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신학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신학
이현갑 목사(중앙신학교장 역임)
하얀 두루마기 차림에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서울신학대학의 교정을 거닐던 이명직 목사의 인상적인 모습은 그가 한국성결교회에 남긴 업적 및 신학사상과 더불어 아직도 많은 성결인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그를 교단의 사부요, 성결교회의 아버지(교부)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국성결교회의 초석을 놓고, 교단을 성장 발전시켰으며, 그의 성결한 삶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기독교인의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사상의 재조명을 통하여 한국교회와 성결교단에 미친 그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I.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업적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 서울에서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이명직은 19세 때에 부친의 뜻에 따라 정치학이나 법학을 공부하기위해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일본의 긴자 거리에서 나팔불고 북치면서 노방전도하던 구세군 전도단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후 그의 생의 목표는 완전히 바뀌어 일본 동경성서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분명한 구원의 확신과 뜨거운 소명감을 가지게 된 것은 동경성서학원에서 있은 두 번의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였다.
첫 번째 성령 체험은 어느날 사사오 교수의 성서주석 시간에 일어났다. 공부하던 학생 중 하나가 일어나서 "불났다. 내 가슴이 탄다"고 외치자, 교실 안에 공부하던 다른 학생들도 저마다 일어나서 "내 가슴도 뜨겁다. 뜨겁게 타오른다"고 날뛰기 시작하였다. 이로인해 교실 안은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으며, 이때 이명직 역시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하였다. 이명직은 성령의 체험 후 마음의 변화가 생겨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기도와 전도에 힘쓰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후 미국인 슐 함머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던 이명직은 또 한 번의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다. 죄악을 무섭게 공격하며 중생을 강조하는 슐 함머 목사의 설교에 크게 찔림을 받은 그는 아직까지 확실한 중생의 체험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와하며, 학교에 결석계를 제출하고 골방에 들어가 금식하며 여러날 철야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도 끝에 그는 적은 죄로부터 큰 죄에 이르기까지 통회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사죄함을 받는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 후 그의 생애는 완전히 변화되었으며, 구령사업을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
약 2년 동안의 신학교 생활을 통해 신학적 기반과 영적인 기반을 닦은 이명직은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방되던 다음 해인 1911년에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의 자격을 취득하여 선교의 임무를 띠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2세의 약관이었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사명감으로 경기도와 개성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하였으며, 개성교회를 목회하여 교회를 부흥시켰다. 1914년 4월 12일에는 성결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안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명직은 이명헌, 강태은, 김상순, 이장하등과 함께 성결교단 처음으로 목사가 되었으며, 충청도 부여에 내려가 규암교회를 3년간 목회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 아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경성 성서학원 교수와 기숙사 사감을 겸하였다.
목회자로서 열심을 다하던 이명직의 사역은 1916년 경성 성서학원의 교수가 됨을 계기로 교육자로서 더욱 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에는 아현교회 담임과 사감직을 사임하고 교수로만 봉직하였으며 또한 성서학원의 규칙을 기초하였다. 특히 1921년 9월에는 성서학원이 중심이 되어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명직은 바로 그 운동의 중심이었다. 1935년에는 성서학원 원장이 되었고, 1940년 경성 신학교로 승격하면서 교장이 되었으며, 1951년 서울 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미국 아주사 대학으로부터 한국의 신학발전과 목회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2월에는 서울신학대학 인가와 함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시무하였으나 1961년 문교부 규정이 60세 이상의 학장은 사퇴하여야 한다는 정년제가 실시 됨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정년퇴직하였으며, 1965년에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야말로 그는 반세기가 넘는 기간을 신학교와 동고동락하면서 한국성결교회를 위한 수많은 교역자를 양성하는 중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명직을 가리켜 성결교단의 사부라고 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수로서의 사역과 열정은 이명직으로 하여금 신학자가 되게 하였으며, 많은 책을 저술하게 하였다. 특히 그는 성결교회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중복음과 성결론을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발전시켰다. 