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마태복음 21장 두 아들 비유

은바리라이프 2020. 6. 12. 15:56

Matthew21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었다.

'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어떤 사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맨 먼저 와서 말하기를`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거라' 하였다.
매트. 21:29"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후회하여 갔다.
매트. 21 30분에 그는 두번째 사람에게 와서 똑같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하고 대답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매트 21:31"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나요?" 그들은 "첫번째"라고 말했다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신다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그 아들은 처음에 밭에 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후회하고 복종했다결국,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랐고 아버지의 말씀은 순종했다그가 일찍이 거절한 것은 죄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회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가 어쨌든 봉사하는 것을 허락했다그래서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으로 여겨졌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그의 동의는 거짓이었고, 그가 가지 않은 것은 그가 진정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를 의도가 없었다는 증거였다그래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도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고, 그것은 그가 위선자임을 보여 주었다.

예수님이 신청하셨다그는 이 둘째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천국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사진이었다고 말합니다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창녀 같은 리스 유태인들은 비록 그들이 죄를 지은 생활 방식을 통해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개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여 용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복음을 회개하고 따름으로써 왕국에 들어올 죄인들을 그려 냅니다둘째 아들은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신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살고 있다.

첫째 아들처럼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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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21에 있어서의 윌링과 무적의 두 아들의 우화 속 상징 주의

존 웰치

매우 귀중한 상징 주의가 두개의 예수 우화에 완전히 담겨 있는데, 이 우화는 "어떤 사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에서 시작된다이 두가지 중에서 더 유명한 것은 보통 루크 15세에서 발견된 방탕한 아들의 우화라고 불린다자주 언급되지 않는 것은 매튜 21에서 발견되는, 의지가 있고 원치 않는 두 아들의 우화라고 불릴 수 있다많은 글을 쓰고 예수의 우화에 대해 깊이 가르친 사람들 조차도 이 짧은 글에 대해 거의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권위 있는 짐들로 도배되어 있다이 두마리의 우화 중 덜 알려진 것을 설명함으로써, 저는 로버트 L. 밀레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필요한 것이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든 그의 포도원에서 일하기 위해 이 날에 내려간 그의 완벽한 의지에 대해 경의와 인정을 표하고 싶습니다.

예수의 우화를 읽는 것

이 또는 다른 예수의 우화에 접근할 때, 밥이 우아하고 간결하게 글을 썼듯이, 사람들은 모든 의사 소통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든 다양한 수준의 의미를 전달하는 여러개의 상징을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 듣는 사람들의 열린 마음과 정신적인 수용력게다가,"우화는 많은 적용을 받을 수 있다." [1]예수의 우화에 있는 각 요소들은 하나의 사물로서, 또는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유사한 역할을 한다사실, 모든 예술은 아날로그로 보여질 수 있다. 왜냐하면 비유하지 않고는 예술이 아닌 공예품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과 함께, 독자들은 그들이 우화에서 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 선택적으로 결정해야 한다[2]그러나 동시에 일부 판독치는 항상 다른 판독치보다 강력합니다강렬한 독서는 세부적인 것에 대한 세심한 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우화, 그림, 혹은 의미 있는 의사 소통의 다른 작품에서 상징의 상호 작용과 강화되는 질감을 더 많이 볼 수 있을수록 읽는 능력은 더 강해진다또한, 강력한 판독 값은 해석되는 텍스트나 작업에서 선택된 몇개의 요소가 아닌 모든 요소를 사용한다게다가, 강한 독서는 그것들이 다른 우화의 나머지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을 설명하거나 확대시킨다게다가, 강력한 독서가 그 상징적인 의미를 그 질감을 얇게 할 정도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

내가 루크 10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우화와 관련하여 다른 곳에서 논의했듯이, 예수의 우화는 확장된 상징적 메시지들로 구성된 것으로 오랫동안 유익하게 읽히고 있다[4]예를 들어, 2세기 기독교 독자들과 그의 "몰락하는 남자""강도들 사이에 떨어지는 것"을 창세기에 아담과 타락으로 연결시켰습니다. 강도들은 사탄의 수하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스스로 구원하는 자로 해석되었습니다많은 것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초기의 이해를 그럴듯하고, 우아하고, 교훈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사실, 2단계 읽기는 예수님이 자신의 변호사가 제기한 두가지 질문에 능숙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해 줍니다."내 이웃은 누구지?"뿐만 아니라 변호사의 좀 더 독창적인 질문인 "주인님, 영원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루크 10:25)

내 생각에는 예수님의 우화들은 다양한 수준으로 읽힐 것이다실제로, 예수는 의도적으로 그의 우화가 적어도 두 단계에서 보여지도록 의도한 것으로 기억되었다한가지 수준은 공개적으로 접근하기 쉽고 직접적인 이야기의 가치에 의해 교화될 수 있는 일반 청취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들에게 예수는 종종 사적인 대화에서 그의 깊은 의미를 펼치거나 토론했을 수도 있다(매튜 13에서 그랬던 것처럼. :1923, 3643; 19:1011). 사실, 조셉 스미스는 모든 우화의 숨겨진 의미가 예수에 의해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설명되었다"고 가르쳤다. [6] 이러한 기호학적 판독치는 포물선의 일반적이고 단순하며 실용적인 판독치를 감소시키거나 대체하지 않습니다실제로 복수의 판독치는 이러한 특이한 텍스트를 풍부하게 하고 확대한다.

특히 중세 시대에 기독교인 통역사들은 성경의 4가지 의미 수준을 확대하고 확대하는 것을 보았다.

1. 문자 그대로, 사실적, 역사적, 문화적이 접근법은 실제로 혹은 효과적으로 이야기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이 객관적 접근법의 도메인은 " 있다"이며, 텍스트 자체를 면밀하게 읽는 것으로 제한한다.

2. 도덕적 또는 윤리적종종, 이야기를 말하거나 상징을 투영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도덕적 의미를 담고 있다호의적인 묘사에 대한 반응으로 독자나 시청자들도 가서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 반면, 부정적인 묘사에 내재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삼가야 한다이러한 사회적 접근의 영역은 "당연하다"이며, 이것은 문화적 관습과 기대의 의미를 토론에 더해 준다.

