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적인 막달라 마리아 붐이 일고 있다. 현재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 있는 그녀의 지상 인기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아마존닷컴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탐색해 보라. 수많은 책 이름들이 뜬다. 최근 뉴욕에서 공연되는 한국의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도 바로 이 마리아를 다뤘다.
안 그래도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근래의 마리아 탐구열에 불을 지피기도 했지만, 그전부터 출판돼 나온 관련도서들이 최근 한꺼번에 주목을 받으면서 더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 관련 도서 대다수가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등 영지주의의 엉터리 외전들을 참조한 것으로 성경을 곡해한 내용들이다. 또 다수는 페미니즘, 여신숭배 사상 등을 조장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여러가지 오해들이 있다. 아마도 그녀를 엄청난 추문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성녀의 영예를 실추시켜 버린 '다빈치코드'에 가장 기발하고 많은 곡해가 담겨 있겠으나, 충분한 비평들이 선행됐기에 더는 언급 않는다. 여기선 다만 널리 회자돼온 일반적이고도 카톨릭적인 오해들만 다루련다.
첫째로 이 마리아가 '창녀 출신'이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얘기 .
단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엔 그런 흔적이 없다. 성경의 막달라 마리아는 본디 오히려 막달라 지방 출신의 '신들린 여인'이었다. 막달라(정확한 지명은 'magdalene'이 아닌 magdala다. 'magdalene'은 막달라 출신이란 뜻)란 곳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동네로 갈릴리호 서쪽 언저리에 위치했다는데 당대 10개의 갈릴리 호반 마을들 중 가장 컸다고 한다. 학설에 따르면, 동일한 이름의 또다른 곳이 있었다는 둥 도무지 위치를 종잡기 어렵다.
중세와 근대, 심지어 현대까지의 카톨릭 '명화'(성화?)들을 보면 거의 예외없이 막달라 마리아를 붉고 치렁치렁한 머리자락에다 살결이 눈부시게 흰, 요염하거나 야하거나 풍만하거나 반나체 바람, 또는 무겁고 어둡고 긴 참회복(?) 차림의 아름다운 백인여성으로 그려놨다. 줄-조셉 르페브르의 경우 무슨 누드바 쇼걸처럼 얼토당토 않게 홀딱 벗겨놓기도 했다. 근년에 뒤늦게 발견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한 작품도 앞가슴을 훤히 드러내논 모습이다. 제 입맛대로 그려놓곤 '막달라 마리아' 딱지만 붙이기만 하면 되는 양.
[멜 깁슨이 영화 '크리스토의 수난'에서 평소의 '야녀' 모니카 벨루치가 이미지가 걸맞다고 '막달라 마리아'로 분장시킨 것은 그야말로 카톨릭적 넌센스였다!] 왜 이 법석들인가?
그러나 주변 분위기는 언제나 음산한 그로토 속에서 성경/해골바가지/옥합을 곁에 둔 채 죄를 엄청 참회하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요한을 제외한 제자들의 뺑소니 속에서도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가까이한 주님의 십자가 주변 골고타를 배경으로 하기도 했다. 골고타란 이름 역시 해골을 뜻한다. 그러면서 성녀로 추앙된다.
하필 왜 해골일까? 이 경우, 해골은 육신의 절제, 죽음의 신비 등을 가리킨단다. 윤동주의 시처럼 정말 마리아가 해골을 벗삼았다면 누구의 해골일까? 여성으로서 좀 끔찍하지 않나? [필자는 어릴 적 누군가의 유골함과 한 방에서 잔 적이 있다. 나중에야 누가 알려주기에 모골이 송연했다]. 마리아처럼 습관(?)이 되면 괜찮은가? 해골에서 썩는 냄새는 안 나는가? 과연 이런 습관이 바람직한 '짓'일까? 단지 상징에 불과한가?
알고보면, 이 모두가 비성경적이다. 이미 구원받고도 마치 평생 쓸개를 핥듯 옛 죄를 고백/사죄를 해야 하고 을씨년스럽게 해골까지 끼고 있으면서 고행을 해야하는 듯 묘사된..전형적인 수도원 영성 냄새가 난다. 왠지 불교랑도 통하는 듯 하고. 마리아가 속세와 '바이바이' 해버린 수녀나 비구니란 말인가? 왜 성경 속 진짜 마리아 마리아, 우리의 마리아가 이랬어야 하나?
원흉은 교황이었다!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강론을 하다 막달라 마리아를 주님께 향유를 부은 '죄많은 여성'으로 "회까닥" 돌려놓고 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다름아닌 교황 성하께서 애꿎은 막달라 마리아를 졸지에 성매매 여성으로 둔갑시켜버린 것. 일설에 따르면, 로마 교회의 '초대 교황'이라는 페트로의 권좌에 은근히 경쟁 상대가 되는 막달라 마리아를 낮추기 위해 이런 딱지를 붙였다는데 쉬~.. 글쎄, 나도 잘 모르는 일이다.
바티칸은 1969년에야,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 출신으로 과거 교황청에서 잘못 인식시킨 것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 성명을 냈다. 그러나 오해와 관행은 여전하므로 사실상 해명/사과성명 효과가 '짱'이 아닌 '꽝'인 셈이다. 왜 성경의 막달라 마리아를 아무 근거 없이 '창녀 신세'로부터 일탈하지 못하게 교회가 막은 걸까? 하기야 예리코 성의 라합은 창녀 출신으로서 메시야의 영광스런 선조가 됐지만.
신약 성경엔 4명의 마리아가 등장한다. 마리아가 히브리어의 '미리암'에 해당하는 만큼 구약의 두 미리암들까지 합하면 모두 6명의 동명이인들인 셈이다. 마리아는 당대에 선호받던 남성이름 시몬/요한/유다만큼 흔한 여성이름의 하나였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르쿠스 요한의 어머니, 베타니 라자로의 누이이자 마르타의 자매, 그리고 막달라 여인이다.