그의 저서 중에는 성서 강의에 대한 부분이 단연 많고 대작으로는 [구약 4천년사]를 비롯하여 기독교 신학개론인 [신학대강], [기독교 4대복음]등이 있으며, 기독교 교육에 사용된 [주일학교 독본] 1-5권이 저술되었으며, 그밖에 수양서로는 [길찾는 친구에게] [인생과 종교] [기독교의 인생관] [성경에서 본 인생관]등이 있고, 인생철학을 비롯하여 성결교회 신조, 헌장, 교회사 등 여러방면의 책들이 있을 뿐 아니라 기타 교단의 중요한 문헌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명직은 교회의 행정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1933년 제1회 총회장, 1934년에 제2회 총회장으로 재선된 것을 비롯하여 1938년 제6회 및 제7회 총회장을 연임하는 등 4차에 걸쳐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것과, 1941년에 한국인 최초로 동양선교회 재단이사장으로 선임된 것은 실로 그의 행정적인 지도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목회자, 교육자, 신학자 및 행정가로서 이명직이 성결교회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정말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항상 평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제 치하에 복음 사역은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는데, 특히 대동아 전쟁이 치열하던 일제 말기에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강요하는 일본의 노골적인 기독교 탄압은 당시 성결교단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명직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혹자는 당시에 이명직이 일본의 신사참배에 적극 가담하였다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결 교단의 책임자로서 약 8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른 것이나, 성결교단이 재림 교리의 준수로 인해 결국에는 다른 교단에서 볼 수 없었던 교단 해체의 상황까지 맞이한 것을 볼 때에, 성결교단의 대표자로서 이명직은 언제나 기독교의 복음과 교단을 수호하기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성결교회를 이룩한 성결의 기수요, 교역자를 무수히 배출한 사부요, 교단의 속죄양과 같은 제물이며, 한국교회의 지도자인 이명직은 1973년 3월 30일 오전 7시 30분 "조금도 고통이나 염려없이 손가락으로 위의 세계를 가리키시며 극히 평화로운 자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II. 이명직 목사의 신학사상
1. 이명직의 신학사상의 형성 배경
한국성결교회 최초의 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명직의 신학사상은 간접적으로는 유교를 중심으로한 한국의 토속적 종교사상과 바울의 신학사상 그리고 요한 웨슬레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직접적으로는 19세기 말 미국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명직의 저서 [기독교 대강령] 제1장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면서 "우리 조선의 한 아버지 단군은 아브라함과 같이 제단을 쌓고... 우리 한족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잘 인식하는 거룩한 민족이다"라고 하면서 단군신앙의 하느님 사상을 아브라함이 믿은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본 인생관]에서는 시편 32편 1-3절 말씀을 "공자 갈아대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 하였으니 무슨 뜻인가? 즉 아침에 도덕훈을 받고 회개하여 양심에 가책없이 하루를 살다가 죽는 것이 장수하며 양심에 평안없이 사는 것 보다 떳떳하다는 뜻"으로 유교식 풀이를 하였다. 이러한 식의 풀이나 성경 해석은 물론 그가 자라고 배운 환경의 영향이지만,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맞추어 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려는 이명직의 적극적인 복음전도의 태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명직은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울의 성결의 경험과 연결시켜 자신의 성결론을 설명하고 있으며, 인간론에서는 바울이 인간을 영과 혼과 몸의 셋으로 구분하였듯이(살전5:23) 그 역시 3분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정에 관한 입장에서는 로마서 8장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는 구절을 들어 예지예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그가 바울신학의 토대 위에 자신의 신학사상을 세워나감으로써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명직의 신학사상은 웨슬레의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는 구원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웨슬레의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따르며, 칼빈주의의 '불가항력적 은혜' 사상을 배격하였다. 그의 이러한 신학사상의 형성은 그가 다녔던 동경성서학원이 웨슬레적 복음주의 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때에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직의 신학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동양선교회의 설립자이자 동경성서학원의 설립자라고 할 수 있는 카우만과 길보른의 신학사상이다. 또한 카우만과 길보른은 신학사상은 19세기 말 미국 성결운동의 주류였던 필그림 성결교회와 하나님의 성서신학교의 설립자인 마틴 냅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려할 때에 이명직의 신학사상의 직접적인 뿌리는 마틴 냅의 신학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이명직 목사의 성결론
이명직의 신학사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성결론이다. 이명직은 한국의 신학자 중에서 웨슬레의 복음주의적인 성결론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최초의 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직의 성결론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성결론이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체험이 뒷받침되어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웨슬레 신학이 칼빈신학과 달리 올더스게이트의 체험과 성서 연구를 기초로 정립된 것처럼, 이명직도 웨슬레에 의해 천명된 성서적 기본교리와 골자를 재강조하면서 자신의 성서 연구와 신앙적 체험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성결론을 만들었다.
