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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역사 (3)

은바리라이프 2008. 2. 12. 18:18
단절된 역사 (3)

 

3) 규원사화에는 숙종 당시 동아시아 실사가 있다

李成桂를 비롯한 濊貊族이 中奴를 漢族이라 하고, 中國을 漢나라로 인정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것은 濊貊族이 결코 漢族이라 불렸던 적이 없음을 말해준다. 漢은 桓이나 韓에 비해 협소한 개념이다. 漢民族만 가리켜 사용했기 때문이다. 桓은 朝鮮 이전부터, 韓은 朝鮮을 구분해서 가리키는 말이다. 朝鮮의 강역에는 蒙古나, 匈奴, 鮮卑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蒙古族에 속한다고 해도 靺鞨과 거란은 중앙아시아에 있다가 朝鮮 개국 이후에 등장한 종족이다. 靺鞨은 12 世 檀君 阿漢 때 등장 했으니까, 桓이나 韓조차 될 수 없다. 高句麗가 속민 濊貊族을 漢에 포함시켰을 리 없다. 그래서 漢委奴라는 말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한단사를 썼다는 揆園史話를 보면, 지지리도 미개한 濊貊族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濊貊族의 온갖 명칭을 들먹 거린다. 온갖 날조사로 濊貊族을 우리민족으로 둔갑 시키고 있다. 한단 역사책을 수거하고 나서 한단사를 가장한 날조역사를 쓴 濊貊族이 北崖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北崖 자신의 말대로 과거에 실패한 李氏朝鮮의 선비라면, 실명을 안 밝힐 이유가 없다. 책 그것도 역사서를 썼는데, 누구나 내가 썼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싶을 것이 아닌가. 자신을 밝히지 못했다는 것은 신분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北崖 역시 濊貊族이다. 자신이 濊貊族임을 너무도 잘 아는 濊貊族, 李氏朝鮮 王室의 宗親으로 추정된다). 李氏朝鮮은 李成桂 이래로 濊貊族과 한민족은 동족 이라는 인식을 계속해서 주입 시켰던 것이다. 우리역사에 濊貊族의 역사를 덧붙이는 방법으로.

◀ 숙여진 병사의 모습

“女眞은 肅愼의 후예이다(女眞者肅愼之後也 揆園史話 漫說).” 앞의 女眞은 濊貊族을, 肅愼은 朝鮮을 말한다. 李氏朝鮮과 明이 역사를 날조하면서 濊貊族을 우리민족에 집어넣은 것이다. 李氏朝鮮의 王들이 濊貊族이라 하루빨리 한민족과 일치 시켜야 李成桂와 그 후손들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神誌氏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 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 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 하고도 억세어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 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漢나라는 읍루(挹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 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隋와 唐나라는 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金나라와 女眞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神誌氏受封於嫘溍國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㫿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漢曰挹婁 元魏曰勿吉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揆園史話 檀君紀).”

蚩尤氏의 후손도 모자랐던지 神誌氏의 후손으로 까지 둔갑했다. “黑水의 땅으로 옮겨(徙黑水之地)”간 것은 黑水女眞이다. “북쪽 끝의 야만인들(窮北蠻人) 역시 黑水女眞”이다. 李氏朝鮮의 濊貊族은 제 동족을 野人이라 부르고 野蠻人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평양(平壤) 땅에서 수렵하며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한 오랑캐를 大震國으로 둔갑 시키고, 우리민족이 同族을 오랑캐라 불렀다고 날조하는 것도 당연하다.

黑水女眞이 黑水 땅으로 이주한 시기는 기원후이고, 神誌氏가 일족을 이끌고 大興安嶺山脈 이북으로 간 것은 기원전 24 세기다. 李氏朝鮮의 濊貊族 조차 黑水女眞과 섞인 적이 없다.

“그 옛 기풍은 다하여 없어지고 비록 글도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天地에 제사를 지내고 친척을 공경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손님을 맞고 벗을 믿는 등 예의바른 마음에 다정하고 성의가 있(其古風泯滅 雖不知書然猶有祭天地敬親戚尊耆老接賓客信朋友 禮意款曲 揆園史話 漫說)”지 않았으니까, 李成桂가 高麗人이라 속이고, 우리나라 영토를 잘라 朱元璋 등에게 주면서 우리나라 왕노릇을 한 것 아닌가.

 

“黑水의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한 갈래의 군사만으로 遼東과 만주를 석권 하였으며, 長城을 넘어 변경(汴京)을 도륙한 뒤 徽王과 欽王을 사로잡아 북쪽으로 보내고 고주(孤主)를 꾸짖어 남쪽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유연(幽燕)을 넘어 중원의 선비들을 매질 하였다. 그러자 조가(趙家)의 군신들 가운데 정성과 성의를 보내며 신하를 자칭하고 조카라고 스스로를 일컬어 남아 있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회(秦檜)와 한윤(韓胤)의 무리는 모두 엉금엉금 기면서 아첨을 떨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의 쾌사이며 동방 諸族의 자랑이다(方其奮興於黑水之地也 以一枝之師 席卷遼滿 越長城而屠汴京 禽徽欽而北去 叱孤主而南竄 跨幽燕而鞭笞中原之士 於是趙家君臣 莫不輸誠納款, 稱臣呼侄 苟乞殘喘 秦檜韓胤之徒 咸匍匐而獻媚 此誠 千古之快事而東方諸族之誇也 揆園史話 漫說).”

徽王과 欽王을 사로잡아간 金汗은 黑水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 있다가 캐시미르를 통해 中土로 들어왔다. 中土에서 일부는 柴達木盆地로, 나머지는 黑水 상류로 갔다. 柴達木盆地의 濊貊族이 中土로 들어가 金汗을 세우고 동쪽에 있는 宋을 공격했다. 遼東은 커녕 遼西조차 석권한 적이 없다. 한때 大震國의 옛 땅 遼東에 빌붙어 있다[주변 고을을 약탈하고 올야국(兀惹國)이라는 나라를 세워]가, 高麗에 의해 遼西로, 다시 白頭山(白山)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니까 高麗는 金汗을 자랑으로 여긴 게 아니라 골칫거리로 여긴 것이다.