흔한 이름이었던 만큼 유의할 것은 이 마리아들이 다 서로 다른 마리아라는 사실. 안 그래도 신약기자들은 훗날의 독자들이 헷갈리지 말라고 한 사람 한 사람 고유별명을 붙여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혼동차단제'인 셈. 이 마리아는 다른 마리아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였다.
둘째로, 향유를 부어드린 여성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추정. 요런 걸 갖고 '지레짐작'이라고도 한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여성은 한 명이 아니다. 한 명일 필요가 없다. 요한복음 12:1~3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는 분명히 베타니의 마리아, 즉 마르타, 라자로와 삼남매간인 마리아였다. 사도 요한이 분명히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와 혼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오류다. 여성이 향유를 부은 사건은 마태/마르쿠스, 루카, 요한복음의 기록이 서로 혼동스럽게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척 다르다.
베타니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린 기록과, 베타니의 파리세/나환자 시몬의 집 파티 석상에서 한 여성이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은 기록 내용이 다르다. 우선 사건 장소부터가 같은 베타니의, 서로 다른 두 집이다. 전자는 라자로의 집이었고(요12:1,2,9) 후자는 시몬의 자택이었다(마26:6, 마르14:3).
루카 7:36~50의 기록도 베타니 나환자와 동명이인인 파리세 '시몬'의, 동네를 알 수 없는 집에서였지만 내용이 매우 차이진다. 처음부터 죄인인 한 여자로 기록됐고 시몬 자신이 그녀를 '죄인'으로 칭했으며, 많은 사랑으로 주님께 많은 죄를 용서받았고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평안히 돌아갔다. 여기서 '죄인=창녀'라는 등식 자체도 문제시된다.
루카가 묘사한 이 여성이 베타니의 마리아일 수가 있는가? 베타니의 마리아는 전혀 아니며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뤀 8:2에 나타나는 막달라 마리아는 악귀를 쫓아내심을 받은 여성 곧 일곱 귀신에게서 놓임받은 막달라 사람 마리아로 분명히 처음부터 명시됐기 때문이다.
만일 7장의 향유를 부은 여성이 막달라 여인이라면 왜 과학자/의사인 루카가 곧 이어지는 8장에서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로 곧이곧대로 명시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주님이 익명의 여성이 주님께 바로 향유를 부은 자리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으니 막달라 마리아가 악귀에게서 놓임받은 것과는 현저히 성격이 다른 구원 사건이다.
셋째로, 카톨릭 일각에서는 심지어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난 간음하다 잡힌 여성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시하는데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정말 아전인수 격의 막갖다붙이기 해석이다. 중세 때부터 잠언 6:16~19에 근거한 '7 중죄' 개념이 있었는데 이것과 막달라 마리아의 일곱 귀신을 연계시키기도 한다. 마리아 자신으로선 억지춘향이인 셈.
막달라라는 이름은 본디 히브리어 '믹달' 즉 요새/고지대란 뜻이니 몸의 고지대 즉 머리털과 관련이 있다고들 밀어 붙인다. 향유를 바친 여성들이 모두들 머리털을 풀어헤쳐 주님의 발을 씻겼으니 자연히 그들 중 하나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억측을 은근히 밀게 된 것이다. 향유 붓고 머리털로 씻긴 여성이 굳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 이유도 없지만, 딱히 막달라 마리아여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소재로 한 찬송가가 몇 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499장)과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346장)이다. 전자는 마리아의 이름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작시작곡자 c. 어스틴 마일스가 요한복음 20장에 기초, 마리아가 동산에서 부활의 주님을 뵌 장면을 배경 삼았다. 참고로, c. 어스틴 마일스는 뉴저지 출신이다.
346장 1절 기사는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라고 돼 있다. 곡이 매우 아름답지만 가사는 물론 잘못이다. 성경엔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작시작곡자 에드윈 판드 파커 목사가 성경보다 카톨릭 전통을 더 중시한 결과라고 본다. 그는 마르14:3을 본문으로 한 자신의 설교의 결론 삼아 이 찬송가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고대 영지주의 외전인 소위 '필맆 복음서'를 비롯한 잡문서에 따라 이 여인을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무슨 '관계'인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는 화려한 낭만은커녕 모조리 씨알머리 없는 사악한 사탄적 수작에 불과하다. 그런 관계라면 주님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가 있는가? 그리스나 로마 신화도 아니고.. 이런 걸 일컬어 흔히 '발칙한 상상' 내지 '싹수 없는 공상'이라고 부른다.
물론 여성들이 신앙생활 초기에 예수님을 혹 '흠모'의 대상(?)으로 찍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겠으나 주님의 교훈과 거룩하심은 그런 생각들을 씻어내준다. 주님은 모든 유혹(=시험)을 받으시고도 아버지께 철저히 복종하심으로 끄떡없이 버텨내셨기에 아들로 인정받으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은 메시아 자격이 없으시다! 올림포스 신화의 주인공이거나 평범한 인간 사나이에 불과한 것이다.
주님을 무덤까지 따라갔고 결국 부활의 새벽 가장 먼저 주님을 뵜던, 우리가 길이 본받을 만한 위대한 신앙여성, 막달라 마리아..그녀에게서 신화와 전설의 옷을 벗겨주자. 성경이 말하는 진실의 옷, 그대로 머물게 하라. 거짓 창녀의 마스크를 그녀에게서 벗겨줘야 한다. 거짓된 카톨릭적 참회의 드레스나 하릴없이 황당한 해골바가지 따위를 그녀 주변에서 떨어버려야 한다.
참 진리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게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