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교회개척사역 -최동규(서울신학대학교 교수)
바울의 교회개척사역
최동규(서울신학대학교 교수)
바울의 교회개척사역은 사도행전 13:2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
로 세우라”는 문장에 언급된 ‘일’(ergon)에 근거를 두고 있다. 누가는 바울과 그의 팀이 첫 선
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이란 표현을 통해 이 단어
를 다시 사용한다(행 14:26). 바울과 바나바는 무슨 ‘일’을 위해 따로 세움을 받았을까? 좁은
의미에서 ‘일’은 교회개척사역과 관련된 선교 활동을 뜻한다. 롤랜드 앨런(Roland Allen)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성(聖) 바울은 단순히 사람들을 개별적
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선교 설교자(a missionary preacher)로 가지 않았다. 그는 전국 곳곳
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교회들을 세웠다.”1)
1. 지역적 개관
바울의 교회개척사역은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해 수행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바울과
그의 팀은 지리적으로 세 개의 지방 곧 갈라디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아시아를 여행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왜곡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바울의 의도는 지역과 도시에 따라 다양한 사역으로 나타났다. 그는 갈라디아에서 교회개척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는 다가오는 유럽 선교를 위한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또한 아시아에서 교회개척사역을 수행할 때 그는 에베소에서 가
르치는 사역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전략적 요충지들에 집중하였다.
1) 구브로 섬에서의 사역
구브로(Cyprus)는 바울이 첫 번째 선교지로 선택한 곳이다. 이 섬이 바나바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구성된 팀의 선교지 선택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지중해
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동쪽에는 살라미 항구가 있었고(행 13:5), 서쪽에는 바보 항구가 있
었다(행 13:6). 구브로에는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유대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또한 스
데반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팔레스타인에 있던 유대인-그리스도인들
중 일부가 구브로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11:19-20). 따라서 이 섬에 있던 유대인
들은 이들에 의해 복음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울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직 교회가 없었으며 이방인들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이 섬에서 행한 인상적인 선교 사역은 이후에 그가 펼칠 사
역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 선교 사역은 바울이 바예수라는 이름의 마술사와 대면
하여 그를 제압한 사건과 서기오 바울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통해 바울 선교의 첫
승리가 확인된 극적인 사건(행 13:4-12)을 말한다.
살라미에서 바울 팀은 유대인 회당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행 13:5). 누가
1)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81.
는 바울이 구브로에서 시작한 첫 사역이 유대인 회당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고한다. 이 보고는
장차 전개될 바울 사역의 징조를 암시한다. 바울은 교회개척을 위한 선교 여행에서 회당을 사
역의 출발지로 선택하였다.2) 사도행전 13:6에 나오는 “온”(holēn)이라는 단어를 고려할 때 바
울 팀이 섬 전체를 여행하지 않고 단지 섬의 유력한 유대인 집단들을 방문하고 회당에서 말씀
을 선포했음을 나타낸다.3) 바울의 일행은 첫 선교지에서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사역하였지
만 누가는 그들이 이곳에서 회심자를 얻었다거나 교회가 세워졌다는 보고를 전혀 하지 않는
다.
2) 갈라디아 지역에서의 교회개척사역
갈라디아는 소아시아의 중앙에 있는 지역으로 앞에서 언급한 구브로와 함께 바울이 첫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주로 사역한 곳이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지역이었다. 하
지만 이 지역은 바울 자신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낯설지 않은 곳이
었다. 아마도 지역에 대한 친숙성이 바울이 이 지역을 선교지로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이곳
에서의 성공적인 교회개척사역은 그에게 더 먼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제공
했다.
(1)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사역
군사전략도시 중 하나인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위가 많고 접근이 쉽지 않은 산악 지역이었
다. 바울 팀은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행
13:14).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기원전 210년 셀레우코스 왕조 치세에서 이 지역으
로 약 2,000명의 유대인 가정이 이민을 갔다.4) 이 점을 고려할 때 아마도 일부 유대인들이
바울 시대에도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루어진 바울 사역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다른 곳에서 자주 했던
것처럼 자신을 기적을 행하는 자로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주된 사역 방식은
메시지에 대한 강조 곧 말씀의 사역이었다. “누가는 이제 바울의 설교 중 하나에 관한 첫 번
째 전체 요약을 제공한다. 일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그의 설교는 본질적
으로 유대인 청중을 향한 연설이었다.”5) 바울과 바나바는 많은 새로운 신자들을 얻었지만 박
해로 추방되었다. 바울이 처음으로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한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건은 “기독교 교회들이 곧 회당의 회중들과 구별되어야 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6)
(2) 이고니온에서의 사역
이고니온−오늘날의 코냐(Konya)−은 갈라디아에 속한 루가오니아(Lycaonia, 행 14:6) 지
2) 행 13:5, 14; 14:1; 17:1-2, 10, 17; 18:4, 19; 19:8.
3) William M. Ramsay, St. Paul the Traveller and the Roman Citizen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62), 73.
4) Flavius Josephus, “The Antiquities of the Jews,” in The Works of Josephus, William
Whiston, trans.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1987), 308-334. [원본은 기원후 약
100년에 쓰임]
5)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The Spirit, the Church & the Worl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0), 222.
6) Paul McKechnie, The First Christian Centuries, 41.
방의 수도이며 에베소와 시리아를 잇는 중요한 상업도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농업과 상업의 중
심지로 발전하였다. 박해는 바울 팀의 선교 사역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아시아의
더 넓은 중앙 지역으로, 특히 중요한 도시인 ‘이고니온’으로 확대되었다.”7) 바울의 팀은 1차
선교 여행과 2차 선교 여행 중에 이 도시를 방문하였다(행 13:51-14:1; 15:36-16:1).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행
14:1).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의 관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다지 어색
하지 않았을 것이다.8) 그들의 전도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자극하여 두 사도를 핍박하였다.
사도행전 14:2-3은 박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을 보여준다. 바울과 바나바는 박해 이면에 영적
도전이 숨어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박해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더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성령께서 그들의 사역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 많은 표적과 기사가 함께 나타났다.
(3) 루스드라에서의 사역
루스드라는 루가오니아의 작은 성읍들 중 하나로 넓게는 갈라디아 지방에 속해 있었다. 기
원전 3000년 초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 도시는 헬레니즘 시대에 여전히 전원적인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로마의 군용도로가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되었다.
바울과 그의 팀이 앞서 들렀던 두 사역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는 관습대로 안식
일에 회당에 들어갔지만 루스드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루스드라에
는 회당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는데(행
14:9), 회당에서 설교하지 않았다면 옥외 거리에서 설교했을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복음을 전
한 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장애인을 고쳐주었다(행 14:8-10). 이 사건은 성령의 역사
로 인한 이적(異蹟)이 전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적 사건과
결합된 복음 선포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루스드라의 사례는 이적을 하나님
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지 않을 때 얼마든지 왜곡된 믿음으로 발전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기도 한다. 루스드라에서 주민들은 바울을 제우스로, 바나바를 헤르메스로 숭배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행 17장)를 제외하면,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성령의 역사
로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신체 장애인을 치유한 뒤에 행한 설교(행 14:15-17)는 사도행
전에 나오는 바울의 다른 설교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 설교를 듣는 대상이 이교도들이었
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적합한 주제와 전개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설교에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나오지 않는 대신에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에 대한 강조가 나온다. 또한 객관적인 복음을 선포하기보다는 매우 상황적인 주제를 사용하
여 설득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9) 그러나 이런 바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디옥과 이고니온
에서 온 몇몇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였고, 이로 인
해 바울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돌에 맞아 거의 죽음에 이를 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
다.
7) Howard C. Kee, To Every Nation under Heaven: the Acts of the Apostles (Harrisburg,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7), 170.
8) 이 구절에 대해서 설명할 때 키(H. C. Kee)는 이런 관습이 바울의 “전형적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석한다. Howard C. Kee, To Every Nation under Heaven, 171.
9) 요하네스 니센, 『신약성경과 선교』, 101-102.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으로 이 도시를 다시 방문했을 때 나중에 충실한 제자가 된 디모
데를 만났다(행 16:1-3). 디모데가 루스드라에서 합류하고 의사 누가가 드로아에서 합류하면
서 바울의 팀 구성은 다문화적 특성을 뚜렷하게 띠게 되었으며, 이런 특성은 이방인 선교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4) 더베에서의 사역
소아시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더베는 루가오니아 지역에 있고 루스드라에서 약 60마일
떨어져 있는 도시였다. 바울이 더베에서 행한 선교 활동은 그의 첫 선교 여행 중에 가장 성공
적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어떤 저항도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행 14:21). 더베의 신자들은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
들이지만, 누가는 그들을 ‘제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도행전 14:21 하반절과 22절에서 누가
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의 신자들도 제자라고 부른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신
자가 된다는 것은 제자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며, 완전화(perfecting)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화(discipling)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도널드 맥가브란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
다.10)
특히 더베에서의 사역 이후에 처음 출발지 안디옥으로 돌아가면서 이전에 복음을 전했던 지
역들을 다시 방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누가의 보고는 바울의 사역과 교회개척의 연관성에 관
하여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
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0-23)
① 무엇보다도 바울의 사역은 당시에 기독교가 생소한 종교이고 이미 각 도시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의 반대와 핍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회심
자들을 얻었다. ② 바울의 사역 팀은 이 회심자들을 중심으로 각 도시마다 교회를 세웠다. 위
의 본문 중 23절에 나오는 “각 교회”라는 표현은 각 도시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분명하게 암
시하고 있다. ③ 바울은 각 도시에 교회를 세울 때 비록 그 교회가 규모 면에서 작은 공동체
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를 세워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나가게 했다. 23절에 나오는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라는 구절이 이 사실을 입증해 준
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바울과 그의 팀이 각 도시에서 교회가 설립되는 과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복음이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는 과정
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기록물이다. 이 책의 초점은 교회개척사역에 있지 않다. 따라서 바울
과 그의 팀이 안디옥을 떠나 각 도시에서 사역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 주고 있는 누가의 각 본
문에는 교회를 설립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본문을 통해서
바울과 그의 팀이 각 도시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교회를 설립했음을 얼마든
10) 도널드 맥가브란, 『교회성장이해』, 제3판, 최동규 외 3인 공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214-217.
지 유추할 수 있다.
(5) 버가에서의 사역
버가는 바울 팀이 1차 선교 여행 초기에 사역했던 곳이며(행 13:13),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 번−마지막으로−복음을 전했던 도시다(행 14:25). 오늘날의 터키 무르타나
(Murtana) 근처에 위치해 있었던 이 도시는 밤빌리아(남부 소아시아) 지방의 남부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버가는 이전에 바울 팀이 소아시아의 내지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이를
반대한 요한 마가가 팀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적이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행 13:13).
