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
- 이정순 교수
- 승인 2020.04.0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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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대학교 이정순 교수께서 코로나19와 관련된 글을 보내왔다. 아래는 글 전문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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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연일 확산되고 있다. 누구도 예측 못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애를 쓰고 있다. 감염을 막기 위해 실시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종교계 역시 건물 중심의 의례 행위를 자제하고 온라인이나 가정에서의 의례로 대체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계 역시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면서 또 일부에서는 여전히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고집하면서 이것을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신앙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전쟁 때도 중단하지 않았던 예배를 왜 중단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면서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물론 생명을 우선시하는 이 위중한 시기에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얼마 전 대구의 신천지로 바이러스 감염자가 폭증하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는 이제 신천지든 정통 교회든 하나로 보이는 듯하다. 정말 바이러스에 의해 다수의 고귀한 생명이 원치 않는 죽음을 맛보고 있는 시대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생명이 먼저인가 아니면 종교가 우선인가 하는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며칠 전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주일 예배를 강행하던 한 목사가 구속된 일이 일어났다. 이 사람은 주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행정명령을 무시한 채 3월 29일 주일 두 차례에 걸쳐 수백명이 모이는 예배를 개최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물론 보석금을 내고 바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도 교회 예배를 제한할 정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얼마나 위중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목사를 기소한 검사는 기자회견에서, "주 정부의 행정명령은 헌법적으로 유효하다"라고 언급하면서 마가복음 12장 31절을 근거로 해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으며, 이웃을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노출시켜 건강을 해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만일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다.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은 물론 현재 많은 서구의 나라들이 종교 집회를 금지하고 있다. 그 대신 각자가 있는 곳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온라인을 통해서든 아니면 개인이나 가족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든 종교 의식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다. 종교인이라면 당연히 거룩한 예배당이나 종교 시설에서 종교의식을 갖는 게 당연할 텐데,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 특별한 시기인 만큼 한 발자국 물러나 달라는 특별 요청인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특별 예배에 머무르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안에서 함께 동영상을 시청하는 형태의 예배도 시행되고 있다. 미국의 한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를 ‘드라이브 쓰루’ 형태로 받고 있다고 한다. 신자는 차에 탄 채 창문만 열고 신부는 2미터 쯤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신자의 고해성사를 듣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시대에 신앙을 쌓아가는 다양한 방식이 매우 흥미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 시설에서의 종교 예식, 즉 예배당에서의 예배만이 유일한 신앙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많은 것 같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생각하고 사모하는 그들의 신앙을 존경하면서도, 이 역시 기독교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배란 무엇인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성행하는 시대에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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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약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 예배의 강화였다. 그때까지 법궤를 모시고 광야 이곳 저곳을 이동하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거대한 왕국이 되면서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를 강조하게 된다.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야훼 하나님, 200여년 동안 왕 없이 사사 체체를 유지 시켜주었던 엘로힘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갇히게 되었다. 세상 한 복판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일원은 누구든지 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하고, 최소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직접 와서 동물을 희생제로 드려야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너무 크고 화려하게 짓다가 무리를 일으키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된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북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했다. 이것이 성서적으로 사마리아인의 기원이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전이 두 개가 생겼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하여 이방인들과 섞이기 시작했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해 포로로 끌려갔다. 신앙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 방문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이국땅에서 절망하던 이스라엘 인들은 이제 성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을 회관과 같은데서 모이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율법을 공부하면서 자녀들의 신앙을 교육했다. 이것이 회당의 시초이다. 여기서 등장한 율법전문가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고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잠시 복구했지만, 희랍과 로마의 침략을 당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 역시 서쪽 벽만 남긴 채 완전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기독교의 성전 개념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유대교식으로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것을 잘 살펴보면 이런 성전 중심, 장소 중심의 예배는 이제 중단되었음을 알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 말미에 예배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21-24절).
예수님 당시까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인들은 “이 산”이라 지칭한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21절)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 어떠한 화려한 성전도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보다 예배 장소나 예배의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디서든 개인이나 집단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4절의 “영과 진리로”(「새번역 성서」)를 「개역 성경」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했는데, 본래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표현은 헬라어 “엔 퓨누마티 카이 알레세이아(έν πνεύματί και άληθεία)”를 번역한 것인데, “영과 진리”(in spirit and in truth)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말을 ”영적으로 참되게“ 라고 번역했는데,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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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예배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나서 오늘날과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지금과 같은 정형화된 형식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후에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예배가 정착된 것이다. 에베소서 5:19-20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면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예배의 주요 요소들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 성경에서는 일요일 오전 11시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라고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다음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 날 모임을 가졌는데, 이후 이것이 주일예배로 정착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 한 모퉁이에서 예배를 드리다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쫓겨났고, 이후 곳곳에 흩어진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의 극심한 박해 시기에는 그마저 힘들어서 비밀리에 모였고, 지하 동굴에서도 모였다. 이렇게 신자들이 모인 모임 그 자체가 ‘에클레시아’(세상으로부터 불러내다), 즉 교회이다. 그래서 그 어느 곳에서든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마18:20)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이 두 세 사람도 모이지 못하면 예배는 불가능한 것인가? 바울서신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6:19, 3:16)라고 선포한다. 이미 성도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각자 처해진 상황 하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리면 그것 역시 훌륭한 예배라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실천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전통을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예배당에서 드리는 주일 11시 예배를 잠시 중단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은 중단되거나 교회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다. 온라인이라는 과학 기술을 도구로 하는 예배든, 가정 단위로 드리는 가정 예배든, 또 혼자 드리는 예배든, 시간과 장소 및 방법에 제한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참된 예배, 진정한 예배는 장소나 시간 또는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신 기술을 도구로 하여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예배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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