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의 결혼관
고대 근동의 결혼관
목차
I. 들어가는 말 1
II. 성경적 결혼관 1
A. 고대 근동의 결혼관 2
B. 결혼 제도의 기원과 성경적 의미 3
1. 창세기 2:24 3
a. 떠남
b. 연합함
c. 한 몸 이룸
2. 돕는 배필 8
C.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9
D 시형제 혼인제도 11
1. 가나안의 상속혼인
2. 고엘제도
3. 목적
a. 혈통의 계승
b. 가산의 보존
c. 과부 보호
E. 복음서를 통해 본 예수님의 결혼관 14
F 비울의 결혼관 15
1. 독신의 동기
2. 독신의 자격
III. 성경적 성관 16
A. 구약성경의 이해 16
1 .창세기에 있어서의 성의 기원
2. 다른 성경들에 있어서의 성
B. 성의 목적 18
1. 부부간의 하나됨
2. 성은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IV. 나가는 말 19
V. 참고 문헌 21
I. 들어가는 말
결혼이란 무엇인가? 많은 선남선녀들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다시 이야기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헤어질 수 있다는 말로 해석 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결혼한 사람들 중 약 40%가 이혼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도된다. 우리 나라도 작년에 법원을 통해 이혼을 한 커플이 6쌍중 1쌍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합의 이혼을 합치면 더 높은 수치의 통계가 된다는 이야기다. 일본에서는 중년을 넘어 노년기에 들어선 60세 이상의 부부들의 이혼도 늘어가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과연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잘못된 결혼관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옛 말에 이르기를 결혼은 인륜 지대 사라고 했다. 러시아 속담에는 ‘바다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세번 기도하라’고 했다. 모두가 결혼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는 결혼의 중요성이 깨어지고 있다. 계약결혼이라는 말이 있고 독신자들이 생기는가 하면 동성애 자들이 정당화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분명히 성경은 결혼의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임을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밖의 행위는 모두 죄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마는 또한 많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은 이제 피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성의 문란과 아울러 결혼의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혼전 성 경험은 이제 보편화가 되었다.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여성운동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 이슈를 끌고 왔다. 여성운동은 이제 여성들을 집밖으로 나오게 만들었고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속에 돕는 배필로서의 위치가 바뀌게 됨으로 결혼의 파괴와 가정의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우리사람들을 이기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결혼이 더 이상 약속의 관계가 아니라 계약의 관계로 변하고 말았다. 계약에 의한 사고 방식은 각각의 배우자들이 권리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어떤 동의서에 동의를 하고 더 나아가서는 결혼 생활이 이혼으로 끝날 것에 대비하여 계산을 미리 분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경이 제시하고 가르치는 결혼의 참 의미를 이 글을 통해서 되짚어 보고자 한다.
먼저 성격적인 결혼관을 살펴보았다. 고대 근동의 결혼관을 살피면서 그 당시 습관을 보았고, 창세기 2: 24절을 통하여 결혼의 성경상의 의미를 정리해 보았다. 다음으로 성경에 창조 질서와 위반되는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그리고 시형제의의 혼인 관계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당시 가나안의 상속혼인과 그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가서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결혼관과 바울의 결혼관을 살폈다. 특히 바울의 결혼관에서는 고전 7장에 준하여 바울이 말하고 있는 독신에 대하여 동기와 자격에 대하여 살폈다. 마지막으로, 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통해서 성의 기원을, 또 그 외의 성경들 속의 성의 문제를 다루었고, 성의 목적을 잠깐 언급하였다.
II.성경적 결혼관
결혼을 단지 전통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짖는 것. 즉, 육체적인 결합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크리스 텐센(Harold Chris tensen)에 의하면 “결혼은 하나의 사회제도이며, 또한 사회 규범에 어떤 영속성과 일치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즉, 모든 사회적 관계는 가정에서 출발된다고 보았으며, 사회 규범의 초석도 역시 결혼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창조의 질서”를 토대로 하여 성경속에 나타나고 있는 결혼관을 살펴보려고 한다
A.고대 근동의 결혼관
성경적인 결혼관을 찾아보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의 결혼 제도를 살펴보자.
고대 근동이라 함은 이집트로부터 시작하여 팔레스타인,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지방을 말한다. 이 지역에 많은 유적들이 발견됨에 따라 구약 성서의 법규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지고, 또 그들의 법규와 구약의 법규들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이 당시의 문화적인 것을 살펴보는 것도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에 있어서 결혼은 가부장적 질서에 의한 것이었다. 일부 일처제가 우세하였으나, 유일한 결혼형태는 아니었다. 바빌로니아인 들은 한 명의 부인을 주요한 부인으로 삼았다. 때로는 한 남자가 두 자매를 부인으로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한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종속적이었다. 야곱의 경우는 한 이스라엘인이 두명의 자매와 결혼하는 것을 보여 준다.(레 18;18). 사회계층간의 내부 결혼은 금지되지 않았다. 종이 자유한 여인과 결혼하는 일도 있었다. 그녀의 자식은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자유자 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재산과 노예 아버지의 재산의 절반을 상속받았다. 이들의 또 다른 관습으로는 납폐급 제도가 있었다. 만일 구혼자가 구혼을 철회하면 신부의 아버지는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그 납폐금을 돌려주지 않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신랑의 아버지가 자신의 마음을 바꾼 경우에는 구혼자에게 그가 받은 금액의 두배를 갚아야 한다(160-161조). 힛타이트인들도 이와 유사한 규정을 가지고 있는데(I 30-31) 신랑이 질병에 의해서 죽었을 때 신랑 측이 보상을 받을 규정은 없다. 이런 경우에 이전의 협정은 깨지고 새로운 구혼자가 그의 전임자가 보상을 해준다(I 29조)
또 하나 힛타이트인들과 앗시리아인들은 만일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죽으면 첫번째로 그의 형제가, 두번째로는 그의 아버지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는 그 형제는 그의 부부관계에 상관없이 그녀와 결혼할 수 있고 또 결혼해야 한다.