누가는 사도들이 앗달리아로 내려가기 전에 버가에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보고한다(행 14:25).
하지만 누가는 방문 기간, 활동 상황, 복음전도의 과정 및 결과 등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바울의 팀이 다른 곳에서는 복음을 전할 때마다 자주 박
해를 받았지만, 더베와 버가에서는 박해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팀은 안디옥을 떠나
첫 사역지였던 구브로의 작은 항구도시 살라미에서도 박해 없는 전도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행 13:5).
3)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의 교회개척사역
바울 팀은 짧은 기간 동안 마게도냐에 머물렀지만 그들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 지역에 세워진 대부분의 교회는 확고하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로 인해
그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다. 반면에 아가야 지역의 경우, 바울은 고린도에서만 성공
하였다. 바울이 고린도에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는데, 그 기간은 그곳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 빌립보에서의 사역
마게도냐의 동쪽 도시들 중 하나이면서 유럽의 관문 역할을 하는 빌립보(Philippi)는 로마와
동부 지방을 연결하는 에그나티아 도로(the Egnatian road)11)변에 세워져 “군사 및 상업적
기업들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12)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회당에 들어갔다거나
유대인을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을 것이
며, 따라서 유대인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 팀이 세운 빌립보 교회는 온전한 이방인 교
회, 다시 말해서 유럽 최초의 교회였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들이 빌립보 교회의 초기 구성원들이 되었다. 그들은 리디아라는 자주색 옷감을
파는 상인, 강가에서 만난 여인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집안사람들이다. 빌립보 교회는 아마
도 리디아의 집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행 16:15, 40). 루디아가 강가에서 만난 여인들 가
운데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이 모두 루디아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11)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군이 건설한 이 도로는 아드리아 해의 항구였던 디라키움(Dyrrachium, 현
재 알바니아의 두러스)에서 시작하여 비잔티움(Byzantium,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끝나는 긴 군
사용 도로였다. 사도행전 17:1에서 누가는 바울 팀이 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
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노니가에 이르렀다고 보고한다. 당시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대 로마의 도로망 가운데 하나인 에그나티아 도로를 이용하였다.
12) Arthur G. Patzia, The Emergence of the Churc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1), 110.
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집안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가정교회로 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경험한 영적 대결(spiritual confrontation)은 빌립보 교
회를 든든하게 세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바울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치유하자 여종의 주
인이 바울과 실라는 관가에 고발하였고, 그 일로 두 사람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들이 이런 고난에 굴하지 않고 기도하고 찬양하였을 때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문이 열리고 모
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결국 간수와 그의 온 집안의
회심으로 이어졌다.
피상적으로 보면, 놀라운 사건이 빌립보에서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팀이 그 도
시에서 생산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나중에 그 교회에 쓴 편지
에 근거해서 보면, 빌립보 교회가 설립 초기에 매우 복음적인 노력을 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
다. 빌립보의 신자들은 바울 팀이 떠난 뒤 도시를 복음화하고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첫 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하여 한 일에 참여”하였던 것이다(빌 1:5).
이것은 비록 바울 팀이 짧은 기간 동안 빌립보에 머물며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에 세
워진 교회는 매우 건실하게 성장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빌 1:3-11).
(2)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
데살로니가−오늘날의 살로니카(Salonika)−는 마게도냐의 수도였으며 지역 공무원이 있는
자유도시였지만 로마의 주둔 부대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 도시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상업이 번창하였다.
바울은 3주 동안 “자기의 관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 안에 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God-fearing Greeks)의 큰 무리와 많은 귀부인
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행 17:2-4). 바울 팀은 이들을 기반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립하였다. 나중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편지를 볼 때, 이 교회는 대부분 이방
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이교도 우상숭배자들도 있었을
것이다(살전 1:9-10).
누가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최장 3주 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것처럼 기록하지만(행 17:2),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은 그들이 다른 이유들과 함께 교회의 지도자들을
임명하기 위해 3주 이상 머물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살전 5:12-13).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몇 년 후 마게도냐에서 바울과 합류한 데살로니가인들 곧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이 지도자
들 중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행 20:4).13)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 난동을 부리자 바울 팀에서 바울만 베뢰아를 빠
져나가 아덴−오늘날의 아테네−으로 갔다. 다른 팀원들인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아덴으로 가 바울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얼마 후 바울은 그곳에서 그들을 마게
도냐로 다시 보내 새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를 교육하게 하였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갔고,
실라는 아마도 빌립보로 갔을 것이다. 팀은 나중에 고린도에서 다시 모일 수 있었다(살전
3:1-6; 참조, 행 17:14 이하; 18:5).
(3) 베뢰아에서의 사역
마게도냐의 도시 중 하나인 베뢰아−오늘날의 베리아(Verria)−는 데살로니가에서 서쪽으로
13) Ibid., 114.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도시는 데살로니가와 같은 상업도시로 개발되지 않았지
만 지중해 세계에서는 세공업, 농업 및 석공업의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기원후 51년에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뒤 바울 팀은 베뢰아로 갔으며, 그곳에서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행 17:10-11).
놀라운 것은 베뢰아 사람들 중에는 열린 마음과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
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하며 매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헬라인들이었
다. 이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바울이 회당에서 이들에게
말씀을 풀어 설명하자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성경에는 ‘베뢰아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바울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곳
에 교회가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당시 베뢰아에서 많은 헬라주의자들이 신자가 되었을 때, 소바더가 그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행 20:4). 부로의 아들인 그는 나중에 베뢰아 교회의 대표로 바울 팀과 함께 사역하였
다. 로마서 16:21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
기 위한 헌금을 거두는 일을 하도록 각 교회가 지명한 대표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고전
16:3-4 참조), 그 세 사람 중 소시바더가 소바더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14) 바울의 설
교는 효과적이었지만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의 사역을 방해하게
했기 때문에 그는 베뢰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4) 아덴에서의 사역
바울 팀의 아덴 사역은 교회개척에 실패한 경우를 보여준다. 로마 시대에 아덴은 경제적으
로 고린도에 뒤지고 학문적 활동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 뒤진 상태였지만, 나름대로 학문, 건
축, 예술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었다. 아덴에서 바울의 선교 활동은 그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이루어졌다(행 17:16-34). 바울이 그들을 기다린 시간은 6주를 넘지 않았을 것
이며, 어쩌면 그 시간이 4주 정도였을 수도 있다.15) 그곳에서 바울이 사용한 전도 방법은 지
식인과의 토론이었다. 그는 종종 에피쿠로스 철학자들, 스토아 철학자들과 토론하였다(행
17:17-18). 나중에 그는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귄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은 고린도전서 1:18 이하에서 바울이 아덴에서의 논쟁 또
는 연설에서 사용한 논증적 기법 곧 헬라주의적 지혜에 의존하는 설교 방식을 포기했다고 말
한 점을 들어 아덴에서의 연설이 실패로 끝났다고 주장한다.16) 그러나 이 연설에 대한 보른캄
의 성급한 판단은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사역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의 연설
들은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이방인들에게 적합한 설교의 모범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연설들이 아덴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회심자가 소수에 그쳤다고 하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누가는 아덴에서 교회가 세워졌다는 보고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5) 고린도에서의 사역
아가야의 중심 도시 고린도는 총독이 거주하는 로마 식민지로서 인구는 약 10만 명에 달하
는 제법 큰 도시였다. 이 도시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는
14) 에른스트 케제만, 『로마서』, 박재순 외 2인 공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677.
15) William M. Ramsay, St. Paul the Traveller and the Roman Citizen, 240.
16) Günther Bornkamm, Paul, D. M. G. Stalker, trans. (Minneapolis, MN: Fortress, 1995),
66-67.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당시에는 학문과 문화
의 중심지였던 아덴을 능가할 만큼 크게 발전하였다.17) 반면에 이런 긍정적인 특성과는 달리,
성적 방종과 우상숭배가 이 도시에 만연해 있었다. 바울 팀은 이 도시에 1년 6개월 동안 머무
르며 복음을 전했는데(행 18:11), 이는 바울 팀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한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는 바울 팀이 2차 선교 여행을 하는 동
안 마치 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그 결과 당시에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가 이 도시에
세워졌다.
아덴에서 떠난 바울은 기원후 52년 또는 53년에 고린도에 도착하였다. 도착하면서부터 전
도 활동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는 아덴에서의 전도 상황으로 인해 다소 위축되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라와 디모데가 그곳으로 와 바울과 합류하게 되자 바울 팀의
사기가 다시 살아나 힘 있게 사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바울은 그곳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사
역을 수행하는 동안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황제 칙령으로 로마를 떠나 살아야 했던 젊은
유대인 부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천막 작업장에서 함께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
에 머물기도 하였다(고후 12:13).
처음에 바울 팀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전도의 방향을 돌렸다(행 18:4-6). 이후 그들은
사역의 거점을 회당에서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이를 계기로 이 집에서 가정
교회가 출범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행 18:7). 교회 구성원들은 주로 이방인이었지만 몇 사람
의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 계층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교회에는 하위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추측컨대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모인 교회를 모델로 삼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들이 고린도에 빠르게 증식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떠난 후 아볼로가
회중들을 돌보았다.
4) 아시아 지역에서의 교회개척사역
아시아는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의 서쪽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헬라 문화가 상당히 남아 있는 곳이며, 대표적인 도시로는 버가모, 사데, 서머나, 에베소를 들
수 있는데, 이 도시들은 모두 학문이 발달하였다. 이 도시들 중에서 바울의 교회개척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는 에베소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에서의 교회개척사역은 주로 에베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에 아시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성령은 그를 마게
도냐와 아가야로 인도하였다. 그와 동료들은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에베소를 방문
하였다. 이 도시에서 오래 머무는 일은 3차 선교 여행 기간에 일어난다. 바울 팀은 세 번째
여행을 계획할 때 에베소를 본부로 삼고 그곳에서 사역을 집중한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여
행 중에 바울이 아시아 지방을 복음화하는 데 사용한 방법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방법에 관
해 에버렛 해리슨(Everett F. Harri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그 지역이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는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이전에 품었던 소망을 이루도록
17)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San Francisco, CA: HarperSanFrancisco, 1997),
131.
