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죄의 용서가 세례와 ‘성자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의 현재적 구원 활동을 특징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듯이 몸의 부활은 그것의 미래적 성취를 특징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다.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세례받은 이들, 그리고 죽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어있는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미래에 죽은 자가 부활을 통해서 얻게 될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게 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발생했으며, 세례받은 자들에게 지금 이미 신앙과 희망의 새로운 생명에 대한 능력을 제공한다(롬 6:4 이하).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진 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주어진 미래적 생명이 현재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몸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은 그 생명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는 이미 앞에서 예수 부활을 다룰 때 충분히 논의되었다.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의 의미에 대해서, 인간현존의 완전성에 대한 질문을 책임적으로 답해야할 보편적 인간의 적합성에 대해서, 이것은 죽음을 뛰어넘지 않은 차안의 지평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데, 그리고 헬라적 불멸신앙의 상이성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헬라 사상은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지속적 생명이라고 표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와 달리 여러 전승을 받아들여 형성된 기독교 신조는 몸의 부활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어떤 고대교회의 신조 전승은 이 언설을 훨씬 첨예화하고 있다. 사라져버릴 지금의 이 몸이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5:53)는 바울의 진술과 같은 것들이다. 몸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다는 강조는 영혼이 다른 육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플라톤적 표상과 반대된다. 이것이 말하려는 바는 인간의 정체성이 육체적 실존의 유일회성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의 질료적 정체성에 대한 신조는, 그 당시에 유기적 질료가 이미 개인의 생존기간 동안 여러 층위에서 갱신된다는 현대적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헬라 세계에서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주장을 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 사상이 질료적 정체성을 강조했다고해서 영혼 불멸성이라는 사상을 완전히 몰아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 사상은 영혼 불멸성과 몸의 부활이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이 두 표상을 상호적으로 결합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이 시간의 지평적 흐름과는 달리 배타적으로 고려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죽은 자의 부활이 개체의 죽음 이후에 즉시 발생될 것으로 기대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전승에 따라서 이 세계와 역사의 마지막에 기대되었기 때문에 개체 실존에 대한 질문은 죽음의 시점과 미래에 있을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의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시기와 관련되었다. 이제 영혼 불멸에 대한 표상이 현재의 생명과 죽은 자의 부활이 미래에 입게 될 생명 사이에 있는 시간의 간격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기독교 사상에서 볼 때 완전한 인간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육체와 영혼이 하나를 이루어야만했기 때문에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실존은 완전한 인간 실존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개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지속됨으로써 주어진 이 연속성은 죽어야 할 현재의 생명과 함께 하는 미래적 생명의 인간적 정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요긴한 것처럼 보였다. 죽음과 미래의 보편적 부활 사이에 놓여있는 인간의 개인적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최후심판 앞에서 인간이 어떤 개인적 정체성 가운데서 책임적이어야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1513년 이래로 영혼이 사멸한다는 주장을 이교도적인 것으로 정죄했으며 영혼 불멸을 옳은 도그마로 승격시켰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감당해야할 인간의 개인적인 정체성과 책임성이라는 문제를 현대 인간론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주장에 그 토대를 두어야하는지 아닌지는 의심스럽다. 여기서의 이 주장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에 죽음을 뛰어넘어 지속된다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지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서 현재의 몸만이 아니라 그것의 질료인 육체*도 역시 미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게 틀림없다는 사도신경의 진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의 현재적 ‘육체’가 미래의 부활 현실성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간의 선적 흐름에 묶여있는 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영혼 불멸이라는 표상을 사실상 기본적으로 받아들인 신학적 관심은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훨씬 만족스러워졌다.
