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10.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주제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앞서 다룬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진술에서와 같이 이번에도 신앙고백의 두 진술*을 다시 한 짝으로 해서 다루어야 하겠다. 그러나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부활과 하나님에게로 사라졌다는(혹은 승천) 이 두 진술은 근원적으로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근원적으로 무덤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부활한 자의 현현은 하늘로부터 일어난 일로서 경험되었다. 부활과 승천의 시간적 차이는 원시 기독교 전승의 후기 국면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가복음의 신학에서 그런 차이가 일어난 것 같다(1세기 후반 쯤). 그리고 이 차이는 부활한 자의 현현에 담겨있는 준(準)-지상적 육체성을 특별히 강조한 그 결과다. 즉 이것은 이제부터 지상에서 일어나는 해후로 간주되었다는 말이다. 부활절 현현이 지상적 해후로서 이해되었다면 예수가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부가적이고 특별한 사건으로서 파악되어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승천 이야기가 이렇게 제시된 것이다.
*이 두 진술이란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사실과 그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이는 곧 판넨베르크가 앞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하나의 묶음으로 처리한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의 우편 자리와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의 관계에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의 경우에서처럼 한 사건을 두 가지의 공통된 관점으로 다루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부활한 자의 우주적 기능으로, 즉 인간 예수에 대한 부활절 사건의 의미가 세상과의 관계에서 확대된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 경우에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진술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두 진술은 상호간 결과론적인 관계를 맺는다. 부활한 자가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이 진술의 근본이다. 이에 반해 예수가 이미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관여했다는 고백은 그것에서 나온 일종의 귀결이다. 양 진술의 실제적이고 전승사적 관계는 사도신경 문서가 보여주고 있는 그런 차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곳에 등재된 순서상의 계산은 (추측 컨데) 보도된 사건의 시간적 순번을 단순하게 따르고 있다. 예수의 지상적 삶과 죽음이라는 사건의 시간적 계산은 그의 현재적 삶에 대한 진술을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미래에 대한 진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몇몇 경우에 다른 순서로 자리잡히게 되었다는 점이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전승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초가 잡힌 진술들이 우선권을 갖게 되었으며, 원시 기독교의 전승사 과정에서 발전된 그것들도 역시 이런 진술을 따라야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고백은 완전히 앞머리에, 즉 그리스도론적인 언급 이전에 놓였어야했으며, 그 다음에 예수 부활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재림에 대한 문장이 뒤따라야만 했다. 우선적으로 그리스도 칭호와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언급되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이에 관한 것은 곧 그리스도의 선재성(독생자로서의 선재성)과 성육신에 대한 진술이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의 대리적 수난에 대한 진술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고백은 실질(實質)적으로 완전히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그것과 더불어 예수에 대한 모든 확대된 신학적 진술의 기초를 형성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서 세상 끝날에 하늘로부터 오게될 신적 심판자라는 표상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세계 끝날이라는 사상과 별로 상관 없이도 발견되는, 죽은 자의 심판이라는 표상에 근거하고 있다. 종말에 대한 기대와 죽은 자의 심판은 유대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페르시아 종교에서도 역시 그렇다. 유대 세계에서 인자(人子)는 종말적 심판자다. 인자의 특징은 에스겔서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예언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겔 2:1 이하). 이 지칭은 여기서 단순히 ‘사람’이라는 뜻이며, 더우기 특정한 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그렇게 지칭함으로써 그의 인격적 실존에 속한 유일회성에 근거해서 그를 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직무의 담지자로서나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서 그를 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를 피조물로서 대하려는 것이다. “너, 사람아”*라고 말이다. 다니엘이 심야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았을 때(단 7:13), 여기서 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역사의 종말에 등장할 하나님 나라의 인간적 성격에 대한 상징이다. 이에 앞서 언급된 짐승모습이 뒤이어 등장하는 세상나라를 상징화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에녹 묵시문학**에서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올 이러한 ‘사람’이나 인자가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인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다. ‘사람’이나 인자가 마지막 때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나타날 심판자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기대는 심판하기 위해 예수가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를 통해서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예수와 동일시되었다. 예수의 사라짐이 어떻게 미래의 세계 심판자라는 형태와, 그리고 인자라는 형태와 연관되는 것일까? 이를 견인한 동인들 가운데서 무언가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
*독일어 원문은 이렇다. “Du einzelner Mensch”. 참고적으로 에스겔 2:1의 말씀은 이렇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즉 인자라는 단어는 사람과 거의 똑같은 뜻인데, 유대의 묵시문학적 해석과 기독교의 종말론적 해석을 통해서 종말에 오게될 세계 심판자로서 개념화되었으며, 기독교 공동체는 이 인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동일화 과정에 초대 교회의 전승사가 개재해 있다는 점을 아래에서 설명한다.
