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46 꿈이 나인가 내가 꿈인가 롬 5:3-5
롬 5장 3-6절
1.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2.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3. 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어 나타난 게 환란이라 그래요. 이 역설이 여러분에게 꼭 이해가 가셔야됩니다. 지금부터 2십 년전 쯤의 일입니다. 어느날 저는 꿈을 꾸었어요.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그 꿈은 지금 떠올려도 아주 감격스러운 그런 꿈입니다.그것은 구름 위 하늘이었어요.구름을 밟고 하얀 옷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마치 눕혀 놓은 삼각김밥의 꼭지점 자리인 듯한 곳에 서계셨고 그뒤로 수많은 천군천사와 성도들이 똑같이 흰옷을 입고 우뢰와 같은 소리로, 그러나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합창을 하는, 저와 함께 합창을하는 그런 꿈이었어요.조도 그들과 함께 힘껏 노래를 했고 그렇게 날이 샜습니다.밤새 꿈속에서 노래만 한거예요. 같이. 그꿈이 얼마나 생생했던지 그들과 함께 밤새 불렀던 그 노래를 꿈에서 깨자마자 다 기억 할수 있었어요.그 노래가 집으로 가자라는 노래입니다.집으로 가자,집으로 가자,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가자.
저는 그 당시에 신앙의 문제로 아주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어려서부터 오랜 세월 교회 문턱을 드나들기는 했는데 제게는 해결되지 않은 그런 질문들이 너무 많았어요.도데체 구원은 뭐고 왜 나는 구원을 받아야 되는거고 죄는 뭐고 은혜는 뭐고 이 역사는 왜 만들어졌는지그리고 이미 구원 받았다고 하는 나는 왜 이 역사를 살아야 되는지?진짜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건지 왜 구원 받은 나에게서 죄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 그리고 그걸 감추고 가리기 위해서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수고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등등, 정말 가슴에 통증을 느낄만큼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이미 지난 수 년동안 다른 종교를 섬렵하고 공부를 한지라 다른 종교의 한계도 다 알아버렸던 때였고 그렇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조차 희미하던 때였어요.그러던 차에 만일 기독교에도 진리가 없다면 내가 이 역사를 계속해서 살아낼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는데 그런 꿈을 꾼 거예요.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밤새 하늘의 교회와 함께 불렀던 그 노래를 옮겨 적기 시작했어요.가사는 모두 제가 고민하던 내용이었고 멜로디는 밤새 제 귀에 들렸던 것이었기 때문에 십 분도 채 안되서 노래가 만들어졌죠.노래가완성되자마자 기타를 집어 들고 수없이 그 노래를 반복해 불렀어요.그리고 극동방송에 나가서 그날 생방송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들이 저에게 전화를 하고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노래를 부를때마다 눈물이 났어요.꿈속에서도 그 노래를 합창하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베게가다주 다 젖어 있었어요.지금도 힘이 빠지고 고단할 때는 저는 의례 기타를 치면서 그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죠. 저는 그때부터 성경을 읽을 때 항상 그 내용을 내가 돌아갈 집과 그집을 완성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던 거 같애요.그러고 나니까 그노래를 부를때마다 더욱 더 눈물이 나더라구요.지금도 제가 그노래를 부를때마다 눈물 짓는 이유는 저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그 사실때문에 감격하여 눈물이 나고 그게 믿겨진다라는 게 또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나고 그것이 감격스러워서 꿈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면서 막 울고 있었던 저와 함께 같이 울어 주었던 그 천상의 교회의 눈물이 생각이 나서도 감격하여 눈물이 납니다.
그들의 눈물은 마치 나도 너처럼 그길을 통과하여 여기에 왔으니까 잘 견디고 잘 참으라는 응원과 격려 같은 거였어요. 저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아무리 외롭고 험하고 좁은 길을 간다고 해도 그길은 나혼자 가는 게 아니라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와 함께 울며 그길을 가시는 예수가 계시고 하늘 가족들의 응원과 눈물이 있다는 게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그리고 그들과 함께 영원히 거할 돌아갈 집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저는 그 집에서 나온 거고 그래서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이 사실 만큼 나그네와 이방인에게 위로가 되는 게 있을까요?나는 잠시후면 그 집으로 돌아 갈거야. 내가 나온 그집, 내가 나왔으므로 확실히 존재하는 그 집. 그 후로 저는 가끔 그때 본 그 꿈이 현실인가 지금 내가 현실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곤 합니다.제 안에 있는 그 믿음이 그 꿈이 현실이고 제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꿈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며칠 전에 다시 꿈을 꾸었어요.도데체 생명이라는 게 무엇일까를 열심히 묵상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제가꿈속에서도 계속 그 생명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더라구요.그러니까 잔 게 아니라 어설프게 비몽사몽간에 꿈을 꾼 거예요.잠시. 그러니까 자기전에 생각했던 그 화두를 계속 꿈속에서도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심지어 저는 욥기 1장을 읽다가 잠들면 꿈속에서 욥기 2장을 보는 꿈을 꾼 적도 있어요.저는 그 꿈속에서 꿈을 꾸기 전에 현실 속에서 생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또다른 나를 객체로 인식을 하고 있었어요.꿈에서 깬 뒤에도 저는 계속해서 생명이라는 화두를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꿈속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있었던 그 ‘나’를, 그것도 나 거든요. 그 ‘나’를 또 객체로 인식을 하고 있더라구요. 도데체 누가 진짜‘나’인가? 헷갈리기 시작했어요.누가 ‘나’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생명에 대해 묵상하던 ‘나’는 누구이고 꿈 속에서 생명에 대해 고민하던 그 ‘나’는 누구냐는거예요.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둘 다 ‘나’가 분명한데 서로를 객체로 인식을 하게 되는 그 현실이 도데체 뭐냐구요.장자의 호정몽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장자가 나비가 되어서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어요.그 순간에는 그는 그냥 나비였습니다.분명 나였는데 나의 현실이 나비예요.그런데 깨어보니까 나비였던 자신은 사라지고 장주, 장자만 남아있는 거예요.장자가 생각합니다.장자가 내 현실인가? 나비가 내 현실인가? 나비가 장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장자인 내가 나비 꿈을 꾼 건가? 잠이 덜 깨서 그런거 같은데 하여튼 그런 고민을 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저는 장자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만일 장자가 나비꿈을꾸다가 와, 이게 나의 현실이네! 근데 그상태로 혼수상태가 되서 계속 나비 꿈만 꾸다가 못일어 났다고 생각해보세요.아니, 그대로 죽었어.그러면 그는 나비로 죽는 겁니까, 아니면 장자로 죽는 겁니까?어떤 게 그의 현실이예요? 이렇게 우리가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의 척도는 고박해야 지각이예요. 지각. 만져지고 볼 수 있고 맛볼수 있는 걸 우리는 지각한다 그러고 그 지각에 의해서 현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정신 분열증이 있는 사람들 한번 생각해보세요.그들은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걸 본다 그러고 다른 이들이 들을 수 없는 걸 듣고 비록 그게 환청이고 환시여도 그들에겐 그게 지각이란 말입니다.다른이들이 만질 수 없는 걸 만진단말입니다.엄연한 그들의 지각이예요. 그거는요. 그게 그들의 현실이란 말예요.그런데 다른이들이 거기에 동의해주지 않기 때문에 다른 다수의 이들이 이들을 미쳤다라고 하는 거지 그들에게 현실이 없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그건 그들의 현실이란 말이예요.
