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자료1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22 -십계명
십계명2-이웃 사랑(下)
예수님의 4계명
4)사랑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중에서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 뒷부분 5계명을 예수님이 넷으로 새롭게 설명해 주셨다. 마지막 네 번째 계명은 사랑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 구원의 복음인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인간이 선악의 두 마음, 곧 탐심(에피뒤미아)으로 바라보고 오해한 것이 율법이므로 이를 예수님이 바르게 깨닫게 하여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것이 ‘완전케 하다’의 참뜻이다.
율법이 성도에게서 구원의 복음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깨달아질 때 복음은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율법의 본래 내용이 사실은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걸 인간들이 탐심으로 바라보면서 ‘지키면 복, 지키지 못하면 저주’라는 이분법으로 판단한 것이 율법주의다.
십계명, 하나님의 모든 말씀
태초에 하나님은 일곱 번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일곱 번의 말씀은 각각 구원의 복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일곱(셰바)이라는 말은 구원의 언약을 가리키며, 같은 계열의 단어인 ‘샤바’는 ‘맹세하다’, ‘삽바트’는 ‘안식, 안식일’을 뜻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셰바(일곱)’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이해됐다.
하나님은 일곱인 구원의 약속을 시내산에서 십계명으로 주셨다. 십계명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10개의 계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십계명은 ‘계명의 십’으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이라는 의미다. 성경에서 10은 완전수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이 완전한 ‘열’에 담았다는 것이 십계명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약속인 일곱을 알게 하시려고 열의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애굽에서,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열)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일곱)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걸 ‘칠십’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칠십 장로, 칠십 제자’ 등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존재다. ‘칠십이 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장로’는 말씀을 젖으로 먹는 ‘어린 아이’에 대조되는 성숙한 존재를 뜻한다. 물론 오늘날 교회 직분으로서의 장로와는 무관하다.
성경의 수많은 계명과 율법을 포함한 모든 말씀은 구원의 약속(일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말씀’이 성경의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말씀’이다. 성경,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우주를 포함한 세상의 만물,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의 인간관계, 그 관계들 사이에서와 세상의 만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들... 모든 것이 ‘말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어나며, 이 세상에서 우연적이나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다. 만약 그런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발생한다.(그러므로 운이나 재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용어다.) 그리고 그 ‘말씀’은 모두 ‘구원의 복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발생하는 것도 말씀이고, 다치고 병이 드는 것도 말씀이고, 인생의 흥망성쇠도 말씀이다. 그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노력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로고스)을 통해 구원의 복음으로 깨달아진 말씀(레마)이 내 안에 간직되어야 구원이다. 믿음은 바로 성령에 의해 깨달아진 그리스도의 말씀(레마)으로 말미암으며(롬10:7) 올바른 믿음은 레마에 의해서만 생성되며, 성도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로고스와 레마가 모두 말씀으로 번역되어 있어 잘 분별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로고스)이 레마로 깨달아지는 자만이 참된 성도다. 레마는 성령에 의해서만 깨달아지므로 성도가 구하고 찾을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오직 성령인 것이다(눅11:9-13).
사랑이 곧 십일조
그리고 그 모든 말씀(열)을 하나(사랑=구원의 복음=그 복음와 사랑을 담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깨닫는 것이 십일조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온전한 십일조를 들이라고 하는 ‘창고’는 곡식창고나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히브리어 ‘벹 하 오차르’는 ‘보물의 집’이란 뜻이다. 성경에서 집은 항상 성전을 말한다. 따라서 ‘벹 하 오차르’는 ‘보물의 성전’이며,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질그릇인 우리에게 담김으로써 성전이 되는 성도의 몸을 가리킨다. ‘나의 집’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도의 몸이다. 성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신약에서 결론이 났다(고전3:16).
하나님이 십일조를 들이라고 하는 곳은 바로 성도의 몸이다. 성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말씀, 하나님의 사랑으로 결론이 나는 온전한 레마의 말씀을 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걸로 참된 생명을 얻게 되니까. 올바른 생명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 십일조를 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을 도적질
바로 앞 구절을 살펴보면 이 뜻은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3:8)’
‘하나님의 것’은 원문을 보면 ‘하나님’이다. 번역자들이 ‘사람이 하나님을 도적질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하나님의 것’이라고 의역한 듯한데, 이는 명백하고도 심각한 오류다. 덕분에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이 소유물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했고, 자연스럽게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착각하게 됐다.
이 구절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도적질 했는데 그 양상이 십일조와 헌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앞선 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헌물을 똥이라고 하시며 다시는 받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시는데, 금방 그걸 똑바로 잘 내놓으라고 말을 바꾸시겠는가.
하나님을 도적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 설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해 진리를 말하지 못할 때 거짓증거,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도적질 하는 일이다. 그래서 바로 뒷부분에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한다’고 하나님이 야단치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말3:13). 십일조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말’,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다.
생명책과 심판의 책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따로 분리된 책이 아니라 하나의 책이다. 생명책과 심판의 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보면서 하나님의 뜻, 구원과 은혜와 사랑을 바르게 깨닫는 자에게 성경은 ‘생명책’이 되며, 성경이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하는 여러 권의 책으로 보이는 자에게 성경은 ‘심판의 책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책’은 단수고, ‘심판의 책들’은 복수다(계20:12).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떡의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되는 것이나, 이스라엘이 돌로 사람들을 쳐서 죽이는 것이 모두 말씀을 온전하게 깨닫지 못하고 조각을 내어 따로 떼어 읽고 오해한 때문이다. 말씀을 토막 내면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이는 사망의 율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 하나로 결론이 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분의 십자가 공로가 또한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고, 말씀하시고,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든 것이 십자가 희생, 십자가 공로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자기를 드러내시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고, 희생이다. 그리고 그 내용과 과정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고,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진리고, 생명이고, 사랑인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사랑’
그리고 성도라는 성전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에 이어 ‘사랑하라’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로써 성도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호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 다 갚고 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호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는 ‘마지막 1/4’을 뜻한다. 그래서 4복음서의 4번째가 ‘사랑의 책’ 요한복음이고,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다. 사도 요한의 서신서인 요한 일서, 요한 이서, 요한 삼서 또한 모두 사랑을 주제로 담고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진리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성도 또한 4번째 조각인 사랑으로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 정사각형의 성전이 된다(계21:16).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지는 4족장의 연대기는 바로 그걸 가르쳐주는 시청각 교재다. 4족장 중 요셉에게만 하나님이 요셉의 밖에서 나타나지 않는데, 그건 하나님이 사랑으로 완성된 요셉의 안에 내주하시며 함께 동행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인생 또한 성도가 인생동안 완성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 사랑, 아가페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그 사랑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거래를 할 뿐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 ‘내가 너를 제법 사랑했으나 네가 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갚지도 못하므로 나는 너에 대한 사랑을 철회하겠다.’ 이 정도면 양반이다. ‘감히 내 사랑을 무시해? 너를 미워하고 저주할거야.’ 이것이 인간들 수준의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라 고작 주고받는 거래고, 팔고 사는 매매일 뿐이다.
인간은 선악의 두 마음인 탐심에 따라 자기의 이해득실에 기반한 선악을 판단하면서 상대에 대한 호불호를 구분할 뿐이다. 그건 피를 나눈 가족 간에도, ‘죽도록 사랑’ 운운했던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인간은 사랑을 흉내낼 뿐 참된 사랑은 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만 사랑인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성도에게 어떻게 나타날까? 여기에 대한 오해가 기독교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고 기대한다. 맞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은 이 세상에서의 좋은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의 택하신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영원의 참생명이다.
하나님은 잠시 후에 불타 없어질 이 세상의 좋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성도에게 광야 40년의 인생을 살게 하시고, 그 속에서 각양 고난과 환난과 대적을 통해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징계(파이데이아)는 ‘교육, 양육’의 뜻도 함께 가진 말이니, 징계처럼 보이는 성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성도를 아들로 만들기 위한 교육과 양육의 목적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징계처럼 보이는 그 일이 실상은 성도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 것이다.
허리에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육을 입고 있는 우리의 두 마음(탐심)은 즐거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더 먼 곳, 영원을 바라보시는 것이다. 우리를 도살할 양처럼 취급하시는 것이 사랑이다. 자기 부인의 죽음(다니토스)을 죽게 하심으로써 영원한 멸망의 죽음(네크로스)를 피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심산의 축복과 에발산의 저주를 모두 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심산에만 이스라엘 지파를 세우고 에발산에는 이방인을 세운 것이 아니라 두 산에 각각 6개 지파씩 세웠다. 축복과 저주가 모두 12지파(12는 아들의 수), 곧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자기 목숨을 버린 사랑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은 바로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고 친구라고 칭해주시는 가장 큰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그 사랑을 알게 된 성도만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다. 좌편의 염소는 아버지에게서 자기 마음에 드는 좋은 것을 얻어낼 때만 기뻐하고 감사하겠다 한다. 그걸 주지 않으면 줄 때까지 부르짖고 떼쓴다. 밥까지 굶어가면서. 그러나 우편의 양은 아버지가 주시는 모든 것이 사랑임을 깨닫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모든 말씀(성경, 사건과 사고, 현상 등) 속에서 그 사랑을 깨닫는 자가 참된 아들이다.
그렇게 아들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 참된 구원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한다. 그것이 성도의 이웃사랑이다. 불신자나 타종교인들도 하는 선행과 구제가 사랑의 진의일 수 없다. 그것들도 하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바르게 깨달아 바르게 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이며,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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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신약성경에서 말씀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헬라어('말, 말씀' 항목 참조): 이것은
때때로 다른 의미들(예컨대 설명, 이유, 동기)로도 사용되었는데 특별히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요1;1,14)과 다른 요한서신(요일1;1;계19:13)에서는 삼위일체 중에서 제2위
(二位)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로고스가 일반 헬라어에서는 이성(理性)을 뜻한다.
<1> 요한서신의 용법
창조시에 로고스는 이미 존재하셨으며(요1:1의 '태초에'는 창1:1과 관련되어 있
음), 하나님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게셨따. 실로 로고스는 하나님이셨다(신적인
존재(Moffatt의 주장)가 아님 -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 정관사가 붙지않는 것이 문법적
으로 옳음. 그러나 이 로고스는 제2위의 하나님으로서 제1위의 하나님과 구분되었다
(Westcott의 [요한복음 주석]1:1을 보라).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는 창조시
에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다(요1;2). 창조의 모든 사역은 로고스를 통하여(의하여:by)
이루어졌다. 이 로고스는 생명의 근원이며(요1:4) 이 세상의 빛이고(요9:5 참조), 모
든 사역을 계속하신다(요1:5의 시제는 현재). 이러한 로고스께서 성육신(成肉身) 하셔
서 하나님의 임재(臨在)에 대한 표적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의 본성(本性)을 계시하셨
다.(요1;14)
요한복음의 서론에는 이처럼 로고스와 그의 활동에 대한 세 가지 주요 특성들이 제
시되어 있다 - 그의 신성과 성부와의 밀접한 관계, 창조주로서의 로고스의 활동, 그의
성육신.
요한일서 1;1에서 '생명의 로고스(말씀)'는 보고, 듣고, 만진 바로서 사도들이 전
파한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비인격적으로는 그리스도께 관한
메시지를 가리킬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 19:12에는, 그리스도가 정복하는 장군으로서
'하나님의 로고스(말씀)'로 일컬어져 있다. 히브리서 4:12에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말씀)'로 일컬어져 있는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
님의 말씀의 분쇄적 효과를 구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15절의 비유적 표현도 참조하
라).
<2> 이 용어의 배경
1.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들은 요한이 로고스란 말을 사용하
는데 예비적 배경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셨으며(창1;3;시
33:9), 그의 말씀은 때때로 반(半) 의인화(擬人化)되어(시107;20;147:15,18), 활동적
이며 능력이 있으며 그 목적한 바를 성취하시는 존재로(사50:10,11) 나타나 있다. 하
나님의 지혜도 의인화되어 사용되었다(잠8장 - 특히 22절 이하에 나오는 창조에 있어
서 지혜의 역할에 대해서 주목하라). 여호와의 사자(使者)는 때때로 하나님의 일컬어
졌으며 때로는 독특한 존재로 언급되어졌다(삿2;1 참조).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도 반
(半) 의인화되어 있다.(출23:21;왕상8:29)
2. 팔레스틴의 유대교
랍비들은 지혜란 말을 의인화하여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집회서24장 참조) 하나님
을 '메므라(아랍어로서 말씀)라는 말로써 완곡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용법은 탈굼
(Targums)에 나온다.
3. 헬라철학
철학자들은 따라서 로고스의 정확한 의미가 각각 다르게 사용되었지만 보통은 이성
(理性)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은 직접 물질과 접촉할 수 없다는 헬라사상을 반영
해주고 있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완충적 존재(shock absorber)이며 이 세
상에 계시된 시적인 원리이다.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 로고스란 신적인 이성일 뿐만 아
니라 동시에이 세계에 분여(分與)된 이성(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에 분여된 이성)이다.
4. 헬라주의적 유대교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달된 유대교에는 창조에 있어서 말씀의 완전한 의인하(擬人化)
가 나타나 있다(솔로몬의 지혜9:1;16:12). 필로(Philo)는 유대인이었지만 플라톤의 철
학과 스토아 철학에 심취해 있었던 사람인데 그의 저서에는 로고스라는 용어가 1300회
이상 나온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이며(골1;5), 원형(原型))이고 '표현'(히1:3 참
조)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제2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또한 이 로고스는 큰 혼돈(황폐
함) 가운데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수단이며, 더구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
법(길)이다.(즉, 지성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좀더 밀접하게 직접적으
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5. 헤르메스 문서(Hermetica)
로고스라는 말은 헤르메스 문서에 자주 나온다. 물론 이 헤르메스 문서는 기독교
이후의 문헌이지만 헬라주의적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헤르메스 문서, hermeitc
literature 참조: 이것은 1세기 말엽-3세기 말에 나타난 애굽의 종교 철학적 문서로
서, 헤르메스라는 애굽 신에게 계시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로고스에 의한 창조의 교
리가 나타나 있음=역자 주). 이 헤르메스 문서에는 로고스 교리가 나타나 있는데 필로
적인 개념과 이교의 신비주의적 개념으로 나타나 있다.
6.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 교리의 원천
요한복음 1장은 철학적인 용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로고스
는 본질적으로 이성(理性)이 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있어서 로고스는 본질적으로
말씀이다. 필로의 작품과 신약성경에 로고스라는 용어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요한복음이 필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인하였다. 그러
나 필로의 작품에 나타난 로고스는 그것(it)으로 지적될 수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는 '그 분'(He)으로 지칭될 수 있음에 틀림 없다. 성육(成育)한 로고스
에 관하여 필로는 플라톤(Plato)이상의 것을 더 주장하지 못했다. 필로는 로고스와
'메시야'(Messiah)를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니의 대리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셔서 계시(啓示)하
시고 구속(救贖)하셨다.
랍비들이 사용한 '메므라'는 하나님의 이름(즉, 여호와=역자 주)을 호칭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대신 사용한 것에 불과하고 실제적인 개념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도 아
니었고 그렇다고 헤르메스 문서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영향을 주고 받은)것
도 아니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 교리의 원천(자료)은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안
에 있다. "예수님은 로고스라는 말로 해석되지는 않지만 로고스는 오직 예수님을 생각
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로고스라는 표현은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말씀의
용법과 지혜의 의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의 활동적인 말씀이시며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신 분이시다. 복음과
복음의 주제인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일컬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당
시에 헤라인의 세계이소 로고스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로고
스의 개념을 이방 세계에 전달하는 데 있어서 교량적 역할을 해주는 아주 유용한 것이
었다.
그리스도께서 필로의 로고스 개념을 회상케 해주는 의미로 묘사된 신약성경의 두
구절들(골1;15-17과 히1;3)에는 로고스란 단어가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필로의 로고
스 사상이 기독교적 개념으로 소개된 것은 아볼로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
다.
<3> 고대 기옥교에 있어서 로고스의 용법
고대의 기독교 변증가들은 로고스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편
리하게 소개했다. 이 변증가들은 로고스를 이성의 개념으로도 사용했으며 따라서 어떤
변증가들은 철학을 복음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 보기도 했다. 히브리적인 말씀의 의미
들은 강조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로
고스 엔디아데토스'(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계신 말씀)와 '로고스 프로포리코스'(창조
에 말씀되어지고 효과적으로 적용된 말씀)를 구별했다. 오리겐(Origen)은 필로의 로고
스를 제2의 하나님의 개념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기독론적(基督論的)
논쟁들에 있어서, 로고스란 용어가 사용됨으로 주요한 신학적 문제들이 분명하게 해결
되지도 않았으며 중요한 신조들에 로고스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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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1 “아나데마”
(롬9:1-2)
1.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1절에 포함됨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아나데마άνάθεμαG331)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감 시절의 경험을 수기 형식으로 기록한, 실존주의 심리학자 빅터 후랭클(Victor Frankle)의 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99% 이상의 수감자들은 그 극한의 고통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리고 조금이라도 덜 힘 들고, 덜 고통스럽고, 덜 배고프기 위해서, 이기적인 짐승이 되고 마는데,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1% 미만의 예외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타인에게 자기 의 마지막 그 빵을 건네주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에게 다 가가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진심으로 전해주기도 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며, 심지어는 타인을 위해 대신 가스실에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짐승처럼 ‘나는 살아야 되겠다. 리는 자기애적 욕망을 위해서 타인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던 99%의 그 짐승 같은 유대인들이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에 반해, 순순히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마지막 남은 빵이나 소유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 놓았던 사람들 중에는 이미 신을 버리고 떠난 이들도 왕왕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와는 이무 이해관계도 없는 타인들을 위해서 목숨 을 버릴 만큼, 그들을 헌신하게 만든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 까요?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사자 우리에서, 독사 굴에서,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앞에서, 활활 타는 풀 무불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 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했던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타종교인들도 심지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는 그러한 이들과 무신론자들까지도,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헌신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인간 세상 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고 칭찬하는 소위 위대한 삶, 거룩한 삶, 착하고 깨끗한 삶, 선하고 아름다운 삶은 기독교만의 열매나 지향점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다른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낼 능력을 어디선가 받습니다. 그것은 보편적 아담들의 공통된 목표이자 지향점, 희망사항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배우고 깨달은 성도들이 그러한 것들을 가볍고 우습게 여겨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백성이 인간 세상에서 이 세상의 것들을 도구로 하여, 하늘의 것들을 배워가야 하는 그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그 크로노스의 그 시간, 그 시간 동안에는 당연히 이 아래 세상의 질서와 도덕과 윤리와 선을 행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열매라기보다는 그냥 사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당연히 마땅히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경계하라고 하는 건,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러한 선한 삶이, 그렇게 거룩해 보이는 위대 한 삶이, 혹시 자기애적 상승욕구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이나 타인이 히는 나에 대한 훌륭한 평가 나, 이런 것들 위해서, 그러한 선한 삶을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애적 상승 욕망이라는 건 원지를 분해해 버릴 정도로 뜨겁습니다.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만큼 뜨겁습니다. 그건 프로이드가 리비도라고 불렀던 아담들의 생 본능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이 살아가게 하는, 역동성 있게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욕망은 자기의 몸에 불을 붙이고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낼 정도로 무섭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봐 왔습니다. 내 몸이 활활 타고 있는 순간에도 누군가 그 행위를 칭찬해 주고 칭송해 주면 자신이 추측 하건대 ‘그래, 누군가가 나의 이런 모습을 위대하게 봐 줄 거야 가치 있게 봐 줄 거야’라고 상상만 해도, 인간은 그 힘으로 자기 몸을 불사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들의 자기애적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행위를, ‘vanity’ ‘헛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허망한 것,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세간의 멋진 평가를 획득하기 위해 내어 놓는 모든 행위는 그 외모가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해 보여도 욕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Vanity ,vanity, aIl is vanity." 허망하고 헛것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선악과를 먹어 버린 모든 아담의 본질적 속성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처럼’의 삶,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건 바로 그 거만한 욕망, 인간들의 그 ‘vanity’의 욕망을 깨부수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그러한 것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해 주시는 그분의 생명과 사랑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내어 놓는 헌신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어 놓는 자기애적 상승 욕망에 의한 헌신은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안다고 해서, 그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그 헌신이 안 일어날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남가주 서머나교회에 담임목사가 1년 동안 떠나 있으니까 사람이 300명도 안 나옵니다. 그들은 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해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알곡들, 진짜 들만 남아 있는 거겠죠. 그리고 지금 서울 서머나 교회에서 지금 900명 정도 모입니다. 왔다 갔다 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1,000명 정도로, 남가주에 모인 그들의 세 배 이상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담임목사가 없는데도 거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것이 그들의 헌신을 끌어내고, 막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그런 헌신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끊어짐’이라든지 ‘저주’라든지 이런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이나 다른 이웃들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거룩하고 가치 있고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 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진리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도구로 쓰이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용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9장 1절은 ‘알레데이아’ ‘진리’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의 내용은 진리입니다. 진리에 관한 내용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항상 첫 단어가 제일 중요한데, 말씀은 “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나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야” 이런 말입니다. 늘 거짓말만 하던 사람이 “이거 거짓말 아니야, 이거 진짜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참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레데이아 로고스 레고”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거짓이 무엇입니까? 거짓은 참을 담은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릇을 통해서 그 안에 담긴 참이라는 내용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그냥 거짓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말미에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위험, 적신, 칼, 사망, 생명, 천사, 사탄, 높음, 깊음, 피조물 등 그런 그릇들을 나열하면서 그것들을 그냥 표면적으로 받아버리면,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끊어짐이라고 웅변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절대 하나님과 우리를 끊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끊어지는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진리라는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 거지, 그냥 표면적으로 이해해 버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처럼 천사가 있네 없네, 영생이 있네 없네, 구원이 있네 없네, 이런 것 갖고 싸우다가 그냥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그리고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환난, 곤고, 핍박, 위험, 칼, 그 아래에서 수고스럽게 짐만 지다가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반드시 진리라는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그것이 바로 거짓이고 거짓이 됩니다. 그리고 그 거짓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건너갈 수 없는 구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한 사도 비울이 로마서 9장의 첫 단 어를 ‘알레데이아’, ‘진리’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야, 나는 진리를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말을 잇는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인데”라고 합니다. 이것을 의역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와 있어.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야. 그래서 나는 그 진리,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갖고 있어”라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나는 연합되어 있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연합되어 있는데 내가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내 민족, 혈육, 형제, 그와 혈통으로 묶여 있는 이스라엘을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의 율법적 행태를 지칭합니다.) 위해서는 “내가 저주받아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간다고 해도 민족적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기를 나는 간절히 원해” 이런 말입니다.
구원받으면 진리가 우리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듭니까? 영생이나 구원을 포기할 자신이 있습니까? 또다시 여러분이 나온 그곳으로 영원토록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겠습니까? 내 형제들의 구원과 그걸 바꾸겠습니까? 참고로 저는 안 바꿉니다. 여기에서 “저주를 받아”라고 되어 있는 ‘아나데마’라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나’라는 말은 ‘에피’라는 말과 구분하여 공간적인 위가 아니라 공간적이지 않은, 다른 차원의 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위로난다’라고 하고, ‘아노멘’ ‘거듭남’ 이렇게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 ‘아나’라는 접두어와 ‘티템’이라는 동사의 합성어가 ‘아나데마’입니다. 그런데 ‘티데미’는 뭐라고 했습니까? 횡적인 바로 섬, 똑바로 섬, 진리를 올바로 알게 되면 이제 똑바로 서게 되는데, 히브리어로는 ‘콤, 헬라어로는 ‘이스테미’입니다. 거기서 ‘타우르스’라는 ‘십자가’, ‘언약의 기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똑 바로서다’, 이 ‘히스테미’를 위해서 횡적으로 이렇게 진열하거나 진설하거나 배설해 놓은 것을 뭔지 알아서 똑바로 서면, 그것이 ‘이스테미’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횡적으로 진열해 놓고 배설해 놓은 첫 번째가 무엇 입니까?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의 세상, 심지어 성전으로, 말하는 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렇게 진열해 놓고, 진설해 놓으신 것으로 우리가 그 위의 것을 똑바로 알아서 똑바로 서 버리면 그것이 ‘이스테미’입니다 그러면 ‘아나데마’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하늘의 것, 위의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아래에서 그 진리를 담은 그것으로 사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예수, 그 율법, 그 성전은 전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된단 말입니다. 성전, 율법,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아나데마’의 삶을 살아야 되는 존재는 전부 파괴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삶 속에, 자기의 시간 속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되어서 너희에게 진리를 설명하는,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어.” 아니, 이 말은 “마땅히 그렇게 될 거고 당연히 그렇게 될 거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의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존재로 존재하다가, 때가 되어서 그가 담고 있는 생명이라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의 파괴를 감수하는 그 행위, 그것을 한 단어로 축약하면 ‘아나티데미’, ‘아나데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그 모양대로 이해되고 남게 되면, 그게 율법이고 그게 성전입니다. 그러면 그게 저주입니다. 그 율법, 그 제사, 그것은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안 하는 존재가 되라고 그것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금하다’라는 내용으로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전만 보고 원어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주의해야 합니다. 사전만 보고 이것이 ‘저주하다’, ‘금하다’니까 “아, 내가 저주 받아서 그렇게 지옥에 갈지라도 나는 내 민족이 구원받으면 괜찮아”라고 이해해 버리면 안 됩니다 그 단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까지 가서 그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진리를 전해주려고 그 역할을 감수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가도, 복음만 전해지변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영생과 구원 죄와 지옥 땅들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진짜 알게 된 사람에게 나올 만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거기로 돌아갑니까? 그게 죽음이고 사망인데.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그 지옥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처절하게 경험해 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구원과 그것을 바꿉니까?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저는 제 자식하고 도 안 바꿉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이며, 긍휼이며, 은혜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적이며 박애주의적인 아담들의 안경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위대한 성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식의 번역을 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인간의 성자로서의 가능성이 열리는 거 아닙니까. “바울도 그렇게 살았으니 우리도 그런 사랑과 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도 ‘진리를 아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위대 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 속에는 우리도 마땅히 그런 존 재가 될 수 있다는 오만이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 흉내 내는 식의 번역인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그 어떤 것을 맞바꿔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무엇과 바꿉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피를 토하며 내 안에 그 생명을 전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내가 그 평안에서 끊어지고 다른 사람을 그 평안으로 밀어 넣고 싶다는 열망은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제게는 그 생명이 소중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 신이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진리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계속 해서 진리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괜찮아. 나는 그리스도와 이미 연합되어 있어. 하지만 당신들을 위해 기꺼이 내가 그 자리로 내려가 삶 속에서 내가 파괴되고 부정되고, 그 진리를 나로부터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와 혈통적으로 묶여 있는 민족적 이스라엘 역시 그런 ‘아나데마’의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며, 이스라엘이 그 자체로 무슨 가치가 있고 위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너희들도 ‘아나데마’ 위의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이렇게 있는, ‘티데미’되어있는 존재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너희들에게 준 그것, 양자 됨이나, 생명이나, 제사나, 율법이나 이런 것 또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너희에게 준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너희들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을 흠향 하신다’라고 여기라고 준 게 아니란 것 입니다. “잘난 체하지 말고 정신 좀 차려. 진리를 말할 테니 내 말을 들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이 전부 그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아담과 하와, 아벨, 셋, 에녹,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심지어 예수까지, 그런 모든 이가 하나같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게 어떤 삶인지 압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진리를 새겨 넣으셨습니다. 그들의 삶이라는 도화지에 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택한 백성에게 그들 자신을 교과서로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쓰임 받는 자들의 삶이 ‘아나데마’, ‘티데미’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그들의 육적 인생이 하나님에게 차압당하고 몰수당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그 발에서 신을 벗은 지들의 인생이었던 것 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발에서 신을 벗게 하시는데, 그때 그들이 신을 벗는 건 ‘나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나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 라는 뜻으로 신을 벗으면 이제 그 상대방은 그 사람의 발을 몰수해 버리고, 자기가 가진 새 발을 줘야 합니다. 그것이 그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서 그리스도의 영, 진리, 성령으로 주실 그 제자들의 발을 새 발로 씻겨주신 것입니다. 신을 벗긴 다음에 “내가 너희 발을 씻길 거야”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에 발을 씻긴다는 건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신을 벗습니다. “나를 양도합니다. 내 발을 몰수해 가십시오. " 주님이 “그래, 내가 그 발을 영접한다. 그 발을 몰수한다, 그리고 새 발을 줄 거야” 하십니다. 그리고 물로, 진리로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새 발,그 진리를 갖게 되고, 그 새 발은 내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못 가고, 그 발에 띠 띄운 그 방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성도의 삶, ‘아나데마’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게 저주지, 복된 삶이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그냥 껍데기로 보면, 그들에게 그것은 저주로 보입니다. 그게 아나데마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그 아나데마, 그 저주의 삶을 산다 할지라도, 너희에게 진리가 전해졌으면 좋겠어. 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나 지옥 가도 상관없어” 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 안에서 증거를 하나 대겠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지금 바울은 육적 이스라엘 을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혈통 적 이스라엘을 진리 설명하는 용도로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 인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유다’에서 나온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남 유다입니다. 그래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같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생이 겹쳐집니다. 알고 있듯이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유다의 후손, 유다의 씨로, 메시야를 보내겠다고 야곱의 유언을 통해 언약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그 유다라는 존재는 물론 영적 이스라엘, 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유다, 이스라엘 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씨로 가져야 한다, 진리라는 것을 씨로 가져야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유다의 후손의 모형으로 먼저 왔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래서 그가 기름 부음을 받고, 씨를 낳는데 ‘살롬’,솔로몬이라는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이스라엘, 유다는 그 씨를 가져야 합니다. 아들을 그 안에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형으로 먼저 살다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좀하리로다 창49:8-10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한다." 이것은 요셉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 유다, 이스라엘, 야곱, 심지어 우리의 삶이 정확히 겹쳐져야 합니다. 마치 유다를 하나님이 장자로 책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 유다, 그 장자를 오게 하라”라고 합니다. 당연히 장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장자가 되는지 설명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9-10장의 그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된 그 유다, 그 이스라엘, 그 요셉, 그 야곱이란 말입니다. 역대상에서는 그 장자의 명분이 분명히 요셉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일어난, 이 예언이 요셉에게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느니라 역대상5:2
이스라엘과 요셉은, 이스라엘은 유다니까, 유다와 요셉은, 반드시 장자를 그려내는 같은 삶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창세기 39장에서 그 이야기 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을 쑥 빼면 바로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그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바로 전에 유다의 이야기,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에 딱 들어가 있습니다. 그 말은 이 요셉의 이야기를 유다의 이야기로 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라고 합니다. “야곱의 삶이라는 건 이런 거야”리는 것입니다 어떤 야곱입니까? 얍복강을 건넌 야곱, 이스라엘입니다. “그 요셉의 이야기는 유다의 이야기로 봐야지” 하면서, 창세기 38장에 유다의 이야기를 끼워 넣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이야기와 야곱의 이야기와 유다의 이야기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 영적 장자인 우리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9-10장을 우리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저 육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보면, 여러분은 성경을 엉터리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맥으로 연결되어서 뚝뚝 끊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입니다.
유다, 즉 그 이스라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창세기 38장을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이 왜 ‘알레데이아,’ ‘진리를 말한다. 라고 하면서, 그 ‘아나데마’라는 단어, 진리의 내용으로 썼는지 잘 보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전부 그 삶을 살았습니다. 유다는 메시아를 씨로, 아들로 낳아야 하는 하나님 백성 전체의 모형입니다. 그러면 그 후손에서 반드시 그 씨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도 오고, 그 후손으로 예수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족보의 한 인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이야기는 며느리와 통간을 해서 쌍둥이를 낳은 것 외에 별로 특이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성경에서 이 이야기는 빼도 될 뻔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빼면 안 되는 내용입니다. 그에겐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그 씨가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형사취수제’ 라는 것이 있어서, 첫째가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수를 둘째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그 첫째 아들은 형의 족보로 입적이 되고 둘째부터는 진짜 그 둘째의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오난에게 그 형수를 주었는데, 오난은 그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땅에다 설정했다고 합니다. 땅에 씨가 설정되면 그게 멸망입니다. 씨는 반드시 ‘네케바’,여자 안으로 들어가 아들로 맺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씨를 땅에다가, 하늘의 씨를 땅에다가 설정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둘째까지 죽여 버리십니다. 씨를 못 가지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인 게 아닙니다.
이제 셋째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셋째 아들마저 저 며느리가 잡아먹을까 봐 안 줍니다. 그리고 ‘ 클 때까지 기다려라, 아들이 아직 너무 어리다’라며 친정으로 보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유다의 아내가 죽습니다. 그리고 그즈음에 유다가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갑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다말이 보니 셋째가 다 컸는데 아들을 아직도 안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녀로 변장을 합니다. 그리고 시아버지를 유혹합니다. 철저하게 담보물로 도장과 지팡이를 받아 놓습니다. 원래 유다가 다말의 몸값으로 주기로 한 것은 염소, 제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그것을 받지 않고 도색과 지팡이만 갖고 사라집니다. 유다가 마누라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창녀와 그런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아닙니다. 얼마 후에 유다의 귀에 자신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것은 죽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이때다 싶어서, 다말을 데려다가 불살라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말이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 아비의 담보물을 내어 놓습니다. 다말을 죽이려고, ‘그 배에 들은 그게 뭐야?’라고 묻자, 그 여자가 그 아비의 담보물을 내 놓는 것입니다. 바로 도장과 지팡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나고,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족보에 그들의 이름이 떡 하니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도 있고 아주 콩가루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메시아의 족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도대체 야곱, 즉 이스라엘의 그 약전을 설명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중간에 왜 이 지저분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빼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내 놓아야 할 담보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도장이라는 건 인 을 말합니다.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그 인입니다. 또한 지팡이는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라메드’라는 단어 자체가 ‘가르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자칼’과 ‘네케바’에, 그 ‘자칼’이라는 단어가 ‘인치다’, ‘표하다’,그래서 ‘기억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또 ‘네케바’라는 단어는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그릇’, 어떤 것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네케바’가 ‘자칼’을 자기의 반쪽으로 담아서 연합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인친 그 자만을 기억한다고 해서, ‘자칼’을 ‘기억하다, 표하다, 인치다’ 이런 단어로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전부 인(印)이 쳐 있는 것입니다 그건 인두를 이렇게 지져 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 자칼, 그 진리, 그 기름’을 그가 갖고 있으면 인친 자입니다. 그 인이라는 개념은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이 터번과 같은 두건을 쓰는데, 이마에 다가 인을 새기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때 인을 도장 새기듯이 새기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성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건 내가 인친 거야 도장 찍은 거야”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이마에 인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인, 도장을 갖고 있으면서 “이쉬가 뭐야?"라는 말에 대답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 인은 그들에게 “이건데요”라며 내 놓을 수 있는 담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인을 ‘기름 부음’이라고도 합니다. ‘기름’ 은 항상, 하나님의 그 진리를 뜻합니다. 구약시대 때 기름은 올리브기름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감람나무, 올리브나무는 항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그 기름으로 항상 빛나야 하는 것이 촛대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인(印)을 ‘기름부음’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기름은 또 성령이라고도 합니다.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2:20-22
‘거룩하신 자’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분의 영으로 내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한다”는 말은 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로 말하지 않는다. 왜 두 가지로 말하니"라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다” 이런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말을 한 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두 말로 말 하면, 그게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은 율법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들의 말이라는 것은, 진리로 해석된 그 아들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 같은 말이었다는 것을 모르면, 그게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것이 ‘엔타이크라이스트’입니다.
