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세푸스 증언과 빌라도 보고서
성경 이외에도 예수에 대해서 그의 행적을 증거하는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상스러운 점은 예수생존시기에 수많은 저술가의 저술에서 예수에 대한 자료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4복음서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고,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 때에는 모인 남자만 하더라도 5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수 만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대중의 지지를 받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 어째서 기록이 없는 것인가?
예를 들어,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던 필로 (Philo of Alexandria. BC 20~AD 50)는, 그 당시 결코 주류를 이룰 수 없었던 미미한 종교 분파인 떼라퓻 또는 에세네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그의 온 저서를 통하여 예수가 언급된 곳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스투스(Justus of Tiberia), 노인 플리니(Pliny the Elder)등, 그 외 수 십명의 예수와 동시대의 유대인 저술가 들이 있는데, 그들의 저술은 현대의 한 도서관을 채우기에 충분한 양 이었지만, 모두 예수에 관한 언급에는 실패 하고 있다. 예수가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의 사후, 수세기가 지나서 기독교인들이 로마사회의 이슈가 되면서 예수에 대해서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그런 저술로서는 로마의 역사가 타시투스(Tacitus)의 저서 연대기(Annals)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해 언급을 들 수 있다. AD 64년의 로마의 대 화재 발생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돌린 사건을 기록하면서, 기독교인(Christian)이라는 단어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시 빌라도에게 처형 당한 크리스투스 (Christus)라는 인물에게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술은 AD 112년에 기록된 것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도 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학자들에 따라서 AD 116~117 년경에 작성된 문서라는 주장도 있음). 또한 그는 크리스투스외 에도 많은 이방 신들에 대 해서 마치 그 들이 실체로 존재한 양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역시 예수의 실존성에 대한 자료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에 대해서 불충분한 자료와는 달리 주목 받고 있는 저술이 하나 있다. 바로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년 ~ AD 101 년)의 저술이다.
(1) 요세푸스 증언의 실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AD 37년에 유대 상류가문인 마티아스 가에서 태어나 AD 68년 그의 나이 31세 때, 갈릴리 총독과 로마군에 대항하는 유대해방군의 사령관이 되었다가 그의 군대가 요타파타 전투에서 전멸되자 포로로 잡혀 로마 장군인 베스파시안(Vespasian)과 그 아들 티투스(Titus)에게 포로로 잡힌후, 친로마파가 되어 로마황제 밑에서 부귀를 누리게 된 인물이다.
그의 첫 번째 저서로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ae, 전7권)가 있으며, 여기서 그는 AD 66~73 년에 일어난 독립 투쟁사를 기록 하고 있다. 이 기록이 아주 세밀한 것은, 본인 자신이 그 전쟁의 와중에 중요 인물로 활동 했기 때문인데, 이 책 중 어디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두 번째로 그의 자서전(Vita Josephi)이 있는데,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의 출생 배경부터 시작 해서 로마에 항복하고 그들의 세력에 포섭된 자신의 합리화와 미화를 꾀하고 있으며, 반(反)유대주의를 논박하는 내용의 아피온 반론(Contra Apionem, 2권)이라는 저술도 있다. 세 번째의 책으로 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 전20권)가 있는데 예수에 관한 유일한 자료가 이 책의 사본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아담과 이브로 시작되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 시대, 출애굽을 망라하며 독립 전쟁 직전 (AD 66년)까지의 유대인 역사를 서술 하고 있는데, 집필 연대는 요세푸스가 밝히고 있듯이 도미티안 (Domitianus) 통치 제 13 년, 즉 AD 93~94 년이다. 책 뒷부분에 문제가 되는 예수 인용구가 있는데 그것들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의 구절이다.
"이 무렵 예수라고 하는 현자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구세주였다.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3일 째 되는 날 다시 부활해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무리들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대고대사 18 권 63~64절]
또 하나의 두 번째 구절을 보자, 유대고대사를 통 털어 예수 인용구는 이 두 구절뿐이다.
