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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종합

은바리라이프 2014. 10. 3. 13:20

==========차1

물은 아래로 흐르면서 길을 내지만, 인생의 교훈은 거슬러 오르는 생명들의 희생에서 찾아지는 법,

 

나는 1939년 11월 13일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석포리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식민통치 수탈이 심화되던 때, 아버지 차병준 씨와 어머니 박채원 여사의 3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령을 제정, 극심한 인적·물적 수탈을 시작했다. 그리고 1941년에는 미국을 도발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킴으로서 일제의 조선수탈은 더욱 심화되던 무렵이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멀지만 우리 주님이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시고 성육신의 삶을 사신 일을 생각하면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차씨의 내력

내가 태어난 장안면 석포리는 연안 차씨의 집성촌이었다. 마을 내에 문중의 열조를 모신 사당이 있었고, 전체적인 마을 분위기 또한 유교적이고 보수적이었다. 아직 복음이

연안 차씨는 50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종문이다. 황제(皇帝)의 후손인 신갑(辛甲)이 고조선 평양 일토산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로 하고 조명(祖明)이라 명명했다. 고조선 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7남 임(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았다.

이때 몽은 자손 번창을 이유로 왕(王)씨 성(姓)을 또다시 차(車)로 고치고 이름을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신라 태조가 계림(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차무일(車無一)이 시중 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 성을 하사받고 차씨 성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됐다.

차무일의 32세손인 건갑(建甲)이 신라 39대 소성왕 때 승상 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상께서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에 보위에 오른 애장왕을 보필하다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하시니 왕께서 왕례로서 기장 만화동에 예장케 하였다. 이때부터 차능(車陵)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城)이라 불렀다. 또 신위도 소성왕 종묘에 배향되었다.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하여 왕위를 빼앗아 헌덕왕이 되었다.

차승색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덕왕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류(柳)씨로 변성하고 이름을 백(栢 또는 桓)으로, 아들도 숙(淑)으로 고쳐 살았다. 둘째 아들 차 공도(車 恭道)는 강남으로 피신 구성인 왕씨로 복성하였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런 인연으로 車氏는 고려 건국에 큰공을 세웠고 고려조의 차씨는 왕씨와 똑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가성 柳氏 6세인 류 해(柳 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하였으므로 공을 삼한통합벽상이등공신에 봉하고 본성이 車氏이기에 조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차달(車達)이라는 호를 내렸다. 큰 아들 차효전(車孝全)은 통일에 필요한 군량미를 헌납하였기에 개국 수공자로 대광(大匡之伯)의 벼슬이 제수 되었으며 연안군(延安君)에 피봉되었다. 연안에 식읍 천호도 받으시고 옛성 차씨로 복성케 되고 종적을 연안(延安)으로 하니 연안 차씨 득관 시조(得貫 始祖)가 되었고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씨와 류씨로 각각 분성되었다. 차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 많은 문무장상이 대를 이어 배출된 명문 집안이다.

고려 공민왕때 군부판서 차포온(龍山君 車蒲溫)은 고려가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 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고려의 명신이며 차문의 자랑스러운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이시며 고려조(高麗朝)의 간의대부(諫議大夫)이신 운암공 차원부(雲巖公 車原 )께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 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 되시고 차씨 문중도 멸족지화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태조의 질책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에 대한 치제(致祭)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좌찬성 벼슬을 추증했고 그후 문절(文節)이란 시호도 내렸다. 다행히 세조 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 외 5인의 기문과 유신석학 48인의 응제시와 예조참판 하위지의 서문으로 엮은 차원부 설원기(車原 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차씨 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되었다.

차씨 문중에는 세조 13년 이시애난 평정에 공을 세운 강열공 차운혁(車云革), 임진왜란시 평양성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 문장 오산공 차천로(車天輅)와 같은 명조 현조님들이 많이 계셨다.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 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 독립 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외 많은 독립 유공자에게 정부 건국 훈장이 수여 되었으며 이 분들이 차씨 문중을 빛내었다.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많은 종문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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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명연안(延安)

성씨명차씨(車氏)

본관소재지황해남도(黃海南道) 연안군(延安郡)

본관이칭

시조명차효전(車孝全)

[상세내용]

본관 연혁

연안(延安)은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시염성(豉鹽城)이라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해고군(海皐郡)으로 바꾸었다. 고려에서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1310년(충선왕 2)에 연안(延安)으로 고쳤다. 1413년(태종 13)에 연안도호부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연안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안군은 다시 배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1952년 연안군과 배천군으로 다시 나누었다.

