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누구외 죄니이까?
가난이 누구외 죄니이까? | |||||||||||||||||||||||||
대물림하는 가난, 성경은 어떻게 보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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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어머니와 장애인 여동생과 쪼들린 경제생활은 여전했다. 더구나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아직도 알코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그는 다시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최근 중앙일보와 한국사회보장학회 공동 조사에 따르면 서울 구로·상계·신림동 등 12개 동의 기초생활보호 대상자 중에 59.7%가 가난을 물려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절대빈곤은 2세 교육을 시킬 수 없는 현상을 낳아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온다는 것이 사회복지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사회복지전문가들은 우선 교육을 중심으로 한 복지단체를 많이 만들어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복지 정책만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가난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성경 속의 가난 가난에 대한 문제는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시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시며,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신명기는 가난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 것으로 이스라엘의 저주라고 보기도 한다(신 28:29). 가난이 마치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미화시키는 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결국 가난을 경감시키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잠 10:4). 지혜서들은 가난과 불명예로 이끌어 가는 무절제한 생활들을 피하라고 젊은이들에게 경고한다.
묵시문학과 예언서는 가난을 억압받고 고난받은 자들에 대한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새 시대에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를 통해 공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소유가 공동적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집을 소유했고 또 자신의 재산이 있었다.
미화되지 않는 가난 우리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이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난을 숙명론처럼 받아들여 가난한 자들을 계속 방치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부자가 단지 부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음부에서 고통을 당했다면 (물론 부자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논외하더라도) 이 땅의 부자들은 모두 천국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눅 16:20) 있었다는 사실에서 부자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요함을 오직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이 부자가 음부에 간 이유이다.
결국 재물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쓰지 않은 사실을 큰 죄라는 것이다. 성서 전체를 볼 때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가난을 제외하고는 모두 악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부를 독점하지 않고 분배함으로써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은총의 표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나 성경으로나 가난은 사회적 구조와 함께 개인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사회와 성경이 다르다.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사회복지 차원 요구는 성경과 동일하다. 그러나 성경은 부에 대한 분배에 대해 부요한 자들에게 책임이 더 있다고 말한다.
손봉호 교수(한성대학교 이사장)는 “가난은 게으름과 관계가 있다”며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근검절약을 하지 않는 것은 죄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분명히 자비의 대상이다. 부요한 자들은 분명히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부요에 대한 나눔이 구약에서처럼 시혜적이고 동냥 차원에서 끝내려 한다는 점이다.
대천덕 신부는 그의 <성경 속의 가난>에서 “구약에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자들은 대부분 생색내듯 동냥을 주듯이 하여 가난한 자들을 열등감이나 당혹감으로 빠뜨렸다”며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령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통해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모든 지체는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다는 전제아래 부요한 자나 가난한 자가 같은 존귀와 같은 위엄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성경전체의 가르침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규 교수(고려신학대학원)는 “부요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이 전제되고 그 가운데 청지기로서 흘려보내야 한다”며 “최선의 대안은 가나한 이웃에 대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자족한 소박한 삶의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태도이다”고 말한다.
김영봉 교수(협성대학교)는 “가난 자체는 미화될 수 없지만 유익도 있다”며 “가난은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게 한다”고 말한다. 가난은 이 땅에서 사라져할 것이다. 물질적인 가난은 삶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가난은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나눔에 대한 올바른 실천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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