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으니 그가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시리라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으니 그가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시리라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구글+(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 다른 공유 찾기 기사스크랩하기
【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03) 사자(Lion)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사자는 소아시아로부터 중동과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모든 육식동물 중에서 유독 사자만 성경의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Palestine에서도 13세기에 므깃도 근처에서 마지막 사자가 죽임을 당했다. 사자는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동물이다. 힘과 위엄과 용기와 위협의 표상이다. 뛰어난 지성의 상징이다.
하나님이 사자로 묘사되었다. 유대인에게 사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토라의 권세를 대변한다. 예술 작품에서 사자는 나무, 아마도 생명의 나무나 토라의 나무 옆에 서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토라가 사자와 같은 힘을 가졌다는 사상이다. 사자와 같은 힘과 근면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토라에 충실한 모든 사람에게 사자 같은 힘을 준다는 의미다. 이방국가는 사자, 늑대, 하이에나, 독수리나 갈까마귀 같은 야생 짐승과 맹금류로 상징된다. 요한은 사자와 어린 양에 상징적인 의미를 더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유대 지도자를 떠올렸을 것이다.
1. 유대 지파의 사자
요한은 1세기에 사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종말론적 희망을 가져오는 메시야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였다(창 49:9-10).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며 다윗의 뿌리다. 두 개는 왕적 호칭이다. 두 가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여기와 쿰란 문헌뿐이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정복하고 심판할 메시야의 권위를 강조한다. 모두 다윗 계통의 메시야적 성격을 강조한다. 둘 다 원수를 정복하는 전투적인 메시야를 암시한다. 오래동안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정복할 왕을 묘사한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타난다. 유다의 왕실도 이와 같은 표현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개념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요한과 동시대의 유대 묵시문학에서 사자의 비유는 로마를 멸할 승리의 메시야를 뜻하고 사용하였다.
이스라엘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 사자와 같았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사자와 어린 양을 연결시킨다. 사자의 이미지와 승리를 재규정한다.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이다. 밀림의 왕자 사자는 강력한 힘과 무기로 상대를 정복한다. 유대 지파의 사자, 왕이신 그리스도는 어떻게 승리를 가져왔는가. 역사적으로, 다윗 계통의 왕들은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사자의 상으로 왕좌를 장식했다(왕상 10:19-20). 왕들은 사자와 비교되었다(잠 19:12). 로마를 상징하는 동물은 독수리다. 유대인들에게 다윗적 메시야는 사자였다. 사자가 독수리를 이겼는가. 독수리가 사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실 동물계의 영원한 라이벌 사자는 날카로운 송곳니, 강력한 발톱, 200kg을 넘나는 체구는 온갖 종류의 공포를 조성한다(욜 1:6; 삼상 17:37; 시 58:6). ‘獅子窟中無異獸(사자굴중무이수)’. ‘사자 굴 안에는 다른 짐승이 없다.’는 뜻이다. 사자는 동물의 왕이다. 사자의 입으로부터 구출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사자의 잔인함, 파괴력,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는 용감하고 담대한 용사인가(잠 28:1; 30:30).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으로 묘사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진멸시키는 다윗의 왕조를 잇는 메시야다. 무력이 아니라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유다 지파의 사자의 위엄 있는 등장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두 눈으로 본 것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 양이다. 그것도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원수를 진멸하는 승리자이다. 그 승리를 얻는 방법이 특이하다.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다.
그리스도가 유다의 사자라고 불릴지라도, 요한이 하나님의 보좌 한 가운데서 본 인물은 사자가 아닌 어린 양, 죽임 당한 어린 양이다. 부활한 어린 양이다. 그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승리하셨다.
유대 지파의 사자라는 이미지는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를 암시한다(창 49:9). 후대 유대교에서 중요한 메시야적 말씀으로 이해했다. 군사적 정복자로서 왕 되신 메시야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용기와 힘과 맹렬함의 절정으로 묘사한다. 유대인들은 다윗 계통의 메시야에게 적용시켰다.
그리스도는 두루마리 일곱 인을 떼시기에 합당한 유대 지파의 사자다. 승리하신 사자다.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에서 탄생했다. 그의 본성에는 사자와 어린 양의 특징이 포함되어 있다. 왕이시며 제사장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마귀와 사망을 이겼다.
2. 유대 지파의 사자 그리스도가 이기다
성탄절은 본질상 기쁨과 슬픔이 혼재한 날이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죽음을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 울 때 부모는 기뻐 웃는다. 부활절은 순수한 기쁨과 승리의 절기다. 고난과 죽음을 이긴 날이다. 어린 양의 죽음은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항복하기를 거절한 결과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였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었다. 하나님이신 그가 완전한 자기희생의 행위를 통해 이기셨다. 절정에 이르는 승리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이기었다.