3. 우화 작가여기서 그림과 시나리오는 다른 그림, 그룹 또는 개발 이외의 비교를 위해 배치된다때때로 이러한 평행 투표자들은 투명하고 명백하다; 다른 때는,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우화적인 상대들은 더 모호하고 본질적으로 코드화되어 있다비록 몇몇 사람들은 예수의 우화의 우화적 특성을 무시했지만, 우화적 해석 방식의 뿌리는 초기 히브리어와 기독교 문학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그것은 적어도 예수 시대에 흔히 사용되었다그 자신과 필로(기원전 20)가 있다. AD50),[10]및 이레나에우스(c.AD140-c.20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죽음 c.AD215)및 그 이후의 기록비록 천국에서의 사건들과 지구에서의 사건들 사이에 몇몇의 우화들이 그려질 수 있지만, 믿음에 대한 씨앗의 우화적인 병렬적인 위치 혹은 선교사에 대한 어부와 같은 세상에서 발견되는 두가지 특징 사이에 더 자주 대립된다이러한 비교 접근법의 영역은 일반적으로 "수평적"이며, 비교와 유추적인 논리로 번창한다.

4.Anagogical. 우화나 우화가 마음과 영혼을 위로 이끌고, 세속적인 사건, 인간 관계, 그리고 자연적인 목적을 더 높은 형이상학적 또는 천상의 수준으로 투영할 때, 그 연계는 유추적이다때때로 신비한 것, 영적인 것, 또는 교리적인 것으로 불리는, 고고학적인 독서는 하늘의 것들을 강조하고 특히 이 삶의 패턴과 이 죽음의 영역을 넘어서 생명과 관련된 진실 사이의 연관성을 이끌어 낸다이러한 상승 접근법의 영역은 "수직"이다그것은 본문의 엄격하고 명백한 의미를 초월하는 인상에 열려 있다이러한 미묘한 의미들이나 이중적인 의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상한 영적인 유리한 지점에 의해 초대되었다.

이 네가지 독서 모드는 전통적인 성서 해석의 세계의 기본 요소로 보여질 수 있다. [11]이 네가지에서, 사람들은 네가지 관점에서 복음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신체적, 사회적, 지적, 정신적 접근입니다.(Luke2:52참조사실, 예수의 우화를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읽는 것은 항상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상징적이고 화려하게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게다가, 예언자 조셉 스미스에 의해 또 다른 도구가 교회에 주어졌다. 1843123일 일요일 루크 15세에서 길을 잃은 양과 잃어버린 동전, 탕아의 우화에 대해 조셉은 가르쳤다."나는 그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답을 이끌어 낸 질문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12] 보시다시피, 이 네가지 독서 방식과 특히 요셉의 열쇠는 매튜 21:28-31에 두 아들을 둔 어떤 사람의 우화의 의미를 밝혀 주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두 아들의 난간 설정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원칙으로 삼고, 먼저 매튜 복음서의 중요한 순간에 나오는 이 짧은 우화의 배경을 생각해 보세요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직후에, 그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서, 지나치게 열성적인 상인들과 돈 거래를 하는 상인들의 상을 치고, 기적적으로 맹인과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을 고쳐 주었으며, 아이들이 이를 알려 주었다그 중요한 날이 끝날 무렵, 근처 베서니 마을에서 친구들과 밤을 보낸 후, 그는 다음날 아침 사원으로 돌아왔다거기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어떤 권한으로 그대들을 공경하십니까?'누가 그대들에게 이 권한을 주었습니까?'(2123)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그들의 모욕에 자기 자신의 질문으로 대답하셨다.`침례자 요한의 침례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물었다. "천국에서 온 건가요, 아니면 사람에서 온 건가요?"(2125그들이 대답하기를 꺼렸을 때, 예수께서는 이것을 권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기회로 사용하셨다그는 어떤 권한으로 이러한 일들을 했는지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거부했지만(21:27 참조), 즉시 간접적으로 두 아들에 대한 이 신랄한 우화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다.-그 중 한명은 궁극적으로 그럴 의향이 있었고 다른 한명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가 고난의 길에 들어간 후 성전에서 가르친 첫번째 교훈이었고, 이 짧은 비유는 효과적으로 이 중요한 권위의 문제를 근본적인 원리로 되돌려 놓았다. 이 중요한 문제는 현재 대제사장들이 존의 권위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꺼려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예수의 근원과 모든 진정한 권위에 관련된 세계의 기초와 관련된 힌지들  깊은 차원에서, 이 비유는 영원한 인격과 결과라는 특정한 이분법을 마음에 떠올리게 한다.

왕 제임스 버전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네가 어떻게 생각하니어떤  사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는 첫째 아들에게 와서 말하였다.`아들아, 나의 포도원에서 날마다 일하러 가거라예수께서 대답하시고 말씀하셨다.`내가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 뒤에 갔다그리고 그는 두번째로 와서 똑같이 말했습니다그는 대답하며 말했습니다."선생님, 갑니다."그리고 가지 않았습니다그들 둘 중 누가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계승했는가그들은 그에게 첫번째라고 말한다.

난간의 객관적 요소

이 교훈적인 이야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나 문화적인 점들이 담겨 있다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수준에서, 이것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이 우화에서 첫번째 단어는 사람의  anthroom입니다이것은 착한 사마리아인(Luke1030)과 방탕한 아들(Luke15:11)의 비유에서 첫번째 단어이다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건 이 남자가 두 아들의 아버지였고, 포도이나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고, 그 포도원에서 바로 일할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 일은 시즈메론이 필요했다."오늘은, 오늘은." 아마도 그것은 수확 시간이거나 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어느 쪽이든, 필요한 것은 다소 급한 것이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직계  자손(노예나 하인이 아님)으로 불린다. 비록 어린 아이들의 말을 할 때 흔히 사용되는 이 애더링의 용어로 언급되지만, 이 아들들은 이 일을 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고 성숙해야 한다어떤 명시되지 않은 이유로, 아버지는 다른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없었거나 이 일을 노예나 밀입국자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그는 내려가서 이 일을 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 중 한명이 필요했다.

이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직접적인 사실을 통해 일상적으로 전달됩니다그러한 경우에, 갈리레아 사회는 아들들이 그날 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들의 사랑하는, 어쩌면 나이 든 아버지를 그가 필요로 할 때 도와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이 이야기는 " 듣는 사람은 복종하지 않은 아들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이 세상의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를 공경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15]한 아들은 결국 이렇게 하고, 다른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좋고 좋지만, 예수가 대제사장들과 도시의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 관계에 대한 문화적 해설을 하지 않았다는 맥락에서 보면 분명하다그는 예루살렘의 최고 권위자들로부터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가 가정적인 가족 행동을 묘사할 때가 아니었다.