그렇다면 지각이라는 건 객관적인 진리이기 보다는 상대적이며 개별적인, 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한거예요.지각이라는 거는요.그래서 똑같은 상황이나 사건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지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 말은모든 인간들은 그의 지각의 상태과 정도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현실을 살고 있다라는 말이예요.그러므로 그 지각을 누구에게 장악당하고 있는 가에 의해 봐야할 것을 못 보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을 현실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보지 않아도 될 것에서 눈을 돌려서 아무도 볼 수 없는 진짜 현실을 은혜로 볼 수 있는 두 부류로 갈라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있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 그랬고너희는 죄의 종이다 그랬어요.그럼 그들의 지각을 장악하고 있는 건 죄예요, 마귀란 말입니다.성도의 아비는 누구? 하나님이예요.그죠? 그러니까 그 두 부류가 지각하는 현실은 완전히 달라야 되는 거예요.그게 믿음이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 인생과 역사가 묵시속에 완료되어있는, 이미 완료되어있는 ‘나’가 있잖아요? 그‘나’가 꾸는 꿈 같은 것이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그러면 거기에 존재하는 ‘나’, 여기서 꿈속에서 사는 ‘나’, 둘다 존재하고 둘 다 지각을 하고 현실을 사는데 공존할 수 있는 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꿈은 깨면 사라지는 거예요.
옛날에 박찬욱 감독의 ‘다른 해가 꾸는 꿈’이란 영화가 있었는데 해가 뜨면 달이 사라지는 걸 보고 아, 이 달은해가 꾸는 꿈인가보다 . 이렇게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나는데 집으로 가자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려 주던 그 꿈속의 장면이 진짜 현실인 거고 이 역사속에서, 빨리 이 꿈에서 깨기를 기다리며 사는 ‘나’가꿈속의 ‘나’가 맞는 거예요.영원이라는 것이 현실이고 잠시,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가 꿈이란 말입니다. 묵시의꿈인 거예요. 역사는.그래서 사라진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그러나 있는 거예요. 깼음에도 불구하고 꿈은남는단 말입니다. 거기서 지각했던 현실이 남는다니까요. 그래서 둘 다 공존하는데 이건 없다라고 하는 거예요. 사라진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눈이 멀어서 묵시를 지각하지 못하고 역사를 현실로 인식하면서 살고 있는 거죠.묵시와 역사, 각영역에서 ‘나’는 지각을 해요. 둘 다 유효한 지각이예요.그러나 꿈은 곧 깨게 되는 거고 꿈속에서의 지각은 어떤교훈을 남긴 채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기에서의 여러분의 성취와 업적과 공로 이런 거에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꿈 속에서 백만장자 됐었는데 깨고 난 다음에 아쉬워서 아침부터 소주 깐날 있잖아요.그렇게되는 거예요.어마어마한 악몽을 꿨어요.깨보니까 꿈이야. 와! 큰일 날뻔했네, 이런 사람도 있고.그러니까 이속에서 여러분이 어떤 꿈을 살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예요. 사실은. 한 가지 교훈만 배우고 가면 되는 거란 말입니다.여기에서, 각자의 역할 속에서.꿈속에서 막 베트맨도 되고 수퍼맨도 되고 그러잖아요?가끔 벼랑 위도 뛰어다녀 막.
그렇게 이 역사라는 꿈은 어떤 역할이 끝나게 되면 일장춘몽처럼 사라져버리는 거예요.베드로가 그 현실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 후서 3장 7절 보세요.
벧후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 까지만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깨는 날이 있다는 거예요. 이 역사에서 깨는 날이 있다는 거예요. 바로 이게 천상의 ‘나’가 꾸고 있는 꿈으로서의역사의 실체예요. 꿈은 언젠가 깨게 되어 있는 거고 이렇게 꿈이 깨는 순간을 불살라진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이예요. 사라진는 거.없어지는 거. 그렇게 분명 묵시 속에 완료되어서 하늘을 살고 있는 천상의 교회인‘나’가 존재해요. 바울이 봤고, 모세가 봤고, 요한이 본 바로 그 천상의 ‘나’가 , 교회가 존재한다구요. 그 교회는집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하나가 빠지면 교회가 아니예요. 그런데 교회를 봤다라는 건 완전한, 예수를 머리로 한 그 완성된 교회가 천상에 있었다는 거고 그안에 내가 있는 거란 말예요. 그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예요.그래서 열두 사도 , 열두 지파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게 교회란 말이예요. 그래서 12곱하기 12곱하기 천, 완전수 십 사만 사천이 그 위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삼각김밥의 꼭지점 같이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머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서 그분의지체로서 하늘의 아들이 되어있는 ‘나’가 지금 존재하고 해요. 그게 진짜 성도의 현실이예요. 이 꿈에서 깨면 여러분은 그 현실로 바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그렇게 이미 집으로 돌아가 있는 ‘나’가 분명 존재하는데 또다른‘나’가 이 역사라는 꿈을 살고 있으면서 그 집으로 돌아 갈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것, 요걸 뭐라 그럴까요? 소망이라고 해요.꿈에서 점점점점 깰 수록 현실과 가까워 지는 거예요.아 이 악몽에서 빨리 깨야 되는데,아, 맞어 이건 꿈이지 , 나에겐 현실이 있지. 이걸 이 현실이 가까울 수록 꿈이 점점점점 깨질수록 우리는 올바로자각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걸 소망이 깊어진다라고 하는 거예요. 소망이 확실해진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묵시는 영원한 지금, 영원한 현재라 그러죠?
그건 하나님이 창조로 완료시켜놨다는 뜻이예요.그래서 지금이예요.영원한 현재예요. 과거와 미래가 있다라는 건 변화와 성숙과첨가와 자라남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천국은 그런게 없단 말예요. 하나님이 완료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아야 하나님 나라예요.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게 아니라 조금 뭐가 더 필요한 거 같은데 이게 하나님 나라 아니란 말입니다.그게 시간 속에서의 역사란 말입니다.그것이. 하나님 나라는 완료란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지금과 영원한 현재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곳에서는 변화와 첨가를 불허해요. 그래서 하나님 혼자 말씀으로 다 창조해버리는 거란 말예요. 그 자체가 완료예요. 그런데 그 영원한 하늘의 존재인 ‘나’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요한계시록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마에 전부 이름이 써있는데 어린양의 이름이라 그러죠? 그러니가 우리의 이름은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인 이예요.모든 존재의 이름은 다 그리스도인이예요. 그건 이 역사속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다 삭제되는 거예요.부정되는 거예요. 아무리 우리가 그 이름을 갈고 닦고 천상에 길이 남을 것으로 남긴다 하더라도 다 부정되는 거예요.그냥 그리스도인 이예요.
그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 놓고 각자의 이름을 가진 채 여러가지 모양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꿈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 꿈속에서 너의 처음자리는 무엇이며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았을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어떤 것이며 그렇게 죽은 흙으로서의 아담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의 종국이 어떤 것인지를 천상에 있는 ‘나’가 역사와 인생이라는 꿈을 통하여 배우는 거예요.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해요.각기 다른 차원에서.꿈을 꾸고 있는 ‘나’가 현실에 존재하는데 꿈속에서의 내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데 둘다 현실을 자각하고 지각한단 말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야곱등의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역사속으로 내려오지만 그들의 진짜 이름은 그들의이마에 새겨져 있어요.그리스도인 이예요.예수에 의해 구원된 존재. 그리스도가 메시아니까. 너희들은 구원받지 않으면 그냥 흙일 수 밖에 없다가 ‘그리스도인’이 담고 있는 메시지란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인, 그들을 총칭하는 이름이예요.옛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을 총칭하는 이름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역사 속에 내려와서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올라가는데 그 꿈의 결론은 하나로 모아지는 거예요.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어요.