"그는 즉 구세주라 칭함 받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인물들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한다. 그들을 정죄 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다." [유대 고대사 20권 200절]
위에서 언급한 두 구절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얼마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인가? 하지만 그 구절들은 중세부터 현대에까지 끊임없는 조작시비를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원래에 없었던 구절이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동안 덧붙여 진 것이다. 이 구절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역사적 배경을 골드버그의 서술로 먼저 간단히 훑어 보자.
AD 93년: 유대고대사가 로마에서 발간되다. 헬라어로 쓰여진 원본들의 권말에는 티투스 황제가 직접 서명을 해 주었고, 발간을 윤허 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 원본들이 아니다. 원본들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도 10 세기경의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220~250년경: 유명한 초기 기독교 변론자인 오리겐(Origenes : 오리게네스라고도 불림)은 헬라적 신화를 차용해서 예수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해서 켈수스에 대한 반론(Contra Celsus)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요세푸스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었는데, 요세푸스의 저작물들 속에서도 여러 명의 예수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선원들을 선동했던 사피아스(Sapphias)의 아들 예수, 도적단의 두목으로 체포된 예수, 7년 동안 예루살렘 주변을 돌아다니며 "슬프다,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슬프다!"를 외치다가 여러 번에 걸쳐 두들겨 맞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던 예수가 있다. (결국 이 예수는 예루살렘 함락 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자기가 원하는 예수를 찾을 수 없어서 실망한 것 같다.
324년: 추기경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내용은 현존하는 복사 본들의 내용과 거의 똑같다.
10 세기: 아랍 역사 학자이자, 아랍 기독교인이면서 추기경인 아가피우스가 두 번째 구절을 인용 한다. 그런데 그의 인용구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유대인 통치에 관한 저술에서 유대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즈음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웠으며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그를 처형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는 3일만에 부활 해 그들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였던 것 같다"
16 세기: 1500여년 동안 아무도 의심 하지 않아 오다, 16 세기에 들어 와서야 조셉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18권에 등장하는 구절의 진위를 의심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 이었다.
17 세기: 리차드 몬테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 였다"라는 구절이 훗 날 기독교인이 복사 과정에서 덧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1737년: 위스튼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면서 요세푸스가 유대인 기독교인 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 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8 세기~ 20 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 되었다고 주장한다.
1929년: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면서, 또 누가 복음과 유대 고대사에 공통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요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주장한다.
1931년: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 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 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한다.
1941년: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 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 하다고 주장한다.
1954년: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뿐이며 나머지는 정확 하다고 주장한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부분의 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년: 콘젤만이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에 내포된 신앙 관과 문제의 두 번째 구절간에 공통성을 발견하고, 18권의 문제 구절 전체가 기독교인에 의해 위조 됐다고 주장한다.
1963년: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 하다고 단정한다.
1971년: 파인스가 9~10 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 (상기한 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하고,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973~1983년: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한다.
1984년: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 하여 두 번째 구절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구절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 하다.
1991년: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 하다. 즉 세 군데 만 위조 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다.
1995년: 골드버그가 컴퓨터를 동원하고 통계학의 개념들을 이용 하여 두 번째 구절과 누가 복음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 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저술중의 예수에 대한 구절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유대교의 제사장인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성경은 신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이루어 진 것이다. 즉 모세로 부터 아닥사스(Artaxerxes, BC 465 ~ 424)왕 때까지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저술에 의하면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소작 농민들은 25%의 세금과 사원에서 부과하는 22%의 헌금 등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는 동족들 앞에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신탁을 알리는 자칭 선지자들이 득시글거렸다고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비유(譬喩)와 알레고리(寓話)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설교하며, 멀지 않아 전쟁이 일어나 메시아가 나타나서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퍼트리며 돌아다녔는데, 이 소문들을 이용하여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처하며 게릴라 투쟁에 지도자로 나선 무리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유대교를 신봉하면서, 동시에 매국노였던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무장독립투쟁을 모두 사기꾼, 강도등으로 간주했다.