허락하셨다. 바울 사도는 이 도시를 작전 기지로 삼아 아시아 전역을 향한 전도 전략을 개발할
기회를 얻었다(행 19:10).18)
에베소는 인구가 약 20만 명인 대도시였지만 로마의 가장 큰 도시가 약 65만 명에 이르렀
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간 규모의 도시였다고 볼 수 있다.19) 이 도시는 국제 무역과 고대 종교
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다산의 여신 아데미(아르테미스)는 에베소 사람들의 종교 생활을 지
배하고 있었다(행 19:23-41). 스탐바우(John Stambaugh)와 발취(David Balch)는 이 여신과
도시의 관계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여신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호화롭게
장식된 그녀의 사원이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도시와 밀접하게 동일시되었다.”20)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은 이 도시를 두 번 방문하였다. AD 52년 그들은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에 고린도에
서 사역한 뒤 이 도시를 방문했지만 즉시 그곳을 떠났다(18:19-21). AD 54년 그들은 세 번째
선교 여행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돌아본 뒤(행 18:23) 바
로 에베소로 직행하여 3개월 동안 회당에서 가르치고 두란노 서원에서 약 2년 동안 가르쳤다
(행 19:8-10).
사도행전 19:10을 근거로 볼 때, 바울이 세 번째 선교 여행 때에 에베소에 오래 머무르며
효과적인 사역을 수행한 결과로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뚜렷한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과거에 사용했던 것과 비교하여 완전히 다른 선교 전략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에베소
를 이방인 선교를 위한 전략적 도시로 여겼다.
3차 선교 여행으로 에베소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바울이 처음 한 사역은, 회심했지만 아직
성숙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열두 명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완전한 진리
를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행 19:1-7). 이들이 바울의 도움을 받아 성령을 체험한 뒤
에베소에 교회를 세웠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증거는 바울이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모
두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행 20:16-17). 그러나 바울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사역을 위해 두란노 서
원을 세웠다. 이곳에서의 가르치는 사역은 오늘날 신학교에서 기독교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과
정과 비슷하다. 학생들은 아마도 바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아시아 각지에서 800km 이상을 여
행했을 것이다.21) 피터 와그너는 이 학교가 “목회적 돌봄과 평범한 신자들의 양육”을 동시에
제공했으며 이 학교가 제공한 커리큘럼은 “전도와 교회개척”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2) 고
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에베소에서의 두란노 서원 사역을 통해 아시아 전역
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그의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전 16:9).
바울은 가르치는 사역 외에도 치유의 놀라운 이적, 예수의 이름으로 악귀들을 쫓아내는 일
과 같은 영적 대결을 경험하였다(행 19:11-20). 빌립보에서 일어난 사건(행 16:12-18)과 더불
어, 이 사역들은 교회개척자들이 선교 분야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전쟁의 예를 보여준다.
바울은 에베소서 6:12에서 그런 문제를 다루기 위한 원칙을 제시한다.
18) Everett F. Harrison, The Apostolic Church (Grand Rapids, MI: Eerdmans, 1985), 209.
19)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131.
20) John Stambaugh and David Balch, The New Testament in Its Social Environment
(Philadelphia, PA: The Westminster Press, 1986), 149.
21) 데이빗 쉔크 ‧ 얼빈 슈트츠만, 『초대교회 모델을 따라 교회를 개척하라』, 217.
22) C. Peter Wagner, Acts of the Holy Spirit, 470.
2. 부름과 훈련
기독교 사역에서 능력과 권위는 결코 인간적인 요소에서 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부름과 영적인 훈련 과정을 통
해서 이루어진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모든 일꾼들은 하나님의 부름과 지시, 그리고 영
적인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사역에 나서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부름을 받는
것은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며, 훈련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반드시 거
쳐야 할 과정이다. 만약 어떤 교회개척자가 하나님의 부름과 훈련 없이 선교 현장으로 간다면
그의 사역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름과 훈련은 그 어떤 사역보다
앞서 선결되어야 한다.
1) 사역은 부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에 필요한 일꾼들을 부르시는 것은 예수에게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들을 불렀다. 부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한 리더”(God-ordained leadership)가 되지 않으면 교회개척을 포함하여
그 어떤 사역도 성립하지 않는다.23) 그분이 제자들을 부르신 경우들을 돌아볼 때, 우리는 다
음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자신의 제자들을 불렀다. 둘째,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회적 또는
지적인 자격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바울에게도 나타나 자신의 사
도가 되도록 도전하였다.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
를 만나 회심하였다. 회심과 함께 예수께서는 바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였다.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의 만남은 사도직에 대한 그의 주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누
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다메섹 체험에 관해 세 차례 전하는데, 이를 통해 주님께서 바울에
게 이방인 선교를 위한 사도직을 부여하셨다고 보고한다(9:3-5; 22:6-8; 26:12-18). 발터 슈
미탈스(Walter Schmithals)는 바울의 사도직에 관해 논의하면서 “사도직의 근거를 그리스도
의 부름에 두는 것은 특정한 신학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단순히 부름을 받은 사
건 자체 또는 부름에 대한 바울의 전통적인 이해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24)
2) 바울은 사역에 앞서 훈련을 받았다
교회개척자들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일꾼이 되기 위해서 철저하게 훈련되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성숙해져야 한다. 자신의 내면과 삶에서 깊은 은혜를 맛
보며, 자신이 선포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분별
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제자로 삼고 그들을 사도로 훈련시켰다(막 3:13-14). 그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기도 하였으며, 권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기도 했다. 그
23) George W. Peters, A Theology of Church Growth (Grand Rapids, MI: Zondervan, 1981),
139.
24) Walter Schmithals, The Office of Apostle in the Early Church, John E. Steely, trans.
(Nashville, KY: Abingdon, 1969), 24.
러나 이 모든 훈련과 사역에 앞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어야 했다. 어쩌면 삶에서 예수와 동
거하며 그분과 깊이 교제하고 그분의 인격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일 수 있다.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 어디에도 바울의 훈련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
다. 다만 일부 구절을 근거로 그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사도
행전 9:23의 “여러 날”과 갈라디아서 1:17-18의 “삼 년 만에”라는 단어들을 근거로 바울이
사도로 부름을 받은 뒤 아라비아에서 3년간 머물렀다는 데 동의한다. 브루스(F. F. Bruce)는
아라비아에서 바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하나는 “종교
적 수도”(a religious retreat)와 비슷한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나바
테아 아라비아에서 기독교 전도자”의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다.25) 두 가지 모두 미래의 사역을
위한 바울의 훈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자는 사역자로서의 내적인 준비에 영향을 미쳤을 것
이고, 후자는 실제적인 훈련을 위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는 동안 두
가지 일들이 모두 일어났을 수도 있다. 이런 추측이 맞는다면, 12명의 제자들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지시를 받기 전에 훈련을 받은 것처럼 바울도 약 3년 동안 이방인 선교를
위해 철저히 훈련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3년간의 아라비아 훈련 이후에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면서 미래에 진행될 이방인 선교 및 교회개척사역을 준비하였다(갈 1:21-24). 갈라
디아서 2:1에 나오는 “심사 년 후에”라는 바울의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의 사역 기간이 14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은 바울의 이 14년 기간에 대해서 “당시 두 지방 ‘시리아와 길리기아’에서 거의 14년
동안 바울이 행한 활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 중 하나다.”라고 말한
다.26) 이 기간 동안 바울은 아라비아에 있을 때보다 영적으로 훨씬 더 성숙해졌을 것이다. 아
라비아에서의 3년 기간이 위대한 교회개척 선교사가 되기 위한 1차 훈련 과정이었다면, 수리
아와 길리기아에서의 14년 기간은 이방인 선교와 교회개척사역을 위한 2차 훈련 과정이었다
고 볼 수 있다.
3. 기도와 성령의 인도
초대교회에서 교회개척사역의 주도권은 사도들이 아니라 성령에 속해 있었다. 성령께서는
교회개척자들에게 교회개척에 대한 비전을 부여하고 그들이 그것을 좇아가도록 이끈다. 그 어
떤 교회개척자의 계획도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앞설 수 없다. 바울의 교회개척사역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와 함께 수행되었다. 브루스가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의 선교 여행은 전략적 계획
과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대한 민감한 반응의 특별한 조합을 보여준다.”27)
1) 바울 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25) F. F. Bruce,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Acts (Grand Rapids, MI: Eerdmans, 1954),
204.
26) Martin Hengel, Acts and the History of Earliest Christianity, John Bowden, trans.
(Philadelphia, PA: Fortress, 1980), 103
27) F. F. Bruce,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Acts, 325.
교회개척의 진정한 주체는 성령이시며, 따라서 교회개척의 성패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
는 데 있다. 그런데 교회개척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데 필요한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가 기
도다. 교회개척에 관한 계획이 아무리 훌륭하고 다른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할지라도
사역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개척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바울 팀이 어려운 여건 속에
서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기도를 통해서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
하심을 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회개척사역은 사역자를 선택하고 파송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바울 팀의 구성 역시 기
도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게 된 것은 조직 내부의 특정
한 의사결정구조를 통해서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가 늘 하던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인도를 받는 데 집중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성령이 지시하심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행 13:2-3).28) 지역교회의 지도자를 임명하는 일도 기도와 함께 진행되었다(행
14:23). 두 경우 모두 금식과 기도가 병행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중요한 일일수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 사역의 중요성은 또한 바울이
자신이 개척한 지역교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도했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살전
3:9-10; 골 1:3, 9).
성령께서는 교회개척자들이 사역을 하는 동안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기도다. 유럽으로 가는 첫 관문인 빌립보에서의 사역은 기도 사
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에 수용적인 몇몇 여성들을 만날 때까
지 전도의 접촉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행 16:13). 그들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고
있던 중에 여자들을 만났다. 안식일에 기도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영적인 훈련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욱이 기도 사역은 능력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빌립보에서 기도하는 곳으로 가려고 했을 때 점치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여종을 만나 그녀에게
서 귀신을 쫓아냈다(행 16:16). “기도할 곳,” “기도하는 곳”과 같이 기도 장소에 대한 반복된
표현은 그들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평소에 기도하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권위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
을 것이다. 또한 기도와 하나님의 능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그들이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함
으로써 인간 세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행
16:25-26).
2) 바울 팀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다
누가는 바울 팀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을 이어나갔음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를 보고
한다. 우선, 바울의 선교 여행은 성령의 파송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선교 사업−교회개척을 중심으로 한−으로 부르신 이는 바로 성령이었다. 그분은 이
일을 위해 일꾼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주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다. 사도행전 13:3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아폴류오’(apoluo)는 누가의 저작에서 ‘풀어주다,
해방시키다’(release)의 뜻으로 쓰이는데,29) 이는 성령께서 사역을 위해 신자들을 해방시킨다
28) I. Howard Marshall, The Acts of the Apostles,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vol. 5 (Grand Rapids, MI: Eerdmans, 1980), 216.