 

 

연안차씨세보》에 따르면 문화 류씨(文化 柳氏)와의 상고세계(上古世系)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차건갑(車建甲)은 신라 소성왕 때의 중신(重臣)으로, 왕이 임종할 때 태자(애장왕)에게 전위(傳位)하기가 불안하여 노(老)재상인 그에게 후사를 부탁하였다. 현재도 그의 묘는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萬化里)에 있으며 세칭 ‘차릉(車陵)’으로 불리고 있다. 건갑의 아들 승색(承穡)은 아버지를 이어 애장왕 밑에서 승상으로 보필하였는데, 애장왕의 서숙(庶叔) 언승(彦昇)이 왕과 왕자를 시해하고 왕위(헌덕왕)에 오르자, 전왕의 원수를 갚고자 헌덕왕을 죽일 계획으로 거사하였다가 실패하고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에 은거하였다. 그는 성을 조모의 성을 따라 양씨(楊氏)로 고치려다가 ‘변양위류(變楊爲柳)’ 하여 유씨(柳氏)로 고치고 이름도 색(穡) 외자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 때의 대승(大丞)이다. 그는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을 칠 때 식량을 지원한 공으로 대승에 오르고 차달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또 태조는 두 아들 중 첫째 효전(孝全)에게는 차씨(車氏)로 하게 하고 관적(貫籍)으로 ‘연안’을 주었으며, 둘째 효금(孝金)에게는 유씨(柳氏)를 잇게 하고 ‘문화(文化)’라는 관적을 주었다.

 

이상은 연안차씨 문중에서 전하는 세계(世系)인데, 문화 류씨 측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위키디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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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5~6세가 됐을 무렵, 우리 집은 화성군 장안면을 떠나 10리쯤 떨어진 화성군 팔탄면 하저리 달기터로 이사했다. 새로운 터전이 된 팔탄면은 신작로도 있고 전기도 들어오는 등 장안리에 비해 좀더 개화한 곳이었다. 또한 팔탄면에는 고모님 내외분이 대농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산 바다

확실히 팔탄면은 호수와 개천이 있어 장안면보다 농사 짓기에 지가 농지도 부모님경에

전기 농토가 넓은 평야

 

아버지는 엄하고 강한 분이셨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 온 가족은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골이 당당하고 근력도 센 편이라 동네에서 씨름대회라도 벌어지면 우승을 휩쓸었다.

 

그분은 근면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분이었다. 장남의 치유를 위해 자신의 뜻과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다. 비록 표현은 서툴고 거칠어도 말없이 가족들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분이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듬해, 나는 팔탄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 무렵 하저리 마을에 전도부인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전도부인[傳道婦人]이란 우리나라에 개신교(改新敎)가 전래되던 초기에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교리를 전하는 일을 하던 여자들을 가리킨다. 전도부인을 영어로 'Bible woman'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에서 그들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복음을 전도하고 성경과 신앙서적을 판매하는 일도 했다. 그래서 그들을 권서인(勸書人)이라고도 불렀다.

전도부인은 특히 선교사들이 직접 접근할 수 없는 여성들에 대한 전도를 위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남성금지구역인 안방에서 여성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초기 전도부인들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많은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사자들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신혼여행을 할 때 북한 지역의 의주와 평양을 염두에 두었다. 그곳에서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을 팔면서 전도하는 권서인들을 돌보고 기독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1949년 무렵, 40대의 전도부인은 하저리 달기터의 큰길 가에 있는 창고를 활용해 ‘하저리 월기교회’를 개척했다. 팔탄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교회에 나갔다. 어린 마음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품처럼 평안했다. 그후에 가족들도 교회에 출석하게 됐는데 그 이유는 큰 형님의 정신분열증 때문이었다. 큰형님 한규는 머리가 비상한 천재였다. 초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일어는 물론 영어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큰형님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우울증과 정신분열증 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마도 비범한 재능에 비해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규 형님은 할일이 태산처럼 많은 농가의 장남이라는 지위 탓에 마음 편하게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성품의 형님은 이상과 현실의 커다란 괴리를 홀로 마음에 간직한 채 괴로워하다가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 것이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와서 교회를 세운 전도부인이 이전에 정신병을 앓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회복됐다는 내력을 알게 되자 부모님은 장자를 위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교회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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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형님의 병세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한규 형님은 장성한 후에 가출을 거듭했고 행방불명의 상태가 되기도 했다.

 

부모님과 내가 함께 형님이 훈련하던 경남 김해의 훈련소에 면회를 간 적이 있다. 지금 김해 비행장이 있는 바로 그곳이 당시의 훈련소 자리였다.

교통편이 불편한 때라

기차를 타고 부산 구포역까지 간 다음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자고 김해까지 버스를 타고

1박2일이 걸려 어렵게 훈련소까지 갔다.

 

부대 입구에서 면회를 신청했다. 우리는 면회신청서를 작성해서 접수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형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담당사병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차한규 상병은 지금 면회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 한규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차한규 상병은 지금.. 탈영을 했습니다.”

어처구니 없고 날벼락 같은 대답이었다.

“........”

 

민망하고 미안하고

안 그래도 불같은 성정의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셨다.

“이놈의 자식을!”

아버지는 누구에게 향하는 지 향방 모를 분노를 토하셨다.

 

기차

김해비행장

구포역

여인숙

 

온 가족이 한규형님을 걱정했다. 정신도 온전치 못하고 가진 돈도 없을텐데 이 한겨울에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얼어 죽지나 않았는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많이 화를 냈던 아버지도 날이 갈수록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근심 속에 푹 젖어들었다.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한규 형이 대문을 들어섰다. 발은 동상에 걸렸고 어느덧 제법 자란 머리는 까치집처럼 뻗쳐 있었고, 그 까치집엔 이가 득실득실했다.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온 탕자를 방에 들이고 지성으로 돌보셨다.

