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는 믿습니다 Ich glaube
1장
나는 믿습니다
Ich glaube
고대 교회 시대인 2세기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도적인 의미의 신앙 고백적 언어나 그 전(前)형식을 언급하는 사람이라면, 즉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원칙적으로 세례 교육을 거친 자라고 할 수 있다. 2세기의 신자들은 세례 받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전능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사죄를 믿습니까? 세 번에 걸쳐서 “나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만했다. 그는 이런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이 신앙고백의 세 부분과 연결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신앙고백의 原형식은 로마 기독교 공동체에서 실시되던 세례고백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질문과 답변 형식을 취했다. 3세기 이래로 그것은 세례를 집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서형식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고백문이 초대교회 시대의 유일한 세례고백문은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지역 공동체에서 세례고백으로 사용된 비슷한 고백형식이 여럿 있었다. 이런 양식들은 2세기 때부터 전승된 것들이었다. 더구나 1세기부터 몇몇 고백양식을 갖춘 단편들이 보존되었는데, 이것들이 인용되어 신약성서에 포함되었다. 로마의 세례고백, 특히 오늘의 사도신경에서 볼 수 있는 최종 형태는 그 당시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양식이 절대 아니다. 이 고백문은 원문 상으로 볼 때 예수의 제자들이 직접 구성했다는 의미에서 사도적인 고백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사도적일 수 있다. 사도들에게 연원되는 사신*을 총괄적으로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도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받아들여졌는데,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 그랬다. 칼 대제는 全카롤링 왕조의 제국에서 예배 때 사용된 본문을 보강하도록 명령했으며, 9세기에는 이 본문형식이 로마 교회에서 확실하게 받아들여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신앙적 근거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서 이것은 니케아와 아다나시우스 신조와 더불어 종교개혁 교회의 고백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사도신경이 같은 차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 교회는 제1차 공의회인 325년의 니케아 신조를 가장 권위 있는 고백문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재론되었으며 보충되었다. 사도적인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보급된 기독교 신앙의 공식화라 할 수 있다.
*사신(使信, Botschaft)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 메시지, 혹은 복음 자체를 가리킨다. 일반적 의미로는 사환의 일이나 사명, 통지, 보고, 사절이다. 우리에게 별로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앞으로 여러 번 등장하게 되니,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세례, 신앙, 그리고 신앙고백은 사도직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같은 짝을 이루고 있다. 각각 세 항목에서 반복적으로 “나는 믿습니다.”라고 천명한다는 것은 고백하는 자가 아버지이며 아들인, 그리고 영인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는 세례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고대 교회에서 이러한 축제형식은 신앙 고백적으로 연결되어있는 마귀에 대한 세 번의 거절로 나타난다. 피세례자는 자신의 고백에 근거해서 세례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에게 맡겨지도록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 양여되었다. 그 예수는 아버지와 하나가 된 바로 그 분이다.
신앙고백과 세례와의 연관이 오늘 우리의 의식구조에서 더 이상 전제조건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습니다.”에 담겨있는 두 단어의 의미와 무게를 정당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그 연관을 기억해야만 한다. 세 번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이며, 아들이며,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이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바르게 받아들여지고 실행될 수 있을까? 오늘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고대 기독교 사회에 딸린 교리적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어떻게 우리는 믿음의 현실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 표현을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 완전한 신뢰심으로 이런 현실성에 의지할 수 있다는 관점에 근거해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밋밋한 언급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 형식이 실제로는 그 신앙과 대립적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세상살이와 그 표현에 적절한 것인가? 현재의 삶에 내재한 모든 것이 억압적인데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신뢰가 신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개방된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지 고정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그런 신뢰가 말이다. 어떻게 이런 신앙이 사도적 신앙고백의 형식화에서 재발견될 수 있는가?
