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2. 진리- 믿음의 내용(그리스도)의 실재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22:15

2. 진리- 믿음의 내용(그리스도)의 실재

 

디모데전서 2장 4절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다. 디모데전, 후서와 디도서의 중요한 요점들 중 첫째는 믿음,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성이고 둘째는 믿음, 즉 믿음의 내용(그리스도)의 실재다.

‘진리’라는 문제는 간단하고도 복잡한 문제다. 특별히 종교 안에서는 교리를 포함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지동설이 교리에 맞지 않다며 파문을 했지만 수백 년이 지난 후에 교황청에서는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했던 일이 있었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대로 그것은 과학적인 문제니까 언젠가는 밝혀질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은 밝혀질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런데도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면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했던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했던가? 성경 안에서 ‘진리(참 이치)’의 궁극적인 의미는 ‘믿음의 내용이신 그리스도’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격화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 원하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참을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것 때문에 전파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하였다(딤전2:7). 그래서 옳게 전하는 자가 되기를 원했고 디모데에게도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하였다(딤후2:15). 진리를 옳게 분별해서 그것을 가감 없이 전하는 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진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기독교 이천 년사에서 진리라는 문제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된 경우가 많다. 지금도 종교 안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진리를 수호한다고 하고 진리를 지킨다고도 하며 진리를 배반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말들은 전부 종교 안에서 나온 말들이다. 특별히 기독교 안에는 그런 말이 많다.

 

2. 진리는 그리스도 자신이심

진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가. 진리의 의미

진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사실이나 진실을 말할 때 진리라는 말을 썼다(신17:4, 왕상10:6). 물은 흘러간다. 이것은 사실이다. “물이 흐른다.”는 말은 사실이고 진리이지만 “물이 올라간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래서 어떤 사실을 말할 때 진리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은 밝혀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지구가 넓적하다고 해도 결국은 둥글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떠나면 종교적으로 어느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며 싸우는 것이다.

둘째로 속성으로서의 도덕적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은 진실하다.’는 전제에서 나왔다. 시편 108편 4절에는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율법의 속성에 대해서도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시119:51).”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속성 자체가 도덕적으로 진실하고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 앞에 서면 진실해진다. 선악을 아는 지식 때문에 거짓되었지만 십자가 앞에 서면 지식이 다 소용이 없게 된다. 그래서 진실해지는 것이다. 사형수가 사형을 받기 직전에는 진실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는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는 진실이다.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과 만나질 수 있다. 다른 것으로는 안된다. 교리를 옳게 믿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나. 진리가 인격화되었음

1) 예수는 인격화된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진리가 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인격화된 진리다. 이것은 요한의 서신들, 특별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특이한 표현이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여 진리가 왔다고 하였다. 사물의 진리는 그냥 있는 것이지 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것은 만고이전부터 있었던 진리다. 그런데 요한은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격화된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왔는데 은혜와 진리라는 것이 그리스도로 인격화되어 온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속성이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누리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없는 것이다. 병이 고쳐진 것도 은혜고 어려움에서 해방된 것도 은혜이지만 그런 것들은 지나고 나면 없어지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누리는 것은 영원한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누리는 것 이상의 은혜는 없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였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의 진실을 우리가 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내 것으로 누리는 것보다 큰 은혜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누릴 수 있도록 오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그분 자신은 진리다. 이것은 사물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2) 성령은 진리의 영임

성령은 귀신이나 유령 같은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다. 진리의 영은 진실의 영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진실한 영이다. 요한복음 14장 7절에는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저를 알지 못하나 너희는 아나니”라고 하셨다. 세상은 모르지만 “너희는 나를 알았으니까 안다.”고 하신 것이다.

사실, 진실, 하나님의 속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인격화되었다. 그래서 인격화된 진리가 우리에게 왔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고 했던 그 진실하신 하나님이 인격화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사물에 대한 진리는 말할 수 있지만 속성으로서의 진리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는 훌륭하고 놀라운 분들이 많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라 진실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따질 때다. 늘 말씀드리지만 나는 왜 예수를 따르는가? 그가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다른 사람보다 더 심오해서도 아니고 더 놀라운 분이라서도 아니다. 옛날에는 능력 때문에 따랐지만 지금은 오직 그가 진실하기 때문에, 그가 진리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따른다. 진리이기 때문에 따른다고 하면 이상하게 교리화되거나 지식화될 수 있다. 내가 진실하기 때문에 그를 따른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인격화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기독교 안에는 진리라는 말이 많다. 진리를 따른다고 하고 진리를 믿는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나온 전도용 책자에는 진리라는 책이 있다. 그들과 말을 해 보면 자기들이 진리라고 하고 자기들이 진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진리라는 말은 굉장히 왜곡되기 쉬운 말이다. 하기도 쉽고 왜곡되기도 쉽고 잘못되기도 쉬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진리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말을 해 놓으면 잘못 하면 한참 나가다가 다른 것이 되고 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라고 하셨지만 내가 “그분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몇 대 지나다 보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진실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따른다.”고 한다.