23 아들을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일2:23
“아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부’,이 말이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 안에 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 진리가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내 안에 있는 그 말, 그 진리를 전해 주어서 그가 아들로 탄생이 되면, 나는 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가 되고 아버지와 아들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 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요일2:24
‘처음부터 들은 것’, ‘아르케’라는 말은 ‘베레쉬트’이므로, 그 아버지의 일곱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 마음으로 가지라는 말입니다. “율법, 성경을 마음으로 가져라, 간직해라" 그것을 그냥, 행위로, 도덕과 윤리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파르’, ‘티끌’입니다. “처음부터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해 내가 이것을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2:25-27
그 진리가 약속이고, 그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갖고 있으면 여러분은 산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기름 부음’이라는 뜻이 헬라어로 ‘크리스마’인데, 여기에 ‘에스’를 붙이면 ‘크리스마스’가됩니다. ‘크리스마’에 오미크론 시그마를 붙이면 ‘존재’가되어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크리스토스’가 되면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기름 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면, 내 안에 거한 그것이 그리스도, 그리스토스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그렇게 내가 그것을 가지면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가지면, 레위기의 수많은 율법 조항이라든지 그 이해도 안가는 묵시서의 내용 같은 게 그냥 진리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게 내 안에 있어서 볼 눈이 생겼습니다. 내 안에 안경이 생겼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그것은 이거야”라고 자꾸 가르쳐 줄 필요가 없습니다. ‘더는 성경말씀 안 읽어도 된다’ ‘설교를 안 들어도 된다’ 이런 게 아니라 더는 ‘이것 이 진리잖아’라고 입증할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를 이야기해 주면, ‘당연히 그런 거죠 마땅히 그렇죠’ 하고 내 안에 있는 그것이, 그 인이, 기름 부음이, 나를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이게 진리란 말입니다. ‘알레데이아.’ 진리이고거짓이 아니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면 우리 안에 인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장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기름, 기름 부음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진리입니다 말씀에서 그 진리가 우리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과 ‘지팡이’를 내가 담보물로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성령, 그 진리를 내가 마음으로 갖고 있다는 뜻으로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시인한다는 것은 아들과 같은 말 을 한다는 것이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것이 ‘아르네요마이에’ 부인 하다는 말입니다. 그 아들의 말을 그냥 율법으로 이야기해 버리면, 그게 부인하는 것입니다. 두 증인은 아버지와 아들인데 그 둘이 한 말을 해야 올바른 증인이지 않겠습니까. 율법과 신약의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과 신약의 말이 다르면 이것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엇갈린 증인이 되면,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와 아들을 둘로 나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인데 ” 요한복음 17장의 이야기,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가 전부 그 내 용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 너희와 나도 하나 ,아버지와 너희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두 증인은 항상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위의 것과 아래의 것은 향상 하나로 연합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이고 복음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기름부음’을 ‘처음부터들은 아버지 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게 곧 말씀입니다. 일곱 말, 그것이 생명이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것이 지팡이가 되어 다음부터는 일일이 안 가르쳐주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대단 한 성경 지식이나 무슨 조직 신학적 이해 그런 것 없어도 됩니다. 알맹이만 안에 갖고 있으면 됩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주는 건, 전부 껍데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성경 또한 이 아래의 말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리 내어 읽으라고 준 것도 아닙니다. 모음 없이 주었는데 어떻게 읽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그 진리가 아닙니다. 아래의 말로 가르치는 내용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수메르어, 라틴어, 아무것도 몰라도 됩니다. 그 진리는 올바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런 것에 욕심을 부리는 것을 지적 허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명하기 쉽게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아내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구약성경 전체를 노트에 한줄 한줄 붙여서 개인 주석을 만드는데 혼자 하기 힘들어서 아내에게 히브리어구 한 절씩 노트에 붙여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뒤집어서 붙여놓은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잘 몰라서 그런 건데 저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더라고요. 모르면 어떻습니까. 내 말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그 히브리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그 사람들 중 몇 %가 예수를 믿습니까? 헬라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 중 기독교인이 몇 %인지 아십니까? 다말이 자기 뱃속에 씨를 잉태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묻습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말 못하면 죽는다!" 불에 태워서 죽인다고 합니다. 그때 그 씨를 잉태한 여자가 도장과 지팡이를 내 놓습니다. 그랬더니 심판을 못합니다. 심판이 지나간 것입니다. 만일 다말이 시아버지가 보낸 염소를 맡아 놓고 그것을 줬다면, 그리고 그 아버지가 와서 물었을 때 그 염소를 내 놓으면서 “이거 당신이 나에게 준 거 아니에요?" 했다 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을 것입니다. 염소는 이무 데서나 구 할 수 있습니다. 제물, 희생 제사의 제물입니다. 그런데 도장과 지팡이는 그 사람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준 것이잖아요. 이것밖에 없어요. 라고 내 놓으면, 그 아버지는 그 여자를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준 것, 자신의 씨가 맞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안에 진리의 씨를 담고 있다고 자부하실 것입니다. “내 안에 진리가 있다. 나는 복음을 이해했다" 그런데 그 씨는 율법의 씨일 수도 있고, 진리의 씨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담고 있는 씨가 율법의 씨라면, 여러분은 그 남편에게 염소 새끼를 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희생 제사만 드리는 자기애적, 자기 헌신의 열정 같은 것입니다. 그게 성전 안에서 드리는 희생 제사, 염소입니다. 주님이 심판대 앞에서 자기 왼편의 염소들에게 뭐 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은 밖으로 나가서 슬퍼하며 이를 갈아라 " 그러자 염소들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를 모른다고 합니까?"라고 따집니다. 하지만 이에 주님은 “그래, 그게 희생 제물 아니냐? 그게 염소잖아. 나는 너희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양들에게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 양들이 주님께 “주님, 언제 우리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라고 묻자 주님은 “너희들이 저 불쌍한 소자(小子) 하나에게, 진리를 알지 못해 이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소자에게 네 안에 있는 그것올 주었으띤, 그게 나에게 한 거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이 인(印)과 지팡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줍지 않게 염소라는 제물 내 놓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 그분의 것, 그분이 나에게 준 그것을 내 놓는 사람 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하나 남은 빵, 목숨, 이런 것을 내 놓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을 진짜 살릴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대신 가스실에 들어간다고 그 사람이 안 죽 습니까? 곧 죽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긴 것은 그저 먼저 죽은 사람의 가치, 만족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은 그거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네 목숨 백 개 주어도, 그것은 나에게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진짜 살 수 있는 그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나데마’의 삶입니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자기 평판을 챙기고, 칭찬도 챙기는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짜 진리가 되어서 하는 그런 일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 일만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서신서에 그 담보물이 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오히려 덧입고자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5:4
“벗고자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온고지신입니다. 옛날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거짓은 그것을 새 것으로 볼 수 있으면 그것이 진리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리라" 말씀처럼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면 되는 것입니다.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후5:5
“보증으로" 담보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印)과 지팡이입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엽1:1 3
그 ‘인’이 성령 맞습니다. 그것을 진리의 말씀,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신 것은 참 지혜로운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 명령을 행해 버리고,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 명령을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거기서 일어납니다.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굉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4
‘보증’입니다. 보증, 인, 성령, 말씀. 그래서 ‘처녀의 비유’에서도 지혜로운 처녀들이 기름, 인, 보증, 그것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랑이 왔습니다. “너 내가 가지고 있으라는 것, 가지고 있어?" 기름을 턱 내 놓았더니, 끌어들여서 문을 닫아 버렸어요. 열 처녀입니까? 성경에서 처녀는 굉장히 부정한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면, 그 존재는 여자로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자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 그리스도, 어린 양, 그 남편을 내 남자로 맞아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집 안으로 들어가서 신부가 되고, 나머지는 처녀가 되어 그 남자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냥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남편, 그 기름, 그 인, 담보물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준 담보물. 그렇게 도장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가진 이가 이스라엘의 완성으로 등장하는 요셉입니다. 남편이 주신 진리라는 담보물을 가지고, 이 꿈에 불과한 세상의 실체를 분별해 내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남편의 인(印)과 지팡이는 껍데기 안의 내용을 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담보물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때와는 달리, 하나님이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요셉의 이야기 중에, 하나님이 요셉 에게 나타났다는 대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쫓아다니면서 참견하지만 요셉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미 진리라는 가르침을 마음으로 갖고 산 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이 보증을 가진 자다, 그것을 내가 그리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로 된 이후의 삶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그는 요셉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안 상태에서 그 요셉은 야곱이고, 야곱은 유다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실체를 이렇게 보았습니다. 살진 소는 제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제로는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물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풍성한 살진 소와 율법의 제물인 마른 소, 흉측한 소, 가짜 소. 그 둘은 일곱으로 동시에 이 땅에 주어지는 것 입니다. 어떤 것이 먼저 왔다가 다른 것이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지금이 풍년의 때입니까, 흉년의 때입니까? 여러분에게는 풍년입니다.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진리로 왔기 때문 업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풍년의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흉년의 때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7 ’의 풍년의 때인 데, 어떤 이들에게는 ‘7’의 흉년의 때입니다. 이처럼 둘은 같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지금 ‘아나떼마’의 모습으로 그렇게 구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 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릅니다. 모르고 그 말을 하고 인생을 살면, 그것을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진리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말씀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진리라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모르고 말하고, 모르고 살아버리면 그게 ‘거짓’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진 소 일곱, 그 진리가 흉측한 것에게 먹혀 있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해도, 그것을 살진 소 일곱으로 받아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한 번 보십시오. 이 역사도 그렇게 끝날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이들이 별로 없지만, 나중에는 하나도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럼 그때는 비진리가 왕인 세상이 됩니다. 진리가 완전히 망한 것처럼 어두운 세상으로, 그 누구도 이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세상인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세상이 그런 상태입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들에게 진리는 먹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7년의 풍년, 그 엄청난 추수, 알곡의 추수, 그 알곡, 진리라는 알곡이 흉측한 가라지에게 먹혀 있는 꼴, 이것이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곡으로, 심령으로 받아먹으면 됩니다. 야곱은 그 7년을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살았는데, 요셉은 칠을 칠, 이 칠을 이 칠로 이해를 하고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진리다, 인과 지팡이를 가진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서 그 꿈을 꾼 자, 자기가 무슨 꿈을 꾼 지도 모르는 그 인간이 바벨론의 왕입니다. 항상 세상의 왕들이 꾼 그 꿈을 해석해주는 건 진리를 아는 이들입니다. 이 인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자기들이 왜 살아야 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과 지팡이를 가진 이들은 그 안에 그 지 팡이, 그 도장, 그 기름이 나를 가르치기 때문에 그 세상을 압니다. ‘세상의 좌, 우, 상, 하, 어둡고 밝은 것, 이게 다 가능하구나’ 하고 알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유인 것입니다 그것이 ‘아나데마’의 모습인 것이죠. 위의 것을 담고 있는 아래의 ‘티데미’ 되어 있는 것들. 이 세상의 선과 악, 죄와 의, 어둠과 밝음, 위와 아래, 좌와 우, 그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인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 담보물이라 는 단어 자체가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성령’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담보로 주셨습니다. 그들은 악과 죄와 어둠과 아래와 바다와 죄, 이것으로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 앞에 담보물을 들이대면서 “이게 바로 하나님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그냥 아래의 것들 아닙니까?"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 가르침으로 우리가 그렇게 알아 버리면 “그렇지, 너는 아는 구나” 하며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출32:9
금송아지도 아니고 금소를 만들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소도 아닙니다. 금으로 만든 것을 어떻게 불에 녹여서 가루로 만듭니까? 소, 아피스의 소처럼 튼실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금으로 치장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았더니, 하나님이 “저 봐라, 저 소들을 나라고 한다. 라고 노하십니다. 하나님을 소라고 하는 죄보 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곧 심판입니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12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출32’ 10-12
말씀은 “하나님은 그렇게 이들의 죄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려고 이 죄를 그들에게 허락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 이들에게 약속을 주었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지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출32:13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에서 이스라엘은 야곱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모세가 창세기를 들먹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의 그 내용을 우리가 진리로 못 알아들으니까 출애굽기를 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 그 말씀이 뭔지 몰라서 율법으로 다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안에서 다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잘 공부하면 창세기를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모세가 그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하늘의 별로 만드신 다고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우리 조상,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룰 것인데, 그렇다면 그 길에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고자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 아닙니까7"라고 인과 지팡이로 명확하게 그 언약을 짚어내서 하나님이 “그렇지, 그러면 내가 심판을 못하는 거야”라고 하면, 그것이 출애굽이고 구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길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7" 그랬더니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내 놓습니다. 그게 인, 복음의 진수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나는 사는 것 입니다. “그게 출애굽이야, 가라" 그걸 내 놓아야 합니다. 땅의 행위가 아니라, 땅의 열매가 아니라 그 아버지의 것을 내 놓아야 합니다. 이게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이고, 요셉의 이야기이고, 이스라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죄를 물을 때 그게 뭔지, 왜 주어진 것인지를 정확하게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과거의 죄 미래의 죄 현재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한 것입니다 없어진 것입니다 과거의 죄도 없고, 현재의 죄도 없고, 미래의 죄도 없으면 죄는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죄와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매주 와서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 죄와 무관한 자로 만들어 주는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그냥 몇 가지 죄를 없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게 죄가 아닌 거구나’라고 깨달아 알면, ‘아, 그 선악과는 생명나무로 우리에게 주신 거구나’ 라고 알면, 그 선악과, 죄, 어두움, 아래의 물, 성전, 율법,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인과 지팡이를 가진 자의 당당함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게 이거잖아요?"라고 내 놓았을 때, 하나님이 “그렇지, 내가 너를 어찌 심판하니7" 하시면 죽음의 심판이 pass over, 유월,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명확하게 이해해서 죄와 세상을 설명하고, 하나님께 “내가 원합니다. ‘아나데마’ 되어서라도 저들이 그걸 깨달아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면 이것이 기도이고 중보 입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흘려주는 것을 ‘프로슈코마이’ 기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옆집 순이 엄마 꼭 낫게 해 주세요” 라고 같이 기도하는 게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유다가 말씀을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 율법을 열심히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엉뚱한 열심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요셉처럼, 유다처럼, 다말처럼, 우리 믿음의 조상들처럼 그 ‘아나데마’의 삶을 살아서 내 골육 친척들에게 진리를 전해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간절히 원한다며 마땅히 그렇게 될 거고 당연히 그것이 이루어질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빨리 그 껍데기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 어줍잖은 선민의식, 그리고 너희가 받았다고 하는 예배, 율법, 천사, 이런 것들, 너희들의 구원의 근거로 내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통해 진리를 그려내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뜻을 깨닫고, ‘아, 우리가 뭐가 잘나서, 우리가 열심히 제사 드려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구나’라고, 이스라엘 스스로 자기를 부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영적 이스라엘로 합류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삶입니다. ‘내가 뭐가 잘나서 하나님이 구원한 게 아니구나’라고 깨달아야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나 열심히 지내고, 율법이나 열심히 지키면서, 우리만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이게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열심히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거란 생각은 모든 보편적 아담들의 일반적 사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자 같은 삶을 살아서 그 분01 기뻐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저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의 이름 모를 어떤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오지에서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며 열심히 봉사하고 선교하고 있는 타종교인들도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하는 것이니 그들보다 더 열심히 하자는 것입니다. 우물도 파 주고, 학교도 짓고, 유치원도 짓고, 진짜로 합시다. 그런데 알지 못하고 섣불리 뛰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조물과 그분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럼에도 그분이 우리와 하나가 되겠다고 하시는 그 사랑과 은혜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 인지를 잘 깨달아서, ‘피조물의 한계와 무지와 무능이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것이 바로 용서이며, 구원이며, 또 그것을 아는 것이 생명이구나’라는 것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때에 “그래, 네 안에 진짜 내가 있구나. 너희들이 율법 안 지키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안 살면 그냥 지옥에 확 보내 버리는, 그런 오해된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나, 그 사랑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사랑의 본체인 내가 네 안에 있구나. 그게 인이고 지팡이지. 그것이 요셉의 삶이고, 이스라엘의 삶이고, 유다의 삶이지. 너희가 그 인과 지팡이를 갖고 있다면 이제 너희 눈도 그렇게 열려야 된단다” 라고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희생하시고 먼저 헌신하십니다. 먼저 제사의 제물로 드려지는 분입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섬기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왔니?"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 희생과 헌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깨달아 알면, 하나님이 그것을 “내인과 지팡이다”라고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 것처럼 아래에는 그거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땅의 열매,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땅의 소산으로 드리면 안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새끼는 장자라는 뜻이고 기름은 진리, 말씀입니다. 그렇게 원문으로 보면, 그 장자, 첫 새끼와 기름으로, 아벨이 하나님께 드려졌다고 나옵니다. 그가 장자로, 진리로,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만 받으십니다. 그것을 로마서 12장에서는 ‘제사’라고 합니다. 그 거룩한 산 제사. 그것을 ‘영적예배’라고 하는데, ‘제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적 예배를 ‘라트레이아’라는 단어로 쓰는데, ‘라트레이아’는 ‘진리로 소통하는 예배’를 뜻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세바조마이’의 그 상태가 되면, 진리로 내 마음을 가져서 나 자체, 내 삶이 예배가 되는 상태인 ‘세바조마이’가 되면, 신령과 진리로 ‘프로스큐네오’하는‘ 화답예배’가 요구될 거라고 합니다. ‘성령과진리’로는 ‘신령과진정’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령과진리’, ‘프로스큐네오’를 뜻하고 곧 ‘예배하라’라는 말입니다. 그때가 온다고 합니다 너희 자체가 제물이 되고 예배가 되면, 너희가 ‘세바조마이’의상태가 되면, 화답예배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분은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배우는 거에만 집중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건,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는 영지주의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자유를 가지고 이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렇게 내가 진리를 이야기하고 여러분이 거기에 화답하는 걸, 이 소통을, ‘라트레이아’라고 하며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아벨이 그렇게 드렸습니다. 기름, 그 말씀과 그 장자로,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인과 지팡이를 내 놓고, 가인은 염소를 내 놓았습니다. 결국 자기가 드리는 그 제물이 뭔지를 모르니까, 내가 드리는 이 제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 말고 다른 제물을 드리는 그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벌어진 게 하나님 살해 사건, 인간들의 예수 살해 사건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 진리를 알면 그 예수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예수를 섬기지 않고, 내 안에 마음으로 갖게 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아벨과 다른 제물을 드렸으며, 왜 그 제물을 지키기 위해 저 하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아 알지 못하면 나는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살인자를 ‘마귀’라고 했습니다. ‘비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예수를 팔아 버리는 내용이 신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유다, 가인, 요셉, 야곱, 그 유다가 그 유다입니다. 우리가 그 유다입니다. 모든 아담이 자기의 그 유익을 위해 그 하나님을 넘기 게 되어 있습니다. ‘팔다’라고 번역된 ‘파라디도미’는‘넘겨주다’라는 뜻입니다. 유다가 안 팔면, 사람들이 그 예수 얼굴 몰랐습니까? 그러니까 넘겨준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저주하며 넘겨주었습니다.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가 왜 그 예수를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죽음에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왜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알면 됩니다. 제지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함과 동시에, 자기들이 그렇게 완벽하게, 세 번이나 철저하게, 그분을 부인한 게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유다는 그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기 전에 죽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다가 안 해버렸기 때문에 마귀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성령이 와서 그 유다가 다른 열 한 명의 제자들처럼 그것이 뭔지 알았으면,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진리의 성령을 인으로 못 받고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복’은 그 진리를 알고 죽는 것입니다. 복(福)은 하나님의 그 제물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한곳, 이 밭, 에덴 동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행복에 서 이 ‘행(幸)’자는 ‘어려서 죽지 않는다’ 이런 말입니다. 그것을 그 대로 해석해서 ‘아기 때 죽지 않는 게 복이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자를 어른이라고 하고, 진리를 못 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를 ‘젖먹는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 어린아이로 죽어 버리면 그게 불행이란 말입니다. 그 어린아이 때 죽지 않고, 진리를 알고, ‘장로(長老)’, 진리를 안 자가 되어 죽으면 그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그걸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그것을 모르고 죽어서 마귀라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아나데마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진리로 깨달아서 하늘의 별들로 살았습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 인과 지팡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받아 하늘의 별 들이 되었다. 나도 너희들에게 그런 아나데마의 존재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 아래의 것들과 아래의 개념들을 위의 것으로 깨달아 알면, 그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너희는 모형으로 주어진, 양자,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이런 것들만 자랑으로 삼고 천사가 뭔지, 부활이 뭔지, 그런 것으로 다투면서, 그것이 구원이니 영생이니 이러고 있으니, 내가 어찌 안타깝지 않겠느냐? 내가 전하는 그 내용이 바로 ‘알레데이아’, 진리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은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 잠시 있다 사라지는 꿈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사는 이 현실, 크로노스, 이 세상, 여기를 꿈, 환상이라고 합니다. 꿈이나 환상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중간에 깨 버리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의 삶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꿈이고 환상인 것입니다. 꿈속에서 여러분이 정말 먹고 싶은 것을 배 터지게 먹어 본 적 있습니까? 깨어났더니 계속 배가 부릅니까? 아닙니다. 꿈속에서 먹은 것은 우리의 현실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꿈속에서 여러분 이 선한 일, 착한 일을 많이 했어도 깨보면 꿈일 뿐입니다. 꿈에서 한 일, 꿈에서 된 것, 꿈에서 먹은 것,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관계, 그토록 상처 많이 받는 그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일관성이 없고, 배신을 일삼고, 험담을 일삼고 그러는가?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성경에서 진짜 여러 분의 하늘 친구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성도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처 받고,오해 받고, 그런 거에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모두 꿈일 뿐입니다.
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사29 :8
그런데 오늘날 생명의 양식을 전해 준다고 하는 예배당에서의 설교가 전부 인간의 육신과 그들의 욕심과 이 세상일에 관한 도덕, 윤리,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니 꿈같은 세상에서 그 꿈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것입니다. 여기는 그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인생을 남들도 존경하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그냥 ‘아나티데미’, 아래의 것입니다. 위의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것뿐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얼마 전에 라틴어 미사를 없앴습니다. 그전까지는 온 세상에 있는 성당이 전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고, 설교도 교황청에서 일괄적으로 내려주는 라틴어 설교를 그냥 읽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은혜 받았습니다. 헌금도 도에 지나칠 정도로 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각자너희 말로 해라”라며 각 교구에서 그들의 말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내 놓은 첫 번째 반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냥 옛날처럼 못 알아듣게 라틴어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훨씬 은혜로워. 사람의 말로 들으니까 배가 고파. 그냥 ‘그건 그거겠거니’하고 추측할 때가 훨씬 은혜로워”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해봐야 배고파 죽겠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은 이 크로노스의 세상이 아닙니다. 영원입니다. 그 영원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생의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영생, 영원의 주인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영원을 현실의 어떤 연장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의 세계도, 이 세상 것들로 막연히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그런 것들이 풍성하게 제공되는 곳’처럼 이 유한의 세계 것들로 그 무한의 세계의 것을 쟁취해 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이 유한 세계의 어떤 것, 꿈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쟁취할 수 없습니다. 얻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하늘의 것입니다.
우리 육신과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정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 그 이스라엘, 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그 민족적 이스라엘이 아니었구나. 그때는 그 밖은 다 이방 인, 그 안은 하나님의 백성. 이렇게 우리에게 아나티데미, 아나데마 아래의 것으로 설명해 주었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 영적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것이었구나’라고 알면, 그 이스라엘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안의 보물인 진리의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시게 되는 것이죠. ‘아나데마’, 하늘을 그려내는 그 도구로써의 그 삶, 그리고 모든 것을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러면 그 인(印)과 지팡이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 “너희들이 스스로 그것을 알면 꿈속에서 행한 그 일은 못 본 걸로 해 줄게”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불안해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은 그동안 살아온 그 시간과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할 것들, 또 내가 원하지만 되지 않은 것, 그런 것들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무슨 사고를 당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 시간밖에 모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그때도 여러분이 지금처럼 아파할까요?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잊었고 너희들도 잊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너희들을, 너를 용서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새록새록 기억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모두 해결되면, 그것은 여러분과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나리오 안에서 우리의 인생이 이 꿈속에서 그렇게 진행된 것인데, 그 시나리오 속에서 한 일로 따지면 그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아나데마의 삶으로 끌고 가신다고 하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버렸는데, 하나님이 그 역할을 들먹이면서 “너 옛날에 왜 그랬니?"라고 하시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제는 내 맘대로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진리, 그 복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그 일, 그 더러운 것, 그 지저분한 것,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그 귀한 걸 쓰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던져도, 진리를 던져도, 복음을 던져도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끌어다 사용해 먹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바울이 원하는 것처럼 저도 간절히 원합니다. 제발 그것을 올바로 알아듣고, 그 자유와 그 기쁨, 그 평안으로 열심히 사십시오. 사람답게 시는 것 그 이상으로, 더 성실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누가 막 살아도 된다고 그랬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화지입니다. 그 역할 잘하고 그분 앞에 그 인(印), 지팡이 내 놓으면서 “하나님, 잘 봤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저는 이런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하면 그것이 영원이고 완성인 것입니다.
로마서 101 “아나데마” (롬9:1-3)
롬9:1-2 <약속의 자녀 약속의 말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감시절의 경험담을 수기 형식으로 기록한 실존주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 된 99% 이상의 수감자들은 금방 그 극한의 고통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잊어버리고,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조금이라도 덜 배고프기 위해서 이기적인 짐승이 되고 마는데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1% 미만의 예외자들이 있더라고 그렇게 기록을 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자신의 마지막 남아 있는 빵을 건네주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에게 다가가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진심으로 전해주기도 하며,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며, 심지어는 타인을 위해서 대신 가스실에 들어가는 그런 이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재미있는 거는 짐승처럼 자기의 그 자기애적 욕망을 위해서, 나는 살아야 되겠다라는 그 자기애적 욕망을 위해서 타인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던 99%의 그 짐승 같은 유대인들이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에 반해, 순순히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마지막 남은 빵이나 아니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놓았던 사람들 중에는 이미 신을 버린, 신을 떠난 이들도 왕왕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들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그들을 그렇게 헌신하게 만든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사자 우리에서, 독사의 굴에서,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앞에서, 활활 타는 풀무불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서 그렇게 했던 사람들을 추앙하고 존경하지 않습니까? 근데 타 종교인들도 심지어 하나님을 떠났다라고 하는 그런 이들, 무신론자자들 까지도 가난하고 압제 받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헌신을 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누가 준 힘이냐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세상 인간 세상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고 칭찬하는 소위 위대한 삶, 거룩한 삶, 착하고 깨끗한 삶, 선하고 아름다운 삶. 그런 것이 기독교만의 열매나 아니면 기독교만의 지향점은 아니라는 게 분명 하죠?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도 그것을 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해낼 능력을 어디선가 받더라는 것이죠. 그건 보편적 아담들의 공통 된 목표고 지향성이고 희망사항이기도 한 거예요. 그렇다고 진리를 배우고 깨달은 성도들이 그런 것들을 가볍고 우습게 여겨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위대한 거예요. 하늘의 백성들이 인간세상에서 인간세상의 것들을 도구로 하여 하늘의 것들을 배워가야 하는 그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그 크로노스의 시간, 그 시간 동안에는 당연히 이 아래 세상의 질서와 도덕과 윤리와 선을 행하고 가르쳐야 되요. 그건 마땅한 겁니다. 그러나 그건 신앙의 열매라기보다는 그냥 사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람이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 당연히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 제가 여러분에게 경계 하라고 하는 건,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러한 선한 삶이, 그렇게 거룩해 보이는 그런 위대한 삶이, 혹시 자기애적 상승 욕구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라는 거예요. 나의 만족이나 타인에 의한 나에 대한 훌륭한 평가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 내가 내놓는 것은 혹시 아닌지 돌아보자는 거예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그런 자기애적 상승 욕망이라는 건 원자를 분해해 버릴 정도로 뜨겁습니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만큼 뜨거 워요. 그건 프로이드가 리비도라고 불렀던 아담들의 생본능 같은 거예요. 진리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역동성 있게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그겁니다. 여러분. 그런 욕망은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낼 정도로 무섭습니다. 이를 악물고. 저는 그런 친구들 후배들을 수 없이 봐왔어요, 제 눈앞에서. 참더라니 까요. 내 몸이 활활 타고 있는 순간에도 누군가 그 행위를 칭찬해주고 칭송해주면, 아니 내가 추측하기를, 그래 누군가 나의 이런 모습을 위대하게 봐 줄 거야, 가치 있게 봐 줄 거야라고 상상만 되어도, 인간은 그 힘으로 자기 몸을 불사를 수 있더라는 거예요. 그게 인간들의 자기애적 욕망이라는 거예요. 성경은 그런 행위를 vanity, 헛되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허망한 거라는 거예요.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세간의 멋진 평가를 획득하기 위해 내놓는 모든 행위는 그 외모가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해 보여도 그건 욕망에 불과한 것이라는 거예요. Vanity 라는 거예요. Vanity is vanity, all is vanity. 허망하고 헛것이라는 거죠. 그건 선악과를 먹어버린 모든 아담들의 본질적 속성 같은 거예요. 하나님처럼의 삶.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바로 그 거만한 욕망, 인간들의 그 vanity의 욕망을 깨부수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나의 가치는 그러한 것으로 매겨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 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일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내어놓는 헌신, 그것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어놓는 자기애적 상승 욕망에 의한 헌신은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나는 거예요. 여러분 진리를 안다고 해서 그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그 헌신이 안 일어날 거 같으세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 남가주 서머나교회에 담임목사가 일 년 동안 여기 떠나 있으니까 사람이 삼백 명도 안 남았어요. 그러나 그들은 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말씀을 사모해서 그 자리 남아 있는 거거든요. 이제 알곡들, 진짜들만 남아 있는 거겠죠. 우리가 서울 서머나교회에서 지금 900명 정도가 모이는데 왔다 갔다 하는 사람 합치면 천 명 정도가 모이는데 그들의 세배 이상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거기가 훨씬 더 많아요. 담임목사 없는 데도. 그런 것이 그들의 헌신을 끌어내고 막고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냥 그 헌신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도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끊어짐 이라든지, 저주라든지, 이런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는 거예요. 바울은 세상이나 다른 이웃들에게 비추어질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자신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거룩하고 가치 있고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 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진리의 복음이 제대로 전해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도구로 쓰이다가 안개처럼 사라 질 용의가 있었다 라는 그런 말입니다. 본문 1절이 ‘알레테이아’ ‘진리’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9장 1절이 진리로 시작 되요. 그러니까 9장의 내용은 진리에요. 진리에 관한 내용이란 말이에요.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항상 첫 단어가 제일 중요하다 그랬죠. ‘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냐,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야’ 이런 말이거든요. 그냥 늘상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이것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참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어. 이렇게 이야기해요. ‘알레떼이아 로고스 레고’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거짓이 뭡니까? 거짓은 참을 담은 그릇이요. 근데 그 그릇을 통해서 그 안에 담긴 참이라는 내용을 보아 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거짓이라 그랬죠. 사도바울이 8장 말미에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위험, 적신, 칼, 사망, 생명, 천사, 사탄, 높음, 깊음, 피조물 등등의 그런 그릇들을 나열하면서 그런 것들을 그냥 표피적으로 받아버리면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끊어짐이라고 웅변을 했죠? 8장에서. 그런 것들이 절대 하나님과 우리를 끊을 수 없어, 그 말은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끊어지면 소재로 사용된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진리라는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 거지, 그냥 표피적으로 이해를 해 버리면 안 되는 거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면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처럼 천사가 있네. 없네, 영생이 있네. 없네, 부활이 있네. 없네, 이 딴거 갖고 싸우다가 그냥 시간 다 허비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환란 곤고 핍박 위험 칼 적신 그 아래에서 수고로운 짐만 지다가 멸망의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반드시 진리라는 내용으로 보아 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 그게 바로 거짓이 되는 거고,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 된다는 말이에요. 거짓이 되는 거고, 그 거짓에 의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건너 갈 수 없는 고랑으로 갈라지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8장을 마무리한 사도 바울이 9장의 첫 단어를 알레떼이아, 진리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중요한 건 진리 야. 나는 진리를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말을 있는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인데,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야, 내 안에 그리스도 가 들어 와 있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야. 그래서 나는 그 진리를 그 그리스도를 내 마음으로 갖고 있어. 그 말은 그리스도와 나는 연합 돼 있어 이런 말입니다. 그렇게 연합되어 있는데 내가 그토록 안타까워하고 있는 내 민족 내 혈육 내 형제, 그와 혈통으로 묶여있는 이스라엘, 물론 이거는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의 율법적 행태를 지칭하는 거겠죠? 그죠? 그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내가 저주 받아도 괜찮아,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아니 내가 간절히 원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이 말이 내가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이 민족적 이스라엘이 다 구원 받기를 나는 간절히 원해~ 이런 말일까요? 여러분 구원 받았죠? 진리가 여러분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근데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어요? 여러분, 여러분 영생이나 구원을 포기 할 자신 있어요? 또 다시 여러분이 나온 그 곳으로 영원토록 들어가라고 한다면 가겠습니까? 내 형제들의 구원과 그걸 바꾸겠어요? 나는 안 바꾸어요. 참고로. 저는 안 바꿉니다. 그런 말 아니에요.
여기에서 ‘저주를 받아’ 라고 번역이 된 ‘아나데마’ 라는 말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되요. ‘아나’ 라는 말은 ‘에피’ 라는 말과 구분을 하여 공간적인 위가 아니라, 공간적이지 않은 다른 차원의 위를 이야기한다. 그랬죠. 그래서 ‘위로 난다’ 그러면 ‘아노뗀, 거듭남’ 이렇게 우리가 이해를 한다고 그랬어요. 그 ‘아나’ 라는 접두어와 ‘티데미’ 라는 동사의 합성어가 ‘아나데마’ 에요. 그러면 티데미는 뭐라 그랬어요? 이제 여러 번 들었어요. 횡적인 바로 섬, 똑바로 섬, 진리로 올바로 알면 이제 똑바로 서게 되죠. 히브리어로는 ‘쿰’. 헬라어로는 ‘이스테미’ 거기에서 ‘스타우로스’ 라는 십자가라는, 언약의 기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똑바로 섬, 이스테미를 위해서 횡적으로 이렇게 진열해 놓거나 진설해 놓거나 배설해 놓은 거. 그래서 그거를 마치 무슨 만화 게임처럼 뿅뵹뿅뿅 먹으면서 가가지고 나중에 다 먹었어. 그래 놓고 이게 뭔 줄 알아서 똑바로 서면 그게 이스테미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횡적으로 진열해 놓고 배설해 놓은 첫 번째 게 뭐에요?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의 세상, 심지어 성전으로 말하는 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죠? 그것으로 이 세상에 이렇게 진열해 놓고 진설해 놓고 봐 라고 주신 그것으로 우리가 아 이거, 이 차서로 그 위의 것을 똑바로 알아, 똑바로 서버리면 그게 이스테미잖아요? 그죠? 그럼 아나데마는 뭐겠어요? 그 하늘의 것을,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아래에서 그러한 것으로, 그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 내가 그렇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예수, 그 율법, 그 성전 이건 전부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되어지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렇죠? 그거는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되어진단 말이에요. 성전, 율법은 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되죠. 성전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로 완성이 되어야지요. 예수는 그리스도의 영, 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되죠.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을 살아야 되는 존재들은 전부 파괴를 함유하고 있어요. 자기의 삶 속에~ 자기의 시간 속에~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진리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진리를 설명하는 존재 이었으면 좋겠어. 아니 이 말은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될 거야, 그런 말이에요. 그렇게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존재로 존재하다가 때가 되어서 그가 담고 있는 생명이라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파괴를 감수하는 그 행위, 그것을 한 단어로 축약하면 아나티데미, 아나데마(άνάθεμα) 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그 모양대로 이해되어 지고 남아버리면 그게 율법이고 그게 성전이죠? 그러면 그게 저주잖아요. 그래서 아나데마를 저주라고도 번역하고...그 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 율법 그 제사는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 걸 안 하는 존재로 되게 되라고 준 것이죠? 그래서 “금하다”라는 내용으로도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전만 보고 원어를 공부한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사전만 보고 아나데마가 “금하다, 저주하다”이니까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에 갈지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으면 나는 괜찮다. 이렇게 여러분이 이해해 버리면 안 돼요. 그 단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까지 올라가서 그 내용을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참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 그 역할을 감수하고 싶다라는 강렬한 소원을 애기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도 복음만 전해지면 괜찮다 라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영생과 구원 그리고 죄와 지옥, 땅들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진짜 알아버린 사람에게서 나올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게 죽음인데 그게 사망인데 ~ 어떻게 내 구원과 그 걸 바꿉니까?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그 지옥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처절하게 경험해 본 사람이~~안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이며, 긍휼이며, 은혜이며 능력인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사람 하나 죽여도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려와서 안 죽어도 된다니까. 그게 그렇게 된다면~~
그러한 인본주의적이며 박애주의적인 아담들의 안경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위대한 성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번역을 해 버린 거예요. 그래야 모든 인간들이 성자로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렇게 살았다. 우리도 그런 마음, 그런 사랑의 마음, 헌신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도요. 진리를 아는 인간이란 존재들은 이렇게 위대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는 마땅히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 라는 오만이 섞여 있는 겁니다. 하나님 흉내 내기 식의 번역인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구원과 그 어떤 것과도 맞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니 구원은 하나님이거든요. 그 하나님을 무엇과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피를 토하며 내 안에 그 생명을 전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내 목숨 수백 개 라도 줄 수 있습니다. 이까짓 것은~ 그러나 내가 그 평안에서 끊어지고 다른 사람을 평안으로 밀어 넣고 싶다는 그런 열망은 절대로 제 안에서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그 만큼 제게는 그 생명이 소중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종류의 애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진리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자기는 아쉬울 게 없어요, 이제. 그죠? 저? 아쉬울 게 없어요. 그냥 이제 지리산이나 아무데 들어가서 마누라랑 둘이 살면 돼. 아쉬운 건 여러분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저에게 자꾸 들려주세요, 들려주세요, 그래야 하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게 내가 부탁하면서 해야 돼요. 오늘 좀 긴데 괜찮을까요?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나는 괜찮아! 나는 그리스도와 이미 연합되어 있다. 그러나 당신들을 위해 내가 기꺼이 그 자리로 내려가, 내 삶 속에서 내가 파괴되고 내가 부정되고, 그 진리가 나로부터 설명되어 진다면 내가 그건 간절히 원하는 거란 거예요. 그리고 그와 혈통적으로 묶여 있는 민족적 이스라엘 역시 그러한 아나데마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뭐가 위대하고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너희들도 아나데마,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진설되어 있는, 티데미 되어 있는 그런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너희들에게 준 그것, 양자됨이나 생명이나 제사나 율법이나 이런 것 또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너희에게 준 것이지, 그걸 근거로 너희들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이고, 우리의 열심을 하나님은 흠양하신다고 준게 아니라는 것을 꼭 알라는 거예요. 나 조차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잘난 체 하지 말고 정신 좀 차리고 진리를 말할 테니 내 말 줌 들으라는 거예요.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전부 그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가 갔어요. 아담과 하와 아벨 셋 에녹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엘리아 엘리사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요한 예수까지....그런 등등의 모든 이들이 하나 같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았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앎니다. 그게 어떤 삶인지 앎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진리를 새겨 놓으셨어요. 아니 그들의 삶이라는 도화지에 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쓰십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들 자신을 교과서로 주는 겁니다. 그렇게 쓰임 받는 자들이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인 것입니다. 그 티데미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그들의 육적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차압당하고 몰수당했다는 말입니다. 그게 그의 발에서 ‘신을 벗은 자들의 인생’ 이었던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말씀드렸죠? 그 발에서 신을 벗는 게 뭔지. 하나님이 그들의 발에서 신을 벗게 하신 다음에~ ‘신을 벗는다’라는 것은 '나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 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때 당시에 그렇게 쓰였던 거예요. 그게 모형으로. 내가 당신에 내를 양도합니다, 하면 신을 벗어요. 그러면 이제 그 상대방은 그 사람의 발을 몰수해 버리고 자기가 가진 새 발을 주어야 되요. 그 안에 담긴 내용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서 당신을 그리스도 영 진리로 성령으로 두 실 그 제자들의 발을 새 발로 씻기는 거예요. 신을 벗긴 다음에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길 거야. 그 때 당시에 발을 씻긴다는 것은 영접한다는 뜻이에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나를 양도한다는 거고, 그러니까 제자들이 신을 벗었어요, 나를 양도합니다, 내 발을 몰수해 가세요, 그러자 주님이, 그래 그 발을 영접한다, 내가 몰수한다. 그리고 새 발을 줄 거야. 물로 진리로 씻어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은 그 진리, 그걸 가진 이들은 새 발, 그 진리를 갖게 되고, 그 새 발은 내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못 가고, 내 밖에서 띠 띄운, 그 발이 띠 띄운 그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그게 아나데마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저게 저주지 복 된 삶이냐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그게 그냥 껍데기로 보이면 그 사람들에게는 그냥 저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아나데마(άνάθεμα)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 아나데마, 그 저주의 삶을 산다 할지라도 너희들에게 진리가 전해졌으면 좋겠어, 라고 말합니다. 나 지옥 가도 상관없어 그 말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 안에서 증거를 하나 대 드리겠습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육적 이스라엘을 진리 설명용 도구로 사용 하고 있습니다. 그죠? 자기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진리 설명용 도구로 쓰고 있잖아요. 유대인이라고도 불리죠? 유대인이란 이름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유다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 남유다에요. 유다와 이스라엘은 같이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설명용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은 야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해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생이 당연히 오버랩이 되어야 되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첫째 둘째 나가리, 셋째 레위는 성전에서 일해야 되니까, 넷째, 그죠? 하나님은 그 유다의 후손, 유다의 씨로 메시아를 보내겠다 라고 야곱의 유언을 통해 언약을 하세요. 그죠? 이스라엘이라는, 그 유다라는 존재는(물론 영적 이스라엘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반드시 그리스도를 씨로 가져야 된다. 진리라는 것을 씨로 가져야 된다 라는 것을 선언해 버린 거예요. 언약해 버린 거란 말입니다. 그 유다의 후손, 그 유다의 후손의 모형으로 먼저 왔던 사람이 다윗이에요. 그래서 그가 기름 부음을 받고, 씨를 낳는데 샬롬, 솔로몬이라는 아들을 낳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그러니까 반드시 이스라엘, 유다는 그 씨를 가져야 되요. 아들을 그 안에 가져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윗이 후손이라고도 부르는 거예요. 주님의 모형으로 먼저 살다간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우리의 모형으로 먼저 살다간 거예요. 그것이.