성탄 찬송가 32곡 중에 구주 또는 구세주가 10번, 왕이 15회 나온다. 만왕의 왕, 임금, 이스라엘 왕, 평화의 왕, 왕의 왕 등이다. 성탄절에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 중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다. 찬송가 115장이다. 작사자는 영국 찬송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명한 아이작 왓츠(Isaac Watts)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4년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에 실었다. 지금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제목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다. 원래의 제목은 ‘메시야의 오심과 왕국’이었다. 언더우드의 ‘찬양가’에 실린 가사는 지금의 가사와 다르다. 지금의 가사는 1908년에 발행된 찬송가에 수록된 것이다. ‘Joy to the world, the Lord is come! Let earth receive her King.’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세상이여 기뻐하라. 하나님이 오신다. 땅은 왕을 맞이하라’이다. 영문은 현재에도 ‘왕이신 하나님의 오심을 기뻐하라’ 이다. 현재형으로 부를 찬송이다. ‘기쁘다. 왕이 오신다.’ 성탄절이 되면 부를 캐롤이 아니다. 항상 불러야 할 찬송이다.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이 부를 찬양이다.
요한은 ‘기쁘다 왕이 오셨네’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가 기록된 두루마리를 펼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크게 울고 있을 때다. 그 소식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며 다윗의 왕가에서 나온 메시야에 대한 것이다. 그분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정복자의 이미지다. 승리를 이루신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인하여 그 사자는 하나님의 신비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은 우리에게 그 사자가 이기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절대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목 박히신 그리스도를 부활 이후에 살아 계신 분으로 묘사한다(고전 1:23).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을 때 빈 무덤을 지키던 청년이 ‘십자가에 목 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할 때 ‘그가 살아나셨다’라고 말한다(막 16:6). 십자가에 죽으심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부활과 승천 이후에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사건이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유대 지파의 사자가 죽임을 당하였기에 승리하였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다. 그는 실제 죽임을 당했다.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사망을 이겼다. 그는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5:9).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5:10). 백성들을 그의 피로 옷을 씻었다(7:14). 그를 통해 이겼다(12:11). 어린 양은 성전도 된다(21:22). 유대적 기대라기보다 메시야에 덧붙여진 것이다.
아시아 일곱교회마다 칭찬과 징계가 다르다. 이기라는 도전은 모두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엄청난 환난의 시기가 올 것이다. 2-3장에서 교회에게 ‘이기라’를 반복해서 권면했다. 권면의 근거와 소망은 어디서 오는가. 어린 양이 교회를 위협하는 악한 세력들을 이미 ‘이기셨다’는 사실에 있다. 승리의 범위를 제한하는 목적어가 없다. 어린 양의 승리가 무한하고 절대적인 승리임을 암시하다.
‘이기다’는 언급한 구약 칭호들의 도입 역할을 한다. 그 칭호들에 담긴 ‘이김’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두 칭호 모두 심판을 통해 그의 원수를 이길 메시야적 인물에 대한 예언을 다룬다. 예수님은 이 예언을 성취한다. 군대의 정복만 아니라 경기의 승리, 환난 중에 가져야 할 믿음의 승리다. 유대 지파의 사자 메시야는 죽음으로 승리하신 어린 양이다. 힘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겼다. 폭력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기셨다. 고대 문헌에서 사자는 위대한 힘을 상징한다. 동물 왕국에서 용기의 대명사다. 강력한 통치자다. 유대 문헌들도 용기와 힘에 대해 사자라는 이미지를 메시야에 대해 보다 자주 사용하고 있다. 에디오피아의 제왕들은 자신들을 ‘유다의 정복하는 사자’라는 직함을 자랑스럽게 전용하였다. 그들은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후손들로 여겼다. 유다 지파에서 나왔다고 확신하였다. 1974년 Haile Selassie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다.
바울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과 십자가를 동일시했다. 최종 부활의 전조로 이해했다(고전 1:18; 15:54-57). 십자가의 승리는 현재하지만 미래에 일어날 우리의 부활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현재하는 부활의 힘을 체험한다. 다가올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 부활의 현재와 미래는 분리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의 본질을 가진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적 소망을 조화 있게 유지하는 것이 부활신앙의 관건이다. 유대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인 어린 양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승리하신 분이다. 어린 양이 죽음에서 승리한 것처럼 그를 따르는 자도 승리한다.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그를 믿는 자도 몸이 다시 살고 영원히 살게 된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겼다. 부활하신 분이다. 부활은 그의 이김의 본질적임을 묘사한다. 어린 양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을 이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