 

아버지는 군부대에 아들의 귀향을 알리고 선처를 호소했다. 다행히 군부대 쪽에서 의가사 제대를 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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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몽구 목사의 수난

하저리 월기교회를 개척한 전도부인이 떠나고

20~30여명 교인

후임으로 성결교단에서 정식으로 차몽구 목사를 파송했다. 해군사관학교 군목

 

전도부인의 후임으로 월기교회에 부임한 차목사는 불운하게도 마을에서 심한 핍박을 받았다. 그가 논두렁을 지나는데 동네의 미친 여자가 길을 막아서서 험한 말을 하며 달려든 것이었다. 그때 차목사는 막 산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 차라 성령충만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여자를 붙잡고 안수기도를 하며 축귀를 시도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본 마을 어른들이 오해하고 분개했다. 남자 목사가 길가는 아녀자를 붙들고 희롱했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보면 그렇게 오해할 법도 했다. 여자가 험한 욕설과 함께 달려들자 목사가 그의 양팔을 붙잡고 머리에 안수기도를 한 것인데, 그것이 마치 싫다고 발버둥치는 여자를 남자가 강압적으로 붙잡고 얼굴에 손을 대면서 희롱하는 모습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선 것을 탐탁치않게 여기던 사람들이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대동단결하여 일어섰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교회로 몰려와 차목사를 두들겨팼다. 그때 얼마나 많이 얻어 맞았던지 차목사는 온몸에 멍이 들고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가 됐다. 그는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할 상태였지만 강한 정신력을 발휘해 강대상에 서서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의 몸 상태는 정신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강대상에서 설교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설사를 하고 만 것이다.

마침 그때 마을 사람들이 또 몽둥이를 들고 들이닥쳤다.

“그렇게 혼을 냈는데 알아듣지 못하고 또 설교를 해!”

“아예 요절을 내버리겠다!”

마을 사람들의 서슬에 놀란 차목사는 똥 묻은 팬티를 벗어던지고 냅다 도망을 쳤다. 그는 그 길로 마을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차목사는 능력이 있어 해사 군목으로

훗날 부산온천장 성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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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새벽에 교회의 종을 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여했다.

남자 집사님과 경쟁

 

6.25 피난민 몰려와

교회도 부흥

 

인민군 마을에 잠깐 들렀다 그냥 지나가

 

1950년 6학년 때 성극

<금시계> 주인공

교회학교 교사

복남이 회개시켜

수득이 시계 훔치고 회개

 

27“ 수득이 이태섭 피난민 경기중 경기종합고 서울대

국회의원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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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때 수원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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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규 한규 만규 군규 순규(생존) 선규

 

남영중학교 졸업 후 수원고등학교 진학

자취

고향의 월기교회 치리 목사로 오가시던 반정성결교회 이우호 목사 (지방회장 목사) 댁 6개월간 하숙

이목사댁은 화성시(당시 화성군) 반정동으로 수원시 소재의 수원고와 가까웠다.

 

2학년 때 허경삼 목사댁으로 옮겼다.

허목사님은 고향의 달기터(月基)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수원의 10전투비행단 군목으로 전근해 오셨다. 허목사님댁은 수원시 세류동에 있었다.

 

나는 이우호 목사, 허경삼 목사 두 분의 목회자 집에 하숙을 하면서

일탈하기 쉬운 청소년기를 잘 넘기고 신앙적인 성숙도 이룰 수 있었다.

당시는 몰랐지만 경건한 목사님들의 일상을 접함음으로써 알게 모르게 그분들의 경건한 삶의 모습을 보면서

 

2학년을 마치기 전에 우리 집은 수원의 허경삼 목사댁을 사서 이사를 했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비롯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수원으로의 이사를 결심하셨고,

이를 안 허 목사 사모님이 자신의 집을 사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비록 수원이 화성군과 인접해 있고, 지금처럼 크게 번화한 도회지가 아니었지만 부모님들은 나름대로 자녀교육을 위해 큰 결단을 하신 듯했다.

땅도 1000평쯤 함께 구입해 농사를 지으셨는데, 이 땅은 훗날 수원시가 발전하면서

도시개발에 편입되어 보상을 받기도 했다.

 

허목사님은 우리집의 세입자로

 

 

고3이 되고 대학진학을 앞두었을 때, 허목사님은 공군사관학교를 추천해 주셨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공사는 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공사 시험에 떨어졌다.

 

------------3번오디오

 

나는 수원고 시절 공부를 특출나게 잘 하진 못했지만 별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감수성은 조금 있었던 문학소년이었다.