가난한 사람으로 꿈을 꾸고 있고 부자로 꿈을 꾸고 있고,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잘난 사람, 못난 사람,여러가지 종류의 꿈을 꾸고 있는 건데 결론은 하나로 모아져야 되요.예수가 그리스도고 예수가 창조주다! 모든 꿈의 결론이 그걸로 나야되는 거예요.그분이 아니면 나는 죄인중의 괴수일수 밖에없다.예수가 창조주고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분이 창조주다.그래서 그들은 역사라는 꿈속에서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반드시 확인 받고 가야되요.그분이 주고 그분이 창조주다 라는 건 나의 모든 게 부정당하고 부인당하는 거란 말입니다. 자기부정, 자기삭제. 그게 곧 죽음이에요, 육의 죽음.그래야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될 거 아닙니까?
성도는 공히 역사를 살아내면서 아, 나는 하나님이 창조해내셔야만 할 죽은 흙이 맞았구나.그런데 자기의 처음자리를 상당히 오해하며 살고 있었구나,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되는 거예요.그래서 역사는 악몽이어야 맞는 거예요.꿈에서 깨서 아, 그 꿈 진짜 왔다였는데 다시 꿈 꾸어야지 그러고 다시 잠든 적있죠? 근데 꿈이 연결이 안돼.다른 꿈이 나와. 이 꿈이 현실인 것처럼야, 이 꿈속으로 다시 들어가고싶어, 요게 지옥을 사는 사람들이예요.땅이라고 하잖아요. 이 꿈, 역사를. 나는 이땅이 좋아, 다시 꿈꿀래. 이것은 나는 죽을래 라는 뜻이예요. 하나님이살렸더니, 눈을 뜨게 했더니 아니, 나 다시 잘거라니까, 이게 악몽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 지옥을 사는 이들이란 말입니다.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이, 이 꿈이 반드시 악몽이어야 되요.이 세상은 지옥이구나. 이게 도가니가 맞구나, 여기가. 그래야 빨리 깨죠.
그렇게 이 세상에서 내가 자꾸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는 경험을 한단 말예요.살아서 그렇게 계속 죽는 작업이 쉽겠냐고? 어려워요.그땨 누군가가 야, 너 내가 지금 죽여 줄게 그러고 스데반을 둘러싼 그사람들 처럼 짱돌을 들고 찾아 왔다고 생각해보세요.80년 동안 계속 맞아 죽고 있었는데 누가 한 순간에 죽여준다 그래요.그러면 어떻겠어요?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떻겠냐구요?빨리 불질러라! 그게 폴리 캅이었던 거예요.계속 살아서숨쉬며 죽고 있었는데 한 번에 불태워서 죽여버린다니까. 80년 동안 계속 불을 맞고 살았어요. 불시험을 맞고살았는데 한순간에 붙여서 죽여 준다니까 빨리 불붙여라.뭐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런게 아니예요. ‘빨리 꿈깨야돼’ 이걸 아는 사람들은 ‘야, 빨리 찍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쟤들 용서해주세요’. 이 마음이 나오는 거예요.아직 이 꿈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그냥 분노하고 있는 것뿐입니다.그러니까 아직 못 죽어요, 여러분은.죽어도 못 죽어.
성도는 이 역사라는 악몽에서 깨어나게 되었을 때 그의 진짜 집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납니다.그리고는 이런말을 하겠죠. 야 참, 꿈 한번 고약하다. 이 꿈은 역사속 ‘나’가 죽은 흙으로 폭로되는 현장이요 하나님의 은혜를떠난 자들의 바벨탑 건설의 과정과 종국이 펼쳐지는 꿈이란 말예요.그 역사는 결국 멸망이란 말입니다. 이 역사는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의 자기실현 경연장이예요. 거기에는 쉼이 있을 수 없고,사랑은 더더욱 있을 수 없고끝없는 자기증명의 추구와 자기 확장의 분주함만 있기 때문에 그런거예요. 그래서 악몽이예요. 이 역사를 떠나는 성도의 고백은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가 되선 안되는 거예요. ‘마귀로 가득찬 이세상 절대로 다시는 내려가서는 안되는 곳인 걸 알았다라고 ‘가서 말하리라가 되야되요. 천상병님은 뭔가 착각하고 가신 거예요.역사 인식이 아름다움으로 결론이 나는 사람들은 이 역사라는 꿈이 깰 때 그아름다운 끔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요. 반면에 성도는 그 역사와 인생이라는 꿈이 깰 때 다시는 이런 꿈같은삶을 반복할 수 없다는 확실한 교훈을 얻어 가지고 가는 이를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영생에 적합한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영원한 현재 밖에 없는 묵시속의 성도는 에덴 밖, 에덴이 있고 에덴 밖이 또 존재하죠? 이게역사예요. 에덴 밖이라는 역사안으로 들어가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이 사는 그 시간, 그게 역사란 말입니다.영원한 현재 밖에 없는 그 영원이라는영역은그 자체가 완료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상처 미래에 대한 불안 이런 게 전혀 없는 곳이예요. 왜? 현재 완료니까. 과거가 무슨 소용있으며 미래가 왜 나를 불안하게 하느냐구요? 완료인데. 그래서 천국에는 눈물과 아픔이 없는 거예요. 불안이 없는 거예요.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눈물 고통 아픔 이런 게 있는 거란 말입니다.과거와 미래에 묶이니까 말이예요.여러분보고 그렇게 살지말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데, 믿음으로 그거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에 여러분이 지금 완료되어 있다라는 것을 붙드시라는 거예요.그때 잠깐 즐거움이 오는 거예요. 우리에게. 그렇구나,그러기위해선 여러분이이 역사인식,인생인식을 확실하고 올바르게 해야 된다니까요.
시간은 말씀 드린 것처럼 시작과 끝이 있어요.그래서 성경이 태초에 시간의 시작으로 시작해서 아멘 주 예수여어서오시옵소서! 예수 오면 시간이 끊나는 거예요. 시간의 끝으로 끝나는 거예요.그렇게 시간은 시작과 끝이있는 것이므로,시작과 끝이 있다라는 건, 종말이 있다라는 건후패와 썩어짐이 있다라는 거예요. 자라남과 성숙이 결국은 후패와 썩어짐인 거예요.그런 시간의 흐름은 피조물들의 자기 존재성 챙기기, 자기 주체성 챙기기의활동을 운유한 거예요. 시간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니까.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한 거라니까요. 완료인 나라에서 나와서.시간 안으로 들어와 사람이 달리기 시작한 게 달리면서 늙는 거예요. 사람들이요. 그리고 죽음으로 향해서 달리는 거란 말입니다.그러한 시간이, 아니 그 피조물들의 자기 존재성 챙기기의 그 활동, 그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경험하는 게 이 역사라는 꿈이란 말예요. 그래서 에덴에서 아담이 완성된 인간으로 어른으로 창조가 됐죠?사람으로 창조가 됐어요, 어른으로.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묵시 세계는 자라남과 성숙과 변화가 필요없는, 과정이 필요없는 완료의 나라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낳자마자 결혼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힘을 갖는 거란 말입니다.그게 완료의 나라인 거예요. 그런 아담이 에덴 밖으로 나가자마자 애기가 탄생되는 거예요. 가인이라는 애기가. 어른으로, 완료로 창조된 아담이 에덴 밖으로 역사로 나가자마자 이제 부터 이 역사가 묵시의 현실을 설명해야 되니까 시간이라는 흐름이 생겼단 말예요.거기서는 이제 아기로 태어나서 죽는 일이 생겨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기로오는 거예요. 그때부터는.그렇게 아기로 태어나서 변화와 자라남과 써어짐을 경험하는 거예요.완료의 묵시대변화와 자라남과 역사와의 대조인 거예요. 우리가 다음 시간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공부할텐데 사람이 낳은 첫번째 인간이 가인과 아벨이예요.사람이 낳은. 그들이 아기로 태어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묵시에서 이미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역사에 내려오자 시작이 있는 거예요. 애기로 오는 거예요,그래서. 그리고는 죽음,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끝, 종말을 경험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시간이다를 알려 주는거예요.그게 바로 우리의 이야기예요.