"파두스가 유대의 총독이던 시대에, 테우다스라는 이름의 어떤 사기꾼이 많은 수의 대중을 선동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소유물을 가지고 요단강으로 그를 따라오라고 선동했다. 그는 그가 예언자이며, 그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이 갈라지고 그들을 쉽게 건너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고대사 20권 97절]
"이집트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가 예언자라고 선언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5퍼얼롱(furlongs) 떨어져 있는 올리브 산으로 나가자고 선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명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며, 그 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대고대사 20권 169~70절, 유대전쟁사 2권 261~62절]
요세푸스는 당시 갈릴리의 유다, 페레아의 시몬, 톨로마이오스, 테우다스, 등 메시아를 사칭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자들에 대해 모두 사기꾼들로 평가했다. 그런데, 예수와 관계된 문제의 구절은 그가 예수의 신성과 기적, 부활을 인정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마치 기독교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실한 유대인이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 요세푸스가 문제의 그 구절을 직접 기록했더라면, 예수도 사기꾼처럼 묘사했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예수의 실존성을 증거한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유대인의 매국노라고 볼 수 있는 요세푸스가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바로 로마황제였다! 유대-로마 전쟁때 패배하여 베스파시안 앞으로 끌려간 요세푸스는 그가 바로 유대인이 학수고대하는 메시아이며, 곧 로마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요행인지 몰라도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베스파시안은 69년에 로마황제로 등극한다. 제는 예언에 대한 보답으로 요세푸스를 로마에 데려가 측근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그를 가르키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라는 말도 '플라비우스 왕가의 요세푸스'라는 뜻이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야 말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여 왔던 메시아이며, 그와 티투스는 멀지 않아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아첨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대의 신탁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임을 주장하며, 메시아를 사칭하여 로마에 대해 무장투쟁을 일삼는 유대동족들을 비난했다. 그런 요세푸스가 '유대 고대사'에서 갑자기 그의 정치적 처세술을 모조리 부정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칭송하는 글을 남긴셈이다. 한술 더 떠서 티투스 황제가 그의 책에 서명을 하고 발간을 허락한 셈이 되니 더욱 어이없는 일이다.
세 번째로,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작가로, 그는 보다 중요성이 적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썼다. 예수에 대한 부분만큼은 선행한 구절이나 뒤따르는 구절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문제의 구절은 다른부분과 문체까지도 다르다. 즉, 문제의 구절만 빼버린다면 완벽한 그의 문체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또, 그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들 가운데에 나오는데, 그 구절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역사가의 글에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개작의 손길에 의해 나뉘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 번째로, 요세푸스의 저술인 유대 전쟁사는 안티오코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대고대사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 되었는데 유대 전쟁사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로 유대고대사의 사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 되었으며,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대고대사는 초대 기독도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으며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초대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초대교부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좋은 증거물을 제시 하지 않았다. 유대고대사가 발간된 것이 기원후 93 년경 이었는데, 거의 140~250년이 흘러간 AD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이 처음 인용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 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요셉 웰레스에 의하면 문제의 구절은 유세비우스의 위조작 이었다고 한다. 요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Evangelical Demonst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 해낸 이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지만 유대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것이 조작이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이성의 모든 논증들은 그 구절이 염치없는 위조임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직한 기독교 학자들은 누구나, 그것을 첨삭된 것으로써 버려왔다.
Dean 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많은 추가적인 구절들과 함께 첨삭되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쓰며, Dean Farr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가 현재 있는 것과 같은 구절을 전부 썼다는 것은, 제대로 된 정신의 비평가라면 절대 믿지 않는다."
Chambers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세푸스의 유명한 그 구절은 일반적으로 첨삭임이 인정된다." [The Chambers Encyclopedia]
왈버튼(Warburton)주교는 그것을 "비열한 위조이며 매우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며 비난했다.
(2) 빌라보 보고서
한편, 요셉푸스의 기록 외에도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조잡한 위조문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빌라도 보고서라는 것이 있다. 필자가 조잡한 위조라고 말하는 것에 분개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을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위조를 하려면 그럴듯하게 해서 사기를 쳐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요세푸스의 문제의 구절을 경우를 따져보자. 요세푸스의 저작물을 이용해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료를 위조하려 한다면 머리 좋은 사기꾼은 다음과 같이 위조할 것이다.
