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기다리는사람들

2007년 성탄 1 강 직무에 충성한 사가랴

은바리라이프 2008. 8. 28. 07:30

2007년 성탄 1 강
                                  직무에 충성한 사가랴
말씀: 누가복음 1:5-25
요절: 누가복음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누가복음 1:3절에 보면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구속역사를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요한의 탄생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눅7:28).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그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니라(요1:27)”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그는 또 불의한 헤롯정권에 대해서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과감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용감한 주의 사자였습니다(눅3:19). 그러나 이런 세례요한이 있게 된 데에는 그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사는 의인이었습니다. 6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5절을 보면 당시는 헤롯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불의하고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로마황제들에게 아부해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시로 뇌물을 바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무려 35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권에 조금이라도 장애가 된다 싶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죽였습니다. 자신의 처남, 삼촌,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 장모까지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에 동방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마2:2)”하고 묻자 두 살 아래의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는 무서운 살인마였습니다. 그러니 당시에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는 로마제국의 비호아래 대제사장도 임의로 임명하고 자기 맘대로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사가랴도 제사장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헤롯의 눈치를 살펴야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상관인 대제사장도 철저히 헤롯파였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쪽으로 줄을 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가랴는 헤롯왕 앞에 살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대제사장 앞에 살지 않았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 살았다는 의미가 무슨 뜻일까요? 사가랴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사람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금 엄연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악이 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불의에 의해 짓밟히고 있습니다. 악하고 잔인한 헤롯왕이 무려 35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종교지도자들도 대부분 어용화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사가랴의 마음 가운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과연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가?” “나도 가야바와 안나스처럼 로비를 해야 하지 않는가?” “이 거대한 불의의 세력 앞에 나 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몸부림쳐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사가랴는 이 모든 회의와 인간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묵묵히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헤롯이 아무리 위세를 떨치고 있어도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사가랴만 그렇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6절을 다시 보면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사가랴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 사모님도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자 몸부림을 쳐도 사모님이 뒤에서 잡아당기면 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어찌하든지 새벽기도 가자고 깨워도 “이 추운 겨울에 무슨 놈에 새벽기도냐” “하나님이 꼭 성전에 가서 기도해야 들으시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이불 속에서 기도해도 다 들으신다” “당신은 왜 돈을 많이 못 벌어 오느냐?” “당신은 왜 그렇게 능력이 없냐?”하고 바가지를 긁으면 사가랴도 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롯의 처나 욥의 처를 보면 참 영적이지 못했습니다. 아합의 처인 이세벨 여사,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도 그렇죠? 솔로몬도 아내가 3000명이나 되었지만 진정한 동역자가 없었습니다. 아내들이 영적이지 못할 때에 남편들이 영적으로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 사모님은 영적인 동역을 잘했습니다. 남편 사가랴가 성전에서 인정을 받든 못 받든, 승진을 하든 못 하든, 돈을 많이 벌어 오든 적게 벌어오든 게의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남편을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남편 최고!” 우리 연희 사모님이 그런답니다. “우리 대환 목자님 최고” 우리 사모님들 한번 해 볼까요? 목자님들 이름을 넣어 한번 해 보겠습니다. “우리 00 목자님 최고”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처럼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잡아준 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6b절을 보십시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푯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잡아주는 다림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시편 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차갑고 어둡게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신문을 보면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펴면 희망의 서광이 비쳐 왔습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에 신 사무엘, 신 룻 선교사님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뉴욕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요, 온갖 물질주의, 육신주의 문화가 넘실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뉴욕의 한복판에서 신 사무엘, 신 룻 선교사님은 꿋꿋이 말씀의 등불을 켜고 계셨습니다. 제가 퀸스 센타와 콜롬비아 센타에서 두 번 주일메시지를 전하고 너무 피곤하여 사무엘 선교사님 댁에서 잠깐 낮잠을 잤습니다. 다른 동역자들은 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올라가는데 저는 피곤해서 못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한 두 시간쯤 자다가 일어나 보니 두 분이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 돋보기를 끼고 성경을 읽고 계셨습니다. 밖에서는 전철 지나가는 시끄러운 소리,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때문에 소란스러웠습니다. 저는 그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이 깼는데 두 분은 전혀 게의치 않고 말씀 속에 파묻혀 계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콜롬비아 센타 역사의 비결이 바로 저기에 있었구나” 어떻게 그 교만한 컬럼비아 대학생들이 이 노부부에 의해서 제자들로 자라나고 있을까? 참 궁금했는데 그 비결이 바로 두 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진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밀레의 그림 ‘만종’이 생각났습니다. 자 보십시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녁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 얼마나 경건하게 보입니까? 