창세기 49장 8절 보세요.
창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너의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한다, 이거는 요셉에게 일어난 일이잖아요. 보세요. 요셉과 유다와 이스라엘 야곱의 삶,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삶이 정확히 오버랩이 되어야 되요.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창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마치 유다를 하나님이 장자로 책봉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맞지요. 이스라엘 그 유다 그 장자를 오게 하라 그러잖아요. 당연히 장자여야 되요.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 장자가 되는 지를 설명해주는 게 성경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시작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9장 10장의 그 이스라엘, 그 유대인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 된 그 유다, 그 이스라엘, 그 요셉, 그 야곱이란 말입니다. 나중에 확실히 이해가 가실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역대기 상으로 가면 그 장자의 명분이 분명히 요셉에게 있다고 얘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일어난, 주어진 이 예언이 요셉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되는 거예요.
역대상 5장 2절을 보세요.
대상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과 요셉은, 이스라엘이 유다니까, 유다와 요셉은 반드시 장자를 그려내는 같은 삶을 공유해야 되죠. 그래서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되고, 창세기 39장에서 그 이야기가 전개가 되거든요. 창세기 38장을 쏙 빼버리면 딱 연결이 되요. 근데 그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가 전개되기 바로 전에 유다의 이야기가,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에 삽입으로 딱 들어가 있어요. 그 말은 이 요셉의 이야기를 유다의 이야기로 보라는 거예요. 요셉이 여기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그러죠? 야곱의 삶이라는 건 이런 거야. 어떤 야곱? 얍복강을 건넌 야곱, 이스라엘이잖아요.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삶이라는 건 이런 거야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펼친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 요셉의 이야기는 유다의 이야기로 봐야지 하면서 38장에 유다의 이야기를 끼어 놓는 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야곱,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유다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여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 영적 장자인 우리들의 이야기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9장 10장을 우리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저 육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보면 여러분, 성경을 엉터리로 보게 되는 거예요. 성경은 한 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니까요. 뚝뚝 끊어져서 여기선 이 이야기, 저기선 다른 이야기, 이렇게 하고 있지 않다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라니까요. 다 꽉곽 눌러서 꾹꾹 짜 보면은 그거 하나에요. 그게 뭔지 아시죠? 유다 즉, 그 이스라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제가 창세기 38장을 간략히 설명해 드릴게요.
바울이 왜 내가 알레떼이이 진리를 말한다 라고 하면서, 그 아나데마 라는 그 단어를 그 진리를 내용으로 끌어다 썼는지 잘 한번 보시라는 말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 그 삶을 살았어요. 유다는 메시아를 씨로, 아들로 나와야 하는 하나님 백성 전체의 모형이에요. 그럼 그 후손에서 반드시 그 씨가 나와야 되요.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도 오고, 그 후손으로 예수가 오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거기에서, 그 라인에서 그 족보의 한 인물로 우리가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이야기란 말입니다.
근데 유다의 이야기는요, 며느리와 통간을 해서 쌍둥이를 낳은 이야기 이외에 별로 특이한 이야기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야기를 성경에서 빼도 될 뻔 했다, 이렇게 써놓았더라니까요. 진짜로. 아니 그거 빼면 안 되는 거예요. 그에게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자손을 생산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죠. 반드시 여기서 그 씨가 와야 되거든요. 유대 사람들에게는 형사취수제라는게 있어서, 첫째가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수는 둘째에게 줘야 되요. 그래서 거기서 반드시 아들을 나아야 되요. 거기서 아들을 낳으면 그 첫째 아들은 형의 족보에 입적이 되고, 둘째부터 그 둘째의 아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둘째 오난에게 그 형수를 주었는데 이 오난이 그게 싫었던 거예요. 그래서 땅에다 설정했다, 그래요. 성경이요. 땅에 씨가 설정되어 버리면 그게 멸망이에요. 씨는 반드시 네케바 여자 안으로 들어가 아들로 맺혀야 되요. 그런데 그가 그 씨를 땅에다가, 하늘의 씨를 땅에다 설정하면 죽는 거예요. 마스터베이션 하지 마라 이런 말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둘째까지 죽여 버립니다. 씨를 못가지지 죽는 거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말 안 들어서 죽였다는 게 아니라. 셋째가 남았어요, 그런데 유다가 그 셋째 아들마저 저 며느리가 잡아먹을까 봐 안 줍니다. 그리고는 다 클 때까지 기다려라. 아직 너무 어리다. 그래서 친정으로 보내지요? 철떡 같이 믿고 갑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유다의 아내가 죽었어요. 그 즈음에 유다가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갑니다. 마누라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근데 그 소식을 듣고서 다말이 보니까 셋째가 다 컸어. 근데 아직도 안 주는 거예요. 그래서 창녀로 변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시아버지를 유혹하죠. 그리고 담보물을 받아놔요. 그 담보물이 도장과 지팡이입니다. 끈은 도장에 달린 거예요. 도장과 지팡이에요. 원래 유다가 다말의 몸값으로 주기로 한 게 염소 이었어요. 제물입니다. 근데 다말이 그것을 받지 않고, 도장과 지팡이만 갖고 사라져요. 이런 글 읽으면서 야 마누라 죽은 지 며칠 되었다고 창녀하고. 그런 거는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가 아닌 거예요. 남자들 잡지 마세요. 괜히. 얼마 후에 유다의 귀에 자신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죽어야 하는 일이에요. 이거는요. 유다는 이때다 싶어서 다말을 대려다가 불살라 죽여버릴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다말이 자기 배속에 있는 아이의 그 아비의 담보물을 내놓아요. 아비가 죽이려고, 너 그 배에 들은 게 그게 뭐야 라고 묻자, 그 여자가 그 아비의 담보물을 내놓는 거예요. 그게 도장과 지팡이였어요. 그렇게 해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나고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족보에 그들이 턱 하니 올라가 있습니다. 콩가루 족보에요. 기생 라합도 있고, 거기에는.
근데 그게 메시아의 족보에요. 그리고는 다시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진단 말이에요. 도대체 야곱, 이스라엘의 그 약전을 설명한다 라고 성경이 이야기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등장 시키는데 그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왜 이 지저분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냐 말이에요. 어떤 이들이 이건 빼 버려야 된다 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 놓아야 할 담보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에피소드인 거예요. 도장 이라는 건, 인을 이야기하죠.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그 인. 인을 말하는 거고. 지팡이는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 라메드라는 말 자체가 ‘가르치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거라고 그랬어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자칼과 네케바의 ‘자칼’ 이라는 단어가 ‘인치다’ ‘표하다’ 그래서 ‘기억하다’ 이런 단어에요. 자칼이란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그 네케바라는 존재가 그릇이란 뜻이라고 그랬죠. 홈, 그릇, 어떤 걸 담는 그 그릇. 그 네케바가 자칼을 자기의 반쪽으로 이렇게 담아서 딱 갖고 연합이 되게 되면, 요철처럼 이렇게 하나가 되게 되면,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인친 그 자만을 기억한다 라고 해서, 자칼을 기억하다 표하다 인 친다 이런 단어로 쓴단 말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전부 인이 쳐져 있는 거예요. 그건 뭐 인두로 지져 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 있으면 그걸 인 쳤다 라고 해요 성경이. 그 자칼, 그 진리, 그 기름을 그가 갖고 있는가? 그러면 인친자에요. 그 인이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나왔냐면,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이 두건을 쓰죠? 그게 터번 같은 거예요. 관. 거기에다가, 이마에다가 인을 새기는데 어떻게 세기냐면 도장 새기듯 세 기라고 그래요. 성경을 보면은. 여호와께 성별, 이렇게 되요. 저건 내가 인친 거야. 도장 찍은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이마에 인친다고 하는 거예요. 여기다 뭘 찍는 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그 인, 그 도장을 갖고 있으면 이 씨가 뭐야 라고 묻는, 만일에 대답 못하면 죽는 겁니다, 그에게 ‘이건데요’ 라고 내놓을 수 있는 담보물이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그 도장이. 그래서 성경은요, 그 인을 기름부음이라고도 이야기해요. 기름은 항상 하나님의 그 진리, 그리고 구약 시대 때 기름이라는 것은 올리브기름 밖에 없어요. 감람나무, 올리브나무는 항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나무였어요. 그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그 기름으로 항상 빛나야 되는 게 촛대였잖아요. 그래서 그 인을 기름부음이라고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름은 또 성령이라고도 하잖아요. 찾아 드릴게요. 요한일서 2장 20절.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신 자는 하나님이시죠. 예수 그리스도에요 모든 것을 아느니라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죠.
요일2: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요 일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말은 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로 말하지 않는다. 왜 두 가지로 말하나 이런 말이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버지와 아들의 말을 한 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두 말로 말하면 그게 적그리스도라는 것에요. 아버지의 말이라는 것은 율법이죠? 하나님의 말씀. 아들의 말이라는 건 진리로 해석 된, 그 아들의 말씀이잖아요. 그건 원래 같은 말이었다 라고 모르면 그게 적그리스도라는 것에요. 왜? 이 아버지의 말은 명령이 될 거고, 이것도 엉뚱한 말이 될 것이거든요. 그거는 하나다 라는 걸 모르면 그거가 엔타이 크라이스트 라는 거예요.
요일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과 똑 같은 말을 하는 자에게는 그에게 아버지가 있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브 라는 말이 성전이라는 뜻이잖아요? 그죠? 아버지가. 내가 내 안에 그 진리를 갖고 있으면 그게 아버지잖아요. 그 진리가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니까. 그리고 내가 그걸 누군가에게 전해주어서 그가 아들로 탄생되면 내 안에 있는 그 말, 그 진리가, 나는 아니지만, 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도 하나가 되는 거고.
요일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 아르케 라는 말이 베레시트라는 말이니까, 그 아버지의 일곱 언약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걸 너희 마음으로 가져라 이런 말이에요. 율법 성경을 마음으로 가져라, 간직해라. 그걸 그냥 행위로 도덕과 윤리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건 아파르, 티끌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요일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 진리가 약속이고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래요. 그걸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은 산거예요. 그게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일2: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요 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이 기름부음이라는 뜻이 헬라어로 ‘크리스마’ 에요. 크리스마에 에스 붙이면 크리스마스거든요. 그거를 ‘크리스마’ 에다가 오미클론 시그마를 붙이면 존재가 되지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렇죠? 그래서 크리스토스가 되면, 그리스도면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는 거예요.
너희 안에 거하나니 그러면, 그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것이 내 안에 거하면, 그것이 그리스도 이니까, 크리스토 이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스도인.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그렇게 내가 그걸 가지면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더 이상. 그걸 마음으로 가지면 그 때부터는 성경의 구약의 레위기의 수많은 율법 조항이라든지, 이해도 안 가는 묵시서의 그 내용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그냥 진리로 이해되어지는 거예요. 왜? 그게 내 안에 있어요. 이제 볼 눈이 생겼어요. 내 안에. 안경이 생겼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누가 더 이상 ‘그건 이거야’ 라고 자꾸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더 이상 성경 말씀 안 읽어도 된다, 설교를 안 들어도 된다, 이런 말이 아니라, 더 이상 이게 진리잖아 라고 입증할 그 과정을 이제 안 통과해도 된다 라는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 해 주면, 당연히 그런 거죠, 마땅히 그렇죠 라고 내 안에 있는 그것이, 그 인이, 그 기름부음이 나를 그렇게 깨닫게 해준다 라는 말이에요.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이게 진리란 말이죠. 알레떼이아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럼 우리 안에 인으로 들어 와 있는 게 뭐에요. 도장으로 들어와 있는 게. 기름이지요? 기름부음입니다. 그게 뭐에요?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진리죠? 그 진리가 우리를 가르친다 그러죠? 가르치는 건 뭐? 지팡이. 그러면 인과 지팡이를 내가 담보물로 갖고 있다는 건, 그 성령, 그 진리를 내가 내 안에 마음으로 갖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은 산다 라는 거예요. 아들을 시인한다는 건, 아들과 같은 말을 한다 라는 거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게 ‘아르네오마이’ 에요. ‘부인하다’ 라는 말이에요. 그 아들의 말을 그냥 율법으로 이야기 해 버리면, 그게 부인하는 거예요. 아들과 아버지를 부인하는 거. 두 증인은 아버지와 아들이거든요. 근데 아버지와 아들은 한 말을 해야 올바른 증인이 되는 거잖아요. 율법과 그 신약의 그 진리는 하나에요 하나. 근데 아버지의 말 다르고, 신약의 말 다르고, 그러면 이 증인이 안 되잖아요. 엇갈린 증인이 되면, 그렇게 만들어 버리면, 적 그리스도 라는 거예요. 왜 아버지와 아들을 둘로 나누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인데.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요한복음 17장의 이야기가 전부 그거 아니에요. 아버지와 나는 하나, 너희와 나도 하나, 아버지와 너희도 하나, 두 증인은 항상 같은 말을 해야 되요. 그 위에 것과 아래 것은 항상 하나로 연합되어 이해가 되어 져야 되는 거예요. 그게 진리라니까요. 그게 복음이라니까요.
성경은 그 기름 부음을 처음부터 들은 아버지의 말이라고 그러고, 말씀이잖아요? 그죠? 일곱 말, 그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것이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그 것만 갖게 해주면 다음부터는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대단한 성경 지식이나, 무슨 조직신학적 이해, 이런 거 없어도 되요, 괜찮아요. 지금 제 말이 어떤 말인지 이게 이해만 가시면, 아무 것도 몰라도 된다니깐요. 그 다음부터는 그거 버려도 되요. 그것만 안에 갖고 있으면 돼, 알맹이만.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은 전부 껍데기잖아요. 사람의 말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성경 또한 여러분의 이 아래의 말로 준 거 잖아요. 써준 거잖아요. 그리고 그거는 소리로 읽으라고 준 것도 아닙니다. 그죠? 모음이 없어줬는데 어떻게 읽냐구요. 소리를 내면 그 즉시 그건 그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제가 소리로 가르치고 있고, 아래의 말로 가르치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마음으로 갖는다면, 헬라어고 히브리어고, 수메르어, 라틴어, 아무 것도 몰라도 된다니까요. 괜히 그 진리는 별로 올바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런 거에 욕심을 부리는 게 지적 허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왜 알아야 해요? 그걸.
제가 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우리 집사람은 관심이 없어. 히브리어 제가 이렇게 성경, 구약성경 전체를 노트에다가 제가 한 줄 한 줄 이렇게 다 붙여 갖고, 제 개인 주석을 만들고 있거든요. 한자 한자 파자 해 갖고, 관련 성구도 찾고 해가지고, 나중에 그거 갖고 다니면 되잖아요. 혼자 하기 힘들어서 제가 프린트 아웃을 해서 히브리어 한절 한절씩 우리 집사람에게 주어 노트에다가 붙여 달라고 하고, 계속 프린트 아웃을 하는데 뒤집어서 붙여 놓았어요. 어디가 위인지 아래 인지 모르는 거예요. ㅎㅎ
모르면 어때요? 제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그 히브리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그 사람들이 몇 프로 예수를 믿습니까? 그 헬라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의 기독교인의 퍼센트가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그게 왜 중요하냐고요?
다말이 자기 뱃속에 씨를 잉태했어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묻습니다. 너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 말 못하면 죽는다. 그것도 불에 태워서 죽는다. 너 말 못 하면 지옥이야. 그 때 그 씨를 잉태한 여자가 도장과 지팡이를 내놓습니다. 그랬더니 심판이 지나갔어요. 아버지가 심판을 못해요. 만일 다말이 시아버지가 보낸 염소를 맡아 놓고 그거를 줘버렸어. 이건 아무 가치 없는 거니까. 그리고 그 아버지가 와서 물었을 때 염소를 내놓으면서, 이거 당신이 나에게 준거 아니에요?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어요. 염소는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어요. 제물이지요, 그게. 희생제사의 제물이에요. 그런데 도장과 지팡이는 그 사람 거예요. 당신이 나에게 준 게 이거잖아요. 이거 밖에 없어요 라고 내놓으면 그 아버지는 그 여자를 심판할 수 가 없어요. 내가 준거가 맞거든요. 내 씨가 맞거든요.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진리의 씨를 담고 있다고 다들 자부하실 거예요. 내 안에 진리가 있다고, 나는 복음을 이해했다고. 그런데 그 씨가 율법의 씨 일수도 있고, 진리의 씨 일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담고 있는 씨가 율법의 씨라면, 여러분은 그 남편에게 염소 새끼를 내놓을 수밖에 없어요. 열심히 희생제사만 드리는 자기애적 자기 헌신의 열정 같은 거겠죠. 그게 희생 제사니까. 성전 안에서 드리는 희생제사. 그걸 염소라고 그래요.
주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자기 왼편의 염소들에게 뭐라고 그럽니까? 니들은 밖으로 나가서 슬피 이를 갈아라 그래요. 염소들이 뭐라 그랬는데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를 모른다고 그럽니까 그랬다니까요. 그래 그게 희생제사 아니냐? 그게 염소잖아? 나는 너희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고 그래요. 나는 너희를 처음부터 안 적이 없다고 그런다니까요? 양들에게 뭐라 그럽니까? 그 양들이 주님에게 ‘주님 우리가 언제 그런 거 했습니까?’ 니들이 저 불쌍한 소자 하나에게, 진리를 알지 못해 이제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소자에게, 네 안에 있는 그걸 주었으면 그게 나에게 한 거야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인과 지팡이를 가진 사람들인 거예요. 어쭙잖게 염소라는 제물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 그 분의 것, 그 분이 나에게 준 그거.
아우슈비츠에서 나머지 빵, 하나 남은 빵, 내 목숨, 이런 거 내놓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을 진짜 살릴 수 있는 거. 내가 그 사람 대신 가스실에 들어간다고 그 사람들은 안 죽습니까? 곧 죽어요, 곧. 그럼 그 과정에서 생긴 건 뭡니까? 먼저 죽은 사람의 가치, 만족, 이거 밖에 없다니까요. 인간들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건 그거 밖에 없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도 죽는다니까요. 하나님은 그걸 주라고 한 게 아니에요. 네 목숨 백 개 주어도 그거는 내가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가 진짜 살 수 있는 그걸 주어야지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아나데마의 삶인 거예요. 겉만 번드르 하게 네 평판도 챙겨 갖고, 네 만족도 챙겨 갖고, 칭찬도 챙겨 갖고, 찬송도 챙겨 갖고, 그러면서 ‘잘했죠’, 이런 거 하지 말란 거예요. 진짜 진리가 되어서 하는 그런 일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진짜. 그런데 그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 일만 하는 것을 제가 경계하라고 하는 거예요. 서신서로 가면 그 담보물이 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 4절
고후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온고이지신’ 이예요. 옛날 것이 나쁜 게 아니에요. 거짓은 그걸 새것으로 볼 수 있으면 그게 진리인 거예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럼요.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면 되는 거예요.
고후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담보물이죠? 뭐예요? 인과 지팡이가 성령이라고 그러지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인이 성령 맞네요. 그걸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네요. 복음이라고 하네요. 그건 믿어야 되는 거네요. 행해야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신 게 참 지혜로운 거예요. 진리를 알지 못한 이들은 그 명령을 행해버리고,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 명령을 마음으로 가져버려요. 심판은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엡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증 이예요. 보증. 그 인, 그 성령, 그 말씀. 그래서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지혜로운 처녀들이 기름, 그 인, 그 보증 그걸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신랑이 왔습니다. ‘너 내가 가지고 있으라는 거 가지고 있어?’ 기름 쑥 내놓았더니, 쑥 끌어 들여서 문을 닫아 버렸어요. 열처녀죠? 여러분 성경에서 처녀는 굉장히 부정한 겁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면 그 존재는 여자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자예요. 여자인데 반드시 하나님, 그 그리스도라는, 어린양이라는 그 남편을 내 남자로 맞아 신부가 되어야 되요.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집 안으로 들어가서 신부가 되고, 나머지는 처녀가 되어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르고 그냥 죽는 거예요. 근데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남편, 그 기름, 그 인, 그 담보물을 갖고 있어야 되요. 하나님이 준 담보물. 그게 도장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가진 이가 이스라엘의 그 완성으로 등장하는 요셉이라는 말이에요. 그 남편이 주신 그 진리라는 담보물을 가지고, 이 꿈에 불과한 세상의 실체를 분별해 내는 이로 사는 거예요. 그 남편의 인과 지팡이는 껍데기 안의 내용을 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담보물이더라는 거예요. 성경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때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라는 내용을 단 한 줄도 적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 중에 하나님이 요셉에게 나타났다는 대목이 어디 있어요? 없지요? 차별대우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쫓아다니면서 참견하세요.
근데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나타나지 않아요. 그건 그가 이미 진리라는 가르침을 마음으로 갖고 산 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에요. 그가 이 보증을 가진 자다 그걸 내가 그리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로 된 이후의 삶은 없죠? 성경에.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그가 어떻게 살게 되냐면 이 요셉처럼 사는 거야. 그러니까 그 요셉은 야곱이에요. 야곱은 유다고. 물론 진리를 안 상태에. 그 이야기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는 세상의 실체를 이렇게 봤습니다. 풍성한 진리의 제물인 그 살찐 소 일곱, 살찐 소는 제물이잖아요.그거는 실제로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거잖아요. 제물이라는 거는. 그죠? 진리잖아요. 그래서 풍성한 살찐 소. 그리고 율법의 제물인 마른 소, 흉측한 소, 가짜소, 그 둘은 일곱으로 동시에 이 땅에 주어지는 거예요. 이게 왔다가 나중에 이게 오는 게 아니고.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지금 보세요. 여러분 지금 풍년의 때입니까? 흉년의 때 입니까? 여러분에게는 풍년이에요. 왜?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 진리로 왔거든요. 누군가 에게는 풍년의 때라니까요. 그 먹이가 마음으로 양식을 들어갈 수 있는 때에, 어떤 이들에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흉년의 때에요. 어떤 이들에게는 칠의 풍년의 때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칠의 흉년의 때라니까요. 둘은 같이 오는 거예요. 세상이 지금 아나데마의 모습으로 그렇게 지금 구조 되어져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 숨소리, 여러분의 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진리를 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그걸 모르는 거예요. 모르고 그 말을 하고, 모르고 그 인생을 살면, 그걸 거짓이라고 그래요. 그러나 그 내용은, 진짜 그 내용은 진리니까요. 이 세상 어떤 것도 말씀으로 지어지지 않는 게 없다면서요. 그러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진리라는 이야기인데 그걸 모르고 말하고, 모르고 살아 버리면 그게 거짓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찐 소 일곱, 그 진리가 흉측한 거에게 먹혀 있는 이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 한다 할지라도 그걸 그 안의 살찐 소 일곱으로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이 역설을 한 번 보세요. 이 역사도 그렇게 끝날 거예요. 진리를 아는 이들이 몇 되지 않지만, 나중에는 하나도 없는 때가 올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때는 비진리가 왕인 세상이 되는 거예요. 잠시 풀려난다고 그러지요? 잠시지만, 그 때에는 진리가 완전히 망한 것처럼 어두운 세상이 온다니까요. 그 누구도 이 진리를 이야기 하지 않는. 지금 현재 세상이 그런 상태라는 거예요. 그쪽이 너무 커. 그래서 여기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이 이야기는 그들에게 먹혀버리는 이야기 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그냥 커튼까지 쳐놓고, 뭔 꼴이야, 창문도 못 열고. 그냥 이러고 있는 거예요. 칠 년의 풍년, 그 엄청난 추수, 알곡의 추수, 진리라는 알곡이 그 흉측한 가라지에게 먹혀 있는 꼴, 이게 역사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걸 알곡으로, 식량으로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야곱은 그 칠칠을 그냥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살았는데 요셉은 이 칠을 이 칠로 이해를 하고 깨달으면 그게 바로 진리다. 인과 지팡이를 가진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세상이야. 그래서 그 꿈을 꾼 놈도 바로고, 다니엘서에서 자기가 무슨 꿈을 꾼지도 모르는 그 인간도 바빌론의 왕이에요. 항상 세상의 왕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해석해 주는 건 진리를 아는 이들이라니까요. 이 인생이 뭔지도 몰라요. 자기들이 왜 살아야 되는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리고 이게 꿈이라는 것도 몰라. 그런데 인과 지팡이를 가진 이들은 그 안에 그 지팡이가, 그 도장이, 그 기름이 나를 가르치기 때문에 그 세상을 아는 거예요. 좌우, 상하, 어둡고 밝은 거, 이게 다 그게 가능하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는 거예요. 그럼 그게 자유인 겁니다. 그게 아나데마의 모습이에요. 위에 것을 담고 있는 아래의 티데미 되어 있는 것들. 이 세상의 선과 악, 죄와 의, 어두움과 밝음, 위와 아래, 좌와 우, 그런 것들을 갖고 그게 뭔지를 깨닫고 말 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인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가진 자들 이예요.
그 담보물이라는 말 자체가 ‘파라클레토스’ 잖아요. 보혜사. 성령. 그걸 여러분에게 담보로 주었다니까요, 보증으로 주었다니까요. 그들은 악과 죄와 어두움과 아래와 바다와 좌, 이걸 갖고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 앞에서 담보물을 들이대면서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그냥 아래의 것들 아닙니까 라고 내가 알아버리면, 그 담보물로 이게 다 그거 아닙니까 가르침으로 우리가 그렇게 알아 버리면, 그렇지 너는 아는구나! 하나님이 심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 9절
출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금소를 만들어 버렸어요. 금송아지도 아니고 금으로 만든 소도 아닙니다. 금으로 만든 걸 어떻게 불에 녹여서 가루로 만듭니까? 뭐 하러 녹여요. 다 금인데. 아피스의 소처럼 틀 실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걸 금으로 치장한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 놨더니 하나님이 저 봐라, 얘들이 저 소를 ‘나’라고 한다. 하나님을 소라고 하는 거 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요. 죽어야죠? 심판입니다.
출32: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심판, 너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 아버지가 옵니다.
출32: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출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그렇게 이들의 죄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려고 이 죄를 그들에게 허락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당신은 분명 이들에게 약속을 주었습니다’.
출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이스라엘은 야곱이지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모세가 창세기를 들먹거리는 거예요. 하나님, 당신은 창세기에 그 내용을 진리를 주셨는데 우리가 못 알아먹으니까 지금 출애굽기를 쓰고 계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그 말씀이 뭔지 몰라서 율법으로 다시 주신 거거든요. 그러니까 창세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안에서 다 해석이 되요. 그래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잘 공부하면 창세기를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모세가 그러는 거예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 있잖아요.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들이대면서 하느님이 이들을 반드시 하늘의 별로 만드신 다고 그랬습니다. 누구에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우리 조상에게, 이스라엘에게 약속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룰 건데 그 길에 이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걸 이루기 위해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 아닙니까 라고 인과 지팡이로 명확하게 그 언약을 짚어내자, ‘그렇지 그러면 내가 심판을 못하는 거야’ 이게 출애굽이고, 이게 구원이다를 보여 주는 거예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하려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갑자기 나타나더니 길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게 뭔 짓입니까? 그랬더니 모세가 뭘 내놓습니까? 아들의 할례를 내놓는 거예요. 그게 인이에요. 그게 복음의 진수 아닙니까? 이들의 죽음으로 나는 사는 거예요. 그게 출애굽이야. ‘가~~’ 그걸 내놓아야 된다니까요. 그 아버지의 것을. 땅의 행위가 아니라, 땅의 열매가 아니라. 이게 바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인 것이고, 요셉의 이야기인 것이고, 이스라엘의 이야기인 거예요, 그리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인 거예요. 죄를 물을 때 그게 뭔지, 또 왜 주어진 것인지 정확하게 제시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십자가는 여러분의 과거의 죄, 미래의 죄, 현재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한 거라면서요. 없이 한 거라면서요. 그럼 과거의 죄도 없고, 현재의 죄도 없고, 미래의 죄도 없으면, 죄는 없는 거네요. 여러분에게는. 무관한 거네요. 그런데 왜 매주 와서 용서해 달라고 그래요? 뭐를. 그 죄와 무관한 자로 만들어 주는 걸 대속이라고 그래요. 여러분의 몇 가지 죄를 없이 해 주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 그게 죄가 아닌 거구나 라고 깨달아 알면, 아~~그 선악과는 생명나무로 우리에게 주신 거구나 라고 알면, 그 선악과, 그 죄, 그 어두움, 그 아래의 물, 그 성전, 그 율법, 그것이 왜 문제가 되냐고요. 우리에게. 그게 인과 지팡이를 가진 자의 당당함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게 이거잖아요 라고 내놓았을 때, 하나님이 그렇지 내가 너를 어찌 심판하니. Pass over, 유월. 넘어가는 거예요. 죽음의 심판이.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명확히 이해해서 죄와 세상을 설명하고, 하나님 그런 거잖아요, 라고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 하는 거, 내가 원합니다. 아나데마 되어서라도 저들이 그걸 깨달아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이걸 기도라고 해요. 이걸 중보라고 해요.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로 흘려주는 것, 이 모든 걸 프로슈코마이, 기도라고 하는 거예요. 옆집 순이 엄마 암, 꼭 낫게 해 주세요 같이 기도해 주는 게 중보기도가 아니라. 그게 이스라엘이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유다가 말씀을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 율법을 열심히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엉뚱한 열심에만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얘기 하는 거예요. 내가 요셉처럼 유다처럼 다말처럼 우리 믿음의 조상들처럼 그 아나데마의 삶을 살며, 내 골육 친척들에게 진리를 전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간절히 원한다는 거예요. 아니 마땅히 그렇게 될 거고 당연히 필연적으로 그것은 이루어질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빨리 그 껍데기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그 어쭙잖은 선민의식, 그리고 너희가 받았다고 하는 예배 율법 천사, 이런 것들 너희들의 구원의 근거로 내놓지 말라는 거예요. 내용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통해서 진리를 그려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깊은 뜻을 깨닫고, 아~~우리가 뭐가 잘 나서, 우리가 열심히 제사 드려서,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게 아니구나 라고 이스라엘 스스로 자기를 부인해야 했어요. 그래야 영적 이스라엘로 합류 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 아닙니까? 내가 뭐가 잘나서 하나님 구원한 게 아니구나, 라고 해야 내가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거라고요. 그게 로마서 9장 10장의 이야기라니까요.
그런데 제사나 열심히 지내고, 율법이나 열심히 지키면서, 우리만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선택 된 민족이라는 어리석은 행위에 머물러 있는 거, 이게 율법주의지 뭐예요.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해. 우리는 이렇게 헌금 많이 해. 우리는 이렇게 선교 열심히 해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할 거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보편적 아담들의 일반적 사고인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자 같은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었습니다. 그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이름 모를 어떤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그런 거예요. 지금도 우간다나 아마존이나 동남아시아의 오지에 가서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며 열심히 봉사하고 선교하고 있는 타종교인도 하는 거예요. 우리도 진리를 알고 그렇게 하자니까요. 나쁜 게 아니라. 그들 보다 더 열심히 하자니까요. 우물도 파주고, 학교도 짓고, 유치원도 짓고, 진짜로 하자니까요.
그런데 알지 못하고 섣불리 뛰지 말자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조물과 하나님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와 하나가 되시겠다 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잘 깨달아서 피조물의 한계와 무지와 무능이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이구나, 그것이 바로 용서이며, 그것이 구원이며, 그것을 아는 게 생명이구나, 이거를 알아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그래 네 안에 진짜 내가 있구나. 너희들이 율법 안 지키고 도적 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안 살면 그냥 확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오해 된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나 그 사랑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그 사랑의 본체인 내가 네 안에 있구나. 그게 인이지. 그게 지팡이지. 그게 요셉의 삶이고, 그게 이스라엘의 삶이고, 그게 유다의 삶이고.
너희들이 그 인과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면 너희들 눈도 그렇게 열려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먼저 희생하시고, 먼저 헌신하시는 분이에요. 먼저 제사의 제물로 드려지는 분이에요. 그분이 우리를 섬기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왔니 그러잖아요. 그 희생과 헌신의 의미가 뭔지를 잘 깨달아 알면, 하나님이 그걸 네 인과 지팡이다 이렇게 이야기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사건이었던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 것처럼. 아래에는 그거 밖에 없거든요, 그게 뭔지를 알아야 생명이니까. 가인은 땅의 열매,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고 그래요. 땅의 소산으로 드리면 안 됩니다.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이라 그래요. 첫 새끼는 장자라는 뜻입니다. 기름은 진리예요. 말씀입니다. 그렇게 장자, 원문으로 보면 그 장자, 첫 새끼와 기름으로 그 아벨이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래요. 그러면 그가 장자로, 진리로, 하나님이 흠양하시는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누구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만 받아요. 그걸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산제사라 그래요. 그 거룩한 산제사, 그걸 영적 예배라고 하는데 산제사라는 말은 제물이란 뜻이에요, 거기서. 영적 예배가 뭐냐면 ‘라트레이아’ 라는 단어를 써요. 거기서.
그 ‘라트레이아’가 뭐냐면, 진리로 소통하는 예배를 이야기해요. 여러분과 제가 ‘세바조마이’ 의 그 상태가 되면, 그게 뭐냐면 진리로 내 마음을 가져 내 자체, 내 삶이 예배가 되는 상태를 ‘세바조마이’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그러냐면, 그러면 이제 성령과 진리로, 신령과 진정으로 그렇게 번역 되어 있는데, 성령과 진리로 프로슈큐네오, 예배를 해라 그래요. 그때가 온데요. 어느 때? 너희들이 세바조마이의 상태가 되면, 너희들 자체가 제물이 되고 예배가 되면, 너희들에게는 이제 신령과 진리로 프로슈큐네오 하는 화답 예배가 요구 될 거라는 거예요.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모여서 이 화답의 예배를 하기 위해 저한테 성경을 배우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배우는 데에만 집중을 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건, 그게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는 영지주의에 머무르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 자유를 가지고 이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이렇게 내가 진리를 이야기하고 여러분이 거기에 화답하는 이 소통을 라트레이아 라고 그래요. 영적 예배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거를 요구하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벨이 그렇게 드렸다고 그래요. 기름, 그 말씀과 그 장자로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는데 가인이 그럼 내가 드리는 이 제물은 뭐야? 이거 하나님이 원하는 거 아냐? 이거? 이 염소 이거? 아벨은 인과 지팡이를 내놓고, 가인은 염소를 내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드리는 그 제물이 뭔지를 모르니까 내가 드리는 이 제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 말고 다른 제물을 드리는 그를 죽여야지요. 이게 하나님 살해 사건이에요. 인간들의. 예수 살해사건. 괜찮아요. 당연히 우리는 그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마땅히 그 진리를 알면, 그 예수를 마땅히 죽여야 되요. 그래야 우리는 그 예수를 섬기지 않고 내 안에 마음으로 가진다니까요. 진리로 가진다니까요. 그런데 내가 그 아벨을 죽인 게 도대체 왜 나는 저 아벨과 다른 제물을 여태까지 드리고 있었으며, 나는 그 제물을 지키기 위해 왜 저 하나님을 살해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내가 깨달아 알지 못하면, 나는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살인자를 마귀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비진리 라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가 예수를 팔아버리는 그림이 신약에 등장하는 거예요. 유다 가인 요셉 야곱 그 유다가 그 유다에요. 유다가, 여러분 얘기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 유다에요. 모든 아담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그 하나님을 넘기게 되어 있어요. ‘팔다’ 라고 번역이 된 ‘파라디도미’ 는 ‘넘겨주다’ 라는 뜻이에요. 넘겨주다. 팔긴 뭘 팔아요? 유다가 안 팔면은 사람들이 그 예수 얼굴 몰랐나요? 다 알았어요. 그럼 무슨 이야기냐고요? 그게. 넘겨주는 거예요. 다른 제자들은 안 넘겨주었나요? 저주하며 넘겨주었습니다. 부인했어요. 그러면 내가 왜 그 예수를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죽음의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알면 돼요. 내가 왜 그를 죽음으로 저렇게 몰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내가 알면 돼요. 제자들은 오순절날 성령이 불에 혀처럼 임함과 동시에 자기들이 그렇게 완벽하게 세 번이나 철저하게 그 분을 부인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니까요. 유다는 그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기 전에 죽어 버렸어요. 그건 유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마귀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성령이 와서 그 유다가 다른 열 한 명의 제자들처럼 그게 뭔지를 알았으면 그 유다나 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야,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 유다는 그 진리의 성령을 인으로 못 받고 죽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진짜 복은 뭔지 아세요? 여러분. 진리를 알고 죽는 거예요. 행복, 조경수 노래 있잖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복은 여러분이 뭔지 아시죠? 하나님의 그 제물 되심에 의해서, 이게 제단이니까. 그렇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한 곳, 이 밭, 에덴동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함께 사는 것을 복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어떤 게 복이냐면, 이 ‘행’ 자가 뭐냐면 어려서 죽지 않는다 이런 말이에요. 어려서 죽는다는 게 애기 때 죽지 않는 게 복이다 이런 말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자를 어른이라고 그래요. 진리를 못 듣고 그게 뭔지 모르는 상태를 젖 먹는 어린아이라 그러지요? 그 어린아이로 죽어 버리면 그게 불행이고요. 그 어린 아이 때 죽지 않고 진리를 알고, 장로, 진리를 안자가 되어 죽으면 그게 복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반드시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되요. 유다가 그걸 모르고 죽어서 마귀라는 소리를 들은 거예요. 하나님에게. 저놈은 마귀다. 왜? 성령이 오기 전에, 그 일을 깨닫기 전에, 죽을 거거든. 우리 조상들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진리로 깨달아서 하늘의 별들로 살았습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이 그 인, 그 지팡이, 그걸 하나님한테 선물 받아 하늘의 별들이 되었다. 나도 너희들에게 그런 아나데마의 존재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 아래의 것들과 아래의 개념들을 위에 것으로 깨달아 알면 그게 구원이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에게 모형으로 주어진 양자,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이런 것들을 너희들의 자랑을 많이 삼고 있으면서, 그리고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천사가 뭔지 부활이 뭔지 이렇게 그런 걸로 싸우고만 있으면서 그게 구원이니, 영생이니, 나는 구원 받았느니, 이러고 있으니 내가 어찌 안타갑지 않겠느냐, 내가 전하는 그 내용이 바로 알레떼이아, 진리야,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라 이런 말이에요. 내 말을 들어라.