앗시리아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조항이 있다. 만일 한 남자가 한 신부를 그의 아들에게 지명하였는데, 그 아들이 죽거나 도망을 쳤다면 , 그는 그녀에게 그의 남아있는 자식들 중에서 10살 이상은 누구든지 줄 수 있다. 만일 신부가 지명된 아버지와 아들이 죽는다면 후자의 아들이 10 살 이상일 때 그의 죽은 아버지의 부인과 결혼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신부의 아버지는 그 약혼을 파기하고 그가 받은 것들 중에서 식량을 제외한 모든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조항들은 성경에 나오는 시형제(Levirate) 제도와 유사하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무자한 과부의 경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목적은 고인의 자손을 얻기 위함이다. 곧 대가 끊길 위험에 처한 형제의 가문에 자식을 낳아 주므로 서 그 혈통을 지속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족들과는 틀리다. 앗시리아인의 규정에 의하면 아비의 집에서 아들과 거주하는 과부는 그녀의 시아버지와 결혼할 수 있다. 만일 그녀의 남편은 물론 시아버지도 죽었다면 그리고 그녀에게 자식이 없다면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것으로 갈 수 있다. 만일 한 남자가 그의 장인에게 납폐금을 지불하였는데 신부가 죽었다면, 그는 부인의 형제들 중의 한사람과 결혼하거나, 그의 양식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지불한 화폐(silver)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만일 한 남자가 그이 아들을 대신하여 납폐급을 지불했는데 결혼 전에 그 아들이 죽었다면 그는 그의 죽은 아들의 부인과 그가 지명한 아들이 결혼하게 할 수 있다. 이때 첫번 약혼은 파기하고 납폐급은 양식을 제외하고는 되돌려 져야 한다. 앗시리아인들의 입장은 두 가족 사이에 결혼을 통해서 맺어진 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먼저 맺어진 약혼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후에 맺어진 약혼에 의해 부가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과부가 아이를 데리고 있다면 그녀는 망부의 아버지에 의해서 맺어진 남자의 가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여자에 관한 입장은 동부 셈족과 이스라엘의 그것과 같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가정에 속하며, 남자에게 자식을 낳아줄 목적으로 남편의 가족에 속한다. 만일 그녀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납폐금은 남편에게 돌려져야 한다.
B. 결혼제도의 기원과 성경적 의미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당신의 형상(imago Dei) 대로 창조하여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니 다 좋은데 좋지 못한 것이 꼭 한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로서 우리는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제도이며, 선물이며, 우주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혼 제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창세기 2 : 24 절
창 2: 24절은 결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 여기에서 중요한 동사표현 세 개가 나오는데 첫째는 “떠나다”, 둘째는 “연합하다” 이며 셋째는 “한 몸을 이루다”이다.
이 세가지 표현읕 결혼에서 중요한 원리와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트로비쉬(W. Trobitch)는 이 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떠남 (Le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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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Cleaving) 한 몸 이룸(One Flesh)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떠남” 과 “연합” 과 “한 몸 이룸”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셋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상호 연결이 끊어지고 그 균형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결혼에서 이 세 가지가 서로 필요충분 조건이 되어야 하며 이는 새로운 성장을 향한 기초가 된다.
a. 떠남 (Leaving)
각 개인은 그 동안에 자라오며 보호받던 그 보금자리로부터 떠남으로서 결혼의 시작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이 떠남은 공적이며 법적인 행동을 뜻한다.
맥래(W. Mcrae)는 이러한 떠남이 이루어져야 할 영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주고 있 다.
첫째, 지정학적인 떠남이 있어야 한다. 지리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것은 떠남을 강화해 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통의 발달로 인해 이러한 떠남이 약화되고 있다.
둘째, 경제적 떠남이 있어야 한다. 이는 지정학적인 떠남보다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결혼초기에는 일시적으로 예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부모에 의지하게 될 때는 “가정의 머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아내는 더 이상 그녀의 머리로서 남편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심리적 떠남이다. 심리적 떠남을 이룰 때 부모와의 관계는 변화되며 이것에 실패할 때 “어른-애”가 된다. 이는 끊임없이 아내와 어머니를 비교하여 가정불화를 일으키게 한다.