*개방된 세계와 고정된 상태라는 대조적 개념은 신학의 보편사적 해석학을 설정하고 있는 판넨베르크 사상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모든 세계의 현상과 실체들은 현재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서 열려져 있다는, 즉 변하고 움직인다는 시각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단순한 직관만으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은 변하고 움직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와, 그 사계절의 과정에 따른 식물의 변화가 있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도 역시 어린 상태에서 어미로 자라고 결국 죽는 변화를 거친다. 뿐만 아니라 우주도 역시 변화와 움직임의 과정 속에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미래를 향해 변화되고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개방된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적합한 현실성을 찾아가는 게 바로 신학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삶의 실천이라 할 신앙은 신뢰*와 같은 의미다. 신뢰는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주변에 이르게되는, 각기 인간적 삶을 기초하는 순간적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영이 호흡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신앙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활동하는 특정한 주변관계들에 대한, 자신이 상호소통하는 사물의 신실성에 대한, 그리고 특히 자신이 함께 살아가야 할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신뢰에 근거해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한다. 모든 곳에서 인간이 그런 신뢰를 발견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인간은 여러 곳에서 신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외 없이, 혹은 모든 곳에서 신뢰가 발생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신앙(Glauben)과 신뢰(Vertrauen)를 엄밀하게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한다는 것은 어떤 실증적인 근거가 없이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 터해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하지만 그렇다고 신뢰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학은 신앙의 지평에 이르기 위한 신뢰의 근거를 확보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을만 하니까, 즉 믿을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믿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뢰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신앙만이 영적인 지평을 제공하며 신뢰를 넘어서까지 발생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필요로 하는 신뢰는 특정한 관계, 즉 사물이나 사람들에게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불특정한 것에까지 이르도록 추구되며 수행된다.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삶의 한 요소로서 이런 불특정한 확신을 요구하고 있는지는 특별히 이런 확신의 생생한 호흡이 궁해진 침체의 순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모든 의심과 붕괴를 밀어내고 살아가는 경우에 유지되는 고유한 확신은 거듭해서 살아난다. 이처럼 모든 조건적인 신뢰를 뛰어넘어 우리의 생명이 발생되는 깊고 무조건적인 신뢰가 존재한다. 우리는 모든 무조건적인 신뢰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주변관계들, 사물들, 그리고 인간들과 연계시키고 있다. 역시 이러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모든 개방성과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는 모든 인간에게 걸려있는 그 무언가의 문제다. 그 어떤 인간이나 일에 집중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주 갓난아이일 때 근원적 신뢰는 부모와 묶인다. 후에 부모로부터 벗어나서 건강한 인간형성의 기본조건들과 연관된다. 일반적인 삶의 조건 아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신뢰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다가, 신뢰의 근거가 흔들리거나 이로써 삶의 능력이 위험에 빠지게 될 때 그것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신뢰를 궁극적으로 어디에 토대하고 있는가? 우리 마음의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달려있는 것일까? 이것은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우리 마음의 신앙과 신뢰는 두 가지, 즉 신과 우상을 만든다.” 십계명의 첫 계명을 의미하는 이 문장은 아직도 생동적인 루터의 말이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치우치거나 집착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가 때에 따라서 신뢰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우리의 의식화된 결정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숨겨진 채로 남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기준에서만 자신을 알고 있다. 이 기준 안에서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삶이 신뢰하고자하는 것에 거하고 있다. 이 신뢰는 절대적으로 실행된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방황하는 삶의 상황 속에서 일종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한다면, 즉 우리 스스로 의지대로 행할 수 있다면 삶을 견인하고 있는 확신의 개방성과 모호성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며 또한 결정될 것이다. 자신의 경험지평을 확대하고 해명함으로써 성숙해가는 자들은 어디서 신뢰하고 어디서 말아야 할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할 것이다. 이런 신뢰에 대한 결단들이 교정될 수도 있다. 이런 결단들 속에서 삶을 떠받치고 있는 신뢰가 새로운, 또한 실질적인 확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에 관련되는 것은 인간이 신뢰하는 대상을 근원적으로 신뢰해야한다는 점인데, 이 근원적 신뢰라는 것은 사실 불확실하다. 근원적인 신뢰가 이루어질 때 모든 것이 확실하게 결집된다. 이것은 신뢰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실성을 말한다. 신뢰는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을 뜻한다. 눈에 두드러진 기만과 공허한 외견에 자신을 맡기는 자는 버림받는다. 왜냐하면 미래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대의 아하스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믿음 안에서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사 7:9).