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하나님을 an Gott
2장 하나님을 an Gott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 첫 신앙 항목이 무언가 기독교적으로 특별한 것이라고 느끼지도 못했다. 대개의 지식인들도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는 생각에 동조하고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신앙고백의 곤란한 문제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에서, 그리고 그의 기적적인 출생과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서 시작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예수가 가르쳤던 하나님에 대한 순박한 믿음을 방해하는 일종의 첨가물로 인식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Christusglaube)은 예수의 기독론적인 지평을 말하는데,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인간 예수에게만 집중시키고 있는 현대신학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즉 예수만 강조되고 그리스도가 약화되는 현상을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라는 특색을 지닌다. 그가 예수의 부활을 기독교 신앙의 초석으로 여기는 것도 그의 이러한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에 기초한 당연한 귀결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신앙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야만 한다.
오늘날 상황은 악화되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거할 자리는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자들마저도 벌써 하나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기독교 전승에 놓여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거점은 사랑을 선포한 인간 예수*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지성적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를 예수의 휴머니티에서 찾으려고 한다. 구약의 하나님,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로서의 하나님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예수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만이 신앙의 유일한 터전으로 자리하는 경향이 있다. 60년대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정치신학 등이 그것이다. 결국 신(神)죽음의 신학에까지 이르게 된다.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초대 교부들의 변증적인 하나님 이해를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삼고자 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대체하려는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리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자 그런 노력에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대담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지켜내는 작업은 승부를 내다보기 힘든 무모한 싸움처럼 보일 수 있으며, 그 사유를 포기하는 신학자들은 다만 세계관적인 바닥짐*을 내팽개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신학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이 인간 실존과의 그 어떤 관계를 획득할 수 있다면, 근대 세계에서 어려운 처지에 빠진 기독교의 상황이 완화되지 않겠는가?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에 대한 예수의 사신은 광범위한 차원에서 한 하나님이라는 표상에 의존적이지 않을 수는 없겠는가? 그리고 예수가 그렇게 몸소 사셨던 베푸는 사랑은 기독교 사신의 고유한 뿌리가 아닌가? 오늘날 이처럼 기독교 내부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질문들이 제기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유는 여기 오늘의 상황에서 거추장스러운 세계관적 껍질로서 간주된다. 이 껍질은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사유를 담지하고 있지만 오늘날 벗어버려야 할 그 무엇을 가리킨다.
*세계관적 바닥짐(der weltanschauliche Ballast)이란 기독교가 세계관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필요로 했던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말한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이런 세계관이 필요 없는 성숙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단순히 예수의 복음, 즉 사랑의 실천과 휴머니티의 확장에 집중해야한다는 현대 신학의 주장을 판넨베르크는 비판한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이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예수를 기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데 아주 익숙해진 사람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예수와 그의 사랑의 사신으로 대체할 생각을 한다. 우리가 다른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관계를 갖게 될 때 왜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가? 예수에 대한 믿음은 그 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재에 대한 확신에 달려있다. 예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현재만이 예수 사건의 보편타당성을 담보한다. 베푸는 사랑이라는 사상은 스스로 수행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사유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웃과 원수 사랑이라는 사신(使信, Botschaft)은 인간을 극단적으로 초긴장 상태로 이끌고 갈 뿐이다. 이런 점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랑에 대한 사상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넘쳐나는 사랑의 인플레이션은 그 가치를 저하시킬 뿐이지 그 절박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사실 예수의 사랑윤리는 그 사랑이 우선 모든 인간들에게 원래적으로 주어진, 일종의 신적인 현실성으로서 이해되어야지 그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현실화되어야 할 요구로 이해된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요청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것이 말 그대로 현실적이어야만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실제로 상호간에 호의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반드시 예수에게 와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같은 인류의 다른 위대한 선생이나 모범 자에게 오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예수가 보여준 이웃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역사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 뿌리가 놓여 있다. 예수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현재 세계의 절박한 변화를 기대하는 가운데서 살았다. 이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통치와 그의 나라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예수의 경우에 도래하는 하나님은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이다. 하나님의 미래가 보여주는 강력한 불빛 안에서 그는 자신의 현재를 보았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며, 세상을 두렵고 떨게할 재판관에게서 직접 보냄을 받음으로써 모든 이들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깃든 사랑을 인식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해야할 자신의 고유한 사명이 그에게는 사랑에 대한 증거였다. 왜냐하면 이런 선포는 죄인으로 하여금 적시에 회심을 불러일으키며, 이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도래하는 나라를 승계할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만물은 종말론적으로 존재하는 미래의 하나님에 의해서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신앙에 터하고 있지만, 동시에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하나님 안에서 그 내용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에 결국 보편사적 지평에서 자신의 진리성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가 선포한 사랑의 사신에서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떨어져나간 세상을 심판할 자로 오실 하나님의 사랑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예수의 사명에서 드러난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요한복음이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 그 의미를 새삼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요 3:16). 오히려 이것은 이미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눅 15) 보여준 것처럼 예수의 자기이해였다. 예수가 선포한 이웃사랑은 모든 인간의 행동에 이미 주어져있는, 그러나 인간 자신의 태도에서 추구되어야 할 하나님의 고유한 성향과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선포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구원하는, 그리고 용서하는 사랑에 대한 사신은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 있다. 예수의 사신에서 이 하나님을 제거해버린다면 인간은 이 사신으로 인해서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예수 출현이 담지하고 있는 예언자적 능력도 아니고 해명되어야 할 갈등들도 아니다.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이 제거된 기독교적 사랑의 사신은 그 사신의 능력과 믿음이 토대를 두고 있는 그 중심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없는 예수의 사신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신론을 통한 모든 神표상의 논란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언급이 어떻게 고수될 수 있겠는가?