 

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경계함

1)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은 자들

디모데후서 2장 18절에는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다.”고 하였다.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지게 했다는 것이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함으로써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진리의 목표, 말씀을 전할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표를 잃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길로 가 버린 것이다.

부활이 없다고 하거나 이미 지나갔다고 하거나 앞으로 올 것이라고 함으로써 혼란을 주면 그로 말미암아 믿음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무너진다. 지난 집회에서 마지막에 말씀드린대로 부활은 체험의 문제다. 체험하지 않은 부활에 관한 지식들은 이론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생명을 살릴 수 없다.

부활이 지나갔다고도 할 수 있고 앞으로 온다고 할 수도 있다.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론으로는 다 맞다. 어떤 이론도 다 논리가 있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이론 자체로는 다 맞다. 논문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다. 그런 사실이 있느냐 없느냐 보다 논리가 맞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과학을 하려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를 따지기 보다는 논리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은 자들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생명은 무엇인가? 생명은 진실하다. 개의 생명도 진실하고 소의 생명도 진실하다. 모든 생명이 다 진실하다. 진실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진실이다. 그래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진실이 있으면 믿음이 생긴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주니까 은행에 대해서 믿음이 생긴다. 어떤 사람에 나에게 신실하면 그 사람에 대해 믿음이 생긴다. 강아지로 태어난 것을 보면 그 강아지가 개가 된다는 믿음이 생긴다. 강아지가 개가 되는 것은 생명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진실하다.

진실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식이다. 지식은 이렇게 만들 수도 있고 저렇게 만들 수도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말은 그 말대로는 맞다. 공산주의에 맞추어서 논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디에 기점을 두고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논리가 나올 수도 있고 저런 논리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논리만 맞으면 그대로 따라간다. 그래서 지식 안에서, 지식 때문에 가짜가 생기는 것이지 생명 안에는 가짜가 없다. 우리 몸에 가짜가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암이 된다. 암이라는 것은 진짜 안에 가짜가 들어온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이 들어온 것이 암이다. 가짜가 들어온 것이다. 생명 안에는 진실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병은 생명이 아닌 것이다.

생명은 진실하다. 그래서 나는 생명을 지키고 싶은 것이고 끝까지 생명을 갖고 싶은 것이며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대구교회의 특색이다. 대구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데도 진리가 있고 다 있다. 그런데 방법이 다 다르다. 그러나 생명은 방법이 없다. 개로 태어난 생명은 개로 산다. 그것이 방법이다.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마다 각각 자기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생명 안에는 생명의 내율이 있어서 외부의 다른 법이 필요하지 않다.

구약은 무엇이고 신약은 무엇인가? 구약은 나의 생명과 밖에서 요구하는 생명이 다르다. 나의 생명의 법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다르다. 그래서 나의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구약은 실패했다. 그래서 신약을 약속하실 때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셨다(램31:33). 어떤 법을 주거나 지식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밖에는 할 수 없는 약속이다. 생명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생명이 되겠는가?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법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사람 속에 오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처음부터 방법을 찾았다. 사탄이 와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하더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녕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했고 사탄은 “너는 왜 흙으로 지어져서 숨이 코에 붙어 있느냐? 나를 봐라. 나는 이렇게 자유자가 아니냐!”고 꾀었을 것이다. 아담이 보니까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라고 물었고,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이것은 방법을 물은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두고 생명의 관계를 갖기를 원하셨는데 아담은 방법을 택한 것이다. 엄마와 태아가 한 핏줄로 돌듯이 하나님은 사람과 한 핏줄로 돌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생명나무다. 하나님으로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 살도록 사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지식이다. 방법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아담은 선악을 알기만 하면 하나님 같이 될 줄 알았다. 탯줄이 없어도, 탯줄에서 피가 들어오지 않아도 다른 피를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탯줄에서 피를 받으려면 항상 엄마 뱃속에 있어야 하니까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아는 술을 먹고 싶지 않아도 산모가 술을 마시면 태아도 할 수 없이 술을 먹어야 한다. 태아는 담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산모가 담배를 배우면 태아도 할 수 없이 니코틴을 흡수해야 한다. 태아는 술도 니코틴도 흡수하고 싶지 않은데 엄마 뱃속에 있으니까 아무리 싫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불편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도 그와 같다. 항상 하나님의 공급으로, 하나님으로만 살아야 한다. 자기 자유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아담은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하게 부딪치는 문제가 이 문제다. 무슨 방법이 없느냐는 것이다. 방법이 있으면 쉬울 텐데 이상하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나서도 대부분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면 율법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흐름 안에서 함께 흐름을 가져서 생명이 흘러가는대로 살자는 것이다.