파라블레의 도덕적 원리

더넓은 윤리적 차원에서, 이 우화는 모든 아들과 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용한 국내의 지침을 준다모든 곳의 행복한 가정에서, 아이들이 결국에는 그들의 부모들이 합당하게 요구한 것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좋다;그리고 아이들이 그들이 하도록 요청 받은 것을 할 것이지만, 그 후에, 어떤 이유로든, 그들의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항상 문제이다그러나, 지금은 예수가 자식의 의무에 대한 객관적인 교훈을 줄 때가 아니다나는 "이것은 편견의 우화"로 사용된 확장된 격언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16]

게다가, 도덕적인 수준에서, 그 우화는 "결정을 내리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결코 늦은 때가 아니다"라는 일반적인 논점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17]사실, 이 비유는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원래 사용했거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견과 행동을 바꾸기에는 아직 너무 늦지 않았다고 설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태 21에 배치되었을 것입니다이러한 견해는 31절 끝에 예수가 그의 도전자들을 기소한  것과 관련해 여러 위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예수님은 그의 도전자들을 기소했다. 그들이 연설자들과 백작들은 세례 요한 침례 교도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도덕적 설득의 수준에서 이 비유는 이런 점에서 매우 유용합니다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많은 것들이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만약 그것이 예수에 의해 의도된 모든 것이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의 소망을 무시했다가 나중에는 마음을 바꾼 단 한명의 아들에 대한 더 간단한 이야기는 그 죄인들이 결국 존을 원망하고 따름으로써 옳은 일을 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충분하고 더 적절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리고 이중적인 이야기와 관련하여 더 이상 언급의 여지가 없었다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이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말한 것을 하지 않았을 때 혼란스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언제 그들이 요한을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는가?

이 파라블의 우화적 표시

알리고리즘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우화는 해석할 수 있는 다른 결과들을 제공한다포도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가장 좋아하고 흔한 상징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거나(이사야 5의 포도원 비유에서처럼)전 세계를 대표한다.(제노스가 제이콥 5의 큰 포도원이나 과수원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를 비유한 것처럼이 상징적인 요소 때문에, 이 비유는 종종 전국적으로 읽히는 것이 좋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두 민족 아들들에 대한 진술로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한 아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하겠다고 말한 반면, 다른 아들들(이스라엘 사람들)은 하지 않겠다고(이방 사람들이나 푸리칸족들과 백작들은)은 한다그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재고하고 갔다이러한 우화적 해석과 일치하게,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들 자신과 아버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이 작은 우화에서 보도록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나눈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순수하게 말씀 드립니다. 대중과 유대인들은 G의 왕국으로 들어갑니다당신 앞에서는 "(매튜 21:31)그리고 이 판결은 존을 거절한 다른 누군가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우화는 예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들이 그의 권위에 대해 그들에게 물었던 두가지 질문 중 어느 것에도 실질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집단적이거나 국가적인 우화는 매튜의 수사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유용하다사실, 논리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이 신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예수가 가르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하거나 말할 수 있는 권위적인 권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실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의 주장에 따르면 멜기세덱의 근원에 대한 예수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예수께서는 처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에게 말하지도 말아라."(21:27;강조하기)그래서 첫번째 것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대제사장들의 두가지 질문  예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니, 예수께서 그들의 두번째 질문에`누가 너에게 이 권한을 주었느냐?' 하고 대답하셨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셉 스미스는 독자들이 "정답을 도출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쳤다[20]이 경우에, 그 질문은 예수의 권위의 원천이었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바로 그 우화가 특히 대답하는 질문입니다[21]

그림으로 난간 읽기

앞서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저는 독자들이 정신적 또는 유추적 관점을 통해 이 우화를 가장 의미 있게 볼 수 있을 것을 제안합니다여기서는 이 텍스트를 강하게 읽을 수 있으며 개념적으로 모든 요소를 결합합니다실로, 가장 의미심장하게도, 이 우화는 권위의 문제를 신의 영역으로 가져간다여기에 관련된 것은 어떤 평범한 아버지도, 어떤 평범한 포도원도, 평범한 아들도 없다주의 깊게 읽는 독자는 예수의 대답에서 일반적으로 신으로부터 받은 권위의 성격과 구체적으로 예수의 권위에 대한 많은 고상한 교리들을 볼 수 있다다음 사항을 고려하십시오.

두 아들은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질문을 받았다결국 이 아버지가 단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22]왕 제임스 버전은  그의  단어를 이탤릭체로 삽입함으로써 보충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중의 둘이  그의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말입니다.(2131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가?"라고  읽는다.(강조를 덧붙였다.) 여기서 명확한 조항(토우)"소유자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을 때 비자유 소유 대명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23], 이는 KJV"그의  아버지"를 합법적인 번역으로 허용할 수 있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은 여기 매튜 7:21에서 발견된 그리스 단어와 관련된 o에 대한 단어들을 되풀이한다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PoyPoychologofmyfatherin천국에 계신 분)따라서"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이라는 질문에 명확한 기사를 사용하는 것은 최소한 비유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천국에 계신 예수와 그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면서 비유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24]그러므로 그 아들들은 그들이 섬길 신성한 주인의 명령을 받고, 그들에게 직접 복종하게 하였습니다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그 권위를 차지하지 않고, 아론과 같이 하나님을 부른다.(히브리 사람 5:4)

이 두 아들은 둘 다 아버지의 계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정중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적으로,"나이를  먹어라"(hyp-downhypage, Matthew21:28, 아버지가 2130분에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하이퍼  페이지라는 단어는 " 사라지다","철수","출발","앞으로 나아가라", 또는 단순히" 가라"등과 같은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의미는 항상 그것이 사용되는 문맥에 달려 있다여기에, 아버지의 집이 있으면, 아들들은 편안한 집을 떠나 들로 나가 일하고, 아버지의 집이 언덕에 있거나, 하늘에 있다면, 아들들은 거기에서 내려올 것이다어떤 경우에도, 작문의 접두사  hyp-(아래의 전치사  hypo에서)" 움직이는 것만큼 휴식의 상태"또는 흥미롭게도,"어떤 일이 행해지는 기관이나 영향의 아래에서, 복종이나 복종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어떤 느낌을 전달한다. [26]게다가, 가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두 아들은 언제, 어디서 근무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권한은 구체적이었습니다특정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시간이나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그들은 예스나 노로 응답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요구를 수정할 수는 없다.

권위 있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보낸 사람의 뜻에 따라야 한다신의 권능을 가진 사람들은 회개하거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기 위해서다.

권위와 법적 대리인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중요한 점 외에도, 이 우화는 예수와 세례 요한을 포함한 모든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신의 사제들을 붙잡기 위해 전화해서 준비한 천국으로 그것의 청취자들을 끌어 모은다그렇게 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하늘 위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곳에는 한 아버지가 정말로 매우 다른 두 아들을 두었고, 예수가 그의 임무와 권위를 아버지로부터 받은 곳이다사실, 아버지가 그의 첫째 아들에게 내리라는  명령, KJV처럼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그래서 이 대화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 대화가 위 어딘가에서 들려 왔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한다.