밀레가 이 작품을 그릴 당시 그는 물감 살 돈조차 없이 가난했다고 합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 아르투르 스테반스씨가 밀레가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을 인수한다는 조건으로 1000프랑을 빌려 주어서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렸답니다. 밀레는 후에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에 교회에서 저녁 종 울리면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일손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다네” 결국 할머니의 경건한 기도생활이 밀레에게 영향을 미쳤고 ‘만종’이라는 위대한 작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19세기 중반 유럽에는 극심한 기근과 전염병이 닥쳐서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 대다수도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신대륙인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저 그림에 바구니 속에 담긴 것이 씨감자가 아니고 죽은 아이의 시체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아이의 시체인데 죽은 아이를 직접 그리기는 뭐해서 씨감자로 그렸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그만큼 농민들이 가난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서 많은 사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농부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부의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와 같은 영성을 느끼게 됩니다. 나라는 어렵고 아이도 없고 인간적으로 어떤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이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내 사정이 어려워도 사가랴 엘리사벳처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여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처럼 들어 쓰실 것입니다.

둘째로,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습니다. 7절을 볼까요? 7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 처럼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들을 크게 축복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떡 뚜꺼비 같은 아들을 낳게 하셔서 장래 희망찬 제사장 후보로 키워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가정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두 사람이 나이가 많아서 이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소망조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삐딱해집니다. 내가 그동안 적당히 산 것도 아니고 불의한 헤롯정권에 타협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며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정을 이렇게 홀대하시는가? 점점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Sorry한 마음을 품고 자신에게 주어진 제사장의 직무에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공부도 빠지지 않고, 소감도 잘 쓰고, 헌금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진심을 드리면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때로는 꼭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예 축복을 안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는데 양들이 잘 서지 않습니다. 주님께 충성을 다 하는데 물질적으로 쪼들리고, 건강이 나빠집니다. 요회역사도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욕이 사라집니다. 열정이 식습니다.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거기다가 목자님마저도 위로해주기는 커녕 푸쉬하면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사가랴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습니다. 사가랴는 시대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자식이 있건 없건 흔들리지 않고 제사장 직무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내가 컨디션이 좋다고 열심히 감당하고 컨디션이 나쁘다고 소홀히 하고 그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요, 영광스러운 의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놓을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시면 하고, 복 주시지 않으면 그만 두고 하는 계약직이 아닙니다. 사가랴는 모든 조건,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다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습니다. 이 사가랴는 정말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입니까? 그는 참으로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할 때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습성은 뭔가 내게 유익이 있어야 마음을 드리고 진심을 드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 당장 유익이 없을지라도 사람들이 안 알아줄지라도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당장에 복을 주시지 않을지라도 묵묵히 직분을 감당합니다. 이런 사람은 파트 메시지 한번 맡아도 대강 전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메시지 한편을 준비해도 밤새워 준비합니다. 한 팀의 1:1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노트는 준비합니다. 오늘 이 한 말씀이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경외심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그들에게는 주께서 주신 직무 자체가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나같이 비천한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주의 역사에 써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의 전에 문지기로 살지라도 감사합니다(시84:10). 이런 사람들은 무익한 종의 자세가 있습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눅17:10).” 사가랴는 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어떤 사심도 품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게 맡겨진 직무에 충성을 다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에게도 이런 자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6:13,14)”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짓는 직무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20년 동안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조그만 고깃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하늘에서 예산을 뿌려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 자기돈 들여서 해야 합니다. 일군들도 붙여 주시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들 데리고 일해야 합니다. 자기 밥 벌어 먹기 위해서 평소에는 직장생활하고 시간 나는대로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육체가 되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 짓고 인생을 엔조이하며 살아갑니다(눅 17:27,28). 그런데 노아는 밤낮없이 톱질하고 못질하고 대패질하고 그러다가 망치로 손을 쳐서 피를 흘리기도 하고 여기저기 톱자국 못자국이 생깁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불평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방주 짓는 직무를 감당하였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창세기 6:9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6: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주께서 주신 직무에 충성을 다한 노아를 축복하사 홍수심판 가운데서도 구원하시고 새 창조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주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 느헤미야 9:8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주 앞에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민수기 12:7절에 “내 종 모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3:6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을 다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였습니다(딤후2:2). 