C.C.C에서 나를 나가라고 한 것은 이런 흐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이 필요해서 나를 나오게 하신 것 같다. C.C.C에서 나와서 나는 어떤 방법도 택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온 사람들이 있으니 알겠지만 나는 방법을 찾지 않았다. 방법을 찾았다면 좋은 방법, 쉬운 방법이 많았을 것이다. 방법으로 하면 쉽고 빠르다. 그렇지만 나는 방법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늦었던 것이다. 1우리가 지금은 30년이 넘어서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10년까지는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왜 그랬던가? 그것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불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전도할 수 있는 방법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법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던 것이고 숫자가 불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방법은 누가 만든 것인가? 방법은 처음에 사탄이 사람에게 준 것이다. 방법만 있다면 사람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방법만 있다면 산모가 마시는 알콜을 마시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방법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뱃속에서 천지분간을 못하고 알콜에 취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태아는 얼마나 방법이 필요하겠는가! 태아가 따로 살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알콜을 마시지 않아도 되고 니코틴을 흡수하지 않아도 되는데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만일 태아가 방법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태아에게는 방법이 없다. 엄마의 탯줄에서 피를 받아먹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교리라는 것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공급만으로 산다면 교리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왜 교리가 생겼는가? 무엇인가 먼저 알아야 하고 무엇인가 해야겠는데 길이 없으니까 그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에게 어디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라고 하셨으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라는 말이 없었다. 다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여야 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멈추면 그들도 멈춰야 했던 것이다. 3일은 멈추고 3일은 움직이면 좋겠는데 3일을 멈출지 일주일을 멈출지 한 달을 멈출지 모르니까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답답했을 것이다. 그들은 방법의 세계에서만 살다가 방법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 왔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렇지만 광야에 나와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아무 방법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태중에 있는 아기처럼 구름기둥이 뜨면 그들도 움직이고 구름기둥이 앉으면 그들도 멈추어야 했다.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의 방법을 없애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세상에서는 방법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방법이 없으면 종교도 안되고 선교도 안된다. 아무것도 안된다. 그런데 그 방법을 없앴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후사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언제 주겠다는 말은 없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주겠다고 하셨으면 쉬웠을 것이다. 날짜만 정해졌다면, 기한만 있다면 10년이든 20년이든 상관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정해진 날짜가 없었다. 아브라함은 10년을 기다렸지만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대로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것이 하갈과 결혼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소용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삭을 낳을 때까지 그에게서 방법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에게서 완전히 방법이 없어졌을 때 이삭을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방법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법이 있으면 안된다. 사람의 방법과 하나님의 계획은 다르다. 방법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의 방법만 있어야지 나의 하나님도 방법이 있으면 안된다. 아브라함은 아기를 낳을 방법이 없어졌다. 아브라함은 늙었고 사라도 늙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때 이삭을 주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아담은 방법을 찾아갔으니까 아담을 끝내려면 방법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가는 것은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십자가에서 천만 번을 죽어도 방법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방법에서 제도도 나왔고 교리도 나왔고 종교적인 실행들이 나왔다. 교리라는 것은 지도와 같다. 천국에 가는 지도, 예수를 아는 지도, 성경을 아는 지도, 이것이 교리다. 그런 지도가 있으면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원치 않으신다. 방법을 만들어 놓으면 그 방법 때문에 왜곡되고 말기 때문이다.

방법은 목표를 잃어 버리게 만든다. 교리나 제도는 왜 만들어 놓았는가? 그것은 방법을 찾다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교리나 제도가 없으면 교회가 보존이 안될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교회를 보존하려면 제도가 있어야 하고 진리를 수호하려면 교리가 있어야 한다.

가톨릭은 제도를 우선적으로 선택했고 개신교는 교리를 우선적으로 선택했다. 이것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다. 가톨릭에서는 교리는 바뀔 수 있지만 제도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 제도가 가톨릭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 가는 사람들 중에는 그 제도를 보고 가는 사람이 많다. 그 제도가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그 제도만 보고 가톨릭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부나 수녀가 한 번 되면 평생이 보장된다. 수녀들은 월급이 얼마 되지 않지만 돈을 쓸 일이 없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마지막까지 가톨릭에서 다 보장을 해 준다. 그 사람이 잘못을 하거나 범죄를 해도 내쫒지 않고 끝까지 보장한다. 그만큼 제도가 완벽하다. 반면에 개신교의 생명은 교리다. 그래서 교리가 조금만 달라도 갈라지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교리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한다. 옳으니 그르니 하고, 보수니 진보니 하며 싸우는 것은 다 교리 때문이다. 제도도 교리도 다 교회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오로지 성령이 인도하신다. 교회는 주님 자신의 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지키실 것이고 성령이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실제로는 막연하다. 방법으로 살던 사람은 예수님이 어떻게 교회를 지켜 주시는지, 성령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맨날 성령 충만을 부르짖지만 성령이 교회를 지켜 주시는데 무엇 때문에 교리를 만들고 제도를 세워 놓았겠는가? 불안하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처음 출발할 때 사람들은 “제도도 없고 교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다 말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십여 년이 흐른 뒤에는 “그러면 이 목사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전부 이 목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 목사가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그것은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떤 제도가 세워지거나 교리가 있으면 그 교리와 제도를 따르면 되기 때문에 내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 그것 때문에 회의적인 사람도 많고 그것 때문에 오지 않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는다. 그들에게 나는 “그것은 내가 알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생명이면 당연히 살아남을 것이고 이것이 주님의 몸이면 당연히 주님이 지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생명이 아니면 당연히 없어져야지 생명이 아닌 것이 남아 있으면 공해다.