"그 무렵 예수라는 사기꾼이 존재했다. 그는 스스로를 구세주라고 칭하며 대중들을 미혹했다.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예수가 3일만에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리며 다니며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이 글을 읽고 분노를 느낄지 모르겠으나, 요세푸스가 위와 같이 예수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록을 했다면 역설적으로 예수의 실존성을 알려주는 중대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특히 요세푸스의 정치성향과 그가 다른 유대인 메시아들을 강도나 사기꾼으로 매도했던 여러 정황을 파악하면 더욱 그렇다.
바로 이런 글의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이른바 빌라도 서신이다. 한동안 빌라도 보고서라는 글이 인터넷의 곳곳에 퍼져있는데, 기독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문서가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고한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식적인 문서라고 이며, 현재 터어키의 성 소피아사원(寺院)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빌라도 보고서라는 것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려고 했으나, 하나같이 전부 똑같은 카피 글 뿐이어서, 이 문서에 대한 어떠한 배경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수많은 카피 글에는 모두 판에 박힌 듯 "본 보고서의 내용은 도날드 N.리드만 박사가 소정의 요금을 지불한 후 특별 허가를 얻어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예루살렘에서 간행(刊行) 되고 있는 월간더 마운트 자이언 리포터(The Mount Zion Reporter 시온산 보고서; June 1974)에 게재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라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글을 퍼트리고 다닌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빌라도가 황제에게 보낸 공문서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읽어보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 조상의 종교는 예수의 종교로 대치될 것이며, 이 숭고한 관용의 종교는 로마제국을 허망하게 붕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련한 저는 유대인의 말을 빌자면 하나님의 섭리요, 우리의 말대로 하자면 운명의 도구로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빌라도는 보고서 전반에 걸쳐 예수를 칭송하고 있는데, 특히나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로마의 종교를 비하하고, 로마제국까지도 붕괴할 것이라는 말을 감히 총독이 황제에게 보고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그런데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시는 다른 분이 필자에게 알려준 제보에 의하면 인터넷에 떠돌던 그 글은 미국 미조리주, 분스빌(boonsville)이라는 마을 출신의 W.마한(W. Mahan)목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1884년에 마한 목사는 적어도 12개의 날조 문서(The Archaeological and the Historical Writings of the Sanhedrin, Talmuds of the Jews, Translated from the Ancient Parchments and Scrolls at Constantinople and the Vatican at Rome 등등)를 발표했다고 한다. 문제의 빌라도 보고서는 프랑스의 극작가 요셉메리(Joseph Mery)가 1837년에 르뷔 드 파리(Revue de Paris)에 발표한 폰스 빌라도 비엔느(Ponce Pilate a Vienne)라는 소설을 베낀 것이며, 다른 저작물들 중에는 유명한 벤허까지 베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마한목사는 법원에 고소 되어 1년간의 자격정지 처벌을 받았으나 그가 남긴 날조문서는 계속해서 출판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던 빌라도 보고서가 19세기 미국 목사의 창작물 이었다는 점에 필자는 맥이 빠진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로마황제에게 보냈다는 이른바 빌라도 서신이라는 고문서는 정말로 존재한다. 아마도 빌라도가 기독교의 성자였다는 오래된 전승이 유럽을 떠돌아 다니다가 결국 어느 소설가를 만나 그의 글속에 녹아 들었는지 모른다. 중세의 카톨릭 전승에 따르면 빌라도의 아내 프로클라는 기독교인이었으며 성인의 대열에 들어가 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빌라도 부부가 성인으로 되어있다.(카톨릭과 이디오피아의 성인 축일표에도 빌라도 부부의 날이 있다) 또한 초대교회 서술가 테르툴리아누스는 빌라도를 성인과 비슷하게 취급했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 2권 /
이런 배경을 기반으로 빌라도를 성인(聖人)으로 올려놓기 위한 빌라도 보고서는 또 있다. 위에서 언급한 어느 목사의 위조문서가 아니라, 6세기~7세기의 시리아어 필사본으로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고,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에서 소개된 비슷한 내용의 빌라도 서신들이 있다. 빌라도의 서신들은 비슷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이 각각 다른 유사문서들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현존하고 있다. (인터넷에 떠돌던 그 빌라도 보고서와 착각하면 않된다. 빌라도가 예수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아 황제에게 보낸 것은 동일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완벽하게 다르다.)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의 저자는 빌라도 서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티센도르프 박사는 그의 저서 비경전 계시록들에서 파리 필사본 가운데 그리스어로 된 사본을 구했는데 본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논의할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다. 빌라도의 편지 뒤에는 후대에 필사자가 추가한 요약 구절이 들어있다. 거기 나오는 유스티누스는, 역사가 요세푸스가 자기와 동시대의 역사가라고 말한 티베리아의 유스투스로 이해된다.