여러분 이 세상은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있다 사라지는 꿈같은 거예요. 환상 같은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있죠, 크로노스의 이 세상, 여기를 꿈이라 그래요. 환상이라 그래요. 꿈이나 환상은 지속 되지 않는 걸 꿈이라 그러잖아요. 중간에 깨 버리는 거. 그렇죠? 꿈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거 꿈이죠. 당연히 환상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꿈 꿔 봐서 알지요? 꿈속에서 여러분이 정말 먹고 싶은 것을 배 터지게 먹어 본 적이 있죠? 깨어났더니 계속 배가 불러요? 너무 너무 목이 마를 때 시원하게 해갈을 했습니다. 계속 물 마셔야 되요. 꿈속에서 먹은 건 우리 현실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아요. 꿈속에서 여러분이 너무 너무 선한 일 착한 일을 많이 했어요. 깨어나서 보니까 서울시장이 불러서 표창장 주던가요? 여러분이 꿈속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청와대 가서 내가 어저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을 열어 주시오, 감옥 문이 열립니다. 꿈에서 한 일, 꿈에서 먹은 것, 꿈에서 되어진 것, 현실에서 아무 소용없어요. 여러분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관계, 그토록 상처 많이 받는 그 인간관계, 마찬가지에요. 왜 그렇게 사람들은 일관성이 없고, 왜 그렇게 사람들은 배신을 일삼고 험담을 일삼고, 그러는가? 당연해요.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경으로 들어가서 진짜 여러분의 하늘 친구들을 찾아보세요. 그들은 그 자리에 늘 거기에 있어요. 변치 않는 내 친구들은 그 안에 다 있다니까요. 성도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맺어지는 거예요. 여기서 상처받고 여기에서 무슨 뭐 오해 받고, 그런 거에 너무 개의치마세요. 꿈이라니까요. 이사야서 29장 8절 보세요.
사29: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그런데 오늘 날 생명의 양식을 전해 준다고 하는 예배당의 설교가 전부 인간의 육신과 그들의 욕심과 이 세상일에 관한, 도덕, 윤리,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 이런 것들이에요. 그러니 꿈같은 세상에서 필요한 그 꿈 얘기만 하고 있으니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거라, 그러니까 돌아서면 또 배고파, 돌아서면 또 목말라. 그러니까 밀려 밀려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여기서는 그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니깐요.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인생을 남들도 존경하는 그런 훌륭한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그냥 아나티데미, 아래의 것, 그것으로 위의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거니까 이게 뭔지를 잘 알고 가는 거예요.
하도 그렇게 헛소리들만 하니까 예전에 로만 카톨릭이 얼마 전에 라틴어 미사를 없앴죠. 그전까지는 전부가 다, 온 세상 있는 다 성당이 전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고, 설교도 교황청에서 일괄적으로 내려주는 라틴어 설교를 읽어 주었어요. 그런데 다들 은혜 받았습니다. 헌금도 도에 지나치게 내고. 그런데 어느 날 이게 아닌가 벼 해서 각자 너희 말로 해라라고 해 갖고, 각 교구에서 자기 나라 말로 이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더니 사람들이 내놓은 첫 번째 반응이 뭔지 아세요? 그냥 옛날처럼 못 알아 듣게 라틴어로 하자 그랬어요. 그 때가 훨씬 은혜로 와. 사람의 말로 들으니까 배가 고파. 그냥 그건 그런 거겠거니 하고 추측할 때가 훨씬 은혜롭다는 거예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아무리 해 봐야 배고파 죽겠는 거예요. 이 배가 채워지지가 않아.
여러분의 현실은 이 크로노스의 세상이 아니에요. 영원입니다. 그 영원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 이생의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았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그 영생, 영원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영원도 이 현실의 어떤 연장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어요. 그 영원의 세계도 그냥 이 세상 것들로 막연히 그려내고 있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그런 것들이 많이 풍성히 제공되는 곳, 이렇게. 그러니까 이 유한의 세계 것들로 그 무한 세계 것을 쟁취해 보겠다고 부산을 떨고 있는 거예요. 그건 이 유한 세계의 그 어떤 것, 이 꿈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로도 쟁취할 수 없는 거예요. 얻어낼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하늘의 겁니다. 우리의 육신과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부정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아~~그 이스라엘, 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그 민족적 이스라엘, 그게 아니었구나. 그 때는 그밖에는 다 이방인, 그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렇게 우리에게 아니티데미, 아나데마, 아래 것으로 설명해주는 거였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 영적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거였구나 라고 알면 그 이스라엘이 부정되는 거잖아요. 그런 것으로 다 주어진 거란 말이에요. 우리 육신도 마찬가집니다. 그게 부정 되는 거예요. 그래야 그 안에 보물인 진리의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시게 되는 거예요. 아나데마! 하늘을 그려내는 그 도구로서의 그 삶. 그리고 모든 것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눈. 그러면 그 인과 지팡이로 그게 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잖아요.
하나님은 스스로 나는 너희들이 그걸 알면 너희들이 이 꿈속에서 행한 그 일은 못 본 걸로 해 줄게 그러셨다니까요. 여러분이 지금 불안해하고, 여러분이 지금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이 지금 여러분이 그 동안 살아 온 그 시간들과 그 동안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또 내가 원하고 원하는 그런 것들인데 되어지지 않는 그런 것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여러분이 돌아가다가 지금 무슨 사고를 당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어요. 인제 앞으로 내가 살 시간 밖에 나는 몰라.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그랬을 때 여러분이 지금처럼 아파할까요? 근데 하나님은 그걸 다 잊었다고 하고, 너희들도 잊으라고 그래요. 왜? 너를 용서하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만 그걸 새록새록 기억해 내고 앉아 있는 거지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모든 게 해결되면 그건 여러분과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애기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쓰인 시나리오에 위해 우리의 인생이 이 꿈속에서 그렇게 진행되어져 갔는데 그 시나리오 속에서, 너 왜 거기서 조폭 했니? 아니 신세계 영화에서 황정민에게 너 왜 거기서 깡패 짓 했어? 지금 여기서 만났다고 쳐봐요. 그런데 우리가 만나가지고 너 왜 조폭 했어? 어디서요? 영화 안에서. 그거 미친 놈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아나데마의 삶으로 끌고 가신다고 했으면서, 우리가 그걸 알아 버렸는데 하나님이 그 역할을 갖고 너 옛날에 왜 그랬니 라고 하겠냐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제는 내 맘대로 살아야지, 어떻게 이리로 갑니까? 어떻게 그 진리를, 그 복음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그 일, 그 더러운 거, 그 지저분한 거,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데 그걸 가져다 쓰냐고요. 그 귀한 걸.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뭘 던져도, 진리를 던져도, 복음을 던져도,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그걸 끌어다 그냥 그걸 사용해 먹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원한 것처럼 저도 간절히 원합니다. 제발 그걸 올바로 알아먹고 그 자유와 그 기쁨, 그 평안으로 열심히 사세요. 사람답게 사는 것 그 이상으로 더 성실하게 사시라니까요. 누가 막 살아도 된다고 했어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화지입니다. 그 역할 잘 하고 가서 그 인, 지팡이 내놓으면서, 하나님 잘 봤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저는 이런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하면 그게 영원입니다. 완성입니다. 기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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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를 설명하는 구분
- 아나(άνάG303); 공간적이지 않은 다른 차원의 위; 위로남,거듭남(아노덴ἄνωθενG509)으로 이해함
- 에피(έπίG1909): 공간적인 위.
* 아나데마(άνάθεμα)는 아나(άνάG303) + 티데미(τίθημιG5087)
- 진리를 알게되면 똑바로 서게 됩니다.: 횡적인 바로섬,똑바로 섬
히)쿰,(자료실 10-2참조) 굳게세움(쿰קוּםH6966)
- 주일예배 로마서(69) 말씀중에서...
‘달리다 쿰’-‘성경전체가 다 들어가 있다’-목사님 말씀
*신부의 이름‘달리다’
- 달리다-어린양(타레H2924)이 죽었다 살아나는 데 신부가 같이 살아남
- 테라(H2922감싸다.덮다)에서 기인.
* 쿰 =(파리스테미G3936)
- 쿰( 말씀으로 파괴하고 다시 세움) = 파리스테미(옆에서다)
- 먼저 죽고 다시 세움
* 쿰 = 코프(H6971-파괴하고 다시세우다) + 멤(물.말씀.진리)로 파자
- 코프는 콜에서 유래됨
- 콜(코프-파괴하고 다시세우다.)+라메드-교훈하고 가르치다
*콜의 사전적의미는 ‘소리’‘목소리’
= 목소리라는 것은 파괴하고 다시 세우서 하나님의 신부로 세우는 것을 의미
이걸 엉뚱하게 사용하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함.
- 콜은 ‘카라’초정하다를 파생함.
- ‘카라H7121’는 ‘파라칼레토스G3875’ 보혜사 성령으로 파생됨.
즉 파괴하고 다시세워 교훈하고 가르쳐서 진리를 알게 하는 일(콜)로 해서
신부옆에 세우는 것.이 일을 하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헬)히스테미(ἵστημιG2476)입니다.
-파생된 단어가 스타우로스(σταρυόςG4716)-언약의 기둥
* 히스테미를 위해서 횡적으로 진열,진설,배설 해놓거나
이런 것을 (성전,율법,예수,성경,세상,나...모든 것..차서로 진열해 놓은 것)만화 게임처럼 하나 하나 먹고 그걸 진리로 알아
똑바로 서게 되면 히스테미라고 합니다.
* 아나데마(άνάθεμα)는 그 하늘의 것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아래에서
그러한 것으로 그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 내가 그렇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건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 성전,그 율법,그 예수는 그 내용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되어집니다.
성전,율법은 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영,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을 살아야 되는 이들은 파괴되어져야 함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속에...자기의 시간속에...
.........
사도바울이 그렇게 되어서 너희들에게 내가 진리를 설명하는 존재 였으면 좋겠어 마땅이 당연히 그렇게 될거야
그렇게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것으로 존재하다가 때가 되어서
그가 담고 있는 생명이라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파괴를 감수하는 그 행위을 축약하면
아나티데미,아나데마(άνάθεμα) 의 삶인 것입니다.
그 모양대로 진리를 못 알아 보고 그대로 표피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율법,성전이고 그게 저주입니다.
그래서 아나데마를 저주라고도 해석하고...
그 건 그렇게 해석 하면은 안되는 거죠
그 율법 그 제사는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였잖아요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 걸 안하는 존재로 되게 되라고 준 것입니다.
그래서 “금하다”라는 내용으로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전만 보고 원어를 공부한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전만 보고 아나데마가 “금하다,저주하다”이니까 당연히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에 갈지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으면 나는 괜찮다.
이렇게 여러분이 이해해 버리면 안됩니다.
그 단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까지 올라가서
그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참 진리를 간곡히 어필하기 위해 그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강렬하게 소원을 애기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도 복음만 전해지면 괜찮다 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영생,구원,죄와 지옥,땅들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아는 자들에게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게 사망이고 멸망인데....
어떻게 그 걸 바꿉니까
내 구원과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그 지옥의 현실이 어떤것인지 처절하게 경험해 본 사람은 안된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은혜,긍휼,능력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본주의적이며 박애주의적인 안경이 사도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위대한 성자로 만들어 버리는 번역을 해 놓은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성자로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 헌신,사랑,믿음,희생...등 가져야 되는게 아닙니까
우리도 그렇게 보는 겁니다.
진리를 아는 존재들이 이렇게 위대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는 마땅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오만이 섞여 있는 겁니다.
하나님처럼의 삶,하나님 흉내내기 식의 번역인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구원과 그 어떤 것과도 맞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입니다.하나님을 무엇과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피를 토하며 내 안에 그 생명을 전해 줄 수는 있을 지언정 내 목숨 수백개라도 줄 수 있습니다.
이까짓 것은...
그 내 평안이 끊어지고 다른 사람을 평안으로 밀어넣고 싶다는 그런 열망은
절대로 제 안에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저는 나오지 않을 거에요 그 만큼 제게는 그 생명이 소중합니다.
바울은 그런 종류의 애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가졌으므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으로) 사도바울은 아쉬울게 없습니다.
..........
그러나 내가 당신을 위해 내가 기꺼히 그 자리로 내려가 내 삶속에서 내가 파괴되고 부정되고
그 진리가 나로부터 설명되어진다면 내가 간절히 원한다.
하나님의 긍휼,은혜,사랑안에서 그리고 그와 혈통적으로 묶여있는 민적적 이스라엘 역시 그러한 아나데마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위대하고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 선택된게 아니라
너희들도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땅에서 티데미 진설되어있는 아나데마의 존재들인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위에것을 설명하기 위해 준 거, 양자됨,영광,언약들,율법,예배,약속들,조상들 또한 이걸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이 너희에 준 것이지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이고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이 흠향하신다
이런걸로 준 게 아닙니다.
꼭 알아 나 조차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잘난체 하지말고 진리를 말 할테니 내 말좀 들어라”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아담과 하와 아벨 셋 에녹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엘리아 엘리사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요한 예수까지....그런등등 모두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앎니다 어떤 삶인지 앎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진리를 새겨 놓으셨어요
그들의 삶속에 도화지에 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쓰십니다.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자신을 교과서로 주는 겁니다
그렇게 쓰임 받는자들이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인 것입니다.
그 티데미의 삶이란 말입니다.
육적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차압당하고 몰수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게 그의 발에서 ‘신을 벗은자의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신을 벗게 하신다음에...
‘신을 벗는다’라는 것은 나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그당시의 쓰인 내용
- 상대방의 발을 몰수하고 거기에 내용을 담아 새발을 줘야합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서 당신을 그리스도 영 진리 성령으로 두 실 그 제자들에게 제자들의 신을 벗기고
발을 씻어 줍니다.
‘발을 씻는다’즉 영접한다라는 뜻입니다.그리고 내가 너희를 몰수하고 새발을 줄거야
그런 의미에서 물로 진리로 씻어주는 겁니다.
새발을 갖게 됩니다. 그 진리로..
새로운 발은 내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못가고
그 발이 띠 띄운 그 방향으로 끌려가는 겁니다.
성도의 삶,아나데마의 삶입니다.
이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어렵습니다
그 율법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그러한 모습을 저주,불행이라 합니다.
그게 그냥 껍데기로 보이면 그 사람들에게는 그냥 저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아나데마(άνάθεμα)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 아나데마 그 저주의 삶을 산다 할지라도 너희들에게 진리가 전해졌으면 좋겠어,좋겠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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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데마(άνάθεμα),
하늘의 것을 알라고 잠시 허락한 것이므로 이게 무엇인지를 잘 알아가는 겁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 크로노스의 세상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영혼이라는 현실에서 이 생에서의 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영생,영혼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영혼도 막연히 현실의 연장쯤으로 해석하고 이 세상것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치장을 합니다.
많이 풍성하게 제공되는 곳 이렇게...
유한의 세계것들이 무한의 세계것들을 쟁취하겠다고 부산을 떠는 것입니다.
유한의 세계 꿈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로도 쟁취 얻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되는 겁니다.그래야 하늘의 것입니다
이 육신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부정당하고 파괴되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아나티데미,아나데마(άνάθεμα)는 아랫것으로 설명해 준 것이였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 영적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것임을 알면 그 이스라엘은 부정되는 겁니다.
그런 것으로 다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그렇게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안에 보물인 진리의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아나데마(άνάθεμα),하늘을 그려내는 도구로서의 삶.
모든 것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러면 그 인과 지팡이로 무언지 설명해 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너희들이 그걸 알면 너희들이 이 꿈속에서 행한 것들을 알아도 못 본걸로 해줄게
불안하고 힘들어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시간들과
그 동안 내가 하지 말아야 할것들 내가 원한 것이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고통스러운 겁니다
지금 기억상실증에 걸려 앞으로 살아야 할 기역만 있다면 전처럼 아파 할까요?
하나님은 다 잊었다 하시고 너희들도 다 잊어라 너를 용서해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만 새록새록 기억해 내고 있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해결이 되면 그 죄와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애기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에 의해 쓰여진 시나리오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 꿈속에서 이렇게 진행되어 가는데
그 시나리오 속에서 “정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으로 끌고 가시겠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그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을 알아 버렸는데 그 역할을 가지고
하나님이 “너 옛날에 왜 그랬니” 애기 하시겠냐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걸 안사람이 ‘이제 내 맘대로 살아야지’이리로 갑니까
어떻게 그 진리를 그 복음을 내가 하고 싶어하는
그 일 그 더러운 것 그 지저분한 것들을 정당화하고 합리화시키는데 그 걸 갖다 씁니까. 그 귀한 걸...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거 아닙니까
진리, 복음을 던져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 먹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원하는 것 처럼 저도 간절히 원합니다
제발 그 진리를 올바로 알아 그 자유, 그 기쁨, 그 평안으로 열심히 사세요!
사람답게 사는 거 그 이상으로 더 성실하게 사세요
누가 막 살아도 된다 그랬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화지입니다
그 역할 잘하고 가서 그 인과지팡이 내 놓으면서
하나님 잘 봤습니다.잘 배웠습니다.저는 이런 존재고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게 영혼입니다.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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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죽음 본문 : 롬 8 : 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자, 바울은 7장에서 그 율법과 죄의 역할과 효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 후에 8장에서 진정한 해방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8장에서 죄와 율법으로 진리와 생명에 이르게 된 그런 성도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줘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8장은 진리가 된 자들아, 육의 행실을 쫓지 말고 영으로 육을 죽여라, 로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어요. 모든 것은 합력이 되어서 선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니까 현상계에 나타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희일비 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규정해 놓은 그런 죄라든지 어둠이라든지 이런 것으로 그런 것을 이렇게 저렇게 판단을 할 게 아니라, 그것으로 절망하거나 기뻐하거나 자랑하거나 자만하거나 그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계시된 진리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너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게 될 거라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8장 마지막 절이죠? 그 어떤 것도 너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그 죄도. 그 더러움도 결국은 너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므로 그것도 너희들을 그것도 너희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거야. 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에요. 그게 바로 로마서 8장의 내용입니다. 육의 행실을 끊고 영으로 육을 죽여라, 라고 하니까 단순하게 나쁜 일 하는 걸 멈추고 영적인 일에만 힘쓰라 라는 말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신문도 안 보고, TV도 안 보고, 유행가도 안 부르고 뭐 이렇게. 정확하게 말 하면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린 지난주에요 사도바울이 8장에서 이렇게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가 율법과 예수 안에서 우리의 육이 죽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공부를 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이 빼먹은 8장 1절의 그 후반부가 ‘메카타 싸륵스 페리파트 알라파타 푸뉴마’ 라 그랬죠? 육신 안에서 살지 않게 된 자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 우리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육을 그때부터 안 보신다, 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정죄, 어디에다가 죄를 정하니? 어디에다가 대고 유죄를 선고할까? 이런 말이란 말에요. 그걸 개역성경은 다 빼먹어 버린 거죠. 육이 죽어 없어지면 하나님은 그 육을 안 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영에다가 죄를 정할 순 없잖아? 그러니까 정죄라는 것이 없어지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1절에서. 우리는 7장에서 죄와, 사망. 그 다나토스, 그 사망. 좋은 사망이죠. 그 사망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라는 바울의 교훈을 충분히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잘 깨달아서 죽으면 그 율법의 효용이, 역할이 그런 거잖아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는 거죠? 율법이, 성경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바잖아요. 그렇게 죄가 무엇인지 잘 깨달아서 아,, 그래 이건 내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라고 내가 죽으면. 그걸 다나토스의 죽음이라고 하죠? 말씀이 나를 죽여 낸 거란 말에요. 그게 말씀의 완성이란 말에요. 그렇게 죽으면 그게 말씀의 완성이고 그게 곧 생명이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해방이라는 게 일어난대요. 그게 2절이에요. 본문 2절. 거기에서 해방이라는 게 일어나는데 그 ‘엘류데리오’라는 해방이라고 번역이 된 그 헬라어는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다', '도덕적 책임과 책무에서 면제 되다', '노예의 자리에서 풀려나다'. 라는 의미의 단어예요. 그렇게 진리로 ‘엘류데리오’ 해방이 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의 노예로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법과 무관한 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모든 도덕적 책무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법의 노예로 안 살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엘류데리오’에요. 해방이란 단어가 그 단어란 말입니다. 그들은 이제 율법의 노예로써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막 산다는 게 아닙니다. 이제 법 위에 서서 법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해방이 담고 있는 내용이란 말에요. 방종이나 방임과는 다른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해방이 된 자들을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잡혀 있으면 죽는 거예요. 법에 잡혀 있으면 죽은 거예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그거란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 이거를 성경에서 예화를 끌어다가 성경으로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진리의 영, 즉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된 자'들은.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말이, 로고스가 영이요, 푸뉴마요. 생명, ‘조에’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말씀으로, 진리로 말씀이 되는 거예요. 진리가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한단 말에요. 그렇게 말씀에 의해, 진리의 말씀에 의해 그 진리의 말씀이 된 자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역할로 부름을 받는다. 그래요. 성경이. 그리스도가 뭐예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죠? 기름부음이란 건 뭡니까? 성경에서 항상. 기름과 금이라는 것은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덮다, 기름을 바르다. 금으로 싸다, 성전이 그렇게 되어있죠? 이거는 말씀으로 덮다 는 뜻이에요. 조각 목에 불과한 이런 피조물이란 존재를 말씀으로, 기름으로 덮어버리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그런 의미거든요. 그게 그리스도에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그걸 메시아라 그래요. 그래서 진리를 우리가 들어서 진리를 내 맘에 담으면 진리의 겉옷을 입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진리로 덮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것을. 그래서 그것을 그리스도, ‘크리스토스’, 이렇게 복수로 뭉둥그려 설명을 해요. 이름 붙인단 말에요 성경이. ‘크리스토스’. 그리스도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에요. 그거를 그렇게 해서 언약 안에서 ‘스타우로스’ 언약, 이게 십자가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 사실은 성경에 그런 십자가라는 말은 없어요. 그냥 ‘스타우로스’를 언약, 기둥이란 단어거든요. 그거를 그냥 십자가라고 번역을 해요. 그래서 쓰는 거예요. Cross 라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언약이라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아는 언약 안에서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어,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 아, 말씀은 그거군요? 라고 다 이루어낸 다음에 피조물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군요? 이놈들이 그럼 하나님 흉내내고 있었던 거네요? 라고 말씀을 완성한 다음에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고 그걸 진리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였잖아요. 그래서 그거를 전해주어 그들을 살려내는 게 메시아, 그리스도잖아요. 그 역할을 그리스도인들이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총칭하여 '인자'라고 불러요. 인자라고 불러요.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인자는 누구밖에 없었어요? 예? 예수님밖에 없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인자다. 그러는 거예요. 인자가 구원한다. 그런다고요. 예수님만 구원한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로 오신 그분에 의해 진리를 부여받은 자들이 그 인자들이 그 구원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여러분도 오늘날 그 역할을 하게 돼요. 그런데 그리스도는 반드시 무얼 통과한다? 언약, 스타우로스 안에서의 다나토스, 그 죽음을 육의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 그 법으로 죽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죽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거란 말에요. 로마서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두 법은 같은 법이라니까요. 같은 법으로 죽고 살아나는 거란 말에요. 죽는 게 사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선악과가 생명나무 실과가 되는 거예요.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창세기의 나무는 항상 단수로 하나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한 단어란 말에요. 한 단어. 그런데 그 인자들을 쭉 거슬러 올라가보면 예수님부터 누가복음 족보에 보면 인제 그 인자의 라인이 쫙 나오죠? 우리 공부했잖아요. 맨 꼭대기에 누가 있어요? 하나님, 그 밑에? 아담. 아담이 뭐예요? 사람. 인, 그런데 거기에는 그 아담, 하 아담이라고 되어 있다고 그랬죠? 그래서 하벤, 하 아담이 인자인데 그 아담의 그 자손. 이게 인자란 말에요. 그러니까 이 라인의 그 아담. 진리가 된 아담을 하 아담이라고 관사를 붙여요. 성경은. 그리고 그냥 인간, 보편적인 그냥 아담을 그냥 관사 없이 아담이라고 쓴단 말에요. 그런데 그 족보 안에서는 하 아담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그 아담. 이렇게 내려온단 말에요. 그 아담의 라인 위에는 하나님이 계세요. 하나님이 그 아담을 보내어 그 아담의 라인들이, 그러니까 예수로 완성되는 그 아담의 라인들이 하나님의 그 그리스도의 역할들을 하는 거예요. 뭐로? 진리, 말씀으로.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씀으로 죽어요. 어떻게? 말씀으로 죽는 게 뭐라 그랬습니까? 우리는 피조물, 하나님 아님. 하나님이 하나님임. 그러니까 하나님 흉내 내는 거 그만두자라는 거예요. 그게 말씀으로 죽는 거예요. 그게 무트의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 아담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파자하면 뭐라 그랬어요? ‘알렙 달렙 메노미’, 하나님의 구별된 말씀.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라는 뜻이에요. 그게 우리 이름이죠? 말씀, 진리가 우리의 이름이래요. 단순히 그 단어를 파자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한다니까요. 그 말씀이 와서 말씀으로 또 누군가를 낳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구약에 보면 그 인자의 라인, 그 진리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라인에 누가누구를 낳다, 낳다, 낳다를 전부 히필 동사를 쓴다고 그랬습니다. 칼 동사나 소팔 동사를 쓰면 그냥 부정모혈로 낳는 거예요. 사람이 그냥 사람을 낳는 거고 히필 동사를 쓰면 그거를 낳게 하다, 는 의미가 되어서 말씀으로 낳다에요. 그래서 셈의 아들이 다섯인데 아르박삿 하나를 히필 동사로 낳았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 건진 거예요. 하나.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말씀이 말씀으로 말씀들을 낳는 거에요. 그들을 인자라 그래요. 성경이. 그런데 그들은 반드시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과한단 말에요. 그래서 그 죽음은 '좋은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죽음은 '완성'이란 말에요. 그런데 이 땅에서 그 완성을 끝, 완성, 종이라는 걸 가장 멋지게 그리고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인간의 죽음이라니까요. 인간은 그게 마지막인줄 알잖아요? 그걸 끝이라고 안다고요 인간들은. 그래서 하나님이 그 죽음을 들어 이게 완성이다,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죽음은, 그 죽음에 대한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그 죽음이 아니란 말에요. 보세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무섭고 두렵고 그런 더러운 게 되는 거지만 죽음이. 그 이후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건 하나의 문이라니까요. 그건요. 그건 무섭고 더러운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걸 하나의 시청각교재로 사용하여 완성이라는 게 이런 거야, 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죽음으로. 그래서 죽음이라는 거는 나쁜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뭐 죽음, 사망 이런 게 나오면 무조건 나쁜 거 이렇게 그래서 그 사망에 이르면 안 되는 거,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국어사전의 개념을 갖고 성경을 보면 안 된다고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죠? 자, 그런 하 벤, 하 아담, 호 휘오스, 호 안드로포스. 인자, 그 인자의 다른 이름이 말씀이라고 했어요. 요한복음 1장 1절 보세요. 예수님이 자기를 인자라고 했는데 성경은 그분을 말씀이라고 그러세요.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 따로 말씀 따로, 가 아니라, 메타라는 전치사는 항상 연합이라는 의미예요 그 말씀이 하나님과 연합된 그분이었다. 그게 말씀이야, 하나님이다! 말씀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거 보세요. 뒤에 나오네요. ㅎ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담고 내려오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고스라고 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 자신, 그, 거기에 있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무'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그거는 레마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걸 어떤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는 거. 나타나게 보여주는 걸 로고스라고 한단 말입니다. 말씀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렇게 로고스, 말씀으로 예수가 육을 입고 내려오셨잖아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니지만 그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는 거란 말이에요. 이거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그게 엘로힘이에요. 그런데 그 엘로힘도 그 하나님은 아니란 말에요. 왜? 그 하나님은 이 현상계에 있는 이 인간들의 이성에 포착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수준의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 엘로힘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그죠? 그거예요. 그 말씀. 보이는 그 하나님으로 오시는 거죠. 그래서 그분이 이제 말씀이에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 그릇으로 담고 온 그분, 말씀. 그런데 그 말씀이 말씀을 낳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을 낳아요. 성경이 성도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거 아세요? 우리의 이름을? 왜? 우리도 진리를 받아 바로 우리는,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피조물의 한계를 이 땅에서 확증해 내고 증거 해 내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도 말씀인 거예요. 계시록 19장 9절 보세요. 계 19 : 9-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 이게 누구죠? 성도입니다. 교회예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 어린 양의 신부들입니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여기서 이것이 아니라 이들은, 이에요.)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이게 로고스, 알레떼이야에요 로고스는 뭐예요? 말씀이죠? 일레떼이야는 진리에요. 이들이 진리이고 말씀이다. 둘 다 복수에요. 이들이 말씀이야. 이들이 진리야, 그런다고요. 진리, 말씀 같은 거죠? 그래서 로고스 알레떼이야 그러는 거예요. 이들이 진리야. 이들이 말씀이야, 왜? 그 아래에서 예수와 똑같이 메시야의 역할을 하고 왔거든. 그들이 진리야. 그래요.)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예수님이 말 타고 오면 큰일 나는 거죠? 이게 심판입니다. 왜? 말은 이사야서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육! 육신을 타고 오면 죽는 거예요 우리는. 다 죽는 거죠? 그 이름이 뭐라 그래요?)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충신은 충성된 신하가 아니라 이게 '피스토스'예요. 믿음이에요. 그분의 이름이 믿음이래요. 그리고 진실, 최진실이 아니라, 기건 '알레떼이아'예요. 진리에요. 이게. 그분의 이름이 믿음이요, 진리래요. 그리고는)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자, 심판하시는 예수님도 말씀 이 땅에 구원하기 위해 말씀으로 오신 그분의 이름도 말씀. 우리, 어린 양의 신부인 우리도 말씀. 다, 우리, 그분도 진리. 나도 진리. 예수님이 내가 진리요! 그랬잖아요. 우리도 진리래요. 우리도 말씀이래요. 예수님과 우리의 이름이 똑같아 졌네요? 말씀이 말씀을 낳은 거죠, 그러니? 말씀이 말씀을 낳은 거예요. 진리가 진리를 낳은 거란 말에요. 그 전체를 인자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냥 피동적으로 그냥 그 예수를 추억하고 감격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삶을 그대로 내 삶으로 사는 그리스도들이라니까요. 크리스투스라니까요. 이게 다른 거예요. 이게 같은 이야기인 거 같지만 아주 다른 거란 말에요. 이렇게 이해를 해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어. 이제 내가 와서 율법으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너희들이 전부 하나님 살해범으로 폭로가 되어버렸네? 전 세계가, 이방인, 유대인 할 거없이 합심하여 하나님을 죽이네? 진리를 죽이네? 그러면 율법으로써, 율법의 역할과 효용,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성취된 거잖아요?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 며요? 성경이. 그러니까 율법으로 오신, 두 번째 성전으로 오신 예수가 그 역할을 끝낸 거네요. 다 이루었다. 봐, 너희들은 한 사람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까, 한 사람도 진리를 못 알아보네? 그리고 그 진리를 꺼버리네? 그러니 그분이 스스로 죽어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인간에게 계시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신을 알겠니?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이요. 너희들은 피조물이지? 라고 십자가, 스타우로스가 선거지요.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한 거예요. 거기서. 다 이루었다. 이거 하러 온 거야. 내가.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살려야 사는 거야. 하나님이 살려야 사는 거야. 스스로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네? 이걸 확증한 거죠? 예수님이?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 다나투스의 죽음을 죽자. 그리고는 그 영혼이 떠나갔다. 그래요. 그분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고, 소리치고 죽자 영혼이 떠나갔다 그래요. 이거를 너무너무 아파서 아, 아파!!너무 괴로워~~소리 지르고, 비명 지르고 훽 죽으니까 이 안에 있는 어떤 혼령 같은 게 휙 떠나갔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안 돼요. 크게 소리 질렀다는 게 뭐죠? 무슨 소리를 질렀어요? ‘메가스’ 라는 건 큰 소리로가 아니에요. 메가, Mega 알죠? 영어에? 메가스라는 건 위대한, 엄청난 말을 외치고, 뭐라고? 다 이루었다고! 다 이루었다고 위대한, 메가스의 외침을 외치자 푸뉴마, 영, 말이라 그랬어요. 생명이 어디로 넘겨졌다. 보내졌다. 라는 뜻이에요. 혼령이 휙 떠나갔다는 뜻이 아니라. 프뉴마, 영혼이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프뉴마가 보내졌다. 어디론가 보내졌다. ( 아키헤미 가 보내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이 율법으로 보내신, 말씀을 담아 보내신 예수의 육을 언약 안에서 죽여 버리고 다 이루어내자 인간들을 아무것도 아니지? 이거 봐, 낫팅이잖아 너희들은, 그러자 그 진리가 완성된 진리가 어디론가 또 보내지더라는 거예요. 프뉴마, 성령, 진리의 영이라고도 번역하죠? 우리가. 그 생명, 말, 진리가 어디로 또 보내지더라는 거예요. (아키헤미) 다 이루었다는 선포가 일어나자.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요한복음 15장 26절 보세요. 요15 : 26- 26.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아버지로' 예요. 내가 아버지로, 아버지는 뭐라 그랬습니까? 아버지가 알렙하고 베잍이니까, 아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그걸 그렇게 써놓고 아버지라고 읽어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 진리를 담는 그릇이 되면 나를 아버지라고,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육의 아버지 이야기하는 거 아니죠? 내가 아버지로 너희에게 보낼 그)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이게 푸뉴마예요. 예수님이 크게, 위대한 메가스의 외침을 외치자 떠나간 프뉴마있죠? 그 프뉴마가 이 프뉴마예요. 알레떼이야 프뉴마.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거 한다고 그래요. 누구? 예수. 아, 그 예수가 그리스도였군요. 그가 담은 건 진리였군요. 그가 한 표적, 기적, 모든 게 다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었던 거군요? 라고 그 진리의 영이 오면 그걸 이해시킨다는 거예요. 어떤 걸로? 그걸로. 설명하여. 그게 그거였다는 것을 이해시킨다는 것이죠.)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신다. 그래요. 누가 한 이야기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예수가 한 이야기를. 그거 갖고 죄와 사망의 법, 율법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그걸 진리로 말씀하셨지만 못 알아들었잖아요. 그걸 갖고 너희들에게 깨닫게 해준다는 거예요. 진리로. 그가. 누가? 푸뉴마가. 예수님의 언약. 그 스타우로스. 그 기둥에서 어딘가로 보내진 그 프뉴마가 어디로 가더니 그 죽음이 뭔지 그분이 공생애 동안 하신일이 뭔지를 설명해준다는 거예요. 진리로. 어떻게? 너희들은 아니고, 너희들은 하나님 살해범, 하나님이 하나님. 그래서 그분이 너희들 안 살리면 너희들은 절대 아니다, 라는 걸 진리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예수가 누구인지를 ‘독사’ 나타내준다는 것이죠.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다른 거가 아니라니까요. 이 '호 코스모스'는 어떤 이에게는 껍데기로만 보여서 여기를 목적지로 삼게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게 진리로 보여서 여기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똑같은 거라니까요. 하나로 보게 된단 말이에요. 진리를 알게 되며는. 요한일서 5장 1절 보세요. 요일 5 : 6- 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물과 피로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그 보혈의 피, 이거는 구약적 개념이죠?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거잖아요? 거저. 예수님이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게 뭐라고 설명을 해요? 생수. 물이라고 설명해요. 물이고, 바로 그 피가 생수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도 못 알아먹네? 그래서 물과 피로 오셨다는 거예요. 못 알아먹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진리의 성령이 이게 뭔지 가르쳐 줘야 되죠? 그래서 그 밑에 뭐라 그러죠?)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보세요. 예수의 육은 반드시 실패해야 돼요. 아무도 구원하면 안 된다니까요.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이나 그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구원되면 안 돼요.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불가능한 상태에서 은혜로 쑤셔 박아주는 거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깨닫는 거지. 그걸로 알아보면 안 돼요. 그러니까 육은 실패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영이 와서 성공을 해내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 말씀을 갖고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무트의 죽음으로 죽어버리면. 무트라는 게 멤타오니까. 말씀의 완성이잖아요. 말씀의 표. 그걸 말씀의 완성이라고 써놓고 그냥 죽음이라고 얘기한다니까요 히브리사람들이. 그렇게 죽으면 내가 그 죽음의 과정, 무트, 다나토스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면 '나는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신입니다' . 나는 하나님처럼 살려고 선악과 먹었지만 아닌 거 이제 알았습니다. 라고 알게 되면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고 그걸 '살았다' 라고 그래요. 그를, 선악과 먹은 거 그게 뭔지 알았어? 그럼 네가 생명나무 실과 먹은 거야. 라고 해주는 거예요 성경이. 그래서 생명나무 실과가 감추어져있다고 하는 거예요. 안 주려고 꽁꽁 감춰놓은 게 아니라. 그걸 아는 자만 그걸 먹은 걸로 여겨주는 거라니까요. 그게 산거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생명이 뭔지를 이 땅에다가는 설명해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땅이 갖고 있는 가장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그것으로 그 생명을 살려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와 율법이라는 게 주어진 거라고. 사도 바울이 7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진리를 받은 이들은 그 말씀을 받은 이들은 말씀의 삶을 살아야 되잖아요. 어떻게? 그분이 하나님이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단지 그분을 설명하는 모형이네요. 사실 이거는 헛 거네요. 곧 헐려야 할 모델하우스인 거로군요. 내 육을 포함해서. 이걸 증거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끌려간다니까요. 그렇게 여러분이 진리를 삶으로 입으로 그렇게 설명하면 창세전에 택함 받은 어떤 이들이 그걸로 또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가 그의 아비 역할을 하는 거예요. 