이러한 천상의 원시적인 함축들은 라틴어 Vulgate이나 KingJamesVersion의 영어나 다른 번역본보다 매튜의 그리스 원문에서 좀 더 분명하다그리스에서 가장 널리 지지된 문헌은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다."한 남자가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첫번째 남자가 말하기를,'오늘은 포도원에서 일하러 가거라.' 그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으나, 그는 자기가 가야 할 일에 마음을 맞추었다다른 쪽으로 가서 그도 같은 말을 했다그리고 그는 대답했다.'나는 주님!' 그리고 그는 가지 않았다." [27] 이러한 그리스어의 해석과 이 텍스트의 일반적인 영어 번역 간의 차이(명백하게 한줄 이상)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예수가 이 두 아들 중 첫번째로 자신을 캐스팅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분명하다대부분의 필사본에서는 31절 끝에 그를 " 1"라고 부른다[28]그가 첫번째 아들인 것처럼, 이 아들은 아버지가 접근한 첫번째 아들이었습니다몇몇 다른 초기 원고에서"마지막"이라고 불리는데, 분명히 화자의 마음 속에서 아들이 이야기에서 가장 뒤쪽에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마지막"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사야 44:6,48:12, 요한 계시록 1:17,22:13:"나는 첫번째이고, 나는 마지막이다." 어느 쪽이든, 순종적이고 순종적인 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다난 그냥 그를 "첫번째"라고 부를 거야.

실제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부탁에 처음엔 KJV가 안  거라고 해석하는 'Outhelo'라고 대답했다.(강조 추가그러나 thelo 미래 시제 동사가 아니다그것은 "나는  하지  않을 것이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다어로는 현재 시제 동사로서,"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또는"사실적으로 "나는(ou)[무엇을, 또는 할 것처럼]것이 아니다"를 의미한다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에서,"Iwillnot"는 라틴어  nolo처럼 "Idon'twill"을 의미할 수 있지만, 현대 독자들은 이 중요한 단어를 이렇게 듣지 않는다. [29]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Thelma-thelo와 어원이 같은 명사)은 이 우화에서 예수의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마태 복음의 중심 주제이며 바로 그 뒤에 있다(Matthew6:10,7:21,12:50,18:14,26:42 참조). 게데마네에서, 구원자가 화해하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할 때, 그는 말했다."나의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세요." [30]마태 복음 2129절에 나오는 이런 말들은 첫째 아들이 예수 자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더 높은 의미를 지닙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아래에서 일이 필요할 때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그리스도가 올 때는 시기가 중요했다하나님의 아들이 약속한 시간과 예언한 시간에 육신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많은 일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르몬의 책에 주어진 예언은 말할 것도 없고, 다니엘의 책에 주어진 예언이 이루어질 날과 해를 세고 있었다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와 그의 청중들에게 포도원은 이스라엘 가문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떠난다  이 동사는 30, Matthew21:29KJV에서 "go"라고 간단히 번역된다이 단어는, 아버지의 명령과 함께," 내려가",[31]는 예수가 아버지 앞에서 떠나는 겸손함이나 화신을 생각 나게 할지도 모릅니다이러한 말들은 예수께서 친히 떠나실 때나 떠나실 때에, 곧 죽음을 앞두고, 정신 병원으로 내려갈 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유대인들이 말했다. 그가 자살할 것인가그가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는 갈 수 없다.(요한  8:22)`내가 가는 것이 너는 가는 것이 좋겠다.(요한 복음  822실제로 예수께서는, 더 오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시고, 마태 21말에 있는 포도원과 악한 소작농들의 우화 직후에, 자신을 먼 나라에 있는 지주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는 자기의 종들을 보내서, 포도원을 짓고, 그들을 때리고 죽이고 죽이고,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그들은 그를 쫓아내고 그도 죽였다.(마태 복음 2133-41절 참조그 비유를 듣고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그들에게서 갈라졌다는 것과, 예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깨달았다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또한 예수가 자신을 기꺼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두 아들의 바로 직전의 우화에서 자신의 첫번째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요청한 일의 부담스러운 부담은 결국 순종적인 장남에게도 휴식을 취할 충분한 이유를 준 것 같다아마도 이 아들은 포도원에 지주 아버지가 보낸 두 하인을 이미 죽였거나 죽였을 나쁜 소작농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지금은 절박한 심정으로 아버지가 보낼 아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장남이 조금만 더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매튜 21:29의 이 시점에서, KJV" 하지만  그가  후회한 후"라고 읽었는데, 이것은 구세주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첫째 아들이 어떤 죄를 뉘우쳤다는 생각은 사실 작은 우화에 꼭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여기서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회개",[32],"회개"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동사가 아니라, 주로"회개하다"를 의미하지 않는 메타  멜로이다정교함과 그리스어에서는 드물게 예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해 슬픔을 느끼거나 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그리스어에서[33]는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목적이나 행동 방침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또는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지만, 더 큰 계획에서 어려운 부분을 맡는 일에 자신을 조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객관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볼 때, 아들은 그의 마음을 바꾸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기로 결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산술적으로 볼 때, 첫째  아들과는 달리,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의 선호를 조정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그들이 세례 요한을 "정의의 길로 인도하는 길"에서 했던 것처럼, 대중 주의자들과 유대인들 조차도 후회하지 않았다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리고 유추적으로, 첫번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려는 의지는 이해할 수 있고 적절한 반응이다. 단지 첫번째 아들이 자신의 벅찬 임무를 회피하고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그것과 맞추는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대부분의 원고들은 그를 " 다른  원고들",[34]이라고 부르는 반면 어떤 원고들은 그를 "두번째 원고들"이라고 부른다[35]이 아들은 '한 손에 '혹은 다른 한 손에 '라는 표현처럼, 첫번째 아들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었습니다그는 수적으로 두번째가 아니다. 그는 또한 상반되는 입장에 서 있다." 다른 마음"이 되거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그는 처음에는 열심이었으나, 결국에는 아버지를 섬기려 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다른 아들이 대답했을 때, 그는 실제로"나는 갑니다, 주인님,"라고 말하지 않았고,"나는 갑니다domin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Vulgate에 이었습니다하지만,"go"라는 단어는 사실 가장 강한 그리스 필사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KJV에 이탤릭체로 표시되어 있다NT에서 쓴 몇권의 원고를 제외하고는, 다른 아들은 "는 주님"이라고만 말합니다일반적인 용어로, 이것은 ", 선생님"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하지만 유추적인 모드에서,'eto'라는 대명사는 연관된 의미를 더한다둘째 아들에게, 그것은 모두 자존심에 관한 것처럼 보인다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그는  불려 온 사실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이러한 맥락에서, 이 단어'Eto'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뭐라고주님"기꺼이 가겠습니다  " 알았어, 내가 마지못해 갈까?"또는"나도  가야겠다!"? "나는 선택 받았어!" "내가 할게."영광을 원해로드."[37]이것들은 모두 가능합니다게다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두번째 그리고 유일한 대답(쿠리)은 약간 완고하게 그의 아버지를 ""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아들에게는 이 문제가 주로 개인적인 사랑이나 효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내재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38]이유가 무엇이든, 그 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그는 불려 갔지만 선발되지는 않았다.