이렇게 떠난다는 의미는 부모를 공경하던 것을 이제는 더 이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기족교인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나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의 틀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 틀을 깨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틀이 깨어질 때 새로운 미래와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떠남은 어느 한편만이 아닌 두 사람 모두에게 족용이 되는 것이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신랑에게 인도되고 또 그 부모님에게 인사하며 키스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감사의 표시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또한 남자는 떠났지만 여자는 떠나지 못할 때 혹은 이와 반대의 경우가 될 때에는 연합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떠남은 연합의 기초가 되며 한 걸음 나아가 연합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떠남으로 인한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로, 떠남은 두 사람에게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되며,
둘째로, 부모에게도 성장을 위한 장이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부모를 떠났을 때 새로운 관계는 성장하게 되며 이제 독립된 존재로 서 “서로의 깊은 헌신과 위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떠남으로 인해 부모에게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자녀들이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부모를 떠나지 못할 때 부모의 삶은 자녀에게 방해를 받게 되며 또 다른 면으로는 부모가 자기의 삶의 방식대로 자녀에게 고집하므로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고부간의 갈등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클라인벨(H. Clinebell)도 이러한 떠남으로 인한 성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부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이루기 위해 떠나며 그 형태는 한 쌍의 배필이 지니고 있는 개성의 상호 작용과 통합과 재분화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떠난다는 의미를 새로운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이루기 위한 시도로 보고 있으며 서로간의 한 몸을 이루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b. 연합함(Cleaving)
연합은 떠남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오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떠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진정 한 몸으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연합이라는 뜻은 문자 적으로 살펴보면 “to cling to", "to stick to", "to be glued to" 로 이것을 해석해 보면 아교로 둘을 붙이듯이 견고하게 서로 접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은 분리하면 찢어지는 것과 같이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다는 것도 이와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 일부일처(Monogamy)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연합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가정의 불화와 질투의 사건이 바로 이 일부일처제가 깨진 상태에서의 사건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성경은 일부일처를 강조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언급이 출 20:17, 레 18:18에 나타나고 있다.
창 2:24절의 “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에서도 진정한 연합을 이 루기 위해서는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합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일처를 깨뜨린 만은 위인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 외에 하갈을 취하므로 이스마엘이 출생되고 그후에 이삭과의 갈등이 일어났던 것이다. 야곱, 다윗, 솔로몬, 삼손등도 똑같은 문제와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둘째로, 연합은 두 사람간의 독점적이요 유일한 관계임을 암시한다.
맥래(McRae)는 결혼에서 서로의 충성은 결혼전의 순결처럼 걸혼에 대한 중요한 성경의 개념이다. 하나님이 결혼에서 순결과 연합을 강조하는 이유를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보호 및 우리의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주장에 비추어서 연합의 중요성을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a)육체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현대인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는 많은 병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후천성면역 결핍증(Aids)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에 기초한 결혼관계를 이탈하고 일부일처제를 무시하고 많은 사람과 무분별하며 무절제한 관계를 맺음으로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b)정신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일부일처제로 맺어진 가정은 육체적인 건강뿐 이 나라 정신적인 건강도 지켜준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가정에서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인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그 무엇을 얻고 누린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평안히 없다면 결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정이 제공해주는 이러한 정신적 평안과 안식은 아주 귀한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아무리 오늘날 핵가족과 산업화나 개인주의로 인하여 일부일처의 가정을 파괴하려는 위협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가정이 정신적인 건강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사회는 결코 건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전형적인 현대 신학자 포엘(Cornelius J. Vander Poel)은 결혼에 대하여의 연합을 다음 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남편과 아내의 합과 상호교류는 너무나 깊고 너무나 전적인 포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말의 가장 완전한 의미는 서로가 자신을 완전히 다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c) 결혼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이란 두 사람만의 약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었다는 마태복음 19:4,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생각인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의 결혼계약은 “영구적이고 무조건적인 헌신”이기에 죽음에 있어서만 해제되는 것이다.
d) 결혼에서 연합은 우리의 사회를 지켜준다.
“결혼은 사회적인 헌신이다”는 셀(Sell)의 말은 상당한 의미가 숨어있다. 성경은 사적인 동거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모를 떠나 연합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공적인 행위”이다. 구약에 나타난 법적 규약은 결혼이 사회전체의 합법적인 관심사임을 보여주며 이는 사회를 유지하는 틀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지켜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파괴되어진 가정 위에는 사회가 올바로 존립할 수 가 없는 것이다.
c. 한 몸 이룸(One Flesh)
이미 우리는 앞에서 떠남과 연합의 의미와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한 몸 이 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창 2:23절의 아담의 감탄사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동물을 지으시고 아담을 지으셔서 함께 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담 홀로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신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닮은 아담에게 짐승들의 이름들을 붙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구약성경에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어느 사람이나 물건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본질까지도 결정짓는 그런 것을 뜻했던 것이다.(창 4:1, 25; 사무엘상 1:20). 이 말은 곧 아담이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에서 이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권세를 가지고 지신이 이름을 짓는 모든 짐승들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짐승들 가운데 무언가에 허전함을 가지고 있는 아담에게 딱 맞는 동반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지으시기 위해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여(창 2:21)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후(창 2:22)아담에게로 데리고 오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였다.
오성춘은 한몸되는 것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한 몸의 인격체의 특성은 상호교통(Communication), 나눔(Sharing), 돌봄(Caring)이며 끊임없이 상호 교통한다...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이 세 가지의 서약을 의미한다.
이는 한 몸 이룸에서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한 몸 이룸이란 단지 육체적인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체를 이루며 의사소통과 나눔 그리고 돌봄이 평생 지속됨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인격체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창조질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거나 종속을 의미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과 고유성을 더욱 더 개발하고 장려하는 가운데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장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뜻한다.