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요동하지 않는 영원자 안에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견고하게 서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영속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을 벗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며,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결코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대상 없이 가능하지 않다. 신뢰행위 안에서 인간은 완전히 말 그대로 자신을 신뢰하며 자신이 만든 사물이나 인간과 견고한 관계를 누린다. 그는 이로써 그가 신뢰하는 것의 확실성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신뢰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실제로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지하고 있다. 이사야의 경우에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으며, 세 번씩이나 “나는 믿습니다.”라고 로마식의 세례고백을 표명한 초대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아들을 땅에 보낸, 그리고 영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현재하는 하나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알리신 영원한 하나님은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흔들림 없는 토대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물이나 인간 처럼 매우 명증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최근에야 깨닫게된 게 결코 아니다. 이미 요한복음서에서 이르기를,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라고 했다(요1:18).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 문장을 통해서 만약에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존엄 앞에 마주서게 된다면 죽게 될 것이라는 구약성서 증언의 근본에 도달해보고자 한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신뢰의 근거와 토대일 뿐이다. 우리가 사물이나 인간을 의지하는 곳에서 신뢰는 아직 유출되지 않은 그 무엇을 지향한다. 이로부터 증명되는 사실은 모든 신뢰의 현실성이라는 것이 이미 가시적이고 파악될 수 있는, 혹은 생산될 수 있는 그것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현존의 개방성 안에서 신뢰는 항상 불가시적인, 그리고 마음대로 처리될 수 없는 현실성에 터해 있다. 그러므로 신뢰는 결코 실망을 주지 않게 되며, 또한 신뢰와 신앙은 항상 의심으로 이끌리기도 하고 위협받기도 한다. 신앙과 회의는 무언가 서로 상관없는 게 아니다. 회의는 신앙과 신뢰를 늘 쫓아다니는 그림자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참된 신뢰라는 것이 신뢰하는 자가 자신의 신뢰를 어디에 터하며 어떤 방향을 잡아야하는가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신학에서는 인간의 신뢰 행위가 단순히 참되다고 여기는 것*과 자주 대립되었다. 신앙은 실제로 신앙의 핵심을 신뢰 안에 둔다는 말은 옳다. 반면에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어서 이해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은, 즉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부활이나 승천과 같이 다른 이들이 믿기 어려운 성서의 보도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선적으로 예수와 그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만이 명실상부하게 신앙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는 참되다고 간주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신뢰와 분리될 수 없으며 이것 없이 신뢰가 유지될 수도 없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곧 그 신앙의 대상이 참되다는 인식(Fürwahrhalten)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왜 참된 존재인가를 판단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 신앙의 대상이 진리라는, 더구나 보편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보편적 해석학에 근거해서 부단히 설명해 나가야 한다.
보다 정확하게 고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됨에 대한 인식이 세 지평에서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현존 세계 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가 그것이다. 인간의 신뢰는 바로 그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사도신경의 두 번째 항목이 거론하고 있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첫째 항목과 연관되어 있는 창조의 세계다. 둘째, 신뢰는 이러한 근거에 근거해서 신뢰가 실제로 관계되어 있는 불가시적 현실성을 기대한다. 이 불가시적 현실성은 각각의 근거에서 인식된다. 사도신경에서 이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현실성이며, 신적인 존엄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양된 하나님 아들의 현실성이고, 교회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비밀이 충만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이다. 셋째, 신뢰는 의지할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관련된다. 사도신경에서 이것은 죄의 용서,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영생에 해당된다.
이러한 세 가지 관계 가운데서 신뢰는 진리, 즉 의지할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다. 신뢰는 그 기초적 근거에 진리성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근거가 분명하고 의지될만한 불가시적 진리에 대한 확신 없이는 존속할 수 없으며, 신뢰하는 자가 의지하고 있는 근거의 확실성이 성취된다는 기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이러한 진리의 조건들과 신뢰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사도신경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하겠다. 믿는 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위격*과 예수의 위격은 사도신경의 진술에서 훨씬 밀접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신앙이 정향하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전능자로서, 세계 창조자로서 표상되고 동일시된다. 성령은 사도신경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니케아 공의회 신조에 훨씬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령은 예언자들에 의해 언급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활력자로 일컬어진다.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자 하나님으로 그려지며, 그의 지상적인 길을 뛰어넘어 부활, 승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그리고 심판자로 다시 오심이라는 일련의 서술을 통해서 그 특색을 드러낸다. 이런 상세한 규정은 예수의 위격을 임시방편으로 기억하고 그것 자체로는 별 무게가 없을 수도 있는 일종의 참고사항만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서술에서 사도신경의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으며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믿음이 의지하고 있는 위격으로 고백된다.