문예부에 참여해 3학년 때 문예부장을 했고,

교지에 ‘5월의 단비’ ‘뭉게 구름’ 등 낭만적인 제목의 시를 싣기도 했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는 영수학원에

다닐 수 없었다. 또한, 대학에 합격한다고 해도 진학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관학교를 가기로 결심했다. 공사시험을 본 것은 그러한

가정형편에 공군 군목인 허경삼 목사의 영향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러나 함께 시험을 친 수원고와 수원시내의 다른 학교 학생들이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학교에서 내노라하는 우등생들이었지만 공군사관학교의 경쟁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해 수원에서는 단 한 명의 합격생도 내지 못했다. 다들 어렵게 보릿고개를 넘어가던 시절인지라 등록금과 학비가 전혀 들지 않고 미래에 대한 보장도 확실한 사관학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공사 탈락 후 진로를 수정해야 했다. 대학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가정형편이었다. 나는 일단 군대를 다녀오기로 마음 먹었다. 수원고등학교 졸업식 다음날, 나는 곧바로 공군을 지원했다. 사병

 

----------------공군

대학진학에 실패한 나는 군대에 지원했다. 공군사병 지원

20명 선발에 500명이나 몰릴 정도로

나는 행정병으로 뽑혔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들어간 행정병은

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대전에서 훈련을 마치고 진해로 배치됐다.

 

400~500

육군이 수만명을 뽑는 데 비하면 이또한 경쟁률이 높았다.

그러나 나는 공사 시험을 대비해 이미 한번 수험준비를 한 바 있었으므로 경기도 전체에서 5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공군 59기로 대전 항공병학교 2개월간 종합훈련 한 후

마지막 날, 훈련을 수료한 후 모든 훈련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했다. 훈병병을 싣고 갈 군용트럭도 수십대도 함께 도열해 섰다. 수십개의 각 특기별로 분류

각 특기별로 호명을 받은 훈련병들이 트럭을 타고 인원 확인을 한 후엔 곧장 연병장을 떠나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갔다.

함께 2개월간 동고동락을 한 동료들끼리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기약도 없고 얼떨떨한 작별을 했다.

 

부릉부릉.

요란한 시동소리와 함께 훈련병들을 태운 트럭들이 매캐한 연기와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가는 모습은 볼만한 장관이었다.

마지막 20명이 남았다. 그 많던 트럭도 다 떠나고 이제 달랑 1대 남았다. 우리들은 전체 인원의 대부분이 떠나고 소수의 인원만 남았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걸까?

글쎄...

 

주위를 둘러보니 다소 안심이 됐다. 대부분 각 내무반에서 두각을 보이던 엘리트 훈련병들이었다.

훈련병들은 모두마지막최후의 20인은 행정특기병이었다.

우리들은 경남 김해의 훈련소로 이송되어 행정특기훈련을 2개월간 더 받았다.

나중에 보니 그곳에 온 동료들은 소위 ‘빽’도 센 친구들이었다.

 

 

김해의 행정특기훈련을 마치고 우리 20인은 또다시 전국으로 흩어졌다. 나는 진해로 는

그런데 마치 운명의 장난같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처럼 내가 보직을 받고 배치된 곳은 내가 들어가기 간절히 원했던

공군사관학교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허경삼 목사를 또 만난 것이었다.

허목사는 진해 공사의 군목으로 영전해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우리는 피차 깜짝 놀랐다.

나중에 나는 허목사 지도하의 군종이 됐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예비하심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공사의 교수부에 배치받고 공사 교수를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행정병으로 복무하면서 공사생들과 교수들을 위한 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했다.)

내가 공사에 합격했다면 바로 이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공부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내가 낙방한 곳에서 즐겁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공사생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운 마음과 질투의 마음이 교차했다.

내가 공사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똑같은 연령대의

 

한국의 내노라 하는 명문가문은 다 있었다.

나는 공사생들을 보면서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 그대로 좌절하고 도태될 것이아니라 미래에 대한 준비와 투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뜻이 맞는 동료와 함께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영어 공부를 위해 따로 시간을 만들기 어려웠다. 밤 10시 취침시간 이후에는 소등을 해야 했으므로 밤 시간은 활용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어나기로 했다. 한창 잠이 많을 때라 새벽에 잠을 포기하고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은

우라는 새벽에 불빛이 새나갈까봐 근무사무실 창문을 담요로 막고

<영문법 삼위일체>라는 교재를 선정해 새벽에 영어공부를 했다.

문법,번역,

영어에 대한 시기와 열심은 훗날 해외선교에서 영어설교를 할 때 그 댓가를 얻을 수 있었다.

젊은 날 잠을 줄여가며 노력한 댓가가 그처럼 알차게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보람되게

젊은 날, 몸의 소욕을 죽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꿈을 향한 노력은 반드시 아름다운 댓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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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시절

 

반장

 

학예회 연극<원술랑>에서 캐스팅 디렉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수원고 시절 텃세 시달려

유도를 배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도복과 회비 등 비용이 제법 들었으므로 유도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원고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수원고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불량학생들과 갈등이 있었다. 물론 키도 작고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먼저 시비를 걸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 이유라는 것은 단지 시골 촌뜨기 출신의 내가 그들이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건방지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그들과 싸워봐야 일방적으로 얻어터질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잘못했다고 굴복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마침 교내에 유도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입회를 신청했다. 그런데 그것도 수월치 않았다. 들어가는 비용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복비, 입회비에 월 회비까지 있었다. 가정형편상 어렵다는 판단을 한 나는 아쉽지만 유도부 입회를 포기했다. 요즘도 주변에서 유도가 나와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나 또한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므로 그때 유도를 배우지 못한 일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유도에 대해 미련이 남는 것은 남다른 내 하체 힘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지게를 질 수 있을 때부터는 하루에도몇 차례씩 산을 오르내리며 꼴을 베어날랐다. 아버지는 또래에 비해 큰 짐을 지고 오는 나를 보고 기뻐하며 칭찬해 주셨다. 그러다 보니 정도로 키가 는 산에 올라가아쉽풀 지게짐 많이 지고 내려와 칭찬

다리 힘이 좋은 편

여름에 강변의 모래사장에 모여 놀 때, 간단한 놀이로 씨름을 했다.