*마침표
성경 창세기 2장 24절에 있는 마침표에 관하여 월터 트로비쉬는 그의 저서인 “나는 너 와 결혼하였다” 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 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나오는 마침표는 자녀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결혼에 대한 부가적인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이처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창 1:28).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볼 때 이 명령은 복을 주신 행동에 대한 부가적인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결혼의 필수적인 요소를 열거할 때 어린애를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떠나고,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침표! 이것은 비록 자녀가 없다해도 한 몸으로 연합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마침표는 자녀가 결혼을 결혼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녀가 없는 결혼도 역시 완전한 의미에서의 결혼인 것이다.
마침표는 임신하지 못하는 것이 이혼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됨에 있어서;
인격체는 처음부터 교제를 나누는 사회적인 특성을 갖고서 태어났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수적이었듯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그리고 땅을 다스리기 위해 배우자가 필요하였다. 하나됨의 의미는 여자가 창조됨과 연관이 있다. 최초의 여자는 남편의 한 부분으로부터 만들어 졌기 때문에, 후에 각 남자는 그의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 연합의 의미는 부부가 몸과 마음이 하 나가 되는 전 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히브리어의 ‘안다’ 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창조 때 정해진 둘이 하나됨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마 19:6) 사람이 독처하여서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이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독신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전 7:1)라는 사도 바울의 말도 있고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창 2:18)라는 창조 질서의 말도 있음을 볼 루터는 독신 생활에 대하여 결혼은 의무로서 해석하며, 모든 사람은 결혼하도록 창조되었으며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본질서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형성하므로 독신 생활에 대하여 어떠한 미덕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예수 님은, 결혼을 창조 질서로써 고귀하게 보나, 이와 마찬가지로 결혼은 구속의 질서에 의해서 상대화된다고 보고 있으므로 독신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2.돕는 배필
창세기 2장 18절에,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라는 문장의 `ezer kenegdo (돕는 배필)이란 말이 오랜 세월동안 잘못 해석되어 왔으며 잘못 쓰여져 왔다. 그 동안 여러 다른 번역 본들을 통하여 이 구절이 그 원 뜻으로부터 왜곡되어져 왔으며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참 뜻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뜻은 종처럼의 섬김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가정 일에 대한 감소를 뜻하지도 않는다. `ezer 이란 단어는 보편적으로 어려움에 빠져있는 인간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종속되어진 도움이 아니라 윗사람의 도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는 이 윗사람의 도움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고 kenegdo이다. 문자 적인 해석은 “..에 대립하여”, “ 그 앞에서”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뜻은 “..에 얼 맞는”, “..에 해당되는”이다. 결론적으로 이 단어는 누구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자세의 도움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에게 종속되어 받는 그런 도움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딱 알맞은 그 누군가를 창조하셔서 그 둘이서 함께 교제하며,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서로 도와가며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그녀는 그의 위에 오르도록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지지 도 않았고, 그에게 짓밟히도록 그의 발로부터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와 동등하기 위하여 그의 옆구리에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그의 팔 아래에서, 그리고 사랑 받기 이하 여 그의 심장 가까이 에서부터 만들어 졌다.”고 하였다. 이 말은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중 요한 기초가 된다. 성경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돕는 배필”을 만들겠다고 하셨다(창2:18) 돕는 배필(A helper correstponding to him) 이라는 말은 “...앞에” 또는 “...와 얼굴을 맞대고”등의 의미를 가진 에서 유래한다. 이런 배경은 인격의 동등 성을 나타낸다. 여자는 남자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 문에 인격적으로 동등하고 따라서 여자와 남자는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잊 지말아야 할 것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돕는 자의 위치라는 것이다. 신양성경에 보면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하 고 있다. 남자의 존재 목적이 여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 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많은 다 른 피조물로 도울 수 도 있겠지만 특별히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 는 안될 것이다.
C 일부 일처제 와 일부 다처제
창세기의 설명은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라”(창 1:28, 2:24) 하였다. 여기서“한 몸”(dne flesh)이라는 의미는 결혼의 일부일처주의와 영원성을 찾아볼 수 있다. 말라기와, 그리스도는 본 구절은 결혼의 확고한 성격과 일부일처 주의임을 명백히 하였다. 일부일처제도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고 성적으로 결합함과 동시에 그 관계의 영원성을 기약하고, 이 관계에 따르는 법적, 인격적 책임을 지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이후 창조질서로서의 일부일처주의가 변하여 구약시대에서는 일부다처주의 결혼 형태가 현저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운 거룩한 생활의 표준과 기준에 비춰볼 때 창조질서에 대한 위반이고 처음 인간에게 제시된 규정에 대한 위반인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일부다처제를 취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라멕이 아다와 실라를, 아브라함이 사라와 하갈을 , 야곱이 레아와 라헬과 빌하와 실바를, 엘가나가 한나와 브니나를 다윗이 아비가일과 아히노암등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일처를 깨뜨린 성경의 위인들은 끊임없는 가정 불화 교통을 겪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보면 위에 언급한 사람들 중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외에 하갈을 취함으로 이스마엘이 출생함으로 이삭과 갈등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야곱도 역시 이러한 갈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다윗도 이로 인해 심지어는 말년에 자식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서 솔로몬 삼손등도 똑같은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성경 어디에도 일부 다처제를 허용하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때로는 일 부 다처제의 금지가 극히 불안정한 바탕위에 서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예컨대 칼 바르트는 “일부 다처제가 명백히 금지되어 있고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으로 명령되어 있는 본문을 단 한곳도 분명하게 지적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주의 적으로 성경에 접근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을 논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결론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오스왈드 화운틴(Oswald Fountain)은 일부다처론에 대한 교회의 비판은 “성경에 근거하여 볼 때 근거가 불 충분한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그로나 우리는 레위기 18:18에서 일부 다처제를 분명하게 금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레위기 18:18은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결혼 구례에 바탕을 둔 신약의 다섯 성경구절들도 창세기의 창조질서가 가 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를 금한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신약의 구절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7: 1-2는, “남자마다 자기 아내 을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고 있고, 디모데전서 3:2,12는 적어도 감독 들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마지막 두 구절을 보면 개종 하였지만 여전히 일부 다처제가 이방인 교회에 유지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감독이나 집사직을 맡을 자격이 박탈당하였다. 그 럼에 도 불구하고 일부 다처제는 족장 시대나 이스라엘 유다 왕들의 시대에 그랬던 것보 다 “합법적”이거나 “규준적”이지 않았다.