왜 우리가 공해에 시달리고 있는가? 그것은 썩어지지 않는 물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공해가 없었다.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플라스틱이 만들어져서 백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번 만들어 놓은 것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쌓인다. 교리로 굳게 교회를 만들어 놓으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있다. 나도 옛날에는 교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박태선 씨의 천년성과 문선명 씨의 통일교가 다른 점은 교리가 없고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통일교에는 확고한 교리가 있지만 천년성에는 교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교리가 없는 박태선 씨의 천년성은 곧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일교에는 한 권의 책이 있는데 그것이 교리와 마찬가지여서 확고하게 논리가 서 있다. 그러니까 문선명 씨가 없어도 그것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교리가 이렇게 중요하다. 교리가 없으면 교회가 보존이 되지 않는다.

초대교회 이후의 교회는 점점 교리화 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이 되면서 제도화 되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교회가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은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잘 보존이 되었다. 그러나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 되고 말았다. 생명에서 떠났으니까, 그리스도가 없어도 되니까 진리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없어도 전혀 상관이 없게 되고 말았다. 지금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있고 없고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되었다. 기독교의 문화와 전통이 이미 전 사회에 퍼졌기 때문에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보다 기독교 문화가 중요하다. 그것은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은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보존되었지만 목표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는 것이다.

방법을 선택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방법을 선택하는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지하려니까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세상 일은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몸은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육과 혼과 영의 구분이다. C.C.C에 있을 때 나는 워치만 니의 말씀을 듣고 얼마 후에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워치만 니가 20대에 폐결핵에 걸려서 죽기 직전이 되었을 때 쓴 책이다. 그가 죽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남겨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이 책을 썼던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기독교계를 보니까 육과 영과 혼이 혼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흥회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분위기가 고조되니까 울음이 터지기도 하고 성령충만을 받기도 하지만 그분은 그것이 혼의 일이지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책을 보고 나니까 내가 해 왔던 교회를 위한다고 했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던 모든 일들이 영에 속한 일이 아니라 혼에 속한 일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있던 선교단체는 젊은이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방법이 굉장히 많았다. 나는 그런 방법들이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적이 전도를 하기 위한 것이니까 방법이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알아진 것은 그것이 혼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혼이 작용해서 일어나는 일을 영의 일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영과 혼은 분명히 다른데도 우리 말 성경에는 영과 혼을 영혼으로 번역해 놓았다. 그것은 장로교의 이분설에 의한 것이다. 장로교는 사람이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워치만 니는 육과 영과 혼, 세 가지로 구분해 놓았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살전5:23, 히4:12). 나는 그 책을 보고 내가 해 왔던 일들이 전부 혼에 속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나는 혼에 속한 일을 더 하지 못해서 안달했었던 것이다. 나는 방법이 탁월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은 혼에 속한 일이었다.

내가 방언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안수하는 데도 다녔고 가슴을 문지르는 데도 다녔다. 그래도 나는 방언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순복음교회에 가 보았는데 그때는 최자실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여서 매주 화요일에 하는 성령대망집회에 오면 방언을 못하는 사람도 거기 오면 방언을 받는다기에 갔던 것이다. 가 보니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전혀 흥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영이 막혀서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들도 내 영이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때는 목회가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정말 심각했었다. 요즘 어떤 데서는 할렐루야를 계속 하라고 시킨다고 한다. 할렐루야를 계속 하다 보면 ‘랄랄랄라’ 하면서 방언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방법이 발달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갔던 성령대망집회는 순진한 편이다. 그러나 방법이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나도 모르게 ‘랄랄랄라’ 해야 되는데 할렐루야를 계속 하다 보면 ‘랄랄랄라’ 하게 된다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없어도 되지 않겠는가? 거기 말고도 방언을 가르치는 데가 많다.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라고 했으니까 말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정한성 형제도 그런 목사님 밑에서 훈련을 받다가 온 형제다. 귀신을 쫓아내라고 했으니까 무조건 환자의 눈을 보고 나가라고 명령하면 귀신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점점 방법만 남고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어버리게 된다. 일은 잘된다. 성령이 와서 방언을 하는 것보다 방법으로 하면 대량생산이 된다. 교회가 커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목표를 잃어버리면 헛일이다. 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목표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만 어디가 목표인가? 대부분이 천당을 목표로 예수를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천당에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천당에 가게 하려고 지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당에 보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사람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다. 그 사람이 되려면 생명나무를 먹고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돼야 한다.