첫째 아들이 예수와 동일시 된다면, 이 우화의 둘째 아들은 그의 형 루시퍼로 이해될 수 있다후기 성인들에게, 이것은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그의 임무와 권한을 받았던 하늘 위원회의 친숙한 광경을 생각하게 한다. [39]이 우화와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어떤 유사점들은 틀림없습니다그 때에 아버지가 물으셨다.`내가 누구를 보낼까?'(아브라함 3:27)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문에서, 루시퍼는 6개의 1인칭 대명사인 "여기  나를  보내 줘"(아브라함 3:27, 모세 4:1, 강조함),"나는 당신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할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것을 할 것입니다;나에게  당신의 명예를 줄 것입니다."(모세 4:1;강조함그러나 예수께서는`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를 보내 주십시오' 하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모세 42, 강조하기이 두가지 응답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무지함의 과정과 신의 부름에 복종하는 정의의 방식 사이의 전형적인 대조를 보여 준다루시퍼는 신의 명예, 영광, 권력, 권위를 찬탈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모세 4:3으로 몰락했고, 예수가 유태인 지도자들을 풍자한 것처럼, 루시퍼는 가지 않았습니다그가 출전을 허락 받지 못했든, 스스로 출마를 포기했든, 결과는 같았다어느 경우든, 아버지가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임무의 범위 내에서 기꺼이 대리인이 되고 그의 의지를 수행한다면, 어느 한쪽을 보내는 것에 분명히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세계의 기초에서 영원한 계획이 수립된 하늘 위원회에 대한 전통적인 지식이 있는지에 상관 없이[40], 태고의 사건은 구원자와 아마도 그의 제자들과 그의 동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잘 알려 져 있었을 것이다사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힘과 권위가 예수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를 권리를 얻은 원조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예수의 권위는 처음부터 다시 추적할 수 있었다. 그의 판단은 단지 자신을 보내 주신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이었다예수께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낸 그의 뜻이다.'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성전 안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의 대결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계신다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요한 14:10)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말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요한 17:8)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성 주간이 시작되는 그 날 이후, 그들이 베서니로 돌아갔을 때, 그들에게 그의 권위의 근원을 상기시키고, 그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두 아들에 대한 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따로 데려가셨다면 그것은 성격에 어긋나거나 계절에 어긋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이 비유는`누가 너에게 이 권위를 주었느냐?' 하는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하늘 위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경전의 많은 부분에 스며들어 있는 이분법적인 유형학의 영향을 구체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41]그들은 이 경우에 듣는 귀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인자하고 순종하는 인자와 비유 속 둘째 아들과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를 거절하였다자신들의 이익을 지나치게 생각하면서, 그들은 이 영원한 교훈을 배우지 못 했다. 사람들이 옳지 못한 지배를 추구할 때, 하늘은 물러가고,"그 사람의 권위에 동의한다."(D&C121:37) 예수의 권위에 도전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알았다언제나 그렇듯이 진정한 권위는 아버지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훈련되고 아버지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변함 없이 행사되는 겸손, 오랜 인내, 친절,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다.

메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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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버트 L. 밀레와 제임스 C입니다크리스텐슨파라블스 그리고 다른 가르치는  이야기들, 7.concurring, ArlandJ. Hultgren, HermeneuticdeGleichnisseJesu:예수의 파라블스의 해석:그들의 신학적 중요성에 목소리를 내는 것MethodischeNeuansaetzeZumVerstehenUrchristlicherParabeltexte, ed. 루벤 짐머맨(투빙겐: MohrSiebeck, 2011), 63940).

[2]일반적으로 RubenZimmermannGabiKern, 명령어HermeneutikdeGleichnisseJesu(ebingen: MohrSiebeck, 2008). 스테판 노르 가드 스벤드슨, 알레르기  전이히브리인의 편지에 나타난 필리핀의 헤르메네우틱스의 평가(Tbingen: MohrSiebeck, 2009).

W. 웰치," 선한 사마리아인:구원 계획의 유형과 그림자", BYU 38,2:50-115,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 20072 40-47,20072 26-33.

[4]ZimmermanKern, HermeneutikdeGleichnisseJesu, 482~93KurtErlemann,"Allegories, Allegorese, Allegorese, Allegorisierung."

[5]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표명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매튜 21세를 계기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그러한 이유들은 논란을 피하고,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특정 폭로의 신성함을 보호하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완화하고, 그의 청취자들이 그들의 의미를 내재화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의 메시지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을 포함한다.

[6]조셉 스미스, 183512225-30,"래터 데이 세인스 메신저와 애보케이트 교회 장로 여러분께 "

[7]특히 C. H. 도드킹덤의 파라블스(뉴욕:찰스 스크립너의 아들들, 1961), 45.

[8]314분이요.

[9]Matthew12:3941에서처럼.

[10]예를 들어, 스토아 문학에서 우화의 역할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PhiloSvendsen, AllegoryTransformed, 952Alexandrian전임자들의 우화 사용을 참조하라.

[11] 이러한 생각은 더 좋은 네가지 종자들이나 토라를 공부하러 가는 네가지 학습자들에게서 유사합니다515분에 브래드 H. 영에서 토론된 "TheParables: 유대인의 전통과 기독교적 해석(Peabody, MA:Hendrickson, 1998), 265(빨리 배움, 빨리 잊기, 빨리 배우기, 천천히 잊기, 천천히 배우기, 빨리 잊기, 빨리 배우기, 천천히 잊기).

(12)앤드류 F. 에하트와 린든 W. 쿡은조셉  스미스의 말, 161.

[13] 논 평자들은 종종 이 비유가 갈리레아 마을의 원래 맥락에서 벗어나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하지만 이 비유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 사용되는 다양한 형태(:tin, what?또는  tide, butwhat?)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입문 질문이다또는 예를 들어 tisoidokei 같은 토론을 밀어붙이기 위해, JohnBurnet, ed.PlatonisOpera(옥스퍼드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67)

[14]이 아이들의 남성의 성별은 남성 형용사인 "첫번째"" 다른 "에서 분명해 진다.

[15]신약 성서의 아동-부모 관계와 그 환경(Peabody, MA:Hendrickson, 2003)126번을 참조하십시오.