*Leib(헬라어- 소마)와 Fleisch(헬라어- 싸르크스)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일단 각각 ‘몸’과 ‘육체’로 표기했다. 소마(Leib)는 영혼(Seele)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인간 구성 요소라고 한다면, 싸르크스(Fleisch)는 다른 동물들도 소유하고 있는 물질로서의 인간 구성 요소를 뜻한다. 또한 싸르크스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게 하는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성격을 말한다면, 소마는 하나님을 긍정하거나 혹은 반대하기로 결정하는 인격적 성격을 말한다. 원래 몸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희생제사를 드리며 자기를 하나님이 통치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소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갈 6:17, 고전 9:27) 그는 우선적으로 시-공간의 차원에 있는 인간의 외적인 현상방식을 생각했다. (참고, TRE 20권, 640 쪽 이하).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육체 입으심(Fleischwerdung Gottes, 요 1:14)이라고 했으며,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싸르크스는 소마의 질료다.
원시 기독교의 묵시문학적 시간이해에 따르면 언젠가 지상에서 계시될 미래의 그것이 하나님의 은폐에, 즉 ‘하늘’*에 이미 드러나 있다. 이것은 부활한 자가 미래의 메시야와, 그리고 세계 심판자와 동일시됨으로써 이미 현재적인, 그러나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세계통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으로 옮겨갔다는 논리였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기독교의 부활 희망에 해당된다. 즉 죽은 자의 미래적 부활로 인해서 명백해지는 사실은 지금 이미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 역사에 담겨 있는 비밀이 현재적이며 영원한 하나님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내적 관계로부터 요한복음의 특기할만한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은 아들을 믿는 자는 지금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요 5:24). 마지막 성취의 미래는 숨겨진 방식으로 이미 현재한다. 따라서 예수와 만남으로써 지금 이미 궁극적인 최후가 결정될 수 있다. 그렇다고 요한이 이 최후의 결정을 미래의 일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최후의 결정은 미래적인, 그러나 숨겨진 방식으로 이미 현재한다. 따라서 요한이 이해한 그리스도는 다음의 문장에서 현재와 미래를 역설적으로 상호 소통시키고 있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요 5:25). 이와 마찬가지로 골로새서에서도 세례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되어있다. 바울에 따르면 이 참여는 미래의 일이며(롬 6:5, 8), 이미 현재의 일이기도 하다(골 2:12). 그런데 여기에 바울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골로새서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죽은 자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폐에서만 현재적 리얼리티가 되기 때문이다. “…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골 3:3, 4). 그러나 이러한 언급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점이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이제 여기서 역사적 미래와 하나님의 영원 속에 은폐된 현재가 묵시문학적으로 결탁**되는 것을 다시 한 번 짚어 보도록 하자. 시간과 영원의 이러한 결탁은 일단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원 가운데 이미 현존하는 그것은 미래에 명백하게 드러나든지 않든지 상관없다고 말이다. 이런 주장은 영원을,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하나님을 무시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시간 속에서 발생하거나 혹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영원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시간적으로 여전히 미래적인 모든 것은 영원 가운데서 이미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원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모든 개체에서 운용되는 세계과정이 영원으로부터 도래한 모든 악과 모순을 포괄한 채 하나님을 통해서 고정되거나, 아니면 전체 인간역사와 더불어 성육신이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이 시간적 역사가 하나님에게도 결정적으로 의미 있다는 신앙에 근거한다. 따라서 시간과 영원의 결탁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이 세계의 미래에 의존적이라는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보여줄 미래적 계시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 없이 그저 무엇이 확정적인지를 드러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미래적 계시는 오히려 영원이신 하나님이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미래에 근거해서 요한복음과 골로새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은폐에서 이미 지금 영생에, 그리고 이미 지금 예수부활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현재적 생명에 담겨있는 연속성이 죽은 자가 얻게될 부활의 미래적 생명과 더불어 시간과정의 줄을 좇아가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 그 미래가 이미 지금 우리의 생명에 현재하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은폐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현재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심층적 차원 안에서 생명에 대한 진리는, 즉 생명의 심판이냐 구원이냐, 하는 문제는 현재적이다. 이 진리는 우리 생명의 과정에서 분명히 결정되는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역으로 미래의 생명이 사실상 현재 생명과 질료적으로 일치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미래의 내용이 현재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현재 생명의 심층적 차원을 성취할 그것이 되기 때문이다. 