어떻게 그 먼 黑龍江에서 티벳고원 북부로 와서 나라를 세운단 말인가. 더구나 新石器人처럼 사는 종족이. 高句麗가 전쟁을 할 때면 늘상 지원군으로 나섰다는데, 黑水에서 한 번도 아니고 매 번 올 수 있단 말인가. 高麗 末, 李氏朝鮮 初의 혼란을 틈타 남하한 黑水 땅의 野人을 김종서(金宗瑞 1390~1453)가 되돌려 보냈다. 北崖 역시 揆園史話 漫說에서 “北으로는 野人을 꾀어 선봉으로 삼(北誘野人而爲前驅)”자고 했다. 바로 生女眞이다.

“高麗史·列傳에 이르기를 女眞은 본래 高句麗의 한 부락 이었는데, 蓋馬山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麗史列傳曰女眞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揆園史話)." 역시 濊貊族답게 “당시의 女眞이 분명히 白頭山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蓋馬'가 '白頭'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蓋馬之爲白頭 明矣 揆園史話).”라고 하고 있다. 濊貊族은 白頭山(예전 白山) 너머 柴達木盆地에 살았다. 蓋馬는 秦嶺山脈이다. 蓋馬하고 白頭는 아무 상관이 없다. 高麗實錄의 원문은 이렇다.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는데, 백두산의 북쪽에 모여 살았다.

속말부(粟末部)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太白山과 맞닥뜨린 곳에서 高麗와 더불어 접해 있다(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與高麗接 揆園史話 唐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粟末部가 柴達木盆地의 가장 남쪽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柴達木盆地에서 長安 서쪽의 太白山과 접할 수 있는가. 柴達木盆地의 白頭山을 韓半島 太白山에 포갠 것이다. 종이 위에서 韓半島 白頭山 이북에 살던 濊貊族은 끝내 韓半島 북부까지 진출했다. 실제는 韓半島 전역으로 진출했다. 바로 李氏朝鮮이다.

“朝鮮의 근심 가운데 나라의 역사가 없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 우리나라의 經典과 史書는 누차의 兵火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없어졌다(朝鮮之患莫大於無國史......我邦經史 屢經兵火 散亡殆盡 揆園史話 序文)." 兵火가 아니라, 李氏朝鮮 스스로 없애버렸다고 實錄에도 수차에 걸쳐 나온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求書의 諭示 말고도 兵火를 빌미삼아 지속적으로 焚書했던 것이다. 실상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책이 멸실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李氏朝鮮의 영토는 축소 되었고, 그때마다 三國의 영토와 高麗의 영토 또한 축소해야 했다. 우리나라 지도는 벌써 없앴으니까, 李氏朝鮮의 지도만 축소하면 해결됐다. 大震國은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이전에는 우리나라로 인정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大震國을 우리나라로 받아 들이면, 그만큼 역사날조해야 할 꺼리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高句麗 강역을 다 회복한 大震國을 두고 靺鞨人이 대다수였다고 말도 안되는 날조를 한 것이다.

揆園史話를 쓴 목적은 濊貊族과 한민족을 동일민족으로 만드는 데 있다. 李成桂가 朝鮮의 후예인데, 高麗人(李成桂는 21 살 때 高麗로 귀화했다)으로 태어나지 못해서 중국 대륙과 우리나라 역사를 포기했단 말인가. 朝鮮의 후예가 아니니까, 한단사를 말살한 것이다. 高句麗, 大震國, 高麗가 濊貊族을 어떻게 다루었나. 속민 이었다. 한 곳에 몰아넣어 감시했다. 정말 濊貊族이 우리민족 이라면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다.

李成桂가 자신을 한민족이라 생각했다면, 黃河 이남을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주었겠는가. 李成桂의 후손들이 자신을 한민족이라 생각 했으면, 東北亞를 淸에게 주었겠는가. 濊貊族의 염원이 朝鮮의 후예가 되는 것이었지만, 진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단사도 수거해서 분서하고, 축소한 三國史, 高麗史도 또 축소해 수거해서 분서했다.

太白逸史와 비교해 보면, 揆園史話를 쓸 당시는 역사날조가 훨씬 더 진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北崖는 明을 가리켜 천한 종족이라 불렀다.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使撓其南鄙 漫說).” “우리가 어찌 中華가 아닐 것이며 中原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君等皆云華夷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太始紀).” 우리민족은 中華가 아니다. 저 말은 北崖가 우리 영토 중국 대륙을 李成桂가 朱元璋 등에게 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李氏朝鮮의 王들은 자신이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역대 왕들이 자손에게 맹목적으로 한단사를 수거, 분서 하라고 유언하면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너는 濊貊族이다’고 알려주지 않고는 한국사를 말살하지 않는다. 한단사 수거, 분서를 주지 시키면서 중국이 미개국 이라는 사실 또한 상기 시켰음은 물론이다.

 

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동(遼東), 만주(滿州), 유주(幽州), 영주(營州)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野人)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朝鮮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漢)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淸帝 談同祖 陳利害 與朝鮮倂據遼滿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東聯倭而使撓其南鄙 夫 然後 朝鮮之强可復 而漢之慢可挫矣 揆園史話 漫說)

李氏朝鮮 이라는 나라의 실상은 이 한 마디 말에 다 함축되어 있다. 揆園史話에는 날조 역사의 논조에서 벗어나는 글이 더러 눈에 띄는데, 이 역시 솔직한 北崖子의 심정을 서술한 대목이다.

저 글만 봐도 北崖라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祖上이 같으면 침략하지 않는가. 三國도 죽어라 싸워댔다. 祖上이 같으면 협박하지 않는가. 淸이 동아시아를 다 집어삼키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는가. 濊貊族이 한민족의 강역을 다 차지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는가. 이해득실을 따지고서, 이미 淸나라 땅으로 변한 遼東, 幽州, 營州의 땅에 李氏朝鮮과 나란히 웅거 하겠는가. 이해득실을 따지고서, 淸이 일어난 滿州에 李氏朝鮮과 나란히 웅거 하겠는가.

불과 수십 년 전에 李氏朝鮮을 침략한 倭까지 끌어 들이겠다는 것이다. 朝鮮 대신 싸우는 동안에 朝鮮을 집어삼킬 게 분명한 倭를 말이다. 北崖가 이렇게 어리석고 썩어빠진 인간이다. 濊貊族 자체가 한도 끝도 없이 어리석은 종족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영토 동아시아를 고작 5 백년 만에 다 말아 먹은 것이 아니겠는가!