시간을 사시며 율법 아래에 오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엄마의 자궁안에서 나온 우리가 시작을 경험한 우리가 점점점 자라나고 변화되고 성숙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썩어서 죽는 거예요.성도는 그걸 살면서 경험한다니까요. 이렇게 죽어야 되는 거구나 원래.원래 하나님이 그냥 완료시켜야 되는, 나는 죽은 흙 이어야 되는 거구나. 그래야 사는 건데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을 살게 되면, 우리의 행위를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죽는 거구나를 우리는 살면서, 살아있는 상태에서 벌써 경험하게 된단 말예요. 그런데 그렇게 멸망으로 향하는시간의 역사 속에서 묵시를 지각하여 역사와 인생을 부정당하며 하늘을 사는 이들이 바로 성도예요. 그래서 그들이 살아내는 이 역사 속의 삶을 성령이 한 마디로, (나를 부정 당하고 부인 당하는 거니까) 한마디로 환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자만 환란을 받는다 그러잖아요?무슨 소리냐구요 이게?왜 성도의 삶이 환란일 수 밖에 없는가?왜 역사는 묵시가 꾸는 악몽일 수 밖에 없는가?그걸 조금 자세히 설명해드리고 다음 시간에 완료해 드릴게요.원래는 하나의 원고 였는데 또 짤랐어요. 그래서 오늘은 조금 일찍 끝날지도 몰라요.
먼저 역사의 등장 인물부터 한번 살펴 볼게요.역사의 등장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죠.성도와 성도의 교훈을돕는 세상이라는 엑스트라예요.인본주의자들은 이것조차도 인정하지 않아요.그들은 뭐냐, 이러는 거예요.뭐긴 뭐예요. 다 죽은 흙이라며요.물론 그 세상이라는 엑스트라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 존재해요.선택 밖의 존재들입니다.그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됨과 자신들의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 열심히 바벨탑을 쌓는 역할을 해요.마치 에서처럼 ‘혼자서도잘해요’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이들이예요.겉으로 볼 때 역사는 마치 그들에의해 세워지고 경륜되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되어있어요. 반드시.그들은 시간과 함께 열심히 달리면서 변화와성숙과 번영을 추구해요.그리고 후패해지고 썩어지고 늙다가 결국 죽습니다.
하늘의 장자권은 야곱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중보자인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진미를 마련하여(예수라는 제물이예요) 죄 없는 짐승의 피로 마련된 제물의 가죽 옷(예수의 보혈이란 말에요 그게 염소 가죽을 입고 가잖아요) 그 옷을 장자의 옷으로 면목없이 걸쳐 입고 거저 받는 게 하늘의 장자권이예요.이게 야곱의 이야기란 말입니다.그런데 성도라는 하늘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입에 문 채로 그 세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려와요. 이 역사 속에. 묵시의 악몽이 시작되는 거죠.
선악과를 입에 문 채 이 땅이라는 꿈을 영원한 현실로 살게 되는 자들을 마귀의 후손이라고 하는 거고 그들이사는 곳을 지옥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이 지옥을 땅, 혹은 땅 아래,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란 말예요.이 꿈이너무 좋아, 난 여기서 살거야.영원히 살 거야, 이게 마귀의 자식들이예요.그러니까 이 역사는 성도에게 있어서지옥으로 지각이 되어야 맞는 거죠?근데 지옥은 항상 근사한 당근으로 위장을 하고 있고 이 악몽속에서의 그묵시는 십자가로 옷을 입고 있어요. 그러니까 분별이 안되는 거예요. 환란으로 옷을 입고 있다니까요. 성도는마치 에덴이라는 묵시 속에서 완벽한 어른으로 창조가 되어서 자라남과 성숙함과 발전해야 하는 부담감에서자유하던 그 아담이 선악과를 입에 물로 에덴 밖으로 나가서 가인과 아벨이라는 아들을 낳고 자라남과 성숙의경험을 하며 (이게 집이 되는 거예요 이제 인간들에게)그런 부담을 가지면서 끝내 이 역사라는 나그네 인생길,참으로 험악한 삶이구나, 이게 이스라엘, 야곱이 고백한 거예요.이스라엘이 바로 이걸 고백하고 죽어야 되는거거든요.나그네 인생길 일백삼십 이년에 참으로, 그 어떤 열조보다 참으로 험악한 삶을 살았네요. 이스라엘이죽기전에 그 고백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 탄식을 뿌리며 떠나는 그런 모습으로 역사라는 꿈을 꾸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삶의 환란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이 지금 악몽으로 인식이 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잘 가고 계시는 거예요.
근데 환란이라는 거는요, (왜 천국에는 환란이 없는지 생각해보시면 되요) 우리의 역사속 자아가 해체될 때, 우리가 감지하게 되는 감정과 인식을 이야기 하는 거죠.나라는 존재가 해체될 때 아픈 걸 우리가 환란이라고 감지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셩경이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환란을 통과 해야된다 라고 반복하여 이야기 하죠?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완전한 자기부인의 상태가 안된다는 증거예요 그것이.자 내가‘없음’입니다.완전한 자기부인이 됐어요. 이게 구원의 상태거든요.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 역사속에서 그런 실력을 사유하게 된다면 환란이 우리에게 없어야 되요.왜, 내가 해체되고 부인된 게 맞는데 왜 그게 환란으로 감지가 되냐구요.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들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다 그랬단 말에요. 왜? 선악과 입에 문 채로 뭔가 겨엄해야 되기 때문에 환란을 당하는 거예요.내가 해체될 때 그게 아프다니까요.놓고 싶지 않아요. 함부로신앙은 그런 모든 걸 다 극복하는 거다, 이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정작 본인에게 닥쳐보세요. 그게 되는가? 아니란 말입니다.
여전히 나라는 육적 자아의 존재성 챙기기와 자아확장이라는 욕망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는요.하나님의 은혜가 왕노릇을 하면서 우리의 육적 자아 챙기기를 방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환란으로 감지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환란이라는 자각이 뭐예요? 환란이 뭐예요? 그게 죄예요.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환란이 없는 거예요. 나는 ‘없는 자’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된 자이기 때문에 내가 해체되고 부인되어도 그게 환란으로 감지가 안된단 말예요.그래서 환란은 죄로 말미암는 거다 하는 거지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도덕 윤리 사회법 이런 거 어긴다고 하나님이 두들겨패는 게 환란이 아니란 말이예요.그런 저급한 유치원 수준에서 이제 벗어나야되요.
