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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 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은바리라이프 2020. 6. 1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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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 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 서거 36주기에 부처희망으로 가득찬 세상을 향해…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4.1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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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생 시절 신학의 방위(方位)도 분별치 못하던 때, 나는 고 이명직님의 강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분을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로 사회적 변화에 무감각한 반문화적 인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반세기 교회를 섬기면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한분을 들라고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명직 목사님을 들고 싶다. 3월 26일, 그분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 구 서울신대 강당에서 서거 36주기 추모행사를 가졌다. 추모행사를 마치고 철없던 제자, 참회하는 심정으로 여기에 감히 몇 자 올리고자 한다.

 첫째로 이명직 목사님은 온몸으로 성서의 권위를 지킨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한국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의 고등비평의 파도가 무섭게 밀려오던 때, 그분은 조목조목 이에 반박하며 맞섰다. 그는 말하기를“그리스도는 절대 신이지만 예수는 절대 사람이라는 말로 십자가의 속죄를 부인하는 사상이 지금 유행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무슨 말인가? 이는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당시 자유주의 성서 신학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명직 목사님은 주자학의 명분론과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한국교회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융통성 없는 지도자로 평가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가슴 뜨거운 감동을 경험했다. 한국교회의 대세가 성서의 권위를 떠나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따라갈 때‘오직 성서’의 외길에 서서 정론 직필의 외로운 싸움을 대면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결코 난해하지 않았다. 솔직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성서적 체험주의 신앙을 수호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웨슬리의 전통과 동양적 지혜를 자유스럽게 활용했다. 나는 그분에게서 소위 토착화 신학을 본 것이 아니라 동양의 인문학적 지식으로 오히려 기독교의 복음을 자유롭게 변증하는 모습을 보았다.

 둘째로 이명직 목사님의 사회적 관심은 그의 신학적 인간 이해에 근거했으며 매우 개혁적이었다. 흔히 그를 평가하되 수직적 성결론에 매여 수평적 사회적 관심에 소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피상적 판단이고 그의 신학에 무지한 소치이다.

 이명직 목사님은 분명한 기독교적 인간 이해의 바탕위에 서 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내시니 다 그의 적자이지 차별을 두셨을 리가 만무하다. 진승(陳勝)의 말과 같이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으리요 한 말 그대로가 진리다....귀골 중에도 백치가 있고 천골 중에도 영웅준걸이 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귀천의 차별이 없고 십자가의 공로를 힘 입음에도 피차가 일반이다.”

 내가 이명직 목사님의 인간평등론을 소개하는 이유는 당시 가장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계층인 형평사원과의 관련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형평사원이란 1923년 천대받던 백정출신 조직으로 사회주의적 경향을 띄었다. 그들 중 온건한 이들이 대동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이 모임을 개혁했다.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니 어떤 교회에서는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함께 예배에 참석지 않겠다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때 이명직 목사님은“하나님께서 형평사원을 다 지옥에 보내기로 작정하신 줄 아는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성결이 어디서 증명될까? 형제를 차별하는 그 마음이 성결치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네 구원이 문제되리라”고 했다.

 그의 지적은 날카롭고 단호하다. 성결은 결코 수직적 관념적 체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정을 차별치 않는 사회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이런 생각은 1934년 제2회 총회에서 형평사원 전도를 본격적으로 실천할 것을 결의하고, 한인업 전도사를 파송했다. 그 외에도 이명직 목사님은 그가 출석하는 아현교회에 걸인들을 받아 적극적으로 돌보았다. 양반 뿐 아니라 일반 서민까지 한자리에 앉지도 않으려는 백정들에 대한 차별철폐가 곧 성결의 증거라고 강력히 주장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스승이신 이명직 선생님이시다.

 셋째로 그분의 종말론적 세계관이다. 우리는 교단이 해산 될 때 그 직접원인이 재림론 때문임을 알고 있다. 이명직 목사님은 마지막 날 주께서 재림하실 때 최후의 심판을 믿었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와 함께 현실의 부조리에 투쟁을 하지 않는 소극적 자세를 지니게 하는 점이 인정된다.

 우리 민족이 당한 일제치하의 학정과 공산치하의 잔혹사는 우리의 상상을 불허한다.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너는 과연 그 상황에서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기쁘게 순교의 제물이 되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명직의 일제치하 행적을 비판한다. 신사참배와 활천지에 실린 그의 친일 논설이야기다. 그는 개인이 아니었다. 교단의 대표요, 신학교 교장이요, 활천의 주필이었다. 책임자는 자유가 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가? 교회들을 문 닫지 않고 예배를 계속할 수 있다면, 신학교를 폐교하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활천지를 폐간하지 않고 계속 발행할수만 있다면 가짜 항복이라도 하리라.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자 그들이 쓰라는 대로 쓰자 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교단은 해산되고 신학교는 문을 닫고 활천은 폐간되었다. 버틸 만큼 버티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는 지난 정권하에서 친일인사 사전을 펴냈는데 거기에 이명직과 박현명 두 분의 이름이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자 한다. 그대들의 부모는 그때 학교에 다니지 않았나? 그 시절 학교교육을 받은 자는 모두 신사참배 동방요배하지 않았나? 친일이 무엇인가. 그 때 죽지않고 살아남은 자는 모두 친일파인가? 억지로 엮어 놓은 친일조직의 엉터리 감투가 친일인가? 만일 그들이 친일파라면 친일의 댓가로 무엇을 받아 누렸는지 입증해야할 것이다.

 내가 더욱 부끄러운 것은 그 시대를 공부해 보지도 않고 살아보지도 않은 후배들이 함부로 돌을 던지는 행위이다. 당신은 왜 순교하지 못했느냐 묻는가? 순교도 하나님이 허락해야 되는 일이 아닐까? 참고로 말하거니와 그 시대에는 이 땅에 그 어떤 교단도 일제에 무릎 꿇지 않은 교단이 없다. 우리처럼 해산당한 교단도 안식교 외에 없다. 성경과 찬송에 먹줄을 치고 치욕스런 예배를 드릴 때 우리 성결교회 신자들은 흩어져 그들의 교회 속으로 흡수 되었다.

 나는 순교의 피를 흘린 선인들에게 옷깃을 여미고 존경하지만 순교하지 못하고 모진 생명 이어가며 교단의 명맥을 이어주신 스승 이명직 목사님이 새삼 그리워진다.

 

목사 송기식
수원교회·철학박사·본지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