*하나님의 위격(die Person Gottes)라고 할 때 여기서의 위격(Person)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격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단어다. 따라서 여기서 단순하게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인격이라고 해도 그렇게 틀린 해석은 아니다. 예수의 위격이나 성령의 위격이라는 표현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위격이라는 단어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방해된다면 그 말을 빼고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도 문제는 없다.
이러한 설명은 신앙의 대상을 분명히 함으로써, 또한 동시에 신앙하는 자가 무슨 근거에서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을 신뢰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함으로써 타당성을 갖게 된다. 신앙하는 자가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신뢰하고 있는 그 확신은 그가 신뢰하고 있는 것을 아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앎은 확실히 완전하지 못하며 임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으며, 또한 회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앎은 여전히 불가시적인 현실성에 대한 가시적인 표식의 기초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신뢰도 이러한 표식에 기초한, 잠정적인 판단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판단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의 확실성과 신뢰성에 대한 판단을 뜻한다. 그리고 내가 온전히 신뢰하는 것과의 관계 가운데서 나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가 (혹은 그것이) 전체로서의 내 현존을 보증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준비되었다는 점을 예상한다. 인간 삶의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그리고 삶에 의미가 있는지 아닌지 명료하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해서, 또한 신뢰에 대한 의존성에 직면해서 인간은 그러한 불확실성의 여러 형태 가운데서 우왕좌왕하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으려고 모든 불확실성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늘 그런 종류의 신뢰를 의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신뢰하는 자가 의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신뢰성이 충분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결한 요소다. 따라서 기독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만물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했으며 죽음을 뛰어넘어 형성된 공동체를 스스로 보증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신뢰한다.
이제 우리는 사도신경과 기독교적 전승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고유한 난제들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문제가 되는 추정의 ‘사실들’이, 특히 두 번째 항목인 예수, 또한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의 창조에 관하여,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언급된 대로 모든 생명의 근원인 영에 관한 사실들이 오늘날 더 이상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부동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 예수의 부활, 그리고 창조 및 예언에 등장하는 영의 활동에 근거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우리가 소위 사실의 사실성을 믿을 수 있어야만 했을지 모른다. 일단 이 사실들은 우리가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사도신경이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 정도로 불가해하거나, 혹은 독단적인 형식화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그 신앙고백에서 거명된 구원행위가 인간경험과 관계없거나 아니면 현재의 현실성과 대립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따라서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이 고유한 신앙의 표현이거나 아니면 중심적 토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고백의 진술을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신앙의 인격적인 행위로 되돌아가는 것, 예수에 대한 신뢰와 그의 사랑 설교에 대한 신뢰로,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되돌아가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의 경우에 죽은 자의 부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일종의 빈말에 불과했을지 모르며, 또한 예수에게서 현재화된, 그리고 그의 부활에서 밝히 드러난, 그리고 하늘과 땅을 창조했으며 그의 심판을 모든 세계에 임하게 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은 채 단순히 예수를 신뢰하는 행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부활이 없는 모든 행위들은 초대교회에서 언어도단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만약 오늘날 예수의 사랑에 대해서 무미건조하게 논의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문제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든지 이해될 수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사랑만을 말하게 되면 예수에게서 나타난 신적인 존엄에 대한 초대교회의 거대담론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독교가 항상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의 진술이 근대주의 의식에 빠져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부분적으로 몹시 불편하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일련의 진술이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들을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도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진술이 