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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은바리라이프 2008. 4. 4. 00:31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윌리엄 슈니더윈드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성경은 언제, 왜 글로 씌어졌을까? 이 질문은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간주할 때 제기되는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인류 문화가 겪은 의미심장한 전환기를 암시하기도 한다. 글로 쓴 거룩한 텍스트가 목축과 농경에 기반을 둔 구술문화에서 생겨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

 

성경 기록자의 문제

우리는 성경을 원래부터 책이었다고 간주하고 읽는다. 지극히 문자화된 사회에 익숙한 관점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책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씌어졌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오늘날의 은 양면에 글을 써넣은 종이들을 한데 묶어 만든 코덱스의 발명으로 탄생했다. 코덱스 형태는 1세기에 처음 출현하여 4세기에는 보편화되었다. 코덱스는 두루마리에 비해 여러 문서들을 훨씬 간편하게 묶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마침내 성경도 우리에게 익숙한 한 권의 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성경의 각 권을 따로따로 써서 보관된 두루마리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성경 각 권의 순서가 정해져야 했고, 이것이 정경(canon)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코덱스 덕분에 성경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코덱스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씌어졌다. 성경을 뜻하는 영어 단어 bible'은 그리스어 비블리아biblia'에서 온 말인데, 이는 책들 또는 두루마리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라는 물음은 성경의 각 권들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누가 성경을 썼는가 하는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지만, 그만큼 논쟁의 여지도 많다. 이 문제가 얼마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발동시켰는지는 리처드 엘리엣 프리드먼의 베스트셀러 누가 성경을 썼는가?의 판매 부수만 봐도 알 수 있다.

 

문학적 측면에서 던질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 하나는 저자는 누구인지 알면 작품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급에게 텍스트가 있는가?에서 스탠리 피시는 글의 내용을 해석하는 공동체가 궁극적으로는 저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독자가 글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성경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진다. 성경은 여러 권들의 집합체이지 어느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다. 더구나 성경처럼 오래된 글에서 저자라고 추측되는 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알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성경의 저자가 누구냐는 질문은 각 개인 저자들이 부각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개인에 대한 강조는 미국 문화에서는 우상화되는 가치일지 모르나 전 세계에 보편화된 문화적 가치는 아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집단을 개인보다 우선시한다. 예를 들어 민속문학 작품은 전통을 공유하는 집단에 속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그 이야기를 노래로 전달하는 이의 소유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개인은 집단 속에 스며들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글은 단순한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집단의 공동 전승이었던 것이다.

 

저자에게 권위가 있는가?

성경 각 권의 저자가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교의가 나와 있었다. 사무엘, 예레미아,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은 마음먹고 앉아서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책을 썼다고 여겨졌다. 그런 후에 제사장 에스라가 이런 책들을 한데 모아 편찬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형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라고 명령 받았지 기록하라고 명령받지는 않았다. 가장 확실한 예가 예레미아서에 나온다. 예레미아서에서 기록 활동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예언자가 받은 예언은 처음으로 왕을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기록한 이는 예레미아 자신이 아니라 그의 비서 역할을 했던 서기관 바룩이었다. 사실 한참 후대까지도 무언가를 기록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당시 필기도구를 구하거나 두루마리를 제작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다.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도록 뒷받침해줄 사회적 기반도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에서 전승은 왕실이나 성전에 관한 내용이 아니면 대체로 구전되었다. 왕실이나 성전에 관한 전승만이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탄탄했던 왕실이나 제사장에 의해 기록될 수 있었다.

 

성경은 왜 기록된 글인가?

왜 성경은 기록된 글인가라는 이 책의 두 번째 질문은 성경의 저자를 묻는 질문보다 훨씬 흥미롭다. 대부분의 사람이 글을 알게 된 것은 현대에나 가능해진 일이다. 모세 같은 인물이 글에 능통했으리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으나, 그가 애굽(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노예 신세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능숙하게 글을 읽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데, 어째서 글로 썼을까? 당시 쓰기 도구였던 두루마리는 비싸서 널리 유통되지도 못했는데, 왜 굳이 글로 써야 했을까?

 

토라(모세오경)은 무엇보다 먼저 글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구전으로 이스라엘에 전해내려온 것이다. 성경에서 십계명을 받는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출애굽기 19~20장에는 계명을 받아 적는다는 말이 전혀 없다. 이는 십계명을 받은 시기가 유대 문화에서 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이전이었음을 뜻하며, 따라서 산 전승이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율법을 받는 두 번째 이야기가 기록된 신명기는 계시의 기록이 유대 문화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일어난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 책의 민족으로의 전환을 반영한다.