근대 무신론의 뼈대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에게서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그의 작품(1841)은 종교에 대한 그의 심리학적 설명을 결정적으로 관철시켰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그의 강의(1846)는 앞서의 기본적 사유를 다만 확장시켰을 뿐이다. 그 뒤에 나온 일련의 모든 중요한 무신론적 경향은 포이에르바흐에게 의존되어 있다. 이것은 니체나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장 폴 사르트르에게도 역시 해당된다. 종교를 환각이라고 보는 포이에르바흐의 설명은 인간 종(種)을 개체와 구별하는 그의 입장과 연관되어 있다. 개체가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따라서 유한한 반면에 종은 무한하다. 개체 인간의 이성, 판타지, 사랑, 그리고 의지의 한계는 인간종의 역사적 발전에서 지양된다. 그러나 개체는 자신의 편협성에 빠지며, 자폐적인 자기애에 빠진다. 개체나 그 개체의 고유한 본질적 완성이 아니라 인간종족의 무한성이 인간과 완전히 다른 본질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개체는 인간의 무한성을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성으로서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흐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유는 심리학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즉 인간의 환각은 인간이 그 고유한 본질을, 즉 종으로서 인간이 도달하게 될 무한한 본질적 완성을 낯선 본질로 간주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현실성에 담겨있는 이러한 낯선 신적 본질은 가상의 하늘에 대해서 인간 스스로의 고유한 본질이 갖게 되는 일종의 투사(投射)일 뿐이다. 포이에르바흐는 이러한 견해를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하나님은 대개 인간과의 유비에 근거해서 생각되었으며,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확실한 것으로 믿으려하는 그 모든 것, 그러나 개체로서의 삶에서는 배타적이며 편협한 방식으로만 현실화되는 그 모든 것의 완성으로서 생각된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인간적 본질을 낯선 본질로 간주함으로써 그는 스스로에게서 소외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 본질에 담긴 능력을 부인하게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책임져야만 한다면, 그가 낯선 신적 본질 탓으로 돌린 그것을 다시 한 번 인간성의 본질적 완성으로서 인식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니체, 니콜라이 하르트만, 그리고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가 모든 神사유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다른 방향에서 포이에르바흐의 기본적 사유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 의해 묘사된 인간의 종교적인 자기소외를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자기소외로 되돌림으로써, 그리고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개개인의 이기심에서 발생한 종교적 투사에 대한 포이에르바흐의 설명을 심화시켰다. 프로이트는 인간 종을 원부* 형태로 대체하고 있다. 이 원부는 아들들에 의해 제거된 이후에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없는 능력 충만과 무제한적인 통치의 이상이 되었다. 포이에르바흐에 따르면 인간 종은 인간에게 낯선 본질이라는 점에서 환각적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포이에르바흐처럼 인간의 비종교적인 근원상황을 전제했다. 인간의 기대로부터 발생한 신성의 도래에 대한 이해에서도 역시 그는 포이에르바흐의 생각을 따랐다. 특히 이런 기대의 발생에 대한 서술과 종교적 환각의 실현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는 포이에르바흐의 고유한 길을 따랐다.