낳은 거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여겨주신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사람이 진리를, 기름을 금을 넘겨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낸다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계 20 : 4-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예수의 증거가 뭡니까? 그리스도의 증거 아니에요. 예수의 증거. 율법이에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의 증거. 그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로고스로 주어지니까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래요? 율법은 우리를 어떻게 해요? 죽여 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목베임을 받는다고 그래요. 목베임을 받는다는 건 머리를 바꾼다는 뜻이에요. 심장을 쑤신다가 아니라 목베임을 받는다. 이건 뭐 단두대에다가 그냥 머리를 넣고 다 잘라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를 머리로 바꿔준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처럼 살려고 지들이 머리되어 살던 이들이 율법을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에 한 해서. 그 목이 잘라지고 지목을 잃어버리고 예수가 머리로 앉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죠. 십자가 이전에 내가 이 머리 둘 곳을 못 찾겠다. 내가 이 머리 둘 곳을 못 찾겠네. 왜? 전부 자기들이 머리래. 그래서 그 법을 주니까. 그게 목을 잘라버리고 예수라는 머리로 바꾸는 거죠. 그런데 그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라 그러죠? 여기서 영혼은 프뉴마가 아니라 푸시케예요. 육입니다. 육. 그들의 육이 어떻게 된다. 그래요? 살아난다. 그래요. 살아서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라고 되어 있죠? 이게 ‘ 메타 크리스토스’ 인데. 메타는 항상 연합의 전치사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란 말이에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란 말에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그리스도인 되는 거니까 그게 그리스도로. 천년, 천년은 항상 완전수에요. 그래서 천 살 이상 산 사람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건 그냥 영원, 완전이란 얘기죠. 그래서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천년을 사는 거예요. 앞으로 무슨 또 천년이 오고 그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히브리말에는 일, 천 이게 같은 말이에요. 다. 그 천년동안 왕노릇 한대요. 어떻게 왕 노릇 해요? 법이 없으니 내가 법이 되어 다스린다니까요. 그게 왕 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부 왕관 쓰고 하늘나라에서 막 다스리고 이런 거 아니에요.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거는.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당연하죠. 못 살아요)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이제 둘째 사망이라는 게 없어요. 다나토스의 죽음 하나면 끝이에요. 그냥.)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또 나오죠? 메타 크리스토스, 또 왕 노릇 한다 그래요. 이 바실레이아는 통치라는 말이에요. 이거와 반대말은 둘로스, 종이라는 말이에요.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통치, 그들이 통치하더라. 예요. 왜? 법에 이제 종속되어 사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통치하더라, 예요. 영원 안에서 통치하더라. 천년 동안. 무엇으로? 그리스도로. 메타 크리스토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될 게 뭐라 그래요? 예수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목을 베어버려요.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에요. 너 아니네? 이 호 코스모스에서 이거 아니네? 이렇게. 목을 바꿔줘야 돼. 머리를 바꿔줘야 되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죄와 사망의 법이 목을 날려 버리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정죄에 이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보세요. 막 8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위하여 아니에요. 나와 복음 때문에, 예수와 예수가 전한 복음 때문에) 지 목숨을 잃으면 (여기서 목숨은 푸시케죠)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약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온 천하는 호 코스모스에요. 하늘과 땅 아닙니다. 호 코스모스. 호 코스모스가 뭐예요? 옛 성전이에요. 그 호 코스모스. 사람들이 원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적인 것, 나의 몸을 비롯하여. 그걸 열심히 얻으려고 하죠? 나의 가치 챙기기. 나의 자존심 챙기기. 이걸 신앙생활이라고들 다 착각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그 호 코스모스를 얻었다 치자. 그 푸시케, 그 육을 얻었다 치자. 그게 죽음이야. 진짜 죽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죽음을, 그 푸시케를 잃어버리면? 그가 구원에 이른다.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세요. 내가 죽어야 돼. 그리고 세 번째 성전으로 살아나야 돼. 세 번째 것으로 세워야 돼. 이렇게 말씀 하세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야단 쳤어요. 꾸짖었습니다. 왜? 내가 다 버리고 쫓았는데 당신이 죽으면 나는 뭐냐는 거죠. 그랬더니 예수님이 사단아! 라고 불러요. 그건 고유명사 아닙니다. 거기선 일반명사에요. 그래서 일반명사는 항상 번역을 해줘야 되죠? 대적 자에요. 네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에 지금 대적자로 일하는 거 알아? 이런 말이에요. 이 마귀새끼야! 이런 말이 아니라. 사단아, 그게 대적자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대적이야. 내가 죽어야 된다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그리고는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나를 쫓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 쫓아야 돼.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 때문에 자기를 그냥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인하려고, 부인도 안 되는 걸 그 애를 쓰는 사람들 많죠?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니까 고난주간 같은 때, 진짜 큰 십자가 만들어 갖고 그거 짊어지고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 봤죠? 그리고 결국 어떤 놈은 거기에다가 지 몸을 박아 버려갖고 죽었어요. 작년인가 언제.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을...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로만 보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자기가 왜 매달려요? 그 십자가가 그 십자가예요? 아닙니다. 이걸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해드리면 이렇게 돼요. 나를 쫓게 될 사람이 있어. 나, 예수 그리스도가 간 그 길을 그대로 좇게 될 사람이 누구예요? '인자'들이에요. 그리스도들. 그리스도인. 나를 좇게 될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아파르 네오마이’는 '자기 말을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인간들은 인간들의 말이 있어요. 자기의 마음. 두 마음으로, 선악의 두 마음으로, 에피뚜미아라는 탐심으로 갖고 있는 지 말이 있죠? 비 진리. 세상의 말. 그 말을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이런 말이에요. 그게 자기부인이라고 번역이 된 거죠.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스타우로스. 십자가가 아니라 언약이에요. 기둥이에요. 크로스가 아니라 기둥. 언약 안에서. 아이로 될 거다. ‘아이로’가 뭐예요? ‘나샤‘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꾼 건데 이게 뭐냐 하면 파괴하다. 받아들이다 에요. 파괴하다, 세우다. 파괴해서 세울 거야. 그래요. 언약 안에서 그는 파괴해서 세울 거야. 나를 좇게 될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성도라 그래. 그리스도인이라 그래. 그런데 그들은 반드시 자기 말을 거절하게 돼. 세상의 말, 비 진리를 거절하게 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가 세상에서 죽는 거예요. 그는. 어? 나 아니네? 이렇게 되는 거니까. 우리는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야 되는 거네? 그거잖아요. 그렇게 그 말을 거절하게 되면 그가 죽고. 파괴되고 다시 서는 거야. 어디서? 언약 안에서. 그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그냥 질질 끌고 쫓아가느라고.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대로 좇아 살게 될 성도들의 삶, 파괴되고 다시 서는 거예요. 육이, 푸쉬케가 망하고 프뉴마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언약이 뭐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언약이라고 그러잖아요? 그 언약이 뭐였느냐고요. 내가 예수로, 율법으로 죽이고 그리스도로 살린다 그러죠? 왜? 율법, 호 코스모스. 육은 아니다, 라는 것을 내가 반드시 증명해야 되므로. 죽이고 그리스도로 살린다. 이게 언약이잖아요? 그래서 파괴되고 살린다. ‘아이로’라는 단어를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먼저 파괴를 경험한다니까요. 절망이에요. 절망. 뭐 이딴 게 다 있어?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왜 이 정도야? 그렇다고 그게 막 패역한 삶으로 막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토록 자기에 대해서 고통스러운 인식을 자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 믿자마자 그냥 성자가 되어 갖고 야, 잘 한다, 잘 한다. 이게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날마다 죽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아, 이놈의 성질 그냥 그래갖고 꾹 참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하고 싶은 걸 그냥 꾹 참는 거. 날 마다 죽어야지,, 사실은 고게 사는 거예요. 아세요? 여러분? 날마다 죽어서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증명해내고 말거야. 내가. 날마다 죽는다. 야, 너, 나를 그렇게, 그렇게 했는데 내가 날마다 죽어서 나는 너보다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걸 내가 증명해 낼 거야! 요게 사는 거예요. 시퍼렇게 사는 거. 날마다 죽는 다는 건. 그 '다나토스의 죽음 그 안으로 던져진 자'는 단 한 순간도 그 과정의 죽음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잆다. 는 뜻이에요. 날마다 죽여 간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로? 넌 아니다. Nothing 이다. 는 그 자리로.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거예요. 나는 날마다 죽어. 다나토스에요 그게. 나는 날마다 죽어. 그래서 날마다 죽어서 뭐를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아니다, 라는 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죽는 거예요.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 거니까. 날마다 죽는다. 성도의 운명적 실존이에요 그게. 매일 죽어. 날마다 죽어. 그렇게 죽지 않으면 절대로 부활, 아나스테미, 아나 이스테미. 위로 똑바로 세우다. 이게 부활이란 말이라고 그랬죠? 아나스테미가 안 되는 거예요. 파괴가 안 되면 아나스테미가 안 된다니까요. 부활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부활 장. 아니스테미의 그 장. 거기에 죽음이 먼저 제시되고 있다니까요. 안 죽어? 그럼 너희는 못 살아. 너희는 부활을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사는 거? 그건 죽은 자의 부활이야. 죽은 자들이 생각하는 부활이야. 야, 그건 부활이 아니라 그게 진짜 죽는 거야. 그렇게 이야기한다니까요. 고린도전서 15장이. 자, 그 아나부스타스, 그 부활, 아니스테미, 그 부활을 고린도전서 15장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한번 보세요. 고전 15 : 31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랑을 하고 있어요. 나는 날마다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는다. 나는 날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있어요. 내가 개척한 교회에서 매일 쫓겨나, 그리고 말도 못한다 그러고. 말을 왜 못했겠어요 바울이? 말에 졸하다는 것은 야, 네 말 같지 않은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이런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런데 그 죽음이 뭐냐 하면 내가 범인처럼 범인이라는 건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냥. 범상치 않은 게 좋은 거죠? 특별한 사람을 아, 범상치 않아! 그러죠? 범은 그냥 범인. 죄 지은 범인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범인. 나와 다른 그런 다른 죽음을 죽는 그런 범인. 그들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워서 죽었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히브리 역사서를 보면 에베소에서 특히 예수를 믿겠다고,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수의 굴에 던져져서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해요.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내가 자랑할 게 하나 있어. 난 날마다 죽어. 그 죽음의 과정에서 난 빠져나올 수가 없어. 그런데 그건 내 자랑이야. 그러면서 뭐와 대조를 하느냐 하면 그런데 내 죽음은 어떤 범인들이 죽은 그런 죽음과는 다른 죽음이다. 그러면서 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내가 다른 범인들처럼 맹수의 굴에서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겠다고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는 그런 죽음 말하는 줄 알아? 그거 아냐. 그렇게 죽었다면 이게 나한테 무슨 유익이 되겠니? 내 부활에 그게 무슨 유익이 되겠어? 우리는 그걸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순교라고 하고 그들을 추앙한다니까요. 사도바울은 그런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게 무슨 유익이 있냐? 그래요. 부활에. 무슨 말이에요? 그건 개죽음이다. 그런 말이에요. 내가 말하는 죽음은 그런 죽음은 아니다. 라는 얘기예요. 보세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죽으면 못 살아나. 진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죽음. 그 죽음은 다나토스의 죽음. 내가 말하는 그 죽음이라니까. 아니, 그 범인들의 죽음은 너희들에게 유익이 안 된다니까. 왜? 예수를 믿겠다고, 그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수가 나를 물어뜯어 죽이고 있는데 비명 한번 안 지르면서 입 꽉 물고 참는 건 하나님처럼 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무서워요. 되더라니까요. 제가 옛날에 안기부 가서 고문 받는데 진짜 아무데나 바늘로 다 찍어서 다 멍이었어요. 그런데 진짜 이 악물고 악 소리 한번 안 질렀어요. 돼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렇게 해서 네가 훌륭한 사람으로, 정말 훌륭한 신앙인으로 남들에게 박수를 받았다면 그거는 개죽음 죽은 거야. 그래요. 예수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준 거 아니잖아요. 그 예수가 진리를 담고 왔는데 못 알아먹었으니까. 그 예수는 실패해야 된다니까요. 실패한 예수를 추억하지 말고 그 예수가 담고 온 진리,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되면 그분이 하신 일이나 그분이 표적으로 준 일이나 그게 다 뭐예요? 아,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거구나.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건. 이렇게 하나님이 시작하여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거구나. 거기에서는 슬픔도 눈물도 질병도 그런 사망의 증상들이 전혀 없는 곳이구나, 이걸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거니까. 그건 더 이상 우리에게 놀라운 게 아닌 거란 말이에요. 그거는. 그게 갖고 있는 내용이 너무 놀랍고 메가스! 너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게 더 이상 우리에게 신기하고 놀랍고 감동적인 게 되어선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알게 되면요 그 예수 부인해. 안 그러면 네 아들 기름에 튀겨 죽여 버릴 거야, 당연히 부인해야죠 그러면요. 그래, 그래 나는 진리를 갖고 있어요. 그러면 내 아들 살려서 어떻게 하던 그 진리를 들려줘야지 죽이던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나는 그 예수 믿는 믿음 굳게 지켜서 칭찬 받을 거야! 이걸 개죽음이라고 한다니까요. 성경에서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라는 게 고작 거기예요. 신사참배? 그거 안 한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모여 있는데 신사가 뭡니까? 거기에 진짜 신이 있어요? 개네 들은 죽어서 다 지옥 가 있어요. 무슨 신이 있어요? 거기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거요. 거기에 절 한 번 하는데 그게 뭔데요: 그게? 후미에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사진 쫙 깔아 놓고 일본 사람들이나 공산당들이 잘 써먹었던 거. 저거 밟고 지나가, 안 그러면 너희 교인들 다 죽일 거야. 그거 안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여럿 죽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게 예수입니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푸른 눈의 그 청년이 예수 맞아요? 진짜 예수의 사진이라고 쳐요. 그 예수는 밟히러 온 거라니까요. 찢기러 온 거라니까요. 침 뱉음 당하러 온 거예요. 왜? 육의 대표로 왔기 때문에. 당연히 밟아야지. 그리고 진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 사람들 살려서 들려줘야지요. 그거 안 밟는 게 뭐 그렇게 대수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보세요. 우리 인간의 보편적 자존심을 높여준 건 전부 추앙하고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흠이 가는 거라고 생각되는 건 전부 밟아 버린다니까요. 이거부터 깨셔야 돼요. 그러니까 순교라는 것도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돼요. 톡소포자충, 기생충도 그런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까요. 쥐새끼를 고양이한테 대들게 만드는 게 기생충이란 말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걸 요구하시겠어요? 그런 결단과 용기와 그런 이김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겁니까? 성경이? 천만의 말씀입니다. 잘못 가도 한참 잘 못 가는 거예요 여러분. 그 예수를 섬김의 대상, 추억의 대상으로 갖고 계시면 안 돼요. 그래서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지 주는? 번역 해야죠? 번역 해줬잖아요 성경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 그러지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한 군데도 없어요. 예수믿음 이라는 말이 로마서하고 요한계시록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피스티스 헤수스’예요. 피스티스가 뭐라 그랬어요? 진리의 체계, 진리의 체계가 뭐라 그랬어요? 율법이죠? 그걸 담고 온 예수. 그걸 진리로 믿으라는 얘기지, 그걸 진리로 가지라는 얘기지 예수를 믿어라가 아니에요. 그럼 ‘피스토스’가 돼야죠. 그런데 그걸 부인하지 않겠다고 부정하지 않겠다고 사자한테 먹히고 이런 게 무슨 유익이 되니? 그러는 거예요. 바울이. 내가 말하는 죽음은 그런 죽음 아니야. 오히려 극단적인 예지만 너무너무 무서워서 예수 부인하고 진리를 알아서도 아니고, 너무너무 무서워서, 기름에 튀겨 죽인다는데 그러면, 살짝 기름 한 방울만 튀어도 얼마나 쓰라리고 아픈데요? 그런데 풀무불 앞에 놓고 시커먼 사자 앞에 놓고 기름 가마,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앞에 놓고 너 부인 안 하면 죽일 거야. 그래서 무서워서 부인했어요. 하나님, 이래서 나에게는 예수가 없으면 안 되는 거군요. 저는 이런 쓰레기입니다. 라고 하면 그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은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시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끌고 갈 수도 있어요. 어떤 목적이 있으셔서.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러나 그걸 성숙한 신앙인의 목표지점으로 잡지 말라는 얘기에요. 아니라니까요. 자,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같이 그 날마다의 죽음을 죽어야 다시 사는 거야. 너희 그 죽음 죽고 있니? 이거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부활이야.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이에요. 그래서 거기서는 육을 부인을 안 해요. 그냥 입은 거라 그래요. 입었으니 너희들이 썩어지고 후패할 걸 그냥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악한 동무들의 말에 속지 마! 속지 마! 거기서 악한 동무라고 번역이 된 푸후데이로‘ ’에도스‘. ’에도스‘가 습관적인 예법, 습관적인 도덕. 이런 말이니까. ’에도스‘. 그리고 ’푸후데이로‘ 가 부패하고 타락한 습관적 예법. 이거예요. 악한 동무가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습관적 예법은 ’크레스토스‘, 자비로워야 하는 교제를 ’호밀리아‘ 교제거든요? 교제가 뭐예요? 진리를 갖고 서로 흘려주는 게 교제란 말에요. ’호밀리아‘ 자비로워야 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호밀리아‘ 교제를 ’카코스‘ 악한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거예요. 습관적인, 그걸 부패했다고 해요. 성경은. 습관적인 예법, 관습, 도덕은, 그걸 가지고 진리를 논한다고 하는 자들은 진짜 자비를 이야기하는 교제를 '카코스', 악하게 만들어. 그래요. 그걸 뭐 악한 동무가 어쩌고, 저쩌고 해놨는데. 그러니까 깨어서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하라, 그래요. 그럼 여기서 죄가 뭐예요? 너희들이 죽겠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믿겠다고 맹수에게 먹히고 사자 굴에 들어가고 한 그거, 그런 거, 죄라는 거예요. 그건 죽음 아니야. 그건 죄야. 의를 행해! 그래요. 어떻게 행해요? 의가 뭐예요?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의'를 준비하셨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라 그러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 하는 거. 그게 의를 행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네러티브 속에서. 그거 해. 그게 사는 거야. 그래요. 그리고 마가복음 8장으로 다시 가면 35절이 이렇게 이어지죠? 막 8 : 35- 누구든지 자기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이게 푸시케라 그랬어요, 그 푸시케를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그러는데 완전히 멸망하다, 에요. 완전히 멸망하다, 그럼 완전히 멸망할 거야. 푸시케를 구하려고 하면. 그런데 우리는 전부 이 푸시케를 구원하려고 한다니까요. 이 푸시케의 위상을 높이려고 신앙생활 한다니까요. 그리고) 나와 복음 때문에 (‘헤네카’는 때문이에요. 나와 복음 때문에) 잃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래요. 이걸 오히려 부정당하고 부인당하고 심지어 개망신 당하는 그런 일을 겪는다 할지라도 이걸 잃는 게 구원이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푸시케는 프뉴마와 반대되는 개념이죠? 영이라고 번역해도 돼요. 사륵스도 영이에요. 원래가. 그러나 이제 진리와 상관이 없는 껍데기로서의 영이 사륵스에요. 육이라고 하는 거죠. 육, 영 이런 거는 우리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사실은요. 푸시케도 영이라고 해요. 육이라고 육신 이라고 하지만. 푸시케가 뭐냐 하면, 여러분 우리 이 육신은 들 숨, 날 숨으로 살죠? 호흡으로 살아요. 들숨이 뭐냐 하면, 밖에 있는 깨끗한 공기를 (깨끗하지도 않지만 하여간) 그걸 들이마셔야 내가 살고 날 숨으로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뿜어내는 거예요. 그럼 결국 나를 살리는 건 내 밖에 있네요? 이거 막아버리면 나 죽으니까. 나를 살리는 물, 나의 70%를 이루고 있는 물, 밖에 있죠? 내 안에서 생산 돼요? 아닙니다. 이거 없으면 죽어요. 음식, 마찬가지 이렇게 생명의 근원이 내 밖에 있고 그게 끊어지면 나는 죽은 자가 되는 걸 푸시케라 그래요. 프뉴마는? 너희 안에서 생수가 솟아나리라 그러죠? 안에서 물이 생산되다 네요? 그리고 그 프뉴마는 호흡이라고도 하네요? 그 안에 있다는 거예요. 호흡이. 진리가 너희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럼 뭐예요? 진리를 생명으로 내 안으로 마음으로 갖고 있는 걸 프뉴마라 그래요. 그걸 영생이라 그래요. 이건 누가 뺏어갈 수 없으니까. 그걸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프뉴마, 영이에요. 그와 반대되는 개념이 푸시케에요. 그러니까 진리가 되지 못하고 이 푸시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이 푸시케의 위상을 높이고 여기에서 뭔가 쇼부를 보려고 하는 그게 푸시케의 구원이에요. 그리고 이 푸시케가 갈 천국 거기를 열심히 소망하는 것. 이것도 푸시케의 구원이죠. 그 푸시케의 구원,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가 그런 말이에요. 푸시케를 그렇게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와 내 말, 예수님의 그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푸시케가 죽으면, 목 베임을 당하면 그는 구원에 이른다. 그 말이에요. 35절이. 그러니까 죽음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절망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예수 믿으면 절망도 없고 외로움도 없고 고독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난도 없고 그렇게 가르치는 건 100% 사기에요. 되지도 않아요. 오히려 그리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소곳이 구하는 거.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를 보십시오. 전부 푸시케의 유익만 구하고 푸시케의 구원만 원해요. 그걸 무당 잡교라 그래요. 푸시케를 계발하고 푸시케를 성숙시키고 푸시케를 변화시키고 푸시케의 가치를 향상시켜 푸시케들이 공평하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푸시케의 세상을 구현하는 게 기독교의 목표가 되어버렸죠? 그것도 건강한 기독교의 목표.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 소위 진보개혁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그런 푸시케들을 위한 어떤 것. 이런 것들은 세상에서도 칭찬해줘요. 참 좋은 교회, 올바른 교회가 나왔다. 세상이 알아보는 교회는 교회 아니에요. 세상이 칭찬해주는 교회는 뭔가 잘 못된 거예요. 그들은 그게 뭔지 몰라야 돼요. 성도가, 교회가 하는 일을 뭔지 몰라야 된다니까요. 하나님은 감추어 놓았다는데 어떻게 세상이 박수 쳐주느냐고요? 모든 종교가 다그 푸시케를 위한 푸시케에 의한 푸시케의 행위를 목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거 원하는 거 내가 완전히 멸망시킬 거야. 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아 생각해보세요. 그 푸시케, 그들에게 좀 좋은 옷 입혀주고 그들의 평균임금을 높여주고 열심히 데모해서 교회가 촛불 들고 나가서 그들에게 밥 조금 많이 먹게 해줬다고 해서 그 푸시케가 프뉴마 됩니까? 푸시케는 그렇게 해서 그냥 죽어요.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하세요. 이왕이면 재산 많이 남겨서 그냥 자식들 쌈질하게 만들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 많이 도와주면서 사세요. 인지상정으로. 그러나 그렇게 해놓고 나 훌륭한 신앙인지요?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건. 진짜 중요한 건 그들에게 프뉴마, 진리의 말을 넘겨주어 그들을 프뉴마로 살려내는 거 이게 진짜 우리가 신경 써야 될 거 아닙니까? 거기에 먼저 매진해야지요.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전부 푸시케의 일에 여념이 없는 거예요. 혈안이 되어 있는 거죠. 그거 밖에 아는 게 없으니까. 그리고 그건 세상도 칭찬해주니까 그것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열심히 하게 해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 있어요.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누가복음에 가서 그 연결부분을 설명합니다. 9장 25절. 눅 9 : 25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가 호 코스모스라고 했습니다. 율법, 세상, 인간, 푸시케 다 그 안에 들어가죠?) 온 천하를 얻었어요. 그런데 그 얻는 게 뭐라 그래요?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 멸망 받는 거라 그러고 빼앗기는 거라 그래요 예수님은. 그게 뭐 유익이냐? 그렇게 호 코스모스를 얻는 게 잃는 거야. 완전히 멸망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유익이 있니? 그래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수치라는 말이죠)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호 코스모스, 푸시케 그 호 코스모스를 얻게 되면 멸망에 이르든지 해를 입게 된다, 그래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유익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그래요. 그게 그들에게 유익이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주님이 26절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예수와 예수의 말, 로고스죠? 그 말을 진리로 전해지지 않으니까 율법으로 받아들이겠죠? 나와 내 말을 수치, ‘에파이스키노마이’ 수치로 가지면 내가 그를 수치로 놓아둘 거야. 이런 말이에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의 말을 부끄러워하고, 가 무슨 말이에요? 수치로 가지면, 수치라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완전한 거 있죠? 율법은 완전함. 사랑이라는 완전. 그 하나로 완성이 돼야 그게 완전이죠? 테텔레스타이가 완전이잖아요? 그게 히브리어로 ‘타밈’인데 그 ‘타밈’ 그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는 전부 수치라 그래요. 그러면 그걸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고 아가페로, 진리로 깨닫지 못하고 법으로 가지고 있으면 수치로 가지고 있으면 내가 그를 완전하지 못한 자, 수치로 놔둘 거야. 이런 말이에요. 너희들이 그걸 수치로 가지면 내가 그걸 수치로 놔둘 거야. 그러니까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그 아가페, 사랑, 진리로 하나로 완성하여 갖고 있어야 돼요. 내가. 아, 그분의 사랑. 그게 다구나! 이렇게. 그 완전, 수치의 반대말. 완전이라는 단어가 신명기에 나와요. 18장 14절 신 18 :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 이게 완전, ‘타밈’이에요. 타밈이 히브리어는 모음이 아무 필요, 가치가 없다 그랬습니다. 자, ‘타밈’ 하면 ‘타우 멤’ 이거든요. 그걸 뒤로 바꾸면 어떻게 돼요? ‘멤타우‘ ’무트‘에요. 완전이라는 말과 죽음이라는 말이 같은 단어라니까요.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죽어서 완전하게 되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원전하라는 게 뭐예요? 죽어서 완전케 된다는 뜻이에요. 무트로 죽어 살아나라,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그렇게 죽어서 살아나는 자가 아닌, 수치들은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 14.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길흉을 말하고 복술을 말하는 게 뭐죠? 오늘날 기독교가 그거잖아요. 인간들의 길흉, 무슨 적용, 어플리케이션 어떻게 하면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복 받을 수 있는가? 이게 길흉과 복술이지 뭡니까? 그들은 그걸 듣는대요. 무당의 말 이런 말이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푸시케의 유익을 위한 말을 너희들에게 절대 용납하지 않아, 그래요. 절대 용납하지 않아. 인간의 존재가치 확립과 향상에 관한 그런 길흉의 말, 복술의 말 그건 너희들에게 용납하지 않아. 너희들은 진리를 듣게 될 거야. 그건 너희들의 푸시케와 아무 상관없어. 그들이 완전한 자야. 죽어서 사는 자야. 누가복음 9장 27절 보세요. 27.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게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도 있다니까 그냥 막연히 추측해서 야, 그 때, 숨이 끊어지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본 제자들도 있구나, 이렇게 상상해서 생각하는데 그 말이 아니라, 직역을 하면, “내가 진리로 말한다.” 그래놓고 “여기 사람들이 서 있다. 죽음, 다나토스,를 ‘디오마이’, 맛보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그 통치라는 게 무엇인지를 ‘호라오’. 깨달아 알 수 없는 자들. 그들이 여기 서 있다.” 이런 말이에요. 다른 말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통치를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는구나! 우리가 하나님 아니구나! 그거를 ‘호라오’ 할 수 있는 이들은 반드시 다나투스의 죽음을 맛보더라. 그렇게 된다. 그들이 여기 서 있다. 이게 진리야.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호라오’ 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맛 봐야 돼요. 이 땅에서 여러분이 그 죽음을 맛 봐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 죽음이 좋은 죽음이라며요? 지금. 그럼 죽음도 좋은 건데 그 죽음의 증상인 다른 것들, 뭐 그거 갖고 너무 파르르 떨 필요 없잖아요? 너무 통곡하고 정말 할 필요도 없잖아요? 다 그거 경험하게 해주려고 하시는 건데. 그러니까 잘 견디시라는 말입니다. 그건 성도에게 날마다 반드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다나토스예요. 무트.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죽음을 스스로 죽는 죽음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성도들이 죽는 죽음 그거 스스로의 죽음이래요. 남들이 죽이는 죽음 아니야. 그래요. 그거는 얼마든지 너희들의 가치를 높이고 자랑할 수 있는 죽음이잖아. 그런데 그것조차도 허락이 안 된대요. 스스로 죽는 죽음이 뭘까요?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되면, 아, 아니구나. 이 육은 이렇게 지맘 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거로구나, 지가 살아서 하나님, 머리가 돼서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그런데 얘가 왜 이렇게 안 죽지? 너무 절망적일 때가 많죠? 그 때, 어떻게 우리가 남들은 전부 이 푸시케를 살리고 이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신앙생활까지도 동원하는데 우린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거야? 도대체. 아니, 어떻게 내가 죽어야 된다는, 이게 죽는 게 옳다고 어떻게 인정을 하게 되죠? 성경은 그걸 ‘엑수시아’, 능력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걸 하나님이 주신다고 한다니까요. 요한복음 10장 17절 보세요. 17.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여기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라고 하는데 이 ‘팔님’이라는 단어는. 목숨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고 새로운 것. 이에요. 내가 새로운 것으로 얻기 위하여 푸시케를 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말이에요. 여러분이 야, 어떻게 이 육이 이렇게 안 죽느냐? 어떻게 여전히 지만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 여전히 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또 법으로 삼아 이렇게 지를 위해 살아?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 하나님 제발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무엇이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진리 밖에는 없을 거야. 하나님 내가 이 진리를 이렇게 듣고 있는데 하루속히 이것 좀 죽게 해주세요. 라는 그 고백! 이게 푸시케를 버리는 거잖아요? 남들은 다 이걸 위해 사는데 하나님이 사랑을 나에게 부으시면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새로운 다른 차원의 생명을 얻기 위해 ‘팔님’, 내가 푸시케를 버린다. 이런 말이에요. 그건. 18절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게 아니라, 누가 나를 너, 예수 믿으면 죽여 버릴 거야, 하고 이렇게 죽이는 그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거래요. 왜? 어떻게? 나는 버릴 권세, 다시 얻을 권세. 엑수시아를 얻었대요. 엑수시아가 뭐라 그랬어요? 말씀을 담게 되면 내가 권세, 권능, 능력이 생기는 거라 그랬죠? 이걸 전해주는 걸 ‘두나미스’의 능력이라 그래요. 그 엑수시아가 나에게 주어지니까, 하나님이 주시니까 내가 그걸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생기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게 나에게 그런 은혜가 허락이 되었다고요?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셨대요. 엑수시아, 진리를 주셨대요. 그랬더니 내가 버릴 권세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이것 좀 어떻게 죽여주세요. 이렇게. 그게 다시 얻는 거라는 뜻이에요. 그게 다시 얻을 권세에요. 예수님이 그렇게 진리이신 그분이 이 땅에서 그렇게 죽었다는 거예요. 그 죽음이 바로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다는 거예요. 로마가, 너희들을 잡아 죽인 게 아니라 그거, 단순히 그것만을 그린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죽는 그 죽음. 스타우로스. 언약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이 바로 다나투스의 죽음을 같이 함께 묘사했던 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누가 줬다 그래요? 이 계명은 내 아버지께서 받은 거야. 그래요. 아버지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성전. 그걸 아버지라고 읽는다. 그랬죠? 내 안에 들어온 진리, 그것이 나에게 그 능력을 주더라. 그래서 여러분이 아침마다 일어나면 또 나는 왜 여전히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지? 이렇게 통회자복이 나오는 거예요. 일찍 빨리 죽었으면...이렇게.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또 무슨 사자 굴에 들어가 죽고 그런 거 너무 사모하지 마세요. 그거 너무 추앙하지 마세요. 진짜 죽는 죽음은 그거 보다 몇 천배 어려워요. 선악과 먹은 아담이 그걸 목구멍에서 토해내는 건 그거 보다 몇 천배 어려워요. 맹수 그거는 한 순간 물어뜯기면 되는 거지만 이건 평생 가는 거기 때문에 힘들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차라리 날 좀 죽여주세요. 난 힘들어서 못 살겠네요 라는 탄식이 나온다니까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걸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는 겁니까? 이 고백이 나온단 말입니다. 무슨 예수 믿는다고 늘 시시덕거리고 기쁘고, 기쁨 충만, 성령 충만? 그렇지 않아요. 그건 미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진리의 성령에 의해 죄와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으로 깨달아지면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이지만 거기에서 해방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2절이에요. 해방. 그래서 이 이야기 밑에 어떤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엑소더스의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성경에 변화산 이야기. 모세, 엘리야, 예수가 별세, 엑소더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죠? 이 이야기 바로 밑에서. 다른 옷을 입고. 희게 변한 다른 옷을 입고. 산상수훈에서 배웠으니까 대충 눈치가 채실텐데. 다른 옷을 입고 별세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건 제가 다음 주에 한번 설명해드릴게요. 자세히, 구체적으로. 푸시케는 밖에서 들어오는 생명의 숨을 마음으로 간직하지 못하면 죽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이 코 끝 잠깐만 잡고 있어도 다 고기 덩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와 상관없이 그 호흡을 내 안에 진리로 갖고 있으면 그게 영생이란 말입니다. 그걸 갖고 계시냐고요, 여러분? 그 육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사는 건데 우리는 푸시케를 위해, 푸시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푸시케의 만족을 위해 예배하고. 푸시케에 진짜 만족 기쁨을 위해서 구제도 하고 푸시케들의 세상. 푸시케들의 천국 이걸 위해서 별짓들을 다 하는 거예요. 아니, 우리도 그런 것 좀 하자고요. 하는데 교회의 목적으로 삼지는 말자고요. 무슨 사회운동이다, 구제다 헌신이다 이런 거는 그냥 사람이 사람의 세상에서 살 때 필요한 거니까. 그냥 이 세상에서 사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하는 일로 여기시면 돼요. 성경에는 그런 종류의 구제나 그런 종류의 헌신, 그런 종류의 사회운동 이런 거 얘기 안 해요. 그걸 다 헛일이다, 그래요. 아래에서 난 자들은 반드시 위로 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다 멸망의 고기 덩어리에요. 거기에는 관심도 없고 그냥 어떻게 해서든지 그 푸시케들이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 게 그게 도대체 뭡니까? 그래서 성경이 아래에서 난 것은 반드시 위로 나게 하라. 그러는 거예요. 아래에서 난 건, 위로 난다는 게 뭐예요? 입 위로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에게서 아기가 아래에서 나잖아요? 그러면 위의 입으로 가르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빠, 아빠, 아빠 해봐. 아빠 해봐, 라고 해서 애기가 아빠라고 엄마가 가르쳐 준거나 아빠가 가르쳐 준 그 말을 똑같이 하면 아, 내 아기가 아빠 했네? 우리 하나님이 그거 듣고 싶어 하는 거라니까요. 진리를 계속 말씀해주는데 못 알아들어.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아, 그거요? 하고 "아버지!" 라고 하면 그게 진리니까. 그래 그거!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너를 이 땅에 보낸 거 아니냐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위로 나는 거예요. 아버지. 진리를 아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 그래 교육이라고 그러잖아요. 아기 낳아가지고 가르치지 않고 저 산에다가 이리나 곰에게 맡겨 놓으면 걘 이리예요 그건요. 사람이에요 그게? 그렇게 산다니까요. 뭐 늑대소년 그런 거 나오잖아요. 걘 늑대에요. 그건요. 그래서 위로 낳아야 된다 그건 ‘아노뗀’, 거듭남이라고도 번역을 하는 거예요. 그게 위로 나다 예요. 왜 인간의 기관 중에 인간의 생물학적 탄생에 쓰이는 기관에서 배설물이 함께 나오는지 아세요? 인간들이 생명이라고 내어 놓는 모든 건 바로 그 더러운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걸 암시해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뭔가 좀 잘 못 만든 것 같지 않으세요? 그 거룩하고 성스러운 생명의 탄생의 기관에서 왜 배설물이 나오게 만드느냐고요? 그리고 사람들은 왜 거기에만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들만 관심을 갖고 있느냐고요? 그게 인간들의 한계라는 겁니다.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더러운 거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서 그렇게 있으면 그 더러움으로 넌 배설물처럼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넌 위로 낳아야 된다는 거예요. 진리로 나야 된다는 거예요. 아래에서 난 그 육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 난 그 진리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성전, 둘, 인간의 수라 그랬죠?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2가. 두 마음이니까 선, 악. 인간의 수에요. 둘로 와서 셋으로 사는 거예요. 둘로 와서 죽고. 인간으로 죽고 셋, 세 번째 성전으로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화 되는 거예요. 영, 진리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 보세요. 요 8 : 23-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어떻게 위에서 났어요? 우리는 부정모혈로 아래에서 났지만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났단 말에요. 그 얘기 하는 거예요. 성령이 뭐예요? 말, 진리, 생명. 나는 위에서 났어. 그렇게 낳아야 돼 너희도. 뭐로? 진리로! 진리의 성령으로.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해준다?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걸로 여겨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호 코스모스가 내 육체도 포함하는 거니까. 너희들에게는 그게 삭제된다는 거예요.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에다가 정죄하니? 어디에다가 유죄를 선고해? 이런 말이에요. 세상에 속하지 않았는데. 여러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그냥 꾹 참는 거, 그게 성숙한 신앙생활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고 싶은 거 맘대로 막 하고 살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렇게 살게 되지도 않아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요즘 저에게 아, 목사님 말씀을 듣더니 그 시로도(초보)가, 목사님이 그러는데 이제 막 살아도 된다 그랬어. 그러면서 막 대한대요. 가족들에게도 그러고 자기에게도 그러고, 그 사람은 아직 초짜예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 메가스, 진리의 성령을 안 사람이 야, 인제 개차반으로 막 살아도 되겠네? 어떻게 이게 됩니까? 그리고 꼭 핑계를 나를 핑계를 대갖고.. 꼭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그런 걸 먼저 법으로 주셨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하고 안 하고의 '행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콘서트하면서 느낀 게 바로 그런 거였어요. 아, 이 분들이 진짜 원하는 게 따로 있었구나! 한 번 탁 터트려주니까 그냥 그래, 그거! 하고 나오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 그거 안하느라고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며 칭찬을 했을까요? 자기를. 야, 너 아직도 그거 해? 나는 벌써 옛날에 끊었는데,, 웃기고들 있는 거죠. 사실은 그거 좋아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부아가 치밀었겠어요? 내가 하나님 나라 가면 보자, 내가! 그건 벼르는 거라니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진리가 된 사람은 그게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그냥 그 속에서 진리를 오히려 찾아내요. 그리고 결국은 내가 즐기던 이런 것도 진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는 거지. 그걸 안하고 꾹 참으면서 넌, 왜 아직도 그 수준이야? 이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거예요. 그건 죽은 거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수준을 따집니까? 아니 누구를 정죄해요? 진리는요 자기를 보게 되어있다니까요. 요거 보기에도 바빠요.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악한지. 얘(자기) 보고 얘 걱정하기에 더 바쁘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오만 군데 돌아다니면서 남 참견들을 다 하고 다니는지 말이죠. 누가 교회를 새로 개척한다는데 뭐 벌써 개척하면 되느냐? 왜 안 돼요? 아니 아직 회개도 안 하고, 회개가 뭐예요? 사실 그거 질투하는 거죠? 아, 나는 옛날에 어마어마하게 잘 나가서 굉장히 부러웠는데 그런데 쫄딱 망해서 얼마나 내가 고소했는지. 그런데 다시 재기를 한단 말이야? 절대 안 돼! 이거지 뭡니까? 진짜 무슨 교계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함이에요? 교계의 정의가 뭔데요? 완벽한 성자들이 목회하는 게 교계정의입니까? 어차피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거긴 그냥 친목계에요. 그럼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회를 한다는데 왜 그렇게 난리냐고요? 그리고 혹시 거기서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면 야,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들어서도 진리를 전하시는구나. 역시 호 코스모스 인간, 육, 푸시케는 낫띵, 하나님이 전부! 깨달으면 되지. 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책을 반납하네 뭐네. 시간들도 많아요. 도대체 보면 전부 삐리삐리 한 애들이 모여 갖고 그거 하고 앉았더라고요. 괜히 질투 나가지고 말에요. 그런 거 하지 말아요. 날 보라고요. 자기 자신을 보라고요. 그리고 이 교회를 신경 쓰라니까요. '여기에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이 푸시케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저 말씀으로!' 그런데 남의 교회 신경 쓰고 난리에요. 왜? 그거예요. 그게 그렇게 죽고 다시 사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진리만 남고, 나와 내가 관심 두고 살았던 이 호 코스모스적 세상이 조금씩 죽어서 말씀이 완성되는 그런 삶을 사는 자.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 죽음, 그 다나투스, 그걸 ‘디오마이’ 맛 봐야 하나님 나라, 그 바실레이아, 하나님의 통치를 ‘호라오’, 비로소 볼 수 있는 거예요. 깨달음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좋은 죽음' '잘 사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죽어야 산다는 이 역설이 이해되어지는 것이 능력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어떻게 그런 능력이 주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고통이라고, 고난이라고 그렇게 손가락질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 우린 그게 복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견디게 하옵소서.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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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2 표적이냐 실체냐
(롬9:4-5)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다음주까지 공부를 해야 오늘 설교가 완벽하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민족적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서 그 영적 이스라엘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을 열심히 피력합니다.