蒙汗干涉期에 柴達木盆地를 수비하던 濊貊族은 蒙汗이 망하자 갈 곳이 티벳고원 북부 밖에 없다. 李成桂의 황위 찬탈 음모가 노골화 되었을 때, 朱元璋에게 李成桂가 濊貊族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최고의 대우를 약속받는 일은 없다. 그런데 濊貊族은 더 있었다. 바로 柴達木盆地에 살았던, 날조역사 속에서는 雙城摠管府에 살았던 濊貊族.


이씨조선 초의 동아시아 티벳이 언제 티벳고원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明이 中土를 빠져나간 다음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柴達木盆地의 濊貊族도 李成桂가 濊貊族임을 알고 있으니까, 입막음을 해야 했다. 李成桂가 威化島 回軍을 했을 때, 달려와 도운 것은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하면, 자신들에게 揚子江 이북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同族이라 해도, 아무 대가없이 돕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후의 淸의 행보가 말해준다. 李成桂는 明에게는 揚子江 이남을, 濊貊族 에게는 揚子江 이북을 주었다.

“滿州에 웅거”하자는 데서 알 수 있듯이, 滿州는 지명이다. 揚子江 이북의 숙여진은 地名으로 종족명을 삼은 것이다. 淸이 揚子江 이북, 黃河 이남에서 시작 했으니까, 滿州도 그 땅에 있었다. 滿州가 옛날부터 있었던 지명 이라면 中土 에서도 4 대강 이북에 있었다. “太祖 누루하치(努爾哈赤)에 이르러 궐연히 건주(建州)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팔기병(八旗兵)을 거느리고 滿州를 석권, 금한국(金汗國)을 세웠다(太祖努爾哈赤蹶然奮興於建州之地 率八旗之師而席卷滿洲創金汗國 揆園史話 漫說)." 揚子江 이북, 黃河 이남 땅 일부를 차지하고 金汗國을 세웠던 것이다. 李成桂가 숙여진에게 揚子江 이북을 주자, 즉각 숙여진끼리 싸움이 일어나, 부족 통합 과정을 거쳐 淸을 세운 것이다.

궐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八旗兵을 거느리고 滿州를 석권? 濊貊族은 中奴의 상대나 될까, 수천 년을 빌빌대던 濊貊族이 갑자기 달라질 수 있는가. 淸이 西洋의 밥 이었다는 사실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八旗兵의 무기는 협박이었다. 협박으로 朝鮮 땅을 다 차지했다. 中奴와 濊貊族이 딱 한 번 이긴 적이 있는데, 韓國戰爭 당시 메군(米軍) 한테서다.

“虞舜(帝舜有虞)이 幽州, 營州의 두 주를 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檀帝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을 모두 다 쫓아냈다(虞舜置幽營二州於藍國之隣帝遣兵征之盡逐其君 檀君世紀)." 藍國은 柴達木盆地다. 幽州, 營州는 柴達木盆地 서쪽 즉 岷江(두 번째 遼水) 이북에 있었다. 朱元璋은 幽州, 營州를 桑乾河 이서로 밀어낸 것이다.

“지금에 무릇 애친씨(愛親氏)는 혁도아라(赫圖阿羅) 사람이다. 그 선조는 멀리 속진의 후예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은 高句麗와 발해(渤海)의 무리 중에서 많이 이어 받았으니, 이들이 남아 있는 檀君의 후예가 됨을 거의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뽐내고 있으니, 滿州가 우리와 친척됨을 긍정하고 인정하려 하겠는가. 저들이 女眞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미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을 배척하고 있으니, 우리가 滿州를 대하며 욕하고 배척하는 것을 어찌 괴이하다고만 하겠는가! 또한 저들이 朝鮮과 더불어 대립한 지가 이미 오래이며, 뭇 오랑캐와 더불어 서로 섞인지가 오래이니, 그 형세가 어찌 능히 다시 합치고서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음을 후회할 수 있겠는가!(今夫愛親氏者 赫圖阿羅之人也 其先 遠出於嫘溍之後 其民多承句麗渤海之衆 是爲舊檀氏之遺裔 庶可斷焉 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滿洲而爲親乎 彼等之於女眞 已以蠻胡斥之其於滿洲寧怪其罵斥耶且彼等之與朝鮮 角立者已尙矣 而與諸胡相混者久矣 其勢安能復合而悔其久分耶 此不必長說也 揆園史話 漫說)"

속진(嫘溍)은 神人王儉이 神誌氏에게 준 봉토로 濊貊族과 아무 상관없는 이름이다. 李成桂의 출신 종족인 濊貊族은 고작 3 백 년 전에도 高麗의 은혜에 기대어 한 구석에서 살던 종족이다.

소중화(小中華)라 뽐낸 것은 李氏朝鮮이다. 韓國史를 말살하고 中奴를 天子國의 자리에 밀어 올리자, 스스로 中奴가 되기를 갈망한 것이다. “世俗에는 이미 妙香山을 가지고 太白山이라고들 한다. 즉 이를 보니 동쪽에 치우쳐 鴨綠江 이남의 한 구석을 차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祖宗을 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世俗旣以妙香山爲太白則其見只局於東鴨綠水以南一隅之地便唱山之祖宗崑崙欣欣以小中華自甘宜 太白逸史 神市本紀).” 三韓秘記가 출처라고 하나, 三韓秘記를 李氏朝鮮 때 썼거나 이전 시대에 쓴 것을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고친 것이다.

揚子江 이북의 숙여진은 이름을 고쳐 滿州族이라 불렀다.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던(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 濊貊族임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濊貊族의 미개 기사를 지우지 않았냐고? 李氏朝鮮을 濊貊族의 나라로 둔갑 시켰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미개 濊貊族의 나라로, 華夏族은 우수한 漢族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淸은 漢族의 나라가 될 수 없었기에 滿州族 이라고 바꾼 것이다. 하지만 곧 滿州族은 漢族으로 변신했고, 현재의 滿州族은 生女眞이다.

淸이 뭇 오랑캐와 더불어 서로 섞인 지가 오래다? 오랑캐 濊貊族이 揚子江 이북으로 가서 한민족과 섞였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를 漢族이라 불렀던 것이다.

東方禮義之國. 이 말은 李氏朝鮮의 풍속이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5300 년 동안 漢委奴로 멸시한 中族의 나라 明을 李氏朝鮮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을 칭송한 말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왕들은 明을 천한 종족이라 멸시 하면서도 朝鮮人들에게는 철저한 事大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朝鮮人들은 ”스스로를 ‘小中華’라고 뽐내고(揆園史話)" “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太白逸史)"했던 것이다.