 

문자문화는 상거래에 관한 짧은 글이나 행정상의 목록 따위를 읽고 쓰는 매우 일상적인 수준에서부터 모세오경이나 이사야서 같은 글을 기록하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언어학자들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사이의 유동성을 강조해왔다. 일례로 성경에서는 예언을 전달할 때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표현을 쓴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기록상의 정형구가 되었지만, 원래는 구술에 의한 메시지 전달 방식이었다.

 

어쩌면 더 중요한 사실은 권위를 놓고 구두전승과 기록된 글 간에 벌인 경쟁일 것이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한데 얽혀 있었던 반면, 구두전승과 기록된 글은 상이한 형태의 권위로서 서로 경쟁한다. 어떤 문화에서 권위의 근거가 구두전승에서 기록된 글로 옮겨질 때는 이는 교육상의 급진적인 전환을 초래한다.

구전에서 기록으로의 전환은 심오한 문화적 변화이기도 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모든 사회계층에서 책과 글쓰기에 대한 저항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술자와 장인의 거부감이 심했다. 이는 그들이 기술을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 구전으로만 전수했기 때문이다. 기록된 말에 대한 비판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은 격언이었다. 책과 글쓰기로부터 가장 위협을 받았던 것은 바로 공동체 내에서 만들어져 구두로 전해내려온 격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연장선상에 놓였던 반면, 기록된 글과 살아 있는 목소리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이런 갈등은 이 둘이 문화적·종교적 권위의 기반을 두고 자리 다툼을 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구전된 토라는 누구나 접할 수 있었던 반면, 성경은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었다. 종교적 권위가 구두전승에서 기록된 글로 옮겨간 것은 표면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런 전환은 종교적 불협화음을 예고한다. 이것은 종교 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고 교육의 본질과 목적도 바꿔놓는다. 또한 정치권력의 재편도 불러온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글쓰기의 기술 혁신 덕분에 가능했던 것처럼, 유대교의 문자화 역시 사회적·기술적 변화 덕분에 가능했다. 문자문화의 확산을 가능케 한 첫 번째 기술 변화는 문자 해독을 용이하게 만들어준 알파벳의 발명이었다. 기원전 8세기, 최초의 대제국인 앗시리아 제국의 발흥과 더불어 알파벳 사용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록된 말씀이 권위를 얻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이후 1세기 무렵 책의 형태인 코덱스의 발명으로 이리저리 따로 돌아다니던 성경 각 권의 두루마리들을 한데 모아 더욱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코덱스는 설교, 가르침, 예배시의 낭독 등에 두루마리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성경이 씌어진 시기는 정확히 언제일까?

정경으로 승인된 각 권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오늘날의 성경이 기원전 5세기와 기원후 4세기 사이에 제작되었다는 주장은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이 시기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책을 정경으로 택할 것인가, 각 권들을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 각 권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또 각 권들에 어떤 해설을 첨가할 것인가 등을 결정하는 편집 작업이 대략 위의 9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글과 국가

고대사회에서 글이 만들어지고 보편화된 데는 국가와 제국의 성립과 직접 연관이 있다. 국가의 지원 없이는 고대의 어느 곳에서도 글쓰기가 활성화될 수 없었다. 글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명이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큰 몫을 했다. 당시 막 등장하기 시작한 서기관 계층에 제한되기는 했어도 글을 행정과 고급문화가 발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글이 들어간 공공의 기념물은 사람들이 읽으라고 세운 것이 아니라 왕실의 힘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가장 힘이 미약한 왕위 계승 후보자라도 개인 서기관을 거느리려 했다. 고대 근동에서 국가라는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글과 문학의 융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알파벳의 발명은 국가의 제도적 지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글쓰기를 보편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알파벳은 사실상 기원전 1000년대 초반에 이미 발명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고대 세계에 문자문화가 퍼져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고대사회에서 글의 번성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국가의 지원과 적절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필요로 했다.

 

글의 초기 용도

글은 세련된 도시 경제 활동을 촉진시켰다. 생산품을 식별하고 물건의 종류와 양을 기록하며, 지식을 축적하는 데 글은 유용한 수단이었다. 글은 기원전 3000년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장부 기록 등 도시국가들의 행정적·경제적 필요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서기관들은 상거래 기록을 남기려고 부드러운 진흙으로 빚은 점토판에 숫자와 그림 부호를 그려넣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음절을 표시하는 상징적 기호가 생겨났고, 기록된 글의 힘과 융통성은 나날이 더해갔다.