일부 일처제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으로 잠언 5; 15-21을 들 수 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나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곳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런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다른 남자의 아내)의 가슴을 안겠느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이 훈계들은 “젊어서 취한 아내” 외에 여러 아내들을 둔 한 남자가 순종할 수 있겠 는가? 남자가 규방의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데 “그녀의 품을 항상 족하 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다른 여자들이 아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 그녀의 사 랑을 연모할” 수 있겠는가?
일부 다처제는 구약과 신약의 사회에 존재하기는 하지마는 결코 하나님의 질서는 아니었다.
D.시형제 혼인제도
시형제 혼인 제도의 기원에 대하여서 그것이 가나안에서 유래 되었다고 보는 견해 와 또는 그것이 고엘제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1. 가나안의 상속혼인
신명기 25장의 시형제 혼인 관습이 가나안에서 유래되었다는 이론은 Burrows가 제시 했다. 그는 Art의 이론 을 근거로해서 이스라엘의 법의 기원과 구조를 재구 성하면서 그것이 본래 가나안의 문서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서 본래의 결의론적 가나안 법을 Burrows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다.
“만일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들 중의 하나가 죽고 자식이 없으면 그
교인의 부인은 외부의 낯선 자와 결혼하지 말라 그녀의 시형 제가
그녀를 부인으로 취하라 그러나 그가 형수를 취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서 성문의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말하기를 ‘나는 그녀를 취하지
않겠다’ 고 말하면 그는 그의 신발을 벗어야 한다.”
Burrows는 본래의 가나안 법에는 과부는 형제가 상속받는 기업의 일부임을 내포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시형제 혼인이 상속자의 권리이지 의무가 결코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가나안 법규의 신면기 편집자를 그 법규를 이스라엘의 법으로 들여올 때 매우 중대한 변경을 가 하였다고 보았다. 그 변경시킨 것은 첫째, 시형제 혼인 을 필연적(apodictic)인 이스라엘 법규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이는 신 25:5,6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삽입은 시형제 혼인을 본래의 상속의 범주에서 제해 버렸고, 어떤 면에서는 고인의 이름과 생명을 지속시키는 수단으로 바꾸어 버렸다. 둘째 그 편집자는 시형제 혼인이 시형제 측의 권리이기 보다는 의무로 만들었다. 시형제 혼인은 본래 그 집의 남자 구성원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였다. 즉, 여자에게 있어서 혼인이란 부가되는 남자와의 결합일 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의 결합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부가 사망하여 과부가 된 경우에도 계속하여 그 가의 소유물이 되었고 그녀 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자는 가치 있고 유용한 가산인 그녀를 사용하지 아니한 채 그 냥 둘 수는 없게 된다. 그래서 그녀를 가산으로서 매매하거나 처로 삼거나 때에 따 라서는 자녀룰 낳을 수 있는 과부는 그 가의 다른 구성원의 처로 삼게 할 수 있었 다. 이와 같이 신명기 편집자가 가나안의 결의론 적인 법규를 필연적인 법으로 바 꾸었다고 하는 Burrows의 이론은 본래의 가나안(그는 이것이 메소포타미아의 관습 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혼인은 주로 구매에 의한 혼인이라는 가정에 기인한 것이다.