성경의 독자는 성도입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주고 읽어서 깨달으라고 준게 아닙니다. 당연히 이 이야기도 영적 이스라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는 말이예요. 저 민족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민족적 이스라엘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 율법, 예배, 약속,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조상이 있고, 또 육신의 예수도, 그들에게서 나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죠. 예수님도 유다 지파의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그리스도는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다 라고 못을 박습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시며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가 너희에게서 났지만, 그 예수는, 그리스도가 났는데, 육적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인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지 못하면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나에게 그리스도(메시아,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보자구요. 지금 바울이 나열한 그것들이 아주 중요한 도구들이고, 배경들임에는 틀림없죠?
그것들이 없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아들, 언약, 약속, 율법, 조상.. 이런 것 없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죠? 당연히 꼭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만 있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조상이라는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하여 그 씨, 아들을 설명해 주기 위해 그 조상들이 있는거 아닙니까? 그렇죠? 근데 그 씨가, 그 조상들에 의해, 제대로 설명이 되어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우리가 못알아먹으니까, 그걸 문자로 펼쳐준게 율법이죠? 그래서 율법은, 조상들의 이야기를 알면, 그 율법은 그냥 풀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이건 좋은거란 말예요.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그냥 구원이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바울은 율법이라는 거짓말에 빠져서 하나님과 끊어져있는 이스라엘에게 그 참 말의 진리를 전파해서, "내가 거짓말을 하지않고 참 말을 한다" 합니다. 그 참 말이 진리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내가 참말을 하는데, 나는 너희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어, 라고 자기의 그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는게 로마서 9장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예를 들고 있는 이 민족적 이스라엘은 그러한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한, 하나님과 끊어져있는 어떤 자들로 지금 예가 되고 있는 거잖아요? 모형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단지 이러한 것들을 열심히 행하고, 이러한 배경을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육신의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육신의 예수가 탄생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얘기예요. 여러분들이 그예수를 육신으로 낳았다 라고 해도, 그런 것으로 구원이 되는 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지금, 바울이요. 쉽게 말해서 지금, 바울이 나열하고 있는 것들이, 진리로 깨달아지지 못하면, 그런것들은 그저 표적에 불과한 거라는 거예요,
쎄메이온, 표적. 양자됨, 언약, 율법, 약속, 예배, 조상, 예수 이렇게 눈에 보이게 나타난 영광, 영광, 독사 라는게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난 걸, 드러난 걸, 독사, 영광이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그 눈에 보이게 나타난 그 영광, 그것이, 진리라는 내용을 담고 이땅에 세워진 것들이잖아요? 그렇게 내용을 담아서 보이는 그릇으로 주어진 것, 그래서 우리의 눈에 이렇게 보이는 것, 케이마이, 보이는걸, 표적, 쎄메이온, 그래요. 싸인, 씨그널.
어디를 가리키는거죠? 그것 자체가 가치있는게 아니잖아요? 이정표 자체가 가치있는게 아니잖아요?
심지어 육신으로 오신 예수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받지 못하면, 그 자체로는, 표적, 쎄메이온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2절 보세요.
(눅2: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가 구유로 오신 것이, 표적이다 그래요. 그 예수 안에, 아들, 언약, 약속, 율법, 조상 등의 개념들이, 모두 함유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 모든 것을 함유하고 있는 예수가, 표적으로 주어진거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닌깐요. 여기서 구유라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되는데, 히브리 말로 구유라는 단어가, 에부스 라는 말이거든요? 에부스 가 요렇게 쓰는데, 싸멕이 위에서 이렇게 기둥을 내려다보는 거거든요? 고걸 형상화해서 문자로 만든거예요. 기둥은 언약이죠? 눈에 보이는 언약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부스, 구유라는 것은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눈에 보이는 약속으로 주시면 그걸 구유라 그래요. 근데 모음은 뭐 필요 없는거니까,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지워버리고 아바스라고 읽어버리면, 요걸 '먹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구유라는건 먹이통이니까, '하나님의 그 성전이 눈에 보이는 약속으로 나타난 구유에 예수가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어 먹이기 위해, 눈에 보이는 언약, 약속으로 준게 뭐예요?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예수입니다. 그 예수라는 아기가, 구유에, 구유에도 아니예요, 구유로, 케이마이, 이렇게 돼 있어요, 제시되어 있어요, 보라고 제시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표적이다 그러는거예요 성경이. 보라고(케이마이) 던져주면 우리는 호라오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유로 오신 예수가 그 내용으로, 하늘의 양식, 진짜 양식으로 보여져야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표적으로 보면 엉뚱한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표적입니다? 잘 기억하셔야 돼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건 지금, 그 구유와 아기 예수가 하나가 되어 있는 그런 형국을 그리고 있는 거에요. 그래놓고 뭐라고 그러냐면, 그게 보이지 않는 그 하늘의 영광, 독사, 나타난거야, 하나님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그 하늘이 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 나타낸게 독사잖아요? 그래서 그걸, 하늘에는, 하늘의 영광이라고 하고, 그게 땅에, 에이레네, 평화를 가져다 주는거 아니겠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구유와, 구유로 온 그 예수를 보고, 하늘에는 영광, 땅에 평화 라고 이야기 하는거예요.
예수는 아들을 주어서 아들을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약속을 눈에 보이는 형상에 담고 온 표적입니다.
그런데 그 표적이신 예수를, 내용으로 보지 못하고, 그 예수의 기능이나, 능력이나, 그분의 행한 일이나, 말 등을 그냥 표피적으로 받아버리면 그게 표적으로 예수를 받는거고, '야 예수님이 중풍병자도 살렸대, 혈루증 환자도 응? 살려냈대. 죽은자도, 나사로도 무덤에서 끄집어냈대. 물 위를 걸으셨대. '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대, 심지어 이거까지. 이런 식으로, 표피적으로 예수를 보면 성경은 그걸 악,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여러분을 구원해주냐구요?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구원하셨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까? 진짜? 그게 여러분을 용서하나요? 정말? 마태복음 16장 1절 보세요
(마16: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이 천기가, 프로소포모 우라노스 예요. 하늘의 그 나타난것, 프로소폰, 파님, 보이지 않는 것이 이렇게 나타난걸 프로소폰이라 한다 그랬죠? 그걸 천기라고 이렇게 번역해 논거예요? 그 하늘의 외적인 그 모습, 나타난 그거, 율법이죠? 그건 분별한다고 하면서 너희가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가 없느냐? 카이로스(시대, 때)가 담고 있는 그 내용으로서의 그 표적은 너희가 모르는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야 저녁에 하늘이 붉은게 그거 얘기할라구 하는거니? 아침에 하늘이 붉은게 그거 얘기할라구 하는거야? 그렇게 어떻게 껍데기는 잘보고, 너희들이 편한대로 다 해석해서 가지면서, 왜 그 시대의 표적으로 그걸 못보냐? 이런 말이예요. 그래놓고 나에게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구? 내가 지금까지 보여준게 전부 그걸 내용으로 담아준건데, 또 무슨 표적을 보여달라 그러냐? 이러는거죠?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째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천기, 프로소폰 호 우라노스, 그 하늘의 껍데기만 보는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다.
누룩은 절대 제물에 섞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섞음, 변질의 대명사가 꿀과 누룩입니다.
바울이 육적인 이스라엘을 예로 들면서 하늘의 프로소폰을 그냥 껍데기로 보면 그것이 율법이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인 거고, 그들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자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지금,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걸 표적으로 보고, 표적으로만 보고, 그리고 주님께 와서, 아 그거 되게 배불르든데요? 굉장히 맛나던데요? 그때 당시에 일용직 노동자는요, 하루에 열심히 노동을 하며는, 한 데나리온 받았어요. 이게 하루 빵값이예요. 근데 예수님이, 예수님을 쫓는 이들을 무상으로 계속 먹여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쫓아오죠. 하루 죙일 나가서 일해봐야 , 떡 하나 살 수 있는데, 예수님이 주니까 당연히 와가, 오더니, 그거 참 멋진 능력이다 이거예요. 그런 기능을 가진 당신 우리의 왕이 돼달래는거죠. 그리고 그런류의 표적을 자꾸 보여달라고 하니까 주님이 뭐라 그러시냐 하면, 너희는 표적을 호라오 하지 못하고, 그냥 표적을 옵타노마이 에이도 하고는, 나에게, 그런 표적을 보여달라고 찾아오는구나. 너희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걸 내용으로 봐야지, 어떻게 너희는 그것을 그냥 표적으로만 보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이 그러죠? 떡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그 표적은, 진짜 하늘의 양식은 그 떡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근데 너희들도 또 세상의 떡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내가 언제 그 떡 가져오라 그랬니? 왜 떡 가져왔냐 안가져왔냐 그거갖고 왜 싸우고 있어?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이라는거야 라고 이야기하는거죠. 누룩은 뭐예요? 섞임과 혼합, 변질, 왜곡의 대명사죠? 그래서 하나님이 만나 주셨을 때, 이스라엘이, 꿀섞인 과자네? 그러는거예요. 자기들끼리 이름을 붙여버린 거에요. 주님은 진주로 줬는데. 그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예요. 그렇게 표적으로만 봐버리면, 모든걸, 껍데기로만 봐버리면, 그들이 바로, 하나님과 끊어져있는 육적 이스라엘의 그모습이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율법, 성전, 제사 이걸 표적으로만 보고, 그것만 열심히 행하고 있지 않느냐?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지금부터, 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장황하게 나열을 하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끊어짐이라는 주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자구요.
바울은 8장 말미에서, 아들이 된 자들은 절대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라고 단언을 해버리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빨리 나타나서 우리를 진리로 좀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다 라고 탄식하며 기다린다 그랬잖아요? 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되어 선이 되니까, 라고 설명까지 해줘요. 그리고는 9장으로 넘어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있는, 구원이 필요한 어떤 이들을 지금 이스라엘로 등장시키고 있는 거예요. 아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여전히 이런 자들은 아들 아니다, 이런 이야기 하는거에요 지금.
그들이 바로 율법과 희생제사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애를 쓰고 있었던 육적 이스라엘 아닙니까? 바울이 9장과 10장에서, 그 설명용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그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은 이 유한 존재들의 절망적 실존, 한계임과 동시에 성도들의 옛 모습이며, 진리를 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율법이라는 배설물, 찌꺼기를 아우르는 아주 적당한 모형이 육적 이스라엘입니다. 율법으로 의에 이르겠다고 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반드시 끊어진다 라는 경고를 육적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서 교회에게 던지고 있는 거에요. 너희가 무슨 아들이냐는 거에요. (9, 10장에서) 우리가 그런 상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온전한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에 빠져있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아주 원색적으로 꾸지람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서신서는 대부분, 그 복음, 넷 으로 주어진 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주의나 인본주의로 자꾸 회귀할려고 하는, 그렇게 그냥 퇴보할려고 하는 그 초대교회들에게 사도들이 절절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보낸 편지들 아닙니까?
갈라디아서 5장 4절
(갈5: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갈라디아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게 '카탈게오 아포 호 크리스토스'거든요? 카달게오는 끊어져서 완전히 멸망하다, 부정적 끊어짐이죠. 로마서 9장의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서'는 그냥 '아포 호 크리스토스' 거든요? 그냥 프롬 이예요. 그리스도로부터. 근데 앞에 카탈게오가 이렇게 붙어 버리면, 이거는 진짜 완전히 끊어져서 망하는 부정적인 끊어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자들이 끊어진다 그래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 그들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며 반드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다 라는 거에요. 그들은 은혜로부터도 떨어진 자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 다시 말해서, 육적 예수(아들, 언약, 약속, 율법)를 표적으로 보고 땅의 음식, 땅의 먹이, 나의 이 육적 자아의 가치를 높여주고, 그리고 이 육적 자아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그렇게 표적으로 예수를 봐버리면, 그리고 그 예수를, 당연히 그예수가 나에게 그런걸 주었다고 하니까, 섬기고, 숭앙하게 되겠죠?
그렇게되면, 그들이 바로,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망하는 자들이라는 거에요. 그들은 진리가 아닌거니까.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는거에요 지금.
그렇다면, 우리는 그 아들, 약속, 언약, 율법, 그 육신의 예수를 도대체 어떻게 가져야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짐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제가 지난주에, 야곱의 그 얍복강 이후의 삶, 즉 이스라엘로서의 그 삶은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그 요셉의 삶을 유다라는 안경으로 봐야하는 것이라 그랬죠? 그래서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하고는 요셉의 이야기를 풀잖아요? 이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잖아요? 그 이스라엘의 삶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그삶을 요셉으로 설명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건, 그 율법, 그 자기를 헌신하여 자기의 노력과 열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마련할려고 하는 그 열심, 그게 율법이고 야곱입니다. 그것이 '실족시키는 자', 강도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환도뼈를 가격당하여 그 율법을, 말씀을 마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 삶을 요셉이 설명해주기에,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밖에서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단 한 줄도 없어요. 이미 그 하나님 말씀을 마음으로 가진 자, 진리를 마음에 가진 상태의 삶을 연기하고 있는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지금 그 역할로 살고있는 거란 말에요, 지금 요셉이. 근데 그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사이에 유다의 이야기,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끼워 넣는건, 바로 이 유다라는 안경을 갖고 요셉을 보라는겁니다. 그럼 요셉은 이스라엘이고, 유다도 이스라엘이네요.
그 유다와 이스라엘이 같은 내용을 담고 이땅에서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간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 유다와 이스라엘 요셉의 삶을 그냥 하나로 묶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거에요. 그들은 뭘 갖고 있어야 된다? 표적을 갖고 있어야 된다 그래요. 보증, 표를 갖고 있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말입니다. 남 유다나 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남북으로 이렇게 갈라졌을 때, 이름을 남 유다, 북 이스라엘로 이렇게 지은 거는, 그냥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졌다 이렇게, 그런 말이예요. 유다가 둘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그냥 유대인, 이스라엘인, 유대, 이스라엘, 막 혼용해서 쓴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다의 후손으로, 아들이신 메시야가 오셔야 되는거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야곱의 아들이, 르우 벤으로 시작하여, 벤 야민으로 끝나는 거에요. 벤이 아들이니까. 르우 벤, 아들이 여기 있다 보라, 아들이다, 아들의 시작. 벤 야민, 오른 손의 아들, 완성된 아들. 이런 뜻인 거에요. 그리고 열 둘을 아들로, 성경에서 계속 쓰잖아요? 열둘, 아들. 그러니까 유다도, 아들을 낳아야 하고, 씨를 가져야 되고, 이스라엘도? 아들을 가져야 돼요. 그래야 그 씨, 그 아들에 의해 그들이 살아나요. 유다에게서 실로가 온다고 했습니다. 근데 그 아들은, 표적으로만 갖고 있으면 안되고 진리로 해석된 표적이어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유다가 표적을 갖고 있는거고, 그 이야기가, 요셉이 말씀을 갖고 있는 자로, 양식을 관장하잖아요? 말씀을 갖고 있는 자로, 표를, 인을 갖고 있는 자로, 성경에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같은 거니까. 그 개념을 끌어들여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민족적 이스라엘을 끌어다가, 영적 이스라엘, 씨를 가진 어떤 이들을 설명하는 거에요. 어떤 이들은 그걸 엉터리 씨로 갖고있더라는거. 그래서 그들이 갖고있던 수많은 표적들을 등장시키면서, 그게 그거냐? 그건 내용으로 이해되어져야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끊어짐의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자 이건 우리의 이야기라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은 우리니까.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요셉이라는 아들로 축약이 되어서, 그 자손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거에요.
생각해보세요. 유다는 메시야를 낳아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죠? 그는 그 아들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창세기 49장의 실로가 메시야거든요. 유다의 씨로 실로가 온다, 그래야 유다가 살아난다 말입니다. 근데 유다는 그 자손의 중요성을 잘 몰라요. 그래서 그 세째에게, 며느리를 주질 않아요. 아들이 없는데도 나몰라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 유다나 나중에 예수 팔아 먹은 가롯 유다와 똑같은 자들입니다.
며느리를 세째에게 줘야 자손이 생깁니다. 그 자손이 없으면 자기도 죽습니다. 멸망이란 말예요. 그 메시아를 (우리가)낳아야 합니다. 낳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의 아들이, 주님이, 땅의 창녀, 부정한 자, 율법(간음한 자), 음란한 여자, 성경에서 간음하는 여자는 항상 뭘 의미한다 그랬죠? 내 남편을 그리스도, 진리로 갖지 않고 율법으로 가져 나와 연합시키면 그걸 간음한다, 그러잖아요? 성경이 율법과 간음하는 자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셨다는건 뭐예요? 그분이 간음하는 여자, 창녀가 되어 이땅에 오셨다는 거에요. 오시더니, 그 씨와, 그 씨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어떤 이에게, 그래서 죽어야하는 어떤 이에게 가서, 그에게 인과 지팡이를 받아내고는, 씨를 만들어버리는거에요. 그 여자가. 이 유다는, 뭔지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고, 그냥.
제가 지난주에는,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죽어야할 부정한 다말이 나중에 그 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그 씨의 주인에게, 그 씨의 주인의 인과 지팡이를 내놓아야 산다 그랬죠? 그 이야기나 지금 다말을 우리를 살리러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하는 거나 똑같은 이야기예요. 그 여자에게 유다는 뭘 내놓아야 되냐 하면, 염소를 주면 안돼요. 근데, 유다가 자기가 뭘 알아서 염소를 안준게 아니라 이쪽에서 안받아버립니다. 희생제물, 희생제사, 율법은 안받아버리고, 인과 지팡이만 뺏어버리는 거예요. 넌 내꺼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씨가 생기자 유다가 어떤 존재인지 폭로가 돼요. 그 씨가 생기지 않았을 땐 잘 감추고 있어서 몰랐죠. 씨가 생기자 어떤 일이 폭로가 되냐면, 마누라가 죽은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창녀와 잠을 잔 유다가 폭로되는 거에요. 당시의 율법으로는 맞아 죽어야 되는 거에요, 돌에 맞아. 다말이 입만 뻥끗하면 유다는 죽는겁니다 거기에서, 다말이 문제가 아니라. 죽어야할 그가, 씨를 가진 그 여자가, 자기가 그 모든, 그 더럽고, 추악한 세상의 평가를 다 자기가 뒤집어 써버리고, 입 뻥끗하지 않고, 유다에게만 인과 지팡이, 이게 당신꺼죠? 라고 이야기 한다음에,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거에요. 그때 유다가, 그게 의다 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니가 의롭다 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싶은건 그겁니다. 유다는, 그리고 다말, 살아야 하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반드시 그 표, 그 인과 지팡이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라는 이야기예요. 그게 요셉의 이야기였고. 그러면 사는 거예요.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이라는 아들에 의해 죽음을 모면하죠? 요셉은 무죄한 아들이었어요. 다른 형제들의 그 죄와 어두움을 고발하는 아들이었죠? 고자질을 잘하는 얍삽한 인간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다른 이들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그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게 말씀이잖아요? 말씀이 떨어지면, 어두움과 그 죄가 막 폭로됩니다. 그게 요셉의 역할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폭로하는 그 형제는, 죽여야죠. 그래서 형제들이 죽일려고 구덩이에 넣었는데, 유다가 팔자, 죽이지는 말자 그래서 팔아요. 어디로 갑니까? 애굽으로 갑니다. 애굽이 어딥니까? 무죄한 자가, 애굽으로 가서 애굽의 감옥으로 들어가요. 요한계시록에서 '애굽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루살렘? 율법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리로, 죄인이 되어 간다니깐요. 무죄한 아들이.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살아 그 땅의 식량을 관장하는 유일한 존재, 그안에 양식을 가진 자로 그 아비를,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거에요. 야곱이 이스라엘이니까.
그러니까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반드시 그 씨를 갖고 있어야 돼요. 표로, 보증으로 꼭 갖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내용으로 갖고 있어야 돼요. 그냥 껍데기 표로 갖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게 나를 살리는 씨, 나를 살리는 아들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유다,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 아들을 씨로 가져야 살 수 있어요. 그 아들은? 그리스도의 영, 즉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영은 눈에 보이는게 아니죠? 그러면 반드시 그 영을 담는 그릇이 필요해요. 그 진리를 담고 이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잖아요?
그 영의 그릇이 육신적 예수였어요. 제가 지난주에, 유다는 반드시 도장과 지팡이를 표로, 보증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그랬죠? 다말이 유다고, 유다가 다말이니까. 중요한건 그 표입니다. 그 표는 쟈칼입니다. 쟈칼 이란 단어도 표 예요. 쟈칼은 반드시 네케바라는 여자, 그릇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돼야 된다 그랬죠? 그런데 그 쟈칼 이란 단어가 무슨 뜻도 있냐면, 남자가 되다, 아들이 되라 라는 뜻도 있어요. 그 표가 여자 안으로 들어가면, 그 여자가 아들이 됩니다. 그게 구원의 메카니즘인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을 하 아담, 사람이라 그래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쟈칼과 네케바 로 만들었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말입니다. 그래놓고 그거를 사람, 하 아담 그래요.
사람이 어디에서 나오죠? 땅에서. 땅이 아다맙니다. 근데 이 아다마 가 뭐냐하면, 요거만 지워버리면 아담이죠? 자 아담을 어떻게 만드냐 하면, 요 말로 만들어요.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를, 말하는거, 이게 문자의 의미거든요?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를 말하면 그걸 아다마 라 그래요. 이걸 성경이 그냥 땅 이렇게 번역을 해놨는데, 뭐 오케이 괜찮아요. 자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하 아담, 사람,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거에요.
이 땅에서 아담이 만들어 집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인데, 이 아담만 되면 됩니까? 아담이 어디서는 굉장히 저주받을 인물로도 나타나고, 어디서는 '우리는 그 아담이 되어야지'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말이에요. 그러면 한번 보잔 말이에요. 모든 인간들이 아담이에요.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말씀을 담아 창조했어요. 그 어느것도 말씀으로 창조되지 않은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말씀을 담고 있어요. 그 말씀은 진리란 말입니다.
그걸 모르고 말하는걸 거짓말이라 그러지, 모든 인간들은 다 진리를 살고, 진리를 행하고, 진리를 먹고, 이렇게 살아요. 그걸 우리가 진리로 못보아서 그러는거지. 하나님이 구별하신 그 진리를 제대로 깨닫고, '아 그거지'라고 내 안에 말로 갖고 있으면, 그걸 하 아담 이라 그래요. 그럼 요걸 요 뒤로 갖다 붙이면, 그게 아다마 네요? 그래서 성경에는, 그냥 이 사람이 아니라 '하 아담의 하 벤'.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에요. 신약 성경에도 '호 휘어스 호 안트로포스',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 그래요. 항상 관사를 붙입니다.
이렇게 그 말을 진리로 가진 그 인자들의 라인, 제가 여기서 이렇게 설명했더니 어떤 이들이 또 그 말을 가지면 그렇게 아들 아들 아들 아들 아들들이 되는 거에요. 아담의 아들은 셋이 되는거고, 셋의 아들은 노아, 노아의 아들은 셈. 이렇게 아르박삿... 나아가는 거죠. 그 아들 아들 아들. 그걸 인자 라 그래요. 그,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설명하는 그건 이땅에 그 실체로 내려올 수는 없으므로 하나님이 아래의 것으로, 말로, 소리로, 혹은 형태로, 이렇게 우리에게 펼쳐서 보여주십니다. 그걸 아파르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전을 말하기 시작하는 하나님'이란 뜻이에요. 그리고는 이걸 티끌이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전을 말하기 시작하시는 하나님, 그 눈에 보이는 것으로 뭘 줬어요? 성전, 율법, 예수, 세상,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잖아요?
그런데, 그건 뭘 만들기 위하는 거라구요? 이 진리를 가진 그 아담, 하 아담. 그걸 만들기 위함이란 말예요. 그래서 준게 이거란 말예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걸 그냥 표적으로 봐 버리면 티끌, 모래가 됩니다. 성경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비를 티끌로 내릴꺼야, 모래로 내릴꺼야, 너희를 바다에 모래로 만들어 버릴꺼야' 할때 쓰이는게 이 아파르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티끌을 모아 사람을 만들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거에요. 우리는 그걸 내용으로 알아야지, '땅에서 티끌을 이렇게 모아서 물을 부어서 반죽을 하고 구워서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게 맞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유다,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걸 씨, 진리로, 아들로 갖고 있어야 됩니다. 그 아들이, 그 진리가 나를 살리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 이스라엘의 광야(스데반이 그 광야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행진의 그 중심이 누구였어요? 어느 지파? 민수기 2장, 유다 지파였단 말예요. 그 유다 지파가 깃발을 들고, 그 깃발을 중심으로, 남, 동, 서, 쭉 이렇게 다른 지파들이 포진을 하고, 거기에 성막이 세워지는 거에요. "움직여!", 그러면 또 그대로 움직이는 거에요. 유다 지파가 중심이 되어서.
그들이 깃발을 들고 있는데, 그 깃발이라는 단어가 표적. 표에요. 들고 있는 이게 뭔지, 이 표적이 뭔지를 알면 사는 거고, 모르면 죽는 거에요. 누가? 유다가, 이스라엘이. 유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냐면, 성전을, 펼치다, 뻗다. 이런 뜻이에요. 성전을 설명하고, 뻗쳐내는거, 그게 유다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라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지파에서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됩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그 성전의 완성이었어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성전을 줬더니 말을 못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해서 성전에서 제사만 드리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말하는 성전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주님이 '내가 성전이다'라고 이야기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파괴되어야 할 성전이라 그랬어요. 그러면 내가 세번째 걸로 세운다 그랬습니다. 그걸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너희가 성령을 품고 있느니 너희가 세번째 성전이다, 했습니다. 우리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게 완성 성전이에요. 내 안에 그 예수 있으니까, 파괴되어 새것으로 살아난 그분이 내 안에 있으니까 내가 성전이라 말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유다 지파는 그 깃발을 갖고 바로 그 씨, 살아난 그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유다, 아들, 이스라엘이 그러기 위해서 그 표적은 반드시 깨져야죠.
쉽게 말할게요. 유다는 표, 깃발을 진리로 보면 살고, 표적으로 보면 죽습니다. 그래서 유다지파에서 예수라는 표적이 나오는 거에요. 그 표적을 가진 유다가, 그 예수를 표적으로 보면 죽는거고, 그것을 진리로 깨달아 알면, 그들이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거란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표적으로 본 겁니다. 표적이라는 그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으면 오트 라는 단언데요, 그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세요.
출애굽기 12장 13절
(출12: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뭐가? 피가. 어린양의 피가. 표적이 될 거래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자 이스라엘을 살리는 표적, (유다가 가진 깃발과 같은 말입니다.) 표적이 뭐에요? 피에요 피. 그 표적을 진리로 가지고 있는 이들이 심판을 모면한다 그럽니다. 그 피는 물, 물은 성령이니까요. 요한일서 5장 8절에서 그 셋은 하나라 합니다. 그러니까 그 피를 진리로, 성령으로 가지고 있는 이들을 내가 넘어가 살려 내겠다는 것, 이게 약속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5절
(출13:15-16)15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16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이게 표적이에요. 근데 뭘 표적으로 삼아요? 죽어야할 장자가, 하나님이 죽인 장자에 의해 살아난다 라는걸 니들의 표적으로 갖고 있으래요. 그게 복음 아닙니까?
자, 그것이 유다가 갖고 있는 깃발이에요. 이렇게 유다, 즉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표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으로 해석이 돼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과 지팡이가 같이 등장하는 거에요. 항상 가르침을 의미하니까. 우리에게 가르친다 잖아요? 그 우리에게 보증으로 오신 그 파라클레토스, 그 보혜사 성령이 보증으로 와서 우리를 가르치겠다 그래요. 그렇죠?
자 그런데, 그 표, 표적을 갖고 있는 유다가 몇 번째 아들이죠? 네 번째 아들이에요. 넷이라는 아들 이란 뜻이에요. 그때 당시에는 뭐 생선장수한테 가서 네 마리 주세요 라고 할때도 매듭을 네 개 이렇게 만들어서 '이거 ' 이랬는데, 무슨 네 번째가 뭐고 다섯 번째가 뭐겠어요? 넷 이라는 아들,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아라비아 숫자도 없었구.
이 표적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이 창세기 1장의 넷이라는 날이예요. 네 번째 날. 창세기 1장 14절 보세요.
(창1:14)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이게 네 번째 날이거든요? 레비, 레비 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께서 성전을 아랫것으로 보여준다는 뜻이에요. 그것을 가져다 이루어야 돼. 완성을 해야된다 뜻이에요.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라고 돼있죠? 이게 완성돼야 된다 라는 거에요. 넷이라는게, 눈에 보여준 그것이, 완성이 되어야 돼. 무엇에 의해? 광명에 의해. 마오르 가 그래서, 네 번째 날에 나오는 거에요.
이 마오르 라는 이 단어는 오르 라는 말이 빛이잖아요? 히브리어는 맴 이 붙어버리면 이게, 장소나 어떤 기명이나 기구가 된다 그랬죠? 그럼 빛이 비추는 장소, 빛이 비추는 어떤 것이란 말에요. 이게 마오르 그래서 이걸 성경이 그냥 광명 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는 태양이나, 달이나, 별이나 이런 걸로 이거를 이해하고 있는거죠? 근데 이거는 그게 아니라, 오르, 창세기 1장 첫째 날에 그 빛, 그것이 비추어지는 어떤 것, 어떤 곳, 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왜? 창세기 넷째 날은 첫째 날과 짝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빛이 어디에서 비춰지는지가 등장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빛에, 비춰지는 빛에 의해서, 징조와 일자와 사시와 연한이 성취된다 라는거야, 이게 넷이죠? 넷이라는 단어가 레비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아래 것으로 말하기 시작하다'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말하면 안 보이는 것으로 내 마음에 받아 가지면 됩니다. 그걸 성취, 완성이라고 하고, 넷이라고 합니다. 징조 사시 일자 연한이 넷으로 완성이 돼야 그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겁니다.
그런데 빛이라는거, 마오르 라는게 뭐냐 하면, 요 맴이 진리잖아요? 빛을 진리로 주게 되면, 그 넷이라는게 이렇게 성취가 되는데, 그게 뭔지를 시작을 하는데, 첫 단어가 오트, 징조, 표, 표적, 표징이란 뜻이에요.
자 하나님께서 하늘의 궁창에다가 광명을 두신다 그러죠? 궁창은 라키야 라는 단어라 그랬습니다. 라키야는 금을 얇게 펴서, 펼쳐서 덮다 라는 뜻이고, 이걸 우리말로 궁창이라고 번역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어디다 만들으라 그러냐 하면, 가운데, 위의 물과 아랫물,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다가 궁창을 만들으라 그래요. 가운데라는 단어는 타베크라 그랬죠? 완성과 아래의 것이 와우 라는 그 문자가 노를 저어서 서로 이렇게 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타베크, 가운데 라는 뜻이 뭐냐 하면, 이렇게 아래것과 우에것, 좌에 것과 우에 것이 요렇게요렇게 노를 저어 가서, 가운데서 이렇게 만나는 지점 있죠? 우에것과 아래것의 교집합, 요걸 타베크 라 그래요.
그럼 그게 뭐에요? 우에것과 아래것의 교집합으로 우리 에게 주어서, 아래것으로 우에것을 알게 만드는 그게, 율법, 성전, 예수, 세상 이런것들이잖아요? 거기에 라키야 를 만들으라는건, 성전을 그런 용도로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거기에 마오르를, 하나님이 광명을 두시겠다는 거에요.
이 마오르 가 나중에, 율법서에서는 뭐라고 쓰이냐 하면, 성소 안에 등대 있죠? 이게 전부 마오르란 말에요. 성소를 비추어서, 성전이 무언지를 설명해주는 그 역할을 하는 그거를, 그 등대를, 그게 또 일/곱/ 등대죠? 우리 수요일날 배웠어요? 그건 일곱 말, 일곱 영, 일곱 눈, 다 똑같은 말이잖아요? 그것이, 성전이 뭔지를 이렇게 설명해주면, 그거를 마오르 라 그래요.
그러면 그 마오르 에 의해서 무엇이 이루어 지냐하면, 표적, 징조, 사시, 모예뜨, 일자, 욤, 연한, 샤네 가 완성이 된다라는 거에요. 그럼, 요게 뭔지를 알면, 그 넷, 유다라는 넷, 넷이라는 유다가 가지고 있는 그 표가 어떻게 완성이 돼야 그를 살리는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알 꺼 아닙니까?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하는데도?
그러니까 성경은 광명, 그 마오르라는걸, 하늘의 태양이나 달 정도를 설명하는 용도로 쓰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리를 담은 성전과 연결을 시켜서 지금 우리에게 그 진리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마오르 라고 지금 기록을 하고 있는거란 말입니다.
자 여기에서, 징조 라고 번역이 된 그 오트 라는 단어가, 표적, 이적, 표, 깃발, 증거, 표징 이런 의미의 단어라 그랬죠? 그러이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전이나 이 호코스모스의 세상이나 율법이나 성경이나 예수나 그리고 행하신 기적이나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전부 뭐라는 거에요? 표적이라는 거에요. 그 자체로는 그릇이라는 거에요. 그건 반드시 내용으로 우리에게 들려지고 읽혀져, 내 마음이 돼야 되는거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복음을 넷으로 설명해준 다음에 내려가셔서 기적 행하시죠? 그게 뭐에요? 내가 조금 아까 이야기해준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너희들이 그걸 못알아먹으니까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해 줄게. 이걸 봐 라고 준거란 말에요.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치고 무덤에서 사람 살려내고... 이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살려놔 봐야 또 병들고 또 죽어요. 아니 이세상에서 쪼끔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그게 무슨 복이겠습니까? 그게 진짜 목적이었다면 그냥 하나님이 무얼 하나하나 쫓아다니면서 만져서 구하구 그래요? 그냥 말하지. 다 나아라. 그리구 다시는 질병아 없어라. 그러면 되지. 그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런 표적들을 그냥 표적으로 봐버리고 그걸 목적으루 삼는 이들이 있어요.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는데 쫓아다니고, 병고치는데 쫓아다니고, 이러고들 앉아 있는거에요. 한국에 내로라 하는 그 대형교회 장로들이 그러구 돌아다니고 있다니까요 지금? 거기 가서 전부 머리 디밀고 앉아 있는거에요 지금. 그걸 묵인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가망이 있습니까? 큰 교회 장로들이고, 그리고, 뭐 사회적으로 굉장히 성공한 사람들이라 그냥 쫄아서 아무말도 못하는거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그 장소를 빌려주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고?