 

설형문자나 신성문자 같은 초기의 문자체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어느 시대나 설형문자는 대부분 문법적 요소(복수형 어미 따위)나 특정한 의미의 단어, 또는 단순한 음절로 사용되는 600여 개의 기호를 사용했다. 이집트의 신성문자에도 몇 백 개의 기호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모두 포함된다. 너무나도 복잡했던 이런 문자 체계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전문 서기관만이 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예술 세계에서 이집트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여전히 소수의 엘리트와 왕들만 글을 사용할 줄 알았다. 엄청나게 많은 설형문자와 신성문자로 된 글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었지만, 대부분이 관료조직이나 경제·행정·종교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초기의 글은 대개 정보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어서 문학적 글은 거의 없었다.

 

알파벳의 발명

글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은 바로 알파벳의 발명이었다. 글은 대체로 말과 관련지어 분석되지만, 글을 반드시 말과 연관 지을 필요는 없다. 초기 신성문자와 설형문자의 경우를 보면, 글은 단순히 기억을 돕는 도구였다. 말과 글은 크게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알파벳의 발명으로 글의 기호체계와 말은 서로 보조를 맞추었고, 문자문화의 확산도 용이해졌다. 알파벳은 글을 대중화하는 힘이 있었고, 그 덕분에 문자문화가 서기관 계급을 넘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혁신은 글의 신비감을 감소시켰다. 알파벳으로 처음 쓴 글이 낙서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알파벳이 글을 배우기 용이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문자문화가 실제로 서기관 계급을 넘어 확산되기까지는 10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글

앗시리아 제국은 정치·행정상의 필요에서 마침내 외국의 문자체계인 알파벳과 외국어인 아람어를 쓰기 시작했다. 앗시리아의 제국 이념은 다양한 말을 쓰는 사람들을 단일한 말만 사용하도록 했다.

 

앗시리아인들은 정치적 이념에서 비롯된 실천적인 언어정책을 추구했다. 그들은 언어와 민족주의 사이의 관계를 잘 알았다. 인종과 지역, 언어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한 앗시리아의 방책은 외국의 문자체계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방책의 탁월성은 앗시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언어인 아카드어로 제국의 언어를 통일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아카드어 대신 나날이 커져가는 제국의 행정업무에 편리하도록, 서기관들이 보다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알파벳으로 된 아람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도시화, 세계화에 따른 경제성장과 더불어 제국 전역에 걸친 알파벳 사용은 제국의 서부 지역에서 글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히스기야와 성경 기록의 시작

성경은 기원전 8세기 후반, 예언자 이사야와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시기에 이르러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강력한 사회적·정치적 힘이 결집하면서 이전에는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전승의 수집과 새로운 글의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예루살렘은 강력한 정치적 중심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작고 고립된 성읍에서 거대한 국제도시로 급속하게 성장했던 것이다. 글은 도시 관료제도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날이 세력을 더해가는 왕실의 힘을 확장시키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성경의 수집과 기록을 촉진시켰다. 성경이 글로 기록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앗시리아 제국

유다, 시리아-팔레스타인, 더 나아가 서구 문명 전체에 미친 앗시리아 제국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앗시리아는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었다. 앗시리아의 인정사정 없는 영토 확장 덕분에 디글랏빌레셀3(기원전 745~기원전 727)는 앗시리아와 바빌론을 병합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소아시아의 우랄투 왕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제국을 확장시켰다. 이후의 앗시리아 왕들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전역을 정복했고, 잠시나마 이집트도 손아귀에 넣었다. 기원전 7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은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멸망하여 사라졌다기보다는 바빌로니아, 이어 페르시아, 그리고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에게로 넘어갔다. 그렇게 앗시리아는 확장을 거듭하며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했다.

 

앗시리아는 근동을 세계화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단일한 정치체제와 경제, 언어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앗시리아인들은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제도를 구비했다. 제국의 행정에서 글은 날로 중요해졌다. 기원전 8세기 글의 확산은 앗시리아나 앗시리아에게 병합되지 않은 유다에서만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앗시리아 제국의 팽창과 맞물려 고대 근동 전역에서 일어난 국제적 경향이었다.