방법으로는 안된다. 그런데 아담은 이미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빗나가 버리고 만 것이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목표는 바벨탑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벨탑은 무너졌다. 그래서 천당이 생겼다. 바벨탑이 계속 성공했다면 천당에 가려고 할 필요가 없는데 세상에는 수없는 바벨탑이 생기고 계속 무너지니까 인간에게 마지막 소망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소망으로서 천당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계속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에 기독교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구원파 사건이다. 구원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들은 대답할 말을 알고 그렇게 묻는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선행을 강조했기 때문에 얼마나 믿어야 천당에 갈 수 있는지 확실히 몰랐다. 아무리 봉사를 열심히 해도 사람이 행하는 일이 완벽한 것이 없으니까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다. 그런 시대에 이런 질문이 던져졌던 것이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당신은 지금 죽으면 천당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 앞에서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수십 년 예수를 믿었어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탈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얻고 너무나 기뻐서 6개월 동안 발이 땅에 닿는지 모르고 다녔다고 한다. 지옥불에서 타지 않고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했던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도 묻는다. “당신은 죄를 짓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아니라고 할 사람은 드물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면 차근차근 이런 저런 죄를 짓지 않느냐며 죄인다. 여자라면 혹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남자들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5:28). 이 질문에 걸리지 않을 남자는 하나도 없다. 여기서 다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죄를 지으면 지옥불에 떨어진다며 차근차근 파고 들어온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한다고 하신 말씀을 인용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곳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지옥은 화장터가 아니라 프라이팬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 누구나 “그러면 어찌하면 되느냐?”고 묻는다. 그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며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이다. 뜨거운 기름속에서 튀김이 될 것을 생각하다가 거기서 해방된다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래서 난리가 났고 한국 교회에 대변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이탈해 나갔다. 그 이후로는 교회들이 그것을 가르쳐서 그런 일이 적지만 그 시대에 한 번 수련회를 하면 수천 명이 모일 정도로 폭풍이 대단했다.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같이 공부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장했고 한 사람은 죄사함과 거듭남을 주장했다. 우리 교회에도 거기서 오신 분들이 많은데 구원파나 죄사함 거듭남파나 같은 계열이다. 그런 방법들은 사람을 쉽게 건지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을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서양식 설교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뱃속의 태아는 알코올이 들어올지 다른 무엇이 들어올지 모른다. 알기만 하면 방어라도 할 텐데 모르니까 언제 니코틴이 들어올지 언제 알코올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니 열 달 동안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해산이 되어 자기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나도 구원파식으로 해결하면 쉽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쩐지 그렇게 하는 것이 용납이 안된다. 그것은 방법이고 수작이다.

 

2)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은 누군가? 여기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 것은 출애굽기 7장 11절을 인용한 것이다. 모세가 이적을 행하자 바로도 애굽의 마술사들을 불러서 이적을 행하게 했던 것이다. 마술은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다. 마술사들은 신기한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눈속임이다. 오락으로 보기는 좋지만 타락한 인간의 방법 중에 최악이 마술이다. 그런 방법으로 실제로 사람을 속인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상대방이 무슨 대답을 할지 뻔히 알면서 왜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묻는가? 자기가 구원을 가지고 있으면 안타까운 사람에게 그대로 말해 주면 될 텐데 그것을 더 잘 전해주고 확실하게 먹여 주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먼저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을 먹여 주기 위해서 수작을 부려도 좋은가? 세상에서는 그럴 수 있다.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 달콤한 것을 발라서 먹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세계에는 그런 것은 안된다. 그것은 다 혼의 일이고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일이다. 왜 더 잘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자기들이 커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대되고 싶고 더 잘되고 싶은 것이 오늘날 교회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20년 동안 사람이 불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때 그것을 답답하게 생각했으면 무슨 방법이라도 동원했을 것이다.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나는 그것이 답답했기 때문에 나대로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것이 교회 발전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나를 치셨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뒤에 알고 보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대로 두었으면 다른 사람들이 하듯이 나도 계속 방법을 써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밀려났고 다음 단계로 오게 되었고 거기서도 밀려나서 그 다음 단계로 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영에 속한 사람’을 읽으면서 그것이 혼에 속한 일이었음을 알았다. 그 책을 보고 사람들은 영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를 쓴다. 우리 형제들도 그 책을 보고 하도 질문을 많이 하기에 그렇게 질문이 많으면 차라리 보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 책을 한 번 보았고 한 구절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책을 보면서 안 것은 종교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혼에 속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혼에 속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르면 계속 했을지 몰라도 알았으니까 더 이상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되든지 안되든지 생명을 따랐다. 그것이 나에게는 기쁨이고 평안이었다.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누군가? 애굽의 마술사들은 노골적으로 모세를 대적했지만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은 자들은 진리를 대적하게 마련이다. 목표를 잃었으니까 또 다른 것을 만들어서 생명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생명을 그냥 두지 않는다. 방법은 계속해서 생명을 노략질한다. 사탄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었다. 아담에게서 “예, 정녕 죽을까 하노라 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줄 알고 물은 것이다. 사탄은 처음부터 그랬다. 그러니 아담이 영락없이 걸렸던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고 그때부터 아담은 방법의 길을 찾아 갔던 것이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길은 감추어졌다. 생명나무는 화염검으로 가려졌고 아담에게 남은 것은 방법밖에 없게 되었다. 생명의 선이 끊어졌으니까 자기 방법대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바벨탑이다.