자기가 부인되는 것에 대한 몹쓸 적대감이 바로 환란으로 감지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모든 환란은 다 죄 때문이라는 성경의 진술이 맞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밥을 굶은 이의 환란의 정체가 뭐예요?진짜 배가 고파서 아픈 거예요?끼니도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자기에 대한 실망과 타인의 평가가 아픈 거예요. ‘나’죠? 환란의 근거는 ‘나’라니까요.배가 고파, 그것 때문에 환란을 겪는다구요? 여자들은 평생 다이어트한다는데 그럼 그것때문에 환란을 겼는 거예요?먹을 거 못 먹어서? 기쁘게 하죠? 야, 다음날 일어났더니 0.5Kg가 쏙 빠졌어. 와! 그걸 무슨 환란이라 그래요?
환란은 ‘나’라니까요. ‘나’. 사업이 쫄딱 망했습니다. 생활의 규모가 축소됐어요.그에게 감지되는 환란의 정체가뭐냐구요.집이 좁아져서 못 자는 거예요?어디서든 자요. 선교가서는 침낭 하나 맨 바닥에 깔고서도 자잖아요.그게 환란이 아니라 망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절망이란 말예요.환란의 정체는 ‘나’의 자아 구축과 자아실현의 열망에서 기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죄예요.아픈 것도 죄예요.원래 우리의 처음 자리는 ‘없음’입니다. 그 없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가득채워지므로 우리는 비로서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예요.질그릇, 그 흙 안에 보석을 품은 모습이예요. 질그릇이란 단어 자체가 흙으로 만듦이라는 뜻이거든요. 그게 하늘의 피조물들의존재 양식이란 말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입에 물고 있음의 흉내를 내고 있는 우리는 마치 자기 스스로 자신의힘과 노력을 통하여 있음이 된 것처럼 기고만장하여 살아요. 그게 시간의 삶이며 썩어짐의 삶이며 후패하는 삶이며 죽음의 삶인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그 흐름이 없는 시간, 자가발전식의 행위, 이런 것이 없는 영원한 현재만 있는 창조의 나라란 말예요. 그런데 그 창조의 나라는 반드시 ‘나 없음’의 전제가 있어야 하나님의 창조가 드러나죠. ‘나 있음’이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그거는 보수란 말예요. 수선이란 말예요, 그거는요. 창조의 나라는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그걸 인식하고 자각하는 자들이 하늘의 새로운 피조물인거예요.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인간의, 육의 정욕을 쫓아 살지 않는다 그러는 거예요.육의 정욕이란 내가 나의 인간됨을 구축하는 그 행동을 멈춘다는 거지,뭐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고 우리는 늘 도덕과 윤리로 해석하는 게 버릇이 되어있어서 성경을 그따위로밖에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있음의 흉내를 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 가셔서 창조의 나라에 적합한 없음의 존재로 부수어 내시는 작업을 한단 말예요. 그런데 육을 입은 성도는 선악과를 입에 물은 채 이 역사속으로 내려온 성도는,그게 아프단 말입니다. 육이 죽는 경험을 오감을 소유한 채 경험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그래서 환란이예요.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안에서 인간들이 그 창조의 주인으로 행세를 하며 사는데 그걸 창조주를 죽인다라고 하는 거예요. 창조주 살해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를요. 창조주를 창조주 대접하지 않는 게 창조주를 죽이는 거란 말이예요.제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십자가가 뭔지.
그렇게 행세를 하며 사는데 하나님께서 그 첫 창조의 영역으로 들어오셔서 새창조를 이루어내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창세기의 그 첫 창조를 실제로 사시는 거예요.그래서시간 속에서 보면 이 역사 다음에완료된 묵시가 오는 것으로 이렇게 그려지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첫 창조의 삶을 지금 사는거예요.몸으로 사는 거요, 경험하는 거예요.그런데 그 새 창조는 역사의 시작으로 볼 때, 창조가 아니라 여기서이미 있음의 흉내를 내는 게 역사이므로 이걸 부수는 역창조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거예요.역사 속에서 새 창조는. 여러분이 조직신학 책이나, 뭐 게알더스 부스나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책을 보면 역창조, 새 창조 이야기가나오는데 다 필요 없어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어려운 말로 안써도 되요. 한 마디로 인간들이 열심히 세워 놓은 게 부수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묵시속 새 창조의 역사속 창조 모습이예요. 그래서이걸 역창조라고 하는 거예요.
첫 창조의 영역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열심과노력으로 그 창조의 주역 행세를 하면서 살아요.그런데 그 첫 창조와 오버랩 되어있는 새 창조의 영역에서 지금은 올 나라와 지금 이 시대가 오버랩 되어있는 나라라고 성경이이야기 하잖아요. 그 첫 창조와 오버랩 되어 있는 새 창조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체의 자리를 차압당하면서 개체의 자리로 내려가는 과정을 겪는 거예요. 그걸 역창조라고 하고 그 역창조가 묵시속 새창조의 역사속 모습인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역사속 새창조를 경험하면서 그들은 이 역사가 현실이 아니고 묵시가 진짜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믿음으로 보게 되고 이 역사라는 악몽에서 어서어서 깨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게되는 거예요. 성도는 이 역사라는 악몽속에서 서서히 꿈이 깨어나는 자로 사는 거예요.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꿈 깨라 그런다니까요 성도는. 꿈 꾸라그러지 않고.꿈이 점점점점 깨어지면서 그 현실을 바라 보는 걸 소망이라고 그러는 거예요.그래서 환란의 끝이 소망인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오늘 본문이 환란이 인내를 낳는다 그러죠? 자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세요.그렇다면 이 인내가 열심히 인내하고 참아서 훌륭한 신앙인으로 자라야 된다 그런 말이겠어요? 부수어지는 게 환란이라면서요? 이인내가 어떤 인내겠냐구요?어떤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고 견뎌내는 걸 인내라고 하지 않아요.정말 여러분이 겪은 환란이, 시험이 여러분을 오래 참는 자로 맷집 있는 자로 만들어 주던가요?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이 환란을안 겪을 수 있을 까?그거 고민하게 하지 절대 여러분을 맷집있는자로 인내 할 수 있는자로 바꾸어 주지 않아요.그 다음에 또 넘어가요.여러분은 환란을 통과하고 난 뒤에 뭐든지 참을 수 있는자로 지금 변화되셨어요?그렇다고 생각하시는 분, 조금만 기다려보세요.진짜 참을 수 없는 일이 닥칠 때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길길이 뛰게되는지.오늘 본문에 나오는인내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똑같이 나오는데 거기보면 인내가 뭔지 확실히 알수 있을 거예요.계시록 14장 12절 보세요.
계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라
인내가 뭐예요? 어떤 환란이 닥쳐도 나는 예수 밖에는 의지 할 게 없어, 이 믿음을 놓치지 않는 걸 인내라고 해요.
계 14장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고
인내를 이야기하면서 죽음을 이야기 해요.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절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이게 죽음 이잖아요, 육의 죽음)그때까지 절대 죽어도 못 죽게 만들어 버리는 걸 인내라고 그래요.인내는 내가 견뎌내는 게아니라 하나님이 살려두는 거예요. 하나님의 열심이.그걸 인내라고 그래요. 환란이 인내를 낳는다는 건 그말이란 말입니다.이 환란은 절대 너희들이 피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의 육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거라는 거예요. 이걸 인내라 그래요 성경이. 여러분이 참아 내는 게 아니예요.견뎌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계시록 1장 9절 보세요.