[16]찰스 H. 탤버트, 매튜(그랜드 래피즈, MI:베이커, 2010), 251.

[17] 어린파라블스, 137.

[18]예를 들어, JoachimJeremias, theParablesofJesus, 1972)(뉴욕:CharlesScribner의 아들들, 1972), 80~81.

[19]`포도원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다.(이사야 5:1-7, 매튜 21:33-43)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아틀랜드 J. Hultgren, theParablesofChrothor:ACommentary(그랜드 래피즈, MI:Edmans, 2000), 221

[20]위의 참고 6을 참조하십시오.

[21]Matthew21:23과 이 우화를 해석하기 위한 25의 두가지 질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WesleyG를 참조하십시오옴 스테드매튜의 파라블스 3부작: Matthew21:2822:14(Cambridge캠브리지 대학 출판부, 2003), 99,108).

[22]Hultgren,"예수의 파라블에 대한 해석", 예수의 파라블스에서 637:"아버지가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도 하다.

[23]HerbertWeirSmyth, 그리스어 문법(Cambridge, MA:HarvardUniversityPress, 1963), 섹션 1121.

[24]소유욕이 강한 당신의 주장에 대해서는 문법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아들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만약 자발적인 아들이 이 비유에서 예수를 대표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천국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1850, 헨리 조지 리델, 로버트 스콧, 헨리 스튜어트 존스그리스-영 렉시콘(옥스포드:클라렌던, 1968).

[26]리델, 스콧, 존스, 그리스-영 렉시콘, 1875.

[27]저는 '당신의 마음, , 남자, 확장해야 합니다,'BYUStudies50, no.3(2011):71에서 이 글을 처음으로 제안했습니다.

(28)대부분의 원고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가서 결국 아들을 "첫번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이 책은 신약 성서의 초기 원고에서 가장 널리 지지를 받고 있고, 나는 여기서 그것을 따른다텍스트 변형에 대한 논의는 Olmstead, Matther'sTrilogyofParables, 16776BruceM이 보고한 사설을 참조하라그리스 신약 성서 해설사 메츠거유나이티드 성경 협회, 1971), 55-56;또한"Hultgren, 예수의  파라블스, 218-19"를 참조하시오. Metzger는 이 책을 "아마도 원본일 것"이라고 부른다.

작은 소수의 원고에서, 이 우화의 또 다른 버전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원하는 아들에게 먼저 접근하게 하지만, 결국 그는 "첫번째"가 아니라"마지막"혹은"가장 작은 "이라고 불립니다이 본문의 기이함에 대한 한가지 가능한 설명은 궁극적으로 의지가 있는 아들이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 이야기의 가장 뒤쪽에 있다는 것이다아니면 의지가 있는 아들이 첫번째와 마지막 둘 다로 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천국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자신을 낮춘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아니면 이 책은 단순히"터무니 없는 "것일 수도 있다피츠 거, 55.

다른 원고들은 두 아들의 등장 순서를 거꾸로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처음에는 그렇다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지 않는 아들에게 먼저 물어보고, 이 글들에서 아버지의 유언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에 따라"후자""마지막  질문"이다. (tos). 그것은 시간 순으로 먼저 물어봤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우화에서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였고, 반면에 세금 징수원들과 매춘부들은 2위를 요구 받은 후 2위로 밀려났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 비유의 형태는 첫번째 것보다 더 열등하다피츠 거, 56게다가, 어느 그룹이 실제로 세례 요한에 의해 처음 요청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9]현대 영어 사용법 사전, H.W.Fowler) 1926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729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는 1인칭 미래 의도의 정확한 해석이 되었을 것이고, 반면"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누군가가 힘을 가지고 있는 한"욕망을 표현했을 것이다.

[30]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마태의 파라블스 트릴로지 100-105,108을 참조하십시오.

[31]첨부된 주석 2326을 참조하십시오.

(32)요하네스 P입니다. LouwEugeneA입니다니다, 명령들, 신약  성서의 그리스-영어 사전. 2.(뉴욕:유나이티드 성경 소시티, 1988), 41.52번 도메인. 510페이지)

[33]LoTestamentNida, 신약 성서의 그리스-영어 사전, 도메인 25.270(페이지 318);31.59(페이지 373). 9월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으려고  말이죠. 하지만 여기 KJV'회개'라고 써 있습니다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신 것이 아니라(사무엘 15:35), 오히려 사울은  슬픔이나  후회를 하고 있었다시편 106:45, 예레미야 20:16, 이즈 키엘 14:22를 참조하십시오스가랴의 11:5에서,"회개""슬픔"과 유사하다시편 110:4에 있는 멜기세덱의 서약과 서약에 대해, 주께서는 그가 "그의  마음을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훨씬 덜 자주, 이 단어는 회개를 의미한다.

[34]א*CDKWXΔV를 포함한다.

[35]H2BCLZ0f1을 포함한다.

[36]D에서 둘째 아들은 '나 주님, 나는 내려갑니다'라고 말하고, 때때로 다른 아들들은 '나는 내려갑니다'에서 동사를 공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암시적으로 보이지만, 추가된 전자를 제외하고는 '자기'라는 대명사를 불필요하게 만듭니다. 이 대명사는 여전히 제 요점과 일치합니다.

[37]모세를 4:1과 비교하여 보아라.`내게 그대의 영광을 주십시오.' 사탄이 먼저 하나님께 접근한 것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태초부터 선택되어 온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아버지, 아버지의 의지가 이루어지고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 될 것입니다."(모세 4:2)

[38]"주님, 주님[쿠리, 쿠리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매튜 721)

[39]일반적으로 JeffreyM.Bradshaw와 로난 제임스 헤드"Mormonism의 사탄과 생명의 나무"요소를 참조하십시오몰몬 철학 신학 학회 저널  4,2(2008):5-7,18-19( 적절한 권위의 문제).

[40]그들은 122:19-23, 시편 82:1,110:3, 이사야 9:5 LX, 예레미야 23:18, 다니엘 7:9-14, 아모스 3:7,1에녹 12:34를 포함한 여러 구절에서 권위 있는 호출과 하늘 위원회의 패턴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W를 만나 보세요웰치몰몬의 책에  나오는 예언자의 부름  번째 네피는 박사 학위 재단입니다몬테 S. 니맨과 찰스 D. 테이트 2(Provo, UT:종교 연구 센터, 1988), 41,46;HughW.Nibley,"천국의 보물우주의 조직에 대한 초기 기독교적 통찰력"대화  8,3-4(1973), 76-98, 휴 니블리 수집 작품(1:171페이지 참조)에 다시 게재, 일반적으로 E를 참조하라테오도어 뮬런 주니어카나니트의 신 위원회 및 초기 히브리 문학(Chico, CA:Scientists, 1980). 223분에, 피터의 글은 펜테코스트의 날에 그의 청중들이 예수를 그의 운명으로 보낸 신의 원시 위원회와 그의  운명에 대한 사전 지식에 익숙하다고 가정한다.

