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소선지서

연구 2 이스라엘의 화와 경고(암3-6장)

은바리라이프 2009. 3. 9. 16:3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우리 성도들을 택하셨다. 그의 택하심은 온전히 그의 섭리 속에 있다. 그런데 택함받은 자들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그분은 택함받은 우리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여호와를 찾아야 하는지도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과제 중의 하나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스라엘의 화와 경고를 통하여서 이 의미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1. 택함받은 자(암3장)

 

암3:3의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에 나타나는 '두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이에 대하여 첫번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하나님과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위의 두 가지 모두를 말한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을 명확히 앎으로써 본문을 좀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3:3-8에 이르는 질문 형식들을 조건절을 달고 있는데, 이들의 조건절들은 우리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 있는가?

 

1) 이스라엘과 선지자 자신을 말함

먼저 암3:3에 나타나는 두 사람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견해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그의 창조자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을 반역함으로써 징벌이 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는 견해는 아모스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부가의문문으로서 양자 모두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동행해야 하는데 그 뜻이 달라서 동행치 못했지만 아모스는 하나님과 뜻이 같아서 동행했다는 것이다. 뜻이 같은 모습과 뜻이 다른 모습을 동시에 열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조건절이 주는 의미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충격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불신앙적인 무감각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택함받은 자는 택한 자와 뜻을 같이함

하나님께서는 뜻이 다른 자와 동행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일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속으로는 달라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동행하는 모습을 본다. 거짓과 가식이 판을 치는 이 사회를 잘 나타내 주는 단면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확실히 자신의 진실성을 하나님께 보여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신앙을 인정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는 것은 택함받은 자의 의무이다. 자기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더라도 자기의 뜻을 굽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2.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는 자들(암4장)

 

부모가 자식을 때릴 때 자식은 부모에게 반감을 가질 때가 많다. 이는 부모의 심경을 자식이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택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러 가지 심판의 재앙들을 내리셨다. 그들에게 고통을 준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나? 단지 그들의 죄를 심판하는 것에 따를 결과인가? 그렇다면 그 심판 후에 그들은 정결한 의인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죄에 대한 징벌을 받았으니 죄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1) 돌아오기를 원하심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을 내리신 연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오라는 의미에서 재앙을 내리신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재앙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들의 주어진 환경의 현상으로만 파악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고 형식적으로만 돌이키게 되었다(암4:6).

 

2) 사랑의 징계를 알라

종종 우리는 탕자의 회개를 읽는다. 그러나 진정 나 자신이 탕자의 모습과 같이 돌아가야 할 그곳이 있음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가 돌아오도록 어떤 징계를 주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징계를 잘 받는 자는 항상 하나님과 뜻을 같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신호를 받지 못하는 자는 주인을 찾지 못하는 개와 같이 세상의 거리를 방황하며 죄악의 쓰레기통을 뒤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3. 여호와를 찾으라(암5,6장)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이제 그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면 과연 미래의 그들의 살 길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에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미래를 보장하는가? 현재의 어떤 것이 자신들을 보장할 수 있는가?

 

1) 나를 찾으라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분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가나안의 신들에 현혹되어 우상을 섬겼으며(겔23:37), 우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겔16:18; 암 4:4,5). 아모스는 하나님을 찾아야만 그들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살길

형식적인 교회 출석과 형식적인 예배는 여화와를 잃는 것이요,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찾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며 공의를 세우는 자는 자신의 살길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택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이 뜻을 이루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재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어 그 뜻을 이루시고자 하신다. 이것이 '사랑의 징계'이다. 그 사랑의 징계를 받는 자는 속히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한다. 오늘도 여호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이 있다면 지금 바로 여호와께 나아와 무릎을 꿇어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해설>

1.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

암3:4에서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풍에서 부르짖겠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자는 먹이를 잡을 떼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데, 배가 비교적 고프지 않을 때는 수풍에서 숨어 있어 기다렸다가 적당한 때에 공격하여 먹이를 잡는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 배가 무척 고플 때는 멀리서라도 먹이가 보이면 크게 부르짖는다. 사자의 우렁찬 목소리에 짐승들은 무서워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다가 사자에게 잡혀 먹히게 되는 것이다.

본몬에서 자자의 부르짖음은 후자의 경우를 말한다. 즉 먹이를 잡은 후에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먹이를 보고 크게 포효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그 선포가 너무도 우렁차고 급해서 선지자 아모스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북이스라엘의 세 성소

1)벧엘

암3:14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면서 벧엘의 단들을 기록한 이유는 벧엘이 아모스 시대에 종교적인 중심지였기 대문이다(암4:4,5). 벧엘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선조인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갈 때에 꿈에 사닥다리를 본 곳으로 돌기둥을 세운 곳이다(창28:18,19). 또한 후일에 세겜 땅을 떠날 때에 이곳을 다시 찾아 벧엘이라 다시 명명한 곳이다(창35:6,7).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 떼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특별히 벧엘을 찾기도 하였다(삼상10:3). 또한 지리적으로는 북쪽으로 세겜과 사마리아에 이르는 큰 도로가 있어 북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는데 편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 1세는 정책적으로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대항하기 위하여 이곳에 재단을 쌓았다(왕상12:27-33). 이 벧엘의 단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고, 인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잡고자 하는 여로보암 왕의 계략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는 온상지가 되었다. 또한 선지자 아모스는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말라"(암5:4,5)는 선포 속에서 하나님은 장소적인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된 하나님께로의 제사를 원하심을 말하고 잇다. 이러한 벧엘의 단이 마지막으로 무너진 때는 남유다의 요시야 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왕하23:15).

2)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제각기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한 인물은 아브라함으로서 이때에 처음으로 브엘세바라는 이름이 주어졌다(창21:22,23). 또한 이삭 역시 브엘세바에 가서 방중에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26:24)고 이삭을 축복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야곱이 오랫동안 잃었던 아들 요셉의 초청을 받고 브엘세바에 도착했을 때에 하나님이 밤중에 다시 나타나셨다(창46:1-4). 이처럼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을 마나는 약속의 장소였다.

그러나 브엘세바 역시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찬 장소였지 하나님의 성소로 택함받는 곳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몸은 오직 하나이며, 임재의 상징으로 정하신 곳은 예루살렘의 성전이므로 다른 곳은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브엘세바 역시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3) 길갈

이 장소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입성할 때에 요단 강을 건너 처음으로 도착한 땅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첫 야영지였으며(수4:19),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간 기념으로 12개의 기념석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수4:20). 또한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백성으로 할례를 행한 곳이며(수5:2-12), 가나안 땅의 소산을 처음으로 먹음으로써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만나가 그친 곳이다(수5:12). 또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이곳에서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하였고(삼상11:14,15),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의 집에 충성을 다짐했기에 더욱이 매력적인 장소인 것이다.

이처럼 벧엘과 브엘세바처럼 길갈 역시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축복한 곳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성소로 지정한 곳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인위적인 장소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축복을 주시기를 거부하셨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예배 행위보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의 정성을 기대하셨다. 그래서 결국은 이곳도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추방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