그건 전부 표적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걸 통하여 주님이 그 죄의 증상, 사망의 그 증상들을 어떻게, 완전하게,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지를, 우리가 배우는거지, 그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거란 말에요. 그걸 표적으로, 껍데기로 보면, 그걸 성경이 어/두/움/ 이라 그래요. 어두움.
지금 이 넷째날이 창세기 첫째날과 짝이라는건 여러분이 다 아실 거예요? 첫째 날은 넷째 날과 짝, 둘쨋날은 다섯쨋날과 짝, 셋쨋날을 여섯째 날과 짝, 이게 완료가 되면 일곱이라는게 되고, 그 일곱을 마음으로 가지면 팔, 여덟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덟의 날에 살아나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그래요. 그건 빛과 어두움을 하나님이 이거는 검게, 이거는 환하게, 이렇게 만들었다, 이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앞에서 어두움이 뭔지를 2절에서 설명해주고 시작하세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흑암은 깊음의 이름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야 하면, 하나님이 '흑암(어두움, 푸쉐크)은 깊음의 파님, 깊음의 이름이라고 하자'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밑에서 이 깊음이 모인 물이고, 그것을 바다(얌)이라고 할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 아래에, 그 위에 샴마임, 하늘, 그게 뭐라 그랬어요? '거기에 물이 있다'라 그랬죠? 쉠이 명사로 쓰면 이름이지만 형용부사로 쓰면 거기란 뜻이니 거기에 물이 있는 곳을 하늘이라 그래요. 그 물이 진리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물론 상징적이지만, 아래의 물로 우리에게 준 것, 눈에 보이게 준 걸 바다라고 하고, 아래의 물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걸 우리가 잠시 이름을 '호쉐크, 어두움이라고 하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죠. 그러니까 어두움이 나쁜 거에요? 그게 없이 어떻게 그 위의 물을 아냐구요? 그걸 직접 줄 수 없어서, 우리가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게 유한 존재의 절망적 한계란 말에요.) 아래의 물이라는 것을 주어 위의 물을 설명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준 아래의 것을 어두움이라고 하는데, 그게 나쁜거냐구요? 그걸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래의 것으로 그냥 봐버리면 이게 어두움이고 이게 죄요 이게 악이지만, 이 어두움으로 그 위의 것을 알아버리면, 이 어두움은 즉시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게 되는 것이고, 그것 그건 내눈에 보이는 똑같은 그것이지만 나에게는 빛이라 말입니다.
그때 그죄가 그악이 그율법이 나에게, 나와 무관한 것이 되고, 그걸 용/서/라고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 어두움이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을 올바로 깨달아 알면 그것이 바로 빛, 오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의 이름을 뭐라 그랬어요? 빛을 낮이라 이름하시고, 낮이라 칭하시고 이렇게 되어있는데, 낮이 날 입니다. 욤. 그 빛을 욤 이라고 하자. 근데 욤 이라는 단어가 뜻이 뭐냐 하면, 진리를 주다 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아래의 것, 그 어두움 이것들을 갖고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이죠?' 하고 알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이 '낮' '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어두움은 '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밤' '라일' 이란 단어 자체도, 가르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밤, 어두움을 우리에게 뭔갈 가르치기 위해 주었어요. 그러면 배우면 돼요. 그러면 그걸 낮, 날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라는 날들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기 위해 이렇게 흐르고 있는 거에요. 이 '날'이라는 의미가 그런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세상에서, 바로 그 진리를 알고 가면 되는거에요. 그게 날들의 역사의 목적이라니까요.
주님은 어두움이라는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율법으로 오셨으니까 어두움으로 오신거죠? 그러나 빛이라는 내용을 담고 왔어요. 그리고는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했단 말에요. "내 안에 있는 그 빛이 진리다"라고 이야기했다 말입니다. 근데 세상은 그 어두움을 통해서 빛을 깨달을 수가 없었어요. 그게 유한자의 한계인거예요. 그렇게 깨달아 알면 그게 '낮'이거든요?
그러나 주님이 이땅에 왔을 때 전부 어두움이었다 그래요 요한복음 1장에. 아무도 못봤다는 거에요.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어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눈이 멀어 그냥 어두움을 살고 있었다 말입니다. 모든 존재가. 그래서 표적으로 오신 예수가 그냥 표적으로 인식이 된 후에 죽임을 당해 버렸어요. 그 표적 안에 담겨 있는 빛을 봐야 되는데. 주님이 그러는거에요. '내가 빛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있는 동안이 낮이다' 하셨어요.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그랬죠? 내가 있는 그시간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이런 말이에요, 엄밀히 보면. "이 시간 동안, 내가 있는 기간 동안 너희들은 열 둘이 돼야지. 낮의 사람이 돼야지. 아들이 되어야지." 이런 말이에요.
그러나, 너희들은 이제 나를 못볼꺼야. 그러면 이 어두움인 세상에 빛이 잠깐 왔다가 사라졌네? 그럼 빛은 있어요 없어요? 사라진거에요. 여긴 그대로 또 어두움이라닌깐요. 근데 그때 주님이 뭐라 그러냐 하면, "내가 사라지면 이제 심판이 오는데, 어떤 자들이 심판을 받을지 아니? 그 빛이 너희 안에 없으면, 너희는 심판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빛으로 오신 그분을 아무도 못알아 봤어요. 다 어두움이니까. 그러니까 그 빛이 너희 안으로 뚫고 들어가 버리겠대요. 그거 없는 자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 빛을 갖고 있는 이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그게.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죽어버린 그 표적을 '쟈칼' 로, '인과 지팡이'로 '가르침'으로 '보증'으로 '성령'으로 당신의 백성들 안으로 인트루젼, 뚤고 들어가게 만들어 버린 거에요. 심어버리는 거에요. 은혜로. 선물로. 그게 성령이에요.
그렇게 표적은 반드시 진리로 완성이 돼야 돼요. '오르' 빛, 오르 로 시작한 그 빛은 '오트'로 완성이 돼야 돼요. 오르 가 이게 빛이 있으라 에서 빛이 오르 잖아요? 그리고 표적이 뭐냐 하면, 오트 예요. 똑같은 단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가 빛이라면, 표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완성하신다 는 거에요. 어떻게? 그 표적에 내용을 이제 너희에게 주어서 너희들을 완성하실꺼라는 거에요. 근데 뭘루 시작하냐 하면 인제 표적 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징조 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그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이요 율법이요 예수요 성전이요 세상이요 인간이요 이런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징조부터 이제 시작이 되는 거에요.
그렇게 표적은 진리로 완성이 되지 못하면 멸망시키는 양식이 됩니다. 그 구유의 아기가 먹이다, 양식, 이런 말이라 그랬잖아요. 주님은 우리에게 양식으로왔다 그랬잖아요? 내가 하늘의 양식이다, 하늘의 떡이야 그랬으니까. 그것이 진리로 깨달아지지 못하고 표적으로 보아져서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되면 그게 우리를 멸망시키는 양식이 되는거에요. 보세요 요한복음 6장 26절 역시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죠
(요6:26-27)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게 호라오 예요. 표적을 너희가 호라오 하지 못하고 표적을 표적으로만 보았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떡으로 먹고, 배만 불리고, 그것으로 '야 우리의 배를 이렇게 부르게 해주는 이가 있어?' 하고 나를 찾아 왔다 라는 거에요. 나의 육적 가치나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섬김의 대상 이게 가짜 하나님이에요 여러분. 27절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호 불러시스 아폴루미' 가 뭐냐 하면, 이게 멸망시키는 양식 이라는 거에요. 너희가 내가 하는 어떤 기적이나 말이나 심지어 나까지도 이런 것을 그냥 표피로만 봐버리면, 그게 멸망시키는 양식이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해. 너희들을 멸망시키는 양식은 열심히 너희들이 율법 행하고 제사 지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겠다고 하는 그 일 아니니? 그게 멸망시키는 양식인데, 그런 일 하지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해. 근데 그양식은 누가 준대요? 인자. 하 아담 하 벤. 호 휘어스 호 안트로포스. 인자, 그사람의 그아들이 그거 준대요. 말씀으로 주는거죠? 이거는. 인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치신 자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인이 뭐라 그랬어요? 성령 이라 그랬잖아요? 보증 이라 그랬잖아요? 그들이 너희에게 줘.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 다음에는? 수많은 그하나님의 그 아들들, 그 사람의 그 아들들이 나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역할들을 이렇게 하는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에게 약속의 후손인 이삭을 주시면서,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죠? 그리고는 이것이 표적이다 그랬습니다? 창세기 17장 11절 보세요
(창17:11)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양피를 베는게 할례죠? 그거는 인간의 생명의 근원, 생명의 씨를 아예 차단해 버리는 거에요. 죽음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할례를 표적이라 그래요. 그런데 언약을 담은 표적이래요. 어떤 언약입니까? 약속의 자손이 낳은지 팔일 만에 할례 하죠? 아들만 합니다. 아들은 팔의 날에 그의 육, 육의 그생명을 완전하게 부정당하는 자다. 이런 말이에요. 그걸 할례 라그래요. 언약의 표적 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왜 아들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팔의 날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그건 제가 다음주에 설명해 드릴께요. 너무 기니까.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후에도 표적을 주세요? 보세요 창세기 9장 13절
(창9: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죠? 칠입니다. 일곱을 너희에게 언약으로 준다. 이게 뭐냐 하면,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라고 돼 있는데, 이게 표적이예요. 역시.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게 표적이다 라고 일곱을 줘요. 그리고는 그 일곱을 안 자들을 방주에서 나온 자들이죠? 그들을 여덟 이라 그래요 베드로전서에 보며는. 여덟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자 그렇게 일곱을 알아, 그 언약의 내용이 뭔지를 알아, 여덟이 되는게 뭔지도 다음주에 설명해 드릴께요 제가.
그렇게 표적이라는건, 하나님의 그 언약, 그 약속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 오트 라는거 다음에 사시, 모예드 라는 단어가 이렇게 이어지는 거에요. 이건 순서에요. 하나님이 마오르 라는걸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비추는,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표적, 오트, 그 표적을, 반드시 어떤 것으로 완성을 해 내실 꺼예요. 그런데 오트 를 주고서는,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알수 없어요.
어떻게 알아요 그걸로?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 모예드 라는걸 주시는데 그게 뭐냐면, 여기는 사시 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이, 모 라는 단어도 역시 맴이라는 그 문자와, 야드 라는 단어의 조합이에요. 야드 라는 단어가 에덴 이라는 단어와 맥을 같이하는 단어거든요? 이게 정하다, 정한 때, 모예드가? 그러니까 정한 때 약속하다, 언약, 약혼하다 이런 말이에요 이게.
절기 , 정한때, 약혼하다, 언약하다, 정하다, 자 이런 의미를 품고있는 그 사시라는, 모예드 라는 단어가 왜 여기에 등장하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그 언약의 마지막 그 목적이 뭡니까? 쟈칼이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그분과, 네케브에 불과한 우리가 혼인의 완성이잖아요? 그게 연합이죠? 이게 목적이죠? 언약의 목적이. 그래서 약혼하다, 그 약혼은 반드시 이루어질 약혼이에요. 혼인으로 완성되는 약혼. 그건 하나님이 정하신 거란 말예요. 그리고 그단어는 기쁨이란 뜻도 있어요. 그게 기쁨이고 그런거에요.
하나님은 그 혼인의 약속을 그 사시(모예드)라는 약속을 , 언약을 절기라는 걸로 주세요. 절기는 사계절이라고 해도 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넷이죠?, 이스라엘의 절기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수장절 초막절? 이렇게 넷으로 우리가 , 우리에게 주어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뭐에요?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하고, 거두고, 하얗게, 아주 순결하게 깨끗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거에요. 그걸 보라고 사계절 준거에요.
유월절날, 로마서 7장에, 죽어야할 첫 남편이 죽죠? 그게 어린 양이잖아요.
그리고 무교절에 교회, 광야에 누룩 들어가지 않는 떡이 하늘 양식으로 쏟아집니다. 그게 교회예요. 말씀이 떨어지는거죠.
오순절날, 새 남편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시는거죠?
그러면 수장절, 추수가 된 알곡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수장. 영원히 사는거죠. 이게 절기가 가진 의미잖아요?
자 언약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진리를, 표적으로 주세요, 오트로 주시는데, 뭔지 몰라? 그래? 그러면 내가 그걸 절기로 풀어서, 그 언약, 혼인이 뭔지를, 풀어서 줄께 라고 모예드로 줘버려요. 그러나 그 절기나, 그 표적, 모든건 아직도 다 이 아래꺼잖아요? 어두움의 것이란 말에요 그거는. 근데 그걸로, 그게 뭔지를 알아버렸으면 그게 뭐예요? 징조, 사시, 그담에 뭐예요? 일자 죠?
그 일자가 욤이예요 욤. 진리를 주다. 그게, 그 표적이, 어두움, 그 아래의 것이, 그 오트와 모예드가 나에게 어두움으로 주어졌지만, 그게 뭔지를 내가 이제 알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알았을 때, 그걸 욤, 진리를 받은 자가 그진리를 넘겨줄 수 있으면 그걸 일자 라 그래요. 일자가 뭐예요? 난, 하여튼 일자. 욤이에요 그게. 순서라닌깐요? 그렇게 되면, 어두움과, 오트와 모예드 그거는, 이 육신을 입고 있는한, 그거에서 살아야 되니까, 이땅에서 발 들고 살 수 있는 사람 어디있어요? 아래 것으로, 이 어두움을 입고 산다구요. 그러이까 이게 크로노스의 삶을 우리가 사는거죠? 그런데 그걸 알아서, 이렇게 진리로 내가 갖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크로노스의 삶을 살면서 카이로스를 같이 사는 거에요. 고렇게 양자를 같이 살 때 요게 짝으로 사는거, 그것두 살고, 이것도 사는거. 어두움을 살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 빛을 가지고 사는 그 걸 솨네, 연한이라 그래요. 연한은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그것도 또. 국어사전 찾어두 안나와. 연한이라 그래요.
그러이까 이거는 표적부터 시작해서 연한,솨네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그게 넷 이라는 거에요. 유다라는 넷 의 아들이, 그렇게 표적을 갖고 시작하여, 솨네로 완성을 하면, 그게 영적 이스라엘이다 라는걸 확실히 알고, 바울은 그것들을, 표적들을, 전부 이렇게 나열한 다음에, 이걸 니들이 그냥 갖고 있는다고? 너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8장에서 말하는 끊어지지 않음이라는건, 이런걸 가졌다고, 이루어지는게 아니란다 를 설명해주는거란 말이에요.
근데 어떻게 이거를 육적 이스라엘, 민족적 이스라엘 이야기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냐구요? 창세기부터 그게 아니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 성경은. 그럼 요즘 뭐 세대주의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자꾸 저에게 메일을 그냥 수십통씩 보내가지고 외국 학자들의 무슨 뭐 논문도 보내주구 이메일로 말이죠. 그거 아니라구 세대주의가 맞다고. 민족적 이스라엘이 곧 다 구원받을 거라구? 가르칠라그래요. 주변사람들에 전해주세요. 그거다 스팸메일 처리해놨으까, 보내두 안읽는다구. 그런 시간두 없어요. 뭘 그걸 읽고 앉아있어? 신학교때, 다 공부한거.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이야기만이예요.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야기만 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그 절기, 그것을, 그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혼인에 이야기를 이 크로노스의 역사를 통하여 그 혼인의 이야기,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동안에 그 하나님과 잘 화해하여, 결혼하시면 되는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바울이 중매쟁이 라고 부르는거죠. 내가 너희를 하나님 앞에 훌륭한 아내로 중매한다 결혼시키겠다는거죠.
근데 중매쟁이가 소개하는 남편의 스펙이 영 말이 아녜요 지금. 이사야서 53장 보세요. 보기에 연한 순같고, 볼품도 없고, 건강하지도 않아. 툭치면 넘어질것 같애. 얼마나 못생겼으면 보자마자 얼굴을 돌린다 그래요. 그 흔한 대학도 안나왔어. 예루살렘에 정규대학, 4년제 정규대학이 두개나 있었습니다. 전문대는 뭐 수도 없이 많았고. 근데 무학이야. 머리 둘 곳도 없어. 아부지가 누군지도 몰라. 동생들은 또 왜이렇게 맣어? 거기다가 그를 남편으로 맞는즉시 나의 육이 그앞에서 부정이 돼야돼. 누가 이런 남편을 택합니까? 근데 어떤 정신나간 이들이 그이를 내 신랑으로 받아들이드라는 것입니다. 그 신랑 앞에서 나의 그 원함, 육적 원함과 내 육신이 그렇게 부정당하는게 맞지 라고 하며 그남편을 신랑으로 꼭붙들드라는 거에요.
그것을 배우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를 허락하신 거에요. 하나님 나라는 있지 않다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그결혼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그거 배우라고 허락한거라니깐요. 여기서 여러분끼리 마음 맞춰서 행복한 천국의 작은 모형을 이루라고, 행복하게 살으라고, 그렇게 결혼이라는 제도를 준게 아니에요. 그게 목적이 되면 여러분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어요. 이 인간의 이 욕심이라는게 끝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배우자를 찾습니까? 이 청년들, 배우자 기도, 기도 제목들 한번 다 꺼내 보세요. 예수와 정 반대의 스펙들을 다 원하고 있어요. 웬만하면 많이 배워야돼. 그러니까 그냥 목사들도 전부 디민, 뭐 닥털 오브 미니스트리, 미니스트, 목회학박사가 왜필요해요? 나는 그거 받은 사람의 90프로 이상은 전부 사기꾼이라고 봐. (ㅎㅎㅎㅎ) 돈디밀면 다주는거. 많이 배워야돼, 돈많아야돼, 잘생겨야돼, 키커야돼, 될수있으면 시댁식구는 적어야돼, (ㅎㅎㅎㅎㅎ) ㅎㅎㅎ. 그앞에서 내가 부정되는게 아니라, 그이가 나의 앞에서 부정돼야돼 ㅎ. (ㅎㅎ) 전부 반대야. 그래놓고, 나는 진리를 알아요 이러고 앉아 있대니까요. 예수를, 예수라는 남편이 그렇게 좋다매요? 그런데 이 역사속에서의 배우자는 왜 정 반대의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냐구요?
자 아무튼 고대의 혼인은, 아이가 태어나야 비로소 완성이 됩니다. 혼인의 절차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장인 장모가 있는 장가로 와야 돼요. 그래서 장가 간다 그러는 거에요. 남편이 혼자 와요. 언제 오냐하면, 밤에 와요. 그리고 칠일 동안, 칠의 날 동안, 밤에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집으로 가는게 아니라 그 장가에서 살아야 돼요. 언제까지? 아이를,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 첫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데리고 시아버지가 있는 시집으로 가서 거기서 영원히 사는거에요. 이게 혼인의 완성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땅에서 여러분은 이 역사, '날' 이라는 이 시간을 통하여, 바로 그 혼인을 완성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반드시 아들을 가져야, 씨를 가져야 돼요, 내안에. 그 진리를 마음으로 가져야 사는 거에요. 그래야 혼인이 완성되는 거에요. 그게 '모에드' 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진리로 그렇게 씨로 왔을 때 이게 날이고 욤이고, 그렇게 해서 위에 삶과 아래에 삶을 동시에 사는, 이 세상의, 세상의 빛이 된 이들의 삶을 소ㅑ네, 완성이라고 하는거에요. 양자를 다 사는 이들의 삶.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표적으로 주신, 그 열의, 그 율법, 열의 율법을 넷으로 주는 거에요. 그리고는, 에스카 톨로스 코드란테스, 넷의 마지막을 반드시 완성해, 그러면 정사각형이 되겠죠? 성전을 위에서 보면 정사각형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그성전 거룩한성 새 예루살렘을 정사각형 정육면체로 묘사를 하잖아요? 그게 넷이예요. 넷의 의미가 그거래니깐요?
자 그렇게 해서, 그 말씀을, 그 오트 를 갖고, 그 하나님의 완성, 그걸로 우리가 이제 진리로 완성해버려, 그러면 그게 무트 가 돼죠? 그게 죽음이예요.
오트 표적을, 우리가 무트, 진리로 완성을 해버리면, 그걸 육의 죽음, 이라고 한다니까요? 인간 육신의 모든 가능성이 부정돼버리는 거에요. 그걸 완성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근데 그 표적의 총화가 바로 예수라 그랬죠? 언약이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조상들을 통하여 설명이 된, 아들이예요. 그 아들은 율법으로도 설명이 됐고, 성전으로도 설명이 됐어요. 그래서 이 성전이 나다 라고 이야기 하신거고, 그성경에 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거예요. 예수란 말이에요. 그렇게 진리라는 씨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들이, 전부 진리 앞에서 깨져야 할 표적이요 그릇들이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깨져야할 표적들만 붙들고는, 우리가 선민이다, 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드라는 것입니다. 그걸 지적하는 거에요. 그건 우리의 이야기잖아요 우리의 이야기. 오늘날에도 그렇게 엉터리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저마다 예배를 한다고 하고, 저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저마다 찬송을 하고, 저마다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합니다. 약속을 이야기하고 언약을 이야기하고 조상들의 이야기를 해요. 뭐 요즘은 그것도 힘들다고 그런 어려운 조직신학적 얘기는 하지말자 그래서 그런 얘기도 안해요. 그냥 신문 얘기만 해.
근데 전부 껍데기로만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섬기고, 표적으로서의 예수를 섬기고, 그 예수가 하신 일만 칭송하고 있는 거에요. 죽은 예수를 다시 살려놓고, 십자가에 매달아논 다음에, 열심히 그 예수만 섬기고 있어요. 그게 죽은 것 같았으나 다시 산 짐승으로서의 예수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세상 임금으로 죽을꺼야 그게 십자가란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이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그이가 세상 임금이지 뭐예요? 우리는 그냥 국어사전 개념으로 이해를 하니까 자꾸 나의 상식으로만 이해를 하니까 세상 임금, 사탄 이렇게 알고 있는 거에요. 뱀? 마귀. 이렇게. 그분이 세상 임금으로 죽어야 세상에서 임금 되고 싶어하는 우리가 그 안에서 죽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거 아닙니까? 근데 주님은 뭐라 그랬냐 하면, 세상 임금으로 내가 죽을건데, 세상 임금이 곧 또다시 온대요. 무슨 말이에요 이게요? 내가 죽으면 이제 마귀가 다시 활개를 치고 온다는 뜻입니까? 아니오. 어떤 이들이 세상 임금으로 죽은 나를 다시 살려 자기들의 유익에 써먹을 거라는거에요. 열심히 섬기면서.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면, 그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느니라.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 없는 예수를, 그 표적으로서의 예수, 그걸 율법으로, 성전으로, 여전히 섬기고 있다닌깐요. 아니 여러분, 옛날에는요, 죽은 시체는 부정하다 해서 절대 못만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사를 아리마데 요셉이 하는거에요. 왜? 아니 예수님의 식구가 없었습니까? 아니 살면서 속망 썩여갖고 다 도망간건가요 그냥? 아유 저거그냥 장례도 치르기싫어 이렇게? 왜 가족들은 어디가고 아리마데 요셉이 장사를 시켜요? 요셉이라는 이름은 예수의 아버지의 이름이예요. 사람이 죽은 예수를 만지면 안되기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장사해야 된다 라는 의미에서 그가 굴에다가 갖다 쳐 넣는겁니다. 그 굴이 어떤 굴이냐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묻혔던 그리고 그 이후에 인자의 라인이 다 묻혔던 막벨라 굴 이라는 의미란 말예요. 그게 뭐에요? 양 우리, 양 우리는 늘 성전이에요. 성전에, 율법의 성전에 예수가 율법으로 묻혔으면, 다시는 만져도 안되고, 가도 안되는거에요. 그래서 옛날에는 평토장, 무덤을 봉분을 세우지 않고 평토장을 해놨어요. 부정한 거니까. 근데 혹시 자기들이 그거 밟을지도 몰라서 고자리에 이렇게 회를 칠해 놨다구. 안 밟을라구. 그런 율법적 노력과 시도를 주님이 회칠한 무덤 이라고 한거에요. 그런걸로 하나님이 기뻐할거 같냐는거죠.
근데 우리는 그 죽은 예수를 살려놓고 열심히 거기 가갖구 그, 이, 예배당을 성전화시켜놓고 여기서 희생제사 를 드리고 있는 거에요. 그분은 그리스도로 살아서 내 안에 생명으로 들어왔는데, 내 밖에 걸어놓고 내 소원을, 나의 인간으로서의 이 욕망 성취를, 나의 가치 상승을, 위해서 열심히 빌고있는거라닌깐요. 그러이까 전부 이 예배던 뭐던 주인공은 나여야 돼. 내가 은혜 안받으면 안되고, 나를 감동시켜주지 못하는 찬양팀은 창양팀두 아냐. 오늘 예배 분위기가 왜이래? 뭘 왜그래 당신땜에 그래요.
그러이까 그진리를 설명해 주는게 못내 다 불편한 거에요. 하는 사람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그렇고.
제가어저께 기독교티비를 우연히 보게되어서, 설교를한편 들었는데, 한국에선뭐 내로라하는 유명한목사님이예요. 한국교회의뭐 사상가를 자처하는분이죠. 개혁의 리더? 뭐이러면서. 30분간 딱 깔끔하게 설교를 끝내시두만요. 근데, 성경 한구절 읽어놓구, 성경에 대해서 설명하는, 꼴을 못봤어요. 아니, 제가, 끝날때까지, 딱 한번만, 어디든 좋으니까 성경을, 인용해서 그걸 설명좀 해줬으면. 나중에는 그냥, 예화도, 예화로라도, 한절만 좀 얘기해줬으면 했는데, 끝까지 성경은 한마디도 얘기하지 않고, 자기가 집회를 다니면서 너무너무 피곤하고 고단한데, 죽을것 같앴는데 하나님이, 잠을 허락하셔서, 잠을 자다, 자고 일어났더니 피로가 다 풀렸대.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잠이라는걸 마련해서, 우리를 회복시키길 원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회복의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러구는 끝났어. 다 듣구 나갖구, 그러니까 피곤할땐 자라는거야? 뭐. (ㅎㅎㅎㅎㅎ)교회에 와서 그얘길 들어야 되냐구요?
회복의 하나님? 이게 비상교지 뭐예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셨대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회복시키기 원하신대요. 그러니까 회복하세요. 더웁게 가세요. 배부르게 가세요. 야고보가 말한 그거 피상교와 뭐가 달라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성경으로 설명을 해줘야죠. 어떻게 회복이 되는지 설명을 해줘야죠. 잠만 자면 되는거에요? 그냥 하나님이 잠이라는걸 만들어주셔서 그렇게 감사해요? 그걸 깨달아야 되냐구 우리가요? 근데 수천명 수만 명이 앉아갖구 아니 한국교회 지성들은 거기 다 가 있다매? 근데 아멘아멘 하고 앉았어요 거기서. 날 회복시켜 준다 그러니까. 그러이까 얼마나 형식적이예요 이게? 하나님이 회복시키기를 원하세요. 그런다고 내가 회복이 돼요? 아무 의미도 없이 굿모닝? 굿에프터눈 이거나 뭐가 달라요? 뭘 굿모닝이야 언제봤다구. (ㅎㅎㅎ) 아무나 보고 안녕하세요?
안녕이 뭐에요? 평안 에이레네 뜻이에요. 진리를 모르는 이는 절대 그 평안 못 갖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녕못하죠? 내가 그 안녕이 뭔지 설명해 줄까요? 안녕하게 해드릴까요? 이렇게 인사를 해야 되는거 아니예요 원래? 근데 아무나보고 안녕하세요? 진리를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안녕하겠냐구요? 아무나 만나면 뭐 기도하고 있어요.
아 나 노회같은데 왜안가냐 하면, 무조건 만나면 할렐루야 이러더니, (ㅎㅎㅎㅎㅎㅎㅎ) 아그게 무슨 인사예요? 하나님 을 찬송하라. 내삶이 지금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데 할레루야 시작해서 지금말이죠, 목사님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어요. 뭘? 왜 날위해 기도해? ㅎㅎ 잘살고 있는데 ㅎ. 그거랑 뭐가 달라요? 그냥 버릇이 되갖구. 여기서도 구원받으세요 회복하세요 안심하세요 평안하세요 그리고 성경말씀은 한 마디도 안해. 근데 그게 편한가봐 서로. 너무 화기애애해요. 어우 부러워 ㅎ. 그런 분위기.
그렇게 표적으로서의 예수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가짜 이스라엘인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한게 이삭 그 아들이었습니까? 아니예요. 그럼 여기서 애 못난 사람들은 다 기도해서 애 받아야죠. 그 애 허락한게 아니라, 씨를 주겠다고 했더니, 표적에 담고 있는 그씨를 주겠다고 했더니, 아브라함이 이해를 못하니까, 아들주겠다는 얘긴가? 그랬더니 그 아들에게 그 씨를 진리로 담아서 아버지잖아요 그건? 아버지를 담아서 아들 안에 담아, 이걸로 아버지, 그 씨를 깨달아 알아라 라구 준거잖아요? 아브라함이 그 이삭, 약속의 후손, 그 씨를 통하여 그진리가 뭔지를 깨닫고 브엘셰바를 팍 찍은 다음에 진리를 알아요.
이게 일곱 우물이지. 이것이 진리지 라고 알자, 하나님이, 그러며는 이제 이건 필요없잖아, 이건 갖다가 파괴해라 그러는거에요. 내가 너에게 준 아버지를 담은 그 아들은 파괴해라 그래야 그게 니 안에 아버지로 들거갈게 아니냐는거죠. 이삭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모형으로만 보여주는 거에요. 그게 어떤 거냐면, 이렇게 준비된 어린양이, 내가 준비한 양이, 죽어야할 자 대신에 대신 죽는게 그이야기 였으니까, 이제는 그 이삭이 이야기하고 있는 모형으로서의 그 그릇은 필요 없잖아 라고 이야기 한거잖아요? 그 아버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내아들로 주었잖아요? 그러면 이제 더이상 백세에 주신 그냥 후 불면 날아갈까 금이야 옥이야 나의 섬김의 대상이 된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이 담고 있는 더 귀한 그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얘는 나에게 섬김의 대상이 안되는 거에요 이제는. 그 아버질 내가 알았으니까. 마찬가지요. 우리에게 그 씨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 아버지를, 진리를 담아 아들을 보내셨어요 이땅에. 누구예요? 예수. 그래서 예수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라고 얘기한거에요. 내가 그아들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예수를 통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그 아버지를 알았잖아요? 진리를, 복음을, 알아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예수는? 역할을 다한것 아닙니까? 다시 살아나서 여기에 매달려 있으면 안된다닌깐요? 그러면 그거는 파괴돼야 되는거에요. 어디서? 모리아산에서. 거기가 예루살렘 아닙니까? 왜? 이제 그건 하나님이 나에게 그아버지를 설명하기 위해 아들 안에 담아 나에게 허락하신 내아들이 되는거에요. 내아들이 되면, 그아들은 섬김의 대상이 되면 안되는거죠? 누가 아들을 섬깁니까? 하 요즘같이 그냥 뭣땜에 사는지 모르는 인간들이 전부 그 자식에 묶여가지구 꽁꽁 묶여갖구 그게 자기 생명이야 다들 보면. 그러니까 이렇게 설명을 해도 모르는 거에요. 그생명이지? 이렇게. 아이 검을 주러 왔다 라고 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끊어낸게 그관계라닌깐요? 그걸 내가 너에게, 니가 그렇게 우상으로 삼으라고 너에게 허락한거냐? 하나님이 그런거라 말입니다.
예전에 우리 선배 아들이 중학교때 사고로 죽었는데, 이선배가요, 소파에 앉아갖구 일어나질 않는데, 똥오줌을 거기다가 다 싸면서, 너무 낙망이 돼갖구, 놔두면 그냥 죽겠더라구요 거기서. 그게 내 생명이었으니까.
하나님은 그러라고 아들 준거 아니예요. 거기에서 그거 안에 담겨있는 더귀한 그 아버지를 깨달으라구. 그러면, 그아버지를 이제 깨달았으면, 그예수는 이제 내 마음 안으로 빛으로 들어와야 되는거에요. 그리고 이제 나는 그걸 아다마, 하 아담의 소리로 전해줘야 하는 자란 말이에요 나는. 여전히 그냥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나의 육신적인 어떤 것을 채우고, 편안하게, 나를 편안하게 해주시고, 잠을 주어서 피곤을 회복시켜주고,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당연히, 그예수는 우리의 섬김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면 안되는거에요. 그러면 여전히 표적 이란말입니다. 그 표적은 멸망의 양식이란 말에요.
이렇게 예수를 포함한 모든 표적들은 진리라는 내용으로 해석이 되어서, 마음 속으로 들어와야 되는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소리도 없고 언어도 없어. 그러나 뜻은 통해. 그게 진리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거에요. 제가 지금 말로. 언어로,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으로 복음이 전해지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뜻으로 통하는 거에요. 그걸 이심전심이라 그래요. 진짜 이심전심은 그거에요. 그러이까 이렇게 말로, 언어로 전하고 있는데, 어떤 이들이 이 마음을 자기가 가지가면? 그게 성령이 계시다는 유일한 증거지 뭐예요? 여기서 찬송이 터지는거지, 무슨 뭐 내가 뭐 대단한 경험을 하고 기적을 체험하고 은이빨이 금이빨로 바뀌고, 부러졌던 팔이 붙구, 그게 나를 살립니까? 시편 19편 1절 보세요
(시19:1-4)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당연하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당연하죠.)
2 날은 날에게 (날이 욤입니다. 낮, 날. 빛은? 날은 날에게, 레마. 말하고.)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해줘요. 전부 그냥 지식만 이렇게 (ㅎㅎㅎ) 날은 날에게 말을 해준다는게, 그걸 말로 듣는이가 별로 없으니까, 다 지식으로 갖구 잘난척들 하는거죠.)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게 진리예요. 그래서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자는,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성령으로 난 자는 소리는 듣는데, 그게 어디서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근데 흔적이 남는단다. 성령으로 난 자들은 다 그래. 이렇게 이야기 한거에요. 제가 말을 잘해서 여러분이 잘 알아듣는 게 아니라닌깐요.
날때부터 소경인자, 하 누가 나를 고쳤는지 난 모르겠어요. 본적이 없는데. 중요한건 내가 보인다는 거에요. 그렇게 통하는 거에요 그냥. 그게 진리라니까요? 그러니까 반드시 표적은 깨지고 내용이 우리 안으로 들어 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이 생, 하늘의, 그, 생명수, 그 진리의 물이 이렇게 흘러가게 통하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근데, 주님은 그 성령을 배, 코일리아가 성전이거든요? 배에서 흐르는 생수라고 하죠? 성경의 어디에 넷으로 흐르는 생수 이야기가 나오는 데가 있어요. 근데 거기에 이름이 모예드의 그 에덴 입니다. 그러면 에덴에서 발원하여 넷으로 흐르는 강 이야기도 그이야기겠죠? 다음주에 하겠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이런 많은 아래의 표적들을 주시고그것으로 진리를 깨달아알라고 말씀하셨음에도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그 표적에 머물며하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른그들처럼 예수를 믿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하나님 진리를 알게하시고그로 말미암아 터져버리는 그 자유가 우리 서머나교회를 가득 채우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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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되냐고 묻는 자들에게
본문: 롬 6 : 1- 11
6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함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되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에 관한 설교를 오래 계속 하다보면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질문이 바로 오늘 본문 중에 나오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니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요, 라는 이런 무식한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 그래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죠?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헬라어 ‘메’ 라는 불변 사를 사용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있어요. 5장에서 한 사람의 행함과 한 사람의 순종함과 은혜의 왕 노릇이라는 전적인 하나님에서의 구원의 메카니즘을 설명한 사도 바울이 갑자기 왜 그럼 은혜에 거하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어도 되겠네, 라는 질문을 끌어다 쓰고 있는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선생이 복음을 올바로 전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그 질문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전도자가, 설교자가 올바로 설교를 하면,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나와야 하는 질문이 그럼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라는 반응이 나와야 된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만일 그런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 설교는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거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그런 반응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명심하셔야 됩니다. 거기가 끝일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건 과정이란 말에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이제부터 사도 바울이 그럴 수 없느니라. 로 시작해서 6장과 7장 전반에 걸쳐 강조하는 성도의 행함의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를 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정말 이 로마서 6장과 7장이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도의 성황에 관한 장인지 한 번 잘 들어 보세요. 먼저 힌트를 조금 드리자면 만일 이 로마서 6장과 7장이 기존의 주석서들이나 강해서들, 그리고 대다수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성화에 대한 강조라고 한다면 로마서 1장부터 5장까지의 문맥이 갑자기 엉키게 되는 거거든요. 지금까지의 로마서의 네러티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선물인 그 의에 의해서만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그 은혜의 복음을 집중하여 설명하고 있었단 말에요. 그런데 갑자기 거기에 보태서 너희의 할 일도 남아 있다, 라는 식의 이야기가 붙어 버리면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내용이 멀겋게 희석이 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사도 바울이 지금 성도가 해내야 할 죄와의 투쟁과 승리에로의 독려에 초점을 만춘 거라면 이 6장의 내용이 7장에서 갑자기 이렇게 바뀌면 안 돼요. 7장 한 번 가 볼게요. 15절.
롬 7 :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것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수시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보세요. 6장과 7장의 내용이 성도의 행함의 내용을 강력하게 독려하는 거라면 7장에서의 이 문맥은 그래서 나도 열심히 싸워서 죄를 안 짓는 사람이 되었어. 그러니까 너희도 열심히 해서 꼭 이겨야 돼. 이렇게 가야 되는데 7 장에서 그 네러티브가 이렇게 끝난다니까요. 심지어 바울은 자기 자신의 그 존재를, 정체성 인식을 사망의 몸이라 그래요. 사망의 몸이 뭐라 그랬어요? 살인자가 죽인 시체를 그 살인자와 꽁꽁 묶는 게 고대 시대의 벌이라 그랬죠? 그래서 얘가 살인한 사람하고 같이 썩는 거예요. 시체가. 요 붙어 있는 더러운 시체를 사망의 몸이라 그래요.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을 바로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니까요.
죄와 싸워서 난 이렇게 거룩해졌다, 가 아니라 나는 사망의 몸이다, 이런 자 인식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라는 것은 성도의 죄 짓기에 대한 강한 부정의 말 정도가 아니라 더 웅숭깊은 내용을 함의하는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이런 힌트를 먼저 잘 숙지하시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과 7장에 담아내고 있는 그럴 수 없느니라. 의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한절한절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본문 1절로 갑니다.