**에녹문서에 대해서는 9장의 역주를 참고할 것.
예수 스스로 앞서 활동했던 세례요한처럼 모든 개연성을 열어두고 인자가 곧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다. 복음서에 전승된 인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서로 다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 그룹에는 물론 인자를 미래의 세계 심판자로 암시하는 권위 있는 말씀들 중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말씀들 가운데서 예수는 인자를 자기와 다른 인격체로 구별하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눅 12:8, 참조- 눅 9:6, 막 8:38). 부활절 이후 공동체는 이 말씀을 다르게 구성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도래할 인자를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마태에 의해 인용된 말씀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마 10:32). 누가복음과의 표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양 문장의 중간에 예수의 나(Ich)라는 단어다. 이것이 바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와 인자를 일치시킨 단서다. 역사적 예수는 마태복음이 인자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했겠지만, 즉 인자를 자기와 구별하였겠지만, 도래할 인자의 심판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사신과 태도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부활절 이후로 기독교 공동체는 지상적 인간인 예수와 미래에 하늘로부터 도래할 세계 심판자 사이에 놓여있는 간과될 수 없는 차이를 포기했다. 인자가 유대적 표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는 부활을 통해서 천상적 모습을 갖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기독교의 희망은 그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통치의 완성을 위해 부활한 자의 재림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 본의 아니게도 부활한 자의 기능이 마지막 심판에서 기대된 인자와 매우 광범위하게 융합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를 기대된 인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아마 제자 중의 몇몇은 이미 부활 현현에서 즉시로 예수를 인자로 간주했을 것이다. 이 부활 현현이 하늘로부터 발생한 사건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늘로부터 발생한 예수의 현현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 게 틀림없는 인자 상과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서 예수와 인자 사이에 그 어떤 틈도 개입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구나 세상심판을 하나님 통치의 궁극적 건설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예수 자신이 자기의 사신을 인자 개념과 연결시켰다. 이 인자의 판단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다. 부활절 이후 이제는 인자의 미래적 기능이 예수출현과 상응한다고 생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양자가 동일시되었다.
이 모든 것은 무언가 우리와 관계있는 것일까? 인자 개념은 기독교 전승에서 이미 초기부터 퇴색되어 있었다. 이방 기독교회는 예수의 재림을 세계 심판과 연결시켰지만, 인자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는 첫 사람의 죄를 극복하고 인간의 운명을 실현할 새로운, 두 번째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미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진술하고 있다. 인자의 유대적 형태에서 그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사람의 계시는 여기서 예수의 부활과 연결되는 것이지 세계 심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예수의 실존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과 그의 고난과 그를 통한 죽음의 극복 가운데서- 사람의 인간성이, 즉 인간으로서의 운명이 실현되었다는 생각은 오늘의 기독교 신앙에서도 역시 기초다. 어떠한 정도로 우리 자신과 모든 다른 인간들이 우리의 생명 가운데서 참된 인간성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예수가 준거라는 사실이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확증에 속한다. 이러한 준거로부터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불문하고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 이것은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기대에 해당되는 문제다. 그것은 현재적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 없이 행동하는 자에게 행운이 임하며, 인간의 인간성을 조롱하는 행동과 태도가 팽배하며, 그리고 무죄한 자가 고난 받는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서 매우 확실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맞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각기의 시대정신에 베여있는 강압적 태도와 압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하는 확실한 토대다.
오늘날도 역시 이런 확증의 현실적 토대를 부활절 사건이 제공한다. 예수의 사명이 십자가 처형으로 분쇄되고 그의 제자들 역시 뿔뿔이 흩어진 다음에 하나님은 부활사건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시며 예수 사신이 요구하는 바를 확증했다. 즉 인간의 구원과 멸망은 하나님의 미래에 참여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예수에게 참여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예수가 궁극적으로 요청한 것은 이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이 출현함으로써 신뢰할만한 주장이 되었다. 이 부활사건에는 이미 예수가 최종적 기준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심판할 세계 심판자라는 사실이 놓여있다. 예수와 그의 사신을 거절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으로 심판받는다. “내가 말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 12:48).