“遼東의 들판을 바라보니, 遼東 벌판의 나무와 계주(薊州) 하늘의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노닐고 있다(望遼野 遼樹薊雲點綴徘徊於指顧之間 揆園史話 序文)."

어째서 北崖는 遼東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나. 淸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땅은 明이 빼앗겼다면서, 明의 復活에 뜻있는 선비가 일어 났다면서, 李氏朝鮮人이 회한에 젖을 수 있는가. 淸이 차지한 遼東은 李氏朝鮮의 영토였고, 뜻있는 선비가 일어난 곳도 李氏朝鮮이었다.

北崖가 바라본 遼東은 어딘가. 揆園史話가 쓰여진 해는 1675 년이다. 淸碑는 1712 년, 大凌河에 세웠다. 결국 北崖가 바라본 遼東은 桑乾河 이동, 난하(灤河) 以西다. 明, 淸과 三分해 나눌 당시의 李氏朝鮮 영토는 黃河 이북과 동북아였다. 丙子胡亂 때는 桑乾河 까지, 丁卯胡亂 때는 灤河 까지 빼앗긴 것이다.

明을 누르기 위해 淸과 野人, 倭까지 연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明의 퇴조를 거론하고 또 明의 부활을 거론할 수 있는가. 1675 년 당시 明이 존속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이 다음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비록 밤낮으로 南漢山城의 치욕에 대해 이빨을 갈면서, 壬辰年에 신통치 않게 도움을 받은 의리로 明나라에 대해 보답하려고 한다. 그러나 1 백년 안에는, 내가 보장 하건데, 기필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我國之士 雖日夜以南漢之耻切齒 以區區東援壬辰之誼 欲向明而圖報 然 百年之內 余保 其必無是事矣 揆園史話 漫說).” 明이 이미 사라졌다면 어떻게 도움을 보답할 수 있으며, 더욱이 앞으로 1 백년 안에는 보답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벌떼같이 일어난 뜻있는 선비는 桑乾河와 灤河 사이에 사는 李氏朝鮮의 선비였다. 李成桂와 北崖가 濊貊族이다 보니까, 이를 숨기려고 횡설수설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濊貊族에 대한 거짓 自畵自讚은 잊지 않았다. “有史 이래 변방 밖의 뭇 종족 가운데 皇帝가 다스리는 漢나라 땅에 들어온 것 중에서 이처럼 강하고도 번성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有史以來 塞外諸族 入帝漢土者 未有若此之强且盛者 揆園史話 漫說).”

遼東(桑乾河 이동)을 탈취당한 것이 明이라 가정해 보자. 揚子江 이남의 明은 揚子江 이북의 淸에 의해 처음부터 영토가 분단되어 버린다. 그런 땅을 지킬 수는 없다. 遼東은 李氏朝鮮의 영토지, 明의 영토가 될 수 없다.

李氏朝鮮 王이 가짜 天子國 明을 위해 淸과 싸울 리가 없다. 李氏朝鮮 역대 왕들은 자신들이 濊貊族임을 감추기 위해 한민족 에게는 날조 事大主義를 세뇌한 반면 자신들은 미개 明을 경멸하고 있었다. 遼東은 明의 땅이 아니라, 李氏朝鮮의 땅이었다. 丙子胡亂(1636~1637), 丁卯胡亂(1627)은 李氏朝鮮의 영토를 두고 벌인 전쟁이다.

八旗兵이 향하는 곳에는 견고하고 강한 성벽이 없었다?(八旗之所向 更無堅城.强壁矣 揆園史話 漫說) 정말 長城이 없었다면, 쓸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長城이 없는 곳마다 견고하고 강한 성벽이 없었다고 기술하지는 않는다. 실상은 견고하고 강한 성벽 즉 萬里長城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更非我土矣. 遼東을 두고 전쟁이 벌어져 遼東의 소유권이 淸과 李氏朝鮮으로 왔다 갔다 했다는 뜻이다. 遼東의 뜻 있는 조선선비 즉 百濟長城 이서 주민들이 淸의 군대에 대항해 치열하게 싸웠던 것이다. 韓半島에서 보낸 지원군은 長城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李氏朝鮮王들은 淸에 맞서 싸울 수 없으니까, 百濟長城 以西 주민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슬프다 한인(桓因)이여, 슬프다 한인(桓因)이여. 지금 한 조각의 진역(震域)과 한 줄기의 遺民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嗟桓因乎 嗟桓因乎 今片區震域一脈遺民 其將奚爲 揆園史話 漫說)." 한 조각의 震域은 淸이 빼앗은 발해만 長城 지역이고, 한 줄기 遺民은 그 땅에 사는 朝鮮人들을 가리킨다. 震域의 중심 長安城을 숙여진에게 줄 때는 쾌재를 불렀던 濊貊族이다. 震域이 아니라, 李氏朝鮮 땅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것뿐이다.

"작은 거룻배로 鴨綠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更) 우리 땅이 아니구나(若越一葦鴨江之水 則已更非我土矣 揆園史話 序文)."

鴨綠의 물길. 이 말에서 李氏朝鮮 이라는 나라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西鴨綠江(桑乾河)을 빼앗기자, 서둘러 새로운 국경에 西鴨綠江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灤河가 새로운 西鴨綠江이 되었다. 그러자 淸도 덩달아 새로운 西鴨綠江을 遼水라고 불렀다. 1712 년 현 大凌河에 淸碑를 세우고, 1824 년에는 현 遼水를 遼水로 불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갈고(葛古) 한웅 이후 4900 년 만에 鴨綠江이 하나가 되었다.

“작은 거룻배로 鴨綠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 우리의 땅이 아니구나.” 새로 밀려난 西鴨綠江 灤河를 건너려고 했지만, 灤河 以西는 淸이 빼앗았기 때문에 더 이상 李氏朝鮮 땅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놓고 진실(李成桂가 우리 역사와 영토를 朱元璋에게 줘버린 탓에 우리나라가 한없이 축소되었다는 것)이 들통날까 두려워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 지 이미 천여 년(噫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 揆園史話 序文)”이라고 슬쩍 거짓말을 갖다 붙였다.