계1장 9절
나 여호와는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
이게 인내와 똑같은 단어예요, 참음이란 단어 사도가 자신을 예수의 환란에 동참한 자, 예수의 나라, 즉 예수의통치에 동참한 자, 예수의 통치에 동참하면 그때부터 자기가 원치 않은 길로 끌려 가는 거예요.나라,통치 같은말이란 말입니다.예수의 참음에 동참한 자라그래요.예수의 인내에 동참한 자라 그래요.예수님의 참음이 뭔데요? ‘하나님, 이 잔은 될 수 있으면 내게서 좀 치워주실래요?’ 그 마음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죽는 자리까지 끌고갔단 말예요. 이게 예수의 참음이란 말입니다.그게 우리의 환란이 낳는 인내란 말예요.그것이요. 그러한 성도의 인내에 대한 설명이 가장 잘 설명된 곳이 계시록 2장의 서머나 교회에요. 계시록 2장 8절 보세요.
계 2장 8절
서머나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환란 똑같이 나오죠?)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에게 처음이요 나중, 어제도 계시고 오늘도 계시고 내일도 계시는 분, 이런 말이 계시록에 많이 나오죠? 그게 뭐예요? 그분은 영원한 현재라는 뜻이예요.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예수의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말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믿고 있는 바가 이거라는 거예요.그래서 그 예수가 와서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지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서머나교회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 그래요.서머나교회는 부자였어요.교인들도 다 부자였어요. 그런데 환란과 궁핍이라고 이야기를 하세요.그거와 상관없는 거예요, 그러니까.성도의 환란과 궁핍은. 그 환란이 어떤 환란이라 그래요?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이예요, 그죠?‘블라스파미아’가 악담이예요. 조롱이예요, 모함이예요.
자칭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유대주의를 총칭하는 거예요.인간의 가능성 발효와 증명, 인간의 그 자기 확장이인생과 역사의 목적인양 으스대는 무리를 총칭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 착하게 살았잖아요.율법 지키며 살았잖아요.그게 유대인이예요. 그러니까 모든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 인간들의 그 보편적 자존심을 챙기기위해 살아가는 보편적 모든 아담들이 유대인이예요. 유대주의란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죽었다가 살아나심의 은혜,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있는 서머나교회에게 환란과 궁핍, 핍박을 안겨주더라는 거예요.
그럼 서머나교회가 당한 환란과 핍박이 뭐겠느냐구요? 왜 십자가만 붙들고 있어? 왜 은혜만 이야기 해? 야, 인간들이 뭘 해야되는 거 아니냐? 이게 유대주의란 말에요. 그들이 하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악담과 조롱을 하는 걸 사단의 , 마귀의 회의의 공격이라고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성경이 그걸,,,.
우리 교회 이름이 서머나교회죠? 우리가 지금 어떤 환란을 당하고 있어요? 착함의 옷으로 근사하게 위장을 했던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공격으로 비난 받고 있잖아요.참 바보 같은 사람들이 말이죠. 그들이 이야기하는 인간들의 그 성숙, 그리고 도달해야할 그 지경, 인간들이 상정해 놓은,그것이 진짜 기독교의 목적지라면석가모니가 제일 존경받아야 할 존재 아닙니까? 왕자의 자리를 버려, 산속에 들어가서 가난하게 살았어, 사랑과 자비로 모든 이를 품어 안았어, 욕을 했겠어요? 거짓말을 했겠어요? 뭘 했겠어요?그런데 왜 석가모니를 우상이라 그러죠?이런 앞 뒤가 안 맞는 인간들이 있어요. 세상에? 그 사람보다 더 잘 산 사람이 어디 있냐구요?근데 왜 우상이라 그러냐구요?그럼 자기들은 지금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교회에서.
성경대로 되고 있는 거예요.주님께서 그들에게 뭐라 그래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래요.끝까지 네가 믿는 예수만 믿으라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나는 죽어야 산다, 이걸 놓치지 말라는 거예요.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예요.그래서. 그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거예요.예수님의 은혜와 십자가와 예수 믿는 믿음만 붙들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잘 죽으라는 거예요.죽도록 충성하라라는 건 너는 죽을 건데, 예수님이그러잖아요.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 그런데 내가 말려 줄게가 아니라 장차 받을 고난이 또 있대요.그럼 놔둔다는 뜻이예요, 그냥. 어디까지? 죽는 때까지.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건 죽을 때까지 견뎌라는 뜻이예요.너는 죽어도 못 죽어란 뜻이예요, 그게요. 이걸 인내라 그래요.하나님이 살려 두는 거예요.언제까지? 죽을 때까지.그게 환란이 낳는 인내란 말입니다.내 능력으로 참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그를 붙들고 죽지도 못하게 목적지로 끌고 가는 걸 인내라고 해요.야고보서로 가면 그 인내가 뭔지 더 잘 설명해주고 있어요.야고보서 5장 10절 보세요.
약 5장 10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욥이 무얼 참았어요? 생각해보세요.욥기를 읽어 보셨죠?욥이 뭘 참았어요? 1장, 2장에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만 영광을 받을지어다. 그리고 바로 내 태어난 날을 저주 했어요.그건 뭐예요? 나를 낳게 한 하나님을 저주한 거예요.뭘 참은 거예요?그리고는 친구들과 논쟁하면서도 계속 악악거리죠. 내가 뭘 잘못했냐?나 착하게 살았다. 내가 지나가는 여자보고 음욕을 품은 적이 있니? 재물에대해 욕심을 품은 적이있니? 내가 뭘 잘못했냐? 나 자식새끼들 잔치벌이면 그 머릿수대로 제사 지낸 사람이야.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일을 겪어야 돼?그랬단 말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앞에 나타나서 뭐라 그러냐면 ‘너 내가 창조할 때 어딨었니?’ 라고 물어보세요.’너 지금 네가 창조주 역할을 하려고 그러는데 내가 창조주야.내가 창조할 때 어딨었니? ‘ 를 묻잖아요.몇 장에 걸쳐서 창조의 이야기가 나온단 말입니다. ‘내가 창조주라니까. ‘ 그때 욥이 뭐라 그래요? 잘못했습니다.제가 다시는 말 안할게요.이게 욥의 죽음이예요.이걸 인내라 그래요 성경이. 욥의 인내. 죽을 때 까지 살아있는 거예요.그걸 야고보가 욥의 인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자각하게 될때 까지 그를 지켜내시는 하나님의 그 긍휼과 사랑을 인내라 그래요.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성도의 인내가 아니라 그 환란 속에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 아들을 죽여내시는 하나님의 그 열심이 환란속에서 발견 되어진다가 환란이 인내를 낳는다는 뜻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원래 성도는 환란을 겪을 자격도 없는 자들이예요.원래 없음이니까.환란은 있음만이 겪을 수 있는 거예요.없음이 무슨 환란을 겪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없음에 불과한 자들에게 있음만이 겪을 수 있는 환란을겪게 해주시는 건 그래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겪는다고 하는 거예요.성도만 고난이 뭔지를 알아요.하나님의, 있음의 고난이 뭔지를 성도만 알아요. 다른 건 자기들이 잘못해서 받는 고난이예요. 사도 바울이 그걸 나누어주잖아요.성도만 진짜 그 고난이 뭔지를 알아요.