[41]예를 들어, 케인은 "주님으로부터 온 사람"으로 시작했지만(창세기 4:1)아벨을 죽이고는 던져졌다에벨은 또한 펠렉과 욕탕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시대에는 지구는 분열되어 있었다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육신을 따라 태어난 노예의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인에게서 태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영원한 약속을 통해 태어났으며, 이것은 바울이 우화로 본것이다이삭에게는 두 아들 야곱과 에서가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과 다투어 영원한 축복을 받고, 다른 하나는 맏아들의 권리를 팔았다요셉에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모세에게는 두 아들(출애굽기 18:3)이 있는데, 그 중 한 아들은 게르솜(게르소m, 게르, 이방인)이고, 다른   아들은 엘리, 나의 하나님아므르, 도와 주십시오. Lehi에게, 이분법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중재자, 혹은 악마의 힘 아래 감금되고 영원한 죽음을 통해 자유와 영원한 삶 사이의 선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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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Sunday’s Gospel was the parable of the laborers in the vineyard inMatthew 20:1-16. For today, we skip the rest of the twentieth chapter ofMatthew, and the first 27 verses of chapter 21. And we never come back tothis section completely. We get part of it on the Feast of St. James on July25 every year when the Gospel reading is Matthew 20:20-28.And so we have to backtrack a little and fill in some blanks in order tomake sense of what Jesus is saying in this parable of the two sons. Inchapters 19 and 20 Jesus is making his way toward Jerusalem, stopping inplaces like Galilee and the region of Judah beyond the Jordan, teaching inparables along the way. At the beginning of chapter 21, Jesus makes whathas become known as his “triumphal entry into Jerusalem” that we celebrateon Palm Sunday.Jesus has now entered Jerusalem for the last time. The time for him togo to the cross is only days away at this point. In Matthew 21 Jesus chasesaway the vendors and money changers from the Temple, curses the fig treeand then goes back and teaches in the temple. It’s at this point that the chiefpriests and the elders come to him wanting to know by what authority he isdoing all these things. Before he will answer their question, he asks them ifthe baptism of John was of heavenly or earthly origin. He’s cornered them.If they answer heavenly, they know Jesus will want to know why they didn’tbelieve John then. On the other hand, if they say “earthly” they’ll have toanswer to the crowds, who take John to be a prophet.

지난 일요일 복음은 마태 복음 20 : 1-16에있는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마태 복음의 나머지 20 장과 21 장의 첫 27 절을 건너 뜁니다. 그리고 우리는이 부분으로 다시 돌아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년 7 25 일 복음 독서가 마태 복음 20 : 20-28 일 때 성 제임스 축제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역 추적을하고 공백을 채워야합니다

 

두 아들의 이 비유에서. 19 장과 제 20 장에서는 예수 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갈릴리와 유다 지방과 같은 곳을 요르단 강 너머로 멈춰서 길을 따라 헤아릴 수없는 사람들을 가르치 셨습니다. 21 장 초반에 예수께서는 우리가 종려 주일을 기념하는예루살렘으로의 승리로 알려진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갈 시간은이 시점에서 며칠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태 복음 21 장에서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과 돈을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 내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후 돌아가 성전에서 가르치 십니다.

 

이 시점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가이 모든 일을 어떤 권위로 알고 싶어하는지 그에게옵니다. 그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땅에서 온 것인지 묻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응답하면 예수가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세속적이라고 말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삼는 군중들에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So they claimignorance. And in response, Jesus denies answering their question.So this is the context in which Jesus tells this parable of the two sons.His purpose is to expose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faithlessness.Now for years and years I never understood this parable. I thought thatwhen Jesus tells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that the tax collectors andprostitutes are going into the kingdom of heaven ahead of them, he meantthat their answer was wrong. They weren’t wrong the first son did the willof his father. And that’s what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said. It’s what Ialways thought. It’s obvious. The second son didn’t do anything. Jesus’admonition of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points out to them, or at least isintended to point out to them, the irony of their position. They are able todiscern which of the two sons did the will of the father, but they cannot seehow they are just like the second son. John came preaching repentance. The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shunned his message at first. Then theyfinally came around and accepted it.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werevery welcoming to John and his message, but ended up ignoring it.Especially reprehensible in Jesus’ estimation is the fact that even after thechief priests and elders saw how the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had achange of heart and eventually came to repentance, they still failed to cometo repentance themselves.Jesus meant for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to see that in the parablethe father represents God, and the first son represents those who may have atfirst rejected the Gospel, but later came to repentance, and that the secondson, who did nothing, represents them. And by extension, we are to see in this parable which of the two sonswe are. The question for us is whether we are doing the will of God theFather.One of the things I find most intriguing about the Gospel is that manytimes, one short passage conveys either the entire Gospel message, or atleast one essential point of it. John 3:16, for example, captures in onesentence the fullness of the Gospel message. In the parable of the two sons,we are addressing the subjects of doing the will of God and entering intoGod’s kingdom.

 

그래서 그들은 무지를 주장합니다. 예수께서는 두 아들에 대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상황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세금 징수 원과 매춘 여성이 하늘 나라로 가고 있다고 말씀 하셨을 때 그들의 대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첫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말한 것입니다. Ialways가 생각한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무것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예수의 훈계는 그들에게 지적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입장의 아이러니를 지적하려고합니다. 그들은 두 아들 중 어느 쪽이 아버지의 뜻을 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번째 아들과 같은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전파했습니다. 세금 징수 원과 매춘부는 처음에 그의 메시지를 기각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마침내 와서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요한과 그의 메시지를 매우 반기고 있었지만 결국 그 소식을 무시했습니다. 특히 예수의 추정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세금 징수 원과 매춘부들이 어떻게 마음의 변화를 보았으며 결국에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비유에서 아버지가 하느님을 나타내고, 첫 번째 아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거절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회개하게 된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회개하지 않으 셨습니다. 아무 것도하지 않은 둘째 아들이 그들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유에서 두 아들 중 어느 아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복음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여러 번, 한 번의 짧은 구절이 전체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적어도 하나의 핵심 요점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 3:16은 온전한 복음 메시지를 담아냅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And actually those two condense into one. Doing the willof God amounts to being in God’s kingdom.This isn’t the first time Jesus has brought this up. In chapter 7 he says“Not every one who says 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heaven; but he that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In fact,this saying fits neatly with the parable of the two sons. The first son wasrebellious at first, but then did the will of his father. The second son, wasagreeable and polite, calling his father “Sir”. Being nice and using theproper, formal titles, but not repenting, is not how one enters the kingdom ofheaven.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is.Now this might raise some tensions for us. You might hear preachersor theologians talk about how the Christian faith is not a set of rules that wemust follow. They might say that we’re not on a performance basis here inthis life. We’re incapable of fulfilling the Law, which is why Jesus came inthe first place. He came to fulfill the Law for us. He was the only one who could. We can’t follow a list of do’s and don’ts and then expect to presentthis performance to God as proof of our fitness for heaven.And yet Jesus returns to the topic of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Inthat verse from chapter 7, it seems clear that our entrance into the kingdomof Heaven is dependent upon our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What is thewill of the Father? How do we know if we’re doing it? How can we do it?The subject of the divine will is enormous. We can get veryphilosophical about it: Is everything that happens the will of God? Are theredistinctions within the will of God? You may hear of a priest or a theologianspeak of the “permissive will of God” or the “perfect will of God”.To put it succinctly, for our purposes here today, for our everyday lives,the will of God means God’s purposes and designs for all of creation andespecially for humanity. God meant for creation to be at least several things.He meant for creation to reflect His glory. And God meant for humanity toknow Him, and to enjoy fellowship with Him for ever. This is what Godwills.Now, all sorts of things happen every day that are not in accord withthis will of God’s.