담고 있는 내용으로부터 근거가 불확실한 신앙 행위로 퇴행하거나, 아니면 그 진술의 진리를 방치해 두는 것도 별로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더구나 이런 진술들이 핵심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현재적 신앙의 기초와 내용이기 때문에 이런 태도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에 진술된 내용이 의심스럽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믿어보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결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그를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착상하고 있는 실질(實質)의 진리를 확실히 보증하는지, 혹은 이 신앙이 그 실질의 내용들과 아무 상관없이 독립되어 있는지, 이 두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같은 결과에 이른다. 왜냐하면 신앙의 확신이 어디서든지 그가 신뢰할 수 있는 내용 보다는 신앙하는 자와 그의 신앙적 결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신앙은 더 이상 근거가 될 수 없는 맹목적 ‘결단’으로 비약됨으로써 결국 자기구원*을 이루는 업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자기 자신을 피안에 토대를 두지 못한 신앙은, 즉 그가 의지하고 있는 궁극적인 것에서 벗어난 신앙은 고유한 자기(Ich)에게 사로잡혀 있게 되어 실행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 신뢰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성은 사도신경이 가리키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소위 그러한 ‘사실들’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특색이나 하나님이 계시되는 예수 역사의 사건에 사도신경의 진술이 정확하게 들어맞는지 아닌지는 또 하나의 다른 질문이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신앙고백의 개개 진술을 얼마나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속한다. 신앙고백의 진술을 이해하고 검증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그저 외관상으로만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항상 다소간 발작적이었던 신앙적 결단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미와 그 문제점들을 타당성 있게 하고, 또한 그 의미를 철두철미 찾아보려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거나 무조건 순종하라는 요구는 그 믿음이나 순종의 내용이 세상을 창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공했으며 성령으로 현재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기껏해야 자기 확신이고, 결국에는 자기구원에 불과하다. 신앙은 맹목적 신뢰가 아니라 구원의 리얼리티, 그리고 그 현실성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오늘의 세계, 그리고 그 현실성과 전혀 무관한 개인의 실존 차원에 가두어두거나, 혹은 교회조직이나 그 확장으로만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그 원래적 전통으로부터 소외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신앙 고백적 진술이 진리론적인 판단에서 결정적인 답변을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우선이다.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는지,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는지, 그를 따르는 신자들을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시킬는지,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무슨 일을 할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누가 최종적으로 답변할 수 있겠는가? 누가 이런 모든 문제들을 실제적으로 해결해 낼 수 있겠는가? 여기에 관계된 사안의 크기가 얼마나 까마득한지 측정해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기초를 갖고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이는 이 신앙고백의 고대형식이 말하는 세계에 충분하게 깊숙이 들어가서 그것의 실질적 기초에 접근하고, 이 형식들이 그저 단순히 공허한 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 삶과 친근한 실질적 내용을 가리킨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의 이런 실질적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해야 할 오늘의 이 시점에서 더욱 중차대하다. 만약 이러한 확신이 전승된 신앙고백형식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다루게 된다면, 비록 이런 확신이 결코 한 번도 완전하게 회의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을지라도 신앙은 그 확신의 근거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내보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그에게 실재하는 근거가 진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비록 그가 그 진리를 완전히 통찰해내지 못하고, 또한 진리가 회의로 인해서 또 다른 근거에서 그를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하는 진리를 믿고 있는 자가 자신의 신앙에 근거해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그 진리를 신앙적 결단을 통해서 보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그에 의해서 전제된 진리를 항상 거듭해서 확인해야만 한다. 최소한 그는 이러한 확인이 가능하며 기독교회의 어느 곳에선가 역시 이러한 확인이 일어난다는, 즉 완전한 공평무사함과 성실성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신학 행위이기 때문에 방법론적인 긴장을 수반한다. 신학이 이런 과업을 정당하게 준수해나갈 때만 모든 대립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사신의 신뢰성이 획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앙이 믿을만하게 보여야만 이 신앙이 자유롭게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날에는 결여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분위기는 상실되어 간다. 따라서 오늘날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닌 사람이 가능한대로 광범위하게 신앙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판단하는 일은 다른 그 어떤 시대보다도 훨씬 절실하게 요청된다.