 

도시화

기원전 8세기 중엽, 앗시리아 제국은 근동지역의 형세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 결과 도시화가 나타났다. 앗시리아 제국의 잔인 무도한 정책은 시골의 인구가 도시로 몰리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도시가 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경제 자원과 전문기술을 요새 건설에 집중함으로써 주민들을 적군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앗시리아의 맹공을 피한 유다는 근동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8세기 말엽에 도시화로의 엄청난 변환을 겪게 됐다.

 

도시화는 기록 활동이 확산되는 데 촉매 역할을 했을 것이다. 초기 왕정(기원전 11세기~기원전 9세기)과 바빌로니아·페르시아 시기(기원전 6세기~기원전 4세기)에 서기관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활동했지만, 기원전 7,8세기는 서기관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시대였고, 히브리 문학이 꽃 피울 수 있는 최적의 사회적 조건이 구비되었다. 유대 민족의 삶에 일어난 이런 변화는 특히 예루살렘에서 두드러졌다.

 

 

예루살렘의 도시화

이스라엘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을 성경의 수집과 창작이 이루어진 중심지로 본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문학적 전승들을 수집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재정적으로 후원해준 것은 분명히 왕실 기관과 성전이었다. 유다 왕정 시기에 예루살렘이 어느 정도 크기였을까? 나흐만 아비가드가 발견한 넓은 벽은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에 위치하며, 그 폭이 6미터 이상이다. 이 성벽의 연대는 기원전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앗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여 히스기야가 지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예루살렘이 기원전 8세기 후반에 무려 네 배나 커지고, 유다 왕국의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성장은 앗시리아 제국의 발흥에 따른 부산물이었다.

 

기원전 722,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북왕국의 멸망으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주민의 행렬을 대면한다. 국가의 관료제도는 예루살렘의 인구와 더불어 성장했다. 많은 공공 건축은 왕정의 성장을 반영한다. 왕실은 행정체계도 새로이 구축했다. 히스기야는 네 개의 행정도시를 만들었고 조세와 공급 체계를 정비했다.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유다 전체 인구의 6퍼센트가 거주했던 예루살렘은 두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30퍼센트의 인구가 거주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황금기의 회복과 북왕국과의 통일을 염원한 유다의 정치적 이념과 맞아떨어졌다. 이 황금기는 히스기야 서기관들의 문헌 수집과 창작, 편집을 통해 문서로 남겨졌다.

 

모세오경에 관련된 글들

학자들은 모세오경에 관련된 문헌의 연대를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의 한 시점으로 제각기 추정해왔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의 맨 앞에 놓인 다섯 권의 연대를 추정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을 성경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에서 글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세오경 가운데 신명기에서만 글이 제대로 대우를 받는다. 모세오경에서 전반적으로 글을 중시하지 않는 태도는 모세오경을 다시 고쳐 쓴 헬레니즘 시기의 요벨서와 비교해볼 때 더 잘 드러난다.

 

모세오경의 연대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두 가지 이유에서 모세오경이 아주 늦은 시기(가령 페르시아 시기 또는 기원전 4,5세기)에 씌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첫 번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모세오경이 애초에 후기 히브리어가 아닌 고전 히브리어로 씌어졌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모세오경에서 이스라엘의 북쪽 지파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북왕국은 기원전 8세기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정치적 정통성과는 거리가 먼 망나니처럼 묘사되었다. 모세오경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북왕국이 세력을 잃기 전이었음이 틀림없다.

 

기원전 8세기의 기록 예언자들

아이러니하게도 기록 예언자라고 불리는 이사야, 미가, 아모스, 호세아는 전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기록 예언자로 불림으로써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이 없는 나단이나 엘리야 같은 인물과 대비된다. 그러나 각 예언자의 이름을 딴 이 책에서 이 예언자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글로 썼다고 언급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하라고 명령했지, 글을 쓰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의 예언서에는 책이란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일은 8세기의 예언자들에게 전혀 중요한 활동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의 책을 기록해준 것일까? 예언서인 이사야서, 미가서, 아모스서, 호세아서에는 이 책들의 시대 배경이 기원전 8세기 중엽에서 말까지임을 알려주는 설명이 맨 처음 나온다. 이는 곧 예언자들이 받은 말씀을 수집하는 편집 활동이 있었다는 뜻이다.

