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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중복음과 복음전도

은바리라이프 2020. 10. 29. 11:21

사중복음과 복음전도

 

1. 들어가는 말.

 

사중복음은 성결교회의 전도의 표제이다. 성결교회는 이 네 가지 복음의 주제를 가지고 복음전도에 힘써 왔고 많은 결실을 맺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음전도가 많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고, 또한 한편에서는 사중복음의 주제들로 오늘날에도 전도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은 가능하다는 것이고, 오히려 진리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에 더 적합한 전도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 이 시대는 세상이 오히려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는 분명한 진리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현종 박사가 연구한 조사에 의하면, 오늘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종교 욕구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두고 있음이 밝혀졌다. , 세상 사람들이 굳이 종교를 가져야 한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싶어서 종교를 선택하기 원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서 종교를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80-90년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 욕구와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여준다. 80-90년대의 가장 큰 종교 욕구는 잘 살고, 성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의 기능으로 세상에 다가설 때 종교가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세상이 인간이 해결해야할 본질적인 질문을 종교욕구로 추구하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주어야 할 부분을 오히려 세상이 교회에게 질문하며 그 답을 요구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의 답변은 교회만이 줄 수 있기에 제대로 된 전략을 가지고 전도한다면 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는 세상이 추구하는 종교욕구에 답변을 할 준비만 철저히 하면 세상과 부응하여 효율적인 전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질문 자체가 교회가 추구하는 복음의 본질적인 질문이고 그에 대한 답변이 전도를 통해서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의 요소들이 오늘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 욕구에 대한 답변으로 훌륭히 자리매김 할 수 있으며, 오히려 간략하게 보이지만,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세상에 제시함으로 교회를 건강하게 부흥시키며 교회가 감당해야할 종교 본연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이기에 좀 더 세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2. 복음의 내용과 전도와의 관계

 

2-1. 전도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

 

현대 전도신학자 중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훌륭한 전도에 관한 정의 중 하나로서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의 정의를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전도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하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며 또한 그를 교회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국 감리교의 위대한 목사였던 생스터(W. E. Sangster)는 말하기를, “전도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전도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도라고 하는 단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통로라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적인 접근방법일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복음전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예수님과 여러 사도들의 모델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전도의 다양한 행위를 묘사하기 위하여 많은 유사어가 사용되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이다. 이 단어는 (ευ)’-좋은- 앙겔리온(αγγελιον)’-소식-이 합쳐진 단어로서, 명사일 때 좋은 소식이란 의미를 가지고 동사일 때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좋은 소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최초로 답을 제시한 사람은 찰스 도드(Charles H. Dodd)이다. 그는 좋은 소식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으로서, 특별히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승리의 부활로 말미암아 인간의 실존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좋은 소식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전도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 심과 부활로 말마암아 해결되어진 인간 실존의 죄의 문제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전도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전수받아 현장의 전도자들과 신학자들이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를 내린 정의가 1974년 스위스 로쟌에서 개최된 세계 복음화에 관한 국제대회의 정의일 것이다. 로쟌언약의 제 4조에 제시된 전도의 정의에 대한 중요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좋은 소식의 전파이며, 그분이 현재의 통치의 주님

으로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해방시키는 성령의 은사

를 제공하신다는 좋은 소식의 전파이다.

 

2-2. 복음전도에 관한 성결교회의 이해

 

복음의 내용과 전도와의 관계를 학문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먼저 정의할 수 있으나 성결교회가 이에 관한 분명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에 성결교회가 주창한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초기성결교회에서는 전도에 관한 정확한 개념 정의가 있었다. 성결교회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명직 목사는 활천을 통하여 전도(傳道)”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직 목사는 이 글에서 전도()”를 전하는 것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길을 잃은 사람에게 ()”를 가르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 ()”를 전하는 것이 전도(傳道)”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명직 목사가 말하는 ()”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명직 목사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며,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지칭한다. 또한 ()”에는 무한한 생명이 있기에 전도(傳道)”란 생명을 전하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전도함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초기성결교회에서 가지고 있었던 전도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 정의였다. 그런데 초기성결교회가 강조한 ()”의 의미는 좋은 소식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거의 같은 것으로 성경적 전도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성결교회에서는 ()”를 전하는 목적을 각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다음 단계인 성결을 경험케 하는 것까지를 포함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성결을 경험하여 온전해 질 수 있도록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 안에는 사람을 구원케 하는 능력도 있지만 성결케 하는 능력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목적이 있었기에 성결교회는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을 전한다는 슬로우건 아래서 한국 땅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활천에서 사설을 집필하던 길보른도 완전한 구원성결을 전하라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전도자가 무엇을 전해야하는지, 그리고 성결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전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3. 사중복음과 전도