*원부(原父, Urvater)는 무소불위한 절대자 아버지 상을 뜻한다. 프로이트의 기독교 비판에 따르면 기독교의 하나님 상은 바로 이런 원부 상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라는 종의 자기투사와 다르지 않다. 이 개념은 친부살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역시 여전히 통용되는 신(神)죽음에 대한 언급은 포이에르바흐의 종교비판과 연관되어 있다. 니체는 이 점에서 그와 연관된다. 그런데 신 죽음에 대한 표상은 매우 특이하게 자가당착적이다. 현재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하나의 하나님은 실제로 하나님이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 죽음에 대한 언급은 종교적 환각이 끝장났다는 신화적 그림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신(神)사유가 인간의 꿈이며, 인간 자신과 그 기대의 거울이었다는 발견에 대한 신화적 그림일 뿐이다.
신학은 무신론적 도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변증법 신학파,* 특별히 칼 바르트와 그 뒤를 이은 헬무트 골비쳐 같은 이들은 무신론을 채용해서 계시신학을 극단적으로 설계해보려고 했다.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 치졸하게 만든 종교들과 유신론적 철학의 가면을 벗겨내는 데는 성공했으며, 그것은 또한 정당했다는 것이다. 종교나 철학자들의 神사유에서 이런 유신론적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이것은 역시 인간적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지만 기독교적 사신에서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적 사신만이 홀로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포이에르바흐가 말하는 의미의 ‘종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변증법 신학(die dialektische Theologie)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기독교 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려한 신학을 말한다. 자유주의신학이 인간중심적이고 윤리 중심적이었다고 한다면 변증법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고 계시 중심적이었다. 일명 신정통주의, 위기의 신학, 말씀의 신학이라고 하는데, 이 신학파의 대표자는 칼 바르트다. 1920년대에 몇 판에 걸쳐 개정된 그의 <로마서 주석>은 이 신학운동의 단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이러한 변증법 신학도 역시 성서 실증주의적 계시론으로 인해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변증법 신학의 이러한 논증은 결코 확증될 수 없다. 각각의 종교가 이와 같은 자기 정당성으로 그들의 신에 대한 예외 조항을 요청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각각의 종교는 포이에르바흐처럼 다른 종교를 인간적인 치졸한 행태라고 재단함으로써 아주 간단히 그들의 경쟁자들을 해치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중적 잣대로 재단해 버리는 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독교 신학은 어떤 근거로 하나님에 대한 진술, 혹은 성서기자들의 진술, 또는 예수 자신을 다른 종교적 신(神)표상과의 연관성으로부터 구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들 사이의 유비가, 다시 말해 신(神)사유에 대한 구약성서 및 초기 기독교적 형태와 세계 종교들 사이의 발생연관이 너무나 또렷한데 말이다.
신구약 성서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관되게 주변 세계와 공유했다. 즉 인간은 어쨌거나 신적 능력의 작용을 감안해야 한다는 확신을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고대교회의 신학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아버지라는 점을 전제했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주장에서 우리는 성서의 하나님에 관한 특별한 요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 像으로 이해한 예수의 사신은 구약성서의 이 하나님과 연관된다. 아버지 상으로 드러난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을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라고 믿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를 벗어난 이방의 역사에서 전제되는 바는 신적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중차대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성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실패한 그 역사를 말한다. 즉 기독교 사신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헬레니즘의 비유대적 세계로 전파되었을 때 ‘참된’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질문, 그리고 신적 현실성의 참된 형태에 대한 질문과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신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다신교적 민간신앙에 맞선 투쟁에서 신학의 동맹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소위 그 철학이 여러 상이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중에서도 오직 한분 하나님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사신은 철학자들이 참으로 신적인 것의 준거로 명확히 했던 그런 것들을 확증함으로써, 이런 준거들만이 우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인데, 하나님이 헬레니즘적 인간 의식에서도 참되다는 점을 증거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인간과 세계를 견인해 나가는 현실성*에 대한 확신이 무신론적 비판 때문에 흔들리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그 현실성의 참된 형태는 성서 전승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명확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이런 철학적 질문은 고대의 고전적인 체제에 맞서, 그리고 교부신학을 통한 그런 체제의 계속과 기독교 중세기의 그런 체제에 맞서 현대에 들어와서 발생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바로 근대 무신론의 출발점이다. 현대 철학이 제기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변화는 하나님을 인간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성’은 독일어 Wirklichkeit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reality로 영역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영어의 reality에 해당되는 독일어는 Realität다. Wirklichkeit는 동사 wirken(작용하다, 활동하다)을 추상명사화한 것인데, 리얼리티 보다는 훨씬 변증법적 성격이 강한 실재, 실제, 현실, 사실 등을 가리킨다. 존재와 현상을 포함하는 어떤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고대와 중세의 구(舊) ‘자연신학’은 세계 질서의 근원과 모든 운동의 최고 이성을 역추적하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세계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세기 후반기 이래로 취약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세계의 현 상태를 규정하고 있는 원인 사슬이 무한한 과거로 소급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서 제일 원인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세대들이 세대계승으로 인해 이미 죽음으로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현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이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괄하는 전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시작만이 아니라 모든 현 상태의 유지도 역시 일종의 원인으로서 필요하다는 점에서 제일 원인자의 수용이 필연적일 수도 있다. 이 제일 원인자는 그에게 의존적인 작용으로부터 시작해서 현재 유지되고 있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활동성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인데, 세상이 존립하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관성의 법칙이 도입된 이래로 한번 등장한 상태에서 한 몸의 지속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시되었다. 이로써 궁극적 근거는 일종의 제일 원인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데카르트와 뉴턴이 여전히 지구 운동에 제일 충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자연像에 기초하려 한 것은 이미 그 당시에 원칙적으로 극복된 표상을 지켜내려고 쓸데없이 안간힘을 쓴 반향에 불과했다. 지구 출현에 관한 기계론적 이론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신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배제되었다는 것은 무언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흐름이었다.