세상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니까 교회도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안된다. 세상이 방법을 찾으니까 교회는 방법이 아니라야 한다. 세상에는 생명이 없으니까 방법을 찾지만 교회는 생명인데 왜 또 다시 방법을 찾겠는가! 생명이니까 생명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왜 또 다시 방법을 찾겠는가! 생명은 생명대로 살아야지 생명에 방법을 대면 댈수록 생명은 죽는다. 방법은 진리를 대적한다. 방법은 무엇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조작하기 위해서 방법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은 그분에게서 얼마나 기대했던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온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텐데 그분은 어떤 방법도 쓰지 않았다. 그분이 못하셨는지 안하셨는지 모르지만 방법이 동원되지 않았다. 오히려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친 제자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하셨다. 그리고 “내가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셨다. 그분은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해서 세상을 평정시킬 수 있지만 그분은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셨고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다. 세상은 왜 망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방법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법으로 시작한 것은 방법으로 망한다.

생명으로 시작하면 생명으로 결실을 맺고 방법으로 시작하면 방법으로 열매를 맺는다. 마지막은 더 큰 방법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적은 방법으로 시작해도 점점 그 방법이 커져서 결국은 고도화되게 된다. 방법을 쓰는지 안쓰는지 모를 정도로 고도화되고 만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방법을 쓰면서도 방법을 쓰는지 모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를 대적했던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이념과 교권을 가지고 예수를 대항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를 수호하려는 표시다. 자기를 수호하려니까 교리를 세우고 제도를 만들고 교권을 세우는 것이다.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교리를 수호하거나 제도를 수호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방법을 쓴다면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예수는 방법이 없는데 왜 방법이 있는가! 예수는 방법을 쓰지 않았는데 왜 방법을 쓰는가! 그래서 나는 “만일 앞으로 내가 없을 때 교회에서 무슨 방법이 필요한 때가 오면 거기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교리나 제도가 있어야 되겠다고 할 때가 오면 근원이 잘못된 줄 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리나 제도와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것을 고쳐서 더 좋은 교리, 더 좋은 방법을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기독교는 확장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계 선교를 했다. 가톨릭은 군대를 앞세우기도 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기독교 세력을 확장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갖다 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갖다 주었던 것이다. 세계지도를 보면 가톨릭이 점령한 지역과 모슬렘이 점령한 지역과 개신교가 있는 지역이 다 다르다. 세상은 꾸며 만든 것, 즉 방법으로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도 방법으로 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인 것이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 이름이 있어도 방법으로 하면 그것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생명만 있어야 한다. 죄사함도 거듭남도 구원도 영생도 방법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신약 안에, 새 언약 안에, 생명의 언약 안에 와 있다. 생명의 언약 안에 와서 생명을 싫어하고 방법을 택하면 생명에서 끊어져야 한다.

방법은 생명보다 훨씬 쉽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 “죄사함을 받았습니까?”라고 한 마디만 물어보면 권희미자 자매님 같은 분 외에는 다 그 자리에서 꼬꾸라진다.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권희미자 자매님은 특이하게도 그런 질문을 받고도 아무 죄도 지은 적이 없다고 하니까 그 전도사가 할 수 없이 그냥 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처음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여기서 천국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런 분은 드물다. 대부분이 그 미끼에 걸려든다. 바로 죄사함을 받고 바로 거듭나니 참 좋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방법을 쓰는 것이 교회 타락의 길이다.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지만 갈수록 점점 목표에서 이탈되고 만다. 방법은 더 쉬운 방법, 더 좋은 방법,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효과주의 때문에,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다  교회는 타락했다.

세상은 효과를 극대화시켜야 한다. 같은 인원, 같은 공장으로 효과를 극대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공장가동률이 얼마냐는 식으로 따지는 것이다. 다른 공장이 100% 70% 가동하는데 50%밖에 가동하지 못하는 공장은 망한다. 효과주의는 세상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벨탑을 쌓지 못한다. 하지만 교회는 그 세계와 다른 세계다. 배를 타면 노를 열심히 저어야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는 노를 저으면 안된다. 그 세계에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다.” 이것은 생명을 말한 것이지 회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커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대량주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

방법을 쓰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효과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효과가 없어도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 생명은 생명대로 있어야 자라고 걷게 되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빨리 성장시키려고 빨리 걷게 만들거나 빨리 자라게 만들면 생명을 버린다. 소도 네모난 상자에 키우면 얼마나 먹기 좋겠는가? 그러면 두부처럼 잘라서 먹기 좋지 않겠는가? 송아지를 처음부터 네모난 상자에 기르면 잘라먹기 좋지 않겠는가? 이것이 방법이다. 더 편리하게 하는 방법, 소고기를 더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요즘은 온갖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어떻게든 수확을 더 얻으려고 온갖 방법을 쓰고 있다. 모든 것이 방법으로 되고 있다. 방법이 뒤떨어지면 실패하기 때문에 방법에서 선두에 서려고 한다. 농사에 있어서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에게 배우고 우리 보다 못한 나라는 우리에게 배운다. 세상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해도 방법이 좋아야 한다. 똑같이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은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세상은 방법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서 잘살고 성공하는 것은 방법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세상과 다른 것, 세상이 아닌 것이 교회다. 세상의 마지막이 바벨론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았는데 또 세상이 되려면 무엇 때문에 교회를 하겠는가? 그러려면 가다 무너질지라도 바벨론으로 가는 것이 빠르다.