즉, 과부가 근족에 의해서 상속되는 재산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신 명기 25장 5정 이하의 이스라엘 법규의 기원이 가나안이라고 하는 것은 가설로서 확 실한 것이 못되는데, 그 이유는 가나안으로부터 나온 법규중 에서 이것과 비교할 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2.고엘 제도
고엘(속량자)은 가장 가까운 친척의 부채를 갚아주고, 그의 원수에게서 방어하는 자요, 자기 집단과 개인적인 친척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고엘의 의 무에는 기업 무르기(Redemption)와 시형제 혼인에 대한 의무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이유로 시형제 혼인의 기원을 고엘 제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 된다. Fewer는 시형제 혼인이 상환(geullah)의 영역에서 기원되었다고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4단계의 발전 단계를 가정하였는데, 첫째, 가까운 근족인 고엘이 그의 근족인 상속자가 되며, 과부와 혼인하는 형태인데, 이는 룻기의 기업이음과 결혼이 혼합된 형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단지 형제들만이 시형제 혼인의 의무 를 수행하는 것이 요청되며, 세번째는 함께 동거하는 형제만이 해당되는 형태이고, 마지막으로는 어떤 형태로도 그의 형제의 부인을 취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다,.(레 20:21)
3.목적
이스라엘에서 시형제 혼인의 본질적인 원인이자 목적은 남자의 후손을 계승시켜 그 “이름”과 그 “집”을 계속 살아 남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감정의 동기만이 문제 가 되는 것이 아나라, 오히려 혈족에게 두는 의미가 표현되는 것 같다. 집안의 재물 이 낯선 사람에게 가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도 여기에 포함 되어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시형제 혼인을 설명하면서 이 제도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 는데 이는 가족의 대가 이어지며, 재산이 가문에서 존속되고 고통받는 과부를 위안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a)혈통의 계승
구약의 시형제 혼인에 대한 세곳의 언급은 그 제도의 주요한 목적이 자식이 없는 과부에게 자식을 주기 위한 것임을 제시한다. 자식을 낳아서 가문의 소멸을 방지하는 것은 시형제 혼인을 행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는 시형제 혼인 이 단지 남편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때만 효력을 갖게되는 것을 제시하는 신 25장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또한 유다가 오난에게 그의 형수에게 들어가라 고 한 명령은 그의 죽은 자의 후손을 양육할 의무고 내포하는 것이다.(창 38:8). 이와 유사하게 보아스와 룻의 결혼도 룻에게 남자아이를 낳게 하므로 써 룻의 죽 은 남편의 혈통을 지속시키려고 의도한 것이 첫째 의도이다(룻 4:13)
시형제 혼인이라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혈연적 유대에 접근 하는 중요한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자식을 낳기 위해 강구 될 수 있는 모든 수단 이 동원되었다. 결혼 후 1년간 군대복무가 면제되었는데(신 24:5) 이는 그가 아 이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그의 부인과 함께 있도록 배려 한 것이다. 롯의 딸들 이 근친상간(incest)을 범한 것도 그들이 아버지의 씨를 유지하려고(창19장) 했다 는 점에서 스스로 자위를 얻기도 했다. 알부다처제의 사회에서는 어려움없이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만일 부인의 잉태치 못하면, 부인은 자신의 여종 을 주어서 여종을 통해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 가 아들 없이 죽게 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시형제 혼인 이었다.
(b) 가산의 보존
고인의 자손을 낳는 것이 시형제 혼인의 주요한 목적이었을 뿐 아니라
도 다른 의미로 재산의 상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명기 25장 6절의 시형제 혼인에 의해서 출생한 첫째 아들이 고인이 이름을 물려받음로써 그의 이름이 이 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게 되어야 한다는 증언에서 제시된다. 그 단어 sem이 이 문맥에서는 문자 적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다말이나 룻 어 느 누구도 실제로는 그들의 자식을 고인인 남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 이다.(창 38:29, 룻 4:17) 그 보다는 sem이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남자의 재산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형제 혼인에 의해서 출생한 장자가 죽은 자의 이름을 잇는다는 규정은 단지 가계의 계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한 자의 재산이 시형제 혼인을 하는 형제에게 이어지는 상속을 뜻한다고 해 석 된다. 한 예로 민수기 27장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 게 나아와서 아바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주장한다. 왜냐하 면 슬로브핫이 아들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왜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 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 되리이가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 기업을 주소서”(4절)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인의 이름은 그의 재산과 관계 가 있는 한 후손들에게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자의 이름이 그의 재산과 밀접하게 관계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고인이 된 남편 재산의 상속이 신명기 25장 5절에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고 할지라도 시형제 혼인에 의해서 태어난 첫번째 아들이 죽은 자의 그 이름을 잇게 되는 것은 그 선언의 이면에 나타난 확실한 의미이다. 그 이름은 기업과 어느 면에서 명백히 관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시형제 혼인의 목적은 암시적으로 조상의 재산이 양도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c)과부보호
시형제 혼인을 시행 하게된 다른 목적은무지항 과부에게 그 가족 안에서의 신 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즉, 시형제와의 결혼은 혼이으로 인하여 그 부가 생 존했던 동안과 마찬가지로 계속 보호, 배려 및 생계를 보장받으며 부가의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이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사살 자녀가 없으 면 과부의 지위란 불안전하고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부를 보호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결혼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에 서 과부가 고인이 된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는 없었다. 만일 과부에게 자식 들이 있다면, 남편의 재산은 그들에게 넘어간다. 만일 그녀에게 자식이 없다면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재산을 상속받았다.(민 27:8-11). 따라서 이스라 엘 에서 무자한 과부의 상태는 매우 열악했는데 이는 남편의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가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과부가 남편 재산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법규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바로 시형제 혼인 관습이었다. 그리고 시형 제 혼인은 분명히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E. 복음서를 통해 본 에수님의 결혼관
예수님은 몸소 독신으로 살았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가족의 인연을 거절할 것을 요구 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저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새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8:29,30 마 19:29)
비록 에수님은 제자들이 이혼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은 자기와 자기의 사명에 대한 관계는 모든 인간적인 인연에 우선 할 것을 요구 하셨다. 그 이유는 하늘나라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안 가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은 “천 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고 하셨다.(마 19:12) 특별히 독신이 휴거와 관련되 어있으며,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더 쉽다고 하였다.(계 14:4)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결혼이란 창조 질서의 이름으로 결혼에 부여되는 높은 명예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세속적이며, 일시 적인 것 같다.