관성의 법칙이 도입된 이래로 자연사건의 제일 원인이라는 가정이 결정적인 대세를 잡게 되자 자연 인식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유에 이르는 길이 폐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이르는 모든 길이 막힌 건 아니었다. 근대 사유에서 하나님은 세상 대신에 인간으로부터 사유되기 시작했다.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로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거듭해서 인간이 신적인 현실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주체성에서 자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새로운 설계를 제시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외부에 있는 실제 세계의 현존은 하나님이 원인자로 존재할 경우에만 확실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원인자가 세계의 근원이 아닐 수 있다 하더라도 내 의식 가운데서 그 원인자 개념을 우선 인식하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윤리적 규정이 자연의 본질로서 자신의 현존과 일치한다는 것은 일종의 최고 힘이 인간의 도덕적 봉사와 사실적인 일 사이의 조화를, 그리고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모순성의 피안적 균형을 이루어낸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만 고려될 수 있다. 즉 이것은 도덕적 신성을 통해 구별되고, 또한 동시에 절대적인 힘으로 자연의 진행을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본질이어야만 한다. 독일의 이상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서, 인식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주체성이 우리 외부에서 현실성과 일치하고 있다는 경이로움은 서로 구별되지만 양측을 포괄하는 주관과 객관의 공동 근원을 전제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로 생각을 발전시켜나갔다. 헤겔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유한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뛰어넘어 모든 유한한 것을 자신 안으로 지양하는 무한한 현실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는지를 지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한한 소여성들에 대한 경험은 이미 자신 안에 무한한 것을 향한 일종의 고양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한계의 피안을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한계도, 그리고 어떤 한정된 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무한성을 알고 있을 때만 어떤 유한한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전승된 神증명은 인간을 유한의 세계로부터 무한을 생각하도록 고양시키려는 표현이라고 말이다.
이와 동일한 문제가 그 신학적 의미에서 항상 함축적으로만 다루어질 뿐이지 명시적으로는 거론되지 않지만 오늘의 인간론에서는 다루어지고 있다. 슐쯔(W. Schulz)는 하이덱거의 입장에 근거해서 말하기를 인간현존의 실존적인 구조는 이 현존을 능가하고 포괄하는 존재에 근거되어 있다고 했다. 현대 인간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인간의 자기 초월과 세계개방성에 대한 언급에서 이와 유사한 점들이 고찰되었다. 인간이 세계 개방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갖는다면 인간은 그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형태를 뛰어넘어 그의 변화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러나 그가 현존적 세계에서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일종의 완전함에 의지한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세계 개방성*에서 인간은 그를 견인해가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에, 즉 모든 현존적인 것의 편협성을 뛰어넘어 고양되며,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현존적인 것에 의해 구별되는 현실성에, 또한 자신에게 속한 자유의 근원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는 현실성에, 또한 인간을 가능한대로 승화시킬 근원이라 할 현실성에 의존한다는 점이 확실하다.