나는 지게짐을 지면서 하체가 잘 단련되어 있었고, 승부욕도 남달랐으므로

좀처럼지지 않았다. 동년배 중에선 상대가 없었고, 2~3살 연상의 형들도 이길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버지 천하장사

지게에 쌀 2가마씩

마을의 대소사, 특히 ‘분쟁의’ 대소사는 아버지가 나서면 다 해결

떠들썩하게 다투던 사람들이 아버지가 나타나면 슬슬 물러나

아버지르 닮아 나도 통뼈였던 것이다.

---

 

-50대 검도

 

나를 강하게 만들지 않으신 섭리에 감사한다.

나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왜 우리가 공부 못한다고 비웃느냐?”

일촉즉발의 순간 수업종이 땡땡 쳤다. 우리들은 너나없이 서둘러 교실로 뛰어갔다. r

이미 긴장감이 사라졌으므로 다시 시비가 붙지 않고 사태는 유야무야로

지나갔다. 시비를 붙었던 친구들과는 오해를 풀고 잘 지냈다.

 

=======27“

제대 6개월전, 병장 군종

 

허목사 설교

겸손 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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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본부 대방동 보라매

제대 무렵 동기 윤석천이 기독교방송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

이 일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제대해도 갈 곳이 없는데 이 친구는 방송국의 아나운서로 출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약도 오르고, 큰 도전을 던져주었다.

제대 후 그가 견습아나운서로 근무할 때 우리 동료들이 방송국 구경을 가기도 했다.

나도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23세

신문 읽으면서 아나운서 훈련

틈틈이 아나운서

수원시청 공보실 아나운서 시험

 

---

수원시 3만 가정 집집마다 스피커 . 부잣집만 라디오 있을 때

kbs, mbc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선별해서 방송을 내보내면

전파사에서 스피커를 설치해 주었다. 전파사가 부천의 CJ헬로비전처럼 지역유선방송사 역할을 했다.

 

청취료를 내는 집만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는 중간에 아침 점심 저녁에 세 번 각 1시간씩 시간을 사서 시정 뉴스를

보도하는 일이었다.

 

시청의 행사가 있을 때면 사회를 보고

미스 수원선발대회, 미스경기선발대회의 사회를 보기도 했다.

 

<성공한 농촌>이란 제목의 대담프로에서는 초대손님과 대화하는 MC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녹음기를 들고 현장에 나가 취재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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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결혼

 

NO.4 9‘

공군 전역 후에 춘천의 강원도청 건설과에 임시직으로 취업했다. 1년쯤 됐을 무렵 나는 신문에서 내 눈에 확 띄는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농협에서 설립하는 농업협동조합대학교(농협대) 신입생 모집 광고였다. 당시 농업협동조합 중앙회가 발족하고 농촌을 부흥시킬 농업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농협대를 설립한 것이다. 그 농협대에서 제2기 장학생을 뽑는다는 공고였다. 2년제에 학비 전액 무료와 기숙사 제공의 조건이었다. 게다가 졸업생은 농협이나 농촌진흥청에 우선적으로 선발되는 특전이 있었다.

가정형편상 대학 진학의 꿈을 접었던 나는 새삼스럽게 잊고 있었던 그 간절한 소망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어려운 공군사관학교를 무모하게 응시했던 것도 대학 입학 등록금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서둘러 공군에 자원입대 한 것도 일반대학을 지원하거나 재수를 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농협대 장학생 선발공고가 내 꿈을 이루어줄 복음으로 보였다. 나는 미련없이 강원도청을 사직하고 상경하여 농협대에 지원했고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농협대는 지금 고양시 원당동에 있지만 당시에는 건국대학교 내에 있었다. 농협대에는 나처럼 늦깎이로 대학생이 된 친구들도 많았다.

그날은 4월 5일 식목일이라 동기들과 강원도 양구에서 식목 행사를 마치고 느즈막하게 돌아왔다. 우리는 모두 건국대 캠퍼스를 가로질러 학교 근처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 앞에 키가 늘씬하게 크고 긴 생머리를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어둑했지만 제법 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 한 사람이 앞에 가고 있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들, 집에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여자는 어른스럽게, 점잖은 말투로 우리를 훈계했다.

당시 아내는 25세였으므로 대학생들을 동생 취급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와 내 친구들도 역시 그냥 대학생이 아니라 군대까지 다녀온 26세의 예비역들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동생 취급하는 여자에게 장난기가 동해서 계속 말을 걸었다. 특히 우리 중에서 한 친구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지 매우 적극적이었고, 우리는 그의 말에 동조하며 응원을 했다. 마침내 여자가 시답잖은 구애에 짜증이 났는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나를 만나고 싶다면 이번 주 일요일에 화양교회로 오세요.”