하나님께서 없음에 불과한 자들에게 있음만이 겪을 수있는 환란을 겪게 해주시는 건 어찌보면 은혜 인거예요.거기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울 수 있어요. 아 이역설이 이해가 가는 사람이 진짜 성도예요. 거기에서 여러분이 겪는 환란 속에서 여러분은 예수가 나와 동행하고 있구나를 알 수 있어요.성도는 그러한 은혜로서의 환란을 통과하면서 그 환란도 과분한 자기의 처음 자리, 자신의 실체를 반드시 알아가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벧전 4장 1절 보세요.
벧전 4장 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어요)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이 말은 육제의 고난을 받으면 죄를 안 짓게 된다는 말이 아니예요 육체의 고난을 받으면 내가 왜 들켰지? 이걸고민하지 절대 죄를 안그쳐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하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예수, 그 앞에서 설명했잖아요 지금. 예수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 그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이가 너희의 죄를 없이 했다라는 뜻이예요 이 말은요.고난을 통과하면 죄를 안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슨 고난을 통과하면 죄를 안 지어요?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 여기 보세요 나오잖아요? 그 후로는 사람이 자기 가치 챙기기의 정욕을 쫓지 않게 되고, 왜? 예수가 내 죄를 없이 해주었으므로 !)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걸 전부 도덕과 윤리로 가르친다니까요. 인간의 가치와 영광을 챙길 수 없는 자리로 끌려 가는 삶, 그게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는 삶인 거예요.그런데 그게 아파요. 힘들어요.그래서 환란입니다. 그래서 고난 입니다.그러니까 인내는 내가 참아내는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지도 못하게 목적지까지 결국 끌고 가셔서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그 기간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인내인 거예요. 그러니까 인내도 결국 내거가 아닌 거예요. 사람들 보고 함부로 참아라 참아라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뭘 참아요? 그 상황이 한번 되어 보세요.본인은 참을 수 있는가?
그렇게 고난이 인내를 낳고 그 인내가 연단을 낳는다고 그러죠? 그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도키메는 사실증거라는 뜻이예요. 증거, 뭐 단단하게 제련을 해서 아주 딴딴하게 된다, 이게 연단이 아니예요.’증거’ 라는 뜻이란 말입니다.환란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여 남게 되는 증거. 불시험을 확 주어서 결국 남게 되는 증거,이것을연단, 도키메라고 합니다. 그 연단의 내용이 베드로전서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벧전 1장 7절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게 연단, 도키메 예요. 시련,믿음의 증거 믿음이 만들어 내는 증거가 있는 거예요.믿음의 도키메, 연단이 불로확 태워버려도(연단하여도 예요 이게.) 불로 확 다 태워버려도 금보다 더 귀하여 에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금을 불로 제련하는 그 제련의 용어가 쓰이고 있단 말입니다. 연단이라는 건 불로 다 태워서 순전한 것만 남겨진 그 상태, 이게 진짜 순전한 것이다, 이게 순전한 진짜다라는 그 증거를 가리키는 거예요.불순물들이 많이 섞여 있는 어떤 것을 불로 확 태워버렸더니 불순물이 다 타고진짜 순전한 것만 남아 있는 고걸 도키메, 증거라고 해요. 연단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히브리서 보면은 믿음은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만드시 불로 확 태워서 환란, ‘증거’를 내게 되어 있어요. 그의 삶속에서. 그런데 그 증거가 뭐겠느냐구요?불로 확 태웠을때 남는 것,그게 고린도전서3장에 나오는 거예요.
고전 3장 10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떤한 것을 시험할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워 놓은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에 타면 해를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성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성전이 바로 여러분이예요, 교회예요.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예수가 십자가로 지으시는 게 교회잖아요.그런데 인간들이 그 터위에 자기들의 공력을 자꾸 보태서 세우는 거예요. 그때 여러가지,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나무 이파리나,여러가지 모양의 공력들이 있는데 이걸 불로 확 태웠을 때 다 탄다는 말이예요.안타는 것 있으면 내가 상줄게 이예요.반어법이란 말예요.안타는 것 있으면 내가 상줄게,다 탄단 말입니다.다 타고 결국 남아야 되는 게 뭐예요?예수라는 터와 예수의 십자가로 지어진 예수라는 집이예요. 이걸 성전이라 그래요.내가 집이다, 내가 성전이다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그리고 내 안에서 너희가 성전이 되는 거라 그랬으니까 예수라는 터 위에 예수라는 집이세워지는 거예요.이게 성전이란 말예요.이게 거룩한 거예요.그런데 너희가 왜 공력으로그 거룩한 걸 더럽히려고 그래? 가 이 고린도전서 3장의 이야기인거예요. 금 같은 공력은 하나님이 칭찬해주나 지푸라기 같은 공력은태워버린다가 아니예요. 무슨 공력이, 금 같은 공력이 하나님 앞에 있을 수가 있냐구요 우리에게? 상급론은 항상 이런데서 출발하는 거예요.이 악당들이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 성전측량의 사건들이 자주 등장 하는 거예요.에스겔 40장, 요한계시록 11장. 왜 성전을 측량하겠어요?진짜 이 성전이 하나님이 준 재료와 식양대로 지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게 측량이라고 하잖아요.무얼로 측량합니까? 누가?인자, 예수. 에스겔서가 성전을 측량하는 에스겔을 인자라고 불러요. 예수의 배역을 하고 있는거예요 에스겔이요. 요한계시록 11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성도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받아 먹고 나서그 말씀에 근거하여 그 자로 성전을 측량한다니까요.말씀 속에서 성전, 하나님의 처소는 어떻게 완료가 된다 그랬어요?예수의 십자가로. 메시아의 공로로. 그런데 그거 아닌 건 ? 다 부수겠다는 거예요.그래서 옛 성전이 AD 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는 거예요.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의 성전이 완전히 파괴 됐을 때, 하나님께서 그 파괴된 자리로 에스겔을 데리고 올라가서 성전을 보여주세요.이 성전 아니고 새 성전, 내가 짓는 새 성전이 진짜 성전이다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성전 측량 사건이란 말입니다.그래서 그 성전 측량을하는데 전부 예수죠? 문, 계단, 휘장 다 예수 잖아요.예수, 성전은 예수다!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계시록 11장1절 보세요.
계 11장 1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계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밖 마당을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 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
42달은 3년 반, 에스겔서 9장에서 3년 반은 역사예요, 역사. 자, 역사 동안에, 42달 동안에 성전 밖은, (성전 밖,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그걸 역사라고 그랬죠?42달이 성전 밖 역사란 말예요) 거기에서 성전 밖은 측량의 대상이 안되요.왜? 그냥 그렇게 살도록, 바벨탑을 쌓도록 보내진 자들이니까.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성전들만 측량을 당하는 거예요.그래서 42달 동안 성전 밖 마당인 역사에게 성전이 짓밟힘을 당한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그게 여러분의 환란의 삶이예요.왜 십자가만 붙들고 있어, 왜 예수만 이야기 해?왜 은혜만 이야기 해?이게 42달동안 여러분이 받을 조롱이며 모욕인 거예요.
그러게 결국 다 부수어지고 깨져서 예수의 은혜와 십자가만 오롯이 남는 거예요.그렇게 측량이 되어 다 예수라는 자아에 맞지 않는 건 다 부서지고 깨어지는 게 우리의 인생이란 말예요. 그래서 예수라는 증거, 그 예수라는연단 ‘도키메’만 남는게 환란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도키메’,연단, 예수, 증거를 낳는다는 말이예요.