신앙이 그 기본적인 진리론에 근거해서 유지된다고 해서 일종의 실증적 학문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역사연구의 결과는 역사 문제에 해당하는 의미의 인식이나 마찬가지로 항상 거듭해서 변화된다. 이 문제는 모든 인간 지식의 잠정성*에 놓여 있다. 이러한 잠정성의 결과가 가변적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그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그 신앙의 기초를 포함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신학적 확증과 연구를 게을리 할 수는 없다. 각각의 역사와 그 특성 및 그 의미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각기 정신적 상황의 형태가 전체적으로 시간적 한계 안에 있을 경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전승된 신앙 양식이 공허한지 아닌지, 그 양식이 완전히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기초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이로써 각기 무조건적인 신뢰의 근거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아닌지. 이 신뢰 안에서 신앙은 의지할 대상과 관계를 갖고자 한다. 구원사건과 관계된다고 해서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신앙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왜냐하면 신앙 행위 가운데서만 나는 내가 신뢰하고 있는 현실성에 나를 고착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 행위에서 신앙은 자신의 고유한 거점을 초월하게 되며, 신앙의 출발점이라 할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의 특별한 형태를 포기하고 신앙이 의지하는 진리에 대한 새롭고 보다 바람직한 인식을 향해 개방된다.
*인간 지식의 잠정성(Vorläufigkeit)이라는 말은 세계 개방성과 연관된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 지식이라는 것이 확고부동하거나 절대불변이지 않다는 뜻이다. 예컨대 뉴턴의 기계론적 물리학이 2백 년 동안 유럽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한 현대물리학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 어떤 인간지식이나 이론이라 하더라도 한시적일 뿐이다. 이것은 타학문만이 아니라 사실은 신학에도 동일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신학도 역시 끊임없이 진리론적 바탕에서 자신을 규명해나가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신경 양식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기초를 요약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기초는 신앙의 실제적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바의 그것이다. 그 양식들은 거의 모든 점에서 더 이상 오늘의 언어일 수 없는 그들 시대의 언어로 이 작업을 펼친다. 따라서 이 사도신경을 단순히 재인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묻고 생각하고 검증하는 심화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늘날 고대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이 과정에서 항상 같은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진술의 가능성은 신앙 고백적 진술이 한정적인 형식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바와 얼마나 책임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의도의 언어적, 그리고 사상적 표현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사실을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인식하려는 표현일 수는 없다. 대개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의 몇몇 단어들을 원래 있는 그대로 명확히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진실을 훼손시키지 않고 예배가 드려지는 동안 함께 신앙고백을 아뢸 수 있다. 우리가 진술 형식에 대한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러한 진술의 의도를 확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사도신경은 니케아 신조와 마찬가지로 수세기의 변화를 통해서 정착된, 그리고 신앙이해의 많은 차이점을 극복하는 기독교의 일치를 뜻하고 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드리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지, 우리의 개인적인 증언만을 외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신앙 고백적 진술의 의도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지 어떤지 분명하게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따라서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의 해석, 연구, 그리고 검토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된다. 신앙고백을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 전승의 진술에 대한 회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작업을 더욱 활발하게 펼쳐야한다.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갖게 되는 이런저런 어두운 불쾌감을 값싸게 해소시켜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즉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유별난 양식들, 소위 시류에 편승한 양식들로 대체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양식들은 그것이 아무리 잘된 경우라 하더라도 개개 기독교인이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가담할 수 있는 고대 고백 형식들을 실질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신앙의 내용은 말을 바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실질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하다. 이 실질은 고대 신앙고백의 형식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형식화를 거절하는 것은 야만스러운 태도다. 특별히 신앙전승을 해명하기 위해서 교육받고 부름 받은 성직자라면 이와 같은 논란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의무는 전승된 신앙의 공적 표현을 해명하는 것뿐이다. 우스꽝스럽다고 비난받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런 의무를 거절하는 것은 분명히 무책임할 뿐이다. 오늘날 널리 퍼져있는 신앙고백의 공식적 표현에 대한 몰이해는 그것의 폐지가 아니라 그 해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앙 고백적 진술에 대한 해석과 논의는 특별한 주목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한 공동체로 경험될 것이며, 또한 신앙고백이 주일 공동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즉 주일 공동체가 그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여 그들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에서 전체 기독교와 연대해 있다는 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