화양교회? 내가 가끔씩 가는 교회였다. 친구는 그 주일에 잘 단장하고 00교회로 갔다.

교회에 다녀온 친구에게 우리들은 하회를 문의했다.

“어떻게 됐소? 잘 된거요?”

친구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어려운 발길 한 사람을 본체만체 합디다. 아마도 난 퇴짜인 모양이오. 차형이 한 번 가보시오.”

 

============-4

1“

“그러죠 뭐. 어차피 주일에 교회는 가야 하니까.”

수원에서는 수원성결교회에 출석했지만 농협대에 입학한 후로는 마땅히 정한 교회는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 주변의 이 교회 저 교회를 순례해 왔는데, 00교회는 그 교회들 중 하나였다.

나는 호기심과 함께 승부욕이 발동했다. ‘어떤 처자기에 내 동기의 자존심을 이렇게 짓밟았는가’ 하는 호기심, ‘어디 나도 무시할 것인가’ 하는 승부욕이 함께 일어났다.

그 다음 주일에 00교회에 갔다. 11시 예배를 마치고 그녀를 찾았다. 식목일 저녁에 보았던 긴 생머리에 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도 무시당하면 어떻게 하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구처럼 퇴짜 맞을 가능성

조금 긴장이 됐다.

“어머, 오셨어요?”

다행히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먼저 아는 체를 해주었다. 나는 안심이 됐다. ‘본체만체’ 무시당하진 않았으니 체면은 차렸구나.

차 마시고

대화가 되고

그녀의 집과 기숙사가 가까웠으므로 자연스럽게 만나게

3-4년 데이트

 

수원시청 공보과 아나운서

이듬해 농협대 2학년 졸업반 때 나는 수원시청 공보과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

방송에 나온 시험공고를 수원성결교회의 지인이 보고 나에게 알려줘

교회가 서울시청 근처에 있어

 

내가 이전부터 방송국 아나운서에 꿈이 있는 걸

공군 복무할 때 제대 무렵 윤석천이란 동기가 기독교방송(CBS)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고 우리에게 방송국 구경을 시켜준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큰 도전을 받아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신문기사를 읽는 등 많은 노력을 했었다.

정식공무원은 아니고 비정규 기능직공무원을 뽑는 일이어서인지 경쟁률이 크게 높지는 않았다. 1명 선발에 남녀 대여섯명이 지원했다. 운 좋게도 나는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

졸업반 2학기였으므로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고 곧장 수원시청으로 출근했다.

돌고 돌아 그 꿈을 다시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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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파사가 지금으로 치면 지역유선방송사의 업무를 담당했다.

수원시청에서는 KBS 라디오 방송에 일정시간을 할애해서 뉴스와 몇몇 프로그램을 끼워서 송출했는데, 그 일을 전파사를 통해서 했다. 전파사에서 송출되는 방송은 몇몇 부잣집만 라디오로 들었고, 대부분 스피커를 통해 옥외방송으로 들었다.

전파사는 유선으로 스피커를 설치해 주고 매달

1일 4회

수원시청 공보과에서는 수원시의 소식을 뉴스로 전해

시정 공지사항, 미담을 발굴해 소개

녹음기를 들고 현장을 찾아다니며 미담을 취재해

대담프로에서 출연자와 대담을 나누기도

지금은 목소리가 탁하지만 그때 나는 제법 미성이어서 내 목소리 듣고 당대 최고의 아나운서인 임택근 씨로 오해하기도 했다.

 

수원시 행사의 사회

미스코리아 수원대회나 경기도대회에서 사회

 

데이트 장소는 건대 인근에서 자연스럽게 수원으로 옮겨졌다.

아내는 직장이 을지로 쪽에 있었는데, 직장을 마치면 수원으로 와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내 일이 좀 더 늦게까지

다방이나 식당, 거리에서 라디오나 옥외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수원시청 공보과에서 나가는 방송은 싫든 좋든 전 수원시민이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동사무소를 찾아 우리 가족의 내력이나 가정상황을 조사했다.

나를 결혼 상대자로 여겼는지 )

 

아내 집안 서울

 

 

 

우리는 한 살 차이다. 26살과 27살에 만나 27

 

 

극동방송

합격

 

해외출장 갔던 담당 간부가 만나러

기다리게 해

괘씸죄

틀어버려

부르지 않아

 

수원시청에는 사표

 

68년5월 결혼

6월 부산

보증금과 월세 정도 부모님께 빌려

 

수정성결교회

 

옹벽 하꼬방

나이아가라 폭포

 

양말 팔아

여름이라 안 팔려

 

시장을 돌아보니

‘기레빠시’라고 하는 자투리 천으로 만든 반 버선이 잘 팔리고 있었다.

어디서 사나?

가르쳐 주지 않아

 

몰래 뒤따라

버스

 

기레빠시 천으로 비키니 수영복 만들어

재질이나 색상이

 

부산의 해운대 동래

해수욕장 가게들에

한달 동안

 

직접 판매

 

방 두 칸짜리 전세집

폐결핵

 

---

데이트 을지로 수원

어느날 약속 시간에 늦어

얼굴이 붉어 화내

공사로 늦은 건데 “오지 마라.”

