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이단 - 몬타니즘
박찬희 교수(Ph.D)
04.04.12
몬타니즘(Montanism)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반에 프리지아에서 융성했던 이단적 기독교 운동이었다. 프리지아는 전통적으로 키벨레(Cybele)와 그 배우자 아티스(Attis)를 매우 도발적이고 흥분된 춤으로 섬기는 신비주의적 밀교의 중심지였었다. 이리하여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프리기아의 이단"으로 불려졌다. 몬타니즘은 그 창시자인 몬타누스(Montanus)에 의해 일파를 형성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동방의 풍요의 여신 키벨레를 믿는 밀교의 사제였다. 에피파니우스(156)와 유세비우스(172)에 따르면 그는 처음 프리지아(Phrygia)에 있는 작은 마을인 아르다바우(Ardabau)에 나타났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 한 영에 사로잡혀 예언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목소리를 자처하고는 신약에서 나타나는 성령강림의 때가 찼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외쳤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을 예수의 말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로 신성화했다. 그들은 인간인 자기들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한다고 했다. 에피파니우스에 의하면 몬타누스는 "나는 천사도 하나님의 사자도 아니다. 나는 강림한 주 하나님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의 종교의식은 페푸자(Pepuza)에 있는 교당에서 자주 열렸는데 횃불을 들고 흰 옷을 입은 일곱명의 처녀가 회중들에게 그들의 신탁을 전달하기 위해 들어가 참석자들의 참회를 눈물로 촉구하고 광신적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Paraclete)가 몬타누스와 프리스카(Prisca 또는 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라는 두 명의 여인을 예언자로 삼아 교회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엑스터스(황홀경)의 상태에서 예언(ecstatic prophecy)하고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계시록 21장에 예언된 새예루살렘이 페푸자(Pepuza)라는 페루지아인의 작은 마을에 곧 임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종말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있던 몬타누스는 크리스챤들을 정화(purify)하기 위해 엄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육체적 욕망을 제거하라고 설교했다. 이 새로운 금욕주의는 결혼을 포기할 것(후에 한번의 결혼은 허락함), 재혼 금지, 고된 금식, 동정성의 강조, 순교에의 열망, 속죄를 위한 엄중하고 많은 참회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주류 교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고 몬타누스와 몬타니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117년경 황제 유스티니안 1세의 엄중한 법령으로 파문되어 서쪽에 일부가 잔존하였다. 그러나 몬타니즘이 끼친 영향은 위대한 교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Tertullian of Carthage)이 AD 208년 이후 이 일파로 개종할 정도로 지대한 것이었다. 터툴리안은 그들을 파문한 이들이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영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에 더 관심을 갖은 채 이 새로운 예언을 교회의 권위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겨 정죄한 것으로 여겨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는 몬타누스의 영성이 교리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제자도에 대하여 선언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이 운동을 순수한 신앙운동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3세기 후반에 터툴리안을 따르는 이들이 모였으며 이들은 터툴리안파(Tertullianisae)로 불려졌고 서쪽에서 잠시 흥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쪽의 정교한 이론과 사색적 신비주의의 경향이 있는 영지주의 집단과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몬타누스의 가르침은 정통 기독교 안에서 새로운 예언활동을 통하여 영적 부흥을 일으키려 의도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감독의 권위를 공격하거나 교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교회도 예언자의 은사활동을 인정했었다.
그러나 몬타누스의 예언활동은 전혀 새로운 것임이 명백해졌다. 참된 예언자들은 그들처럼 열광적인 활홀경으로 몰고가지 않으며 권위적으로 말하지 않고 마치 성령의 목소리를 내는 양하지도 않는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위한 성서적 기초에 대한 지식으로 전통을 존중했고 교회의 종말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받은 종교적 영감을 표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성직계급 정치로 조직화된 기독교의 획일성을 거부하였고 여성 지도력을 인정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엑스타시, 계시, 예언을 강조했기 때문에 계시록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여겼다. 따라서 주류교회는 계시록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았고 그것을 교회의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그 시기에 계시록은 그 책 자체의 권위를 인정받았고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3세기 이후에 와서 교회의 문헌 안에서 몬타니즘의 영향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아주 드물게 언급될 정도였다. 7세기에 이르러 몬타니즘은 더 이상 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몬타니즘의 계시록 연구에 대한 관심은 초대교회로 하여금 천년왕국 사상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 운동은 계시록이 교회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데 일조했다. 교회 연구에 대한 좀더 넓은 영역에서 보면 몬타니즘의 은사주의적 경향이 유입되는 것에 대한 주류 교회의 저항은 기독교 신앙의 은사주의적 표현에 대한 주류교회의 의심을 초래했고 동시에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현대 오순절파의 일부는 몬타니스주의를 그것이 발흥하기 훨씬 이전인 속사도 시대부터 이미 성령의 사도적 은사가 명멸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몬타니즘은 당시 진원지에서는 이단적인 사상으로 정죄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정통적이고 순수한 성령운동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근래에 오순절적(pentecostal) 운동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실제적으로 몬타니즘은 그 자체의 극단적이고 급진적이며 열광주의적인 면모로 인해 정죄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이 늦어지면서 해이해진 당시의 신앙에 대한 반대급부적 발흥으로서 일면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박찬희 교수(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