는 것을 의미한다.30) 이런 점에서 선교의 주도권은 분명히 성령께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런 성령의 부름과 지시에 순종했을 뿐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 팀의 구성과 파송에 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선교 사역이 성령의 인도 아래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들에 의해 수행되어
야 함을 가르쳐 준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2차 선교 여행 중에 두 차례에 걸쳐 성령의 지시에 복종하였다. 먼
저 성령께서는 그들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제한하였으며 비두니아로 들어가는 것
을 허용하지 않았다(행 16:6-7). 이후 성령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마게도
냐와 아가야로 인도하였다(행 16:8-10). 그러나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이 선교 여행을 계
획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에만 의존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다소 경
솔하다.31) 오히려 이런 사건들은 바울이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을지라도 그것이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거나 방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바울의 계획은 결코 성령의 인도하심과 모순되지 않
는다. 실제로 성경은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개입 사이에 어떤 간극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
라”(잠 16:9).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실패처럼 보이는 아덴에서의 사역 때문에 매우 낙담해 있었다
(고전 2:1-5). 그때 주님께서는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라고 격
려하셨다(행 18:9-10). 주님이 격려해 주신 덕분에 바울은 그곳에서 활기차게 교회개척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4. 바울의 교회개척사역의 전략적 특성
짧은 기간 동안 세 차례 선교 여행을 통해 진행된 바울의 교회개척사역이 그토록 놀라운 결
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사역은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
니라 매우 전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서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는 원리
들은 무엇인가? 그의 개척 전략들은 오늘날 효과적인 개척사역을 위해 요구되는 요소들이 무
엇인지를 가르쳐준다.
롤랜드 앨런은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으며 여행 중에 여러 차례 여행
일정을 변경했다고 주장한다.32) 그러나 신약성경은 계획과 무계획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포
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계획이 시간
의 흐름 속에서 예정된 일정들이 아니라 전체 과정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운영 방안 또는 반복
적 접근 방식을 뜻한다면, 바울 팀이 사역을 위한 일정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전략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지(E. A. Judge)는 바울 팀의
첫 여행과 두 번째 여행 사이에 전략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33) 저지에 따르면, 바울
은 첫 여정 동안 심한 박해에도 시민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여행
29)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217.
30) Patrick Johnstone, The Church Is Bigger Than You Think, 161.
31)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12.
32)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10-12.
33) E. A. Judge, “Early Christians as a Scholastic Community,” Journal of Religious History 1
(1960-61): 127.
때에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저지는 바울이 과거의 사역과는 달리 빌립보에
도착한 뒤 중산층 사람들−예를 들어 루디아−에게 집중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교회개척전략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데살로니가의 야손(행 17:9), 베뢰아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믿은
“헬라의 [많은] 귀부인과 남자들”(행 17:12),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행 17:34)을 증거로 제시하는데, 이들은 모두 지적이고 사회적인 지위
가 높은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난 계층들은 이
보다 훨씬 더 넓었다.
아래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여기서 먼저 바울 팀의 전략으로 간주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것들은 모두 8가지다.
(1) 그들은 이미 교회가 있는 지역에는 가지 않았다.
(2) 그들은 교회개척사역을 수행하면서 첫 여행에서는 작은 마을에 집중하였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여행에서는 비교적 큰 도시에 집중하였다.
(3) 그들은 전략적 요충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접근 방식(the regional approach)으로 사
역했기 때문에 선교지 전 지역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4) 그들은 문화적으로 적합한(relevant) 사역을 하였다.
(5) 그들은 회당을 복음화를 위한 효과적인 문화적 교량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마을이나 도
시에 도착했을 때 회당을 이용했다.
(6) 그들은 회당이 아닌 집에서 모임을 갖는 가정교회들을 세웠다.
(7) 그들은 선교지를 떠나면서 새로 설립된 지역교회의 양육과 돌봄을 위해 토착적 지도자
들을 임명하고 바울 팀을 중심으로 한 사도적 네트워크에 참여시켰다.
(8)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선교 사역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일을 했다.
1) 교회 없는 지역을 우선하는 전략
교회개척사역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회개척자의 비전과 열정이다.
만약 교회개척자에게 적절한 비전과 열정이 없다면 성공적인 교회개척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사도적 교회개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그런 태도는 아
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된다.
바울의 경우, 그의 이런 비전은 교회가 없는 지역으로 가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으로 표
현되었다(롬 15:20; 고후 10:15-16). 사도적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돕는 것이다. 이 과제는 다른 곳에서 이미 회심한 신자의 이동을 통한 교회 성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롬 15:23)고 말한다. 이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브루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의 일은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
에 복음을 전하고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34) 바울을 비롯
한 모든 사도들의 사역은 바로 이런 선교적 비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울의 비전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결코 자신의 삶을 위한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그야
말로 죽음을 불사하는 복음적 열정과 관련이 있었다. 바울 팀은 여행하는 동안 결코 힘든 길
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구브로를 떠나 아시아에 도착한 뒤 바울 팀은 남부 해안 길
보다 훨씬 어려운 내륙 길을 선택하였다. 또한 그들은 출발지 안디옥으로 돌아갈 때 이미 방
문했던 도시들에는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무 망설임 없이 그 도시들을 다시 방
34) F. F. Bruce, Paul: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314-315.
문하는 노선을 선택하였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선교적
열정을 파악할 수 있다.
2) 작은 마을과 대도시
바울 팀은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하면서 작은 마을과 대도시에 교회를 세웠다.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에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작은 마을들을 찾아갔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여행 중
에는 대도시를 찾아갔다. 바울의 선교 활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 바울이 항상 대도시에만 교
회를 설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쩌면 이들의 잘못된
생각은 앨런이 말한 “전략적 요충지”(strategic points)를 단순히 대도시로 오해한 데서 비롯
된 것일 수도 있다.35) 앨런은 전략적 요충지 이론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학자들에게 귀중한 통
찰을 제공했지만 갈라디아 지방의 농촌 특성을 간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앨런의 영향을 받은 웨인 믹스는, 바울의 세계는 “생산적인 시골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도
시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36)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의 기독교는 전적으로 도시
적”이었으며,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의 시골 문화(the village culture)에서 태어났지만 콘스탄
틴 시대 이후에 로마제국의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37) 이런 주장은 그 당
시에 헬라화가 도시화 현상과 맞물려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갈라디아 지방의 도시들은 다른 지방의 도시들(cities)과 비교할 때 비교적 작은 마을들
(towns)에 불과하였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그리스-로마 환경에서 인구가 4만 명
이상인 대도시 목록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목록에는 다른 지방의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었지
만 갈라디아 지방의 도시들은 포함되지 않았다.38)
스탐바우와 발취는 갈라디아 지방의 경제적, 문화적 상황에 대해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갈라디아서가 바울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회중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생각한
다. 이 지역에는 로마 당국이 곡식과 양모를 생산하는, 고지대 농촌 지역의 문명 중심지로 세
운 몇 개의 분산된 도시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시골 부족 정착촌이었다.39)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갈라디아의 루스드라와 아가야의 아덴을 비교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아덴은 “세계의 문화 중심지”였고, 루스드라는 원시적 풍광을 지닌
“후진적인 농업 지역”이었다.40) 그린의 분석은 바울의 선교 사역이 대도시에서만 수행되었다
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해와 다르다. 물론 바울이 각 지방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선교 대상
지역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의 도시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도시가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행한 교회개척사역은 오늘날 작
은 마을이나 시골 지역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35)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10-17.
36) Wayne A.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9.
37) Ibid., 8.
38)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131-132.
39) John Stambaugh and David Balch, The New Testament in Its Social Environment, 154.
40) Michael Green,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MI:
Eerdmans, 2004), 179.
3) 전략적 요충지와 지역 접근 방식
1세기의 교회개척자들은 단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한 곳에만 머물지 않았다. 순회 전
도자로서 그들은 많은 지역을 방문하였다. 순회 교회개척자의 이미지는 여러 곳을 다닌다는
점에서 당시의 견유학파(犬儒學派)의 떠돌이 철학자 이미지와 비슷했다.41) 하지만 순회 교회
개척자들은 부(富)에 대한 욕심 없이 오직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사도들을 파견한 성령의 지
시를 따랐다.
바울의 선교에서 도시가 전략적으로 중요했다는 점을 학계에 밝힌 사람은 롤랜드 앨런이다.
그에 따르면 “[바울이] 교회를 개척한 모든 도시 또는 마을은 로마의 행정 중심지이거나 그리
스 문명의 중심지이거나 유대인들의 영향이 큰 도시이거나 상업적으로 중요한 중심지였다.”42)
사회적 이동성의 원리에 근거하여 헬레니즘 세계의 교회들이 “주요 무역로 근처의 중요한 도
시들”에 세워졌다는 아브라함 말허비(Abraham J. Malherbe)의 주장은 이 견해를 보완해 준
다.43) 그러나 앨런에 따르면 바울이 도시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
의 의도는 해당 도시에 베이스캠프가 될 만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 전체에
복음의 영향력을 확산하는 데 있었다.
이 전략은 세 번째 여행 중에 정점을 찍었다. 바울은 전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회개
척 방법을 순회 방식에서 정주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전략이 효과적이
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바울이 에베소에 단 하나의 교회를 세웠지만 이 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의 영향력으로 인해 지역 전체에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아서 파치아(Arthur G.
Patzia)는 바울 사역의 전략적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기간 곧 바울이 전혀 여행하지 않았던 이 시기에 교회가 가장 크게 성장하
였다. 그의 선교 전략은 ‘어딘가로 가는’ 순회 사역에서 한 곳에 머무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의 사역의 특징은 그의 가르침을 통해 회심자들을 얻은 뒤 그들과 그들의 동역자들로 하여금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
서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기 때문에 에베소에 남으려고 한 이 정책에 대해 매우 낙관적
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전 16:9).44)
바울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하
고 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에 없고”(롬 15:23). 이 구절의 의미로 볼 때 바울은 스스
로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용한 전략은 마치 연못에 돌이 떨어졌을 때 생기는 파동 현상과 같다.
사회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바울 팀의 교회개척사역을 설명하는 레온하르트 고펠트(Leonhard
Goppelt)는 그들이 먼저 대도시에서 디딤돌을 확보한 다음 전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복음을
전파시켰다고 말한다.45) 바울은 항상 개별 지역교회를 넘어 지방과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
41) Gerd Teissen, The Social Setting of Pauline Christianity: Essays on Corinth, John H.
Schütz, ed. and trans. (Philadelphia, PA: Fortress, 1982), 39.
42)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13.
43) Abraham J. Malherbe, Social Aspects of Early Christianity, 2nd edition (Philadelphia, PA:
Fortress, 1983), 63.
44) Arthur G. Patzia, The Emergence of the Church, 127.