절교

 

편지 “

미안하게 됐다. 우리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좋은 사람 만나 잘 살아라.

다방

나오라.

확인할 것이 있다.

막상 만나 보니 마음이 약해져

다시 만나

 

프로포즈

한강 백사장에 나뭇가지로 낙서를 했다.

 

‘신랑 차군규

신부 고염옥

축 결혼‘

 

감동받은 듯

결혼

 

 

 

 

 

 

-------------5================

문학적 여유 키 작고

 

 

 

=======6

 

수수 꾸밈없고 화장도 하지 않아

생활력

 

폐결핵

같이 식사하지 말고 신체적 접촉도 하지 말라고

그러나 아내는 따르지 않아

 

스트렙토마이신

 

배가 아프다고

자궁외 임신 나팔관에 착상

 

----

결혼하지 말자고

아무 것도 없다고

 

 

=====7

수원 본가에서 올라오라

쥬리아 화장품

 

아버지 땅 주택건축

 

장로 장립

십일조 못내

 

시험들어

차라리 목사가 되는 게 낫겠다

 

38세

여의도 옮겨

 

12촌 누님뻘 순복음 권사

신학교 권유

내가 품었던 마음

 

대조동 순복음신학원 야간

낮에는 건축 밤에는 공부

 

단독주택

잘 팔리지 않아 빚을 지고 어려울 때도

땅을 파는 것보다

 

10채 정도

 

 

4학년 1월

졸업하면 목회를 해야 하는데 뭔가 체험이 있어야 하고 방언도

목회지도 정해야

집 장사도 끝나가고

오산리 기도원

 

성결 장로 삼오건설 토목과장

차집사

교인 열댓명 자신이 예배 인도

현장 식구

주일에 돌아가면서 기도회

기도모임 만들고 운영

 

당시 삼오 3000명

 

삼오건설 호텔 주택단지 개발

베드윈 입주

군인들 막사

일단 막사를 쓰고

 

15개 회사

 

삼오건설이 최대

 

 

================8========

차181

수원 이사 당시 큰 형님은 행방불명 상태

기간이 길어지자 부모님은 체념

큰누님 방규는 결혼해서 두 자녀를 낳았지만 30대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매형도 사망

두 자녀를 아내가

작은 형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졸업 직장 다니다 고혈압으로 사망

막내 여동생 당뇨병으로 사망

-----------부천 이주

쿠웨이트 이후

전도사 부교역자로 들어가

1979년 11월 1일 교구장 발령

1년 반만에 대교구장

1년 만에 교육국장

교육국장 1년쯤 무렵 부천

 

1983년 부천

서울 수원간 거리 멀어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

서울은 집값이 비싸고 부천이 신흥도시 거리도 가깝고 집값도 비싸지 않아

 

원종동에 살면서 부부가

83년 1~ 10월 30일까지 10개월간 산기도

나무가 많은 야산

10개월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목회에 대해 확실하게 응답받고 잘 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도 시키셨다.

 

11월 아침조회 때 조용기 목사가 지교회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차국장, 부천에 가서 지교회를 세워보는 게 어때?"

 

부천은 서울과 가깝고 한창 성장하고 있는 도시였으므로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예, 해보겠습니다. 사실 제가 부천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거 참, 잘 됐구만.”

조용기 목사가 놀랐다. 그때 조목사는 내가 부천으로 이주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모두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것 같다며 축복해 주었다.

내가 지난 10개월 동안 산기도를 할 때 내 기도 제목은 교회개척이 아니라 여의도교회에서 맡은 바 사명을 잘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도 부천에.

당회에서 계획한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성령의 감동

 

내가 부천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지교회 설립계획은 빠르게 결실을 맺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교회 자리를 물색하고 계약을 맺고 시설설비가 완료됐다.

그리고 1983년 11월 18일 창립예배. 부천 송내동에 여의도순복음교회 1호 지교회가 출범을 했다.

부천교구 300여명으로

여의도의 지교회는 부천을 시작으로 인천과 성남에도 거의 동시에 발족했다.

 

 

여의도 교육국장이 지교회를

10년만 출석교인 300명에서 출석교인 6000명, 2만여명의 대형교회로 크게 성장했다.

93년

 

교회건축

`당시 시장이 교회 집사

모든 헌금 십일조는 모두 여의도로

자금을 요청했지만 여의도는 문화일보 때문에 자금여력도 없었다.

성전건축을 위해 별도의 헌금을 모금했다.

---2002년 결별

중동지성전 상의없이 암암리에

욕심

우리 교인 1000명이 옮겨

섭섭한 마음

미국으로

마음 달래기 위해

독립교회

독자적 신학교 유치원

30% 이상이 독립교회

대형교회는 대부분 독립교회

일본도 대부분 독립교회

교단정치 회의

독립교회로

목회와 선교에만 집중

나름대로 멋있는 교회

해외선교로 눈을 돌리고

9개월간 자리 비워

-------

귀국 500명 줄어

자연 감소

교단 총회 불참

예하성 부총회장

인간적으로 정이 들었고 조용기 목사는 스승이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붙이고 있었다.