도래할 세계 심판자가 바로 예수라는 점에서 그의 심판은 더 이상 미래만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비밀스런 방식으로 이미 현재적으로 그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심판은 우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개시로서, 죽은 자의 부활과 창조의 갱신으로서 계시된다.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와 연결된 세계 심판은 이미 비밀스럽게 결정된 모든 것을 지금 여기에 노출시킨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 심판대 앞에 서야하며, 그리고 명목상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도 하나님의 통치와 그 새로운 생명의 불빛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예수에게 계시된 인간의 운명과 더불어 자신에게 다가온 진리 앞에서 결국 예수와 분리되어 버리는 중에서도 말이다(마 25:31-44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심판자가 기독교 신앙이 지금도 역시 의존하고 있는 예수 말고는 결코 다른 이일 수 없다는 기독교적 확신의 근거는 여전하다. 왜냐하면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모든 영원에 돌입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요 5:24).
이러한 숙고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원시 기독교 전승사와 비슷한 과정에 접어든 셈이다. 이 전승사는 세계 심판자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왕으로서 예수가 재림한다는 기대로부터 예수 재림의 미래적 사건이 비밀스럽게 이미 현재적으로 드러나게 된 현실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에까지 다다르게 됨으로써 이런 숙고를 관철시켰다.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는 것이야말로 부활한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이 진술은 시편 110:1의 말씀과 상응한다. “야웨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않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루살렘 왕에게 전한 말씀으로 말이다. 여기서 야웨는 왕에게 세계통치를 약속하는데, 이는 시편 2:8 이하의 말씀과 흡사하다. 하나님 자신이 원수를 그의 발아래 무릎 꿇게 한다. 왕에게 약속된 권력은 특별히 하나님의 우편에 앉도록 초청되는 것을 뜻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통치자의 우편 자리는 통치자의 권한에 이은 차열이었으며, 통치자의 이름으로 권한을 실행하는 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왕에게 “내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왕이 하나님의 고유한 세계통치를 실행할 때 그를 강력하게 만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시 기독교에서 이 말은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말걸음이라고 해석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해석은 시편 110:1 본문에서, 즉 (主) 하나님이 ‘나의 주’에게 말씀했다는 진술에서 한 거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예수가 그의 공동체에서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주’라고 일컬어지자 곧 시편 110편의 말씀을 그에게 연결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행 2:34 이하 참조). 메시야 신앙이 시편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게 된 출발점이었다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높다. 이미 유대적 기대는 이 시편을 오시는 메시야와 연계시켰다. 시편의 이러한 구조를 예수에게 적용시킬 동기가 주어졌다면,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를 인자로서만이 아니라 메시야로서, 그리고 최종적 심판자로서만이 아니라 도래할 구원시대의 왕으로서 가역적인 방식으로 기대했다는 점이 이미 전제된다. 이러한 기대는 벌써 앞서 논의된 바처럼, 십자가 명패에 새겨진, 즉 예수를 메시야로 가리키는 명문을 통해서 유발되었다. 그러나 기대되고 있는 메시야와 예수를 동실시하는 심층적 근거는 예수가 부활하여 오게될 인자가 된 이후로 그 이외에는 그 어떤 구원자도 거처를 갖지 못함으로써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예수에게서 실행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 우편 자리에 대한 표상은 한걸음 더 나아가 메시야의 미래적 세계통치가 이미 하늘에서 현재적으로 이루어진 현실성으로서 이해되었다는 데 놓여 있다. 미래에 지상에서 여전히 계시되어야 할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에서 이미 지금 현실성인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일반적 이해와 상응한다. 종말 시에 지상에서는 하늘에서 현재 이미 준비된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성 가운데서 역시- 계시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미래의 메시야적 통치자로 희망하게 된 그 생각이 발전하여 예수가 이미 현재 비밀스럽게 통치한다는 신앙고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는 이 경우에 결코 미래로 치우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 지상에서 미래에 계시되어야만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은폐 가운데서 지금 무엇이 현실성인지 관철해낼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우편 자리’는 부활한 이가 현재적으로 거하고 있는 장소를 공간적인 의미로 진술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공간적 기준들은 부활 현실성이 그것들과 지평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16세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으로 높임을 받았다는 공간적 이해가 개혁주의자와 루터주의자 사이에 전개된 성만찬 논쟁을 야기시키는 데까지 확대된다. 만약에 부활한 이의 육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공간적으로(localiter) 자리한다면 결국 예수가 지상의 제단에 동시적으로 현재할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쯔빙글리는 생각했다. 루터가 이러한 논증에 포함된 하나님의 우편 자리에 대한 공간적 표상에 대해서 논란을 재기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한 이가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하도록, 창조에 신적인 통치를 실행하도록 올림을 받았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도가 통치한다는 신앙고백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암시에 있다. 이 일치는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모든 것에,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신앙고백적 진술을 확보해가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인식이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숙고하게 된 마지막 귀결이었지만, 그것이 원시 기독교에서 당연하게 전제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니케아 신조가 누가복음 1:33의 말씀대로 예수가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온다는 진술을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 처럼, 예수가 하나님과 일치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통치가 끝장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해체될 수 있는 어떤 중간단계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8에서 이러한 견해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때 만물이 아들에게 복종한 후에 아들도 역시 아버지에게 복종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언급은 마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한정적으로 진행되기나 하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순차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만물을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에 복종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담긴 유일한 의미이다. 