 

이상에서 보자면, 전도란 내가 경험한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결교회는 그 복음의 내용을 중생이라는 기본적인 내용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인적인 회복의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다. 전도는 영혼만을 구원하는 실천이 아니라, 죄 때문에 타락한 인간 자체를 회복하기 위한 실천이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전인적인 타락이 일어났다면, 역시 전도를 통하여 전인적인 구원이 일어나야 한다. 사중복음의 내용은 이러한 전인적인 구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보다 포괄적인 인생의 문제에 대흔 답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각 요소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전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초기 성결교회 전도자들은 이러한 복음의 요소들을 이 땅에서 경험하였기에 그것이 동력이 되어 세상에 외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중요한 이론이라도 내용만으로는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체험은 확신을 갖게 하며, 그 확신은 세상을 향한 외침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전도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에서는 사중복음이 전도의 표제로서 어떻게 전도와 관련되어 전도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전도를 실천하게 하였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3-1. “중생과 성결교회의 전도

 

성결교회는 전도표제의 첫 번째로서 중생을 강조한다. 성결교회가 이해하고 있던 중생의 개념은 성결교회의 사부라고 할 수 있는 이명직과 몇몇 선조들에 의하여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성경을 그대로 풀어 놓은 것이며 그것에 개인적 주해를 덧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명직에 의하면,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중생의 방법으로는 첫째, 물로 중생하는데,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였고, 둘째 성신으로 중생하며, 셋째, 십자가로 중생하고, 넷째 신앙으로 중생한다고 하였다. 그 중생의 결과는 새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만족과 기쁨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명확한 중생에 관한 이해는 초기 성결교회로 하여금 그 이론을 교회 밖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로 찾아가게끔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중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기에 한시라도 급하게 중생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이 중생을 경험한 사람들의 도리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성결교회는 활천을 통하여 구령사업의 적기는 다음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가르쳤다. 그렇기에 구령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의 도를 전하기 위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도한 것이다. 이것이 중생이라는 전도의 표제에 담겨 있는 전도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초기성결교회 전도활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노방전도의 내용을 보자면, 그 내용은 중생의 도를 전한 것이었다. 초기 전도자들은 노방으로 나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명직도 같은 맥락에서 확인해주고 있다. “매일 저녁마다 한 사람은 장등을 들고 한 사람은 북을 치며 황토현에 가서 밋기만 하오 밋기만 하오 하고 찬미를 부를 때에...” 또한 축호전도를 하면서도 중생의 복음을 전하였고 심방을 통해서도 중생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초기 성결교회에는 주일 저녁에 구령회라고 명칭 붙여진 예배가 정기적으로 드려졌다. 이 구령회에서는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중생의 복음을 전하여 거듭남을 강조하고 명목상의 신자들을 진정한 신자들로 만드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즉 구령회를 통하여 첫째, 거듭남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둘째, 죄를 포기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으며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제시하여 그분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구령회 자체가 초기성결교회의 전도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3-2. “성결과 성결교회의 전도

 