45) Leonhard Goppelt, Apostolic and Post-apostolic Times, Robert A. Guelich, trans. (New
다.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각 지역교회는 비록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속
한 좀 더 넓은 지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4) 토착적 교회 설립
바울 팀의 교회개척사역은 자립적이고 지역 중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 이후 일
부 선교학자들이 토착 교회의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 개념은 바울 팀의 사역에서 중시된 삼
자(三自) 원리−자립, 자치, 자전−와 일치한다.46)
바울은 그가 개척한 어린 교회들이 자립할 때까지 그 교회들을 돌보았다. 그는 박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때까지 한 곳에 계속 머물렀다. 때로는 필요에 따라 오랫동안 한 곳
에 머물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에베소에서 약 27개월 동안
머물렀다(행 18:11; 19:8-10).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어린 교회들이 성숙해지고 자
립 독립되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과 관련이 있다.
토착화(indigenization)의 원리는 교회개척자들이 어린 교회를 홀로 남겨두고 지원과 보살
핌 없이 스스로 모든 문제를 처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불가피하게 어느
지역을 떠나야 할 때 교회의 자립과 성장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사도행전
14:22-23을 설명하면서 존 스토트(John Stott)는 바울이 그 어떤 선교단체도 설립하지 않고서
도 세 가지 조치−“사도적 가르침, 목회적 관리, 하나님의 신실하심”−를 취함으로써 확신을
가지고 어린 교회를 떠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47) 그는 이런 설명이 롤랜드 앨런의 저서
(1962)에 포함되어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스토트는 바울의 조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바울이, 각 교회마다 스스로 자기들의 일을 관리하도록 맡기고 떠나도 되겠다고 확신한 이유
가 여기에 있었다. 그 교회들에게는 (‘믿음’과 편지로) 가르치는 사도들, 그들을 돌보는 목사들,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축복하시는 성령이 있었다. 이 세 가지(사도적 가르침, 목회적 관리,
하나님의 신실하심)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48)
다른 지역으로 떠난 뒤 바울은 어린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지역교회 지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동료들을 어린 교회에 보내 장로들을 임명하
거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조치에는 언제나 불안한 측면
이 있었다. 반면에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도록 그분께 맡기는 것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방
법이었다.
5) 재정의 원칙
York: Harper & Row, 1970), 89.
46) John L. Nevius, The 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 (Philadelphia, P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8). 찰스 브록에 의하면, “토착 교회는 상황
화된 교회다. 이 교회는 외부의 간섭이나 통제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문화에서 성장할 수 있
다.” Charles Brock, Indigenous Church Planting: A Practical Journey (Neosho, MO: Church
Growth International, 1994), 89.
47)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235-239.
48) Ibid., 237.
바울은 자신의 선교 사역 때문에 교회들 또는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일
을 해서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가 개척한 교회들이 종종 바울 팀을 후
원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불규칙적인 것이었다. 바울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여행을 마친 뒤 그
를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 그동안의 사역에 대해 보고했지만 중보기도를 제외하고는 그 교회로
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개척자들이 바
울처럼 재정적 지원 없이 개척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바울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단편적으로만 사태를 본 결과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로마제국 어디서나 자유롭게 일
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파송 교회 또는 후원자들로부터 정기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바울이 선택한 자비량 방식은 여러 가지 재정 운영 방식 중 하나일
뿐 결코 개척 사역의 보편적인 원칙으로 보기는 어렵다.
바울은 재정 문제에 관해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는 자신의 생계비 및 선
교 사업비를 조달하기 위해 자기 직업을 가졌다. 둘째, 그는 개척된 교회들이 자립하기를 기
대하였다. 셋째, 그는 모든 교회들, 심지어 가난한 교회들까지도 다른 사람들의 궁핍한 상황을
외면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49) 다른 차원에서, 앨런은 재정 문제에 관한 바울의 세 가지 원
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① 그는 자신을 위해 재정적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② 그는 자
신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서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았다. ③ 그는 지역교회의 재정에 간섭
하지 않았다.”50) 이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를 돕기를 원하는 지
역교회들의 비정기적인 지원을 거부하지 않았다(빌 4:16; 고후 11:8). 소유에 대한 바울의 태
도는 빌립보서 4:12에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지원을 원하지 않았지만, 사도적 네트워크를 통해 열악한 교회를 지원
하는 일에는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기근으로 고통을 겪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원
하는 일에 협력할 것을 이방인 교회들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5. 복음전도와 설교
오늘날의 설교에는 잘못된 교리, 세속 사회에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메시지, 청중
의 상황과 관련이 없는 설교 등과 같이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들어와 뒤섞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행한 설교는 뚜렷하게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아
래에서 초대교회의 설교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구성 요소인 메시지, 의
사 전달 방법, 청중의 세 가지 관점이 사용될 것이다.
1) 사도들은 ‘복음’을 전했다
설교(preaching)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직접적인 수단이다. 설교가 가르침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는 복음에 대한 증언이다. 사도행전에는
19개의 설교가 있다. 그중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8개, 바울의 설교가 9개 있다.51) 이 설교들을
49) J. Herbert Kane, Christian Missions in Biblical Perspective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6), 92.
50)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49.
살펴보면, 그들이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설교하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
스도의 좋은 소식만을 설교의 초점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께서 사도들을 그분의 증인으로 부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 그들에게 사도의 칭호를 준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지위에 관한 결정적인
사실은 그들의 소명이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 곧 주님의 사람과 관련이 있으며 어떤 종류
의 제도나 조직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52)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
해 파송된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틴 시대에 등장한,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통치권은 초대교회
의 사도적 권위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어떻게 사도직을 주장하는지를 탐구하면 사도적 권위의 근거를 분명
히 알 수 있다. 당시에 많은 거짓 사도들이 바울 팀이 개척한 교회들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
들은 사도직이 신비한 은사 또는 사도의 표징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후 12 장). 하지
만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책망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의 근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찾았다(고전 15:10; 엡 3:7). 바울은 항상 주님께서 일차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 하나
님을 섬기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했다(롬 1:9; 15:19; 고전 1:17). 바울의 사도적
자기 인식은 바로 이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
라고 명령하였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도적 권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도들이 행한 설교 내용을 보면 사도적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내용은 무엇인가? 도드는, 최근에 그의 분류가 다
소 엄격하긴 하지만, 설교(kerigma)와 가르침(didaché)을 구분함으로써 신약 연구에 크게 기
여하였다. 그는 케리그마에 사도적 설교의 내용으로 간주될 수 있는 여섯 가지 기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여섯 가지 기본 진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둘째, 이것은 예수의 사역, 죽음,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
셋째, 예수께서는 부활로 말미암아 새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우두머리로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고양(高揚)되었다.
넷째, 교회와 관련해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현재적 능력과 영광의 표징이다.
다섯째, 메시아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곧 완성될 것이다.
여섯째, 케리그마는 항상 회개의 요구, 그들에게 제공되는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 선택된 공동
체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원’ 곧 ‘도래하는 시대의 삶’(the life of the Age to
Come)에 대한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53)
사도행전에는 세 가지 대표적인 설교가 있는데, 베드로의 설교(행 2:14-36), 스데반의 설교
(행 7:2-5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행 13:13-43)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설
교들은 설교자의 성향에 따라 각각 고유한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모두 다 위에서 언급
한 케리그마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51) 베드로의 설교 8개는 1장, 2장, 3장, 4장, 5장, 10장, 11장, 15장에 있다. 바울의 설교 9개 중 5개
는 13장, 14장, 17장, 20장, 28장에 있고, 4가지 변증 설교는 22장과 26장에 있다. 19개 중 나머지
두 개는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설교와 15장에 있는 야고보의 설교다.
52) Hans von Campenhausen,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Spiritual Power: in the Church of
the First Three Centuries, J. A. Baker, trans.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9), 27.
53)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21-24.
행한 바울의 설교는 간결하면서도 복음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마이클
그린은 이 설교에 담긴 주제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 번째로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메시아의 오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지를 보
여준다. 두 번째로는 예수께서 고대의 예언을 성취하고, 다윗의 축복을 집중적으로 받고, 신적
인 자손으로 온 분이라는 복음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데 전념한다.… 설교의 세 번째 부분
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죄의 용서, 모세의 율법 아래서는 결코 얻을 수 없
는, 그분이 주신 자유, 믿음으로 그분께 응답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한다.54)
사도적 설교의 이런 특성들은 사도적 사역이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이었다는 사실과, 사
도적 권위는 개인적인 능력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초대교회 상황에서 사도들은 복음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
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논리적 구성과 전달 방식을 달리 하였다.
2) 불신자들을 향한 담대한 설교
신약 시대의 설교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졌지만 주로 교회 밖에서 이루어졌다. 교회 안에
서의 설교가 상당히 교육적인(instructive) 특성을 띤 반면 교회 밖에서의 설교는 바울이 행한
몇 가지 변증적인 설교를 제외하고 거의 복음을 선포하는(evangelistic) 형태를 띠었다. 초대
교회에서 이루어진 이런 설교 패턴은 기독교가 사회의 지배적 세력 또는 가치가 된 ‘크리스텐
덤’(Christendom) 곧 기독교 국가가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가 흘러오
는 동안 이런 패턴으로 설교한 사역자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진정한 발전은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교회에서 나와 세속 사회로 들어간 담
대한 복음전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드의 정의에 따르면, 케리그마의 특징을 가진 사도적 설교는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기독
교의 공개적 선언”이었다.55) 1세기의 사도들이 접한 비기독교 세계의 영역은 다양했다. 사도
들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그들은 종종 복음을 듣
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집에 초대되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초대되었으며(행 10:1-48),
바울은 루디아와 빌립보 간수의 집에 초대되었다(빌 16:15, 32-34). 또한 바울은 유대교의 가
르침에는 익숙했어도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회당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복음을 선포했다. 바울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복음적 관점에서 그가 당시의 회당을 세속적인
상황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문 앞(행 14:13), 강변(행 16:13), 시장(행
17:17)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빌 1:12).
그는 전도를 위해 논객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행 17:16-34), 사람들이 이교도의 희
생 의식을 행하는 경우와 같이 긴급한 경우에는 그들에게 소리를 치기도 하였다(행
14:13-18).
사도적 설교는 오순절 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한 뒤 전개된 베드로의 설교에서
시작되었다. 사도들은 주로 성전이 아니라 옥외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마이클 그린은 옥외
설교 활동이 일반적으로 유대인 세계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수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도들
54) Michael Green,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 301-302.
55) Ibid., 7.