이명직의 성결론의 핵심은 그의 초기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성결교회 약사]에서 잘 나타난다.
완전한 성결이라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의 세례를 받음이나 곧 거듭난 후에 믿음으로 순간에 받는 경험이니라, 또한 완전 성결은 원죄에서 정결케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능력을 주심이니라.
이 한 문장에는 이명직의 성결론에 대한 다섯가지 핵심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성신의 세례를 받음"으로 완전한 성결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한 성결이란 하나님만의 속성인 '절대적 성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음으로 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 성결'임을 보여준다.
둘째, "거듭난 후에 받는 경험"이라는 것은 완전한 성결이 중생 후에 받는 2차적 은혜임을 보여준다.
셋째, "믿음으로 순간에 받는 경험"이라는 것은 완전한 성결이 중생 후의 점진적 성결과는 달리 성령으로 말미암는 순간적 역사임을 보여준다.
넷째, "원죄에서 씻음"이라는 것은 완전한 성결이 우리의 자범죄 뿐만 아니라 원죄까지도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능력을 주심이라"는 것은 완전한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능력있는 사역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명직은 이처럼 웨슬레의 성결신학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결 전후의 인간의 영적 상태를 4단계(타락전시대, 타락시대, 중생시대, 성결시대)로 구분하여 도표로 알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성결신학으로 발전시켰으며, 온전한 성결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성서적으로 제시하였다.
3. 이명직 목사의 사중복음
이명직이 이룩한 신학적 공헌 중에 하나는 한국성결교회의 전도표제인 '사중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사실 한국성결교회는 전도표제인 '사중복음'을 통해 부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성결교회의 초대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전도표제로 하여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복음 사상이라 할지라도 신학화되지 않으면 얼마 못가서 사멸될 수밖에 없음을 고려할 때, 사중복음의 신학화 작업을 한 이명직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명직이 체계화한 사중복음 사상을 앞서 살펴본 성결 부분만 제외하고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명직은 중생이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심령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신인격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중생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생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회개와 그리스도의 보혈, 그리고 신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명직은 신유란 질병이 있을 때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친히 고침을 받는 것으로서 은사이자 복음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신유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질병 치료에 있어서 의약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병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도 신유의 범주에 넣음으로써 극단적인 신비주의적 신유론을 경계하였다.
이명직의 재림론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을 따른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5시대[제1시대 무죄시대(창1,2장), 제2시대 양심시대(창3:1-10), 제3시대 도덕적 시대(창11-출1장), 제4시대 율법시대(출19장-말라기와 예수의 십자가까지), 제5시대 교회시대(십자가로부터 교회의 재림까지)]로 구분하여 세대주의적 입장을 따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상황을 예수님의 공중재림, 휴거와 공중혼인잔치, 지상대환란, 이스라엘의 회복, 예수님의 지상강림과 천년왕국, 천년후의 백보좌의 심판, 천국(신천신지)의 순서로 나열함으로써 전천년설과 환난전 휴거설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재림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재림의 징조는 알 수 있다고 주장함을 볼 때에 그의 재림론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으므로 깨어서 준비할 것을 알리는 '경고성 재림론'이라 할 수 있다.
III. 맺음말
한국성결교회가 제도적,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초창기에 이명직 목사의 활동적인 사역이 오늘날 한국성결교회가 한국 기독교의 3대 교단이 되기 위한 초석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성결교회 내에서 그에 대한 인식과 연구가 부족했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적 성장 속에서도 질적 빈곤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웨슬레적 성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이 때에 한국성결교회에 이명직과 같은 성결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공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재조명을 통하여 초대 한국성결교회의 뜨거웠던 사중복음과 성결의 신앙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