揆園史話를 쓴 해로부터 천 년 전은 新羅가 三國을 통일했을 때다. 결국 李氏朝鮮이 상실한 땅을 新羅가 상실했다고 뒤집어씌운 것이다.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 지 이미 천여 년”이라고 하면서도 그 땅에서 大震國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후 발해(渤海)가 비록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단지 新羅와 더불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을 뿐, 서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곧 소원해질 따름이었다(厥後渤海雖興 只與新羅南北相對不惟秦越而已 揆園史話 檀君紀)." 濊貊族이 柴達木盆地에서 빠져나와 멸망한 大震國의 平壤城 주변을 수렵하고 약탈한 것은 “渤海人들이 그 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 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두려워해서이다(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揆園史話 檀君紀).”고 날조했다. 大震國史를 朱元璋에게 넘기고는 또 金富軾에게 덮어 씌웠다. “본래 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金富軾)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渤海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金氏는 이로서 언제 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本神人王儉之宅數句亦何足深責而渤海史 幷不過問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 揆園史話 檀君紀).”

李氏朝鮮은 淸에게 최소한 여섯 번이나 영토를 빼앗겼다. 丙子胡亂 때 桑乾河 까지, 丁卯胡亂 때 灤河 까지, 淸碑 세울 때 大凌河 까지 상실하고, 곧 현 遼水 까지 밀려나 1824 년(“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 세 조선교구 제정”의 참고지도)에는 이씨조선의 영토가 東鴨綠江 西北端에서, 黑龍江 하류가 되었다. 1909 년에 日本이 淸과 ‘間島協定’을 맺어 韓半島 이북을 넘겨줬다. 그리고 李氏朝鮮은 日本한테 韓半島를 빼앗기고 망했다.


▲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 (오른쪽 지도는 현재의 지도로 비교한 것임)



▲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 세 조선교구 제정의 원본지도(황색부분)



아무르강에서 스타노보이강 까지가 1689 년 네르친스크조약에서 李氏朝鮮이 상실한 땅.

1858 년 아이훈조약 체결 당시에는 흑룡강 좌안을 러시아령으로 하고, 우안의 우수리강에 이르는 지역을 조선령으로 하며, 우수리강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연해지방)을 양국 공동관리 하에 두고, 흑룡강 좌안의 만주인 부락을 조선의 관할하에 두었다.
1860 년에는 북경조약에서 이씨조선, 러시아 공동관리하에 있던 연해지역을 러시아령으로 했다.
다시 1904 년 이씨조선이 청에 현 압록강, 현 토문강, 흑룡강 이북을 넘기자, 한반도와 주황색 부분이 조선의 땅으로 남았다.
이렇게 해서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 세 조선교구 제정의 원본지도가 만들어졌다.


李氏朝鮮이 세워짐에서 멸망까지 5 백 년 동안 동아시아를 다 잃었다. 나라 자체가 망한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명으로 5300 년간 世界를 밝히던 한민족은 李氏朝鮮 때문에 未開民族으로 평가받고 있다. 濊貊族이 얼마나 저능하고 무능하고, 비열한 지 알 수 있다. 탐욕만 무한대였던 것이다. 淸이라고 건국한 濊貊族은 또 어떤가. 저능하고 무능하고 비열하기는 매한가지다. 淸이 존속할 당시 中國은 서양의 밥이었다.

李成桂의 고향은 柴達木盆地이고, 1 차 날조사 에서는 雙城摠管府가 있던 현 黃河 하류 이북이었다. 최종적으로 축소된 날조역사에서 李成桂의 고향은 오늘날의 함경남도로 낙착됐다. 그런데 李氏朝鮮은 咸境道 출신자를 차별했다. 李成桂가 자신의 고향을 싫어했다? 李成桂가 차별한 咸境道는 바로 현 黃河 하류 이북이었다.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가 고작 中奴 따위에게 패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데, 黃河 이남에는 中奴도 아닌, 숙여진이 살고 있었다. 천한 종족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살던 이들은 李成桂가 현 黃河 이남을 천한 종족들에게 줘버리고, 韓半島에 처박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들의 王으로 군림한 李成桂가 바로 그 천한 종족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최근 공개된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 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 사본을 두고 “한반도 괴지도의 비밀”(2003 년 7 월 29 일 주간조선에 실린 기사 제목)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역사를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제목과 기사다.

이 땅의 사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당시 間島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중국 입장에서 間島는 변방에 있는 척박한 땅으로, 일종의 버려진 땅이었다.” 이러고 있다. 6 천년 自國史는 부정해가며 고작 우리나라를 남이 버린 땅이나 줍는 거지나라로 둔갑시킨 것이다. 濊貊族은 해도, 한민족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間島가 沃土라 朝鮮人이 건너가 토지를 개간했다고 할 때는 언제고, 間島가 척박한 땅이라 中奴가 버렸다고? 어디에도 버려진 땅은 없다. 한 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인류는 지난 수만 년 동안 전쟁을 해왔다. 中奴는 유사 이래로 티벳고원 북부조차 서로 차지 하려고 허구한 날 전쟁을 해댔다. 間島가 아니라, 馬羅島, 獨島라도 中奴는 기를 쓰고 빼앗으려 했을 것이다. 한 뼘의 땅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게 中奴다.

間島가 척박 하다고? 시베리아도 우리나라 땅이었다. 間島가 척박하면 韓半島는 티벳고원 북부쯤 되는가? 티벳고원 북부는 에베레스트 산쯤 되겠다. 하기야 티벳고원 북부 안에 에베레스트가 버티고 있다. 中奴는 그런 척박한 땅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間島는 완전 옥토다. 間島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면, 中奴는 淸碑 따윈 세울 필요도 없었다. 제 땅 제가 차지 하는데, 定界碑를 세워 다른 나라에 땅까지 떼어줄 것인가. 鴨綠江 이북은 神市氏가 개천한 神市가 있고, 太白山이 있는 우리나라의 聖域이다.

北崖는 濊貊族을 한민족과 동족으로 만들기 위해 강변 하면서도 李成桂 등이 濊貊族임을 드러내서는 안됐다. 李成桂의 역사, 영토 축소 사실은 은폐 하면서 실로 교묘하게 써야 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왕들은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역사를 축소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李氏朝鮮實錄 조차 끝없이 뜯어 고쳤던 것이다. 영토가 축소될 때마다 그에 맞추어 조작하다 보니까, 끝내는 韓半島를 강역으로 한 우리나라 역사가 성립해야 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건국의 정통으로 삼은 나라다. 李氏朝鮮實錄이 史草에 근거해 편찬했다는 소리는 거짓말이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以前史 모두를 말살하고 날조한 濊貊族의 나라다. 高麗史 조차 “본래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고 “高麗實錄에 따라 바로 쓴” 게 아니라 완전 날조했던 것이다. 李氏朝鮮史 역시 사실대로 기록할 리 없는 濊貊族의 나라인 것이다.