명확히 말해서 이는 하나님의 미래가 숨겨진 방식으로 모든 사물을 영원히 현재화하는 그 불빛에서 제시되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 미래가 스스로 현재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완전히 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즉 그것은 실제로 그 육체이며, 우리의 현재적 생명의 전적인 연장(延長)이다. 이 연장은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질 인간의 운명과 달리 그 심판을 통과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주권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얻거나 들림받을 그것이다. 그러나 죽을 우리의 생명이 이렇게 변화한다는 것이 고정불변한 무시간적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신경은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덧붙여 영생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영생은 기독교의 부활절에 관한 신조형성에서 전해진 것으로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자가 기대하는 그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풀 신조는 이 점에서 미래 세계의 생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영생이 하나님의 미래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동시에 이 영생에서는 현재적 생명과는 다른 종류의 무엇이 암시되고 있다. 미래 세계의 생명은 지금과 동일한 시간상에서 현재적 생명을 다시 공급받거나 끝이 없는 연속이 아니라, 생명의 역동성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생명의 심층적 차원에서 키워나감으로써 확대시킨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우주를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 구조로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말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근본적으로 오류라고 말할 수 없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은폐성을 하늘이라는 표상으로 개념화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승천했다는 것도 역시 역사적 예수가 아직은 은폐되어있지만 미래에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온전한, 그리고 비밀의 통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결탁(Verschränkung)이라는 단어는 두 사물이나 현상이 교차적으로 어떤 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인데, 본문 가운데서는 역사적 미래와 영원이 묵시문학적으로 결탁하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전승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 사상사에 개입된 이러한 결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역사가 무시간적 영원성으로 왜곡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이 역사에 의존된다는 뜻이다. 판넨베르크는 물론 후자의 해석을 정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 역사와 영원이 상호적으로 무언가 현실적인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시간적으로(zeitlos)라는 말은 성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헬라적인 개념이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을 이렇게 무시간적, 비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위험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원은 현재의 시간에 의존적이며 현재의 시간은 하나님의 영원을 선취하고 있다.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 하나님이라는 판넨베르크의 명제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편사적 지평에서 바라보려는 그의 신학적 특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은 만사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그 미래는 이 세상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게 아니라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2장 역주 참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재 생명이 미래 세계의 영생으로 돌입한다는 것은, 이것이 곧 죽은 자의 부활인데, 고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한 사건으로, 또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세계가 끝날 때 등장하게 될 한 사건으로 기대되었다. 이 영생은 개개의 인간들이 죽은 다음에 즉시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개개인의 구원, 그리고 불행과 죄책과 죽음을 통해서 이리저리 찢겨버린 현존의 완성과 인류의 운명은 현 세계의 역사가 종말에 이를 때 발생하는 죽은 자의 보편적인 부활표상 가운데서 상호 연결된다. 이것은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최후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계시와 맺는 완벽한 결합에서 드러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사회적 운명이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는 그 근원으로부터 개개인의 생명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선택받은 백성과 인류에게 약속된 구원사건의 몫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개체 인간의 삶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현 생명의 부정적인 대차대조를 피안적으로 균형 잡으려는 사상이 아닌가라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죽은 자의 부활과 죽은 자의 심판은 현 역사가 끝날 때 모든 이들이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실이며, 또한 이것이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서막이라는 생각은 개인이 감당해야할 인간 운명의 성취를 모든 다른 개인이나 인간사회와 연결시킨다.