 

히스기야의 서기관들은 전해내려오던 여러 지혜의 말들을 솔로몬 왕이 지었다고 여기며 한데 모았다. 왕실 서기관들은 또한 북왕국 몰락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신명기적 역사서도 만들어냈다. 당대의 사건인 북왕국 사람들의 이주와 다윗 자손들의 생존은 이런 문헌을 기록하게 만든 시대적 배경이었다. 성전의 제사장들도 아마 성결규례(레위기 17~26)와 같은, 제사장들에게 내려오던 전승을 수집하고 편집했을 것이다. 창세기, 출애굽기에 나오는 초기 이스라엘의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로 수집되었다. 출애굽기는 이미 추방과 구속, 왕권의 강력한 상징으로서 기능했다. 이 각각의 글은 궁극적으로 다윗의 자손들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토라가 글로 기록되기까지

모세오경, 곧 토라의 기록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문자화의 두드러진 한 예이다. 토라의 기록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단연 모세이다. 그런데 토라가 글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모세의 역할은 각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된다. 모세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후에 씌어진 많은 글과 전승이 여전히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여겨졌고, 마침내는 토라 전체를 모세가 기록했다고 알려졌다. 기원전 300~기원후 300, 헬레니즘 시기의 유대인들은 요벨서와 같은 책을 지으면서 그 저자로 모세의 이름을 붙였다.

 

말씀인 토라

우선 토라의 히브리어 원뜻이 구전을 내포하는 가르침 또는 교훈을 전함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토라라는 말은 이 원뜻으로 널리 사용된다. 동시에 모세오경에는 가르침의 본체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가리켜 토라라고 칭해왔다. 토라의 히브리어 본뜻인 가르침의 바탕에는 구술문화가 깔려 있다. 이 단어는 글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토라(모세오경) 내에서 가르침이란 원뜻으로 토라가 사용되는 것은 아직 이 단어가 전문용어로 자리잡기 전 단계였음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모세오경이 적어도 네 가지 출처에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왔다. 여기에는 제사장계 문서와 신명기적 문서가 포함된다. 간단히 말해서, 레위기와 민수기는 제사장계 문서에 해당하고 신명기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신명기적 문서에 해당한다. 벨하우젠 이후 학계 의견을 따르면, 제사장계 문서는 모세오경을 이루는 네 가지 출처 중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토라는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기록된 텍스트를 의미하는 용어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토라는 (말로 전하는) 가르침, 교훈이라는 원뜻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제사장계 문서가 자신의 문자성을 의식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부분 제사장에 의해 기록되었고 토라가 기록된 텍스트를 의미했던 페르시아 시기나 헬레니즘 시기의 문헌과 대조를 이룬다.

 

기록된 토라(앞에 기록된이란 말을 붙인 것에 주의하라)는 에스라기, 느헤미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페르시아 시기의 종교 활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기 8장에서는 모세의 토라를 기록한 두루마리를 읽고, 연구하고, 준행했다. 이렇게 토라가 문자화되는 과정은 역대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토라는 확고하게 기록된 텍스트를 뜻했다. 이처럼 토라가 말로 된 가르침이나 교훈이 아니라 기록된 텍스트로 여겨지게 된 것은 신명기와 요시야 시기의 기록자들 덕분이었다.

 

지속적인 토라의 문자화

문자화의 과정은 단순한 역사적 발달 과정보다 훨씬 복잡하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리고 유대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글과 구전이 맡았던 역할은 매우 복잡하다. 연속성과 팽팽한 대립이 구전(구전된 토라)과 기록된 토라 사이에 공존했다. 이런 대립관계는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유대교 성립 시기에 상이한 사회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반영한다. 요시아와 그의 신명기적 개혁은 도시와 제사장 특권층에 대한 땅의 백성(지방민)의 반발이었다. 이때 토라는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으로 기록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구전과 예언적 말이야말로 참 지혜로 여겨지며 숭상되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정통성을 획득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려는 종교적 특권층(거짓을 말하는 서기관들)이 사용한 기록된 토라가 사회에서 점차로 중요성을 더해가는 데에 이미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기록된 텍스트는 완성되었고, 결국 구전을 대체하게 되었다. 구전은 이전의 권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문자화 과정에서 결국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성전 그늘 아래에서의 성경

페르시아 시기에 왕실 중심의 성경 기록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 시기에는 다윗 계보의 왕들이 사라지고, 대신 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세력으로 부상했다. 유대 민족은 점차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성경의 기록과 편집 역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졌으며, 제사장들의 통제를 받았다. 다윗의 자손들이 잊혀지지는 않았으나, 예전의 지위는 완전히 박탈당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왕손들인 다윗의 자손들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다윗과 그 자손들은 성전과 제사장들, 그리고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의 후견인일 뿐이었다. 다윗의 자리는 대제사장이자 서기관(또는 하자)이었던 에스라가 차지한다. 