시편 101:6절에 “하나님의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많은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힘센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이 충성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저희들도 눈 앞에 유익이 있든 없든 당장에 축복이 있던 없든 묵묵히 주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지금 당장 열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인정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때가 되면 반드시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계시록 2: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린 충성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세례요한도 아버지를 닮아서 자신의 직무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직무가 무엇이었습니까?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그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세례요한의 직무는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는 예비자의 사명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자신은 소리와 같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빛나고 광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 직무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나는 왜 소리로 살다 사라져야 하는가? 나는 왜 메시야의 길만 닦아야 하는가? 나는 왜 내 제자들을 다 예수님께로 보내야 하는가? 나는 왜 젊은 나이에 옥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하며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보십시오. 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찾아왔을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왜 쟤는 메시야를 잉태하고 나는 메시야의 선구자를 잉태해야 합니까?” “하나님 불공평해요. 바꿔주세요”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오직 자신의 직무에 감사하고 충성했습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부모의 충성심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이로서 사가랴와 엘리사벳, 세례요한의 가정은 메시야의 선구자의 가정으로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주신 직무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선교하는 직무를,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 전하는 직무를,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역사를 섬기는 직무를, 어떤 사람에게는 행정적인 직무를, 어떤 사람에게는 예술적인 직무를, 어떤 사람에게는 어린이들을 섬기는 직무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중보기도하는 직무를 주셨습니다. 주께서 주신 직무는  서로 서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서 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직무를 다 할때, 그 직무가 어떤 것이든 구분하지 않고 다 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셋째로,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함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가 얼마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개인과 가정을 당신의 구속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그들의 기도는 인간적으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기도를 쉬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이가 젊었을 때나 나이가 늙었을 때나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아들만 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사가랴의 찬송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인류 구속역사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쉬지 않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자기와 가정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스케일 있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하나님은 지난 수 십년 동안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도에 귀를 막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그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셨습니다. 다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단지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귀한 자식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셨을 뿐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이 메시야의 선구자를 낳고 키울만한 영적인 가정이 되도록 연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 가정이 낳고 키울 요한은 어떤 자가 됩니까?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 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보통아들이 아닙니다. 겨우 명문대 나와서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노부모 잘 봉양하는 그런 정도의 아들이 아닙니다. 죄악된 시대를 각성시키고 어그러진 그 시대의 심령들을 주께로 돌이키는 큰 사명을 감당할 사람입니다. 그런 세례요한을 키울려면 엘리사벳의 태가 얼마나 성령충만해야 하겠습니까? 그 가정이 얼마나 말씀충만 기도충만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메시야의 선구자를 보낼려고 하시는데 그 가정이 아무 부족함이 없이 맨날 TV 연속극이나 보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맨날 부부싸움이나 하고 누구 흉보고 인간적인 소리나 하는 그런 가정이라면 그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영적으로 자라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을 오랫동안 군급하게 하시고 눈물로 기도하게 하셔서 그 가정이 겸손하고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그릇이 되도록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이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러므로 빨리 기도 응답해 주시는 것만이 꼭 축복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태어납니까? 그중에 절반이 아들입니다. 무조건 자식 많이 낳고 아들 낳는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세례요한과 같이 준비된 인물을 낳고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준비된 인물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내면을 연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기도훈련을 시키십니다. 다른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도 영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 충만하니까 나중에 세례요한도 성령충만한 가운데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잖습니까? 15절에 엘리사벳의 모태가 성령충만했다고 했습니다. 67절에 사가랴가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언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충만한 부모에게서 성령충만한 아들이 나옵니다. 성령충만한 교회에서 성령충만한 주의 사자들이 나옵니다. 성령충만한 목자 밑에서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세워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열심히 기도하므로 성령충만함을 덧입어서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거목들을 키워 낼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시대가 악하고 타락한 가운데서도 말없이 주의 주신 직무에 충성을 다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시대를 탓하지 말고, 현실을 핑계대지 말고 하나님앞에서 말씀대로 살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