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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누구외 죄니이까?

은바리라이프 2010. 5. 21. 16:00

가난이 누구외 죄니이까?
대물림하는 가난, 성경은 어떻게 보나
2003년 08월 20일 (수) 00:00:00 양봉식 sunyang@amennews.co,


서울역 광장의 노숙자로 지내는 김광림 씨(39)는 겨울에 고향집으로 갔다가 봄이 되면서 다시 서울역 광장으로 돌아왔다. 추운 겨울을 거리에서 견디는 것도 힘들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고향에서 살아볼 요량으로 집으로 갔지만 집안 사정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병든 어머니와 장애인 여동생과 쪼들린 경제생활은 여전했다. 더구나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아직도 알코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그는 다시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은 도시빈민의 흔한 현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최근 중앙일보와 한국사회보장학회 공동 조사에 따르면 서울 구로·상계·신림동 등 12개 동의 기초생활보호 대상자 중에 59.7%가 가난을 물려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3분의 1 가량(32.7%)이 할아버지 때부터 가난을 물려받았다고 응답해 가난이 대물림하는 현상이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경섭 교수는 “80년대 들어 경제가 안정되면서 계층 상승의 기회가 줄어들어 빈곤이 고착화되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더욱 심해졌다”면서 “이대로 가다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절대빈곤은 2세 교육을 시킬 수 없는 현상을 낳아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온다는 것이 사회복지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사회복지전문가들은 우선 교육을 중심으로 한 복지단체를 많이 만들어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복지 정책만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가난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성경 속의 가난

가난에 대한 문제는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성경의 가난은 여러 가지 형태이다. 모세오경은 가난한 자들과 관련해서는 땅과 관련되어 등장한다. 땅을 소유하지 않고 있고 땅의 소출이 필요한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경제적 구조로 인해 발생한 가난한 자들에 대해 율법을 통해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을 탈취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부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시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시며,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가난에 대해 성경은 미화하지 않는다. 가난은 사회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의 게으름이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가난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 것으로 이스라엘의 저주라고 보기도 한다(신 28:29). 가난이 마치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미화시키는 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결국 가난을 경감시키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혜서인 잠언은 빈곤의 기원을 사람의 게으름과 가난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의 태만의 결과라고 말한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잠 10:4).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잠 20:13).

지혜서들은 가난과 불명예로 이끌어 가는 무절제한 생활들을 피하라고 젊은이들에게 경고한다.
그렇다고 가난에 대한 사회적인 강자들의 책임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와 부요한 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은 의무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묵시문학과 예언서는 가난을 억압받고 고난받은 자들에 대한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새 시대에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은 구약과 달리 가난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같으나 그것을 해결하는 관점이 다르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어떤 소유도 가지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가난에 처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라고 외쳤다. 가난에 대한 분배의 모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일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를 통해 공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소유가 공동적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집을 소유했고 또 자신의 재산이 있었다.

 

미화되지 않는 가난

우리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이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난을 숙명론처럼 받아들여 가난한 자들을 계속 방치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이야기는 가난과 부요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자가 단지 부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음부에서 고통을 당했다면 (물론 부자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논외하더라도) 이 땅의 부자들은 모두 천국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눅 16:20) 있었다는 사실에서 부자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요함을 오직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이 부자가 음부에 간 이유이다.

 

결국 재물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쓰지 않은 사실을 큰 죄라는 것이다. 성서 전체를 볼 때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가난을 제외하고는 모두 악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부를 독점하지 않고 분배함으로써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은총의 표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나 성경으로나 가난은 사회적 구조와 함께 개인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사회와 성경이 다르다.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사회복지 차원 요구는 성경과 동일하다. 그러나 성경은 부에 대한 분배에 대해 부요한 자들에게 책임이 더 있다고 말한다.

 

손봉호 교수(한성대학교 이사장)는 “가난은 게으름과 관계가 있다”며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근검절약을 하지 않는 것은 죄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분명히 자비의 대상이다. 부요한 자들은 분명히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부요에 대한 나눔이 구약에서처럼 시혜적이고 동냥 차원에서 끝내려 한다는 점이다.

 

대천덕 신부는 그의 <성경 속의 가난>에서 “구약에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자들은 대부분 생색내듯 동냥을 주듯이 하여 가난한 자들을 열등감이나 당혹감으로 빠뜨렸다”며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령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통해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모든 지체는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다는 전제아래 부요한 자나 가난한 자가 같은 존귀와 같은 위엄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성경전체의 가르침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규 교수(고려신학대학원)는 “부요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이 전제되고 그 가운데 청지기로서 흘려보내야 한다”며 “최선의 대안은 가나한 이웃에 대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자족한 소박한 삶의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태도이다”고 말한다.

 

김영봉 교수(협성대학교)는 “가난 자체는 미화될 수 없지만 유익도 있다”며 “가난은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게 한다”고 말한다.

가난은 이 땅에서 사라져할 것이다. 물질적인 가난은 삶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가난은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나눔에 대한 올바른 실천이 절실한 때이다.

아굴의 기도에서 배운다.

전광식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잠언 30:7~9절에는 아굴의 기도가 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이다. 아굴은 어떤 사건을 두고 하는 일시적인 기도가 아닌 일생을 두고 하는 기도제목이었다. 또한 자기의 모습과 삶에 대한 적나라한 인식의 고백 위에서 나온 매우 진솔한 기도였으며 그 기도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좇고 하나님 중심적 기도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아굴은 부요와 가난의 중간에 서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향한 아가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난과 부요의 중간에 있으려는 아굴의 자세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 소유관에서는 인간 자신이나 재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하다. 물론 재물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만 그 소유성과 목적성이 근본적인 것도 궁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궁극적인 귀착지이다. 즉 재물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재물이 있고 하나님을 위해 재물이 있는 것이다.

아굴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경외할까 하는 영적인 문제인 것이다.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도적질 하지 않고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가난과 청빈이 경건에 유익이 되다면 가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른다 하지 않고 재물을 우상시 하지 않으며 도리어 부를 이웃 사랑과 선한 봉사를 위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기고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죄악과 심성을 잘 인지하고 자기고백적으로 고하고 있다.

아굴의 인간이 부요해지면 남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에게 마저 대항하여 바벨탑의 우상으로 쌓을 수 있는 교만성이 있고, 또 역으로 가난해지면 재물에 대한 유혹에 빠지고 비굴해 질 수 있는 인간의 연약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재물의 중용이나 인간 자신의 비중을 말하기 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성을 제일로 내세우고 있다.

아굴의 소유원리는 중용의 미를 말한 것이 아니라 경건미(敬虔美)를 말한 것이다. 재물에 대한 인간의 심성을 아는 아굴에게는 소유적 중용이 바로 경건성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경건성을 위해 소유에서의 중용이 유익하다는 점이다. 말하지만 아굴은 ‘돈있음’과 ‘돈없음’이 중요한 것도 중심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섬김’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재물이나 소유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것을 가진 이의 의식과 마음 자세가 중요함을 말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부하기도 하고 가난할 수 있는데 이렇든 저렇든 ‘하나님 섬김’의 자세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이런 근본이 되든 영적인 일에 소유에 있어서의 양극단이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