 

페르시아 시기는 엄밀히 말하면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지만, 한동안은 다윗 계보의 왕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실제로 다스리게 된 시기는 기원전 6세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페르시아의 관할 아래 있었던 이 시기는 예루살렘의 암흑기였다. 이 당시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시기에 제사장과 서기관은 이스라엘의 문학을 창조하기보다는 보존하는 데 그쳤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기록 활동은 아주 제한되었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사용되던 아람어의 영향이 히브리어에도 짙게 드리워졌다. 페르시아 시기의 성경 기록은 어떤 새로운 내용이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아주 적은 양에 지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점령기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큰 책은 역대기, 에스라기, 느헤미야기 정도이다. 이 책들에는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 사용한 아람어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사장의 편집 활동은 내용별로 소제목을 달고, 편집적 해설을 덧붙이며, 성경의 각 권을 종류별로 묶는 일 등을 포함했다. 그래서 소예언자들(호세아, 요엘, 아보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 쓴 상대적으로 짧은 예언 두루마리들은 12소예언서(또는 12선지서)라는 하나의 큰 두루마리로 묶였다. 모세오경은 원래 포로기 이전에 다 기록되었지만, 최종 편집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사회 상황을 감안할 때 페르시아 시기에 정전을 모두 편집하여 확립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일부 편집 과정은 분명히 초기 헬레니즘 시기인 기원전 3세기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원전 3세기는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이집트 왕실로부터 서기관들이 기록 활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시기의 글쓰기와 성경

페르시아 시기에 히브리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언어가 되었지만, 글쓰기 자체의 역할은 더욱 중시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표준 아람어를 고대 근동 전역의 공용어로 채택했다. 아람어의 영향은 특히 페르시아 제국에서 기록된 성경 부분에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특히 에스라기도 상당 부분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히브리어가 지속적으로 쓰이던 때조차도 공용어인 아람어의 영향은 고스란히 히브리어에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람어는 성경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에 기록된 책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람어가 널리 사용되던 시기에 그 책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구성하는 책들은 대부분 그 연대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성경의 기록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성경 각 권의 연대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경, 더 나아가 유대 문하에는 역사적 공백이 존재한다. 가장 큰 공백은 기원전 6세기~기원전 2세기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를 다룬 유대 문학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기는 예루살렘에서 히브리 문학이 꽃피웠던 시기가 아니다. 기원전 2세기에, 히브리 문학은 다시 부흥한다. 마카베오서 사원, 집회서, 요벨서, 그리고 무엇보다 다니엘서는 기원전 2세기에 씌어졌다. 이는 민족주의를 앙양하려는 뜻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로 한 하스몬 왕가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히브리어는 성경의 고전 히브리어나 기원전 7세기의 문헌에서 사용된 히브리어와는 판이하게 달랐으며, 이후 랍비 히브리어(미슈나 히브리어)의 모체가 되었다.

 

우리가 성경 히브리어를 연구할 때 부딪히는 기본적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의 왕정과 페르시아 시기 사이에 서기관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거의 떠난 가난한 유다 지역에서 서기관 조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서기관과 히브리어는 분리되었다.  

 

문자화된 야훼의 말씀 예언의 쇠퇴

야훼의 말씀이란 표현은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받은 예언자의 말을 뜻했다. 그런데 이 표현이 토라를 뜻하는 용어가 되면서, 예언 자체는 기록된 글 속으로 스며들어가 마침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떤 유대 전승에서는 기원전 586년 성전 붕괴 이후로 예언은 끝났다는 믿음이 강하게 남아 있다. 기록된 글이 이제 종교적 권위의 근거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은 또 있다. 원래 묻다, 질문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 다라쉬darash'와 그 명사형인 미드라쉬Midrash가 이제 기록된 글의 연구 또는 해석이란 뜻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기록된 글과 구두전승 사이의 불화에 대해 역사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첫 번째 이유는 구두전승을 지지했던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글을 지배하던 자들은 정치·종교 엘리트들이었다. 구두전승에서 기록된 글로 권위가 옮겨가는 데 관심을 쏟았던 이들 역시 기록 활동의 수단을 장악한 사람들이었다. 경제력이 떨어지고 정치적 힘이 부족할수록 권력자들에 대항하는 글을 짓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