우리는 이 요약된 구절의 진정성을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 수가 없다. 유스투스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고 포니우스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테오도루스라는 인물을 우리는 티베리우스 황제라고 이해한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 2권 /
위조화폐의 경우에는 정밀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고대의 위조문서들은 메스메디아 부재나 지식의 일부층 독점 등으로 오히려 그 위조의 수법이 유치해도 무지자들은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빌리도 서신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문서인지는 직접 읽어보기만 하면 금새 알 수가 있다. 로마총독이 공식적으로 왕들에게 보냈다는 공문서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위에서 언급한 위조 빌라도 보고서와 유사하다) 아예 한술 더 떠서 헤롯이 빌라도에게 보낸 서신 중에는 "당신네 부부는 밤이나 낮이나 예수를 기억하면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정의로움을 받아들이십시오"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빌라도 뿐만 아니라 헤롯까지도 기독교로 개종한 듯 보인다. 한편,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자면, 그는 백부장 롱기누스로부터 예수의 부활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 그리고 빌라도와 그의 아내 앞에 부활한 예수가 등장한 후, 두 부부는 예수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편지들은 직접 전문을 다 읽어보면 너무도 기독교적인 찬양과 서술에 조잡한 위조를 한눈에 알아채게 만든다)
그리고,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낸 서신들은 위의 빌라도의 보고서와 유사한 성격의 문서이다. 이 서신에도 후대의 필사자가 "빌라도는 개인적인 보고서와 함께 아래 내용을 로마의 황제에게 보고했다"라면서 이것이 공문서임을 미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숨겨진 성서에는 앞에서 소개한 빌라도 보고서 바로 뒤에, 내용은 유사하지만 또 다른 빌라도 보고서가 2개 더 실려있다. 전부 유사한 내용이지만 각각 다른 글들인 것이다. 빌라도는 똑같은 내용의 서신을 황제에게 계속해서 보냈단 말인가?
빌라도 보고서라고 주장하는 여러 가지 버전의 글들을 보면 한눈에 그 조잡함을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복음서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즉, 예수가 병자들을 치료한 기적으로 서신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복음서에 있는 나자로의 부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후 치유된 여인...등등 복음서의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고 가정해도, 빌라도는 이런 기적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닐 터인데, 이런 기적행위들로 서신의 대부분을 할애해서 공문서를 작성한 보낸 빌라도는 황제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리고 숨겨진성서에서 이 빌라도 서신과 함께 소개되어 있는 빌라도의 최후는 더 가관이다. 빌라도의 최후 역시 두가지 버전이 있다. 첫번재는 빌라도를 성인으로 만든 파라도시스이다. 편지를 읽고 난 로마황제는 "그렇게 위대하신 분을 죽였단 말인가?"라고 화를 내며,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하여 목을 베라는 사형선고를 내린다. 사형을 당하기전 빌라도는 기도를 했고, 그 순간 하늘에서 빌라도를 축복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목이 떨어지자 천사가 빌라도의 머리를 받았으며, 그 모습을 본 빌라도의 아내 프로크라는 기쁨에 넘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빌라도의 처참한 자살버전이다. 빌라도의 편지를 읽은 황제는 화가나서 그를 소환했으나, 빌라도는 예수의 옷을 걸치고 황제앞에 나타났다. 예수의 옷을 걸친 그를 볼 때 마다 이상하게 황제는 분노가 가라앉았으나, 황제의 측근인 어느 기독교 신자의 권유로 빌라도의 옷을 벗기니 황제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빌라도는 처형당하기 전에 자신의 단검으로 자살해 버렸다. 빌라도 보고서는 여러 가지의 버전이 있으며, 담긴 내용조차 도저히 공문서라고 볼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조잡한 문서일 뿐이다. 차라리 빌라도 복음서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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