의 우상입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로마서 6:20)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장대(십자가)에 높이 달린 놋뱀(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민수기 21:9, 요한복음 3:14).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비웃으며 자기가 친 장막(tent)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죄 안에서 죽어갑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봅시다. 독사가 물었으면 피를 빨아내야지 놋뱀을 바라보면 낫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하며 자기 논리 안에서 복음을 거부하며 당장 눈에 보이는 일이나 물질과 육신만을 위하며 살다가 죽어갑니다. 당신은 당신의 주위에서 죽어 가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뜨거운 전도의 열정을 갖고 계십니까?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