성결은 성결교회 전도표제의 두 번째 주제이다. 이미 어휘 자체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성결은 성결교회가 추구하고 목표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실제로 성결교회가 이 땅에서 처음 시작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미 조선 땅에 중생의 복음을 전하는 다른 교파들이 들어와 있었지만 두 번째 은혜로서 성결을 전하고 가르치는 교단이 없었기에 성결을 전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성결이라는 전도표제는 그 자체가 성결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었으므로 전도의 동력이 되었다. 성결교회에서 전도의 표제로서 중생을 먼저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성결을 경험케 하기 위함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중생을 경험하여야 그 다음 단계로서 성결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 없는 성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를 창립한 멤버 중에 한 사람인 정빈도 성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기독교의 신앙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는데서 시작하지만 여기서 머물면 안 된다 "성결의 은혜는 오순절에 예비하신 두 번째 은혜로서 이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완전한 제물을 드릴 수 있고, 성신의 불로 마음 가운데 적고 큰 모든 모든 더러운 것을 완전히 소멸하여 버린 후에 아름다운 새사람을 입을 수 있다". 그가 성결의 중요성을 이렇게 절실히 깨달았기에 한국에 돌아와 성결교회를 시작하는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성결교회에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 한 예로, 성결교회는 주일 오후에 성별회라는 예배를 정기적으로 두어 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별회란 성결의 교리를 명백히 설교하고 성결의 은혜를 명백하게 실험적으로 경험하며, 경험한 은혜를 간증하는 집회이다.” 또한 참석의 대상도 중생을 체험한 자로서 특히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여 기도하는 자들이었다. 이 성별회는 초기에는 복음전도관을 중심으로 열렸지만, 나중에는 성서학원과 교역자 전국수양대회, 그리고 심령수양회와 순회 장막집회에서도 이어져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일으켜 갔다. 비록 성별회가 예배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성별회는 성결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전도의 방법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별회가 어떻게 전도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첫째는 성결을 경험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지고 시작된 예배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복음전도관 시대의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두 단계로 나누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첫 단계로서 중생의 체험, 그리고 둘째 단계로서 성결의 체험을 전하였다. 그렇기에 성별회는 두 번째 단계를 소망하는 자들에게 성결의 복음을 전한 성결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전도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별회 외에도, 초기성결교회의 부흥회는 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경험하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활천의 소식란을 보면 부흥회에 대한 보고가 나오는데, 빠짐없이 성결을 경험한자들에 대한 보고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활천을 보면, 전도자는 반드시 성결을 확실하게 전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전도자의 의무 중에 하나는 반드시 성결의 복음을 전하여 그 은혜를 체험케 해야 한다고 못박아 놓고 있는 것이다.

 

3-3. “신유와 성결교회의 전도

 

전도의 표제로서 신유는 초기성결교회의 전도활동에서 활발하게 경험되었던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활천과 같은 교단잡지나 설교 등에서 다른 주제에 비하여 그리 활발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신유에 관한 경험이 빈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고, 또 그것이 전도의 동기가 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 성결교회에서의 신유는 전도의 큰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초기 성결교회에서의 신유가 전도의 중요한 동력이 된 이유는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전도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피전도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신유였기 때문이었다. 육체의 연약함을 치료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피전도자들은 자연스럽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의료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열악한 환경 속에 있던 초기성결교회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였다. 또한 신유가 전도의 동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초기 성결교회가 시작될 당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이미 그 땅을 점령하고 있는 미신과 우상들, 그리고 귀신들과의 싸움을 의미했는데, 그 치열한 영적인 전쟁 속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신유의 사건은 그 자체가 우상과 귀신들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유는 그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관련이 깊다. 의료시설이 발전하지 못하고 필요한 상비약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초월적인 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의료시설이 발전하고 필요한 상비약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만을 의지한다면 영적인 신비주의로 전락할 위험도 있는 것이다. 의학과 상비약들 치료의 도구들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초기성결교회에서 적극적으로 경험되어졌던 신유의 역사가 시간이 흐르며 줄어들어갔다는 이론을 증명할 완벽한 근거는 아니며, 또한 현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신유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신유사건의 빈도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론적인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유를 통한 전도의 사례는 복음전도관 시대에 집중해서 많이 나타나 있다. 그 중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일본 경찰서에서 일하던 박순의라는 사람이 너무 아파서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소용이 없던 차에 기독교인 의사의 권고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아서 12명의 새신자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또 철원에서는 배선표 전도사가 신앙에 열성이 있는 한 인본인의 소개로 병들어 누워 있는 일본인 부인을 방문하여 사도행전 1631절과 1526절을 읽으며 기도하였다. 그때 일본 여성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음을 입었으며, 남편까지도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신유의 역사는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초기 성결교회에 일어난 몇 가지 신유의 특징을 들자면, 위의 사례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병이 낫고 나서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된 경우보다 피전도자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병을 위해 기도하였을 때 신유의 역사가 나타난 경우가 많았다. 다음으로는 미신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가정을 직접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던 전도부인들을 통하여 더 많은 신유의 사례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당시 조선의 관례로 볼 때, 살림을 맡아 열악한 환경에 더 노출된 부류가 여성이었는데 유교적인 문화 속에서 그러한 여성들을 자연스럽게 찾아갈 수 있었던 부류는 여성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신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특정한 계층과 부류와 연관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흘러도 신유의 역사는 지속될 수 있었다.