여러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면서 그 증거를 가진 첫 번째 인물이아벨로 나와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은. 아벨이 뭐 한 사람이예요? ‘Nothingness’,헛 것,Vanity , 없음으로 와서이 땅에서 죽으신 예수.그게 아벨이예요.그게 증거라니까요.그게 인내가 낳는 연단인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성전 측량이었어요. 열심히 율법과 제사로 성전을 짓고 있는 유대인들, 이스라엘에게오셔서 예수라는 자아를 갖다 낸 거에요.그래놓고 이거 아니다, 부숴라! 삼일 만에 다시 세운다. 계속 그랬거든요.그랬더니 성전 짓던 자들이 예수를 죽였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그래요.이게 요한계시록 10장11장이예요.
두증인이 말씀을 받아 먹고 성전을 측량하다가 맞아 죽죠, 어디서? 바벨론에서. 거기는 예수의 십자가가 선 곳이래요. 예수처럼 여러분도 십자가, 예수 보혈이야기 하다가 맞아 죽어야 되요.그렇게 되어있어요. 그 일이 인생 속에서 안나타나는 사람들은 아직 먼 거예요, 여러분.그렇게 예수의 십자가라는 하늘의 자를 갖고 나를 척량하고 세상을 척량하면서 내 안에서 일차적으로 한 번 죽고, 왜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예수가 아닌 다른 성전을쌓고 있지?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지?내 안에서 먼저 죽고 그 사람을 통하여 또 세상에 맞아 죽어요. 그러니까성도는 두 번 죽어요. 그러니까 환란인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절감하는 ‘나’가 내 안에서 죽는 ‘나’예요. ‘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구나’이게 내 안에서 죽는 ‘나’.그리고 그 은혜의 필연성을 입으로 삶으로 전파하면서 세상에게 무시 당하고 조롱 받으며 죽는 거 이게 세상에서 죽는 ‘나’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쇠도 녹이는 불이 절절 끓는 지옥의 도가니가 맞는거예요.우리는 반드시 그 지옥의 도가니인 세상을 지각해야 되요.공지영의 도가니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광주인화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해서 쓴 소설이죠? 그 책을 보면 첫 장이 무진시의 안개로부터 시작이 되요. 영화도 안개로 부터 시작되요.왜 안개로부터 시작될까요? 인간들은 자신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안개 속에서 무엇이든지 저지를 수 있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실제로 그 안개 속에서 지저분한 일들이 일어나요.장애아들을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장애학교에서 교회 장로이며 쌍동이인 그 학교 교장과 행정실장이 어린 장애아들을 성폭행하고 유린 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심지어 남자아이까지 성폭행을 해서 그 아이가 인권단체에 말을 흘렸더니 그 아이를 골프채로 폭행을 합니다. 그 중 충격을 받은 아이는 기찻길로 나갔다가 기차에치어 죽기도 해요.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그 학교에서 아이를 굶어 죽인 뒤에 야산에 묻기도 했대요.안개 속에서저질러지는 인간들의 행위예요.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인권단체의 고발로 법정에 섭니다.그런데 그들은 그 지역의 실세였고 재력가였어요.모든이들을 매수합니다.변호사를 비롯해서 진단서를 끊을 수 있는 산부인과 의사,피해 학생들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 심지어 검사까지 매수를 해서 결국 무죄로 풀려나요.집행유예로 다 풀려납니다.그 책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힛트를 치면서 다시 그 사건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됐어요.인터넷이 뜨거워졌습니다. 모두 다 그 학교와 교사들을 단죄하는 이야기 뿐이예요.결국 그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얼마전에. 그리고 그 학교의 교사 몇 명이 직위해제를 당했어요.온세상이 검사가 되어서 그들을 고발하더라는 거지요.그래서 공지영은 바로 그 안개 안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을 도가니로 표현 한거예요.쇠도 녹이는 불이 절절절절 끓는 도가니. 도가니탕 말구.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모두 검사가 되어서 그들만 도가니다 라고 하는 그들이 진짜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 자들인 거 같아요.온갖 추잡하고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감추어지고 했던 그 인화학교만 도가니입니까?
안개로 감춰져있던 그 무진시만 도가니인가요?제가 보기에는 그 사건 밖에서 그 사건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해돌을 던지면서 너희 같은 것들이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을 깍아 내렸으므로 너희는 죽어도 싸다 라고 외치는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진짜 도가니예요.거기가 진짜 지옥인 거예요. 인간은 이마만큼 가치있는 존재다라는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진짜 도가니란 말입니다. 그건 난 적어도 너 같은 악당은 아니다를전제 한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검사로 고발을 하는 거 아닙니까? 온갖 악플을 다 달아내는 거 아니예요?우리가 정말 그렇게 괜찮은 인간들이냐구요? 우리가 우리 주위에도 안개가 자욱하게 덮혀서 우리가 하는 일이 그어떤 것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 그때도 검사역할을 할 수 있냐구요 우리가요?
내가 바로 그 안개속 도가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놓치고 있는 사람이 진짜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사람인 거예요.다른 이들의 약점과 잘못을 침소봉대해서 공격을 함으로 해서 나의 순결함과 잘남을 상대적으로 증명해 보고 싶어하는 그 마귀의 거친 숨소리 이게 프로젝션이에요.내 안에 있는 거, 내가 하고 싶어 죽겠는데 누군가가 해버린 거예요.내 안에 있는 것 들키기 싫으니까 그걸 욕을 하는 거예요.
어떤 심리학자가 도데체 왜 이 도가니가 이렇게 크게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이런 소설과 영화가 힛트하는지를 연구해서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뭔줄 아세요? 인간들의 관음증이었어요.온 세상이 나는 안그렇다 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그걸 몰래 숨어서 보고 싶어하더라는 거예요. 이게 마귀들 세상이 아니고 뭡니까?그 인간들의 관음증이 영화와 소설을 힛트시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상황과 사건을 분별하여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까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건데라는 관음증이 이 사건을오히려 더 이슈화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고소합니까? 지옥의 도가니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그러니 이 세상은 빨리깨어나야 할 악몽이 맞는 거예요. 모두가 미쳤어요. 나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남은 죽어도 괜찮은 세상이예요. 모함과 누명과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상대를 죽여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하는 이 세상. 그들의 정체를 폭로해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들을 그들이 어떻게 한다구요? 십자가에 매달아 죽입니다.그렇게 인화학교에 있는 그 사건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힘을 합쳐 고소하며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잘 위장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 아니다! 너희들이 마귀 새끼다 ! 라고 이야기 해보세요.그들이 십자가와 망치 들고 안 찾아 오겠느냐구?이게 성도의 삶이라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예수와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자들은, 은혜 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드시 십자가에 맞아 죽게되어 있어요.정신 차리십쇼 여러분.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도가니예요.그걸 아는 사람만 성도예요. 그 자리에서 누가 누구를 향해 화살을 날릴 수가 있습니까?그 환란은 끝까지, 그렇게 은혜를 이야기 하고 십자가를붙듦으로서 여러분에게 닥치는 환란은 여러분이 죽는 날까지 여러분에게 임할 겁니다.그래서 여러분에게 인내가 있는 거예요. 이미. 여러분은 인내의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목 매달지 않고 살아있는 이게 인내입니다. 그리고그렇게 살다가 결국 예수의 십자가만 꼭 붙드는 걸 연단이라고 하고 그 예수의 십자가가 없는 이세상에서빨리 탈출해야 되겠다, 이 꿈은 빨리 깨야 되겠구나가 소망이예요. 다음 시간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조금 더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