롬 6 : 1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세서 행하게 하여 함이니라
언뜻 보면, 표피적으로 보면 너희 죄 지으면 절대 안 돼, 라고 강력하게 독려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이런 것을 곡해해서 구원파의 어떤 무리들은 자기들은 죽어도 죄 안 짓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있어요. LA에 있는 구원파 목사 한 사람도 제가 직접 만나서 얘기 했는데 자기는 한 번도 죄를 지어본 적이 없대요. 나 헤수스 그럴 뻔 했어요. 예수님인줄 알고. 어떻게 죄를 한 번도 안 졌다는 말을 저렇게 확신 있게 ‘사람’이 하는지. 자기는 안 지었대요. 죄를. 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보시는 것처럼 5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관해 침이 마르도록 설명한 사도 바울이 6장 1절에서 지금까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이해했다면 너희는 반드시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 건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라, 고 지금 바울이 스스로 질문자가 되어서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예요. 어떤 정보 획득을 목적으로, 대답을 목적으로 던지는 질문이 아닌, 어떤 내용을 강화하고 확증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을 수사학적 질문이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5장까지에서 자기가 설명한 내용을 지금 강화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지 몰라서 뭘 묻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단호하게 부정을 한 사도 바울이 그 뒤에 어떤 이야기를 붙여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 어떻게 죄에 거하겠느냐 그러죠? 바울은 그 질문과 대답 속에 너희들은 정말 죄가 뭔지 알기는 아니? 라는 질문과 함께 은혜의 왕 노릇 하에 있는 자들은 이미 죄책에서 자유로운 자들이 다를 함께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자연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개념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관점에서 판단된 그 행위에 국한 되지요? 행위와 되어 나온 어떤 법, 거기에 국한되어 죄를 정의한단 말에요. 자연인들은. 인간 보편이 합의하고 정의한 도덕과 윤리와 양심에 근고한 선과 악의 구별에 의해 죄와 선이 판단 돼요. 자연인들 사이에서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러한 행위나 사유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아요. 그게 죄가 아니라는 건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존재의 근본을 가리키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존재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선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독자적 존재의 상태를 악이라고 해요. 물론 그런 존재는 있을 수가 없지만 선과 악을 설명하기 위해 의를, 불의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상정해 놓고 우리에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마귀, 마귀의 세력, 마귀의 세간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설정하시는 거란 말에요. 이 세상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그 생명력, 창조의 능력 그 밖에서 존재가 될 수 있는 게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악이라고 하고 그렇게 추구해나가는 그 경향성마저도 악이고 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 거예요. 방향을, 과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질문하는 자들은 죄가 뭔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없는 얼치기들인 거예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 선악 체계 하에 있는 얼치기들이예요. 그런데 그 얼치기들 중에 귀가 열린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될 그들에게 설명을 해주시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바로 그러한 죄가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더욱더 강화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거란 말에요. 잘 생각해보십쇼.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라는 질문 속에는 자신의 그 행함이 대단한 가치가 있음이 이미 전제로 들어가 있는 거죠? 자신의 행함에 의해 어떤 결과가 도축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그 속에 들어 있잖아요. 그걸 인과율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게 세상의 법칙이에요. 항상 원인이 있어야 그 원인에 의해 결과가 오는 것,
그런데 구원이라는 건 뭐예요? 우리 측에서의 원인이 없는데 구원이라는 결과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하고 자존심 상해서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는 거란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는 인과율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물론 원인은 있죠. 그런데 원인 제공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란 말에요. 자, 그렇게 자신의 행함에 의해 어떠한 결과가 도축될 것이다, 라는 그 신념, 그건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생래적, 내적, 체계인 선악 체계인 거예요. 그게 배제되어 있단 말에요. 이미. 그 선악 체계 속에서는 반드시 원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 권선과 징악이 진리예요. 그래서 기도한 만큼 복 받고 금식한 날만큼 복 받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사고 체계 속에서는. 그 선악 체계 속에서는 은혜가 이해가 되어지지 않아요. 거기에서는 권선과 징악이 진리예요. 그리고 내가 한 만큼 결과가 주어진다, 가 진리란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선악 체계가 구분해 놓은 선과 악에 대한 권면과 징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의 진리는. 그 구분에 의한 성에 대한 권면과 악에 대한 경고와 그 징계를 하는 것 자체, 선악 구분의,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사는 그 모든 행위를 하나님이 뭐가 그랬어요? 저주해버렸으니까. 죄라고 한단 말에요. 그건요. 선악을 아는 일에 주체가 되는 건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을 일이란 말에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반드시 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그렇게 율법 지킴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을 마귀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여러분 도덕과 윤리는 항상 상대성을 갖고 있는 거 아세요? 수시로 변합니다. 여러분.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요 손님이 찾아오면 자기 아내를 갈 때까지 내 줘야 돼요. 그게 선이예요. 진리라는 건 어디세서든지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어디서는 이게 악이고 어디서는 선 인거? 어느 나라에서는 뚱뚱한 게 예쁜 거고 어느 나라에서는 마른 게 예쁜 거. 진리 아니란 말에요. 이거는요. 옛날 중세의 미인도 같은 거 보세요. 요즘은 욕먹어요. 그거요. 그런데 그 땐 미인이었다니까요.
보세요, 인간이 정의한 아름다움, 선, 착함 이런 건 시대에 따라 변한다니까요. 그건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을 선하다, 악하다, 가치 있다, 가치 없다고 판단하는 거, 이게 선악 체계이고 선악 구조란 말입니다. 그거 아녜요. 성경은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를 그들의 행위로 구분하지 않고 영역으로 구분을 해요. 그 존재가 어떤 영역에 소개 있으며 누가 그를 장악하고 있는가, 로 구분하고 나누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손에 장악된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린 아기까지 도륙해서 난자하여 죽어도 그게 선이었던 거예요. 오히려 그거 안 하면 하나님이 죽여 버렸다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두 나라를 대조해가며 설명하는데 그 한쪽이 마귀의 나라이며 다른 한쪽이 아들의 나라인 거예요.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 흑암의 나라에 먼저 속해 있다가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과정을 겪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그게 없음의 자리에서, 티끌에서 있음의 자리로 가게 되는 창조의 메카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흑암의 나라로 먼저 오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에 설명해 드렸죠? 왜 우리가 간음한 자로 먼저 오게 되는지. 그렇게 됨으로써 구원이 뭔지, 영생이 뭔지, 죄가 뭔지, 의가 뭔지를 배우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 과정 전체를 양육이라 그래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여자가 철장을 가진 아들을 낳고 천 이백 육십일 동안 양육 받는다. 그러죠? 천 이백 육십일은? 한 때, 두 때, 반 때, 세달 반, 뭐예요? 역사예요. 인생. 우리의 이 역사와 인생은 바로 그런 양육의 과정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걸 배워가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아, 우리의 처음 자리는 이렇게 티끌이었구나, 이렇게 알아 가는 거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 그 능력 뒤로 자꾸 이렇게 숨어들어가게 되는 걸 성화라고 해요. 그건요. 그게 진짜 Sanctification 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십자가 뒤로 이제 숨어서, 작아지다 못해 거기에 이렇게 함몰되어 버리는 상태를 Union Christ, 연합이라고 하는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3절 보십쇼.
골 1: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아들이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는 장면이 나오죠? 그건 뭔 얘기예요? 도대체가. 아들이 하나님께 나라를 바쳐요. 그러면 그 아들은 뭐냐고요? 하나님 나라는 아들에 의해서만 완성되고 그 나라라는 건 아들과 관련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라 취급 안 한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아들이 나라를 바치는 거예요. 내가 나라 못 바친단 말에요. 그럼 보세요. 옮기셨다. 이 메세트테세는 메디스타미의 직설법 과거시제예요. 여러분은 이미 옮겨졌어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단 말에요.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을 성도라고 하고 그들의 상태를 거룩이라 그래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의 의와 거룩이, 구원이 되셨다, 그러지 너희들이 거룩을 성취해 가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거룩이란 말에요. 그런데 그 일은 아버지께서 홀로 하신 일이예요. 우리가 애써서 그 나라에 들어간 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옮기셨다 그러잖아요. 우리가 옮겨 간 거 아니란 말에요. 옮기셨다, 그래요. 그런데 광야는 우리 발로 걸어가야 돼. 하나님이 옮기시는데.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에요.
그런데 애굽은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부추, 파, 마늘 이런 거. 정력제, 고기 이런 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그 왕에게 순종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나란데 가나안은 내가 먹고 싶은 걸주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것만 먹는 곳이란 말에요. 그러니 이게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감지가 될 때 쉽겠느냐고요, 이게. 어려워도. 고난이란 말에요. 그게. 고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까지 설명한 게 바로 그 내용이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겨졌다. 이게 5장까지의 내용이잖아요.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의. 하나님의 의. 계속 그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에스겔서나 요한 계시록 등에서 확인한 것처럼 아들의 나라는 아들에게서 나오는 생명수에 의해 열두 가지 실과, 열둘 이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라고 했습니다. 아들의 숫자예요.
그 실과가 아들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에 의해서,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도 그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 그러잖아요. 그 생명에 의해서 사는 자들. 그들이 사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한단 말에요. 아들의 나라라고 한단 말에요.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만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영생이고 거기에는 사망이 없는 거죠? 그럼, 사망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사망은 죄의 삯이니까. 죄가 없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이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면서요? 그럼 분은 사망과 죄와 관계가 있다, 없다? 있기, 없기? 없다!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야, 구원 받았다며? 너희는 또 무슨 행위를 근거로 하여, 또 어떻게 너희 행위의 가치를 부여하여 죄를 지어도 되냐, 말아도 되냐 이따위 얘기를 하느냐? 라고 물어주는 거예요. 대신. 잘 새겨들으세요.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녜요.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아들의 피로 가려서 안 본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게 진짜 감사한 사람이 그럼 이제 맘대로 죄 지어야지. 이렇게 나오겠냐는 거예요. 진짜 아는 사람이면. 여태까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고 있고 정말 하고 싶은 거 허벅지 찔러 가며 참고 있었다는 거죠 그거? 감사해서 한 게 아니라.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이 지금. 진짜 너희 복음에 의해 그일 하고 있는 거야? 얘기를 계속 묻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자기를 향해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안 짓습니까? 우리도 죄 짓는단 말에요. 나를 사랑하는 게 죄예요. 하나님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거. 그런데 보이지도 않은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합니까? 거짓말들 하지 마세요. 우리는 나만 사랑해요. 내 자식? 그것도 나예요. 내 부모? 그것도 나라니까요. 내 존재의 확장. 나만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래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가 역사 속에서 사망을 통과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이 죄를 안 짓는다면, LA에 있는 그 목사님처럼 죄를 안 짓잖아요? 지금부터? 그럼 안 죽어야 돼요. 사망은 죄의 삯이거든요. 다 죽는단 말에요. 그건 인간이 죽는 날까지 죄만 짓다 간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그 안에 예수가 살아있는 자, 그들만 하나님에게 살아나는 거예요. 예수로. 예수의 지체로만. 다시 말해서 사도는 지금 너희가 어떻게 죄를 더 짓겠다는 말을 할 수 있냐? 고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이미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이 어떻게 죄와 관계가 있겠느냐 라고 구원의 현실을 설명하는 거예요. 너희는 지금 죄라는 것을 고작 인간들의 선악체계가 구분해 놓은 착한 일에 반대되는 그러한 것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다. 라는 거예요. 죄라는 건 행위화 되어서 표면으로 나타난 것 정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해도 되요? 말아야 되요? 해야 해요? 안 해야 해요? 이런 걸 물어보고 있다는 얘기예요. 지금.
죄는 생명과 관계가 된 거고 너희들이 열심과 노력을 보태어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 양심적인 삶, 선한 삶도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만큼 죄는 무서운 거란 말입니다. 죽음이라니까요. 없음이라니까요. 그 자체가. 거기에서 내가 내 안에서 나오는 어떤 능력과 지혜와 힘을 갖고, 업적을 갖고 내가 존재가 되어 보겠다, 라고 하는 그걸 죄와 의, 이런 걸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주이다, 이걸 죄라는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지금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죄는 생명과 관계된 단어라니까요. 몇 가지 하고 안 하고 가 문제가 아니란 말에요. 제가 수요일에 말씀 드렸잖아요. 아니, 어떤 처녀 데려다가 강간하고 280토막으로 죽인 그 놈이나 나나 똑같이 살인한 자란 말에요. 하나님은 둘을 똑같은 존재로 취급하신다니까요. 예수가 없으면.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홀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되는 거예요. 없음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또 죄 운운 하는 건 그 죄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아주 잘못된 것이 아니냐? 라는 그런 지적인 거예요. 아들 안에서 구원에 이른 성도는 이제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된 거다, 라고 선언하는 거죠. 그래서 죽음과 세례의 이야기로 그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거예요. 다시 본문 2절로 갑니다.
롬 6 :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합하여, 합하여, 합하여 계속 나오죠? 연합 이예요. 이게. 연합. 우리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신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죄가 왕 노릇하여 사망으로 끌고 가는 그 흑암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된 거예요. 죄라는 왕이 마음대로 부리던 종이 있었어요. 죄가, 마귀가 권세 잡은 곳이 어디예요? 여기예요. 여기. 이 세상. 거기서 마귀가 맘대로 부리던 이 세간들이, 종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종이 죽었네? 마귀가 어떻게 해요? 갖다 버려야 돼요 그건요. 그래서 여러분을 세상에서 죽이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리려고.
죄는 그렇게 난 살았다, 라고 펄펄 뛰면서 기고만장한 자들만을 자기의 세간으로 활용한단 말에요. 야, 인간이 왜 죽어? 왜 인간이 없음이야? 우리도 능력 있어. 할 수 있다니까? 이게 살은 거잖아요. 죄가 걔는 쓸 수 있다니까요. 살았기 때문에. 왜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이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는 지 아시겠죠? 바벨론에서 죽어요. 성도는. 그렇게 죄가 내다버린 시체를 은혜가 덮어서 살려내는 게 구원이란 말에요. 그래서 은혜가 더 큰 거란 말에요. 그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걸 동원하시는 거예요. 잠시.
사도는 그걸 세례라고 하고 세례의 개념을 합하여, 즉 연합으로 풀고 있는 거예요. 5절에 보면 연합하여라. 는 말도 두 번이나 나와요. 같은 말이에요. 연합이에요.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죽고 산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죽지도 못해요. 그리고 살아날 수도 없어요. 존재를 몰수당하는 거라니까요. 성도는요. 우린 그렇게 예수 안에서 죄와 아무 상관없는 자로 죽어버렸어요. 죽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와 연합하여 장사 됐어요. 장사라는 건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하거나 수장을 하거나 완전히 죽여 버리는 걸 ‘장사’라고 하죠. 세례라는 말 자체가 물에 장사지내다 예요. 그래서 물에다가 푹 담가버리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예요, 여러분. 왜 머리 위에다 뿌리는지 아세요? 네 머리 위까지 물에 잠겼다는 예식이란 말에요. 하나의 모형이란 말에요.
본문에 나오는 장사라는 말은 완전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완전히 죽은 놈들이 무슨 죄를 짓고 안 짓고 이런 말을 어떻게 하느냐? 이런 거예요. 죽였다며?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장사된 지 사흘만 이라고 장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고 소요리 문답. 대요리 문답에도 장사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설명이 되고 있는 거예요. 장사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에 장사되시죠? 이사야서 53장 9절 보세요.
사 5 :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무덤이,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부자의 무덤에 부자와 함께 장사되신다. 그러죠? 연합이에요. 함께. 보시다시피 이사야는 그 부자를 악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성경에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 라는 건 못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돈이 많다, 라고 했을 때 얼마가 있어야 많은 거예요? 인간들은 나 돈 많아, 라고 이렇게 만족할만한 그 많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녜요. 그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그걸 부자라고 하지 않아요.
부자는 ‘나 있음’, ‘나는 존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백성들, 하늘나라의 이 존재들은 하나님이 채우지 않으면 없음이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없는 거야? 나도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됐는데 나도 능력 있고 지혜 있고 할 수 있어, 라는 이 사람들. 이걸 부자라고 그래요. 나는 가진 게 있다니까. 이걸 부자라고 해요. 나도 율법 지켜서 착하게 살아서 그 구원에 이르는데 일조할 수 있다니까 이걸 부자라고 해요. 그걸 악인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게 여러분과 저라니까요. 그럼 그 낙타가 부자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 건가요? 있습니다. 낙타가 다이어트 하면 돼요. 영적 다이어트. 그게 뭔지 아세요? 자기부인, 십자가, 라는 거예요. 그렇게 부인되고, 부인되다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양식을 안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삐쩍 마르다가 결국 먼지가 되어 바늘구멍으로 쏙 들어가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그게 쉽겠어요? 열흘 금식만 해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스트레스 받아요. 그러면 하지를 말지.
여러분 하나님은 우릴 그렇게 부정시켜 가세요. 부인시켜 가세요. 너, 아니라니까. 이렇게. 그러니까 예배당에 두각을 나타내고 잘난 인간들이 점점 많아지는 교회는 잘못 가는 교회인 거예요. 점점 감춰지고 숨겨지는 이들이 많이 나와야 돼요. 할 말이 없어져야 돼요. 그런데요,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실제로 예수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죠? 부자예요. 권세가 있는 사람이에요. 산헤드린 공회는 옛 성전 안에 있습니다. 옛 성전, 못된 그 옛 성전을 대표하는 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산헤드린 공회예요. 그 안에 속해 있는 자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어요. 그런데 그의 무덤으로 예수님이 들어가세요. 그런데 이사야서와 연결시키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예수님이 함께 들어가는 거죠? 마가복음 15장 43절 보십쇼.
막 15 : 43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여러분, 빌라도가 예수님 죽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와서 그거 달라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람도 빌라도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 숨어버렸어요. 제자들 까지. 근데 이 사람이 거길 간 거예요. 이 부자가. 마태복음 27장 59절 보세요.
마 27 : 59 –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틈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어
( 기의 새 무덤이죠? 자기가 묻힐 새 무덤을 미리 준비할 정도로 부자였어요. 이 사람이)
--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 이게 장사지내는 거예요, 매장 하는 거예요
--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왜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덤 주변에는 마리아란 이름만 나오는지 제가 설명해드렸죠? 마리아는 마라. 쓴 물에서 나오는 단어예요. 이게 나오미예요 진짜 기쁨. 단물이 되는 거. 거기에 그런데 뭐가 던져져요? 나뭇가지, 십자가가 던져져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쓴물들이 단물이 되는 거. 그래서 마리아만 그렇게 있는 거예요. 여기도 보세요. 막달라 마리아 (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 또 다른 마리아, 잉태치 못하던 여자. 이거 다 마귀의 모형 이예요. 여러분. 일곱 귀신 들어갔었다는 것은 귀신이 일곱 마리가 들어갔었다는 게 아니라 완전수, 완전한 마귀란 뜻이에요. 그런데 그 무덤에 예수가 들어가셔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장사지내지는 건데 사흘 만에 예수님이 살아나셨네요? 그럼 함께 살아나야 되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 예요. 함께 죽고, 합하여 죽고 합하여 살아났다, 라는 말이 그 말이란 말에요.
그러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무덤을 준비했어요. 나는 죽을 거다, 를 이미 알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의 무덤에서, 무덤은 죽은 자를 가두는 곳이니까. 무덤에서 산 자가 되어 나왔네요. 예수님의 부활에 합하여. 그럼 그 무덤은 파기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무덤은 없어지는 거예요. 어디서? 예수 안에서. 그게 장사지낸 거예요. 완전히 죽어야 돼요. 대신에. 그래서 이렇게 이제 거의 죽은 것처럼 흐물흐물한데 때린 데 또 때리고 계속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장사 지내버리려고. 완전히 죽이려고 그냥. 그래서 왜 복음을 아는 이들을 변태라고 하느냐 하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걸 넉넉히 이긴다니까요. 아니, 넉넉히 이기는 건 좀 그렇고 살아있다니까요. 그래도. 다른 삶 같으면 목매달아 확 죽어버릴 것 같은데 살아있어요.. 그걸 넉넉히 이긴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산 자들은 역사 속에서도 죽어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사지내 드리고 산헤드린 공회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가 유대인들의 그 유대교에서 출교 안당하고 버틸 수 있었을까요? 그 소경의 부모, 자기자식인데도 불구하고 난 몰라요, 그랬잖아요. 출교 당할까봐. 자식인데도. 그건 무서운 거예요. 아예 그 사람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가더라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와 함께 장사 지냄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서도 죽는 거예요. 다른 세계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다른 나라, 아들의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내가 악인이고 내가 부잡니다. 그래서 난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라고 이 역사 속에서 없음의 자리로 죽는 자만 산다!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연합의 이야기란 말에요. 여러분 그 마리아들이 나중에 그 무덤 안에 들어가서 뭘 봐요? 천사들을 보죠? 우리의 이 역사 속 무덤이 바로 천국의 통로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천국이 펼쳐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내가 문이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늘로 가는 문이다. 그런데 양의 문이에요. 양의 문은 성전에 제물들이, 양들이 총총총총 걸어 들어가던 문이었어요. 죽으러 들어가는 거거든요. 그거. 예수라는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바로 그 양의 문을 통과해야 돼요. 그건 죽음이란 뜻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 역사 속삶은 무덤으로의 행진이어야 맞는 거예요. 그 무덤을 거쳐야 천국 문이 열리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이 천국 문입니다. 잊지 마세요. 그렇게 죄의 몸이 예수와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되어야 생명이 부어지는 게 창조의 메카니즘이에요. 창조는 없음의 상태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야 창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왕 노릇 안에 들어가 있는 후자의 사람들이 정말 막살게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어떤 사형수가 자신의 죄로 인해서 사형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사형수의 죄는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같이 사람을 죽인 죄였어요. 당연히 사형이죠? 죽어야 돼요. 그거는요. 자기도 알아요. 자기가 얼마나 흉악한 인간인지 그래서 그냥 수긍하고 인정하고 사형날짜를, 집행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살인을 저지른 자는 죽어야 한다, 라 는 법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는 죽어야 돼요. 법 아래에 있는 자. 그런데 요한일서 3장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살인한 자다. 그래요. 3절에서 ‘미워하는‘ 이라고 번역 된 그 단어도 ’조금 사랑하는’ 이예요. 그러니까 형제를 완전히,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모든 자가 다 살인이래요. 성경이.
여러분은 매일매일 살인하세요? 하루라도 건너뛰는 날 있어요? 혹시? 매일 살인하죠? 그럼 여러분도 사형수 맞아요. 그 자각이 그 감옥에서 진짜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보다 좀 흐릴 뿐이지 우리는 똑같은 인간들이란 말에요. 성경이 판단하는 그 죄의 관점에서 보면요. 그죠? 우리도 사형수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가리켜서 처음부터 살인한 자 라고 하는 거예요. 살인한 자는 다 돌로 쳐서 죽여야 되는 게 율법이거든요. 법 아래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돼요. 다 죽어야 돼요. 그 사형수가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감옥 안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봉사도 하고, 사고도 안치고 착하게 살았어요. 자격증도 막 20개씩 따고.
그래도 그가 법 아래에 있으면 죽어야 되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이, 법 집행의 최고 권위자예요. 대통령이, 부통령도 아니고 대통령이 재는 살려줘라, 그랬어요. 대통령이 걔가 감옥에서 뭘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하여튼 살려줘라 그랬어요. 이제 그는 법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법 위에, 그 법 집행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그 높은 권위자가 은혜로 덮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를 묶고 있던 포승을 그가 풀 때도 아무도 말리면 안 돼요, 이제는요. 그리고 그가 자기를 가두던 감옥에서 걸어 나올 때 누구도 그건 막을 수 없어요. 법이 이제 못 막아요. 사면 됐거든요. 요걸 은혜라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사형수들이요 사형 집행 날짜가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어떤 꿈을 꾸는지 아세요? 어떤 꿈을 제일 많이 꾸는지 아세요? 내가 저지른 그 죄, 그걸로 말미암아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그 죄. 그 죄 짓기 바로 이전으로만, 제발 한 번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요 꿈을 제일 많이 꾼다고요. 그만큼 사망이 무서운 거예요. 여러분. 오죽하면 731부대에서 엄마들의 모성을 실험하기 위해 뜨거운 방에다가 갓난 애기를 낳은 엄마와 갓난 애기를 같이 넣고 불을 땠더니 100% 엄마들이 죽음 앞에서는 그 애기를 밟고 올라 갔다잖아요 사망은, 죽음은 그렇게. 사망은, 죽음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거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에이 그 죽으면 끝이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확 죽어버릴까? 이런 말 하지 마세요. 큰일 나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그 감옥에서 나왔어요. 그렇게 아주 처절하게, 야, 내가 고 죄 짓기 바로 이전으로만 돌아갈 수 있으면 하고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깨보면 또 현실은 나는 사형수야. 그걸 그렇게 처절하게 진짜 인지한 사람이 나가면서, 아, 이제 그 죄 또 지어야지, 이러고 나가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함부로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나요? 이렇게 물어보느냐면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한 번도 고민을 안 해봤기 때문이에요. 그 원수들은요. 그걸 모르니까 인제 그러면 죄 막 지어도 되겠네? 이따위 소리를 한다니까요. 그걸로 인해,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며 나를 파괴하는 것인지, 그러니까 나는 바로 고 전으로만 돌려주면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 안해야지 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그 사람에게 은혜의 복음이 떨어지면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떻게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나요? 찬송을 먼저 하게 되지, 인제 그럼 막 살아도 되나? 이게 무슨 막말이냐고요. 도대체가?
제가 은혜와 십자가를 알라고 했지 언제 막 살라고 했습니까? 왜 인터넷에다 도배들을 해 놓는 거예요? 도대체가. 김성수 목사가 막 살라 그랬다고. 아니 이해도 못하는 놈들이 꼭 그냥 설교 중간에 한 토막 정도 떼어다가 어디서 또 베꼈는지 그냥 딱 써놓고선 거기에다가 구구절절이 아주 주석서를 썼더구먼요. 아니 은혜를 아는 이들이 진짜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이고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며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추악하게 만든 그 죄의 실체가 뭔지를 진짜 고민해보고 안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요.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그 죄에 대해서 막 폭로하고 설명한 거 또 하고 계속 하는 거예요. 진짜 아느냐? 이걸.
은혜의 왕 노릇이라는 건 바로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해서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향한 그 지향성까지 끌어내는 거예요. 다시는 그리로 가지 말아야지. 이렇게. 그게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뭐 어떤 사람들처럼 성도는 구원 받았어도 죽을 때까지 죄인이니까, 죄만 짓다 가니까 헌금도 하지 말고 봉사도 하지 말고, 예배도 가지 말고 차라리 뭐 라디오를 들으라. 이따위 소리나 하는 사람들은 그건 십자가 자체를 모독하는 거예요. 그건. 그건 십자가 복음 아닙니다. 그런 건. 그런데 성도는요 여전히 역사 속에서 아담의 몸을 입고 있는지라 그 은혜 또한 법으로 인식을 하게 돼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생래적, 내적체계로 이미 그의 삶 속에서 공고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선악체계라는 게.
그래서 은혜가 자신을 구원해줬으니까 그 은혜가 요구하는 어떤 것을 또 해야 된다. 라고 또 다시 법으로 들어가요. 그건 기특한 게 아녜요. 그 은혜를 또 다른 법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건 모독하는 거예요. 그걸 율법주의라고 그래요. 성도는 그 율법주의의 과정을 반드시 통과합니다. 아무리 자유, 자유 은혜, 은혜 해도 저도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이렇게 멍하니 있어도 되는 건가? 아니, 멍하니 있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도 뭔가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불안해 갖고 말이죠. 그럴 때가 많아요.
맨날 이렇게 자유, 십자가, 은혜 이렇게 이야기하는 저도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니까요, 우리는. 그 자리에 계속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부으세요. 하나님께서는 하늘 백성들에게 당신이 은혜를 쏟아 붓지 않으시면 그들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라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해주는 동시에 믿음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언약의 현실을 동시에 이해시켜 가세요. 그리고는 결국 그들에게서 항복을 받아 내는 거, 그게 은혜의 왕 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미국 조지아세서 1800 년경에 노예시장이 있었잖아요. 저도 필라델피아 집회에 가서 실지로 노예시장을 가봤더니 참 처참하더구먼요. 짐승대접도 못 받았어요. 그런데 어떤 농장을 하는 부잣집 주인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노예, 험악한 노예 하나를 비싼 값을 주고 샀대요. 당시 에는요 노예가 시장에 나왔는데 이게 시장에 가도 팔리지 않고 쓸모없다고 판단이 되면 바다에 빠트려서 죽였어요. 왜? 얘가 먹는 밥이 아까워서. 그러니까 그 노예는 곧 죽을 노예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오더니 아주 비싼 값에 자기를 사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살아난 거 아녜요? 그 사람 때문에. 그런데 살아났는데 금방 이 사람이, 감사함을 금방 잊어버리고 인간이 그렇다니까요. 나는 아프리카에서 추장의 아들이었는데 내가 저사람 집에 가서 노예로 살아야 된다, 라는 그 생각이 엄습해오자 자기를 비싼 값에 사서 농장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그 주인의 마차 뒤에서 악을, 악을 쓰면서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는 거예요. 나는 절대 네 말 안들을 거야, 절대 네 말 안들을 거야. 그런데 그 주인이 농장에 가자마자 이 노예를 풀어줬어요. 자유롭게 가라. 뜨악했겠죠? 어?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풀어주는 거냐고? 그 주인이 그랬대요. 실화예요. ㅎ
나는 너를 내 노예로 부리려고 사온 게 아니라 조금 있으면 네가 그렇게 노예상인에 의해 바다에 빠트려져 죽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를 설려내려고 너를 산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 노예상인들이 없는 곳으로 왔으니까 이제 가! 네 마음대로 가. 그랬대요. 여러분 당시는 흑인 노예들은 짐승 취급도 못 받았다고 그랬죠? 이 사람은 거기서 자유롭게 나가봐야 다른 백인들의 눈에 띄면 곧 사냥감이 되든지 아니면 또 노예로 끌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쓸모없는 노예니까 죽였겠죠. 그 때 이 노예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뭐예요? 아니, 나 같은 걸 위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 같은 걸 위해 자기의 그 비싼 소유를 털어서 나를 산 사랑의 주인이라면 요기에 붙어 있어야지.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죽는 거예요. 여기에 붙어 있어야지. 죽을 때까지 그 주인을 섬겼다 그래요.
구원은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무서워서, 이거 안 해도 되겠네? 이거는 무서워서 했다는 거 아녜요? 무서워서 그분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도대체 이 쓸모없는 인간을 왜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가에 감격하여 기쁘게 순종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어떤 힘든 일을 할 때 기쁘잖아요? 저희가 일 년에 한 번씩 꼭 중국에 할빈에 선교를 갔는데 거기 가면은 정말 불편해요. 화장실도 문도 없고, 홈을 그냥 쪽 파 놓고 그냥 거기에 일렬로 앉아서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그게 쓸려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쌓여 있어. 거기에. 앞 사람이 먹은 거 다 확인할 수 있어요. 뒤에 앉아 가지고. 그러니까 화장실도 못 가, 잠자리도 불편해. 애들, 조선족 아이들 기숙사에서 자니까. 그런데도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거기서는. 그런 거예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분이 나에게 행하신 걸 알게 되면 뭐가 힘드냐고요? 섬기는 게 즐겁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러잖아요. 비유에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라 그래요. 그게 하늘의 다스림이에요. 그래서 하늘 왕이 섬겨주는 거예요. 우리를. 그걸 우리가 조금씩 배워가는 것입니다. 법 아래에서의 순종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서의 자발적 순종의 자리. 이걸 항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큰일 나는 거로구나 이거. 성도에게서 서서히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변화인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가 뭔지 죄가 뭔지 자신의 처음자리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죄를 짓는 걸 막지 않으시는 거예요. 놔두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사람들 앞에서 쇼하지 마세요. 나는 죄 하나도 안 지어, 나는 너무 경건해, 나는 너무 홀리해. 너는 왜 그 모양이야? 이런 연극좀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다들 집에 돌아갈 때 그냥 우울해 갖고, 저 사람들은 저렇게 그냥 잘들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나? 집에 가면 다 똑같아요. 그 과정 속에서 예수를 아는 거예요. 은혜를 배우면 되는 거예요. 죄 지어봐라, 그리고 그게 진짜 너희들을 기쁘게 해주는지. 그게 진짜 너희들에게 유익을 주는지 한 번 해 봐. 경험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실수 하고 실패 하고 이 과정을 겪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죄가 밀고 가는 사망의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똑똑히 경험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 그 두려움과 공포 같은 것들이 여전히 있는 거예요. 예수 믿자마자 그냥 죽는 날까지 너무너무 행복하고 너무너무 기쁘고, 병원에 한 번 가보셔야 돼. 신경체계 어딘가 하나가 고장 난거예요.
그런 와중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지되는 그 언약, 이해되는 그 언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쏟아부어주는 그 은혜, 이걸 우리가 열린 눈으로 듣다 보면 찬송을 안 할 수 없게 되는 거. 이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며 사는 것을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착하게 도덕과 윤리 잘 지키며 사는 게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선물해주신 그 생명, 예수 안에서 사는 걸 새 생명 안에서 산다. 라고 하는 거예요. 본문 4절 보세요.
롬 6 :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도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죽음과 관계없는, 상관없는 영적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음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건 그 사망의 근거가 되는 죄와 무관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은혜로. 왜 그렇게 은혜로 살려내셔야 한다. 그래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게 뭔지를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8절
갈 2 :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법으로 다시 돌아가면 너희는 그게 죄 짓는 거야. 이야기하는 거죠)
2 :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2 :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새 생명을 가진 자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
2 : 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다.
그걸 믿는 걸 새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단 말에요. 어떤 행위를 내놓는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그걸 믿으면 돼요. 그래서 그 믿는 걸 영생이라고도 하잖아요. 하나님이. 성도는 그렇게 예수가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이예요. 그게 생 생명 가운데 행하는 거예요. 더 이상 자기의 행위로 평가 받는 이들이 아니란 말에요. 그런데 무슨 상을 받으려고 뭘 하겠다고,, 그 자체가 아직 나는 상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자입니다, 라는 자리에서 못 내려온 거예요. 신자의 새 생명은 오르고 올라야 할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정상의 선물인 거예요. 성도는 이미 새 생명이라는 정상에 올라서 그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자들인 것이지 어떻게 그 새 생명이라는 고지에 올라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들이 아닌 거예요.
소요리 문답 1 번 질문 뭐죠? 인생의 목적 답,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기고 누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게 인생의 목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상에 올라가 있는 자로서 그걸 누리다 보면 그렇게 세상 사람들, 율법주의 적 관점에서 보면 열심을 부리는 사람보다 더 수월하고 행복하고 기쁘게 그들보다 더 낫게 살 수 있단 말에요. 그런데 성경을 자꾸 법으로 보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쾌하고, 불안하고 공포스럽고 그런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미 산 정상에 올라가 있는 분들은 그 산 정상에서의 모습은 각기 다를 수 있어요. 어떤 분들은 기뻐 뛰면서 야, 저기 좀 봐, 저 경치 좀 봐, 이 바람 좀 봐, 이러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떤 분들은 아, 이제 다 왔구나. 힘들다 하고 누워서 낮잠 잠깐 자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야, 이제 올라왔으니까 막걸리 한잔 먹고 또 내려가야지 그러고 막걸리 한잔 먹는 분도 있고, 정상에서. 다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그들은 정상을 누리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들이 내가 어떻게 여기를 올라와 있는지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금씩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 나는 내 힘으로 여기 올라온 게 아니라 나를 여기에 올려준 그분, 그분께 감사하고 찬송해야 하는 자구나, 요런 행위로 이렇게 수렴이 되어가는 거지. 여러분이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다고 해서 여기서 전부 예수처럼 성자처럼 그렇게 동일한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이 정상에 올라와 있기에 그게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하여 그 감격스러운 삶을 사는 거예요. 그렇게 지향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얼마나 기쁜 삶인지 경험하고. 야,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히 이렇게 살게 된단 말이야? 소망을 갖게 되고. 그러는 거란 말입니다. 뭐 대단한 거 없단 말에요.
은혜의 복음을 들은 후에 아, 저 사람은 지금 우리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라는 걸 정상으로 힘을 내어 기어 올라가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그러나 하면 행복해지니까 그렇게 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존재 양식이니까 이제 앞으로 너희들은 그렇게 살게 될 거야. 그래서 성경에 그 많은 하라, 하지 말 라의 명령들이 나오는 거지 그걸로 차곡차곡 계산해서 얘는 개털 모자, 얘는 은 면류관, 얘는 금 면류관 이거 아니란 말에요. 어디서 그런 무식한 소리가 있어요? 구원은 예수 안에서 사는 거예요. 믿음 안에서 사는 거예요. 거기서 반드시 찬송이 격발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원의 현실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때요? 그 구원을 홀로 완성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경외감이 들죠? 그래서 그걸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 하는 거예요.
이루라는 건 누리라는 말이지 하나님이 한 90% 해 놨으니까 10%는 너희들이 해라, 이 말이 아녜요. 구원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두려워요, 우리는요. 떨린다니까요. 그 능력이 너무 엄청나서. 불가능한 거잖아요. 성도는 그걸 알아요. 내가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방불한 자로 살게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성도는 알아요. 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성령이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런데 언약은 이루어 졌다니까 야,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완성하셨단다. 언약에서. 그러니까 그런 깨달음과 이해가 두렵고 떨림으로 내게 먼저 주어진, 완성되어 주어진 구원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는 거니까 구원을 이룬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지 이루어 가라는 게 아니란 말에요. 빌립보서 2장 12절 보세요.
빌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누구?) 하나님
(하님이 행하신다며 뭘 이루래요?)
자기의 깊으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이미 행하셨고 우리를 끌고 함께 멍에를 지고, (히브리사람들의 멍에는 항상 두 마리가 같이 지는 거라고 했죠) 예수와 함께 십자가라는 멍에를 지고 광야를 같이 걸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분은 절대 나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절대 나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가는 거. 신앙생활 이예요. 거기서 나오는 진짜 찬송. 진짜 예배, 진짜 헌금, 진짜 봉사, 진짜 섬김 이런 거 하자는 말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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