에게 그리 낯선 방식이 아니었다고 말한다.56) 예수의 설교 사역은 사도들에게 옥외 설교를 위
한 모범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상 사역의 마지막 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
기도 하였지만, 야외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분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장소로 해변, 들판, 산, 집과 같은 야외 장소를 선택하였다.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바울이 이방인들과 대화한 장소는 옥외였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한
신체 장애인을 만난 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문 어귀였던 것으로 보인다(행 14:13). 바
울은 그곳에서 이교도들에게 변증적인 설교를 하였다. 바울은 아덴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에 대해 말하기도 했지만 시장에서 그곳을 이용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
도 하였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변증적인 설교를 했던 아레오바고 역시 옥외
장소였다(행 17:16-31). 하지만 여기에서 핵심은 복음을 전하는 장소가 건물 안인지 밖인지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도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불신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사실이다.
존 스토트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행한 사역과 에베소에서 행한 사역을 비교하면 두 도시에서
의 사역에서 비슷한 사역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이 세속적 상
황에서 수행되었음을 증명한다.57) 고린도에서 바울은 자신의 관습대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에 저항했기 때문에 그는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
스도의 집으로 옮겨 갔다(행 18:1-7). 바울은 에베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그는 에베
소에서 처음 3개월 동안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쳤다. 그러나 저항에 부딪치자 그는 그곳을 떠
나 두란노 서원으로 갔다(행 19:8-9). 이런 행동들을 보면, 그가 장소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하
기 위해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로 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사도들은 겁 없이 복음을 선포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고 채찍질을 당하는 것과 같
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행 16:23-25). 그들은 권력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
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의 고위 관리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
다(행 4:1-22). 고린도후서 11:23-27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었던 여러 가지 시련을 열거한다.
그러나 그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조차도 사도들을 “그리
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고 고백한다(롬 8:35). 그들이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
한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인 스승으로부터 가장 분명한 모범을 보았으며, 또한 성
령의 충만함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3) 상황화된 전도
바울은 앵무새처럼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되뇌는 메신저가 아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방랑 설교가들(the wandering preachers)과는 달리 “새로운 삶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예수의 메시지는 재상황화(recontextualization)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
었다.58)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로부터 1세기 교회에 전승된 복음을 선포할 때 그것을 현장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설교할 때 결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
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그는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특정한 상황 속에서 복음의 접촉점을 찾
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56) Michael Green,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 303.
57)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311-312.
58) 요하네스 니센, 『신약성경과 선교』, 183.
사도 바울은 사역지로 선택한 도시에 회당이 있는 경우 일반적으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
다. 회당 안에서 그의 청중은 주로 종교적이고 교육받은, 헬라화된 유대인들이었으며(예를 들
면 행 13:16-41), 그들에게 한 설교는 대체로 변증적이었다. 롤랜드 앨런은 바울의 회당 설교
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으로 요약한다.
(1) 청중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과 회유의 말투, 그들과 그들의 교리에 담긴 선한 것을 모두
인정하는 자세, 그들의 어려움에 동정심을 느끼고 가능한 한 분명하고 단순하게 길을 제시하는
태도. (2)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듣기 싫어하는 진리를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는 용기… (3) 존중하는 마음. 적절한 증거를 신중하게 제시하며… 그들을 영적 능력과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살아있는 존재로 대하면서 호소하는 [모습]. (4) 자신의 메시지에 담긴
진리성과 그 능력에 대한 망설임 없는 확신…59)
회당에서 바울은 주로 헬라화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회당 밖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는 바울의 회당 설교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것으
로 간주되며, 루스드라에서의 설교와 아덴에서의 설교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설교에 해당한
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설교 유형은 서로 현저하게 대조를 이룬다. 회당 설교는 구약의 예언
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구속 과정을 다루는 반면,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설교는 구약성
경의 중재 없는 자연신학의 접근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존 스토트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와 루스드라에서의 설교를 비교하면서 바울의 유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접근 방식과 강조점은 다양했다. 그가 안
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전한 내용은 구약성경, 구약 시대의 역사, 예언 및 율법에 관한 것이었
다. 그러나 루스드라에 있는 이교도들에게 설교할 때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성경에 초점을
두지 않고 그들이 알고 있고 볼 수 있는 주변의 자연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60)
바울의 유연성은 아덴에서의 선교 활동에서 더 잘 표현된다. 처음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첫 번째 부류는 유대교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과 ‘하나
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매일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며, 세 번째 부
류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다(행 17:17-18). 존 스토트는 이 세 집단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규정하는데, 첫 번째 집단은 종교인들, 두 번째 집단은 세속 사회에서 스
쳐 지나가듯 “우연하게 만나는 통행인들”(NEB)61)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세 번째 집단은 현대
세계에서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이 없지만 나름대로 비슷한 사람들을 꼽는다면 많은 교
육을 받은 사람들 또는 대학인(大學人)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와 부활에 관한 좋
은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면서(행 17:18) 각 집단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첫 번째 집단에게는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두 번째 집단에게는 논증의 방식
을 사용하였으며, 세 번째 집단과는 처음부터 논쟁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62)
당시 헬레니즘 사회는 다원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며, 여러 종교 집단과
철학적 학파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삶의 의미 문제에 관하여 가
59)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63-64.
60)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232.
61) The New English Bible (NT 1961, second edition 1970; OT 1970).
62)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280-281.
장 탁월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교설을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법을 찾기에 골몰하였다.63)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지역으로 들어간 바울 팀의 선교적 자리
는 바로 이런 다원주의적 경쟁 체계 안이었다. 아마도 바울 팀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효과
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며, 특히 아덴에서 바울이 보여준 설교
방식들은 이런 고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는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했던 이전의 설교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 설교는 램지(William M. Ramsay)가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적 표현을 전혀 사용하
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인다.64) 그러나 그의 설교는 바울의 문화적 유연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기독교의 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용어와 표현 형식을 사용하였다. 그는 그들의 종
교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의 설교가 대단한 결실을 맺
지는 못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에 관한 중요한 주제들을 설득력 있게 드러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루스드라에서의 설교와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두 설교 모두 청중이 이방인들이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학적으로 뚜렷하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F. 브루스는 루스드라에서의 설교가 “교육받지 않은 이교도들을 향한
설교의 한 사례”인 반면에 아덴에서의 설교는 “‘교육받은’ 이교도들을 향한 설교의 한 사례”
를 보여준다고 말한다.65) 이런 설명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농촌 지역과 도시 지역의 상
황적 차이를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66) 분명한 것은 바울이 로마 세계 전역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여행하면서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따라 설교 형태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6. 문화적으로 적합한 사역
종종 바울의 선교 활동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언행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예루
살렘에 올라갔을 때에는 자신이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이방인의 사도”임을 주장
하면서 디도에게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지만(갈 2:1-8), 루스드라에서는 “그 지역
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하였다(행 16:3). 또한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 구원과 상관이 없음을 강조하였으나(롬 3:28; 갈 2:16), 예루살렘을 방
문했을 때에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았다(행 21:24).
이런 바울의 언행 불일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답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
해와 그의 성육신적 선교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구원의 수단으로 오
용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지 그것이 무익하다거나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과 구원의 관계에 대해 논증한 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즉 우리가 믿
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리라”(롬
3:31). 바울은 율법이 그 나름의 의미와 유익이 있지만 결코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선적인 가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임으로 분명히 했던 것이다.
63) 요하네스 니센, 『신약성경과 선교』, 196.
64) William M. Ramsay, St. Paul the Traveller and the Roman Citizen, 150.
65) F. F. Bruce, Paul: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170.
66) Michael Green,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 179.
바울의 성육신적 선교 정신은 복음과 문화에 대한 그의 이해로부터 나온다. 그는 복음의 진
리 자체는 변할 수 없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듣는 이들의 문화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바울의 생각은 도널드 맥가브란의 사회문화 중심적 선교
원리와 일치한다. 맥가브란은 자신의 저서 『교회성장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
에서 전도 대상자들이 문화적 장벽을 넘지 않고 복음을 들을 때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67) 이와 같이 바울은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려면 전도 행위가 항상 대상
자들의 문화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고린도전서 9:19-22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
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서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와 같
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
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이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자세는 마치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이셨던 성
자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온 것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와 바울은 모두 상대방의 공감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삶을 버리고 상대
방의 문화적 코드에 맞추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이런 자세가 “대상 문
화에의 완전한 동화(assimilation)나 기독교적 정체성의 상실을 뜻하지 않는다.”68) 십자가의
복음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
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
을 모색했을 뿐이다.
1) 바울의 문화적 적응
문화적 관련성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일차적으로 교회개척 팀을 조직하는 방식에 반영되었
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바울은 선교 현장과 문화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들로 팀을 구성하였
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이면서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의 팀원 중 한 사람인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드로아에서 합류한 누가는 헬라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헬라 의학을 익힌 의사
였기 때문에 바울의 선교지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바울 팀이 선교지를 선택한 것도 문화적 관련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
울과 바나바는 문화적으로 친숙한 지역을 선교지로 선택하였다. 그들은 선교지를 고향에서 멀
리 떨어져 있지 않고 그들에게 친숙한 곳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런 원칙에 의거하여 그들이 첫 선교지로 선택한 곳이 구브로 섬이었는데, 이곳은 바나바
의 고향이었다. 또한 첫 여행 동안 그들이 방문한 모든 도시는 구브로 뿐만 아니라 바울의 고
67) 도널드 맥가브란, 『교회성장이해』, 최동규 외 3인 공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277-302.
68) 요하네스 니센, 『신약성경과 선교』, 178.
향 다소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들이었다. 아마도 바울은 구브로에서 시작하여 비시디아 안
디옥과 자신의 고향 다소를 거쳐 안디옥에 이르는, 소아시아 내륙을 관통하는 여행을 계획했
을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이 옳다면, 바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더베에서
여행 계획을 변경하고 그때까지 왔던 경로를 다시 되돌아갔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그의 첫
여정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바울이 자신에게 친숙한 지역을 첫 선교지로 선택하고 싶어 했
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꽤 설득력이 있다.
이런 설명과 관련하여, 맥가브란은 종족 운동(people movement)의 관점에서 쓴 자신의 책
에서 바울의 여정이 그가 1년 동안 안디옥에서 가르친 사람들의 친척들을 방문하는 것과 관련
이 있다고 주장한다.69)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적어도 바울이 기독교 신앙
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교회개척사역의 디딤돌로 사용하고 그들의 마을
과 도시들을 전략적 요충지로 선택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선교지의 문화적 특성을 고려했다는 점은 그들이 교회개척을 위해 여
행하면서 각 성에서 획일적인 방식으로 사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회
당과 가정교회는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문화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사역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성에 들어갔을 때 그 성이 가지고 있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회당, 특히 그곳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던
경건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God-fearing Gentiles)을 복음전파의 중요
한 수단으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한 예가 된다. 또한 다른 곳과는 달리 아덴에서는 철학적 논
증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 것도 문화적 상황을 고려한 바울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으로, 바울 팀은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회 지도자들을 선택하
여 세울 때에도 각 지역교회가 처한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였다. 사도행전 14:23에 의하면,
바울 팀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였
다(굵은 글씨는 필자의 강조 표시임). 그들은 교회의 장로들을 세울 때 ‘각각의’ 교회가 처한
상황에 맞는 인물들을 선정했을 것이다.