“나라의 흥망은 뒤바뀜이 무상하니 지금 朝鮮의 불행은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니겠는가(國之興亡不得免翻覆無常也 然則 安可以眠前榮枯 二三其心也哉 漫說).” 땅을 잃었다 하면, 우리나라 탓으로 전가하기 급급한데, 어떻게 불행이 끝날 수 있겠는가. 실패를 분석하지 않고, 실패를 거울삼지 않는 李氏朝鮮은 처음부터 비참한 종말을 맞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丙子胡亂, 丁卯胡亂. 女眞 대 女眞의 전쟁 이었다. 胡亂. 李氏朝鮮 王은 자신이 오랑캐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神機箭, 火車, 火砲, 거북선(龜船)...... 高麗의 첨단무기는 李氏朝鮮이 다 가지고 있었다. 李氏朝鮮은 무력에 있어서 아직도 막강했다. 李氏朝鮮은 전쟁에 열의 없는 濊貊族 때문에 졌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丙子胡亂, 丁卯胡亂에 이겨서는 안됐다. 당연히 이종(李倧 1595~1649 李氏朝鮮의 仁祖라고 불리는 濊貊族)은 지려고 기를 썼겠지? 매번 淸이 朝鮮 땅을 확고히 차지할 때 까지 지원군 파견을 온갖 이유로 미적 거렸던 것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사령관들이 文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차에 걸친 胡亂 뒤에도 北崖는 정신 못 차리고 淸이 제 동족이라 믿었던가. 그러나 淸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西鴨綠江을 난하(灤河)에서 현 遼水로 밀어낸 것이다. 그리고 1824 년에는 東鴨綠江 까지 밀어붙이고, 1909 년 淸日協定을 맺어 韓半島 이북을 전부 가로챘다.

 

李氏朝鮮은 숙여진(滿州族)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李氏朝鮮王도 숙여진이고, 숙여진이 비밀을 누설할까봐 노심초사 했으니까. 淸은 李氏朝鮮王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後漢의 천문기록도 渤海灣의 현 北京에서 관측한 것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黑水靺鞨이 여러 靺鞨 중에서 가장 강해?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산 종족이다. 숙여진 역시 文明化(?)되기 이전에는 그러했다. 高麗史에는 더 쉽게 풀이해놨다.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를 찾아 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고. 이런 종족이 어떻게 가장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싸울 때만 뭉쳤던가. 麻衣太子 후손 극기(克己)가 가서 지도한 生女眞은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黑水靺鞨을 滿州族으로 둔갑 시키고, 新羅 末 부터 鴨綠江 까지 진출해서 살았다고 날조하기 위해서 종이 위에서만 가장 강한 종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李氏朝鮮의 濊貊族 까지도 저들을 野人, 野蠻人이라 불렀다. “淸나라 皇帝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朝鮮과 더불어 遼東, 滿州, 幽州, 營州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野人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고(說淸帝 談同祖 陳利害與朝鮮倂據遼滿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揆園史話 漫說)." “점차 북쪽 끝의 野蠻人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揆園史話 檀君紀)."

마치 生女眞만이 濊貊族인 양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사람(李氏朝鮮人)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뽐내고 있으니, 滿州(淸)가 우리와 친척됨을 긍정하고 인정하려 하겠는가. 저들이 女眞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미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을 배척하고 있다(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 滿洲而爲親乎 彼等之於女眞 已以蠻胡斥之 揆園史話 漫說).” 淸을 세운 濊貊族도 제 동족을 오랑캐라 업신여겼다. 生女眞을 동족으로 삼고 싶어 하는 건 大韓民國 사람들 밖에 없다.


▲ 남국의 위치



번한은 첫 번째 위치
부여는 부우, 부소와 함께 티벳고원 남부를 봉토로 받았다가, 설유의 난을 평정한 후 티벳고원 남부 전체를 봉토로 받았다(규원사화). 三韓이 생긴 것은 단군왕검 재위 마지막 해인 庚子 93 년(B.C. 2241)이다(檀君世紀). 이때 馬韓이 민강 이동 타강 이서에 자리잡았다. 부여의 봉토가 축소 되었는지, 봉토를 옮겼는지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찾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단군 색불루가 즉위할 당시 부여는 백악산(현 은허) 일대에 있었다.


읍루(挹婁), 물길(勿吉), 靺鞨, 女眞, 滿州라 불리는 李成桂의 종족은 우리민족이 되고 싶어 환장한 종족이다. 우리민족 이라면서 갑자기 등장할 수 없으니까,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藍侯의 백성이 되었다(昔 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檀君紀).”고 날조한 것이다. 우리민족에 맥(貊), 예맥(濊貊)은 없다. 貊, 濊貊은 濊貊族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 년 만에 白山의 남쪽 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平壤이라 하니 곧 두 번째의 임금성이다(居牛首河畔十年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 曰平壤卽第二壬儉城也 揆園史話 檀君紀)." 濊貊族을 우리민족 이라고 날조 하고자, 李氏朝鮮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 받고자, 神人王儉이 藏唐京으로 천도한 것도 濊貊族의 거주지가 있는 속말(涑沫)의 땅 白山으로 천도 했다고 날조했다. 濊貊族이 있는 한, 우리민족은 절대 涑沫의 땅을 벗어날 수 없다. “檀君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涑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浿水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하게 되었다(檀君之世 民物漸繁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則其捨粟末之地而南遷於浿水之濱以圖後日之隆運 揆園史話 檀君紀).” 琉璃明帝가 國內城으로 천도한 것을 두고 北崖가 날조한 말이다.

“高麗朝 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 년 인데도 한으로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滿州의 동류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自勝朝 以降貢使北行累百年而不爲之恨 猝以滿洲之讎爲不俱戴天則獨何故耶 揆園史話 序文)" 땅을 갈취 당했기 때문이지. 그래도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땅을 갈취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朝貢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린 역사가 백 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한다(其貢使北行歷累百年而不爲之耻 太白逸史 神市本紀)."