 

4-4. “재림과 성결교회의 전도

 

성결교회의 전도표제의 마지막 주제인 재림이 성결교회의 전도활동에 어떠한 동력을 제공하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결교회가 받아들여 믿고 있는 재림 사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결교회가 수용하여 믿고 있는 재림사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다. 이것은 동경성서학원에 유학하였던 정빈, 김상준, 이명직에 의하여 수용되어 한국성결교회의 재림사상으로 전래되었다.

그런데 19세기 성결운동을 주도하던 단체들이 받아들였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19세기 신앙선교운동의 배경이 될 만큼 강력한 선교와 전도의 동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 세상에 대해서 비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세계선교와 전도의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엇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 되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온 세상 사람들이 회심한 다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다음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땅 끝까지 찾아가 선교하고 전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빨리 온 세계에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그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가능한 빨리 복음을 전해야 했다.

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동양선교회가 가지고 있던 재림관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카우만과 길보른은 일본의 한 젊은 선교사를 만나 일본의 모든 지역에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도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대거부락전도운동을 태동시켜 완성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는 재림관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고 이루기 위해서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대거부락전도운동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끝마쳐졌고, 그 후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건너 들어와서 순회전도대, 지방전도대, 대거부락전도의 형식을 띄고 전도활동을 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가정을 돌며, 모든 마을을 돌며,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도했던 원동력은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고 완성하기 위해서 복음을 땅 끝까지 빨리 전해야 한다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가지고 있는 전도와 선교관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성결교회의 재림관은 전도활동에 직접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복음전도관이 그 세력을 전국적으로 확장하고, 전국적인 조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 했던 결과였다. 이러한 성결교회의 전도활동은 오늘의 십자군 전도대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결교회가 가지고 있던 재림 신앙은 기독교의 종말적 역사인식으로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큰 힘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것을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 재림이라는 종말관이다. 성결교회가 신앙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다른 복음을 쫓지 않고 배교치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재림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렇게 변질되지 않는 복음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적극적인 전도활동 역시 유지될 수 있었다.

 

5. 나아가는 말

 

성결교회는 사중 복음이라는 탁월한 복음의 내용을 소유하였고, 그 내용을 교회 안에서 먼저 경험케 함으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할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였다. 그래서 교회가 힘 있고 건강한 초대교회와 같이 부흥하는 것을 경험하며 오늘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마치 성결교회가 기지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들려달라는 듯이, 인간 본질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그것을 가장 큰 종교 욕구로 표현하며 접근하고 있다. 인간의 본연의 문제의 관한 답변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복음만이 제시할 수 있으며 그 답변이 능력 있게 제시되어질 때 복음전도는 효율적으로, 그리고 능력 있게 실천되어질 수 있다. 다시 한 번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이라는 전도표제가 제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사중복음의 내용과 그 경험이 이 시대의 고민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답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효율적으로 실천되어지기 위해서는 교회가 이 사중복음의 내용을 더 폭 넓게 공부하고 분명하고도 뚜렷한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중복음의 한 주제, 한 주제를 한 분기씩의 주제로 잡아 공부하고 경험케 하는 1년의 목회계획이 효율적으로 수립되어 질 수 있다면, 교회가 건강해 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능력 있는 복음전도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Back to the Basic!’ 한국의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을 염두해 두고 외쳐야 할 슬로우건이며 교회를 건강히 회복하고 살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도 이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