이것은 이미 지상적 예수의 사신 내용을 구성한다. 이 사신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에 의해, 또한 이 임박을 위해 문을 열라는 강력한 권고와 초청에 의해 완전히 성취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통치가 과연 어떤 내용인지 이해된 것 같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모든 인간을, 그리고 그 인간과 더불어 전체 피조물을(롬 8:21이하)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중재하는 일을,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과 아들 관계로 이끌어가는 일을 완성한다고 말이다. 여기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의 지상적 현존에서 이미 현실적이었던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가 언급한대로 그리스도의 통치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실행된다고,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과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신을 듣는 자는 예수와 연결된다. 따라서 그는 예수 처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게되며, 또한 그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원래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 사이의 상대성이 고양되는 것이다. 즉 통치받는 자가 하나님의 주권에 참여한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통치로 인해서 이것이 확증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자체 목표를 갖지 않는다. 그것의 목표와 의미는 통치 받는 자를 들어 올리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인간세계와 그 역사 내부에서 특별한 영역이라 할 교회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선포를 통해서 전 인류를 지향한다. 전 세계는 예수를 통해서, 그리고 그에 대한 교회의 사신을 통해서 교회가 갖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세계와의 관계로 부름을 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와 동일지평에 놓일 수 없다. 전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다. 따라서 전 세계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창조를 완성해가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만물은 역시 예수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예수가 하는 일은 세계가 오직 창조자의 덕분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창조자가 세계의 미래라는 점을 기억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그 사실을 알고 그렇게 노력하든지 않든지 간에 만약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만물과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실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는 실제로 예수가 창조의 중재자요 ‘독생자’라는 진술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도래하는 그 나라의 일에 대한 예수의 전적인 헌신에 기초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는 오늘의 세계에서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 이는 곧 하나님 통치의 미래가 은폐*되어 있는 것과 같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현재 그 통치를 믿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은 단순히 입술로만 되뇌는 고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고백은 그것이 실제로 기독교인의 태도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불신앙적인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희망을 기초하고 희망에 따라서 산다는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직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은폐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신앙 고백적 프락시스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통치의 보편성에 상응하여 실행되는 모든 세계에 대한 선포가 속해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 통치의 사실적인 은폐성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이 통치에 근거해서 살게 하고,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사회의 과업에 동역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 통치의 은폐성은 기독교의 복음이 조우하는 어떤 저항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예수의 역사에 나타난 사건의 의미를 잠정적으로만 이해하고, 따라서 이 예수 사건이 상이한 모습으로서 증거 되고, 또한 보다 나은 이해를 통해서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분명하다.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의 통치에 상응하는 기독교인의 모든 행위와 노력은 항상 잠정적이며 따라서 개혁을 필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한 궁극적인 현실성 가운데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의 경우라도 그리스도의 통치에 상응하는 잠정적인 인식과 실행에 담긴 현실성을 잠정적으로만 믿음으로써 살아간다. 예수 안에게 나타난 사건과 그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에, 따라서 기독교의 선포와 기독교인의 행위가 아직도 불충분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언어와 행위는 이 세계 가운데서 저항을 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최소한 부분적일지라도 그 저항이 분명히 타당할 때도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 안에서도 역시 명백하지 않으며, 기독교인의 인식이나 행동에서, 또한 교회의 행태에서도 역시 그렇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신앙적 이해와 태도에서 이미 교회일치를 위협적으로 파괴시키고 있는 모순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현존적 시각에서 볼 때 교회 안에서도 역시 아직은 명백하지 못하지만, 예수에게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아닌- 이미 발생한 사건을 토대로 해서 그에게 신앙고백을 드리는 그런 신앙에서만은 명백하다.
*여기서 은폐되어 있다는(verborgen) 말은 미래에 드러나게 될 그 궁극적 진리를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를 보라.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진보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는 여전히 불안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평화와 자유와 진리가 완전히 지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괴와 억압과 위선이 어느 한 순간도 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은폐성은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 교회가 진리에 어긋한 역사를 그 안에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한다면 교회가 진리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며, 따라서 마틴 루터가 ‘끊임없이 개혁되는 교회’라고 말한 것처럼 교회는 자기 개혁을 당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인이 이러한 잠정성과 은폐성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부활의 예수를 향한 신앙 가운데서 만큼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명백히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