F. 바울의 결혼관
결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종말론적인 의미가 예수님 보다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바 울이 결혼에 관해서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보면, 창조의 질서로 서의 결혼이 다만 희미한 배경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 반면에 종말과 그 재난에 대비해 기 위해서는 독신으로 있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1.독신의 동기
바울은, 독신이 결혼보다 더 거룩한 것은 아니나, 독신인 들에게는 그들의 온 신체적 힘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을 다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바울은 독신의 필요성 을 이야기하면서 결혼한자들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결혼은 하나의 속박이다. 그는 말하기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고전 7:27)고 하였다.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집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결혼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된다. “이런 이들(결혼한자들)은 육신의 고 난이 있으리라”(고전 7:28) 하였다. 결혼 후에는 자연히 육신에 고난이 증가하여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결혼한 사람은 세상일을 염려하게 된다.“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고전 7:32-34)“라고 하였다. 사실이 그렇다. 결혼한 사람은 아내와 자식을 위하여 세 상일로 분주할 수밖에 없고 세상일로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의 염려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2. 독신의 자격
바울은 독신자의 자격을 고린도 전서7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는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 라”(고전 7:7) 이 말은 사람은 결혼을 할 수도 있으나 또한 독신으로 지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이다. 결혼이 창조질서라고 한다면 독신은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서 그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그렇게 살 아야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인간의 본능의 하나인 성욕이 있으나, 어떤 사람은 성의식은 있으나 성에 대한 충동은 없다. 이러한 경우 후자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둘째로, 마음에 확정한 사람이다.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 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 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 여도 잘하는 것이다”.(고전 7: 36-37) 결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마음의 확정에 따라서 결정할 수 있다. 그 결정은 어떤 결정이 되든지 결코 죄 짓는 것이 아니다. 중 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의 확정이다.
셋째로, 환경 적인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부득이한 일도 없고....”(고전 7:37) 꼭 결 혼해야만 하는 환경 적인 부담이 없다면 독신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대를 있는 다는지 기업을 있는 경우이다.
이상의 경우에서 살펴보면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이지마는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의 확정이나 혹은 하나님의 은사로 독 신으로 지낼 수 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종말론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III. 성경의 성관
A. 구약성경의 이해
1. 창세기에 있어서의 성의 기원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은 성 문제에 대하여 많은 빛을 비추어 주고 있다. 이것들을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모두가 성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한 질서이며, 그 성기와 성행위가 전혀 순결함을 계시함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성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 고,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어느 부분도 불결하거나 부정하다 할 수 없으며, 인간의 어떠한 능력도 불경건하거나, 사악하다 할 수 없다. 이 창조의 이야기는 제2장에서 더욱 회화적이면서 상징적 언어들로써 서술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치 토기장이처럼 아담을 흙으로 빛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심으로서 사람이 되게 하셨고, 그 후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 아담의 고독을 덜어 주도록 하셨으며,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으로 결합함으로 서로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하셨던 것이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은 상태로 부부생활을 하여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문맥상으로 보아 자녀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여기에서 성을 출상의 목적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만일 성의 목적을 출산에 두게되면 인격과 인격간의 성적인 결합이, 목적을 위한 수단처럼 단절된 성행위로 격하되어 버리고 말게된다. 그러므로 성의 목적은 결혼을 위한 것이므로, 둘이 하나되어 함께 살아가는 데서 성적 완성의 황홀경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인격 전부를 서로 상대방에게 주입해 주게 될 것이다.
2. 다른 성경들에 있어서의 성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서 성은 계속하여 다른 성경에서도 논의되어지고 있다. 신명기에 보면 새 신랑은 1년간 군 복무도 제외하고 신부와 같이 있으면서 그를 즐겁게 해 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는 성의 낙만적인 면을 찬미하며, 인간애의 경건을 멀한 곳이 많다. 성경 기자들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첫째로, 야곱과 라헬의 연애를 들고 있다. 실로 라헬을 향한 야곱의 불같은 7년에 7년을 더하는 이역의 머슴사리도 수일 같이 여기며 즐거워했다.(창 29:11, 17-20). 둘째로, 보아스와 모압여인 룻 과의 연애다. 룻기에서는 이 두 사람의 연애가 더욱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이 사랑은 그 씨인 아들 오벳으로 인하여 더욱 귀하였다. 성경에서 이 사랑의 열매를 찬미하여 이스라엘의 기업이요, 생명의 회복 자요, 노년의 봉양자라 하였다. 진실로 다윗의 왕통이 이 경건한 연애를 통하여 주어졌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째로, 아가서는 모든 사랑의 예찬 중에서도 그 절정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가장 아름답고 남녀의 순결한 애정 감정이 잘 묘사돼있는 이 아가서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은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자 그대로 남녀간의 성과 사랑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임을 교훈 하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것이다. 즉 한 성이 다른 성에 대하여 가지는 애정과, 그 애정간에 대화되는 자연적 표현의 정욕이, 하등 불 경건하거나 불결한 것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에대한 인식은 다른 이웃 이방인들과는 구별이 되었다. 이웃나라 백성들은 성을 신성시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비신성시 하였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성을 마음껏, 자유로이 즐기도록 가르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녀간에 “알몸”으로 결합하는 것이 부부예절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성(Sex)은 오직 부부 예절의 범위 내에서만 선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성의 진정한 의의도 남편과 아내간에 공통된 즐거움이 동반되는 데서 찾았다. 성행위는 뜨거운 사랑의 간계에서만 성의 진정한 선과 완성을 보게 되며, 인간의 성생활에서는 자신을 행한 사랑과, 상대방을 향한 사랑간에 양극이 작용하고 있다.
B. 성의 목적
성경은 창조 때부터 성을 좋다(선하다)고 하였고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에게 주신 것임을 알 수 가 있다.