*인간의 세계개방성(Weltoffenheit)은 인간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더불어 열려있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고정불변한 것이 없으며 종말론적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처럼, 인간존재도 역시 자기 개체 안에만 독단적으로 구별되어 있다기보다는 세계변화에 의존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세계 역사와의 연관성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이래로 발전되어온 하나님에 대한 무신론적 비판을 극복할 수 있는 우선적이며 근본적인 결론이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도출된다. 물론 인간과 모든 유한한 것들을 능가하고, 또한 유한하지만 이 전체 세계를 기초하고 견인해가는 신적 현실성을 전제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과 그 주관성의 구조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어떤 증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불가피한 환각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여전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계를 능가하는 神적 현실성에 대한 사상이 인간의 인간실존에 기초하여 형성된다면 이런 사상의 형성은 거기서 환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이에 반하여 무신론적 논증은 神에 대한 사유에서 인간발전의 경과적 국면이 보여주는 특별성에 기인한, 근본적으로 타파될 수 있는 환각이 핵심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증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존재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 종교적 주제는 없어도 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이 증명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계속적인 진술들은 공허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증명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인간역사의 초기부터 잘 알려진 대로 종교적 본질이 인간의 인간존재에 속한다는 반명제가 여전하다면 하나님의 현실성과 고유성을 간과한 채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럴 경우에 오히려 신적 현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그것이 논의될만한 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현실성*을 결정하는 문제는 대체적으로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 계속적으로 이루어내는 관계성에 해당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인간학적 논증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한다. 신적 현실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세상과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주장한다는 뜻이다. 이미 우리가 지적했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 사유와의 관계에 터한 세계인식에서 더 이상 도출될 수 없다 하더라도, 神에 대한 사유가 사유로서의 다른 근원을 갖고 있다면 그 진리성은 해명하는 능력, 그리고 의미를 열어주는 능력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 능력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현실성에 대한 인간의 경험 전체로 진행되는 그것을 말한다. 여기서 일종의 神에 대한 사유가 현실성 경험에 직면해서 증명되는지 아닌지 결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식의 변화들, 종교사의 변형들은 이러한 변화와 연관된다. 이러한 연관은 물론 종교적 인식의 변형들이 단순히 세계경험의 변화에 나타나는 거울像이기나 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의존적인 형태를 갖지는 않다. 오히려 각각의 종교사에는 역사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현실성이 종교의 전승에 알려져 있는 신적 능력을 통해 명확하게 이해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결국 한 종교에 전승된 神이해가 현실성을 독특하고 새롭게 경험함으로써 그 경험이 신성에 의해 작동된 세계이해 가운데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면 이런 과업을 훨씬 효과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神경험의 자리가 틀림없이 마련된다. 이런 종류의 투쟁과 결정들은 민중 종교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와 성서의 하나님에게도 해당된다. 유대 민중들에게서 획득되고 유지된 神에 대한 이해는 후기 고대세계에서 예수 사신과 역사를 통해서 변형됨으로써 모든 경쟁적 신들 보다도 탁월한 이해로 증명되었다. 이는 그들이 그 당시의 현실성 경험을 총체적으로 밝히고 심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 현실성에 대한 경험은 수세기 동안 요동이 심했으며 오늘날 급격한 변화를 거쳐 왔다. 여기서 종교사적으로 핵심적인 문제는 기독교적으로 각인된 인류의 가장 큰 부분에서 그 결과로 나타난 이 변화들이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하나님 이해로부터 현실성에 대한 전체적인 의미를 일치시키는 데로 통합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이 현실성은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에 터한 그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결과적으로 우선 기독교 전승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성을 결정한다. 기독교가 작동하고 있는 영역에서 영적으로 생생하게 각성되어 있는 개인은 오늘날 그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근대적 학문과 그 결과를 통해 변화된 현재의 세계경험에 직면해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으로서 증명되는 분이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현실성(Wirklichkeit) 개념을 참고해서 ‘하나님의 현실성’ 문제를 생각하기 바란다. 이 현실성 문제는 현대 철학과 물리학의 토대에 속한다. 예컨대 과정철학이 현실성(reality)을 과정(process)이라고 말하듯이 기계론적 세계이해로는 더 이상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성 개념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현실성을 추구하려던 전통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성서를 이원론적 세계관에 근거해서 해석함으로써 이 세상의 현실과 현상을 말하고 있는 과학자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졌다. 판넨베르크는 이제 기독교의 하나님을 말할 때 그 현실성을 확보해야만 현실성 문제를 진리의 기초로 생각하는 다른 학문들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학은 해석학적이다.
인간존재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그것 자체로는 겨우 부분적인 전망만 보여줄 뿐이다. 이런 부분적인 전망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진술의 신뢰성이 적극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만약 그 신뢰성이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면 인간존재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으며 사전에 차단당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