2) 복음의 다리로서의 회당
로마 시대에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에는 회당이 있었다. 이 회당에는 단지 유
대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당에는 여러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발적 모임들과 가정들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70) 회당은 유
대인 공동체 내에서 종교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사법적인 기능도 담당했다. 회당이 처음 출현
한 시기는 아마도 페르시아 시대 또는 바벨론 포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독특한 기관은
정치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이 선조들의 땅과 히브리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 살아야 했을 때 유대교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율법을 읽고, 해석
하고, 기도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일주일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안
식일 회당 모임이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시에서 도시로 들어갔을 때 회당 공동체는 바울 팀의 사역에 꼭 필요
한 다리의 역할을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회당 내에 있는 “다리 위에 있
69) Donald A. McGavran, The Bridges of God: A Study in the Strategy of Missions, Revised
edition (New York, NY: Friendship Press, 1981), 17-36.
70) Wayne A.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80.
는”(on the bridge) 사람들에게 집중했던 것이다. 맥가브란에 따르면 “회당 공동체는 히브리
민족의 유대인들, 그리스 민족의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교를 믿기는 하지만 할례를 받지는 않
은 비주류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은 이 공동체를 인식하고 이방인 공동체로 나
아가는 다리로 활용하였다.”71)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회당을 활용했던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도시는 비시디아 안디옥(행 13:14), 이고니온(행
14:1), 데살로니가(행 17:1-2), 베뢰아(행 17:10), 아덴(행 17:17), 고린도(행 18:4), 에베소(행
18:19; 19:8)다.
바울 팀이 회당을 선교의 교두보로 삼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로
바울 팀의 구성원 중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회당은 그들에게 매우 익숙
했고, 적어도 그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생활 양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둘째로 바울은 유
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회당 내의 여러 집단 중 하나였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주목하였
다.72) 바울은 그의 설교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에 적절한 디
딤돌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아버지가 헬라인이었던 디모데와 온전한 헬라인이었던 의사 누가
가 이방인들을 향해 선교할 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문화적 전략을 사용한 결과, 비록 대부분의 경우에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들은 새로운 종교적 믿음 곧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회당과의 관계를 끊을 필요는 없
었다. 왜냐하면 기원후 85년경에 유대교 측에서 반기독교적인 조항을 만들 때까지 초기 기독
교와 유대교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73) 이런 배경에서 회당은 바울이 이방인
을 위한 선교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했던 복음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선교와 회당의 관계에 관한 몇 가지 지나친 주장들은 시정될 필요가 있다. 먼
저, 회당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회당들(Christian synagogues)이 1
세기에 실재했다고 주장한다. 이들 중 한 사람인 크레이그 밴 겔더(Craig Van Gelder)는 바
울이 회당에서 전한 복음에 의해 회심한 사람들이 기존의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
운 회당 모임을 가진 것처럼 언급한다.74)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을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다.
한편, 문서비평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회당에 대해 언급한 사도행전의 본문들이 역사적인 사
실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회당이 바울의 선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폄훼하려고 한다. 그
들 중 한 사람인 제이콥 저벨(Jacob Jervell)은 사도행전에 회당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가
누가의 의도적인 삽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주장에 대한 논거로 바울의 문서에 회당
71) Donald A. McGavran, The Bridges of God, 32.
72) 데이비드 보쉬는 초대교회의 선교를 세 단계 곧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하는 단계로부터
(특히 행 11:19 참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오직 이방인들에
게만 선교하는 단계”로 구분한다. David J. Bosch, Witness to the World: The Christian Mission
in Theological Perspective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80), 100.
73) 회당은 복음전도를 위한 문화적 다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신흥 기독교 공동체들을 조직하는 데
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헬라파 유대인 회당의 본을 따라 조직과 의식, 직분을 포
함하는 교회의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두 조직은 같은 유대인 배경에서 서로에게 혁신적인 경쟁
자였다. 참조, Wayne A.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80-81; James T. Burtchaell,
From Synagogue to Church: Public Services and Offices in the Earliest Christian
Communitie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272-338 참조.
74) 크레이그 밴 겔더, 『교회의 본질』, 최동규 역 (서울: CLC, 2015), 254.
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과, 바울이 고린도후서 11:24에서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겪은 여러
가지 박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75) 그의 주장에 따르면 누가가 바울이 회당에
자주 출입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누가가 유대교와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해서, 사도행전의 저자가 회당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전체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시킴으로써
기독교가 유대교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헬레니즘 사회의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이 교회개척사역을 하면서 회당
의 중요성을 간과했을 리가 없다. 실제로 바울은 그 당시에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기독교와 헬레니즘 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런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면 바울이
어떻게 성공적인 교회개척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
복음의 수용성에 관한 이론은 20세기 중반에 교회성장학파가 공헌한 것 중 하나다. 이 이론
은 사람이나 집단 또는 지역마다 복음에 대해 반응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가급적 복음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나 집단에게 선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76) 바울이
교회개척사역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복음에 대해 수용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회당
내에 있었던 경건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God-fearing Gentiles)이었다(행
13:16, 26, 43; 14:1; 17:4, 12, 17; 18:7). 바울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
유는 그들이 그 도시에서 가장 복음에 수용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대교
회당 안팎에서 등장하는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아마
도 유대인 선교에서 이방인 선교로 넘어가는 일종의 다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지목될 수 있는 사람들은 8:2에 처음 등장하고 18:7에 마지막으
로 나타난다.
회당 내에서 비주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일정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하나님을 경외하
는 이방인들’은 유대교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에 대해서도 이
미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F. 브루스는 이들이 유대교 예배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였
지만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들이라고 정의한다.77) 이와 같은 배경에서 ‘하나
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은 바울이 메시아에 관한 새로운 진리를 전했을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도시들을 찾아갔을 때 자연스럽게 사역의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때 단지 유대교의 변방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어느 지역에서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에 의해 그
지역에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선교는 하나님
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향한 선교였다고 말하는 저벨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78) 그의 말
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방인 선교는 회당 안에 있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로
75) Jacob Jervell, Luke and the People of God (Minneapolis, MN: Augusburg Publishing
House, 1972), 41-74.
76) 도널드 맥가브란, 『교회성장이해』, 303-325.
77) F. F. Bruce, Paul: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128.
78) Jacob Jervell, The Theology of the Acts of the Apostle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저벨의 주장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기
독교 공동체 내에서 외부자가 아닌 내부자의 입장에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
으리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7. 강함과 약함의 변증법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교회개척사역의 성패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은 초대교회의 탄생 이후 성령 하나님에 의해 나
타나고 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교회개척을 포함한 다양한 선교 활동에 참여하는 사역자들에
게 두 가지 뚜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나는 강함(strength)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약함
(weakness)의 방식이다. 데이비드 보쉬에 의하면 이 두 가지 방식은 두 가지 사이의 “변증법
적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준다.79) 그러므로 성공적인 교회개척을 원하
는 사역자라면 반드시 이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체험해야 한다.
1) 강함의 사도적 사역
사도들의 사역은 먼저 강함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사도들이 경험한 강함의 사역은 흔히
성령에 의한 ‘능력 사역’(power ministry)으로 일컬어진다. 이 능력 사역은 재정이나 시설,
프로그램과 같은 특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 않았던 바울 팀의 교회개척사역에 매우 큰 영
향을 미쳤다. 능력 사역은 교회의 탄생을 주도하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인간과 자연 세계에
개입하시는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인간적 인과율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방향으로 이끌어가
는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20세기 후반에 이런 사역에 대한 왜곡된 이해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이 사역의 핵심은 성령의 주도적인 의지와 인간의 순종에 있다.
복음전도 또는 선교 사역이 단지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제한될 때 그것은 힘이 없을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성령의 역사 곧 성령의 강력한 개입이 동반되어야 한다(살전 1:5 참
조). 바울의 선교에서 강함의 사도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능력 대결
(power encounter) 또는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고, 다른 하나는 권능(miracles)과
기사(wonders)와 표적(signs)이다.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의 첫 번째 사역지 구브로에서 바예수를 만난 사건은 영적 전쟁의 전
형적인 사례 중 하나다(행 13:4-12).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서 선지자로 불린 반면(행
13:1), 바예수는 마술사이자 거짓 선지자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 사건은 개별 마술사와의 갈등
문제를 넘어 이방인 선교에 잠재적 저항 세력으로 작용하는 마술 전체와의 대결을 상징한다.
더욱이 이방인 세계에서 기독교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종파들 중 하나로 여겨졌을 것이다. 따
라서 교회개척 사역자들은 이방인들에게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공적 삶을 살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와 대결
하였던 영적 전쟁을 상기시킨다. 예수께서 그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바울과 바나바도 바예
수를 상대하여 이겼다. 그 결과 총독 서기오 바울이 회심하였으며, 이는 바울 팀이 이방인 선
교 여행에서 거둔 첫 열매가 되었다. 총독의 회심은 그가 섬의 강력한 정치 지도자 중 한 사
79)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Maryknoll, NY: Orbis, 1991), 177.
람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고니온에 들어가 사역을 시작한 바울과 바나바는 곧바로 유대인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
치게 되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그곳에 장기적으로 머물면서 은혜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다(행 14:1-4). 이 사건은
두 가지 방식으로 도시에 큰 갈등을 일으켰다. 하나는 유대교를 믿는 신자들과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유대인과 사도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
이었다. 이런 갈등과 혼란은 교회개척사역이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
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성공 가능성도 높아진다.
빌립보와 에베소에서 행한 바울 팀의 사역은 영적 전쟁의 전개 과정을 잘 보여준다(행
16:16-40; 19:10-20). 바울은 빌립보에서 노예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다. 그런데 이
영적 대결은 그녀를 통해 이득을 얻는 주인과 정치적 권력자들과의 대결로 발전되었다. 에베
소서 6:12은 교회개척을 포함한 하나님의 선교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과 우주
적 차원에서도 영적 전쟁을 수반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영적 전쟁을 세 가지
범주 곧 “지상적 수준의 영적 전쟁”(ground-level spiritual warfare), “주술적 수준의 영적
전쟁”(occult-level spiritual warfare),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strategic-level spiritual
warfare)으로 구분하는 피터 와그너의 견해는 성경의 원리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80) 로마의
여신 다이아나(Diana)와 같은 존재인 아데미(아르테미스, Artemis)는 매춘과 관련된 희생 제
의로 다산을 약속했다.81) 처음에 수적으로 작은 교회에 강림하신 성령은 교회개척자들에게 몇
세기 동안 도시를 지배했던 악령들과 대결하도록 능력을 부어주었다.