기하성과 예하성 통합 시기에 탈퇴

교단 법적 싸움 시끄러울 때

교인들이 이해할 지도

당회 소집

교단 탈퇴 하고 독립교회

100% 찬성

안수집사회 권사회도

세례교인 대상 찬반투표

-------------

독립교단 가입

연말정산 처리 문제

2년후

3000 교회 금전적인 문제

박조준 목사비롯한 뜻이 맞는 교회들이 모여

2013년 10월 (사)국제독립교회연합

초대 이사장겸 회장

정치하지 않고 통제

서로 형제처럼

박조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후임

군사정권 외환밀반출

독립교단 설립

장로

우리 교회가 가입하자

대형 교회 가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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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법인 설립 부지를 구입하고 신학교 설립해 신학생들을 길러내는

선교지는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한 함께 존재

대부분 선교지에서 현지인 명의를 빌려 진행하는 방식 많고

현지인들이 문제 일으켜

우리는 20여년동안 문제

평신도 선교

이건호 집사

뉴질랜드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정식 목사

=========9

임태순 새소망교회 기하성 사위

케냐 파송 후 케냐 마챠코스 현지 기하성 교단 땅에 신학교 가건물, 기도원, 식당을 짓고

자금 부족, 여러 가지 문제로 기로에 있을 때

도움 요청

금요예배 은혜

헌금 지원

직속 선교사 정식 선교사 발령 월급을 비롯 전폭적 지원

 

 

급여, 신학교 완공, 정식 신학교 인가

 

마차코스 대성회

 

현지 총회에서 분교

 

인가 나면

정식 비자 나오고 기존 신학교 보다 커질까 두려워

 

미국에 있을 때 보고 받고

 

억울하지만 다 버리고 나와라

멀리 또 하나의 부지를 사라.

 

니무르 지역에 6000평 부지를 사고 신학교도 다시 지어

나이로비에서 1시간 거리

케냐에 2개의 신학교를 지은 셈

 

니무르 대성회

 

케냐 집회 4회

모으기 쉬워

7000~1만

 

실외 집회 스타디움, 학교, 공원, 무대 만들어

 

성도 40~50명 함께

관람 기도

공연 국악 합창 독창

3000만원 들어

 

95년 50대후반

영어 설교

원주민어 통역

 

영어 실력 좋지 않지만 담대하게

성령의 은혜로

 

그 후 성회 때마다 영어로 설교

 

 

홍보

지역 방송 거리마다 포스터

볼펜 선물

 

 

결신자 수백명씩

 

휠체어

귀머거리

 

케냐

낮에 교역자 세미나

 

통성기도

안수 나가떨어져

 

10회 모두 성공적

 

방해는 크게 없어

 

 

쿠웨이트 경험 선교 DNA

교단 탈퇴 후 선교에만 전념할 수 있어

선교사들 붙여주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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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2회

 

이리한자야

슐라웨시에서

빨루 신학교

원래 미국인 선교사들 쓰다가 떠난 곳

규모가 작아 5억 투자 3만평 매입

 

이리한자야 청년 두명이 신학생

둘 중 한 명이 다리가 잘려

폭탄테러

신학교 교실 입구에

소포

열어보니

 

교회 세워주고

집회

 

파파야 뉴기니섬 절반 이리한자야

원시인 개방적

헌당식 겸 집회

 

슐라웨시는 이슬람 세력 강하고 보수적이지만 이리얀지아는 자유로워

 

슐라웨시주의 빨루 집회

30만 인구

 

실내집회만 허용

 

호텔 컨벤션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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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갈릴리 선교회에서 파송

김경열? 집사 전문인 선교사

4만여평 농장

대만인이 50년 임차

여의치 않아세를 받고 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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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통아

 

 

===========10

뉴질랜드

 

 

 

 

남아공

기하성 소속 한인교회 목회

원주민 선교

 

 

멕시코

우리 교회 조은경 전도사가 은퇴한 후 장로

본 교회 방문

 

조 전도사는 자녀가 살고 있던 미국을 방문했다가 친구의 소개로 장로 만났다.

그 장로는 멕시코를 오가며 선교하던 중

 

 

 

멕시코 초청

바울 선교회 장로들과 답사 겸 방문

 

 

센터

중단상태

60~70명 출석 중

 

미국에서 젊은 목사 초빙

 

 

 

 

 

 

 

 

182

부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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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수련원

 

아버지 묘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 일대를 오가던 중 부동산 업자

수련원 부지 소개 5만평

계획 세우지 않으면 부동산 투기로 세금 많이 나와

교회 지으려

허가 나오지 않아

기도원 지으려

 

마스터플랜

교회로 허가

 

청소년 수련원

 

거리가 멀어 장로들 반대

 

20여년동안 120~130억원 정도가 투입

12만평 7억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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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선교사대회

쿠웨이트 삼오교회 교우회

 

 

 

중동선교회

 

 

중동지역 선교사 60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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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200 교회

현재 15개 세울 곳이 없어

중국과 북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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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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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칭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