華夏族 한테는 三國時代 부터 朝貢 했다고 날조했다. 李氏朝鮮의 濊貊族은 華夏族에게 朝貢하는 것은 恨으로 여기지 않기는 커녕 자랑으로 여겼다. 李成桂의 거짓말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지금에 있어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小中華’라고 뽐내고 있다(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 揆園史話)." “山의 祖宗을 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世俗旣以妙香山爲太白則其見只局於東鴨綠水以南一隅之地便唱山之祖宗崑崙欣欣以小中華自甘宜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러니까 朝貢하는 사신이 들락거린 북쪽은 明과 병행해 존속하던 淸이다. 북쪽을 들락거린다고 한 것은 揚子江을 기준으로 이남에는 明이, 이북에는 淸이 있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은 明 뿐만 아니라 淸에게도 일찌감치 朝貢을 했던 것이다. 淸의 등장은 李成桂가 黃河 이남을 준 직후다. 朱元璋과 李成桂가 明을 上國으로 李氏朝鮮은 朝貢國으로 합의하자, 淸도 우리도 上國을 시켜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淸의 협박은 李成桂 때 부터 시작 되었다. 그래서 물귀신처럼 高麗를 끌어들인 것이다.

李氏朝鮮王들은 드러내놓고 淸을 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긴 것이 아니다. 李氏朝鮮王들이 공공연히 滿州族을 同流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濊貊族끼리 있을 때나 울분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혼(李琿 1575~1641 李氏朝鮮의 光海君이라 불리는 濊貊族)이 親淸政策을 취하고 이호(李淏 1619~1659 李氏朝鮮의 孝宗이라 불리는 濊貊族)가 北伐을 추진할 수 있는가.

결국 北伐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한민족의 耳目 때문에 북벌을 준비하는 척 했을 뿐이다. 明의 출병요구에 원조하는 척 하면서 淸에 항복했다? 揆園史話를 쓸 당시에도 明은 멀쩡했다. 빼앗긴 것은 朝鮮의 땅이지, 明의 땅이 아니다. 李琿은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다. 이공(李玜 1790~1834 李氏朝鮮의 純祖라고 불리는 濊貊族) 역시 濊貊族이라 淸碑를 세워 李氏朝鮮 땅을 가로채는 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淸은 곧 현 遼水까지, 1824 년에는 東鴨綠江 이북까지, 1909 년에는 韓半島 이북 전부를 삼켰다.

李氏朝鮮이 망하지 않고 아직까지 존속 한다면, 漢江이 遼水가 되었을 것이다. 高句麗와 百濟, 新羅는 고작 韓半島 남부를 놓고 싸운 나라로 날조 되었을 것이다. 그 때도 당당함을 찾고 世界의 中心이라는 天下觀을 찾을 수 있을까.

동아시아의 天子國에 恨이 있을 리 만무하다. 恨은 우리나라의 정서가 아니라, 李氏朝鮮의 정서다. 丙子胡亂, 丁卯胡亂 당시 이종(李倧 1595~1649 李氏朝鮮의 仁祖라고 불리는 濊貊族)은 자신이 濊貊族이라는 사실을 숨기느라, 士大夫의 부인들까지 淸에게 주었다. 壬辰倭亂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倭亂이 일어난 나라도 李氏朝鮮이다.

 

침략군은 가는 곳마다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며 전라도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일본측 종군 의승인 케이넨(慶念)은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어린아이 눈앞에서 부모를 베어 죽였으며, 시체가 무수히 쌓여 있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조선일기)

1 차 침략 때와 달리 倭軍은 더욱 참혹 하게도 朝鮮人의 귀 대신 코를 베기 시작했다. 倭將의 전공을 나타내는 코 영수증이라는 것이 있는데, 전북 김제 지역의 코 영수증만 약 3100 개에 이른다.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진 수만 개의 코는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역사스페셜 6 권)

◀ 비총(코무덤) 『토요도미는 코무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넘어간 뒤 이미지가 너무 잔인해 귀무덤(耳塚)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壬辰倭亂 당시, 수많은 朝鮮人이 日本으로 끌려 가서 西洋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겨졌다. 倭奴强占期에는 日本軍에 강제동원되어 죽어간 朝鮮人은 6 백만으로 추정된다. 추정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번도 조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日本軍 위안부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20 만명에 이른다. 倭奴에게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한 朝鮮人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이희(李熹 1852~1919 李氏朝鮮의 高宗이라 부르는 濊貊族)의 庶子 이은(李垠 1897~1970)이라는 자는 李氏朝鮮이 日本에 강점되었을 때 조차 저 혼자 편하고자 日本軍 장교까지 되었다. 濊貊族 李成桂와 그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李氏朝鮮에서 한민족의 삶은 고단 그 자체였다. 恨은 중국 대륙을 내놓고, 동북아도 유지하지 못한 채 韓半島로 축소 되었다가 끝내 망한 李氏朝鮮의 정서였던 것이다.

濊貊族과 섞인 李氏朝鮮은 모든 면에서 퇴보한 나라다. 日本으로 이주한 中國倭는 140 만 명으로 당시 日本 인구의 4 분의 1에 해당한다. 140 만 명이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百濟의 문화와 의식 수준을 미개의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이다. 李成桂의 부 李子春은 千戶이고 李豆蘭은 百戶다. 고작 5500 명의 濊貊族이 와도 이 지경인데, 140 만이나 끌고 왔다면 우리나라도 日本처럼 미개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다.

揆園史話 어디에 애국심이 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세 치 혀끝에서 노는 요설밖에 없다.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잘난 나라를 훔쳤는데, 역사를 다 말살하고 나자, 끝없이 축소되어 이제는 숙여진 淸에게도 땅을 빼앗기고 中奴 明에게도 조공해야 하는 현실의 억울함과 분함을 토로했을 뿐이다. 李氏朝鮮이 또 다시 영토를 세 번이나 잃고 韓半島로 축소 되리라라는 걸 알았다면, 北崖는 절대 揆園史話를 쓰지 않았다.