진리에 있어서 목표를 잃어버린 것, 진리를 대적하는 것, 이런 것 때문에 디모데전, 후서와 디도서가 쓰여졌다. 그래서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디모데전, 후서와 디도서는 목회서신이다. 교회를 목양함에 있어서 이런 문제들이 나오니까 이 문제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분명하게 경계를 갖지 않으면 언제 방법이 또 나올지 모른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효과 있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금방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에서, 진실에서 벗어난 것을 경계한 것이다. 진실은 생명밖에 없다. 생명에서 벗어난 것을 경계한 것이다.

우리교회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 방법을 써서 “오늘은 누구 누구 몇 명이 나와서 간증하라.”고 한다면 시끄럽지도 않고 좋을 것 같다. 하루에 열 명이나 스무 명쯤 지정해서 간증을 하라고 하면 조용하고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방법은 좋은 방법이지만 생명은 그렇지 않다. 튀어나올 생명도 있고 들어가야 할 생명도 있다. 들어가야 할 생명을 지정하거나 튀어나와야 할 생명을 제외하면 안되니까 방법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스스로 자제해서 뒷사람을 위해서 짧게 간증을 하지만 초창기에는 한 사람이 한 시간을 넘게 간증한 적도 있다. 이해원 형제는 고장난 형광등이 일곱 번 깜빡이면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또 하면서 한 시간이 넘게 간증을 했던 것이다.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만약 그때 잘못한다고 다 끊어버렸으면 오늘 우리 교회는 없다. 그래도 그때는 지금처럼 일찍 가는 사람이 없이 다 듣고 있었다. 한 번은 여덟 시간을 집회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다 듣느라고 아침에 시작한 집회가 오후 5시가 되어 끝났던 것이다. 그때는 젊었으니까 가능했었다. 그것을 제지하고 싶지만 하나를 제지하면 다른 것도 다 제지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계산상으로는 한 사람이 오래 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제지할 수 없었다. 길게 할 사람은 길게 해야 하고 짧게 할 사람은 짧게 해야 한다. 짧게 하는 사람은 짧게 해도 엑기스를 내놓지만 길게 하는 사람은 엑기스를 내놓지 못하니까 듣는 사람이 엑기스를 짜내야 한다. 자기는 못짜니까 듣는 사람이 짜먹어야 한다.

초창기에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보고 젊은 사람들을 저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때 만일 내가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규격이 있게 만들려고 했다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교회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생명을 말하고 생명을 내놓았기 때문에 우리를 보고 생명파라고 했다. 그렇게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 교회가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생명보다 효과를 더 노렸다면 당장은 효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것은 생명이지 효과가 아니다. 효과는 없어도 상관없다.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이 일을 못하시겠는가? 우리가 효과를 못낸다고 천국이 안되겠는가? 효과를 노리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다. 그런즉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의 생명체다. 교회의 생명을 방해하는 것은 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무슨 방법이나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다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다.

 