월터 카이져는 성의 향유에 대하여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경의 성 묘사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흔한 왜곡은 그것이 창세기 3장의 타락과의 연과성 때문이라고들 생각한 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느낀 부끄러움은 제일 먼저 하나 님께 대해서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고(창 3:8) 그 다음에 서로 부끄러워 했다.
성은 향유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짧으면서도 즐거운 비유인 잠언 5:15-21에 나타난다. 솔로몬은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녀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촉구한다.
클라 인(Meredith Klin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왜 인간의 사랑과 결혼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노래가 담긴 영감으로 된 정경을 앞에 두고 잘못을 저질러야 하는가? 이 주제가 얼마나 큰 인간의 관심사인가를 고려해 볼 때, 만일 하나님께서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책에 결혼과 사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아가서에 관하여는 제아무리 순수한 부부의 사랑이라도 반대하고 오히려 그런 사랑에는 반드시 다소간의 죄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 일부 초대 교부들의 입장과는 반대이다. 정녕 아가서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연모와 온전한 매력을 느낀다.
1) 성은 부부간의 하나됨을 가져다준다
부부가 하나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취미나 사상 등을 통해 하나가 된다. 그 중에서도 성생활은 하나됨을 더욱 강화한다. 이는 친밀하고 독특한 대화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금기시 하는 태도를 가져 왔다. 특히 이러한 면은 유교 권인 우리에게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성생활이 가져다주는 독특한 면을 Elton Trueblood, 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성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은 어떤 행동이나 말이 제공할 수 없는 용어를 남편과 아내에게 제공한다. 사랑은 적절하게 표현할 용어가 필요한데 성생활은 바로 그 용어가 되어준다.
여기에서 보듯이 성생활은 부부간에 더욱 깊은 관계로 이끌어 주며, 이것은 연합을 위한 독특한 표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성은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성은 많은 공격을 받아왔다. 이것은 육신은 순결한 영혼의 더러운 곳으로 이분한 플라톤의 철학과 어거스틴의 영향 때문이다. 또한 경건 주의자들도 성적 사랑은 그리스도를 생각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생활은 이러한 공격 가운데도 즐거운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아 7:1-10, 창 26:8)
바울도 부부간의 성생활은 즐거운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은 “이것 이 부부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요, 사단의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생활이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성이 올바른 장소인 결혼 안에서, 올바른 사람 사이에 바르게 체험될 때에만 하며, 이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참된 즐거움과 활력소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IV. 나가는 말
결혼은 분명히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이다. 현대 가정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가정이 전보다 많아 졌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가정의 파괴는 곧 결혼의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혹은 알면서도 그 뜻을 저버리는데 있다는 말이다. 이 작은 글을 통하여 이러한 잘못된 결혼관과 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먼저 고대 근동의 결혼 관습을 보면서 구약 시대의 히브리 민족의 결혼 생활을 이해하려 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일부다처제와 시형제의 제도는 히브리 민족만의 관습이 아니고 그 당시의 근처 모든 민족의 관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결혼 제도의 기원과 성경적 의미에서는 창세기 2: 24절을 통하여 결혼의 의미를살펴 보았는데 오늘날 많은 가정의 파괴는 바로 이 성경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함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떠남과, 연합함과 한몸이룸이라는 결혼의 의미는 다시한번 우리의 가족관을 되새겨 보게 한다. 대 가족 제도에 살아가는 우리 한국사람의 관습이 과연 성서적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연합함과 한몸 이룸이란 결코 육체적인 결합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두 인격체의 만남이요 결합인 것이다. 두 인격체의 인격적인 만남이기에 여기에는 분명 책임과 의무가 또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결혼이 파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결혼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또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또 하나 결혼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위치를 다루었다. 분명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 하나님은 창조 하셨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진리이다. 진리는 변해서는 안된다. 오늘 현대 가정의 문제가 바로 이 두 사람 자신의 책임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에 있다. 그러나 이 진리 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결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록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자도 남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Image Dei)으로 창조되었으므로 두 인격의 만남이 우선되어야 하는 사실을 밝혀 두었다.
일부 일처제와 일부 다처제의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성격적인 창조 질서와는 위배되는 일부 다처제의 이야기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부 다처제가 정당화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성경은 분명히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질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와의 하나됨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또 하나 창조 질서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형제 혼인 제도를 다루었다.
이 문제 역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근본적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또 다른 오해가 생기기 쉽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바로 가문의 문제였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형제 재 도는 그것을 합리화시키기보다는 그 근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에 들어가서 복음서를 통한 예수님의 결혼간을 간단하게 살폈고, 특별히 고전 7 장을 통하여 바울의 결혼관을 살폈는데, 여기서는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독신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독신은 결코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 하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독신도 하나님이 허락하여야 가능한 것이고, 독신을 작정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한 이기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좀 더 하나님께 헌신을 위한 삶으로서의 독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성경의 성에 대한 인식을 간단하게 살폈다. 결혼과 마찬가지로 성(Sex)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에 결코 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을 쾌락의 도구로 잘못 사용하므로 성에 대한 오해와 가정의 파괴와 결혼의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성은 순결하고, 성은 즐거은 것이다. 부부의 하나됨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결혼과 성은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창조 질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바른 결혼관과 성의식을 통해서 점점 개인화 되어가고. 기계화 되어가고, 쾌락주의로 빠져가므로 깨어지는 가정과 결혼이 회복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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