영적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하나님의 승리를 예기(豫期)한다. 그
것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로 여겨질 수 있다. 돈 윌리엄스(Don Williams)는 자
신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에 따르면 기사와
표적은 하나님의 강력한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존재를 증명한다.82) 존 칼빈(John
Calvin)은 이고니온에서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주님은 기적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셨다. 주님의 그런 행위는 우리에게 실제로 기적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기적의 주된 목적은 참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보
여 주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적을 왜곡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기적)이 그분의
말씀에서 분리되는 것을 거의 허용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들은 완
전하고 진정한 권위로 복음을 세우는 것 외에는 결코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는 원리를 반
드시 지켜야 한다.83)
고린도후서 12:12에 따르면, 바울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사도의 징표로 제시하는 것 같
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행 8:4-8 참조).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놀라운 표적들을 십자가보다 열등한 것으로 평가하고(고전
1:22-23) 사도의 직무와 기적의 사역을 구별한다(고전 12:28).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표적
80) C. Peter Wagner, Acts of the Holy Spirit, 474.
81) Everett Ferguson, Backgrounds of Early Christianity (Grand Rapids, MI: Eerdmans, 1993),
163.
82) Don Williams, Signs, Wonders and Kingdom of God: A Biblical Guide for the Reluctant
Skeptic (Ann Arbor, MI: Vine Books 1989).
83) John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vol. 2, John W. Fraser, trans. (Grand Rapids, MI:
Eerdmans, 1966), 3.
과 기사는 어떤 사람이 성령과 함께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는 있어도 그가 사도임
을 입증하는 증거로는 사용될 수 없다.
바울은 교회개척을 위해 4개 지역을 여행하면서 5개 도시 곧 이고니온(행 14:3), 루스드라
(행 14:8-10), 빌립보(행 16:18), 에베소(행 19:11-12), 드로아(행 20:9-10)에서 기적을 행했
다. 그러나 롤랜드 앨런은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할 목적으로 기적을 행하지 않
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주장에 대한 논거로 바울에 의해 치유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 중
에서 어느 누구도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시한다.84) 하지만 기적이 하나님의
선교에 크게 유용하게 작용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앨런에 따르면 기적은 바울의 선교 현
장에서 크게 다음과 같은 4가지 역할을 하였다. “① 기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② 기적
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행한 사람의 메시지와 사역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다는 증거로 받아들
여졌다. ③ 기적은 새로운 종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④ 사도 바울의 기적은 해방과
구원의 교리를 예증해 주었다.”85)
2) 약함의 사도적 사역
하나님의 능력은 사도의 권위에 필수적이지만 그 능력은 겸손과 섬김의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울은 때때로 전도를 위해 표적과 기사와 권능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회중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섬기고 겸손함으로써 사도적 권위를 나타내고 싶어 했다. 바울은 회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약점과 무력함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의 약점과 무력함은 단지 인간의
실패나 패배가 아니었다. 한스 폰 캄펜하우젠(Hans von Campenhausen)에 따르면
따라서 사도적, 기독교적 삶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철저히 변증법적이다. 그러나 권위라는
개념의 맥락에서 보면 인간의 실패와 좌절과 같은 부정적인 면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약점, 고통, 실패에 관해 말하는 모든 구절에서 그런 말을 한 뒤에 바로 이어서
그를 통한 그리스도의 강력한 역사(役事), 그리스도의 승리와 개가에 대해 말한다.86)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난’ 사상이 있다. 의로운 사람들이 부도덕한 사회에서 이유 없
이 고난을 겪는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런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책은 욥기와
이사야서다. 욥기는 신정론의 관점에서 고통을 해명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사
야서는 묵시문학적 세계관 속에서 고난의 종에 대한 사상을 담고 있다. 구약에서 고난에 대한
이런 사상은 구심적 선교 곧 하나님께로부터 선택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열방을 향한 제사장
적 사명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출 19:5-6).
예수의 메시아 사역도 고난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당할
죽음을 구원론의 관점에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개념을 통해 이해하였다(마
16:21; 막 8:31; 9:31; 10:33; 눅 9:22; 17:25). 예수의 고난은 사도들이 앞으로 겪게 될 여러
가지 고난의 원형이 되었으며,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기쁨으로 고난을 받
도록 요청하였다.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보낼 때, 그분은 그들이 고난을 당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10:17; 눅 11:49).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이 일시적으로
84)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 42.
85) Ibid., 43-48.
86) Hans von Campenhausen,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Spiritual Power, 42.
고난을 겪으며 행한 선교 사역은 오순절 이후 그들이 어떻게 사도적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를 예견할 수 있는 선행적 활동이었다.
고난에 대한 예수의 생각은 그분의 말과 삶을 통해 사도들에게 전달되었다. 스승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해 배운 사도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울 역시 교회개척을 하는 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그것이 그의 사역 의지를 꺾
지는 못했다. 예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 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를 때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행 9:15-16). 실제로 그는 사역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극
심한 고난을 겪었다(고전 4:9-13; 고후 11:23-27; 참조, 롬 8:35). 그는 이 고난을 통해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고후 4:7; 참조, 빌 4:13)을 깨달았다.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무력함과 고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한에서 사도적 고난을 신학화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 번째와 두
번째 편지에서 볼 때, 아마도 고린도의 일부 신자들이 바울의 약점과 시련을 근거로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한 것 같다. 그들은 웅변과 기적을 통해 영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신뢰
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울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다른 사도들처럼 자신도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런 능력 행함을 근거로 사도직을 주장할 수 있었
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후 12:11-12). 그는 오히려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증거로 고난의 경험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도적 고난이 회중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고후 1:6). 이와 관련하여 발터 슈미탈스는 “그것[고난]은 사도가 겪어야 하는 사도
직의 본질에 속한다.”고 언급한다.87)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의 강함이 인간의 약점을 통해 증명된다는 신학적 명제를 천명했다
(고후 12:9-10).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은 이런 이해에 근거하여 자신의
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할 수 있었다(고후 11:30; 12:9).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할 수 있었다(고후 12:10). 약함에 대한 그의 신학
은 같은 구절에 나오는 다음 문장에서 정점에 이른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8. 제자훈련
가르침과 훈련의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 사역
은 교회개척사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특히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
는 것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복음을 전하고, 회심한 신자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은 개척된 교회를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우는 과정과 같다. 바울 역시 이런 사
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음을 선포하면서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데
이비드 헤셀그레이브(David J. Hesselgrave)가 지적한 바와 같이, 바울의 가르침과 훈련의 사
역은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과 전임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88) 동일한 사례를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분은 열두 명에 대한 제자훈련을 군중
87) Walter Schmithals, The Office of Apostle in the Early Church, 47. 콜린 크루즈(Colin
Kruse)는 예수와 바울의 사역에서 종과 고난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설명하는 그의 책에
서 사도적 사역은 봉사의 직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도이자 참
된 종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한다. Colin Kruse, New Testament Models for
Ministry: Jesus and Paul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83), 83.
88) David J. Hesselgrave, Planting Churches Cross-culturally: North America and Beyond,
에게 가르치는 것과 분리시켰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 안디옥에서 회중에 속한 일반 신자들을 가르치는 사역
을 하였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 11:26). 당시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은 신앙적인
면에서 아직 “어리고 교육받지 않은 신자들이었다.”89) 바나바와 함께 바울은 그들에게 구속
(救贖)의 의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가르쳤다. 이로 인해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은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행 11:26).
일반적인 회중 구성원들과는 다른 그룹으로 분류되는 지역교회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프로그
램은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르는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진행되었다. 두란노 서원은 일종의
훈련학교로서 일정한 교육적 형식에 맞춰 사역자들을 육성하였다. 이 학교의 목적은 교회개척
자들을 양성하고 그들이 또 다른 개척자들을 재생산할 수 있게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가르친 내용은 헬레니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교과 과정과는 많이 달
랐다.90) 데이비드 쉔크(David W. Shenk)와 얼빈 슈트츠만(Ervin R. Stutzman)은 사도행전
20:4에 나오는 사람들의 목록이 바울이 에베소에서 가르친 사람들과 같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
한다. 선교 및 교회개척에 관한 바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세
운 몇몇 교회들을 확인하기 위해 에베소를 떠났을 때 동행한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쉔
크와 슈트츠만의 표현에 따르면, “이 여정이 바울이 훈련하고 있었던 지도자들에게는 일종의
타문화권 교회개척의 현장을 답사하는 여행이 되었다.”91)
교회 설립의 중심축을 이루는 바울의 가르침과 훈련은 선택된 사람들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서 수행되었다. 멘토로서 바울은 자신의 훈련생들이 선교와 교회개척 사역을 위해 충분히 무
장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관계는 비공식적이지만 매우 친밀했다. 바울의 훈련 방법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의 훈련 방법과 비슷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자신
이 멘토링한 제자들과 그가 세운 교회의 신자들에게 자신 있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할
수 있었다(고전 4:16; 11:1; 빌 3:17).
바울의 훈련생들이 자신의 눈으로 성령의 능력을 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가르
쳤다. 그의 교육 방법은 특정한 커리큘럼과 학습 일정에 의해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을 사역 현장으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들과 함께 일하기도 하였다. 헤셀그레
이브에 의하면 “그것은 현장 중심의 훈련(on-the-job training)이었다. 젊은 선교-전도자들에
게 이것은 사도와 동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요한 마가, 디모데, 디도는 모두 훈련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장로 훈련과 선교사 훈련 사이에 존재하는 큰 차이점 중 하
나다.”92)
바울은 훈련생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들과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그들을 위
한 중보기도는 그의 훈련생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살전 3:9-10; 골 1:3, 9). 그의 영적
멘토링은 자신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제자들을 대한다고 언급했을 때 가장 뚜렷하게 의미
가 드러난다(고전 4:15; 빌 2:22; 살전 2:11).
2nd edit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0), 105.
89)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205.
90) Everett Ferguson, Backgrounds of Early Christianity, 100-103 참조.
91) 데이빗 쉔크 ‧ 얼빈 슈트츠만, 『초대교회 모델을 따라 교회를 개척하라』, 219.
92) David J. Hesselgrave, Planting Churches Cross-culturally,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