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

1) 진리를 알면 자유케 됨

진리를 알면 자유케 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하셨다. 진리를 알면 효과주의나 방법에 매이지 않게 된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 된 적이 없는데 왜 자유케 된다고 하느냐고 했다. 그때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라며 독한 말을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것은 그들이 진리를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 하셨다. 아들은 낳아진 것이다. 아들은 방법이 아니다. 낳는 것은 방법이 아니니까 생래적으로 장가를 가면 낳는다. 아기 낳는 것을 물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고기를 보면 신기하다. 물고기는 체외수정을 하니까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암놈 뒤에 수놈들이 따라다닌다. 암놈이 알을 까고 가면 수놈은 그 위에 수정을 하고 간다. 물고기가 어떻게 알고 그렇게 하겠는가! 우리 연못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몰라도 암놈 뒤를 수놈들이 줄줄이 따라다닌다. 누가 가르쳐 주어서 그렇게 하겠는가! 우리가 볼 때는 참으로 놀라운 방법이지만 그 방법은 생명의 방법이지 꾸며 만든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생명 안에는 생명의 방법이 내장되어 있다. 벼룩은 뛰도록 방법이 내장되어 있어서 자기 몸의 수십 수백 배를 뛸 수 있다. 사람은 자기 키의 두 배 이상을 뛰지 못하지만 벼룩은 몇백 배를 뛴다. 그것은 그 생명 안에 그 방법을 내장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생명체라면 교회 안에 생명의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방법을 만드니까 생명 자체의 방법은 없어지고 인위적인 방법만 남게 되었다. 원시적인 사람은 자연적인 감각이 있었는데 문화 때문에 자연적인 감각이 쇠퇴되었다고 한다. 쥐는 배가 출항할 때 그 배가 침몰할 것 같으면 그 배에서 나온다고 한다. 쥐는 자연적인 감각으로 배가 침몰할 것을 안다. 그런 능력을 생명 안에 주신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문화가 커졌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졌다고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 생명의 법을 내장해 놓으셨는데 인위적인 방법을 계속 동원하면 생명의 방법은 쇠퇴하고 만다. 그래서 방법을 더 써야 하고 계속 방법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지가 안되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이 온갖 방법들이 다 동원하고 있다. 새벽기도에 어떻게 4만 명이 모이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작정기도를 시키는 방법을 쓴다는 것이다. 10일 작정기도, 한 달 작정기도, 백일 작정기도를 연속하다 보면 일 년이 지나간다. 그것이 일 년 내내 기도하게 하는 방법이다. 등산을 하고 나면 성취감이 생겨서 더 높은 산에 올라가고 싶듯이 열흘 작정기도를 끝내고 나면 성취감이 생겨서 한 달 작정기도를 하게 되고 백일 작정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충주에 있을 때 학생들이 가자고 해서 치악산에 올라가 보았는데 1280고지에 올라갔다 오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7-800m는 산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높은 산에 도전하는 것이다. 방법은 계속 방법을 요구한다. 성취감에 뿌듯해지기 때문이다. 한 달을 꼬빡 새벽기도에 나가고 나면 굉장한 성취감이 생기고 일 년을 한 번도 안빠지고 새벽기도에 나가고 나면 굉장한 자부심이 생긴다. 그것을 이용해서 방법을 쓰는 것이다. 은혜가 충만해서가 아니라 방법이 충만해서 새벽기도에 수만 명씩 모이는 것이다.

 

2)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 진리가 없으면 진리 안에 서지 못함

진리를 좇으면 빛으로 온다고 하셨다(요3:21). 그러나 진리가 없으면 진리 안에 서지 못한다. 진리의 근원은 생명이다. 우리가 생명을 좇으면 빛으로 오게 된다. 생명을 좇으면 생명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방법을 좇으면 방법으로 열매를 맺어서 그 결국은 바벨론이 된다. 생명이 없으면 생명 안에 설 수 없다. 방법으로는 생명 안에 설 수 없다. 그래서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한다고 하셨다(요8:44).

진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밝히 밝혀졌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이것이 진실이다. 이제는 더 이상의 진실을 찾을 것이 없다. 지금까지의 진실, 성경이 말한 모든 진리의 실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람이다. 십자가에서 이 실재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제는 진리에 대해서 헷갈려서는 안된다. 교리적인 진리도 있고 신학적인 진리도 있지만 이것만 알면 헷갈릴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면 헷갈릴 수밖에 없다. 신학적인 진리는 보수주의 신학을 했을 때와 자유주의 신학을 했을 때 달라진다. 김치현 형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그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보수주의 신학을 한 사람과 중도주의 신학을 한 사람이 일 년 후에 만났는데 완전히 달랐다. 지식이 이렇게 무섭다. 두 학기를 마치고 만났는데 두 사람의 노선이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이 질문을 하는데 이 사람의 질문과 저 사람의 질문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 둘을 보니 심각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면 그렇게 된다.

진리는 진실이고, 진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다. 이것을 모르면 이쪽에서 배우면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저쪽에서 배우면 저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일부러 거짓을 가르치겠는가? 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겠는가? 자기들대로는 다 진실이고 옳은 말이다. 그래서 확신있게 신념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진리는 하나인데 갈라지는가? 왜 진리는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가 안되는가? 그것은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신 그리스도가 없고 그 대신 지식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톨릭 신학을 한 신부와 개신교 신학을 한 목사의 진리가 다르고 이 교파에 다닌 사람과 저 교파에 다른 사람의 진리가 다른 것이다. 진리가 왜 그렇게 많은가? 원칙적으로는 진리는 하나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가 안된다.

진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있다면 어느 이론에도 넘어갈 필요도 없고 현혹될 필요도 없다. 디모데전, 후서는 그런 데 헷갈리지 않게 하려고 쓴 것이다.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려고 쓴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예수의 생명, 이것만이 진실이다. 생명 이외의 것은 진실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 지식이고 교리다. 지식 안에서의 진리는 생명 안에 있는 진리와 다르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성이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믿음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진실성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항목인 진리도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이상의 다른 것을 생각하면 헷갈리게 되고 만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서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하신 말씀을 듣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진리에서 이탈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고 여러 가지 길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경계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진리는 오직 한 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인식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벗어남이 없이 방법을 취하지 않고 오직 생명만을 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 위에서 생명을 지키는 교회, 생명의 노선에 있는 교회, 생명 이외의 것을 취하지 않는 교회로 서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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