무릇 묘청(妙淸)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金富軾)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妙淸의 요사스러움과 서경(西京)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발해(渤海)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漢)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及夫妙淸之造亂奉命剿討者 又是金富軾也金氏旣無信文 又惡妙淸之妖西京之破 幷不深採其說 下筆寫過 只留本神人王儉之宅數句亦何足深責 而渤海史 幷不過問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盖金氏旣醉於漢籍 又乏雄圖 則雖有甚歎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之處 而亦無能而已矣 我邦經史之禍 其來久矣 今浩歎無益亦復奈何 揆園史話 檀君紀)

北崖가 얼마나 간사한 인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妙淸의 亂은 中土에서 일어났다. 金富軾은 우리나라 역사를 편찬할 만한 인물이라서 三國史記를 편찬했다. 설령 金富軾이 中奴를 소망한다고 해도 仁宗(1109~1146) 이하 高麗人들이 엉터리 역사책을 보고 가만 있었겠는가. 원래 역사책은 그 특성상 바로 쓸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는 책이다. 그래서 李氏朝鮮도 高麗史를 여섯 번이나 고쳤다고 실토했다. 실은 그보다 훨씬 많이 뜯어고쳤다.

三國史記는 우리나라 역사책만을 참고해서 편찬한 책이다. 三國史記를 편찬할 당시는 三國志, 後漢書, 魏書, 晉書, 宋書, 南北史, 舊唐書, 新唐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조리 李成桂가 건네준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서 쓴 책들이니까.

三國史記의 참고문헌을 中奴에게 준 책으로 바꿔놓고 한다는 소리가 “三國의 역사를 편수하며 2 천 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海東 三國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 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東川王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平壤은 본래 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王이 王儉에 도읍을 하였다’ (東川帝가 遷都한 곳은 海城으로 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 아니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 백 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 朝代記의 이름이 古朝鮮秘記, 지공기(誌公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등의 책과 함께 世祖가 내린 求書의 諭示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金富軾)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修三國史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 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等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與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密記等書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揆園史話 檀君紀)”

滿州族이 기꺼이 中奴의 王朝가 되고자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대국에 속하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高麗가 大帝國이 아니었다면, 朱元璋은 우리나라가 아무리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나라 역사를 원하지 않았다.

蒙汗이 미쳤다고 遼史, 金史에 宋史까지 편찬해주나. 明이 했다. 淸이 遼史, 金史, 蒙史를 썼다면, 이미 宋史로 변한 高麗史를 재분해해서 써야 한다. 遼汗과 金汗이 蒙古에 속하긴 하지만, 蒙古는 자신을 中國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들 역사책을 써주지 않았다. 거란은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濊貊族은 柴達木盆地에 집어넣고, 高麗軍의 침공을 방어하라 한 蒙汗이 아닌가.

蒙汗에게 있어 유일한 목표는 高麗에 기생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明이 쓰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다 집어 넣었으니까, 明 아닌 다른 나라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야 蒙汗 아니 元이 中國의 王朝라고 왜곡할 수 있지 않은가. 中土는 蒙汗의 일부다. 내리 5 천 년을 우리나라 속국으로 산 땅이다. 어떤 나라도 그런 中奴의 일부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蒙汗도 그랬다. 그래서 未開 中土를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은 예외없이 배달과 朝鮮의 후손으로 자처했다. 그러므로 이들 피지배종족은 寧古塔만이 아니라, 朝鮮時代의 지명을 다 애용할 수 있다. “눌현(訥縣)은 지금 常春 朱家城子”가 아니다. 訥縣은 洛陽이다. 太白逸史는 이미 李成桂와 朱元璋이 역사를 날조한 이후에 찬한 책이다. 太白逸史에 나오는 地理比定은 축소된 강역 위에서 헤매고 있다.

 

淸은 遼水를 세 차례나 밀어내고, 西鴨綠江을 두 차례나 밀어 내면서 다섯 번이나 李氏朝鮮의 땅을 갈취했다. 明과 李氏朝鮮에서 영토 약탈 및 역사 약탈 수법을 다 배웠기 때문이다. 제 종족 이름으로 삼은 滿州 까지도 밀어낸 淸이 무엇을 밀어내지 못할 것인가. 寧古塔이 滿州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에 있다고?

淸은 寧古塔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도 이마저 밀어낼 정도로 지명 밀어내기에 혈안이었다.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만 가로챌 수 있다면, 滿州를 밀어내고 寧古塔을 밀어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李氏朝鮮이 明의 거만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은 약점이 잡혔기 때문이지,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다. 明의 전력은 형편 없었다. 中國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明의 海禁措置다. 朱元璋은 반대파(?)와 결탁하여 자신을 공격 할까봐 두려워 바다에 나가 倭寇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는 海禁措置를 취했다. 倭寇가 온다한들 몇 명이나 온다고 海禁措置 까지 필요 했던가. 韓半島에도 한 번에 많아봐야 고작 수만 명 밖에는 오지 못했다.

◀ 임진정왜도(壬辰征倭圖) 중에서


明은 壬辰倭亂 때 도우러 왔다면서 장수들은 하나같이 뇌물에 넘어가 倭와 결탁하고 병사들은 전투 중에 쭈그리고 앉아 졸았던 그런 나라다. 亂中日記와 明의 從軍 畵家가 그린 생생한 그림(壬辰征倭圖)으로 남아 있다.

그런 明이 어째서 李氏朝鮮을 도왔는가. 李氏朝鮮 아닌 다른 나라가 들어서면, 李成桂 처럼 협박해 上國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李成桂의 후손이 아니면 누가 明을 天子國으로 떠받든단 말인가. 中國에 事大함을 참을 수 없으면서도 매번 한단사(桓檀史)를 말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얼마나 朝鮮의 계승국을 자처하고 싶었는데, 도리어 한단사를 말살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 焚書하지 못하고 王宮에 숨겨둔 것을 日本이 빼돌린 것이다.

李氏朝鮮의 王들은 어째서 天文觀測에 狂的 이었나. 天孫民族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九夷니, 九黎니, 九桓이니 했지만, 진정한 朝鮮의 자손은, 天孫民族은 한민족 뿐이었다. 천문관측은 천손민족인 우리나라만 했던 것이다. 천문관측한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민족이라는 증거였다. 朝鮮의 후예라고 믿고 싶었기에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광적으로 천문관측에 매달렸던 것이다.

원래 李成桂는 중국 대륙은 자신이 갖고 同族 숙여진 에게는 동북아를 줄 생각 이었다. 李成桂의 계획이 실현됐다면, 韓半島는 濊貊族의 나라가 되었다.

李成桂는 天子가 될 생각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 역시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가지기 원했던 수많은 미개 유목민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