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
1930년대에 등장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발흥이다. 이때 나타나는 신학적인 세 조류는 박형용의 전통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정경옥의 문화 자유주의이다. 외의 두 개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30년대에 등장한다. 이때 신학적인 혼란기였다. 이런 혼란이 왜 역사에 등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3.1운동의 요인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은 국내외적으로 새로운 관심을 일으켰다. 국내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소망을 갖는 기회가 되었고 일본에는 한국에 대한 정책 중 무력통치를 그만두고 소수의 엘리트를 키워서 문화정책을 펴려고 했다. 이때 사범학교를 육성해서 그 학교의 교사들은 일본의 엘리트를 뽑아서 왔다. 사범학교를 통해서 황국신민화를 시켰다. 또 사범학교 출신들은 80%가 일본으로 유학 갔고, 20%는 서구로 갔다. 이 유학생들이 1920년대를 지나면서 들어오기 지적 했다.
박형용, 김재준, 정경옥, 송창근, 채필근, 백낙준, 남궁혁 등이다. 박형용은 프린스톤 출신이다. 김재준은 청산학원 출신인데, 일본에서는 칼 바르트를 유일한 신학자로 볼만큼 바르트를 추종하는 학자였다. 나중에 그는 웨스트민스터로 갔다. 정경옥은 게렛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거기서 그는 Rail교수에게서 배웠는데 문화변혁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송창근은 청산학원 출신이다. 미국에 가서 미국 덴버에서 박사 학위를 마쳤다. 진보주의 사상이었다. 채필근은 일본에서 공부했고 진보주의 사상이었다. 백낙준은 프린스톤에서 MA를 했고 예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등교육과 기독교 세계관에 생을 걸었다. 남궁혁은 프린스톤에서 공부했고 정통주의 노선을 밟았다.
그런데 1930년대 이전에도 자유주의 신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 발견된다. 전성천 박사가 예일대학 논문에서 네 명의 선교사를 언급하면서 언더우드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브라운이라는 미국 내지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의 저술에서 1910년대 미국 북장로교회의 소수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선교를 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네비우스는 15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선교하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헌트, 스코필드 같은 선교사들도 성경의 영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1918년에 있었던 소위 김장호 목사 사건이었다. 그가 총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김장호 목사가 신 신학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1922년에 총회에서 목사를 면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유 교회를 세웠는데, 문제는 그의 자유주의 사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그는 윌리암 커 선교사 밑에서 5년간 조사로 일했는데 그때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윌리암 커 선교사는 미국에서 서명운동이 벌어질 때 서명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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