 

실제로 이 두 개는 하나로 압축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께서 이것을 처음으로 일으키 신 것은 아닙니다. 7 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주님, 주님, 저에게 말하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사실,이 말은 두 아들의 비유에 잘 맞습니다. 첫 아들은 처음에는 반항적 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행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은 아버지를선생이라고 부르며 예의 바르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습니다. 친절하고 합당하고 공식적인 제목을 사용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이제는 우리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설교 자나 신학자들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우리가 따라야 할 규칙이 아닌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생에서 성과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이행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처음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법을 성취하기 위해왔다. 그는 유일하게 할 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해야 할 일과하지 말아야 할 일을 따를 수 없으며 하늘에 대한 적합성을 증명하기 위해이 공연을 하나님 께 바쳐야하지만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7 장의 그 구절에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신성한 의지의 주제는 엄청납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매우 철학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 구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대 한 뜻또는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대한 제사장이나 신학자의 말을들을 수 있습니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목적을 의미합니다. 모든 창조물, 특히 인류를 위한 디자인. 하나님은 창조가 최소한 몇 가지가 되어야하며 창조가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류가 그분을 알고 영원히 그분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모든 종류의 일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Things happen that reflect anything but the glory of God.Far too many people do not know God and do not enjoy fellowship withhim.When we are “doing” the will of God, our whole lives are ordered tothe ends of reflecting His glory in the world and enjoying fellowship withHim. The first step we can take in so ordering our lives is to come torepentance. This is John was talking about. Some people seemed like they weren’t going to listen, but then they did. Others said they would listen, butnever did. This is what Jesus is talking about.There are some people today who have an image of Jesus that justdoesn’t fit with how he is portrayed in the Gospel of Matthew, especially inthese scenes in chapter 21. They see Jesus as more of a Haight-Ashburyflower child type who went around in his robes and his long hair and beard,ate granola and said things like “all you need is love and peace, brothers andsisters”.It’s as if they haven’t read the Gospel of Matthew. Jesus says thingslike, “don’t think I’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ve come not tobring peace, but a sword.” Jesus was very confrontational. We skipped overthe scene where he entered the temple and threw out the money changersand the vendors. He was angry. And in this parable he is directlyconfronting the religious leadership. He does not mince words. He’s deadserious. He has to be.But notice that Jesus does confront these people who have not come torepentance. That’s mercy. He could have let them go their way. But God’swill is that none should perish.Jesus gets tough here. Few people would want to be compared to taxcollectors and prostitutes, least of all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of thetemple. Even worse, no one wants to be told that the dregs of society, thelowest of the low are ahead of them in entering the kingdom of heaven.Isn’t the kingdom of heaven for the good people, the people who are polite and decent, agreeable and courteous? How could tax collectors andprostitutes be getting in ahead of the elite, favored class?God’s will is conditioned by His great mercy so that your past is nobarrier to coming to repentance. Yours self is. The chief priests and theelders belong to that class of people who for whatever reason, most likelypride, will not repent. So Jesus comes to them.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아무 것도 반영하지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과의 친교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할 때, 우리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질서있게 할 수있는 첫 단계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말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듣겠다 고 말했지만 결코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예수의 말을 듣고있는 사람들 중에는 마태 복음에 묘사 된 방식, 특히 21 장에 나오는 장면에서 예수의 형상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의 가운과 그의 긴 머리와 수염으로 돌아 다니는 Ashburyflower 어린이 유형은 그라 놀라를 먹으며당신이 필요한 것은 사랑과 평화, 형제 자매와 같은 말을했습니다. 마치 그들이 마태 복음을 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내가 땅에 평화를 가져 오려고 생각하지 말고 평화를 빕니다가 아니라 칼로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매우 대립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사원에 들어간 장면을 건너 뛰고 돈 교환 자와 벤더를 버렸습니다. 그는 화가 났었 다. 그리고이 비유에서 그는 종교 지도자와 직접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참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들과 대면 하심을 주목하십시오. 자비입니다. 그는 그들의 길을 가게 놔둘 수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멸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금 징수 원과 매춘부, 최소한 모든 대제사장과 장로와 비교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 나쁜 것은, 아무도 가장 낮은 사회의 찌꺼기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앞서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의하고 정중 한? 세금 징수 원과 매춘 여성이 어떻게 엘리트, 호의적 인 수업보다 앞서 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큰 자비에 의해 조절되어 과거가 회개에 방해가되지 않도록합니다. 당신의 자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 학자들은 어떤 이유로 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하지 않을 그 계층의 사람들에 속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오 십니다.

 

Maybe if they don’t like theidea of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going on ahead of them, they’ll rethinkthis.We know we’re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when we come to Him andconfess our sins and repent of them. We are able to do this because Jesuscomes to us and calls us to it. Jesus exerts some kind of spiritual gravity onus. When he said in John’s Gospel that when he would be lifted up from theearth he would draw all people to himself, this is what he meant. He drawsus to Himself. He’s determined to bring us to repentance so that we mayenter the Kingdom of heaven. That is the will of the Father. Amen.

 

그들이 세금 징수 원과 매춘부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께 나아갈 때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예수 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종류의 영적 중력을 행사하십니다. 요한 복음에서 그가 세상에서 들려 질 때 모든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들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끌린다. 그분은 우리가 천국을 열망 할 수 있도록 우리를 회개 시키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