18세기 이래로 진행된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에서는 이런 연결이 실종되었다. 평화와 정의로 실행되어야 할 완전한 사회의 목표, 즉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 무계급 사회의 목표는 현 세계의 조건 하에서 인간 자신에 의해서 실현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근대의 이러한 미래 신앙은 미래의 완전한 사회에서 휴머니티가 미래적으로 현실화될 때 과거 세대의 개인들이 참여할 몫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 대답도 더 이상 줄 수 없다. 이 근대의 미래신앙에는 아마도 인류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개인의 행복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대의 혁명운동이 태동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인류가 개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더구나 억압받지 않는 미래 사회의 인간들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개인이 모여 인류를 이룬다는 생각과 반대되는 인류는 냉혹한 추상*일 뿐이다. 이러한 추상은 개인을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이 정치적 현실로 전환되는 곳에서 매우 확실하게 비인간적으로 작동한다. 인류가 감당해야할 인간 운명의 실현은 인류에 포함된 모든 개인의 인간적 운명이 함께 실현될 때만 고려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모든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라는 고전적 기독교 교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부활은 하나님 통치의 개시와 동시에 발생한다. 즉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과 최후심판 없이, 또한 모든 개인의 참여 없이는 하나님 나라도, 인류의 실현도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기준은 인류가 정치적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실현된다는 잘못된 이념을 막아내는 데 적절하며 불가결한 요소다. 이것은 이 기준이 휴머니티의 이름으로 관행화된 예언의 비인간적 성격을 노출시킴으로써 발생한다. 다른 한편으로 평화와 정의 가운데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념으로부터 항상 거듭해서 정치적, 사회적 삶의 갱신이라는 충격들이 도출된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희망이 뜻하는 핵심도 역시 인류의 사회적 운명이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사명 가운데서 임박한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와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인 예수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교회의 자명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작용 없이는 거할 자리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자신의 사신을 예수가 개인에게 제시했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으로서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의미한 게 아니다. 이런 관계는 세계종말의 임박에 대한 기대를 시간적인 조건에서만 생각한 결과는 아니다. 예수가 정치적으로 각인된 메시야 칭호를 거절했다는 것은 정치적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곧장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임박과 현재를 규정해나가는 능력에 대한 종교적 신뢰가 사회적으로 작용해야한다는, 항존적이고 의미심장한 암시를 담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연결됨으로써 종말론적 희망에 영감받아 실행되는 사회의 모든 정치적 갱신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질서를 오직 우회적인 유비로서만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 평화질서가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그 수준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질서가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개인적 운명을 어느 정도로나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서 이 운명은 개인들이 주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모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 받는 것과 일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를 판단할 수 있는 휴머니티의 등급은 그 휴머니티가 인류의 과거,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국가의 과거와 불편부당하게 맺어진 관계 속에서 측정된다. 그리고 개인의 생명도 역시 현 사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심층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는 역사에 연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세대나 마찬가지로 인류의 과거 세대를 포괄하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희망은 마지막 세대의 구원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가 담지하고 있는 모든 시대의 변용(變容)**을 철저하게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빛을 발하는 신적 심판의 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 지평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사라진 어떤 이상화된 사회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판넨베르크는 개인이 무시된 인류를 추상(Abstraktion)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견지하고 있는 개개인들이 사회적 변혁을 이루는 것이지 개인이 무시된 사회적 이념이 구원의 세계를 이루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히틀러의 제삼제국은 물론이거니와 개인보다는 사회적 지평을 훨씬 강화시키고 있는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착상이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며 미래적 존재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일종의 線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단순히 종말의 우선권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것이 종말에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겠지만, 여기에는 곧 종말이 이르기 전역사인 모든 시대의 변용(Verklärung aller Epochen)이 전제된다. 말하자면 현재는 당연히 종말론적으로 규정되어야하지만 미래도 역시 현재와의 연결 속에서 그 현실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판넨베르크 신학의 중심개념인 “역사로서의 계시”로 돌아가게 된다. 역사는 전체(Ganzheit)로서, 하나(Einheit)로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